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천 “권력 순위 발언은 마지막 충언이었다” - '영초언니들'이 잊혀져 '박근혜' 괴물이 자랐다
박관천 “권력 순위 발언은 마지막 충언이었다”
‘정윤회 문건’을 작성한 박관천 전 경정(사진)은 당시 최순실씨가 어떻게 국정과 인사에 개입했는지 조사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린’을 건드린다고 판단해서 수정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조국 민정수석이 ‘정윤회 문건 사건’ 재조사 방침을 밝혔다. 2014년 11월 <세계일보>는 최순실씨의 전남편 정윤회씨가 청와대 문고리 3인방 및 십상시로 일컬어지는 이들과 정기적으로 만나 국정에 개입한다는 내용을 담은 청와대 보고서를 입수해 보도했다. 문건 작성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 산하 공직기강비서관실에 근무하던 박관천 전 경정이었다. 박 전 경정은 이 사건으로 구속되어 500여 일간 옥고를 치렀다. 그는 검찰 수사 과정에서 “우리나라 권력 서열 1위는 최순실, 2위는 정윤회, 3위는 박근혜 대통령이다”라고 말했다. 박근혜 게이트가 터지면서 그의 예언이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박 전 경정을 만나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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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
문재인 대통령이 정윤회 문건 사건 재조사 방침을 밝혔는데 협조하고 있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아직 연락을 받지 못했다. 조만간 연락이 올 것으로 알고 협조할 생각이다. 그 사건은 명쾌하게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대목이 많다. 철저한 조사로 진실을 규명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 오점을 있는 그대로 정리하고, 오점을 다시는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런 반성의 시각에서 이번에 문 대통령과 조국 수석이 재조사 방침을 밝혔다고 이해한다.
정윤회 문건 사건 재조사의 핵심은 무엇이라고 보나?
이 사건이 발생했을 때 검찰은 두 가지 방향으로 수사했다. 하나는 문건 내용이 맞느냐였고, 다른 하나는 그 문건이 어떻게 유출되었나였다. 두 가지 수사 모두 석연치 않게 끝났다. 검찰은 문건 내용에 대해 제대로 수사도 하지 않은 채 허위라고 결론지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문건 내용은 지라시,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이라고 규정하자 검찰은 그 프레임대로 수사를 했다. 나는 문건 유출로만 재판을 받았을 뿐이다. 문건 내용의 진위 여부는 미결인 사건이다. 물론 문건 유출 수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래서 문건 내용, 문건 유출 둘 다 명확하게 의혹을 해소하려면 재조사가 불가피하다고 본다.
수사 당시 검찰은 문건 유출 경로를 어떻게 조사했나?
검찰은 내가 보관해둔 문건을 나와 일면식도 없는 한일 전 경위가 꺼내서 복사했고 최경락 전 경위가 언론에 유출했다고 발표했다. 즉, 검찰은 ‘박관천 반출→한일 복사→최경락 유포’로 결론을 냈다. 문건을 왜 복사하고 왜 유포했는지 밝히지 못했다. 어떤 행위든 동기가 있다. 검찰은 정보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쓸 필요가 있어서 한 전 경위나 최 전 경위가 복사했다고 얘기하더라. 과연 문건을 유출한 동기로 그 이유가 적합하다고 보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최경락 전 경위가 생을 달리했는데?
최 전 경위는 그 문건이 언론에 유출되면 어떤 사회적 파장이 일어날지 모를 리 없다. 그가 왜 문건을 언론에 줬는지 그 동기가 검찰 수사에서 빠져 있다. 공무상 비밀 누설 혐의는 법정 형량이 2년 이하의 징역이다. 여러 건 누설했다고 해도 최고형이 3년이다. 최고형 3년에 해당하는 죄를 저질렀다고 목숨을 끊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될까? 최 전 경위가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의문점이 많다.
청와대 민정수석실 차원에서 최 전 경위를 회유했다는 폭로가 있었다.
정윤회 문건 사건이 터지자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한 전 경위와 최 전 경위를 회유했다. 한일 전 경위가 지난해 언론 인터뷰에서 “그해 12월8일 청와대 민정수석실 행정관이 ‘문건을 최경락 경위에게 넘겼다고 진술하면 불기소도 가능하다’며 협조를 요구했다”라고 양심선언을 했다. 민정수석실 차원에서 두 경찰관에게 회유한 사람이 누군지도 밝혀졌다. 하지만 검찰은 이에 대해 전혀 수사를 하지 않았다. 재조사가 이뤄지면 이런 부분도 명쾌하게 소명될 것으로 본다.
수사 당시 검찰에서도 그 문건들을 모두 알고 있었나?
지금도 수사받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한다. 2015년 1월2일 검찰이 나를 구치소에서 불러 정윤회 문건의 첫 버전부터 마지막 버전까지 7~8개를 보여주었다. 내가 청와대에 있을 때 작성한 뒤 폐기한 문건들이었다. 검사에게 “그 문건 어디서 구했느냐”라고 물었더니, “청와대가 협조해줬다”라고 검사가 답했다. 청와대에서도 안 주려는 걸 참 어렵게 구했다면서 “문건들을 왜 이렇게 자주 수정했느냐”라고 검사가 내게 물었다. 보통 문서 작성할 때 두세 번 수정하는데 정윤회 문건은 여러 번 수정을 거쳤다. 이 문서가 역린을 다룬 내용이라서 조응천 공직기강비서관이 많이 고쳤다고 답변했다.
폐기한 문건을 검찰이 어떻게 입수했나?
청와대에 복합출력기가 있다. 문건을 수정하기 위해 복합기로 출력하는데 그 과정에서 문건이 PDF 파일로 저장된다고 한다. 민정수석실이 거기에서 뽑아 검찰에 건네준 것이다.
정윤회씨는 그 문건이 허위라고 주장했는데?
