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조류독감' 사태로 되돌아보는 우리의 삶과 문명
일취월장7
2017. 4. 22. 12:22
미래의 어느 날 소무덤, 닭무덤, 돼지무덤, 오리무덤들…
[귀농통문] '조류독감' 사태로 되돌아보는 우리의 삶과 문명
2017.04.22 12:02:02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현실과 해결해야 할 과제를 대변하는 말 중에 AI(조류독감(Avian influenza) 또는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라는 용어만큼 상징적인 것이 있을까? 사람들이 조류독감을 두려워하는 것은 조류 자체의 감염도 문제이지만 조류독감의 바이러스가 변형, 진화하여 종(種) 간의 장벽을 뚫고 인간에게 전염될 수 있다는 데 있다. 한편, 인공지능의 거듭된 진화는 인간의 두뇌(의식)를 능가하는 기계 출현의 가능성이 상상에서 현실로 다가왔음을 실감하게 하는 일대 사건이다.
수백만 년 동안 야생에서 동식물을 숙주로 기거하며 인류와 공존해왔던 세균이 인간이 행한 개발 문명을 기화로 대규모 인명을 앗아갈지 모르는 잠재적 살해자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최첨단 기술의 총화인 인공지능은 자연계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영장(靈長)으로서의 위치마저 위협하고 있다. 가장 작은 원시적 생명체인 바이러스와 자신이 만든 최첨단 기술인 인공지능으로부터 각각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례 모두 인간 사회의 변화와 밀접하다는 점에서 '현대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추구하는 무한 질주의 자본주의 문명이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더 지탱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재앙을 낳는 문명의 역설
우리는 몇 년 간격으로, 이제는 거의 해마다, 반복되는 '조류독감'과 '구제역' 사태로 가금류를 비롯하여 소, 돼지와 같은 가축 수백, 수천 만의 생명을 산 채로 매장하고 있다. 인간에겐 방재(防災)가 되었는지 몰라도 진정 동물에겐 끔찍한 재앙(災殃)이다. 먼 미래의 어느 날 소무덤, 닭무덤, 돼지무덤, 오리무덤들…. 그리고 꼬리 자르기, 부리 자르기, 뿔 자르기의 흔적과 함께 야만적인 사육 공간과 사육 도구들이 발굴된다면 미래인들은 오늘의 시대를 뭐라고 규정할까? 현시대를 풍요롭고 성숙한 문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잔혹성과 야만성이 극에 달했던 시대로 볼 것인가?
지구가 생성되기 시작한 게 45억 년 전이고 인간이라는 종은 불과 몇백만 년 전에 출현하였다. 역사 과학의 발달로 밝혀진 인간 진화와 사회 진보의 과정에 따르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의식이 진화함으로써 지구공동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현대문명은 18세기 말 이후 과학에 기반을 둔 산업혁명이 불러온 결과이다. 인류는 지구에서 인류 자신 이외에 더 이상 인류를 위협하는 적은 사라졌다고 자부해 왔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천하 만물은 욕망을 실현하는 진보의 도구요 수단으로 전락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철저한 자기소외에 빠졌다. 인류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자연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인류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는 체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누천년 동안 축적된 생활문화 구조와 일상적 삶에 격변을 일으켰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농사 중심의 마을 문명이 산업 중심의 도시 문명과 오직 이윤 추구를 위한 농산업으로 대체되었다.
일상의 삶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분야는 식문화이다. 우리의 먹을거리는 이제 전 지구적 범위에서 조달되며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단지 투입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생산된 것이지 인간의 건강과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농산물의 기업적 생산방식과 더불어 대량 생산체제는 생태계의 유기적인 관계망을 파괴하고 황폐화시켰다. 기계화, 공장화의 목표는 생명의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의 포만과 혀끝의 감미로움에 맞추어져 있다.
