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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정말로 '친일파의 나라'인가?

일취월장7 2016. 9. 24. 10:03

대한민국은 정말로 '친일파의 나라'인가?

2016.09.21 09:53:27


[강양구의 친북] <친일과 망각>

             
그간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공동 진행한 책 팟캐스트 '독서통'이 지난 5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끝났습니다. 대신, 앞으로는 '강양구의 친북'이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친북은 앞으로 매주 월요일 <시사통> 코너를 전담할 새 콘텐츠 '먼데이 프레시안'의 책 팟캐스트로, 그간 김종배 <시사통> 대표와 독서통을 공동 진행한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가 단독 진행합니다.

친북은 첫 번째 책으로 <친일과 망각>(김용진·박중석·심인보 지음, 다람 펴냄)을 선정했습니다. 

<친일과 망각>은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지난해 광복 70주년을 맞아 특별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정리한 책입니다. <친일과 망각>은 일제 강점기 적극적으로 친일 부역자로 활동한 이들의 후손 1177명을 조사, 이들의 직업과 재산, 학력, 사는 곳 등 전방위적인 정보를 정리한 탐사 보도의 중요한 모범 사례입니다. 

우리는 그간 '친일파는 나쁜 사람'이라는 상식을 큰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영향력이 실제로 지금 한국 사회 어디까지 이어지는지, 이들 후손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지 등 구체적인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친일과 망각>은 끈질긴 조사와 취재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움직인 이들 가운데 적잖은 친일파의 후손이 어떤 혜택을 입고 우리 사회에서 살아왔는지, 그들이 과거사 문제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어떻게 한국 정부가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지난 19일, 친북은 이 책의 대표 저자 심인보 <뉴스타파> 기자와 함께 과거사 청산이 왜 중요한지, 친일파의 후손이 어떤 혜택을 입으며 살아왔는지에 관해 서울 마포구 서교동 <시사통> 스튜디오에서 이야기했습니다. 

▲ 심인보 <뉴스타파> 기자. ⓒ프레시안(최형락)



친일파 후손 명단을 공개해야 하는 이유
 

강양구 : 그간 <프레시안>과 <시사통>이 공동 진행한 독서통이 강양구의 친북으로 새롭게 단장했습니다. 독서통이 시사 이슈 중심으로 책과 인터뷰이를 선정했다면, 친북은 보다 다양한 주제로 독서 공동체와 소통할 예정입니다. 친북이 처음 고른 책은 제목부터 묵직한 <친일과 망각>입니다. 

이 책은 독립 언론 <뉴스타파>가 광복 70주년 특별 기획으로 제작한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자리에 이 책의 대표 저자 세 분 가운데 심인보 기자를 모셨습니다. <친일과 망각> 다큐멘터리 제작뿐만 아니라, 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성매매 보도 등 굵직한 보도를 여럿 하셨죠. 안녕하세요. 

심인보 : 안녕하세요. 

강양구 : 한국방송(KBS)에서 뉴스타파로 옮기셨어요. 

심인보 : 작년(2015년) 2월에 옮겼습니다. 육아 휴직 후 KBS에 복귀해서, 2014년 말에 길환영 사장 퇴진 투쟁을 동료들과 함께 했어요. 이후 3부작 다큐멘터리를 하나 만들고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강양구 : 햇수로는 퇴사하신 지 거의 2년 정도 되셨습니다. 사실 KBS는 많은 사람이 부러워하는 직장이잖아요? 2005년 입사할 때 많이 기쁘셨을 텐데, 어떻습니까? 후회 안 되십니까?

심인보 : 후회는 전혀 안 합니다. 기자로서는, <뉴스타파> 기자로서 일하는 게 훨씬 보람 있습니다. 후회가 있다면, 두고 온 사람들에 관한 미안함이죠.

강양구 : <친일과 망각> 다큐멘터리를 못 보신 청취자도 꽤 되실 겁니다. 어떤 의도로 만들어진 작품입니까? 

심인보 : 작년이 해방 70년이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친일파에 관한 극단적 인식이 있습니다. '친일파가 해방 이후 우리나라 권력 핵심을 쥐고 다 해 먹는다'는 인식이 있는 반면, 이제 다 지나간 옛날 일이라는 생각을 가진 분도 많습니다. 

정확한 실체는 누구도 모르죠. <뉴스타파> 제작진은 바로 이 대목에 집중했습니다. 저희는 친일파의 후손을 찾아서, 그들이 지금은 무엇을 하는지 인구·사회학적으로 분석해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강양구 : 친일파 후손 1177명을 조사하셨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업을 거쳤습니까? 제가 다큐멘터리도 보고 책도 읽었는데, 시쳇말로 '삽질'이라고 해야 하나요? 매우 어려운 작업을 하셨더라고요. 

심인보 : 예. 탐사 보도라는 게 그렇습니다. 최종적으로 나온 결과물을 보면 그럴 듯하지만, 그 과정은 정말 '맨 땅에 헤딩'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뭐가 나올지 모르고 땅을 파는 거죠. 

힘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처음 이 프로젝트를 같이 하자는 제안을 술자리에서 받았는데, 저는 못 하겠다고 했습니다. 해 봤자 유의미한 결과가 안 나올 것 같았거든요.

강양구 : 샘플은 어떻게 뽑으셨습니까? 

심인보 : 여러 원 자료가 있습니다.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자료가 남아 있습니다. 당시 진술 조서 등을 참고로 해 후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 때 친일진상규명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친일재산조사위(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두 위원회가 활동했습니다. 당시 위원회가 친일 행위자의 재산을 국고 환수키로 하니까, 많은 후손이 소송을 제기했어요. 소송 자료를 보면, 그들의 신원 정보가 나오죠. 이런 자료도 모았습니다. 

강양구 : 땅 돌려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신원을 드러냈군요. (웃음) 저는 <뉴스타파>가 이 기획을 한창 취재 중일 때,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조금 걱정되더라고요. 친일파 단죄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자주 제기되는 문제인데, 일종의 연좌제 아니냐는 의견이 있거든요. 이런 반발이 나올까봐 걱정됐습니다. 

책을 보니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아들인 김정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부회장께서도 연좌제 때문에 큰 고초를 겪으셨더라고요. 김상덕 위원장께서 납북되셨다는 이유로요. 그간 한국 현대사에서 연좌제로 인해 고통 받은 분이 많은데, 아무리 좋은 의도를 지녔다고 한들 친일파 후손에게 연좌제를 들이대는 게 옳으냐는 지적이 나올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심인보 : 저희도 다큐멘터리 제작 때 고민한 부분입니다. 제가 처음 이 프로젝트를 안 한다고 한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 때문이고요. 

그런데, 자료를 조사하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우리의 프로그램이 후손을 사법적으로 단죄하자는 게 아닙니다. 그저, 그들이 누구인지를 밝히자는 거였습니다. 그것이 언론으로부터도 보호받아야 할 내밀한 사생활의 영역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오히려 저희의 고민은 후손의 신분을 어느 정도까지 공개할 건가, 이거였어요. 내부적으로 회의를 거쳐 선출직 공직자와 차관급 이상 공무원, 대기업의 오너 일가 정도를 공개했습니다. 실명과 구체적 재산 내역을 공개했죠. 저는 서울대학교 교수 이상의 학계 관계자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강양구 : 저도 그 대목이 약간 아쉽더라고요. 서울대 교수뿐만 아니라, 흔히 '스카이(SKY)'로 말하는 대학의 영향력 있는 교수라면 이름이 공개되는 것 정도는 감수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더군요. 