문건 내용을 보자. 소위 십상시에 미운털이 박힌 고위 공직자 3명을 쫓아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당시 이정현 홍보수석, 김덕중 국세청장, 김기춘 비서실장이다. 그 문건이 2014년 1월6일 작성됐다. 2014년 그 문건에 쓰인 2명이 실제로 축출되었다. 내게 문건 작성을 지시한 김기춘 전 실장만 건재했다. 일각에서는 나를 예언자라 하는데 점쟁이도 아니고 예언 능력도 없다. 직무상 조사한 내용을 사실대로 보고해야 해서 그대로 썼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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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2014년 12월10일 정윤회씨가 국정개입 의혹 문건을 보도한 <세계일보>에 대한 고소인 자격으로 서초동 서울중앙지검에 출두하고 있다. |
정윤회씨는 문고리 3인방도 만나지 않았다고 했다.
최순실씨의 조카 장시호씨가 최근 뭐라 했는가? 내가 문건에 적시한 그 중식당에서 장시호 본인이 가명으로 예약해 정윤회씨가 문고리 3인방을 수차례 만나서 의논했다고 실토했다. 장시호씨가 없는 말을 지어내 정윤회씨를 비방할 이유가 있나. 강남 일식당에서 문고리 3인방 등 십상시가 만났다는 내 보고서도 사실로 드러났다. 최근 한 언론에서 강남의 일식당 주인을 인터뷰했는데, 그 주인이 “여기서 문고리 3인방이 윤회 오빠와 자주 만났고 모 언론사 사장도 윤회 오빠와 자주 만나는 단골손님이었다”라고 증언했다.
검찰은 통화내역 조회 결과 정윤회씨와 문고리 3인방 등이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다고 발표했는데?
지금까지 박영수 특검과 검찰 수사에서 박근혜 정부 청와대 주변에 얼마나 많은 대포폰(차명 전화)이 등장했는가. 검찰은 대포폰 조사를 하지 않았다. 비유하자면 밀수하는 사람이 여객선 타고 하겠나? 수사의 기초 상식이다. 정윤회씨가 검찰의 옛 발표에 기대어 자꾸 변명으로 일관하면 국민한테 용서받지 못한다.
최근 “황제 수사의 원조는 우병우가 아니라 정윤회”라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검찰 수사 과정에서 정윤회씨와 대질을 했다. 조사 전에 속으로 권력 실세니 검찰에서도 어느 정도 대접해주겠지 생각했다. 생각보다 심했다. 정윤회씨가 검사 앞에서 조사를 받는데 다리를 꼬고 앉아서 팔짱을 끼고 “그것 말이야” 하는 식으로 훈계조로 진술하더라. 정씨는 혼자 말하다 일어나서 커피를 타기도 하고 마음 내키는 대로 돌아다니며 진술을 했다. 정윤회씨가 나갈 때는 검찰 수사관들이 에워싸고 공손히 차 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과연 대한민국에 검찰청에서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었다. 나도 경찰 수사 오래 해봐서 알지만 경찰서에 들어와서도 그렇게 수사받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정윤회씨 쪽은 당시 검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고 해명하는데?
신변보호 요청이란 제보자 또는 피해자가 위협당할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다. 또 검찰청 수사관들이 아니라 방호원들이 신변보호를 해야 한다. 정윤회씨는 피해자나 제보자가 아니다. 국민들이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검찰청에서 팔짱을 끼고 웃는 모습에 얼마나 분노했나. 우병우가 민정수석이고 같은 검찰 식구라서 그렇게 대우받은 것도 잘못인데, 정윤회씨는 민간인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병우 전 수석보다 더한 자세로 검찰을 대하더라.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국회 청문회에서 정윤회 문건을 모른다고 주장했는데.
김 전 실장과 대질 조사라도 받고 싶다. 정윤회 문건은 2013년 말 ‘김기춘 실장 경질설’이 보도되어 김 전 실장이 진원지를 알아보라 해서 조사가 시작됐다. 조응천 전 비서관이 공직기강실 회의를 소집해 “큰일 났다. 할배(김기춘 실장)가 빨리 알아보라고 난리다”라고 했다. 김기춘 전 실장은 청문회에서 시키지도 않은 보고서를 조응천 비서관이 가져왔다고 하더라. 삼자대면 하자. 나는 김 전 실장이 나하고 조응천 비서관 앞에서 그런 말할 수 있다면 다 인정하겠다. 고령이고 모시던 분한테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유진룡 전 장관이 청문회에 안 나오는 이유로 한 말이 이해가 되더라(유 전 장관은 지난해 12월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인격이 여물지 못해 김 전 실장을 보면 따귀나 뒤통수를 때리는 등 사고를 일으킬 수 있어서 참석을 자제했다”라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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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2016년 12월10일 고 최경락 경위의 형인 최낙기씨(맨 왼쪽)가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우병우 전 민정수석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
정윤회 문건 작성 당시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대해서도 파악했나?
내가 1년여 동안 박근혜 대통령 측근들을 관리하면서 정윤회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 실세인지, 최순실씨가 어떻게 국정과 인사에 개입하는지 조사해 알게 됐다. 정윤회·최순실 이 두 사람이 하는 말이 대통령 의사 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는지 종합적으로 조사해 판단했다. 당연히 문건 앞부분에는 최순실에 관한 조사 내용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지만 조응천 당시 공직기강비서관과 함께 고심했다. 최순실 대목은 ‘역린’에 해당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서 내용을 순화하느라 6~7회가량 수정했다. 수정할 때마다 출력해서 확인하고 수정해야 하지 않나. 그래서 내가 정윤회 문건은 7~8가지 버전이 있었다고 말한 것이다.
정유라와 최순실, 박근혜 전 대통령 관계도 조사했나?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친인척이나 측근 동향 파악은 상당히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조사는 다 한다.
이재만·안봉근·정호성 등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을 둘러싼 비리 혐의도 조사했는가?
솔직히 3인방에게 문제가 있다는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조응천 전 비서관이 나에게 “우리는 대통령의 옷에 불과하다. 하지만 3인방은 피부다. 피부가 잘못되면 수술해야 한다. 그러니 더 유심히 보아야 한다”라고 지시했다. 3인방의 문제점에 대해 보고서를 올렸지만 별다른 조치가 없었다.
문고리 3인방의 전횡을 막기 위해 다른 노력은 안 했나?