농림수산축산부 통계를 보면, 한국인은 1980년에 1인당 연간 11.3킬로그램(kg)의 고기를 소비했으나, 2014년에는 51.4kg으로 거의 4배 이상 늘었다. 쌀을 비롯한 곡물 소비량의 감소분을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과잉 폭식하고 있는 셈이다. 학교 급식 식단을 보면, 하루도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육식의 비약적 증가는 현대식 공장 축산의 직접적 원인이자 그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식량문제, 환경문제, 인간의 건강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밀식 사육에 따른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과 변형 바이러스의 인체 감염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을 낳는다. 공장식 축산에 대한 청산과 그 대안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동물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대가로 영양분을 채워갈 것이다.

자연과 공진화하는 인류
두 번째 우리가 성찰해야 할 문제는 생명에 대한 시선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 개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귀한 생명체인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현대문명을 떠받치는 철학 역시 모든 물질과 생명체에 대한 인간 우위 또는 인간 중심의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몸 자체가 다양한 생명체(미생물)의 유기적 통합체이자 온 우주의 도움과 다른 생명체들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전일적 존재이다. 어떤 생명체도 인간보다 하위 혹은 주변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바이러스는 원시 생명체의 시원이자 지금도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생명의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존재다. 바이러스는 모든 생명체의 진화에 관여하였으며, 지금도 모든 생명체 내에서 적응을 하며 생존하고 있다. 바이러스는 잘 죽지 않는다. 무한 분열 증식하거나 변형될 뿐이다. 작금의 '조류독감' 사태를 보노라면,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첨단 과학의 시대에 이 세계의 주인이 진짜 누구인지를 시위하는 듯하다. 인간은 미생물계의 생태에 적응하는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활동일 뿐이다. 비록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바이러스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화 역사에서 원시 생명인 바이러스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들이 지구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융합하고 적응하면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했다는 것이 과학이 밝혀낸 바이다. 인간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고등 생명체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두뇌 역시 세포로 이루진 것이다. 진화의 원천인 바이러스 자신이 진화한 고등 생명체와 내부 공생한다.
이렇듯 인간은 수많은 생명체들과 공생하는 존재이다. 우리 몸의 세포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가 바이러스와 바이러스의 결합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우리의 손톱 밑이나 피부에 기생하는 다양한 균들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우리 몸 안에도 대장균과 같은 수조 개의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다. 소화관에 사는 균이 없다면 비타민 B나 K를 합성할 수 없다. 인간만 그러한 게 아니라 다른 동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인간은 다른 고등 생명체와 '외부 공생'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소, 닭, 돼지 등 가축들과 가장 가까운 공생을 해왔으며 다른 생명체들 역시 인간과 공진화해 왔다.
다만 그들은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 낸 낯선 환경 속에서 존재의 지속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를 찾고 새로운 바이러스 생태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거듭 분열∙변형시켜나간다. 그리고 빠르게 진화한다. 일정한 적응 과정을 통해 환경에 최적화된 뒤에 공생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예방 접종도 인간이 바이러스와 공생하려는 능동적 적응 행위이다. 이것이 인간 중심적 시선을 넘어 우주적 시선으로, 생명공동체적 시선으로 확장되어야 할 자연의 당위적 요청이자 과학적 근거이다. 시선의 확장은 새로운 문명을 잉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만물의 영장'에게 주어진 과제
흔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혹자는 이 말 자체가 '인간을 특권화하는 철학'의 표현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만물보다 우월한 인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영장'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진화적 존재'이자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 지금의 문명을 넘어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과 신령한 존재로의 전환을 잉태하고 있다. '영장'은 '신령스러운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인간에게는 우주 137억 년, 지구 45억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으며 현재도 우주의 한가운데에서 우주 운행의 원리에 따라 살아간다. 인간이 '우주적 존재'로서 진화해온 영장임은 다른 천지 만물도 신령스러운 존재임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과 더불어 사는 과제와 함께 진화적 성숙의 과제를 떠안은 존재인 것이다.