심인보 : 저희가 독단적으로 이 문제를 결정하자니 부담이 컸습니다. 많은 전문가를 모시고 자문위원회를 몇 차례 거쳐 공개 범위를 결정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보수적으로 접근한 면이 있습니다. 

▲ 우리는 친일파가 남긴 상처를 진지하게 돌아보지 않았다. 퇴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찍은 것으로 보이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맨 왼쪽)과 친일파 고관들. 해쓱해진 이완용 옆으로 임선준(任善準), 이병무(李秉武), 송병준(宋秉畯)이 나란히 앉아 있다. ⓒ프레시안 자료 사진


친일 비판, 누구도 고민하지 않았다? 

강양구 : 네. 그런 노력 덕분에 균형을 잘 잡았다고 보시는 분도 많으실 거예요.

이 아이템을 접하고서 들었던 걱정이 하나 더 있어요. <뉴스타파>가 너무 쉬운 길 가려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했어요. 

적어도 한국 사회에서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 치고 대놓고 친일파를 옹호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아이템은 대중에게 환영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저는 <뉴스타파>가 공론장에 화두를 던지는, 논란이 불가피한 아이템이 아니라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아이템을 선택한 것 아닌가, 의심했죠.

물론 이 생각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또 책을 읽고서 바꿨습니다. 제가 너무 짧게 생각했더라고요. 듣자 하니 내부에서도 이런 걱정을 했다면서요? 

심인보 : 네. 친일 문제는 누구나 비판하고 반대하죠. 그런데, 비판하고 반대하려면 그 대상의 실체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막연히 '친일은 잘못'이라고만 하고 넘어가는 이상의 무엇을 한국 사회는 고민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말씀하신 것처럼 쉬운 길일 수 있어요. 그런데, 그 쉬운 길을 여태 누구도 가지 않았거든요.

강양구 : 그런 시도가 번번이 좌절됐죠. 

심인보 : 네. 그렇다고 우리 사회의 지식인이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해 왔느냐?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민족문제연구소와 민족문제연구소 설립의 길을 여신 임종국 선생. 이런 분이 정말 외로운 길을 걸어오셨을 뿐이거든요. 이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친일파에 관해 아는 지식도 정말로 적었을 거예요. 

강양구 : 임종국 선생의 <친일 문학론>(민족문제연구소 펴냄), 그리고 임종국 선생의 후학들이 뜻을 모아 설립한 민족문제연구소가 우리의 친일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죠.

심인보 : 그렇습니다. 친일 문제가 대중적 이슈라고 볼 수 있지만, 그런 면에서 일종의 착시입니다. 전혀 대중적이지 않았습니다. 친일파의 후손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어떤 연구도, 어떤 보도도 여태 없었습니다. 

친일파 후손 "난 자수성가했다" 

강양구 : 이제 책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해보죠.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힘들게 사신다는 이야기가 몇 차례 언론 보도를 통해 대중에게 알려졌습니다. 반면 우리는 친일파 후손은 대부분 잘 먹고 잘 살 거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런데 심 기자께서 여러 차례 말씀하셨듯이, 정확한 상황은 잘 모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친일파 후손이 잘 삽니까? 

심인보 : 맞습니다. 왜곡된 역사의 수혜자인 것 같아요. 당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실지 모르겠지만요. 

강양구 : 책을 보다 흥미로웠던 대목이 있습니다. 실제로 취재해 보니, 친일파 후손의 상당수가 잘 먹고 잘 사는 게 맞는데, 정작 후손 대부분은 조상 덕이 아니라고 답변했다면서요.

심인보 : 네. 저희가 이 취재를 진행하면서 후손에게 메일을 많이 보냈습니다. 공통 질문의 하나가 '당신의 현재 사회적 성취에 친일한 조상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미쳤다고 생각하느냐'는 거였습니다. 0점에서 100점 사이 점수 척도로 대답을 요청했는데, 대부분이 0점이었어요. 전혀 도움 받지 않았다는 거죠. 

가장 높은 점수를 준 분이 30점을 매겼습니다. 이 분도 설명을 보면, 물질적 도움은 없었으나 학구열이 높은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분이 누구냐면, 진성호 전 국회의원입니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이시죠. 

강양구 : 이 대목이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는 하나의 힌트가 될 것 같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학력 자본이 가진 힘이 엄청나잖아요. 이런 학력 자본을 쌓는 걸 가능케 한 집안 분위기와 물질적 여유야말로 친일파 후손이 한국 사회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중요한 토대가 아니었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심인보 : 그렇죠. 이인호 KBS 이사장이 대표적 인물이죠. 이 분이 이명세라는 친일파의 손녀이십니다. 

이 분이 서울대에 입학하셨어요. 당시 시대상을 보자면, 여자를 대학에 보낸다는 건 보통 집안에서는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이었죠. 이후 이 분은 한국전쟁 직후에 유학을 떠나셨습니다. 미국 보스턴의 명문 여자 대학인 웰즐리 대학교에 입학하셨죠.

강양구 : 힐러리 클린턴이 나온 대학이죠? 

심인보 : 맞습니다. 그 대학의 당시 학비를 지금 통화 가치로 환산하면 1년에 수 억 원에 달합니다. 그 엄혹한 시기에 이런 지원을 받으신 거죠. 과연 이 분이 정말 머리가 뛰어나서 유학까지 갔겠느냐. 물론 공부를 잘 하셨겠죠. 그런데 집안에 책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환경에서 자라셨다고 합니다. 어릴 적부터 한국 사회의 최고급 지식인과 교우하셨겠죠.

당시에는 유학가신 분이 매우 적었어요. 인재가 적었죠. 이 분은 귀국 후 곧바로 고려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셨고, 이후 서울대로 옮기셨습니다. 특히 학문 분야의 경우, 초창기에 유학하신 분이 해당 전공 분야의 대부가 되신 사례가 많습니다. 이렇게 자라신 분께서 "나는 친일파 할아버지로부터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이걸 이해할 수 있을까요?

▲ 이인호 한국방송(KBS) 이사장. ⓒ연합뉴스


친일파 후손 중 의사가 많다? 

강양구 :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사실을 한 가지 알았습니다. 친일파 후손의 직업군을 조사했더니, 의사가 매우 많았다고요? 

심인보 : 네.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물론 기업인(대기업 임원 이상)이 가장 많았어요. 하지만 단일 직군 가운데 의사가 많은 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친일파 후손 가운데 의사 비율이 10%가 넘었습니다. 놀랍죠. 그 이유가 뭘까 고민을 했습니다.

당시 의사는 지금처럼 인기 있는 직업이 아니었어요. 그러니 집안에 어차피 돈은 있으니,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면서도 정치적 부침은 심하지 않은 직업으로 친일파의 후손이 의사의 길을 택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강양구 : 친일파 후손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심인보 : 네. 친일파 일부는 반민특위에 끌려가기도 했죠. 의사와 비슷한 사례로 친일파 후손 가운데 여성의 경우 음대 교수가 많습니다. 예체능계 교수가 많죠.