정윤회 문건 사건 전에 한 번은 3인방 문제로 정윤회씨를 만났다. 정윤회씨가 문고리 3인방과 자주 만나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고언을 했다. “3명을 다 믿지는 마라. 그중에 제일 사심 없이 일처리할 사람은 정호성 비서관으로 보인다. 나머지 한 명은 무분별한 행동도 많이 하고 낄 데 안 낄 데 안 가리는 것 같다. 또 한 명은 사심이 많은 거 같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이 터지면서 공교롭게 정호성만 구속되었고, 안봉근과 이재만은 행방이 묘연하다. 대통령 최측근이었던 비서관들이 게이트가 터지자마자 사라졌다. 국회 청문회 출석요구서도 일부러 받지 않고 도망을 다녔다. 대통령이 구속 수감될 때도 두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둘은 국회의원 시절부터 박 전 대통령을 모셨다는데 인간적 도리가 아니라고 본다.
3인방에 대한 말을 듣고 정윤회씨가 뭐라고 하던가.
고개만 끄덕끄덕하더라. 내 충고에 공감하는 의사 표시로 알았다.
민정수석실 차원에서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막을 기회가 있지 않았나?
기회가 세 번 있었다. 첫 번째는 2014년 1월 내가 조응천 전 비서관과 십상시 보고서를 올렸을 때다. 한 번이라도 이런 게 왜 나왔느냐고 경위를 물어봤더라면 좀 더 상세한 보고서가 올라가서 문제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2014년 11월 정윤회 문건 사건이 내 의도와 상관없이 세상에 공개된 뒤 검찰 조사가 이뤄졌을 때다. 당시 박 전 대통령이 ‘문건 내용은 지라시, 문건 유출은 국기문란’이라는 프레임을 짜지 않았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내가 검찰에서 권력 순위 발언을 한 것은 구속 상태에서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충언이었다. 검찰에 그 이야기를 꺼내면 100% 민정수석에게 보고된다는 것을 잘 알고 한 작심 발언이었다. 그 말 이후 언론에 보도되었고 나는 혹독한 고난만 겪었다. 아내가 접견을 와서 그러더라. “오지랖도 넓다. 구속되어 있는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냐. 왜 그런 말을 해서 언론에 나느냐”라고 원망하더라.
검찰과 경찰의 수사권 조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는 질주하다가 낭떠러지로 추락한다. 대한민국 검찰이 가진 수사권, 기소권, 독점적인 영장청구권을 누가 줬나?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에 나오듯 국민이 준 것이다. 그러면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머슴이 마음대로 하면 국민이 권한을 회수한다. 바로 그 시점에 와 있다. 검찰의 독점적 권한에 대한 견제 장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국민들의 요구다. 물론 경찰도 수사권을 넘겨받았을 때 국민 입장에서 어떻게 쓸지 진지하게 준비해야 한다. 경찰도 겸허하게 준비하고, 자기 성찰을 해야 한다.
억하심정은 누가 푸나
당선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이 돋보였다. 조직과 집단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원칙으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서로의 억하심정을 풀어주는 것은 이제 우리 몫이다.
당선 이후 문재인 대통령의 언행도 돋보였다. 특히 지난 역사와 정권 속에서 상처받은 이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는 각별했다. 당선 당일, 그는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손을 맞잡았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는 희생자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 포옹을 했다. 소위 지도자가 그처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언제였던가 싶다.
나는 최근의 변화를 보면서 ‘억하심정’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누군가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을 표출할 때, 무슨 심정으로 그러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뭔가 마음에 맺힌 것이 있다고 여겨질 때, 쓰는 말이다.
우리는 대통령의 언행을 보면서 억하심정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억하심정의 뿌리가 생각보다 깊고 멀리 뻗어 있다면? 어떤 이에게는 일생에 걸쳐 쌓인 것이라면? 어떤 사람들에게는 수세대에 걸쳐 쌓인 것이라면?
내가 종사하는 사회학은 억하심정의 사회적 원인과 해법을 따지는 학문이다. 2013년 한국불평등연구회가 주최한 학술행사에서 논문 한 편이 발표됐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 사회학과의 임채윤 교수와 김근태 연구원이 작성한 논문에 따르면 한국은 “일상에서 타인으로부터 존중받는다”라는 느낌에서 세계 최하위권이었다.
특히 한국인은 소득수준이 낮을수록 타인에게서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다. 가난하게 사는 것도 힘든데 사람대접 받기도 힘든 것이다. 한국의 경제적 불평등은 심각하다. 더 심각한 건 경제적 불평등이 사람다움의 자격과 권리를 훼손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에 비해 임금만 적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조직에서 동등한 구성원 대접을 받지 못한다. 그들은 의사 결정에 적극 참여할 수 없다. 극단적인 예도 있다. 그들은 직원 연수에 참석하지 못한다. 운동회에서 정규직이 축구를 하면 그들은 족구를 한다. 비정규직용 의자와 정규직용 의자는 다르다. 물론 후자가 더 좋다.
한국은 민주주의의 모범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 정의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결집하여 평화적으로 권력을 교체하는 시민적 역량을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그 위대한 시민들은 일상에서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가?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 지위와 직급이 낮은 사람, 인종과 성적 정체성이 다른 사람을 향해 어떤 언행을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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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김무성 바른정당 의원의 노룩패스로 한국의 ‘개저씨’라는 말이 국제적으로 회자되었다. |
한국의 가부장주의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외신에서 ‘개저씨(gaejeossi)’는 ‘권위적 한국 남성’을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한국이 밖으로 어떻게 보이나 하는 애국적 염려는 잠시 접어두자. 혹여 내 자신이 타인의 억하심정을 부추기는 원인은 아닌지, 그것을 덜어주려는 의지가 과연 있는지 먼저 생각해보자.
친절함이나 자상함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문제다
대통령의 언행이 사람들의 억하심정을 일말이라도 풀어줬다면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다만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리더십과 근사한 중장년 ‘남자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줘서 귀하고 또 고맙게 느껴진다면, 참으로 서글프다. 하루하루 삶 속에서 억하심정을 풀어주는 이는 우리가 함께 일하고 생활을 나누는 사람이지 미디어 속 대통령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대통령과 정부가 국민의 억하심정을 풀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고용과 교육과 복지에 관해 약속했던 정책의 실행이다. 권력의 남용과 오용으로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한 사건들에 대한 진실 규명이다.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감시와 독려가 필요한 일이다.