근대 물질문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 대 자연의 이원론적 철학을 넘어서 일원론적인 인식론으로 전환해야 하고, 경쟁과 투쟁의 문명을 공생과 협동의 문명으로 대체해야 한다. 근대 철학은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을 대상화시키고 인간의 욕망과 이해의 수단으로 복속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찍이 인간이 누려보지 못한 과학의 발달과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한정된 자연 자원(우주 역사 과정에서 생긴 물질자원과 농축된 태양에너지(화석연료))에 대한 수탈과 인류의 오랜 사회문화적 진화의 자산인 공동체 문명의 파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제 현대문명은 지속가능성을 위협받고 있으며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요청받고 있다. 과학은 공생의 자리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은 인간이 신령스러움을 회복하고 공생의 농업과 마을공동체에 바탕을 둔 생명공동체 사회를 지향할 때(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가지런히 하는 새로운 삶의 사람이 등장할 때) 근대의 모순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이다.
수백만 년 동안 야생에서 동식물을 숙주로 기거하며 인류와 공존해왔던 세균이 인간이 행한 개발 문명을 기화로 대규모 인명을 앗아갈지 모르는 잠재적 살해자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최첨단 기술의 총화인 인공지능은 자연계에서 인류가 차지하는 영장(靈長)으로서의 위치마저 위협하고 있다. 가장 작은 원시적 생명체인 바이러스와 자신이 만든 최첨단 기술인 인공지능으로부터 각각 위협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례 모두 인간 사회의 변화와 밀접하다는 점에서 '현대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이 추구하는 무한 질주의 자본주의 문명이 어디까지 왔는지 얼마나 더 지탱할 수 있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재앙을 낳는 문명의 역설
우리는 몇 년 간격으로, 이제는 거의 해마다, 반복되는 '조류독감'과 '구제역' 사태로 가금류를 비롯하여 소, 돼지와 같은 가축 수백, 수천 만의 생명을 산 채로 매장하고 있다. 인간에겐 방재(防災)가 되었는지 몰라도 진정 동물에겐 끔찍한 재앙(災殃)이다. 먼 미래의 어느 날 소무덤, 닭무덤, 돼지무덤, 오리무덤들…. 그리고 꼬리 자르기, 부리 자르기, 뿔 자르기의 흔적과 함께 야만적인 사육 공간과 사육 도구들이 발굴된다면 미래인들은 오늘의 시대를 뭐라고 규정할까? 현시대를 풍요롭고 성숙한 문명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잔혹성과 야만성이 극에 달했던 시대로 볼 것인가?
지구가 생성되기 시작한 게 45억 년 전이고 인간이라는 종은 불과 몇백만 년 전에 출현하였다. 역사 과학의 발달로 밝혀진 인간 진화와 사회 진보의 과정에 따르면 인간은 도구를 사용하고, 의식이 진화함으로써 지구공동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현대문명은 18세기 말 이후 과학에 기반을 둔 산업혁명이 불러온 결과이다. 인류는 지구에서 인류 자신 이외에 더 이상 인류를 위협하는 적은 사라졌다고 자부해 왔다.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의해 천하 만물은 욕망을 실현하는 진보의 도구요 수단으로 전락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연을 대상화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철저한 자기소외에 빠졌다. 인류가 누리는 물질적 풍요는 자연의 모든 것을 상품화하고 인류의 목적에 맞게 통제하는 체제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것은 누천년 동안 축적된 생활문화 구조와 일상적 삶에 격변을 일으켰다.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농사 중심의 마을 문명이 산업 중심의 도시 문명과 오직 이윤 추구를 위한 농산업으로 대체되었다.
