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가 교환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가치가 서로 교환된다는 말이다. 이 등가 교환에 관한 얘기가 자본론 맨 앞에 등장하는 말인데, 이 얘기의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까지 올라간다. 맑스를 포함해서 경제학 내에서 보는 등가라는 개념이, 경제학적 의미에서 '정의'의 기본 개념이다.
just exchange, 즉 뭔가 교환하고 나서, 아니 나 손해봤어, 이렇게 누군가가 다시 물러달라고 하지 않는 것, 그게 정당한 교환이다. 만약 누군가 손해봤다고 생각하면 다시 물러달라고 할테니까, 그 때에는 부당한 교환이 발생한 것이다.
맑스가 착취에 대해서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다른 모든 상품은 등가로 교환되는데, 노동만은 부등가로 교환되기 때문이다. 즉 노동의 가치보다 월급가치가 더 적다, 그리고 그 차이만큼이 착취이다, 이런 얘기다. 이런 1:1 교환 말고도, 1세계와 3세계 사이에 시스템적으로 부당가 교환이 일어난다는 것은 아민 등의 주변부 자본주의론 이론이었다. 페리페리에 있는 나라들은 공산품과 농산품 사이의 부등가 교환 때문에 점점 더 페리페리로 몰린다는 중남미 경제이론.
노동이 등가인지 아닌지, 이게 자본론 3권을 둘러싸고 오랫동안 진행된 오래된 논쟁이고, 3권의 가치론은 수학적으로 증명되지 못했다. 그 해법을 찾아내려고 했던 게 전형 논쟁이고, 지금 교수노조 위원장인 강남훈 선생의 전공이 이 분야였다. 작고하신 정운영 선생이 평생을 걸고 풀어보려고 했던 문제도 이 문제였다. 가치가 가격으로 전형되는 과정에서 노동의 부등가 교환 문제를 찾아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결국 이 문제에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노동의 부등가 교환 문제는 경제학 내에서 미궁으로 들어갔다. 이제는 이런 문제에 관심 갖는 경제학자는 거의 없고, 아마 이 문제를 푼다고 하면 박사 논문 주제심사에서 탈락할 것이다. 안 풀린다는 게 보편적 상식이 되었다.
물론 현실에서는 등가이든 부등가이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처럼 교환 후에 물러달라고 하지 않아도 부당한 거래인 경우는 많다.
한국에서 대기업과 하청업체의 거래는, 속으로는 부당하다고 생각해도 물러달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거래는 한 번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포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야말로 '관계'라는 것이 매번 등가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거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고 할 때 '위계(hierarchy)'라는 개념을 들여오기도 한다. 신제도학파가 노벨상 받을 때, 세계적으로 히트친 개념이다. 세상에는 위아래가 있을 수 있고, 높은 놈, 낮은 놈이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위계가 존재하는 것을 조직, 위계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시장, 이렇게 두 개로 나누면 신제도학파가 된다. 구제도학파는, 시장이든 뭐든, 하여간 세상은 단순하게 거래로만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들.
80년대 이후에 공부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신제도학파의 영향이 크게 남아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장하준이고, 지금 민주당 정책연구원 원장하는 박순성도 역시 유사한 흐름의 학자이다.
조금 넓게 보면 경제적인 것, 경제적이지 않은 것, 이렇게 볼 수도 있는데, 이걸 좁히면 거래인 것, 거래가 아닌 것, 이렇게 볼 수도 있다. 개리 베커 이후로는 거래와 거래아닌 것을 사실 구분하기는 좀 어려워졌다. 더 좁히면, 등가교환과 등가교환이 아닌 것, 이렇게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80년대 이후 경제학의 발전은 주로 이렇게 등가교환이 아닌 것들의 세계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주도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노동시장에서 발생하는 내부시장 문제, 아켈로프의 레몬 시장 등을 설명한 정보경제학 혹은 환경적 요소의 내부화까지, 시장의 실패 혹은 교묘한 시장 등에서 발생하는 현상을 설명하는 게 한 축을 이루고 있다. 혁신, 지식, 최근의 창의성까지, 이렇게 전통적인 왈라스 모델과는 다른 얘기들에 주로 노벨경제학상이 나가고 있다.
당연한 것이, 신고전학파를 형성하는 기본 골격에는 어지간한 건 다 노벨상이 나갔고, 여기에서는 새로운 이론들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자, 이렇게 모든 것을 거래로 생각하고, 그것도 등가의 거래라고 생각한다면.