강양구 :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책에도 나오지만, 친일파 후손인 모 대학교 음대 교수는 피난 중 부산에서 피아노를 사셨다고요.

심인보 : 굉장하죠? 그것도 아버지를 졸라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겁니다. 당시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수 있는 어린아이가 얼마나 됐을까요?

강양구 : 지금도 아버지를 졸라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피아노를 받을 수 있는 아이는 별로 없죠. 집에서 어렸을 때부터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장성할 때까지 피아노를 공부할 수 있었던 사람이 당시 얼마나 됐겠습니까. 당연히 그런 분들이 유학도 가고, 나중에 대학에 자리 잡을 수 있었겠죠. 

그런데도 친일파 후손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한다는 우리의 통념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친일과 망각>의 결론입니다. 

친일 정신은 살아 있다 

심인보 :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파워 엘리트가 정치인, 법조인 그리고 일부 언론인이잖아요. 이런 이들 가운데 친일파의 후손이 많지는 않았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이런 영역에 속한 분 가운데 친일파 후손이 이승만 정부에서 박정희 정부에 이르기까지는 많아요. 하지만 이후로는 점차 줄어듭니다. 

파워 엘리트를 충원하는 방식이 시간이 흐르면서 다양화했고, 경제가 빠르게 성장했다는 점도 염두에 둬야겠죠. 

강양구 : 해방 70년이 됐지만, 여전히 친일파 후손이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리라는 생각은 사실과 다르다는 거군요. 

심인보 : 네. 그런데, 저희가 취재할 때 한홍구 성공회대학교 교수와 임경석 성균관대학교 교수께서 이런 지적을 하셨어요. 친일의 정신, 친일파가 만든 사회 구조가 여전히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거죠. 

강양구 : 저도 인상 깊어서 메모했어요. 책에 소개된 대목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검찰이나 경찰 등 권력 기관에서 친일파가 만든 구조가 어떻게 전수되고 연결되어 지금에 이르렀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한홍구) 

"식민지 시기 외세의 통치에 종속적으로 협력하는 시스템이 형태만 달리한 채 지금까지도 계속 진행되는 지점에 주목해야 한다." (임경석) 

심인보 : 한홍구 교수께서 직접 쓰신 <사법부>(돌베개 펴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보면, 앞서 소개하신 말씀의 자세한 내용이 생생히 드러납니다.

강양구 : 임경석 교수의 지적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최근 사드(THAAD) 정국을 보면서도 새삼 느끼지만, 대한민국의 고위 관료, 보수 정치인, 지식인이 사실은 공공연한 친미파잖아요. 그들이 '국익'이라고 할 때, 그들의 머릿속에 연상되는 국익은 사실 '미국의 이익'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죠. 

심인보 : 약간 추상적으로 들릴 수 있지만, 친일파와 그 후손의 삶은 우리 사회의 지배 엘리트가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에 관한 교재죠. 

강양구 : 만일 국권을 외세에 빼앗기는 시기가 다시 온다면, 과연 지금 지배 엘리트가 과거 친일파의 모습과 다를까 생각해봄직 하네요. 별로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심인보 : 네. 그 시절처럼 의병이나 독립운동하실 분이 많이 나올지도 의문입니다. 너무나 쓰라린 역사적 교훈을 우리가 공유하고 있으니까요. 

친일 청산 제대로 했다면... 

강양구 : <뉴스타파> 제작진이 상당히 많은 친일파 후손과 접촉했는데, 공개 사과하신 분이 딱 세 분이더군요. 문효치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김경근 목사, 홍영표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다들 사연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심인보 : 네. 사실 인터뷰 성사가 쉽지 않았어요. 세 명도 저희 기대보단 많은 숫자였습니다. 아예 안 나오거나, 운 좋으면 한 명 정도를 기대했죠. 

강양구 : 김경근 목사 사연 들으면서 한편으론 애잔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자제들이 "아빠, 우리 친일파 후손이야?"라고 얘기했다고요. (웃음)

심인보 : 김 목사의 경우, 집안 내력을 모르셨어요. 이런 분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강양구 : 그렇겠네요. 아버지가 자녀들 앉혀놓고 "너희 할아버지께서 친일파였다"라고 굳이 얘기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심인보 : 네. 친일 청산이 제대로 되었다면 그런 일은 없었겠죠. 국가가 보수적으로 결정한 친일파가 1006명(친일진상규명위 발표)인데, 이 정도면 정말 거물급만 추린 거죠. 그런데 그 자손이 조상의 내력을 모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사회적 평가와 반성이 제대로 되었다면 알았을 겁니다. 

강양구 : 친일파의 경우, 일정 기간 공민권 박탈 같은 제재가 가해졌어야 마땅했는데요.

심인보 : 그렇죠. 애초 반민특위에는 공민권 박탈 조항이 들어있었습니다. 임시정부 강령에도 공민권 박탈과 재산 몰수 조항이 있었습니다. 

강양구 : 연좌제는 당연히 나쁩니다만, 친일 당사자에 관한 제재가 잘 되었다면 친일 행위로 얻은 상당한 재산이 사회로 환수되었을 테고, 그렇다면 그 후손은 다른 이들과 적어도 공정히 경쟁했겠죠. 

어쨌든 세 분께서 사과하셨는데, 정말 큰 용기를 내신 겁니다. 홍영표 의원은 현역 국회의원이셔서 더 부담이 되셨을 텐데요. 

심인보 : 사실 저희가 제작 당시부터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이가 홍영표 의원이었어요. 정치인이시고, 그 전에도 그런 논란이 있어서 어느 정도는 알려졌거든요.

다행히 기대대로 인터뷰에 응해주셨습니다. 본인께서 느낀 정신적 압박감이 상당히 컸던 것 같더라고요. 카메라 앞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그 점에 관해 홍영표 의원께 제작진이 고마움을 갖고 있습니다. 

강양구 : 나중에 홍영표 의원은 소셜 미디어 계정에 인터뷰 후기도 남기셨죠. (웃음) 친일파 후손 논란이 일어난 분 가운데 대권 후보로도 꼽히는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있죠. 이 분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심인보 : 일단 김무성 전 대표는 친일 문제에 두 가지로 엮였어요. 자기 집안이 친일 논란이 있습니다. 다만 조상께서 친일 행위자 1006명에는 들어가지 않았죠. 친일진상규명위가 친일파를 선정하던 2009년 당시까지는 김무성 씨 부친인 김용주 씨에 관한 자료가 덜 확보되었습니다. 만일 지금 발굴된 자료를 당시 확보했다면, 발표된 친일 행위자 수가 1007명이 됐겠죠. 

강양구 : 그 사실도 <뉴스타파>에서 보도했죠? 