일상의 삶 중에서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분야는 식문화이다. 우리의 먹을거리는 이제 전 지구적 범위에서 조달되며 그것이 어떻게 생산되는지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다. 확실한 것은 그것이 단지 투입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생산된 것이지 인간의 건강과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농산물의 기업적 생산방식과 더불어 대량 생산체제는 생태계의 유기적인 관계망을 파괴하고 황폐화시켰다. 기계화, 공장화의 목표는 생명의 지속가능성이 아니라 인간의 포만과 혀끝의 감미로움에 맞추어져 있다.
농림수산축산부 통계를 보면, 한국인은 1980년에 1인당 연간 11.3킬로그램(kg)의 고기를 소비했으나, 2014년에는 51.4kg으로 거의 4배 이상 늘었다. 쌀을 비롯한 곡물 소비량의 감소분을대체하는 수준을 넘어 과잉 폭식하고 있는 셈이다. 학교 급식 식단을 보면, 하루도 고기가 빠지지 않는다. 육식의 비약적 증가는 현대식 공장 축산의 직접적 원인이자 그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다시 식량문제, 환경문제, 인간의 건강문제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밀식 사육에 따른 바이러스의 집단 감염과 변형 바이러스의 인체 감염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위험'을 낳는다. 공장식 축산에 대한 청산과 그 대안이 없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수많은 동물의 고통스러운 죽음을 대가로 영양분을 채워갈 것이다.

ⓒ연합뉴스
자연과 공진화하는 인류
두 번째 우리가 성찰해야 할 문제는 생명에 대한 시선이다. 우리는 흔히 인간 개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귀한 생명체인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현대문명을 떠받치는 철학 역시 모든 물질과 생명체에 대한 인간 우위 또는 인간 중심의 사유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그의 몸 자체가 다양한 생명체(미생물)의 유기적 통합체이자 온 우주의 도움과 다른 생명체들 없이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는 전일적 존재이다. 어떤 생명체도 인간보다 하위 혹은 주변적 존재라고 할 수 없다.
바이러스는 원시 생명체의 시원이자 지금도 살아 있는 가장 오래된 생명의 '살아있는 화석'과 같은 존재다. 바이러스는 모든 생명체의 진화에 관여하였으며, 지금도 모든 생명체 내에서 적응을 하며 생존하고 있다. 바이러스는 잘 죽지 않는다. 무한 분열 증식하거나 변형될 뿐이다. 작금의 '조류독감' 사태를 보노라면, 우주선을 쏘아 올리고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을 만들어내는 첨단 과학의 시대에 이 세계의 주인이 진짜 누구인지를 시위하는 듯하다. 인간은 미생물계의 생태에 적응하는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바이러스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생존을 위한 자연스러운 활동일 뿐이다. 비록 살고자 하는 열망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변모시킬지 바이러스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진화 역사에서 원시 생명인 바이러스가 지구를 지배하고 있었고, 이들이 지구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 융합하고 적응하면서 다세포 생명체로 진화했다는 것이 과학이 밝혀낸 바이다. 인간은 10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진 고등 생명체이고,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두뇌 역시 세포로 이루진 것이다. 진화의 원천인 바이러스 자신이 진화한 고등 생명체와 내부 공생한다.
이렇듯 인간은 수많은 생명체들과 공생하는 존재이다. 우리 몸의 세포에 들어 있는 미토콘드리아가 바이러스와 바이러스의 결합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우리의 손톱 밑이나 피부에 기생하는 다양한 균들과 바이러스뿐만 아니라, 우리 몸 안에도 대장균과 같은 수조 개의 생명들이 함께 살고 있다. 소화관에 사는 균이 없다면 비타민 B나 K를 합성할 수 없다. 인간만 그러한 게 아니라 다른 동식물들도 마찬가지이다. 당연히 인간은 다른 고등 생명체와 '외부 공생'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소, 닭, 돼지 등 가축들과 가장 가까운 공생을 해왔으며 다른 생명체들 역시 인간과 공진화해 왔다.
