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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냐’ - 박정희 시대를 넘어 포용국가로

일취월장7 2017. 4. 29. 10:32

보편이냐 선별이냐

우리나라에서 복지 논쟁은 ‘보편 복지냐, 선별 복지냐’로 진행되었다. 복지가 권리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인식하면서도 부자들까지 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4월 29일 토요일 제501호

한 청중이 묻는다. “저는 형편에 따라 다르게 지급해도 좋을 것 같은데, 그러면 전 선별주의인가요?” 보편 복지를 옹호하는 강사를 향한, 무척이나 솔직한 질문이다.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고민하고 계시네요, 말씀의 취지를 이해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복지 논쟁은 사실상 2010년 보편·선별 복지 담론에서 본격화되었다. 이어 2012년 대선에서는 모든 후보가 복지국가를 약속하는 상황으로 급진전했다. 그런데 정치적 진영 논리가 첨예하게 작동하면서 논쟁이 선악 이분 구도로 진행된 면이 있다. 보편 복지 시각에서 선별 복지는 사람을 차별하는 제도로, 선별 복지 시각에서 보편 복지는 예산을 함부로 쓰는 비효율적 제도로 간주되었다. 시민들의 생각은 한층 더 복잡했다. 복지가 권리로서 자리 잡아야 한다고 인식하면서도 부잣집 아이들, 부자 노인들까지 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마음속에 맴돌았다.

이번 대선에서도 비슷한 논쟁 구도가 펼쳐진다. 지난 3월 방송 토론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현재 하위 70%에게 적용되는 기초연금을 30만원으로 인상하겠다고 말하자 이재명 후보가 반박했다. 모든 노인에게 기초연금을 제공해야 보편적 복지를 주창하는 민주당의 정체성에 맞는다며 “모든 65세 이상에게 지급하느냐, 아니면 70% 노인에게만 지원하느냐는 철학의 차이”라고 꼬집었다.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는 대상을 더 좁힌 공약을 내놓았다. 하위 50% 노인에 한해 기초연금을 차등 인상한다. 이재명 후보의 눈으로 보면 더욱 선별주의로 기운 방안이다.

근래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보육료를 5분위로 차등 지원하는 공약을 내놓았다. 현행 방식은 모든 아동에게 연령별로 동일액을 지원하는데, 이 공약은 최상위 20%는 제외하고 최하위 20%에게는 지금보다 두 배 제공하는 하후상박 방식을 적용했다. 유사한 논쟁이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도 반값 등록금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계층을 따지지 않고 등록금의 절반을, 박근혜 후보는 80% 계층까지 소득에 따라 차등 지원하자고 제시했다.

ⓒ연합뉴스
4월24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빈곤 노인 기초연금 보장을 위한 연대 회원들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들은 일부 대선 후보의 '기초연금 30만 원 공약'이 우리 사회 가장 가난한 기초생활 수급 노인들에게는 혜택이 돌아오지 않는 공약이라고 비판했다.

어떤 방식이 우리에게 적절할까? 아니,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차등 지원은 보편주의와 상충하는가? 보편주의는 위의 다양한 복지 설계도를 어떻게 이해할까?

보편적 복지국가의 모델로 손꼽히는 스웨덴의 사례를 보자. 스웨덴은 1998년 이전까지 기초연금을 모든 노인에게 제공하다가 이후 하위 계층에게만 적용하는 최저연금 방식으로 개편했다. 국민연금이 일정액에 미치지 못할 경우 부족한 금액만큼을 기초연금으로 지급한다. 그 결과 현재 노인 중 약 40%만 기초연금을 받는다.

이는 선별주의로 후퇴한 것일까? 기초연금 프로그램만 보면 그렇다. 보편주의를 지향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당황스러운 변화일 수 있다. 여기서 기초연금 개별 ‘제도’를 넘어 노후소득 보장 ‘부문’으로 시야를 넓혀보자. 스웨덴 노인들은 현재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으로 구성된 공적연금 이원 체계에서 두 연금을 합해 최저연금액을 보장받는다. 이 금액이 상시노동 평균소득자 월급의 24% 수준, 스웨덴 1인 최저생계비의 약 2배에 해당한다. 상시노동자 평균소득 기준으로 계산하면 우리나라 기초연금 급여율이 6%이므로(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 기준 10%), 우리보다 4배 높은 금액이다. 결국 기초연금만 보면 선별주의이지만 노후 소득 보장 시야에서는 모든 노인이 최저생계비의 2배 이상을 공적연금으로 보장받는 보편주의로 볼 수 있다. 노인의 삶에 절실한 의료·주거·공동체망까지 포괄하는 사회 ‘체제’ 수준에서는 더욱 그렇다.

