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의 적들', 죽은 그들의 공통점
'이승만의 적들', 죽은 그들의 공통점
[인터뷰]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펴낸 신기철 소장
사물을 보는 눈과 역사를 보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 시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피해자의 시각이고 둘째는 가해자의 시각이다. 셋째는 '중립'이라는 미명을 쓴 겁쟁이 혹은 방관자의 시각이다. 피해자의 입장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이고 '제주4.3항쟁'이지만 같은 사건을 가해자는 '광주민중반란'과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폭동'으로 표현하고 기록한다.
내가 지난 노무현정부 시절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직장동료'로 만난 신기철은 피해자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역사를 기록한다. 사실 피해자 입장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일은 배고프고 고달프다.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을 하는 국가에서는 가해자 입장을 대변해 주고 가해자 시각으로 역사, 특히 현대사를 기록하는 일은 너무나 쉽고 수월하다. 정부에서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해줄 뿐 아니라 어엿한 '자리'도 보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기철은 이런 '달콤한' 권력의 유혹을 뿌리치고 지난 10여 년간 피해자 입장에서 현대사를 조사, 연구했고 기록했다. 그리고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문을 닫은 후 지금까지 5권의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을 썼다. 대학교수도 5년에 5권의 책을 쓰기가 '하늘의 별따기'라고 하는 요즘 그는 들판에서 5권의 연구서를 쓴 것이다(처음 2권은 거의 '실업자' 상태에서 썼다).
가장 최근에 쓴 책이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이다. 역사 전공자인 기자도 이 책의 원고를 밤을 지새워보면서 많이 배웠고, 많이 느꼈고. 많이 가슴 아팠고, 많이 분노했다.
이 책은 이승만 정권기 억울하게 학살당한 열 분에 관한 담담한 이야기다. 이 분들은 민주주의 혁명가, 숙청 군인, 항일운동가, 상식적인 시민들이었다. 왜 이승만은 이런 훌륭한 분들을 학살했을까? 지금도 계속 이어지는 우리현대사의 비극이고 신비한(?) 수수께끼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저자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 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 신기철 | |
ⓒ 신기철 |
-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를 펴낸 것을 축하드린다. 지난 2010년 12월 31일 진실화해위원회(아래 진실위)가 이명박 정권에 의해 문을 닫은 후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는 막을 내렸다. 그 후 지난 5년여 간 들판에서 과거사정리에 관한 책을 무려 다섯 권이나 썼는데,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이렇게 줄기차게 개인적 차원에서 과거사정리를 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부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까지 고문, 학살, 실종이라는 국가 범죄의 생생한 사례들이 규명되었는데, 정작 진실은 수십 권의 보고서에 묻혀 봉인되어 버린 느낌이다. 실제 옛 조사기록을 다시 보려고 해도 방법이 없다. 지난 과거사 기구들이 진실을 드러내어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파묻었다고나 할까. 다시 끄집어내야하고 기회가 된다면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과거사가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의 과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덮자고 한 일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하자고 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종료는 새로운 출발이어야 하는데...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의 책임 회피, 최근 사드(THAAD) 배치 책임을 국민에게 전가하는 정책을 봐라. 박 정권이 하는 짓을 보면 국민주권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다르다. 패배주의를 극복했다고 할까? 자기 권리를 정확히 주장하고 있다. 돈 몇 푼에 찌그러지지도 않고 지역의 이익도 넘어 서고 있다. 과거사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교훈은 평화와 인권, 민주주의, 국민 주권이 아니겠나? 이를 이해하는 오늘의 시민은 어제의 시민이 아니라고 믿는다. 내 작업이 그 흐름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애국과 반공이란 이름 아래 반인륜 범죄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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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 |
ⓒ 신기철 |
- 책의 부제가 "한국전쟁과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 이야기"인데, '이승만의 거대한 적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왜 이들(희생자나 피해자들)을 '거대한 적들'이라고 표현했는지?