심인보 : 네. 그리고 김무성 전 대표 사돈 집안 역시 친일입니다. 김무성 전 대표는 집안의 친일 내역을 송두리째 부인하시죠. 본인 조상에 관한 나름의 사실을 갖고 있다면, 그럴 수는 있다고 봐요. 그런데 이 분은, 거기서 한발 나가서 친일 청산 노력 자체를 폄훼하시죠. 정치인으로서 공공연히 과거를 벗어야 한다고 주장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김무성 전 대표의 경우, 표현이 조금 그렇습니다만 죄질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친일파 청산 문제에 관해 여러 차례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연합뉴스


여전히 친일 부역자 조사는 필요하다 

강양구 : 이 책 내용에 관한 큰 줄기만 이야기하고 있는데, 정말 집요하고 꼼꼼하게 조사하셨더라고요. 후손들이 어디 사는지 등에 관한 자료도 전부 소개되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끝내신 소감이 어떠십니까? 후련하십니까? 뭔가 찝찝하시기도 할 것 같은데요? 책을 보니 그런 느낌이 들더라고요. 

심인보 :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탐사 보도하는 사람의 로망이 있습니다. 전수 조사죠. 기사를 쓸 때, 아무리 한 줄짜리, 두 줄짜리 기사라손 치더라도 '전수 조사'라는 단어를 집어넣을 수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요. 우리가 다 봤다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그런데 친일 후손 작업의 경우, 전수 조사가 아니에요. 그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전수 조사는 언론으로서는 불가능한 작업이더라고요. 과거 1990년대는 (개인 정보 보호에 대한 인식이 미비해서) 주민등록번호만 알아도 그 사람에 관해 많은 정보를 알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이런 것이 전부 불법이 됐죠. 

선배 얘기를 들어보면, 그 때는 기자가 동사무소만 가면 관련 명부를 그냥 내주던 시절이었다고 합니다. 이번 취재에서 저희가 운 좋게 후손 일부의 주민등록번호를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걸 갖고 저희가 알 수 있는 정보가 더는 없더군요. 관련 도움을 받더라도 불법이죠. 그러니, 일개 언론사에서는 전수 조사를 할 수 없습니다.

덧붙이자면, 저희가 조사한 친일 후손이 아무래도 우리 눈에 잘 띄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제가 앞서 말씀드렸는데,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이니 눈에 잘 띄죠. 그 때문에 전수 조사하지 않아 나올 수 있는 통계적 편향 등에 관해 아쉬운 대목이 있죠.

강양구 : 당연히 성공하지 못한 분, 낙오한 분, 아예 한국 생활을 정리하고 외국으로 가신 분도 많으실 텐데, 이런 분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겠죠.

심인보 : 네. 작업 과정에서 그런 분도 찾았습니다만, 그런데도 충분하지 못했을 거예요.

강양구 : <뉴스타파>의 이번 작업을 기초로, 공적인 기관이 만들어져 관련 작업을 계속 진행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심인보 : 그렇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강양구 : 책을 보니 외국의 과거사 정리 사례를 소개하셨더라고요. 폴란드의 관련 기관이 인상적이었는데, 소개 부탁드립니다. 

심인보 : 민족기억연구소라고 합니다. 해당 내용은 제가 취재하지 않아서 저도 책에 나온 이상은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공공 기관이 중심이 되어서 공적으로 기록과 기억을 계속 확인하는 작업을 한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강양구 : 나치 독일의 점령기 때 부역자의 만행, 가해자의 행적과 피해자 사례 등을 지금까지도 계속 발굴하고 정리하는 작업을 이어가더군요. 이런 작업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면서 공적 기관에서 이어진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런 작업을 사람들이 알아야 비슷한 상황에 닥쳐도 사회가 경각심을 갖게 되지 않겠습니까? 

심인보 : 그렇죠. 나의 이런 짓을 역사가 잊지 않겠지, 이런 생각을 우리 사회가 가져야만 하죠. 

"KBS는 되살아날 것" 

강양구 : 이제 서서히 인터뷰를 마무리해야 할 시간인 듯합니다. 뉴스타파가 저희 <프레시안>으로서는 참 부러운데, 초기부터 든든한 후원 회원이 계셨죠? 지금 한 4만 명 정도 되나요?

심인보 : 4만 명 조금 안 됩니다. 정말 고맙죠. KBS도 수신료를 받는 회사였는데, 제가 거기 있을 당시는 수신료를 내주시는 시청자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뉴스타파>에 와서는 4만 명 후원 회원의 마음이 크게 느껴집니다. 저희가 종종 후원 회원과 행사도 해서, 이때마다 여러분을 뵙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강양구 : 이 대목에서 약간 삐딱한 질문을 하나 드려볼게요. 최승호 PD나 심 기자와 같은 분이 KBS나 MBC를 박차고 나와 독립 언론의 길을 걷는 건 좋은 일입니다만, 그렇다면 KBS나 MBC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거나 KBS와 MBC는 정말 영향력이 큰 언론이고 또 공공의 자산이잖아요? 요즘 언론계에 몸담은 여러분과 이야기를 나누면, 상황이 좋아져 KBS나 MBC가 이른바 ‘정상화’된다 하더라도, 좋은 언론으로 거듭날 내부 동력이 남아있느냐는 데 관해 회의적인 분이 많더라고요.

심인보 :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뉴스타파에 KBS 출신 6명이 있고, MBC 출신으로 최승호 선배가 계십니다. KBS의 경우, 좋은 기자가 지금도 많이 남아있습니다. 이분들이 지금은 취재 일선에서 떠났습니다만, 정치 환경이 개선된다면 이 분들이 분명 제 역할을 하실 겁니다. 

다만 걱정되는 건, 지금 만들어진 구조와 사고방식이 계속 이어져서 그런 분들이 역할을 하는 걸 막는 문제죠. 아무튼 저는 내부에 계신 좋은 분들이 좋은 언론을 만들리라 확신합니다. 

"<친일 문학론>은 뛰어난 탐사 보도 서적" 

강양구 : 저희 친북이 매번 출연자에게 숙제를 드릴 예정입니다. 심 기자에게도 미리 숙제를 드렸죠. 이 책을 집필하면서 가장 자극을 받았거나, 큰 도움을 받은 책 한 권을 골라주십시오. 

심인보 : 단연코 임종국 선생의 <친일 문학론>입니다. 이 책은 단순한 문학 비평이 아닙니다. 매우 뛰어난 탐사 보도 서적입니다. 치열한 기자 정신이 녹아든 책입니다. 한 권씩 사셔서 조금씩이라도 읽어 가신다면, 정말 좋으실 겁니다. 

강양구 : 평소 책을 좋아하나요? 

심인보 : 기자가 되어서 좋은 점 가운데 하나가, 취재를 핑계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거예요.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강양구 :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작가가 있나요? 

심인보 : 제가 SF 소설을 좋아합니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어슐러 K. 르 귄입니다.

강양구 : 르 귄의 작품은 저도 좋아합니다. 르 귄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작품을 쓰는 작가죠. 어린이에게도 즐거움을 주고, 또 어른은 어른대로 생각할 거리를 줍니다. 르 귄의 작품이 많은데, 좋아하는 작품 하나만 꼽는다면요? 

▲ <친일과 망각>(김용진·박중석·심인보 지음, 다람 펴냄). ⓒ다람

심인보 : 저는 어스시 시리즈(황금가지 펴냄)를 좋아하고요. <빼앗긴 자들>(이수현 옮김, 황금가지 펴냄)도 아주 많은 통찰을 담은 책이라서 좋아합니다. 글 자체가 우아하고, 그리는 세계가 아름다워서 읽는 게 즐거운 작가입니다.

