천인공노할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힐 때마다 사람들이 한마디씩 보탠다. “서울 광화문 네거리에 거꾸로 매달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씩 돌을 던져 맞아 죽게 해야 한다” “범인이 죽을 때까지 전 국민이 바늘로 한 번씩 찔러야 한다” 등등. 자신의 상상력이 허락하는 온갖 고문과 형벌의 방식을 입에 담는 것으로 분풀이하려 든다. 그런다고 분이 풀릴 리 없다. 더구나 아무리 분해봐야, 피해자 가족보다 더 분하고 원통한 사람은 없을 터이다.

범인을 사형하고 나면 유가족의 분하고 원통한 마음이 사그라들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사형제 폐지론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한 바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 때문에 사형, 그 이상의 복수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다. 영화라는 매체는 그중 후자의 욕망을 더 자주 스크린에 옮긴다. 더 잔혹하게, 더 단호하게 응징하는 폭력의 히어로. 당한 대로 갚아주고 잃은 만큼 빼앗는 복수의 화신! 이런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를, 나는 ‘함무라비 시네마’라고 이름 붙인다.

   
2시간20분 동안 잔인한 장면을 참고 본 관객에게 복수의 쾌감을 안겨주지 않는 영화 <악마를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가 그런 영화다. 주인공 수현(이병헌)은 사랑하는 약혼녀를 연쇄살인범 장경철(최민식)에게 잃었다. 그냥 죽였어도 용서할 수 없는데, 사체를 토막 내 하천가에 버렸다. 이런 놈을 빨리 잡지 못하는 경찰도 답답하지만, 설령 잡는다 해도 제대로 복수할 수 없는 법과 제도 때문에 더 속 터진다.

‘사적 복수 영화’는 전 세계적 현상?


다행히 국가정보원 소속 요원의 지위와 재능을 십분 활용해 신속하게 범인을 찾아낸다. 이 악마 같은 놈을 어떻게 벌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오랜 시간 최대한 많은 고통을 안겨줄 수 있을까. 광화문 네거리에 거꾸로 매다는 것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응징을 궁리하고 또 실천하는 사이, 수현은 어느새 악마를 닮아간다. 당하기만 하던 악마도 반격을 준비한다.

<악마를 보았다>가 전에 없던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영화는 아니다. 사실 영화에서 ‘복수’란 텔레비전 드라마의 ‘배다른 형제’만큼이나 흔해빠진 소재인즉. 대신 이 영화는 한국 영화치고는(!) 전에 없던 잔혹한 묘사로 진작 논란의 중심에 섰다. 시체를 토막 내고 아킬레스건을 끊어내는 광경을 대놓고 보여주는 게 꼭 필요한 묘사였는지, 그렇다고 영상물등급위원회가 제한상영관도 없는 나라에서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리는 게 합당했는지, 그건 이 지면이 감당할 수 있는 부피의 질문이 아니다. 나 혼자 짊어질 수 있는 질량의 논쟁거리가 아니기도 하다.

그래서 다만 이렇게 질문하기로 한다. 왜 지금 한국 영화에 악마가 넘쳐나는가. 왜 사람들은 그토록 복수에 목말라 있는가. 그런데 왜 이 영화는 복수가 완성되는 순간, 기대했던 만큼 짜릿한 쾌감이 척수를 관통하지 않는가.

개인의 사적인 복수행위를 법으로 금지한 시대, 과연 ‘복수는 나의 것’이 될 수 있는가. 박찬욱 감독이 진작 그 난감한 질문을 던지며,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로 이어지는 이른바 ‘복수 3부작’을 만들었다. 복수의 쾌감으로 뚜렷한 느낌표를 남기는 대신 속죄와 구원에 대한 질문으로 거대한 물음표를 남긴 박찬욱 영화와 달리, 나홍진의 <추격자>(2008)는 좀 더 우직한 응징의 서사로 관객을 흥분시켰다. 한국 영화에서는 대략 그 무렵부터 부쩍 악마와 대면하는 일이 잦았던 걸로 기억한다.

공교롭게도 할리우드 역시 비슷한 시기부터 논쟁적인 복수극이 연이어 등장했다. <브레이브 원>(2007)에서 약혼자를 잃은 조디 포스터는 직접 총을 들고 범인들을 처단했다. <데스 센텐스>(2007)와 <모범 시민>(2009)에서는 법치주의의 커다란 구멍을 아버지 혼자 메웠고, <테이큰>(2008)과 <왼편 마지막 집>(2009)은 딸이 당한 폭력을 곱절로 갚아주었다.