다만 그들은 인간이 새롭게 만들어 낸 낯선 환경 속에서 존재의 지속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새로운 숙주를 찾고 새로운 바이러스 생태계를 형성하면서 그 속에서 자신을 거듭 분열∙변형시켜나간다. 그리고 빠르게 진화한다. 일정한 적응 과정을 통해 환경에 최적화된 뒤에 공생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예방 접종도 인간이 바이러스와 공생하려는 능동적 적응 행위이다. 이것이 인간 중심적 시선을 넘어 우주적 시선으로, 생명공동체적 시선으로 확장되어야 할 자연의 당위적 요청이자 과학적 근거이다. 시선의 확장은 새로운 문명을 잉태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만물의 영장'에게 주어진 과제
흔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혹자는 이 말 자체가 '인간을 특권화하는 철학'의 표현이라 비판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는 '만물보다 우월한 인간'에 초점을 두기보다는 '영장'의 의미를 좀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인간이 '진화적 존재'이자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나아가 지금의 문명을 넘어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과 신령한 존재로의 전환을 잉태하고 있다. '영장'은 '신령스러운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인간에게는 우주 137억 년, 지구 45억 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으며 현재도 우주의 한가운데에서 우주 운행의 원리에 따라 살아간다. 인간이 '우주적 존재'로서 진화해온 영장임은 다른 천지 만물도 신령스러운 존재임을 의미한다. 결국 인간은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만물과 더불어 사는 과제와 함께 진화적 성숙의 과제를 떠안은 존재인 것이다.
근대 물질문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 대 자연의 이원론적 철학을 넘어서 일원론적인 인식론으로 전환해야 하고, 경쟁과 투쟁의 문명을 공생과 협동의 문명으로 대체해야 한다. 근대 철학은 인간 이외의 모든 것들을 대상화시키고 인간의 욕망과 이해의 수단으로 복속시켰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찍이 인간이 누려보지 못한 과학의 발달과 물질적 풍요를 경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물질적 풍요는 한정된 자연 자원(우주 역사 과정에서 생긴 물질자원과 농축된 태양에너지(화석연료))에 대한 수탈과 인류의 오랜 사회문화적 진화의 자산인 공동체 문명의 파괴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제 현대문명은 지속가능성을 위협받고 있으며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요청받고 있다. 과학은 공생의 자리에서 통제되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은 인간이 신령스러움을 회복하고 공생의 농업과 마을공동체에 바탕을 둔 생명공동체 사회를 지향할 때(자연과 조화하는 삶을 가지런히 하는 새로운 삶의 사람이 등장할 때) 근대의 모순을 넘어 설 수 있을 것이다.
학살의 동물, 호모 카에데스
[귀농통문] "지금 당장 살처분을 중단하라"
2017.04.22 12:01:29
누가 인간을 '이성의 동물'이라고 말했던가? 인간이 지금까지 지구 생태계와 인간 세상에 저지른 만행을 생각하면 학살이야말로, 인간을 다른 생물종과 구별 짓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 아닌가 싶다. 이성은 그러므로 학살을 효과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아니라면 학살의 순간에 이성이 잠시 마비되었던지. 괴롭지만 인간이 저지른 학살의 역사를 대충 훑어보자.
지구 생물종의 3분의 1 이상이 살고 있는 열대우림은 지난 50년 사이에 그 면적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의 '카네기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기후 이상 현상과 더불어 금세기 내에 열대우림은 거의 파괴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실 인간의 학살 행위가 가장 심하게 행해진 곳은 동물계가 아니라 식물계이다.