강양구 : 요즘 읽으시는 책도 궁금하군요.

심인보 : 제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성매매 보도를 했는데, 이게 <뉴스타파>의 재벌 개혁 시리즈 일부입니다. 저희가 내년까지 재벌 개혁 시리즈를 이어갈 건데, 이 시리즈를 하려고 관련 주제의 책을 많이 찾아 읽고 있어요. 그 가운데 김상봉 전남대학교 교수(철학과)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가 매우 신선했습니다.

재벌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여러 학자가 대부분 경제 성장과 같은 비교적 좁은 지평에서 이야기하시는데, 이 분은 아무래도 철학자이시다보니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십니다. 최근 출퇴근하면서 즐겁게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강 기자는 무슨 책을 읽고 있나요? 

강양구 : 네, 저는 <숨결이 바람 될 때>라는 책이 참 좋았습니다. 미국의 명문대 병원에서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재직 중이던, 저나 심 기자랑 동갑내기 저자가 성공을 코앞에 두고서 폐암 말기 판정을 받습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과 싸우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던 의사가 막상 자기와의 죽음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의 일들이 담담하게 기록된 책입니다.

심 기자님도 또 친북을 듣고 있는 청취자 여러분도 꼭 한 번 읽어보길 권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서 정작 삶이 좀 더 풍요로워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심인보 : 꼭 읽어봐야겠네요. 

강양구 : 제가 한 권 선물할게요. (웃음) 오늘은 <뉴스타파>의 동명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엮은 <친일과 망각>을 두고, 대표 저자 가운데 한 분인 심인보 기자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기사 많이 기대하겠습니다. 또 <프레시안>과 저도 좀 더 분발해서 선의의 경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건국절 수용하면 민족사 정통성 잃어버린다”

대통령과 여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를 지우는 건국절 법제화를 주장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인 이종찬 전 국정원장에게 그 배경과 문제점을 들었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6년 09월 21일 수요일 제470호


김훈 중위 사건부터 조희팔 추적 보도,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 등 굵직한 특종을 여러 차례 터뜨린 탐사 보도 전문기자가 현대사 인물을 만난다. ‘정희상의 인사이드’ 인터뷰는 격주로 게재한다. 독자와 함께 인터뷰이를 만나는 이벤트도 진행할 예정이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81·사진)의 출생지는 중국이다. 1936년 중국 상하이시 장락로 682롱(弄) 7호에서 태어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발상지인 중국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다. 그의 출생지 자체가 굴곡진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을 압축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그의 할아버지다. 우당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여섯 형제와 함께 당시 40만원(현재 가치 600억원 상당)에 달하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우당은 영화 <암살>에도 등장하는, 항일 무장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던 만주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이 전 원장은 광복 이듬해 귀국해 경기중·고교를 거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65년 현직 군인 신분으로 국정원 전신인 중앙정보부(중정) 중앙정보학교 공채 정규과정 1기로 입교했다. 중정에 몸담으며 박정희 정권의 공작 정치 뒤안을 목격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민정당 창당 멤버로 전격 발탁되었다. 제13·14·15대 국회의원 및 집권 민정당 사무총장과 부총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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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이후 김대중 대통령과 손잡고 ‘수평적 정권교체’를 성사시키면서 정치 역정에 대반전을 꾀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초대 국정원장으로 옛 친정에 복귀했다.

국정원장을 마지막으로 2001년 정계를 떠난 이 전 원장은 하와이 동서문화센터와 하버드 대학 한국학연구소에서 수학한 뒤 우당 이회영 선생 기념사업과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에 전념해왔다. 지난해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준비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 전 원장과의 인터뷰를 ‘건국절 논란’과 ‘국정원 개혁’ 주제로 나눠 2회에 걸쳐 연재한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건국 68주년’이라고 언급해 건국절 논란이 불거졌다.


건국절 제정 주장은 우리 헌법 정신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아직도 그 숨은 뜻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감옥에서 돌아가셨다고 써주는 대로 읽고 있는 수준 아닌가. 뉴라이트가 ‘건국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도 ‘건국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대통령은 정부 수립 후 “새로 탄생된 이 민국의 연원은 기미년(1919년)부터 기산한다”라고 천명했다. 1948년 발행된 우리나라 관보 1호에도 ‘대한민국 30년’으로 기재했다. 그런데 뉴라이트 쪽이 그런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자꾸 팔고 있다. 박 대통령이 생각 없이 그걸 받아들여 사달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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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지난 2월15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건국절 관련 토론회에 참석한 이종찬 전 국정원장(왼쪽에서 두 번째).

새누리당은 건국절을 법제화하겠다고 하는데?



1948년에 건국을 했다고 하면 그 전에 나라가 없었다는 얘기가 된다. 당장 독도는 누구 것이 되나. 위안부 문제도 나라가 없었으니까 일본 마음대로 처리할 수도 있다는 것인가. 건국절을 법제화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정상적 역사가 다 깨진다. 정부가 뉴라이트 쪽의 건국절을 수용하면 우리는 민족사의 정통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황교안 국무총리도 지난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고시를 하며 국정교과서에 8월15일 ‘건국’으로 기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 총리가 헌법 정신을 잘 모르고 한 말이다. 그 말은 우리의 정통성을 낮추자는 것이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전문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 독립국가를 재건함’으로 정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은 기미년(1919년)에 세웠고, 이걸 광복 후 정부 수립으로 재건했다는 뜻이다. 제헌헌법을 만든 분들의 생각도 분명했다. 나라는 있었다. 다만 대한제국 왕정이 끊어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초대 내각 이인 법무부 장관의 국회 발언록에도 이렇게 나온다. 제헌 의원들이 “정부 수립 전 우리의 국적은 어딥니까”라고 물으니 이 법무부 장관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국적은 당연히 대한민국이죠. 일제 치하에 정부가 없었다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없었습니까? 나라는 있었습니다”라고 답했다.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자격으로 활동하지 않았나?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기원을 상하이 임정으로 본 견해는 정부 수립 전부터 일관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수립 후 초대 대한민국 집정관 총재직을 맡았다. 한성 임시정부 초기에는 대통령이라는 말을 못 지어서 집정관 총재라고 칭했다. 영어로는 집정관 총재를 ‘The presi-dent of Republic of Korea’로 표기했으니 임정 대통령이다.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1919년에 선출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Elected President)’이라는 명함으로 활동했다. 그는 미국 조야(朝野)에 “미국은 1882년에 체결된 조·미 통상조약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미국이 “을사조약 때문에 외교권이 없지 않으냐”라고 묵살하자 “무슨 소리냐 그건 일본이 강탈해간 거다.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라고 맞섰다. 또 영국 국왕에게까지 “황제 폐하! 이 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올시다”로 시작하는 편지를 보내 독립을 호소했다. 1943년 12월1일 연합국 측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총리, 중화민국의 장제스 군사위원회 위원장이 발표한 카이로 선언에서 독립을 약속한 나라는 인도도 아일랜드도 아닌, 대한민국밖에 없었다. 그래서 1948년 8월15일 정부 수립 기념일에 이 대통령이 “동양의 오랜 국가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되었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나라가 쭉 있었는데 일제가 강탈해간 것을 1948년에 정부 수립으로 회복했다는 것이 이 대통령 생각이었다.