우리는 우리대로 일이 있다. 좋은 직업과 나쁜 직업의 비율이 바뀌기 전에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이 있다. 일터에서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기. 조직과 집단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원칙을 잊지 않기. 그간 쌓인 서로의 억하심정을 헤아리고 풀기 위해 노력하기.
오해할까 봐 덧붙인다. 나는 지금까지 친절함이나 자상함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 아니다. 나는 민주주의를, 자유와 평등의 실천을 이야기한 것이다. 우리의 현장은 결국 삶이니까.
'살인 물대포' 쏘던 경찰이 '인권'을 애타게 찾고있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가장 인권 친화적이고 싶어하는 조직이 있다. 바로 경찰이다. "수사권 조정의 필수적 전제로 인권 친화적 경찰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에 대해 경찰 자체로 구체적이고 실행 가능한 방안을 마련해달라." 청와대 민정수석의 이 한마디로 경찰은 인권과 가까워질 수 있는 모든 제스처를 취하고 있다. 경찰교육원은 인권 과목을 편성하겠다고 밝혔으며, 경찰청은 집회·시위 현장에서 채증 기준을 개정 검토하겠다고 나섰다. 뿐만 아니라 청와대 인근 천막 농성에 아무런 제지 조치가 없다는 점도 눈에 띈다.
경찰청장 이철성은 지난 6월 9일 남영동 대공분실 자리였던 경찰청 인권센터에 방문해 박종철 열사를 추모하고 "잘못된 선배들의 역사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남기고 갔다. 지금까지 경찰에게 인권을 보장하라는 요구는 끊임없이 제기해왔다. 꾸준히 제도를 개선하고, 경찰청 인권위원회를 만드는 등 경찰이 인권과 가까워지도록 노력해왔다. 그럼에도 경찰의 태도는 새삼스럽다. 그래서 다시 한번 질문하게 된다. 인권 친화적인 경찰은 가능할까?
인권 친화적 경찰 어떻게 가능할까
경찰 조직이 하고 있는 일은 그 자체가 인간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일이다. 수사, 구속, 검문, 단속 등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방식으로 누군가의 자유를 제한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인권 침해와 분리되기 어렵다. 그래서 법으로 경찰의 권한을 제한하는 영장주의를 규정하고, 피의자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도록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 등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 원칙들이 어떻게 등장하게 되었는지 굳이 살피지 않더라도, 경찰의 권한이 강력하기 때문에 생겨났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프레시안(최형락)
그래서 결론을 이야기하면 인권 친화적인 경찰, 쉬운 일은 아니다.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은 경찰의 권한을 '○○을 할 수 있다'라고 명시한다. 집회 금지를 통보할 수 있고, 차벽을 설치 할 수 있고, 살수차를 동원할 수 있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찰은 대규모 집회마다 금지를 통보했다. 살수차로 백남기 농민을 쓰러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고, 세월호 유가족을 차벽에 가뒀다. 집시법의 옳고 그름을 떠나 집회와 시위에 관한 권리를 적극적으로 제한하기 위한 조치만을 선택해온 경찰이었다. 집회와 시위가 아니더라도, 광범위하게 개인정보를 수집하고 정부의 심기를 거스르는 사람은 서슴없이 사찰했다. 세월호 유가족, 쌍용자동차 노동자, 철거민, 대학생 등 누구든 가리지 않았다.
이런 조치를 명령한 책임자들의 현재는 어떨까? 용산참사의 진압을 명령한 김석기는 공항공사 사장을 거쳐 지금 국회의원을 지내고 있다, 쌍용자동차 진압을 지휘했던 경기지방경찰청장 조현오는 경찰청장까지 승진했다.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제압한 이성한은 한국전력의 상임감사라는 보은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이성한과 같이 밀양 할매들을 들어냈던 당시 경남청장 이철성은 청와대 치안비서관을 거쳐 경찰청장이 되었다. 역대 임기를 채운 경찰청장은 단 두 명뿐인데, 그 중 한 명이 백남기 농민을 살수차로 쓰러트릴 당시 경찰청장이던 강신명이다. 이외에도 거론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경찰들이 처벌은커녕 인권을 제압하고 영전을 거듭했다.
경찰이 진심으로 인권 친화적 경찰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스스로 잘하겠다는 말이 아니다. 인권 침해와 경찰과의 불가분성을 파악하는 일이다. 그저 잠시 자세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경찰의 행동 하나하나가 얼마든지 인권 침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경찰 개인이 의도하지 않더라도 인권 침해가 발생할 수 있다. 인권을 존중하겠다는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경찰은 여전히 자신이 지닌 인권 침해 가능성에 대해선 외면하고 인권 친화적 '쇼맨십'을 벌이고 있는 듯하다.
경찰이 인권과 가까워지기 위해
2015년 11월 14일, 경찰의 물대포로 사람이 죽었다. 하지만 당시 경찰청장 강신명은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사람이 죽은 집회를 두고, 평화를 넘어 준법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던 강신명은 2016년 8월 명예롭게 임기를 마쳤다. 지금까지 경찰은 집회·시위를 탄압하는 일과 주요 인사들을 사찰하는 일을 실적으로 삼아왔다. 그렇게 쌓인 실적으로 승진하고, 퇴직 후 공사 사장 취임하고, 국회의원 공천받으며 경찰 조직의 생리를 형성했다. 시민에게 법보다 '경찰 폭력'이 가까울 수 있었던 이유는 이 경찰의 생리를 끊어낸 역사가 없기 때문이다. 경찰이 인권과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과거를 청산해야 한다. 어떤 인권 침해를 일으켜왔는지 포착하고 앞으로를 점검 가능하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경찰 인력도 축소 혹은 재편해야 한다. 집회, 시위 관리를 주요 업무로 하는 경비, 사찰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정보, 의전 담당하는 경무, 대공을 담당하는 보안까지 이 네 가지 업무에만 약 2만 명 이상이 배치되어 있다. 하지만 말이 2만 명이지 실제 지구대나 파출소 인원을 끌어오는 관행까지 포함하면 더 많은 인원이 배치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업무들이 경찰에서 중요하게 담당해야 할 업무인지 점검해야한다. 특히 경비, 정보, 보안은 인권 침해의 최전선에 있는 업무다. 경찰이 인권 친화적이기 위해 해나가야 할 일들을 선별하고 과감하게 선을 긋자. 인권에 반하는 업무는 과감히 축소 혹은 폐지해서 경찰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력 구조 개편에 나서야 한다.