"최근 고양금정굴사건 희생자를 '김일성 앞잡이', '죽창을 들이 댄' 부역자였고 이들을 총살한 행위는 '학살'이 아니라 '처형'이었다는 한 고양시의원이 있었다. 재판 없이 죽인 것은 맞지만 죽을 죄를 지은 것은 사실이라는 발언이었다. 명예훼손 소송이 진행 중이지만 승패를 떠나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1심 재판부는 지난 7월 7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애국이나 반공이란 이름 아래 집단학살이라는 반인륜 범죄를 범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돌아보니 한국전쟁 전후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편견은 여전한 것 같다. 그들은 이 책에 소개한 분들을 남로당원이나 사회주의자라고 보는데 나는 이 말이 타당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검토해 봤다. 결과 어느 판결문도 그 사실이 입증된 경우는 없다.
열 분에 불과하지만 집단을 지어봤더니 민주주의혁명가, 숙청 군인, 항일운동가, 상식적인 시민들로 나눌 수 있었다. 그랬더니 모두 '이승만의 적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승만 정부는 미군정에 의존해 친일파를 등용했고, 군내 비리를 통해 정치자금을 확보했다. 친일경찰과 군인들을 동원에 생존권 투쟁에 나선 노동자 농민들을 학살했고, 국군 수복 후에는 패전의 책임을 점령지역 민중들에게 떠넘겼다. 이에 반대한 사람들이 모두 이승만의 적들이었을 텐데, 결국 일반 국민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하더라는 것이다."
- 이승만과 이승만 사후 박정희를 비롯한 오늘 한국의 수구세력들은 100만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의 억울하고 한 많은 삶과 죽음에 대해서 알면서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하고 오히려 은폐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은 왜 그럴까?
"지난 2002년 '위령사업 촉구결의안'이 고양시의회에서 다루어질 때였다. 결국 부결되고 말았는데, 그때 의회 입구에 이런 내용의 벽보가 붙어 있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국가유공자가 설 자리는 없습니다.' 놀라운 이야기 아닌가? 민간인학살 사실을 인정하면 국가 존립이 흔들린다는 인식이다. 국가범죄에 대한 공범의식인 것이다. 이런 공범의식은 세월호 사건 진상규명에도, 사드 반대 성주 집회에도 나타난다. 진짜 외부인들 말이다.
나는 이를 가해자의 범죄은폐 심리라고 본다. 추악한 진실이 드러나는 불리한 순간마다 반공과 애국을 주장하며 은폐해 왔다. 반인륜 범죄행위에 대한 공범의식으로 포장된 추악한 부정비리의 진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무관심 같다. 너무나 보편화되어서 참상의 느낌이 없는 것이다. 무한경쟁에서 이겨 살아남는 것만을 최고로 여기는 사회는 생명의 가치를 폄하하는 문화를 갖게 된다는 연구가 있다. 범죄를 용인하는 사회. 우리 사회가 그 지경까지 간 것은 아니길 바란다."
김창룡조차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
-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그들은 누구였나? 이들은 한국전쟁기 이승만 정권 아래서 어떤 삶을 살았나?
"100만 명의 죽음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본다. 우리 주변 누구나 이 피해를 입었을 것으로 볼 수 있고 그만큼 피해자들은 우리의 가까운 이웃들, 쉽게 만날 수 있는 상식적인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분들은 사회의식 수준에 있어서 평균보다 조금 앞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연령층은 주로 20대 후반에서 30대에 몰려 있었을 것이고.
해방 후 친일파들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고, 일제도 시도하지 않았던 남북을 분단시키고, 쌀값은 오를 뿐 아니라 구경도 못하게 되고, 경찰의 감시 아래 투표하는 부정이 저질러지고, 사병들의 밥값까지 빼돌리는 부정부패한 장교들이 오히려 청렴하고 실력 있는 장교를 숙청하는 현실을 이런 분들이 어떻게 받아 들였을까? 저항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을 것 같다. 이것이 1950년 5월 총선거 결과로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2대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전쟁을 맞은 이승만 세력은 이들을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던 것으로 본다.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건 국군수복 후 부역혐의자 학살이다. 희생자들 상당수는 정치적 반대자도 아니었다. 김창룡조차 그해 11월 말 시인하는 인터뷰를 한다. '엉뚱한 사람들도 많이 죽었다'고. 이게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해 온 '묻지 마' 범죄의 원형이다."