콜럼버스가 인도에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처음 발견한 섬이 지금의 아이티이다. 그는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섬을 보고 그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온 백인들은 처음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원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백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거의 전부가 몰살되고 만다. 백인들은 그곳의 산림을 베어내고 거대한 설탕 농장을 경영하면서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오기 시작한다. 당시 카리브해 도서 지역에 있는 약 100만 명의 흑인 노예 가운데 절반이 아이티에 있었다고 하니, 이 섬의 설탕 농장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아이티는 독립 후에도 이러한 사회경제 구조를 유지하면서 산림을 파괴한 결과 오늘날 겨우 국토의 1%만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아이티야말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학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비극의 땅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백인들은 아이티의 비극을 전 세계에 수출하여 지난 500년 동안 지구생태계를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산림을 포함한 다양한 지표 식물들은 지구 생태계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군이지만, 인간은 대규모 단작농(monoculture)과 약탈 농업을 통해 지구 표면의 식생을 거의 다 파괴해버렸다. 오죽하면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라는 말이 생겼을까. 산림을 파괴해 농경지로 만드는 것도 문제인데 그 농경지마저 매년 600만 헥타르(ha) 정도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을 건설한 유럽계 백인들은 서부 개척사를 위대한 국가 건설의 역사로 알고 있지만, 그 실상은 끔찍한 인종 학살과 토착 동물의 멸종으로 점철되어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북미 평원에는 약 6000만 마리의 들소(버펄로)가 노닐고 있었으나, 백인들의 학살에 의해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겨우 수백 마리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보호 정책에 의해 약 3만 마리 정도가 유지되고 있다.
버펄로는 인간이 직접 사냥에 나서서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이 파괴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멸종하고 말았다. 하버드대학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 생물의 멸종 속도는 매년 100만 종 가운데 한 종 정도였으나, 지금은 대체로 그 1000배에 가깝다고 추정한다.
사실 다른 생물종의 학살에 비해 인간의 학살은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이 간다. 인간의 학살은 대부분 전쟁 또는 전쟁에 버금가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서로 죽고 죽이는 일로 가득 차 있다. 근대 이전에 저질러진 가장 끔찍한 학살은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시기에 일어났다. 콜럼버스가 아이티에 첫발을 디딘 이후 500년 동안 신대륙에서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약 1억 명의 원주민이 죽었다.
학살은 직접적인 살육 외에 질병이 큰 역할을 했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구대륙의 병원균에 면역력이 없음을 알아채고 의도적으로 질병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것은 인류가 최장 기간 최대의 인간을 집단 학살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같은 기간에 아프리카에서는 비슷한 의도와 목적에 의해 3000만 명이 죽어갔다.

20세기에 들어와 세계 곳곳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들어서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 투쟁과 인종 갈등이 벌어져 끔찍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이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00만이 죽었다고 한다. 그밖에 터키와 발칸반도, 콩고, 르완다, 수단, 캄보디아,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베트남, 시리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집단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를 다 합하면 족히 1000만이 넘는다. 이것은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 통계 밖에 있는 숫자이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와 중국은 독재적 지도자가 사회 개혁을 강제하기 위해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경우이고, 터키와 발칸반도, 아프리카, 일본 등지의 학살은 서로 다른 민족 또는 부족끼리 상대방을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여 학살극을 벌인 것이다.
한국도 이 대열에서 빠지면 대단히 섭섭해할 나라이다. 우리는 유독 험난한 근대사를 겪어오면서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언제라도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멀리는 해방 후 보도연맹 사건에서 시작하여 가까이는 광주학살에 이르기까지 집단학살의 이력이 화려하다. 심지어 우리는 베트남에 가서 다른 민족을 집단 학살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현지인들에게 집단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과연 우리 민족이 생명을 사랑하고 신명을 즐기는 낙천적 민족이 맞나 의문이 들 지경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문턱에서 끔찍한 학살을 주제로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살처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이다. 지난겨울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해 가금류가 3200만 마리 넘게 살처분되고 지금은 구제역으로 인해 대동물인 소의 살처분이 확대되고 있다. 물론 가축을 키운 농장주들은 결코 죽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대부분 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살처분에 동의하고 마는 것은 생명보다 돈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탄핵정국이라 해도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죽어가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는 국민들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학살의 동물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걸까? 세월호 사건을 보면 같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은 분명 살아있는 것 같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은 여전히 먼 이야기인가? 아니 이러다가도 사회가 둘로 나뉘어 싸울 때는 자기들끼리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이지 않는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불교에서는 이를 일컬어 깊은 '무명(無明)'에 싸여있다고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대자연의 질서이니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즉자적인 생존을 넘어 불필요한 살생을 한다. 삐뚤어진 자의식과 욕심, 그리고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생명의 멸종과 환경 파괴가 일어난다. 인간이 학살의 동물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의 소자아를 벗어나 생태계 전체와 연결되는 대자아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소자아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사회구조를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 예컨대 살처분을 요구하는 국제 질서에 당당히 맞서‘생명주권’을 선포하는 배포를 가져야 한다.