그런데도 뉴라이트는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면서 건국절을 주장하는데?


내가 최근 박진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을 만나 모든 사정을 설명했다. 더 이상 건국절 문제로 이승만 대통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굉장히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이 대통령이 정부 수립 연차를 기미년에서 기산해 ‘대한민국 30년’으로 한 뜻은 통일된 나라를 만들 때를 내다본 거 아니겠나. 기미년에 어디 남북한이 따로 있었는가. 

건국절 제정론자들은 영토·주권·국민 등 국가의 3요소를 갖추지 못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국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뉴라이트 쪽 인사를 만났더니 그런 주장을 하더라. 내가 “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집을 강탈해갔는데, 그럼 원래 그 집과 물건이 도둑의 소유냐 그 집주인의 소유냐”라고 예를 들어 반박했다. 그에 대해 답변을 못하더라.

새누리당이나 박근혜 정부가 건국절을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뉴라이트가 건국일이라고 보는 1948년 8·15 행사 때도 플래카드에 엄연히 ‘대한민국 정부수립 국민 축하식’이라고 나온다. 대한민국 정부 회복을 축하하는 자리이지 건국 축하식이 결코 아니었다는 의미다.

건국절 법제화를 반대하는 쪽 논리의 허점은 없는가?

건국절 반대 논리 역시 대개 임시정부를 왜 무시하느냐는 식으로 불만스럽다는 주장을 펴는 선에서 끝난다. 임시정부가 무시당하면 왜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없는지 그 이유까지 근거를 들고 조목조목 반박해야 한다. 몇몇 뜻있는 인사와 함께 지난해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준비위원회’를 결성했는데 이 위원회를 통해서라도 그 근거 논리를 모으고 제시할 예정이다. 보고서 등 근거 자료가 정말 셀 수도 없이 많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개헌 때 현행 헌법 전문에 ‘임시정부 법통 계승’ 문구를 넣는 데 기여한 것으로 안다.

앞서 말했지만 제헌헌법 전문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이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잇는다는 대목이 들어가 있다. 이것이 유지되다가 5·16 쿠데타 이후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 의거와 5·16 혁명의 이념에 입각’으로 헌법 전문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이 어떻게 탄생했느냐는 부분에 대해 아주 모호하게 바꾼 것이다. 박정희 정권 내내 이렇게 유지되다가 5공화국 헌법 전문에는 4·19와 5·16 부분을 뺀 ‘3·1 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만 남았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학도병 탈출 1호 독립군이었던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이 직접 나를 불렀다. 김 전 총장이 ‘이번 기회에 임정의 법통을 잇는다는 내용을 헌법 전문에 꼭 넣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당시 이강훈 광복회장 등 독립운동 원로들의 조언을 받아 내가 개헌 소위원회 여당(민정당) 간사인 현경대 의원을 찾아가 요구했다. 그렇게 해서 현행 헌법 전문대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이라고 정확하게 들어갔다.

역대 군사정권에서 제헌헌법 전문의 임시정부 대목을 삭제한 배경은 무엇이었다고 보는가?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는 제헌헌법의 정신은 제2공화국 장면 내각까지는 살아 있었다. 5·16 쿠데타 이후 바뀐 배경에는 당시만 해도 암암리에 상하이 임시정부 세력을 배척하려는 친일 세력의 영향이 있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이후 노골적으로 임시정부 법통을 무시하는 건국절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건국절을 막는 일이라면 전국 어디든 가서 강연할 생각이다.



"경제 성장, 박정희의 공은 10%뿐이다"

2016.09.21 07:33:55
[유종성 칼럼] 박정희 신화를 깨기
             
학생 운동, 시민 운동 경력을 뒤로 하고 40대에 만학의 길에 올랐을 때 받은 가장 큰 충격 가운데 하나는 한국 경제와 박정희 찬양론이 서구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었다. 제3세계 여러 나라는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약탈 국가"가 된 반면, 한국은 박정희가 "발전 국가"를 수립했다는 것이다.

물론 박정희의 재벌 중심 산업화 전략이 한국의 급속한 경제 성장에 공헌했다고 해도 이것이 양극화와 정경 유착의 폐해 등 부정적인 효과를 덮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는 좀 더 근본적인 의문 즉, 과거 한국의 경제 성장이 과연 박정희 덕분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러던 가운데 하버드 대학교의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이 한국과 대만(타이완)의 경제 발전 성공 요인을 분석한 논문을 보았다. 그는 초기 조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국가 간 양적 비교 분석을 통해 보여줬다. (☞관련 자료 : Getting Interventions Right: How South Korea and Taiwan Grew Rich) 

로드릭은 소득 불평등 또는 토지 소유 불평등과 교육 수준과 같은 초기 조건이 개발도상국의 장기적인 경제 성장률과 매우 높은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60년을 기준으로 한국과 대만은 개도국 가운데 이례적으로 토지 소유와 소득 분배의 불평등 정도가 낮았고, 당시 소득 수준에 비교해서 볼 때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이 두 초기 조건이 1960년에서 1985년까지 이후 25년간의 경제 성장률을 예측하는 능력이 매우 컸다. 가령, 한국과 대만의 경우는 이 두 초기 조건이 향후의 높은 경제 성장률의 90% 가까이를 설명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박정희의 공로는 고작 10%밖에 안 되는 셈이다. 로드릭의 표현을 빌면, "기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국과 대만 모두에 이러한 초기 조건이 형성된 데에는 농지 개혁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농지 개혁이 지주 계급을 해체시키고 불평등을 완화함으로써 국가가 지배적인 세력으로부터 포획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는 데에는 이미 많은 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존 문헌은 발전 국가 수립에 있어서 박정희의 결정적인 공로를 인정하였다. 국가의 자율성과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있어서 능력주의에 입각한 전문 관료제의 확립이 중요한데, 박정희가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단적인 증거로, 이승만 정권 하에는 엽관제가 횡행하여 가령 중앙 부처 사무관급(현재의 5급) 공무원의 신규 채용 중 대다수가 특채였고 행정 고시를 통해 투명하고 공개적으로 뽑은 인원은 소수에 불과했는데, 박정희 시대에는 행정 고시를 통한 임용 비율이 5배나 늘어나고 특채는 소수로 줄었다는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이승만 시대 엽관주의에 짓눌렸던 관료제를 박정희가 획기적으로 개혁하여 능력주의 관료제를 확립했고, 이것이 발전 국가의 핵심적인 세력이 되었다는 설이 확립된 것이다.

그런데, 여러 문헌에 반복적으로 인용된 이승만과 박정희 시대의 사무관 채용 방식에 대한 비교 통계를 들여다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이승만 시대는 1948년부터 1960년까지 12년간의 평균치이고, 박정희 시대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년간에 대한 평균치였기 때문이다. 이건 공정한 비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승만 시대의 초기와 후기, 박정희 시대의 초기와 후기를 나눠서 보면 어떤 추세가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원자료를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정부(당시 총무처)에서 1977년부터 매년 낸 연감에 각급 공무원 임용 통계가 나와 있어 1977년부터 1979년까지의 자료는 쉽게 구할 수가 있었다. 1948년부터 1960년까지 대해서는 다행히도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은퇴한 안용식 교수가 과거 박사 학위 논문을 쓸 때 관보에 기재된 공무원 임용 자료를 모아 방대한 자료를 구축하였던 것을 알게 되어 안 교수를 직접 만나 이를 건네받았다.