수사나 단속, 검문과 같은 과정에서 제기되는 절차상 인권 침해들도 점검해야 한다. 2015년 구파발 검문소 의경 총기 사망 사건이나 2010년 양천 경찰서에서 발생한 고문사건 등 은 그저 실수나 사고로 치부할 수 없다. 민정수석이 인권 친화적 경찰로 거듭나길 바란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발생한 민간인 폭행 사건도 마찬가지다. 실제 피의자라 하더라도 경찰이 해선 안 될 폭력이 발생했지만 경찰은 가해자를 구속조차 하지 않았다. 경찰의 인권 의식을 의심케 하는 사건들이 꾸준히 발생해왔다. 경찰의 내부 시스템에서 인권이 중요한 지표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개혁에는 셀프가 없다
권력기관은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다. 검찰도 그랬고, 국정원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지난 박근혜 정권이 '셀프 개혁은 없다'를 확실히 보여줬다. 경찰도 마찬가지다. 경찰 혼자 변화하고 개혁할 수 없다. 그래서 지금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정부의 인권친화적 경찰로 거듭나라는 주문은 쇼맨십을 용인하고 있다. 수사권 조정과 인권은 거래할 수 없다. 수사권 조정하지 않아도 경찰은 인권 친화적이어야 한다. 정부는 경찰이 인권 친화적이기 위한 다른 의지를 보여야 한다.
먼저 법·제도 개선해야 한다. 경비, 정보, 보안 업무가 작동 가능하도록 만드는 근거들 제한해야한다. 촛불 집회로 등장한 정권을 자처하려면 집시법을 개정해야 한다. 2017년부터는 물대포, 차벽은 집회와 시위 현장에서 등장하지 않도록 금지시켜야 한다. 또 사상·양심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서 보안 업무를 중단해야 한다. 그 근거가 되는 국가보안법, 보안관찰법 폐지에도 앞장서야 한다.
또 인사 시스템 역시 재정비해야 한다. 인권 침해의 행위자로서 경찰이 과거를 청산하려면 보상과 징계의 기준이 달라져야 한다. 집회, 시위를 강경 진압하고 소환장을 남발하며 공포를 조장하는 경찰에게 '집회 관리를 잘했다'는 말보다, 인권 침해의 가해자로 지목할 수 있는 인사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제 역할을 하지 못해왔던 경찰청 인권위원회를 새롭게 꾸리든, 새로운 경찰 감사시스템을 마련하든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아랫돌 빼서 윗돌 괼 수 없다
검찰에 대한 신뢰가 그 어떤 공권력보다 낮기 때문인지 경찰의 문제는 후순위로 밀리는 것일까. 하지만 개혁의 우선순위가 필요성을 좌지우지하지 않는다. 공권력은 결국 같이 개혁되어야 한다. 경찰 개혁의 과제 함께 진행해야 한다.
'영초언니들'이 잊혀져 '박근혜' 괴물이 자랐다
태곳적부터 여성이 있었다. '세상의 절반'이기에 세상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여성들이 그 모습 그대로 기억되는 경우는 드물다. 남성들의 눈에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고, 기록되어 왔다. '그들의 역사(History)'가 아닌 '그녀들의 역사(Herstory)'가 필요한 이유다.
대한민국에서 1970년대 박정희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던 운동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운동권 내에는 아들의 제적, 구속, 죽음으로 가슴 치는 어머니들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청춘을 바쳐 싸운 여성 투사들도 있었다. 남성들의 보조적인 역할만 한 것도 아니다. 책의 주인공 천영초 씨, '고려대 9.14 시위 사건'을 일으킨 이혜자 씨 등 여대생들도 앞장서 싸웠다. 여성노동자들이 주축이 된 'YH 무역 농성 사건'은 영원할 것 같던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방아쇠 역할을 했다.
타국에서 불의의 사고로 시력과 기억을 잃어버린 영초언니는 그녀와 함께한 많은 이들의 젊은 시절의 기록인 한 권의 책으로 '사회적 스승'이자 '지식인의 모델'로 우리 앞에 다시 섰다. 이 책의 필자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은 뜨거운 '자매애'로 40여년 전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로 돌아가 공포와 고통, 번민을 헤집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70, 80년대 독재정치를 겪었든, 겪지 않았든, 스스로의 젊은 날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책 <영초언니>(문학동네 펴냄)에 얽힌 얘기를 지난 12일 제주에서 서명숙 이사장을 만나 들었다.

▲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 ⓒ프레시안(이명선)
고려대 72학번 천영초, <영초언니>는 100% 실화다
프레시안 : 박정희 정권에서 20대를 보낸 70년대 학번은 아니지만, 책 <영초언니>를 감명 깊게 봤다. "독재 타도"를 외치던 당시 대학가 이야기인데, 마치 소설을 읽듯 등장인물과 그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서명숙 : 한 매체에서는 책을 소개하며 "제주올레 서명숙 이사장의 첫 소설"(6월 1일 자 <오마이뉴스>)이라고 보도했다.(웃음)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도 "소설"이라고 소개하더라. 하지만 <영초언니>는 정말 100% 완벽 실화다. 구성과 문장에 글을 쓴 내 체취가 실릴 수는 있지만, 사실관계에 보탠 내용이 하나도 없다. 영초언니(고려대 신문방송학과 72학번 천영초)를 비롯한 등장인물 모두 실명 그대로다. 다만, 영초언니의 아들과 교도관, 형사만 가명이다.
프레시안 : 책 서문에 2006년 겨울 "후배들의 기약 없는 싸움", 일명 '<시사저널> 사태’를 지켜보며 "어처구니없게도 30여 년 전 대학 시절의 기억"이 떠올라 책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서명숙 : <시사저널>을 그만둔 상태였는데, 삼성을 비판하는 기사를 싣지 못하게 한 경영진과 그에 저항하는 후배 기자들이 첨예한 갈등을 빚으며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고 있었다. 당시 <시사저널> 동료와 후배를 만나고 오면, 늘 영초언니 꿈을 꿨다. 캐나다에서 교통사고로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뇌의 6, 70%가 손상"된 영초언니도 사느라 바빠 잊고 있던 때다. 그런데 대학시절 영초언니와 함께했던 일이 꿈에 자꾸 나왔다.