지구 생물종의 3분의 1 이상이 살고 있는 열대우림은 지난 50년 사이에 그 면적이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미국의 '카네기연구소'의 보고에 의하면 기후 이상 현상과 더불어 금세기 내에 열대우림은 거의 파괴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사실 인간의 학살 행위가 가장 심하게 행해진 곳은 동물계가 아니라 식물계이다.
콜럼버스가 인도에 가기 위해 대서양을 건너 처음 발견한 섬이 지금의 아이티이다. 그는 울창한 원시림으로 뒤덮인 아름다운 섬을 보고 그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했다. 유럽에서 온 백인들은 처음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원주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에 백인들이 가져온 질병으로 인해 거의 전부가 몰살되고 만다. 백인들은 그곳의 산림을 베어내고 거대한 설탕 농장을 경영하면서 필요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아프리카에서 흑인들을 노예로 데려오기 시작한다. 당시 카리브해 도서 지역에 있는 약 100만 명의 흑인 노예 가운데 절반이 아이티에 있었다고 하니, 이 섬의 설탕 농장이 얼마나 컸을지 상상이 간다.
아이티는 독립 후에도 이러한 사회경제 구조를 유지하면서 산림을 파괴한 결과 오늘날 겨우 국토의 1%만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아이티야말로, 자연과 인간에 대한 학살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비극의 땅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백인들은 아이티의 비극을 전 세계에 수출하여 지난 500년 동안 지구생태계를 학살의 현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산림을 포함한 다양한 지표 식물들은 지구 생태계를 지탱하는 가장 기본적인 생명군이지만, 인간은 대규모 단작농(monoculture)과 약탈 농업을 통해 지구 표면의 식생을 거의 다 파괴해버렸다. 오죽하면 "문명 앞에는 숲이 있고, 문명 뒤에는 사막이 남는다"라는 말이 생겼을까. 산림을 파괴해 농경지로 만드는 것도 문제인데 그 농경지마저 매년 600만 헥타르(ha) 정도가 사막으로 변하고 있다.
미국을 건설한 유럽계 백인들은 서부 개척사를 위대한 국가 건설의 역사로 알고 있지만, 그 실상은 끔찍한 인종 학살과 토착 동물의 멸종으로 점철되어 있다.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북미 평원에는 약 6000만 마리의 들소(버펄로)가 노닐고 있었으나, 백인들의 학살에 의해 100년도 안 되는 사이에 겨우 수백 마리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보호 정책에 의해 약 3만 마리 정도가 유지되고 있다.
버펄로는 인간이 직접 사냥에 나서서 멸종 위기에 처한 것이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인간이 파괴한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멸종하고 말았다. 하버드대학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인간이 나타나기 전까지 생물의 멸종 속도는 매년 100만 종 가운데 한 종 정도였으나, 지금은 대체로 그 1000배에 가깝다고 추정한다.
사실 다른 생물종의 학살에 비해 인간의 학살은 비교조차 되지 않지만, 같은 인간이기 때문에 특별히 주목이 간다. 인간의 학살은 대부분 전쟁 또는 전쟁에 버금가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분쟁의 역사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으리만큼 서로 죽고 죽이는 일로 가득 차 있다. 근대 이전에 저질러진 가장 끔찍한 학살은 유럽의 백인들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는 시기에 일어났다. 콜럼버스가 아이티에 첫발을 디딘 이후 500년 동안 신대륙에서 벌어진 학살극으로 인해 약 1억 명의 원주민이 죽었다.