이 자료를 보니 정부 수립 초창기 몇 년간은 공무원 신규 채용 인원이 매우 많았지만 아직 행정 고시 등 공채로 뽑은 인원수는 많지가 않았는데(일제 및 미군정 관료 출신 특채가 대다수였다), 이승만 정부 중후반으로 가면 전체 신규 채용 인원은 급격히 줄어든 반면 고시를 통해 뽑은 인원수는 완만히 상승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또 1964년, 1965년, 1966~73년의 기간에 대해서는 공무원 임용 방식에 대한 비교 통계를 보여주는 2차 자료들을 찾을 수가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무관급 신규 채용 인원 중 행정 고시 채용 비율이 변화한 추세를 정리해보니, 과거 알려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나타났다. 정부 수립 초기(1948~52년) 4.7%에 불과했으나 이승만 정부 중후반(1953~59년)에는 48.3%로 급증했다가, 박정희 정권 초기에는 군 출신 대거 특채로 인해 38.3%(1964년), 35.6%(1965년)로 다소 하락했다가 이후 다시 점진적인 증가 추세를 보여 55.0%(1966~73년), 65.2%(1977~79년), 64.6%(1980~87년), 70.4%(1988~95년)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공무원 시험에는 행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7급과 9급 공채에 해당하는 시험도 중요한데, 이승만 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가장 인원수가 많은 9급에 대해 공채가 시행되지 않은 것이었다. 이것이 엽관제와 정실 인사의 폐해를 낳는 중요한 원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9급 공채를 처음 시작한 것은 4.19 혁명 후 장면 정권이었다.

의무 교육 제도의 도입과 아울러 농지 개혁의 시행이 교육의 급격한 팽창을 가져왔는데, 당시 대학생 숫자가 급격히 늘었지만 졸업 후 일자리가 없어서 대학생의 불만이 고조되고 있었다. 4.19 혁명으로 탄생한 민주 정부는 고학력 청년 실업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규모의 9급 공채 시험을 처음 실시한 것이었다. 이는 능력주의 관료제 확립에 4.19 혁명과 장면 정권이 공헌한 바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국 경제 발전에 박정희의 공헌이 전혀 없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존 문헌들이 박정희의 공로를 지나치게 과장한 것은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관련 자료 : Demystifying the Park Chung-hee Myth: The Critical Role of Land Reform in the Evolution of Korea's Developmental State) 

또 농지 개혁이 지주 계급 해체로 국가 자율성을 제고했을 뿐 아니라 급격한 교육의 확대를 가져와 이것이 4.19 학생 혁명은 물론 능력주의 관료제를 확대, 발전시키는 강한 압력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발전 국가 형성의 초석을 쌓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농지 개혁으로 이룬 평준화의 성과가 사라지고 부와 소득 분배의 양극화가 다시금 심각해지고 있는 오늘날 농지 개혁의 의미를 되새기는 것은 단순한 과거의 회고를 넘어서 현재와 미래에 대해 중요한 정책적 함의를 가진다고 본다. 

(농지 개혁의 성패가 이후 엽관주의와 능력주의 관료제에 미친 영향을 놓고서 한국, 대만, 필리핀의 3개국 사례에 대한 비교 분석과 더 폭넓은 국가 간 양적 비교는 필자가 펴낸 [Democracy, Inequality and Corruption: Korea, Taiwan and the Philippines Compared](Cambridge University Press 펴냄)에서 이뤄졌다. 동아시아 출판사에서 한국어판이 올해 안에 나올 예정이다.)          


김구·김대중·노무현이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
2016.09.21 09:30:11

[이충렬의 정권+교체] 中의 '국공 합작'…한국엔 '국민 합작'이 필요하다

             
우리 현대사를 다시 한번 되씹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김욱 교수가 최근 김대중센터에서 한 강연이 계기가 되었다. 이 강연에서 김욱 교수는 더민주와 국민의 당이 연대할 수 있는 논리적 가능성은 더민주의 대선후보가 친노와 결별하고 '지역주의 양비론'과 '호남불가론'을 부정하면서 반영남패권주의를 표방할 경우라고 주장했다. '호남의 가치와 몫'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부정하는 친노세력은 결코 호남과 연대의 대상이 돼서는 안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새삼 김욱 교수의 주장에 대해 따질 생각은 없다. 단지 영남(구체적으로는 부산경남지역을 일컫는 PK지역)민주화세력과 호남민주화세력의 뿌리깊은 갈등구조의 기원과 역사를 되짚어볼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노무현·문재인이 상징하는 PK민주화세력과 김대중을 정신적 지도자로 하는 호남민주화세력은 지난 10여년째 골육상쟁을 벌이고 있다. 지난 총선에서 더민주가 호남에서 단 3석을 얻는 대참패를 하면서 문재인과 친노에 대한 호남의 비토 정서가 극적으로 표출되었다.

어떻게 하다가 영남과 호남의 민주화세력이 이렇게 빙탄불상용의 관계가 되어 버렸을까? 1980년대만 하더라도 호남과 영남의 민주연대야말로 6월항쟁을 승리로 이끈 최대의 동력이었다. 이 연대는 민주화라는 가치를 매개로 한 가장 강력한 지역연합이었다. 

뭉치면 이기고, 흩어지면 패배한다는 말은 항상 맞는 말이다. 그런데 왜 공동의 적을 마주하고도 서로를 먼저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힐까? 분열하는 상대야말로 가장 상대하기 쉬운 법이고 그로인해 이른바 '기울어진 운동장'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말은 범야권에게는 넘을 수 없는 장벽처럼 다가오는 말이다. 우리 사회의 총체적 역량을 비교할 때 범여권에 비해 범야권이 불리한 조건에 처해있다는 뜻이다.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과 적을 다 잘 알고 싸우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아니하고, 자신은 알되 적을 모르고 싸우면 승패의 확률은 반반이고, 자신도 모르고 상대도 모르면서 싸우면 백전백패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의 중요성을 손자는 위와 같이 표현했다. 상대편의 본질을 폭로하고 분노와 증오심을 키우는 것도 홍보전의 한 방편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과 빈틈을 환히 드러내놓고 공격만 해대서야 이길 수 있겠는가? 

성공한 역사로부터 벤치마킹을 하고 실패한 역사에서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그리하여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 우리의 책임은 없는가?

현대사 100년을 거치면서 범야권은 김구-김대중-노무현을 정통성을 잇는 지도자로 생각하고 있고, 범여권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그들의 지도자라 생각한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관련하여 김구-김대중-노무현의 책임은 없을까? .  

①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최초의 총선거를 앞두고 김구는 47년 12월 22일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총선불참을 선언하였다.  

② 1987년 6월항쟁의 승리 후 김대중은 4자필승론을 내세우며 분당하여 대통령후보에 출마하였다. 

③ 2003년 노무현은 집권하자마자 대북송금 특검에 서명하고 연말에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을 창당하였다.  