- 국방부에서 펴낸 <한국전쟁사>는 한국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8천 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국군 중 약 5%의 군인들이 남로당 관련 혐의로 군법회의에서 군복을 벗어야 했거나 총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를 어떻게 봐야 하나?
"민간인학살 사건에 있어서 군인들의 신분은 대개 가해자 측으로 여기지만 여기에는 숙청당한 피해자도 많다. 또 군인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피학살 민간인의 가족이기도 하다. 친일파 고급장교들을 제외한다면 병사 대부분은 민중의 아들딸이었다.
나는 숙군의 과정을 미군정과 이승만세력의 친위쿠데타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숙군은 반란을 낳았고 반란은 다시 숙군을 낳았다. 악순환이었지만 그래도 어느 것이 먼저였냐고 따지자면 숙군이 먼저라고 답하겠다. 자질 없던 친일 고급장교들은 창군 당시부터 사병들의 밥값까지 빼돌려 사익을 취했다. 저항이 없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것이다. 하극상이라며 처단했는데 이것이 숙군의 시작이었다고 본다.
가장 대표적인 반란이자 숙군의 사례인 여수 14연대 반란을 보자. 남로당의 봉기 음모를 상식처럼 여기지만 진실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14연대 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9월 말 연행 당했다. 군내 반란조직인 <혁명의용군> 주모자라는 이유였다.
그런데 <혁명의용군>의 실체는 증명된 바 없으니 이 사실을 목격한 14연대 병사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구 6연대 사건도 전 연대장 최남근 소령의 석방을 주장하며 봉기를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다. 14연대도 오동기 소령의 석방을 주장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아직 역사학계에서 주목하지 못하고 있지만 연대장의 연행은 14연대원의 공분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국방부는 숙청당한 군인은 모두 4375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장교 242명, 사병 4133명이다. 여순반란 참여 군인 1000~2000명이나 강표월북사건처럼 월북한 군인 300여 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니 숙군에 얽혀 사라진 군인들이 8천여 명에 이른다는 주장도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
- 책에서 이승만 정권은 남로당 관련혐의자에 대해 모진 고문을 하고 재판 후에 무죄 판결난 군인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고 했는데, 왜 이승만은 무죄 판결난 이들조차 석방하지 않고 학살했다고 생각하나?
"1948년 12월 7일 해군 고등군법회의에서 반란조직인 <해상의용군>에 가입했다던 대위 이항수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항수 대위를 석방하지 않고 마산형무소에 가두었다가 1950년 7월 5일 마산 앞바다 무인도에서 학살했다. 일제 식민지 정권조차 이런 사례가 있었나?
나로서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다. 국가가 아니라 조직폭력배들의 집단도 이렇게 하진 않을 것 같다. 조직을 유지하는 기본 원칙이 있을 텐데 그에 어긋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한다면 이게 무슨 조직이겠나? 숙군을 정치쿠데타로 본다 하더라도 자신들에게 무해한 사람까지 죽이는 짓을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를 숙군으로도 보는 것조차 합리적인 설명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로당원 200명을 넘겼다는 박정희"
- 책은 <해상의용군>은 1946년 11월부터 1948년 8월까지 활동했고 <해상인민군>은 1948년 8월부터 11월까지 활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병조장 이항표가 의심을 받기 시작한 때가 1948년 5월이고 체포당한 때는 3개월 후인 8월이니 <해상의용군>은 이항표의 체포 전 조직이고 <해상인민군>은 체포 후 만들어진 조직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한 사람을 통해 두 가지 반란조직이 그것도 체포 후에 만들어진다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는지?
"국가보안법이나 국방경비법의 처벌대상은 이적조직, 반란조직의 실체를 전제로 한다. 이것이 없으면 처벌하지 못한다. 이적 조직이 있고 이에 가입해야 하고 가입 사실이 문서나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범죄의 세 가지 구성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국가보안법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관련 단체라고 낙인찍으면 무조건 처벌 대상이 된다. 정당도 해산당할 정도니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결사의 자유는 대한민국엔 없는 거나 다름없다.