학살은 직접적인 살육 외에 질병이 큰 역할을 했다. 백인들은 원주민들이 구대륙의 병원균에 면역력이 없음을 알아채고 의도적으로 질병을 퍼트리기도 했다. 이것은 인류가 최장 기간 최대의 인간을 집단 학살한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인간의 본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같은 기간에 아프리카에서는 비슷한 의도와 목적에 의해 3000만 명이 죽어갔다.

ⓒ프레시안
20세기에 들어와 세계 곳곳에서 근대 국민국가가 들어서면서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 투쟁과 인종 갈등이 벌어져 끔찍한 집단학살이 자행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이다. 정확한 수치는 알 수 없지만 대략 600만이 죽었다고 한다. 그밖에 터키와 발칸반도, 콩고, 르완다, 수단, 캄보디아, 인도,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베트남, 시리아, 중국, 일본 등지에서 집단학살을 당한 사람들의 숫자를 다 합하면 족히 1000만이 넘는다. 이것은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 통계 밖에 있는 숫자이다. 예를 들어 캄보디아와 중국은 독재적 지도자가 사회 개혁을 강제하기 위해 자국민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경우이고, 터키와 발칸반도, 아프리카, 일본 등지의 학살은 서로 다른 민족 또는 부족끼리 상대방을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여 학살극을 벌인 것이다.
한국도 이 대열에서 빠지면 대단히 섭섭해할 나라이다. 우리는 유독 험난한 근대사를 겪어오면서 같은 민족끼리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죽고 죽이기를 반복해왔다. 지금도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고, 언제라도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멀리는 해방 후 보도연맹 사건에서 시작하여 가까이는 광주학살에 이르기까지 집단학살의 이력이 화려하다. 심지어 우리는 베트남에 가서 다른 민족을 집단 학살하는가 하면, 일본에서 현지인들에게 집단 학살을 당하기도 했다. 과연 우리 민족이 생명을 사랑하고 신명을 즐기는 낙천적 민족이 맞나 의문이 들 지경이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문턱에서 끔찍한 학살을 주제로 글을 쓰는 이유는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살처분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어서이다. 지난겨울 조류인플루엔자(AI)로 인해 가금류가 3200만 마리 넘게 살처분되고 지금은 구제역으로 인해 대동물인 소의 살처분이 확대되고 있다. 물론 가축을 키운 농장주들은 결코 죽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대부분 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살처분에 동의하고 마는 것은 생명보다 돈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탄핵정국이라 해도 이렇게 많은 동물들이 죽어가는데도 눈 하나 꿈쩍 않는 국민들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인간이 학살의 동물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걸까? 세월호 사건을 보면 같은 인간에 대한 측은지심은 분명 살아있는 것 같지만 인간 이외의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은 여전히 먼 이야기인가? 아니 이러다가도 사회가 둘로 나뉘어 싸울 때는 자기들끼리 무자비한 학살극을 벌이지 않는가? 도대체 무어란 말인가? 불교에서는 이를 일컬어 깊은 '무명(無明)'에 싸여있다고 한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의 목숨을 취하는 것은 대자연의 질서이니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즉자적인 생존을 넘어 불필요한 살생을 한다. 삐뚤어진 자의식과 욕심, 그리고 잘못된 사회구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다른 생명의 멸종과 환경 파괴가 일어난다. 인간이 학살의 동물이라는 오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의 소자아를 벗어나 생태계 전체와 연결되는 대자아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와 함께 소자아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사회구조를 과감하게 혁파해야 한다. 예컨대 살처분을 요구하는 국제 질서에 당당히 맞서‘생명주권’을 선포하는 배포를 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