우리 정치의 운동장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데 큰 영향을 끼친 3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100년 후의 시각에서 보면 ①번이 가장 큰 요인이고 ②번이 그 다음으로 큰 영향을 미쳤고, ③번은 ②번의 파생사건으로 분류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2017년의 관점에서 보면 ③번이 ①번과 ②번을 압도하여 현재의 정치에 절대적인 규정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 세 가지 대사건이 우리 정치에 끼친 결과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앞두고 실시한 5.10 총선거에 김구와 그의 세력이 불참한 것은 이후 한국 정치에 가공할 후과를 남겼다.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세력이 정치판에서 사실상 완전히 단절되는 재앙이 초래되었다.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한민국은 친일세력이 완전히 장악하여 반공의 캐치프레이즈를 앞세워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극우사회가 되어 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김구세력이 총선에 참여했다면 제1당이 되었으리라고 많은 연구자들이 말하고 있다. 그랬다면 김구와 이승만을 축으로 한국정치가 짜여지면서 친일파에 대한 견제가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김구의 오판은 신생 대한민국의 항로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게 만들었다.   

② 4자필승론에 대한 확신을 바탕으로 김대중은 단일화를 거부하고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만들어 대통령에 출마하였다. 그는 3등으로 낙선했고 전두환과 더불어 12.12 쿠데타를 주도했던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허용하여 군부정권을 5년 더 연장하게 되었다. 

87년 야권분열 또한 한국역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엇나가게 만들었다. 민주화운동을 강고하게 뒷받침했던 호남과 PK의 지역연합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의 32년 집권기간에 뿌리내린 재벌중심의 기득권체제는 난공불락의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분열의 후과로 민주세력은 단독 집권이 불가능해지고 군부세력의 일부와 손잡아야만 정권에 접근할 수 있었다. 3당합당과 DJP연합을 통한 집권이 그것이다. 앙시앙레짐(구체제)이라 할 기득권 시스템을 혁파하는 본질적 개혁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③ 2003년 노무현 세력의 열린우리당 창당은 87년이후 분열되었던  호남과 영남민주화세력의 재통합에 대한 기대를 무산시키고 오히려 양진영의 불신과 적대감을 구조화시키는 패착으로 판명났다.   

열린우리당의 창당을 영남패권주의만으로 보기는 어렵다. 창당주체는 천정배·신기남·정동영 등의 호남신진세력과 유시민으로 대표되는 노무현 대통령 직계세력의 연합이었다. 이들은 주저하는 노무현을 새정치와 전국정당화라는 명분으로 설득하였고, 일단 동참하기로 결정한 노무현 대통령은 창당을 강력 지지하였다.  

그런데 영남패권주의로 볼 수 있는 단서가 분명히 존재한다. 2004년 총선이 열린우리당의 대승으로 끝나자마자 노무현 대통령의 오른팔이던 이광재 의원과 386 의원들이 모여 의정연구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는데 이들은 한나라당에서 영입해온 김혁규 경남도지사를 국무총리로 강력히 밀었다. 그 이유는 그를 노무현 대통령의 후계자로 옹립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서 가치관과 정체성을 묻지 않는 막무가내 영남후보론의 단초를 볼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우리당은 호남의 지지를 점차 잃어버리게 되고 마침내 천정배와 정동영은 창당이 잘못되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과 결별하게 된다. 이후 호남과 친노의 대립은 야권의 최대 아킬레스 건이 되었다. 마침내 지난 총선에서 더민주와 국민의당으로 분리되었다.  

지금 여기서 새삼스럽게 책임과 잘잘못을 따지고 싶은 것이 아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다시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가가 이 글의 주제이다. 김구와 김대중 시대에 있었던 일은 이제 역사의 영역으로 넘어가 있다. 그러나 호남과 영남민주화세력의 분열은 현재 진행형인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해결의 방향을 결정할 여지를 아직도 갖고 있다. 만약 ③번을 잘 해결해낸다면 ①과 ②로 인한 부정적 유산마저 다시 역전시킬 계기를 만들 수도 있다. 역사에서의 대역전극이라고나 할까. 

현대 중국 정치사의 두 사건을 예로 들어 단서로 삼고자 한다. 첫 번째 사례는 1936년 서안사건을 계기로 만들어진 모택동의 중국공산당과 장개석의 국민당, 그들의 '국공합작'이다. 

당시 북벌을 통하여 중국통일을 꿈꾸던 장개석은 중국대륙에 침략해오던 일본보다 공산당 토벌을 우선시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지식인과 민중들은 외적의 침입 앞에서 민족 단결을 통해 항일전을 해야 한다는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마침내 만주군벌 출신의 장학량이 서안을 방문한 장개석을 연금하여 자신의 목숨을 댓가로 '국공합작'이라는 역사를 만들어 내었다. 장개석과 모택동은 10여년이 넘는 내전을 통해 서로를 살육하는 증오의 관계였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 앞에서 이들은 결국 손을 맞잡는 결단을 내렸다.  

두 번째 사례는 등소평이다. 흑묘백묘론을 앞세운 개혁개방노선으로의 대전환이다. 오늘날 중국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패권을 다투는 지위로 올라섰다. 정치적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지도이념으로 하는 중국공산당은 독재국가이면서도,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시장경제로 완전히 탈바꿈을 하게 됐다. 중국공산당은 어떻게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절묘하게 끌고갈 수 있을까? 만약 내부의 권력투쟁 논리에만 매달렸다면 그들은 자파 세력의 헤게모니를 위한 이념투쟁을 앞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주의 초급단계 100년론'이라는 실용적 이론을 만들어, 이런 모순적인 상황을 중국식으로 해결하였다. 

PK민주화세력은 87년의 분열 이후 자신들이 겪어온 비참한 기억에 사로잡혀 있다. 호남민주화세력은 2003년 이후 노무현과 문재인에 대한 배신감에 사로잡혀 있다. 역지사지의 입장이 되어 서로를 이해하고 싶은 생각조차 없다. 누구의 책임을 묻고 단죄하는 방식으로 이 갈등이 해결되겠는가? 국민이 가장 바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큰 틀에서 힘을 합치는 모습, 자파의 헤게모니를 추구하기 보다 윈윈하는 상생의 자세를 보여주는 모습이 중요하다. 

역사에서 비약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 해결해버리는 방식처럼 발상의 전환이 중요할 때가 많다. 과거의 증오와 원한에서 떨쳐일어나 새로운 역사를 만든 사례가 많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사례 하나 더. 1978년 중국과 일본은 2차대전을 공식적으로 매듭짓고 관계정상화를 위한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댜오위다오(일본명 센가쿠열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이 첨예하게 부딪혔다. 이때 등소평이 일본 대표단에게 한 말이다. 

"영유권 주장이 지금 해결될 가능성은 없다. 그렇다면 서로의 주장을 현 상태로 그대로 봉인해두자. 그러다보면 백년 후 쯤 우리 후손들이 더 지혜로운 해결책을 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차이는 그대로 두고 당장 필요한 협력을 해나가자." 

내년 대선에서 해묵은 분열을, 정권교체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야권의 분열과 이전투구를 멋지게 극복할 리더십이 출현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다음 주에는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이 만든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글이 이어질 예정입니다.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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