   
<아저씨>(위)는 ‘단독 해결사’의 쾌감에 액션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영리하게 덧붙여 관객몰이를 한다.
날로 악랄해지는 범죄를 단죄하기에 현실의 법체계는 지나치게 망설이고 과도하게 인내한다는 의심. 법이 미처 보호하지 못하는, 아니 처음부터 보호해줄 생각이 없는 약자의 원한을 누군가는 대신 갚아주길 바라는 희망. 악마는 수의를 입어야지 죄수복을 입어서는 안 되며, 하물며 프라다를 입으며 잘 먹고 잘살아서는 더더욱 안 된다는 믿음. 악인이라면 마땅히 지옥행 열차를 타야 하고, 살인범은 당연히 인간 사표를 쓰는 게 진정한 정의이고 법치라는 신념.

그것이 역설적으로 문명사회 스크린에서 더 자주 야만의 얼굴을 보게 만들고, 그 많은 세계 각국 아저씨들이 앞 다투어 ‘모범 시민’의 공허한 훈장을 떼어버리는 이유일 터. 그래서 “약혼녀가 당한 것 이상으로 복수하겠다”라는 수현은, 법제도의 자제력에 갑갑함을 느끼며 해소되지 않는 복수심을 가슴에 묻고 살아가는 모든 현대인의 아바타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몇 년 동안 유난히 많은 한국 영화에서 악마를 보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추격자> 이후 비슷한 장르의 영화가 짧은 시기에 너무 많이 쏟아져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돈이 안 되는 장르’라던 범죄 스릴러 한 편이 크게 성공한 후, 제작자들의 투자 원칙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다. 한때 ‘충무로에서 제작 준비하는 작품의 70%가 스릴러다’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고, 실제로 ‘제2의 <추격자>’가 되려는 영화가 속속 완성됐다.

영웅을 보여줘 성공한 <아저씨>


올해 개봉작만 헤아려봐도 <용서는 없다> <무법자> <파괴된 사나이> <아저씨> 그리고 <악마를 보았다>가 대략 ‘포스트 <추격자>’의 대권을 노리는 작품. 하지만 <아저씨>에 <용서는 없다>의 제목을 붙인다 한들, <악마를 보았다>에 <파괴된 사나이>의 제목을 붙인다 한들 별로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스토리는 닮았다. 그래서 스타일의 차이와 표현 방식이 더 중요하다.

<아저씨>는 <추격자>가 보여준 ‘도꼬다이(단독) 해결사’의 쾌감에 액션 영화의 장르적 쾌감을 영리하게 덧붙인 결과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악마를 보았다>는? 잔혹한 묘사를 두려워하지 않는 ‘고어 스릴러’의 표현을 강점으로 내세운다. 문제는 ‘고어 스릴러’가 그리 대중적인 장르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냥 손모가지를 꺾는’ 액션 장르보다야 ‘아예 손모가지를 잘라버리는’ 고어 장르가 더 거북할 수밖에 없다.

<악마를 보았다>는 소문대로 잔인했다. 가장 잔인한 순간은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다. 그렇게 잔인한 장면을 2시간20분이나 참고 견뎠는데도 관객에게 속시원한 복수의 쾌감을 안겨주지 않고 끝내기 때문에 참 잔인한 영화다. 김지운 감독은 “전리품이 없는 싸움에 뛰어든 한 남자의 허망한 파국을 그리고 싶었다”라고 말하지만, 아무래도 많은 관객들은 ‘허망한 파국’보다야 ‘응징의 카타르시스’를 기대하며 극장을 찾기 마련이다. 법이 내 편이 아니라고 느끼게 만드는 나라, 법은 예로부터 스폰서의 편이라고 믿게 되는 나라, 동물처럼 울부짖는 유가족들 앞에 진짜 동물처럼 범죄를 저지른 악마를 속히 잡아오지 못하는 나라, 그런 나라에 사는 관객이 영화 한 편에 그 정도 대리만족을 기대하는 게 무리한 요구는 아닐 것이다.

<아저씨> 인터넷 평점 9.37과 <악마를 보았다> 인터넷 평점 6.85. 두 영화가 받아든 성적표는, 어느 영화가 더 잘 만든 영화인지 말해주는 지표라기보다, 지금 한국 관객이 어떤 영화를 더 보고 싶어하는지 설명하는 숫자다. 복수는 통쾌해야 하고 악당은 패배해야 한다. 꼴도 보기 싫은 동시대의 어떤 인간들을 실제로 광화문 네거리에 거꾸로 매달 수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