현실과 과거가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오죽하면, 정혜신 박사에게 '내가 왜 이런 거냐'고 물었다. 정 박사는 심리학의 '주둔군 이론'에 따르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했다. "군인이 전투를 하다가 밀릴 때 통상 가장 어려운 전투를 치렀던 고지로 후퇴하는 건 그곳에 가장 많은 주둔군을 두고 왔기 때문이라"며 "다시 어려운 일이 닥치면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했다. "바람이 몹시 불던 어떤 날"로….
'내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겨울이 그때였구나. 그때 심리적으로 주둔군을 그곳에 남겨놓고 왔구나' 싶어서 어떻게든 해원굿(解怨-)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글쓰기로 나를 치유하는 동시에, 197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선 수많은 영초언니를 잊고 사는 우리를 위해서라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마이뉴스> 편집국장 시절에도 쓰지 않던 블로그에 글을 연재했다. 그마저도 제주 올레길 찾기라는 새로운 일에 빠져 중단됐다.
올레길이 일차적으로 마무리될 즈음, 영초언니가 캐나다에서 영구 귀국했다. 하지만 사고 직후 모습보다 더 비참했다. 담배를 처음 소개해준 '나쁜 언니', 사회의 모순에 눈뜨게 해준 '사회적 스승', 행동하는 양심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보여준 '지식인의 모델'이었던 영초언니는 같은 말만 반복하며 먹을 것만 찾았다.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기록의 의무를 지닌 기자로 25년여를 살았는데, 가장 가까운 사람을 기록하지 않았구나. 매일 정치인만 쫓아다녔지. 막상 내 인생의 거물인 영초언니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기자직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영초언니를 기록하는 것은 기록자의 마지막 책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영초언니는 기록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들어간 <고대신문>에서 만난 인연 아닌가.
조정래 선생님 덕에…<영초언니> 출판 뒷이야기

▲ <영초언니>(서명숙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서명숙 : 책 서문에 밝히지는 않았지만, <영초언니>는 4년 전에 출판될 뻔했다. 당시 조정래 선생님이 제주도에 올레길을 걸으러 오셨길래, 칭찬받을 생각으로 책 출판 계획을 알렸다. 그랬더니, '박근혜 정부에서 그런 책을 내면 절대 안 된다. 감옥 가려고 그러느냐'며 만류했다. 나는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의 과오 일부에 대해 사과도 했는데 문제 될 게 없지 않아요?'라며 '감옥 가도 좋아요. <영초언니> 썼다고 잡혀가면, 책이 더 유명해질 것 아니에요'라고 농담을 했다.(웃음)
하지만 조 선생님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자신을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시하고 있다며 '딸 박근혜는 자신의 집권 자체를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고 봤다. 이어 '심리적으로 동일한 대상이자, 이데올로기적 선언 모델인 아버지를 비판하는 책을 어떻게든 문제 삼을 것'이라며 '박근혜를 위시한 세력은 음성적인 방법으로라도 보복할 것이다. 제주올레를 후원하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후원을 중단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과거인 선배 한 사람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인 후배들에게 충격과 상처를 주면 안 된다'며 '현실을 직시해라. 책은 몇 년 뒤에 내면 된다. 박근혜 정부 말기에 내던지, 끝나면 내던지'라고 만류하셨다.
나로서는 현실과 타협하는 것 같아 비겁하게 여겨졌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태백산맥>으로 고초를 많이 당한 선생님의 과한 우려'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미 <시사인>과 연재를 약속한 상태였다. 선생님이 나와 제주올레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지만, '책 안 내겠다'라는 말도 딱히 하지 않은 채 넘겼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사모님께서 조정래 선생님이 밤새 걱정하셨다며 전화를 했다. 그래서 '선생님의 판단이 옳든 그르든 존경하는 어른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생각에, 후배들에게 싹싹 빌며 연재 계획을 철회했다.
"'염병' 최순실이 방아쇠를 당겼다"
프레시안 : 지금 생각하면, 조정래 선생님의 우려가 맞았던 것 같다.(웃음)
서명숙 : 그렇다. 박근혜 정권에 대한 조 선생님의 분석이 정확했다.(웃음) 이사장의 책 한 권으로 제주올레가 박근혜 정부 블랙리스트에 포함돼 6~7년 동안 어렵게 구축한 올레길이 수포가 될 뻔했다. 당연히 후원도 끊기고.(웃음)
올레길 유명세에,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줄 안다. 그러나 올레길은 절반 이상이 후원금으로 운영된다. 상황이 이런데, 4년 전 <영초언니>가 나왔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상상만으로도 몸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박근혜 탄핵' 촛불을 들면서도 책을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1월 최순실 씨가 특검에 강제소환되는 장면을 생방송으로 보는데, 귀를 의심했다. 최 씨가 "민주주의"를 입에 올리며 "억울하다"고 하는 것 아닌가. 순간 40여 년 전 "민주주의를 쟁취하자"고 외치며 감옥에 수감된 영초언니 모습이 떠올랐다. 심지어 영초언니는 교도관이 입을 틀어막아 끝까지 외치지도 못했는데, 최 씨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더라. 나중에 청소 노동자가 최 씨를 향해 "염병하네"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졌지만, 생방송을 보면서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 죽음을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를 최 씨가 누리고 있구나. 수세식 변기와 TV가 설치된 독방에서 책도 읽으며….'