이 사건이 발생하기 시작한 1948년 5월은 대한민국 출범 전이었다. 그러니 물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도 없을 때였다. 반국가단체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군내 반란단체들을 만들어야 처벌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이 반란조직은 좌익 여부와 관련 없다는 것이다.
앞 오동기 소령의 <혁명의용군>, 해군의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이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에서만 조작 냄새가 나는 것이 아니다. 반란의 전제로 삼고 있는 이 조직들은 유령 조직으로 보인다. 반란을 도모했다는 사실도 증명되지 않으며 가입 사실을 증명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오직 '군기문란조직'이란 군법회의의 선언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 <해상의용군> <해상인민군>은 전형적인 가공 조직이라고 본다. 이항표는 남로당원 200명을 넘겼다는 박정희처럼 두루마기 문서에 해군 내 숙청대상자 명단을 넘겼다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전형적인 프락치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백선엽의 거짓말
- 이상규 소령은 해군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는 해병대 창설 제안자 중 한 사람임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음에도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회고록에서 지워졌다. 왜 이상규 소령에 대한 기록이 해군의 역사와 그의 동료들의 회고록에서 지워졌다고 생각하는지?
"국방부 전사편찬연구소 <한국전쟁사>, 중앙정보부 <북한대남공작사>, <부산신문> 등 1970년대 이전 자료들에서는 1948년 10월 19일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해군에서는 이상규 소령을 해군 진압책임자로 임명하고 7척의 배를 지휘한 사실과 해병대 창설 제안 보고서 제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당시 상관이었을 신현준, 부하였을 공정식은 이 사실들을 기록하지 않을 뿐 아니라 마치 자신들이 했던 일로 주장하고 있다.
나는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지던 1950년 9월 15일 이 작전에 참여했다는 국군 17연대장 백인엽의 주장이 거짓이었음을 확인한 적이 있었다. 그는 9월 24일 전투 없이 인천에 내렸을 뿐이다. 이 외에도 당시 군인들이 전공을 높이기 위해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를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문제는 역사가들이 이러한 거짓을 알면서도 묵인한다는 것이다.
해군 뿐 아니라 육군도 숙청당한 군인을 기피하는 경향이 있고 더 나아가 그들을 모욕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장도영은 15연대장 최남근 소령에 대해서는 여수 14연대 반군을 지도하기까지 했다는 주장까지 한다.
개인감정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무척 비겁한 주장으로 보인다. 이상규 소령의 경우도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는지 모른다. 신씨나 공씨 등의 회고록을 보면 일제 군인출신들이 민간인 출신들을 얕잡아 보는 경향이 보인다. 반면 항해 자격증까지 갖고 있었던 이 소령은 '배도 모르는 자들이 해군이라고?'했을 수 있었겠다."
- 한국전쟁기 이념공세의 가장 큰 희생자들은 이념과는 아무 상관없이 하루하루를 그저 꾸준히 살아갔던 일반 농민이나 민중이 대다수였다. 어떻게 이런 죄 없는 일반 농민이나 민중이 이승만 정권의 최대 희생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을까?
"일반 민중의 피해가 컸던 것은 특권층 중심의 정치 철학이나 정책에 있었다고 본다. 경제관료들이 주장하는 낙수이론 같은 거였겠다. 국민을 주권자로 본 것이 아니라 '개돼지'로 보았던 것이고 거기서 더 나아가 집권을 위협하는 비협조 세력으로 보았던 것이었다.
전쟁 전 국민보도연맹원이 34만 명, 형무소 재소자가 5만 명이었다. 이들 대부분 1950년 7월 학살당했다. 그런데 불과 2개월 만에 다시 55만 명의 처단대상이 생겼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로선 이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가설이 이승만 세력을 '점령자'로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의 전투사나 혁명사를 보면 상당수의 희생이 따른 전투 후 점령했을 경우 보복학살이 벌어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이승만의 경우는 이런 상식과 전혀 맞지 않는다. 후퇴할 때나 점령할 때나 격렬한 전투 피해가 보고된 사례는 없다. 보복학살이 아니라 고도로 의도된 학살이었다. 이는 보복이라는 상식과 다르게 뒤집어서 봐야 한다.