여기에서는 선행이나 미덕과 같은 얘기를 세울 공간이 별로 없다.
개인주의를 아주 좁히면, 정말 물리적인 자신에 관한 얘기, 즉 극단적인 에고만 남는다.
미국 특유의 가족주의가 있어서 그런지, 미국으로 넘어간 다음의 '자기'는 보통 house-hold라고 부르는 가정이 한 주체가 된다.
나와 아내, 그리고 내 자식들, 이걸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게 미국식 경제학의 한 특징 같아 보이기도 한다.
경주 최부자 얘기의 요체가, 사방 십리 내에 밥 굶는 사람이 없게하라, 그런 거로 알고 있다.
물론 그건 최부자가 워낙 부자라서 그런 거지만.
자기 골목에, 같은 층에, 밥 굶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이런 경구가 지금 시대에도 어울리는 것인지, 그런 질문이 가끔 떠오른다.
최고은 작가의 쪽지를 보면서 내가 떠올린 생각은, 과연 그렇게 굶고 있는 사람이 우리 집 앞에 그런 쪽지를 붙일 수 있는 삶을 내가 살고 있는가, 그런 거였다.
밥 남은 거와 김치 조금.
한국의 중산층이 정말로 부패한 집단이라는 생각을 요즘 조금씩 해보는 중이다.
어쨌든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면, 굶고 있는 누군가에게 밥 남은 거와 김치 조금을 나누어주지 못할리는 없다. 그걸로 크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조금씩 서로를 돌보고, 주변을 돌보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지옥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 문제가 아닌가?
아무리 잘 사는 사회라도, 어려운 사람, 굶는 사람은 생기게 마련이다.
그런 걸 조금씩 도우면서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말, 그런 생각을 너무 오랫동안 안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시장이라는 장치를 완벽하다고 설정해 놓고,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면 알아서 균형이 된다는 시장 이데올로기 혹은 경제 근본주의에 너무 우리가 깊게 빠져있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시장만으로 움직이는 그런 자본주의는 존재한 적도 없고, 등가의 교환만으로 세상은 움직인 적이 없다.
등가가 아닌 것, 그게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전형적 속성이다. 거래하라!
사랑은 거래되지 않는다. 거래로 시작한 사랑, 그게 영원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돌보면서 느껴지는 마음의 변화, 그건 등가의 가치가 아니다. 그렇지만 세상에 실체로 존재한다. 동물들도 주변 동료들을 도우면서 살아간다.
지난 겨우내, 마당에 있는 고양이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서 사료를 주었었다, 물 조금과.
한 마리가 와서 다 먹을 것 같지만, 길고양이들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자신도 배고플테지만, 조금 먹고 다른 고양이들을 위해서 남겨놓는다.
포유류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나눔과 돌봄, 이런 기본적인 가치들,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악마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한국의 중산층, 바로 그런 것 아니었을까?
경제학은 아직 부등가 교환, 거래 아닌 행위, 돌봄의 미학,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에는 덜 발전되어 있다. 19세기에서 20세기, 자본주의 형성에서 세계 금융화까지는 어느 정도 설명을 했지만, 21세기에 적합한 변화를 설명할 이론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것 같다.
애완동물이든 반려동물이든, 교감이 주는 행복감이 있다.
영화 <오스틴 파워>의 닥터 이블도 늘 고양이와 함께 있다.
동물과도 그런데, 심지어 사람에게는?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악마의 모습으로 우리를 길들이고, 우리들의 2세들에게 그렇게 악마 교육을 시키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어떤 종교도, 어떤 과학도, 어떤 이론도, 기본은 동료를 사랑하고, 주변에게 무엇인가를 베풀라고 되어 있다. 인간이 만든 교리와 가치 중에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가 만든 중고등학교를 위한 전경련이나 재경부 등에서 만든 경제학 교재, 심지어는 초등학교용 경제학 교재에까지,
모두 남을 죽이고 살아남아라, 이렇게 가르친다.
이건 경제학도 아니고, 교리도 아니고, 교훈도 아니고, 그냥 악마 교육이 아닌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이런 걸 배워야 하고, 같이 행복해지는 삶에 대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한국은, 타워 팰리스를 지어올리는 순간, 사회적으로나, 생태적으로나, 그리고 미학적으로도 망했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과 같이 살지 않겠다고 하는 순간, 중산층들이 자신들만의 정원을 가지겠다고 하는 순간, 그건 사회적으로도 지속가능하지 않고, 생태적으로도 지속가능하지 않다.