1979년 말,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성동구치소에 수감됐다. 당시 17명이 5.5평에서 지냈는데, '수감번호 4141' 신입으로 지정받은 잠자리가 푸세식(재래식) 화장실 입구였다. 사람들이 밤에 화장실을 들고 나며 두꺼운 비닐을 들출 때마다 고약한 냄새가 났다. 스물두 살, 창창한 나이에 양계장의 닭처럼 사방이 막힌 좁은 곳에서 생활했다. 그런데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최 씨는 헌정 사상 유례가 없는 국정농단을 하고서도 최신식 감방에서 생활하고 있다. 박 전 대통령과 영초언니, 최 씨와 나는 심지어 또래 아닌가. 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그 감옥에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웃음)
'군사독재 정권의 조작으로 억울하게 수감된 사람들, 나와서도 평생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며 사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천영초의 민주주의'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번은 올레길로, 또 한 번은 조정래 선생님의 만류로 두 번이나 좌절된 영초언니의 이야기를 이번에는 꼭 세상에 내놔야겠다고 결심했다. 최 씨가 <영초언니> 출판의 방아쇠를 당긴 셈이다. 동기 부여가 확실하게 됐다.

▲ 국정농단의 주범 최순실 씨는 지난 1월 특검에 강제소환되며 "더이상 민주주의 특검이 아닙니다"라고 외쳤다. YTN 뉴스 화면 갈무리.
"대통령 박근혜? 귀싸대기 맞은 기분이었다"
프레시안 : 책에 고려대 여학생들끼리 책도 읽고 토론도 하는 '가라열'('가라! 여성 해방의 길로, 가라! 독재 타도의 길로, 가라! 노동자 해방의 길로!' 등의 의미를 함축해 지은 10명의 여학생 모임명) 이야기가 나온다. 자생적 페미니스트 조직으로, 당시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을 보면서 선구안(先驅眼)에 감탄하게 된다. 동시에 그만큼 우리 사회가 바뀌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해 씁쓸하다.
서명숙 : 1978~79년 당시 일이다. 우리가 오히려 지금 세대를 보면 바뀐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이 담배를 피우면 지금도 안 좋게 보지 않나. 아직도 우리 사회는 남녀 공히 같은 시각으로 보지 않는다. '이건 아닌데?' 하는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자각하기까지 영초언니가 매개 역할을 해줬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제주도 여성인 어머니가 자생적 페미니스트와 같은 요소가 있었다. 딸인 나에게 어릴 때부터 최초의 여성 장관인 임영신 상공부 장관(이승만 정부), 최초의 여성 변호사인 황산성 변호사(11대 국회의원 및, 김영삼 정부 환경부 장관 역임) 등을 롤모델로 '전문직 여성으로 이왕이면 결혼하지 말라'고 했다. 후에 딸이 결혼한다고 하자, 남자의 직업 등 현실적 조건보다 '내 딸이?'라며 결혼 소식 자체에 놀랐다.
어머니는 정치적으로는 보수였지만, 집안에서도 딸과 아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제주에서 서울로 사립대를 보내면서도 '큰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그런 나에게 <고대신문> 입사 첫 날, 한 선배가 남학생 책상을 걸레로 닦으라며 여비서 취급을 했다. 찬물에 걸레를 빨며 '집어 던지고 나가 버릴까'도 고민했지만, '나중에 편집국장이 되면 남자 후배들도 똑같이 느끼게 해줘야지'라며 참았다.(웃음)
프레시안 : 영초언니 삶이 여자 입장에서 무척 가슴이 아팠다. 민주 정부 이후 학생운동 출신들이 국회에 진출하기도 하고, 장·차관에 임명되는 등 명예회복과 사회적 보상이 이뤄지는 경우도 있다. 운동권 출신의 여성 정치인들도 있지만, 남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것은 분명하다.
서명숙 : 책에 나오는 언니들, 천영초나 이혜자 모두 고려대 역사상 가장 큰 집회(데모)를 이끈 사람들이다. 영초언니와 혜자언니가 주도한 당시 집회는 국가적·제도적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최소한의 방어였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로, 이들의 운동 동기가 너무 순수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2013년 헌법재판소의 긴급조치 1, 2, 9호 위헌 결정에도 불구하고 정치적·경제적으로 보상받지 못했다.
1978년 생물학과 4학년이었던 혜자언니는 '고려대 9.14 시위 사건'('고려대 잔 다르크 사건', '78 민중 선언 사건'으로도 불린다)을 주도했다. 이 시위는 '긴급조치 9호' 발동 이후 3년 4개월 동안 이어진 대학가의 침묵을 깼다. 지금까지 기자로 수많은 역사적인 현장과 집회를 경험했지만, 내 인생의 가장 극적인 장면을 꼽으라고 하면 바로 이 날이다. 당시 1000여 명의 학생이 경찰과 대치하며 학내 정보원(일명 '짭새')이 사무실로 쓰던 정문 경비실을 부수었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는 이 같은 사실이 단 한 줄도 보도되지 않았다. 일본 <아사히신문>만 기사화했을 뿐이다.
혜자언니는 '당시 두렵고 힘들었지만, 이를 이겨내고 해냈다'는 자부심으로 개인적으로는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2012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 근혜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자신의 인생이 모욕을 당한 것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역사로부터, 국민으로부터 귀싸대기를 맞은 기분이었다'고. 하지만 촛불집회를 계기로, 혜자언니는 역사와 국민 앞에 미안함이 앞섰다고 말했다.

▲ 고려대 9.14 시위 당시 모습. 학생들이 강당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고대신문
"기상나팔 대신 장송곡이 울려 퍼졌다"
프레시안 : 70년대 대학가 풍경 하면,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표되는 낭만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서명숙 : 사실 학생들이 정치적·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두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우민정책(愚民政策)'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당시 대학을 다닌 사람들은 내상 또는 심리적 스크레치로, 웃고 있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인생에 있어 가장 해맑은 시기에 방관자는 방관자대로, 참여자는 참여자대로, 평생을 트라우마 또는 외상후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영초언니>를 읽은 독자들이 감상평을 보내오는데 나와 동시대 사람들은 '도서관에만 있었다. 그게 효도하는 것인 줄 알았다'라며 때늦은 자기 고백을 하기도 하고, 젊은 친구들은 'YH 무역 농성 사건'에 놀라기도 한다. 연애 이야기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도 있고….(웃음)
프레시안 : 책에 따르면, YH 무역 여성노동자 수감 소식에 재소자들이 "노조 빨갱이" "진짜 빨갱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리고 얼마 뒤,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던 자발스러운 기상나팔 대신 구슬픈 트럼펫 장송곡이 울려 퍼"지며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이 전해졌다. 시간상으로 보면, 불과 두 달 만이다.