보편주의 핵심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권리’로서 복지

우리나라에서 보편·선별 복지 논쟁이 등장한 지 어느새 8년째다. 무상급식·무상보육·기초연금이 시행되고, 시민들이 해당 복지의 강·약점도 체험하고 있다. 아쉬운 건, 보편·선별 논쟁이 처음 출발할 때의 방식, 즉 여전히 개별 제도에 머문다는 점이다. 물론 이 수준에서도 논의가 필요하고 대상에 따라 균등한, 혹은 원리를 혼용한 방식이 제시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보편주의 여부를 따지는 건 제한적이다. 보편주의의 핵심은 모든 시민을 포괄하는 ‘권리’로서 복지이다. 이 권리 보장은 개별 ‘제도’보다는 ‘부문’ ‘체제’ 수준으로 올라갈수록 종합적이고 실질적이다. 여러 수준의 시야에서 보편주의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기 바란다.


박정희 시대를 넘어 포용국가로

[기고] '모두를 위한 국가, 약자를 위한 포용'
2017.04.28 16:53:14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라는? 2013년 이코노미스트지의 조사에 따르면 1위가 스위스로 나타났다. 2위부터 5위까지는 호주,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가 차지했다. 상위 5개국 중 4개국이 유럽 국가이고, 그 중 3개국은 북유럽 국가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도 북유럽 국가에 이민가고 싶다는 소리를 심심찮게 듣는다. '아메리칸드림'의 시대가 저물고 '유럽피언 드림'의 시대가 성큼 다가온 듯하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조사가 있다. 2015년 한 방송국에서 실시한 인터넷 조사에 따르면 "한국이 싫어서 이민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고 답한 비율이 88%나 된다. 떠나고 싶은 나라와 살고 싶은 나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이게 나라냐?"지난 겨울,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말을 꼽으라면 단연 이 말일 듯싶다. 이 짧은 두 마디가 커다란 울림이 되었던 이유는, 그 말 속에 '떠나고 싶은 나라'의 비극적 현실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의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나날이 악화되고 있다. 상위 10% 계층이 전체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전체 자산의 3분의 2를 가지고 있다. 노동생산성은 증가하는데, 임금은 제자리다. 노동자가 받아야 할 정당한 몫을 누군가 약탈한다는 뜻이다. 신종 신분제는 불평등 구조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임시직과 일용직을 합한 비정규직 비중은 전체 근로자의 45%에 이르고, 비정규직의 임금 수준은 정규직의 50%에도 못 미친다. 대기업과 중소기업간 임금 격차도 날로 악화되고 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신분'때문에 임금 차별을 받는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같은 수단으로 재벌·대기업이 과도한 이윤을 챙겨가는 동안, 가계가 가져가는 몫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 금년 1월말 현재 1,344조에 달하는 가계부채는 폭발 직전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는 서민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중산층의 붕괴를 가속화한다. 우리나라의 국민행복도 지수는 OECD 최하위권이다. 많은 국민이 '요람부터 무덤까지'불행과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치열한 경쟁의 문을 뚫기 위해 밤낮 공부에 매달려야 한다. 그렇게 해도 일할 기회를 찾는 게 하늘의 별따기다. 미래가 불안한 젊은이는 결혼을 기피하고 출산을 포기한다. "죽지 못해 산다"는 건 옛말이 되어 가고 있다. '살지 못해 죽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인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민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은 건 당연한 귀결이다. 

도대체 이 비극적 현실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많은 학자들이 기적의 역설 때문이라고 말한다. 산업화의 기적을 주도한 발전국가 패러다임이 그 원인이라는 것이다. 발전국가 패러다임은 경제성장 제일주의에 기초해 있다. 이 패러다임에서 '경제성장'은 '반공'과 함께 절대선(善)의 경지에 도달한 핵심적 국가존립의 이유다. 그동안 경제성장을 위해 재벌을 키우고 대기업에 공적 자원을 몰아줬다.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내세워 개인, 사회, 공동체를 동원한 국가주의적 동원경제인 것이다. 성장이라는 지상목표를 향해 폭주하는 사이, 독점적 재벌의 이윤추구 행태는 더욱 강화되었고, 부자·특권층 중심의 경제정책이 우선순위에 놓이면서 사람을 살리는 고용과 복지는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 결과 개인과 가정이 붕괴되었고, 공동체와 사회는 파괴되었다. 미래가 불안한 젊은이들은 결혼을 포기하고 출산을 포기한다. 저출산 현상이 지속되면서 인구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인구기반의 붕괴는 노동력과 소비자의 축소를 의미하고, 이는 곧 경제기반의 붕괴를 의미한다. 