최씨 부자는, 부자라서 사방 10리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돌봤다.
그러나 자기 주변에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경구는, 인간이라면 응당 적용되는 가치일 것 같다.
자기 주변에 굶는 사람이 있어도 행복한 사람, 그건 사람 아니다.
그런데 요즘 좀 산다는 한국의 40대, 50대들의 생각은?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저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사회에 가득한 걸 보면서,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비로소 체감하는.
이게 사람 사는 사회냐, 악마들의 사회지!
한국의 모든 것을 쥔 사람들이 지지한 명박 정권은, 정신적으로 실패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을 사람 취급 안 하는 사람들로 모인 집단이고, 예로부터 그런 지배층이 사회를 장악했을 때, 국고가 비고, 백성들은 굶주리고, 외적이 처들어왔다.
정말로 우리의 국고가 비게 되었고, 워킹 푸어, 하우스 푸어가 가득 차고, 북한이 포를 쏘게 되었다.
정신이 실패하면, 물질도 실패하게 되는 것, 그래서 명박 정권은 실패한 것이다.
자기 주변에 굶는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마음이 편하지 않은 것, 그게 인간이 가진 본래의 미덕이다.
신도들은 가난한데, 교회는 부자인 곳, 그곳에 성령이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다.
시청자들은 정신적으로 빈곤한데, 방송사 사장 등 간부만 부자인 공영방송, 그래서는 그걸 방송국이라고 부를 수도 없다.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사람, 그런 사람들의 우리들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우리들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강한 나라는, 자기 주변에 굶는 사람이 없도록 서로 서로 돌보는 나라...
나는 그 모습을 21세기 스위스에서 처음 보았다.
우리도 언젠가는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골목, 아파트 같은 층, 최소한 그 안에서는 굶는 사람들이 없도록 서로를 돌볼 수 있는 나라.
내가 한국의 40대에게 아직도 기대하는 건, 그들이 그렇게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이 아직은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2010년대, 우리가 만들어야 하는 나라는, 아무도 굶지 않고, 아무도 정서적으로 빈곤하지 않고, 아무도 문화적으로 소외되지 않는 나라, 그런 나라가 아닌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의 뉴딜, 그게 뉴딜의 원래 이름이다. 우린 그걸 토건 제일주의 정도로 해석하고 있는, 뻔뻔하고도 무식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다음 시대에게 이 사회를, 이 전통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다.
40대가 주변의 10대와 20대를 돌보고 시작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물질적으로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 풍요로운 삶과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신적으로는 가난한 삶,
이 두 개 중에서 고르라면 답은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우리는 모두 틀린 답을 고르고 있었다.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선택한 국민들이 절반이 넘는 나라, 그게 선진국이다. 전체적으로는, 풍요로운 나라가 된다.
정신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드는 나라, 그게 바로 악마들의 나라이고, 그게 우리들의 나라, 대한민국이다.
정신적으로 실패한 정권, 혹은 정서적으로 부패한 정권, 그 속에서 우리가 다시 출발할 때, 우리의 미덕은, 누구도 굶어서는 안된다, 그게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한미 FTA 논쟁 때, 내가 가장 이상하게 생각한 것은, 노동자들이나 도시 중산층들이, 농민이 망한다고 할 때, 그게 마치 자신에게 기계적으로 이득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
그게 사회적 가치가 된 나라가, 번영하고 행복한 사례가 없다.
한국의 정치적 실권을 가진 50대들, 그들은 경제 발전의 수혜를 누렸지만, 정신적으로는 부패했다.
그들의 실패를, 다시 반복할 수는 없다.
'의료, 복지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험 가입할 땐 천사, 보험금 탈 땐 악마 "억울하면 재판하라?" (0) | 2011.05.21 |
---|---|
복지담론 원작자 이상이 대표를 만나다 (0) | 2011.05.21 |
"4월 7일 한국엔 먹어선 안되는 비가 내렸다" (0) | 2011.04.21 |
“감기에 항생제 처방 99% 무의미하다” (0) | 2011.04.21 |
"삼성과 정부는 왜 영리병원에 목을 매나?" (0) | 2011.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