서명숙 : 절대권력이 무너지는 것은 외부의 충격이 아닌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나 차지철 전 대통령 경호실 실장 등 내부의 충격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는 절대권력이 더욱 강화된 것 같지만, 안에서는 모순이 쌓일 대로 쌓여 폭발 직전이 된 것이다.
여기에 YH 무역 농성 사건이 스모킹 건(smoking gun)이 됐다. 기업주가 폐업 신고를 하고 해외로 도피하자 여성노동자들이 당시 유일 야당이었던 신민당사를 찾아 "배고파 못 살겠다"며 농성을 했고, 경찰 진압 과정에서 김경숙 씨가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의원직 제명을 당하자, 김 총재의 지지기반인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분노하며 '부마 민중 항쟁'이 벌어졌다. 그 결과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된 '10.26 사태'로 이어졌다.
박정희가 5.16쿠데타 이후 근대화와 권위주의를 통치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얼마나 지독한 절대권력을 휘둘렀는지 모른다. 기성세대 대부분은 박정희 전 대통령하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며 나라의 초석을 다진 사람이라고 한다. 이는 현대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 군사독재에 저항하며 데모한 사람들은 0.01%에 불과하다. 그 외에는 침묵하거나 방관했다.

▲ YH 무역 여성노동자들의 신민당 점거 농성.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박정희 시대' 청산 못해 '박근혜'가 자랐다
프레시안 :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없었기 때문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12년 당시 20대들은 70년대 독재정치의 실상을 모르고 투표를 했다.
서명숙 : 박근혜 전 대통령이 '박정희의 딸'이라는 사실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 시대에 대한 반성과 청산이 제대로 안 됐기 때문에 '박근혜'라는 싹이 자랄 수 있었다. 독일의 경우, 히틀러 치하였던 나치 시절(1933~1945년)을 끊임없이 반성하고 있다. 나치는 사회적·정치적·도덕적으로 매우 인종차별적이고 권위적이었지만, 오랜 기간 집단으로 세뇌됐기 때문에 향수를 가진 사람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는 반성으로, 나치 추종자라고 해도 쉬쉬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를 당당하게 여긴다. 처음에는 공(功)과 과(過) 모두 있다고 생각해도 차츰 공만 얘기한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옅어진다. 경제적인 성과는 계속 얘기되지만, '인혁당 사건'과 '동백림 사건'과 같은 간첩 조작 사건이나 절대권력에 희생돼 고문당하고 수감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잊힌다.
"폭력이 폭력을 낳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
프레시안 :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당사자들 입장에서 지난해 촛불집회에 대한 감회도 남다를 것 같다.
서명숙 : 지난해 촛불집회로 "박정희 정권을 향한 향수에 뿌리를 둔 박근혜 정권도 막을 내리고, 박근혜 본인은 구속되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6.10 민주항쟁' 이전, 긴급조치와 유신헌법으로 온 나라가 병영 같았던 시절에도 경제적으로는 약진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엄청난 탄압이 이뤄졌다.
무엇이든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없다. 젊은 세대도 이제는 과거의 이런 저항이 쌓여서 지금의 민주주의와 촛불집회가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최루탄 대신 살수차와 차 벽이 등장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폭력이 폭력을 낳고 평화가 평화를 낳는다.
프레시안 : 6.10 민주항쟁 30주년 기념식을 보면서 '언론이 언제부터 저렇게 관심을 가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주의 투쟁 역사를 복원해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영초언니>는 그런 의미에서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서명숙 : 그렇다. 우리 사회에 수많은 영초언니가 있을 것이다. 책 한 권을 내세우며 과거로 돌아가자는 것은 아니다. 또 과거의 행동을 보상받자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과거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반성할 줄 알아야 독일처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박근혜'와 같은 괴물은 또 나올 것이다. '모든 국가는 그 나라 국민의 수준에 맞는 정치인을 갖는다'고 하지 않나. '박근혜'는 대통령이 돼야 했던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았어야 한다.

ⓒ프레시안(이명선)
"길 찾는 일은 영원한 특종"
프레시안 : <영초언니>를 통해 젊은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서명숙 : 내가 청춘이었던 시절에는 정치적 민주화가, 지금 청춘들에게는 경제적 민주화가 시대정신이다. 과거는 독재권력이라는 하나의 대상과 싸워야 했지만, 지금은 금수저·흙수저와 같은 부의 양극화뿐 아니라 자영업자를 상대로 한 대기업의 횡포 등 전선이 다양하다. 책에 등장한 영초언니나, 혜자언니나 처음부터 투사였던 것이 아니다. 비틀거리며 두려움에 떨면서 독재정권에 맞섰다.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면,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어떤 행동도 없이 자신을 경멸하는 것은 위험하다.
프레시안 : 평생을 기자로, 기록을 의무로 생각하고 살았다. 언론계 선배로 후배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서명숙 : 박정희 대통령의 긴급조치 1, 2호로 유신에 반대하는 기사를 쓸 수 없게 되자, 선배들은 거리로 나왔다(일명 '동아투위'). 후배들에게 당시와 같은 '행동하는 양심'을 본받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이명박-박근혜 정권과 타협한 언론은 스스로 알 것이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이들에게는 '언론인'이 가져야 하는 시대적 책무와 고민이 없었다. 그저 단순 직업인일 뿐이었다. YTN과 MBC 등 해직기자들의 고생이 많았다. 이들 모두 상식적으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있을 것이다.
프레시안 : 제주올레가 어느새 10주년을 맞았다. 제주에 이어 일본에서도 '규슈올레'를 만들었다. 앞으로 계획은?
서명숙 : 오는 17일 몽골 울란바토르를 간다. 제주올레의 상징이 말('간세 인형'으로 상품화되어 있다)인데, 진짜 말의 나라인 몽골에 올레길을 찾으러 간다.
길을 찾는 일은 정말 즐겁다. 기자 시절에는 특종을 해도 몇 달 후면 다른 기사로 이슈가 덮였다. 그런데 길은 마치 고고학자가 유물을 발굴하듯 걸어 다니며 찾아 놓으면, 사람들이 그 길을 걷고 또 걷는다. 나로서는 '영원한 특종'을 한 셈이다.(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