그래서 경제우선주의, 성장제일주의는 사람과 사회만 파괴한 것이 아니라, 경제와 성장잠재력까지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경제가 사회를 압도하고, 시장이 사람 위에 군림하면서 소비심리와 투자심리가 위축되었다. 삶의 여유가 없어지자, 창조적 도전이 멈추었다. 약탈적 행태에 익숙한 재벌·대기업은 혁신에 나서기보다는 중소기업을 더 쥐어짜는 데 열중했다. 그리하여 약탈경제로의 퇴화가 시작되었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도산 위기에 내몰렸고, 시장은 위축되었다. 장기 저성장은 더 이상 우려가 아니라 현실이 되어 버렸다. 박정희 시대의 유산이 계속되는 한, 대한민국은 파국의 종착점을 향해 달리는 폭주기관차가 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파국을 피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박정희 시대와 과감히 결별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는 것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사람과 사회 우선"이 되어야 한다. 시장과 경제를 우선하여 사람과 사회를 죽이는 길에서 벗어나서, 먼저 사람과 사회를 살리고 경제까지 살리는 길을 택하자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고 싶은 나라 조사에서 언제나 상위권에 이름을 올려놓는 북유럽국가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이것을 깨달았던 모양이다.

이 국가들은 시장과 사람, 경제와 사회를 분리하지 않는다.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결국 사람이고 경제를 구성하는 원리가 사회를 구성하는 원리와 다르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사람과 사회가 있어야 제품도 만들고 소비행위도 이루어진다. 사람과 사회가 안정되어야 제품의 질도 좋아지고 경제적 교환도 풍부해진다. 슘페터가 말한 창조적 파괴는 진공상태에서 되는 게 아니다. 고용이 안정되고 생활이 안정되어야 창조적 도전이 가능하다. 시장이 요구하는 기능적 지식에 매몰되지 않고 자유롭게 상상하며 자기 꿈을 펼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은 이 모든 것의 결과이지 결코 그 선행 변수가 될 수 없다. 

이 국가들을 움직이는 핵심 원리를 꼽자면 포용성과 혁신성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인 삶의 조건을 향유할 수 있도록 사회보장을 확대하는 것이 포용성의 원리이고, 창의적 학습사회를 만들어 각자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혁신성의 원리이다. 이 국가들은 이 두 가지 원리를 정교하게 결합한 사회경제 통합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또 하나 더 있다. 신뢰를 바탕으로 다양한 형태의 정치적·사회적 대화와 타협의 프로세스를 제도화하여 이 복잡한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우리나라는 북유럽국가들과 여러 조건이 다르다. 흔히 사회적 시장경제모델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모델을 작동시키는 기본원리, 즉 포용성과 혁신성을 바탕으로 우리만의 변종, 혼종, 신종 모델을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두 원리를 따서 우리만의 시스템을 '혁신적 포용국가'라고 불러도 괜찮을 듯싶다.  

혁신적 포용국가는 사람과 사회를 살리고 혁신을 촉진하여, 시장·투자·고용·이윤을 확대하고 경제를 살리는 국가다. 경제가 살아나면 사람과 사회에 대한 투자가 증가하여 국민의 삶이 더욱 개선되고, 함께 살 수 있는 공생의 기반이 만들어질 것이다. 

장미 대선을 코앞에 두고 후보마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하면서 수많은 정책공약을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정작 나라다운 나라의 청사진은 잘 보이지 않는다. 좋은 정책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거대한 청사진과 확고한 국정철학이 없다면, 그 정책들도 결국은 박정희 시대의의 질긴 관성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대선 때마다 국민의 환심을 샀던 화려한 공약들이 집권 후 어떻게 사장되었는지를 우리 국민들은 똑똑히 보아 왔다.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설계도 위에 좋은 정책들을 올려놓아야만 과거 정부의 실패를 피할 수 있다. 

미국 41대 국무장관을 지냈던 윌리엄 브라이언의 유명한 '금의 십자가' 연설에 나온 한 대목을 곱씹어볼만한 시점이다. "정부에 대한 두 가지 관념이 있다. 부자들이 잘 살도록 제도를 만들면 그들의 번영이 하층민에게 흘러내릴 것이라는 믿음이 그 하나다. 민주당의 믿음은 그 반대편에 있다. 대중이 잘 살 수 있도록 제도를 만들면, 그들의 번영이 위로 차올라 모든 계층에 흘러갈 것이라는 믿음이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사회경제적 약자를 위한 제도가 만들어져야 모두를 위한 국가가 된다는 것이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어느 한 정치인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우리는 '모두를 위한 국가, 약자를 위한 포용'을 꿈꾼다. 그것이 박정희 시대를 뛰어넘어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해 우리들을 이끌어줄 강력한 포용국가의 비전이다.

▲성경륭 참여정부 정책실장, 한림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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