민간인학살사건과 이승만의 관계를 규명하기 위한 쟁점의 핵심은 첫 출발이 언제로 보느냐는 것이다. 한국전쟁의 발발일인 6월 25일을 기점으로 본다면 민간인학살 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적어도 1948년, 더 나아가 1945년까지 앞당겨야 한다. 가설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승만의 점령은 미군정의 주둔과 같이 시작된다. 두 세력은 신생 정권의 안정을 위해 극단적인 폭력을 행사하다가 전쟁을 맞게 된다. 물러나면서 국민들을 학살하고 떠난다. 적에게 협력할까 봐. 이는 그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점령자였음을 의미한다. 민주주의 공화국 대통령이 자기 국민을 보호한다는 생각이었다면 이런 짓, 국민보도연맹사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수복 후에도 마찬가지다. 수복 후 부역의심자들의 명부를 작성하고 연행하여 학살했다. 이런 행위는 침략자들이 저지르는 방식과 같았으니 이승만 정부는 수복한 것이 아니라 재점령했던 것이다. 위 가설은 비약이라든가 반미주의라든가 하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지만 아직까지 이 외에 달리 100만 학살의 원인을 설명할 수 없었다."
"피해자가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에 대해 조사하고 연구하면서 느낀 점이 많을 텐데. 특별히 지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왜 우리 정부와 사회는 그 억울한 학살 희생자들의 삶과 죽음을 기억하려 하지 않으려 한다고 생각하는지?
"해방과 전쟁 세대들의 자연 수명이 다 해 간다. 가해자의 은폐 시도는 거의 성공했다. 그리고 이에 비해 피해 집단은 아직까지도 가해 애착 현상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무기력한 피해자가 고문자에게 애착이 생기는 현상 말이다. 제3자는 저 피해가 나에게도 옮길까 봐 지켜보는데 그치고 있고. 방관자 현상이라고 한다. 어쩌면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자들은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에 편승한 기회주의 세력인지도 모른다. 이들도 민중을 개돼지로 여기기는 마찬가지일 수 있다.
피해자들에겐 너무나 가혹한 주장일 수 있는데, 이를 해결하는 방안은 가장 먼저 피해자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문제다. 천안함 사건의 경우 나는 의혹을 떨칠 수 없는데, 돈이나 특혜 같은 방법에 의해 피해자 집단의 의지가 사라지면 진실규명 싸움은 멈추게 되지 않나? 피해자가 싸우지 않으면 누구도 대신해 주지 못한다. 피해자가 싸워야 그 다음으로 정의로운 시민들이 가세할 것이고, 여론이 형성되고 그래서 가해자가 처벌되고. 그렇게 사회정의가 세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피해 집단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다"
- 법치국가에서는 고문에 의해 얻은 증거는 재판에서 증거로 채택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거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야만적인 고문에 의한 '자백'으로 '빨갱이'로 몰리고 억울하게 생명을 잃거나 몸과 마음이 망가진 수많은 희생자들에 대해 왜 지금까지도 정부는 이 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회복시켜 주지 않는 것일까?
"위헌 또는 불법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흔한 논리가 한국사회를 지배한다. 사법부가 말하는 법적 안정성 논리, 성공한 쿠데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자는 공감대가 있다. 게다가 놀라운 건 피해 집단조차 여기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2011년 단심재판에 의한 처벌이 위헌이라는 헌법위원회의 1952년 9월 9일 결정을 헌법재판소 도서관에서 발견한 이래 줄기차게 알려왔다. 내가 보기엔 현재 한국사회 법조계의 인권의식은 사실 1952년 선배들만도 못하다.
그리고 지금은 짐작이 어려우실지 모르겠지만 피해 집단 대부분은 보수정당을 지지해 왔다. 가장 강하게 국가의 무오류성을 받아들여 왔던 분들이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랬던 분들이 20년에 걸친 진실규명 활동을 통해 정치 성향을 바꾼 것이다. 어쩌면 본래의 정체성을 회복한 것이고.
한편, 가해 집단이 자신들의 범죄를 고백하긴 어려울 것이다. 청와대 권력형 비리나 법조 비리, 기업인의 패륜과 부정부패를 보자. 처벌되지 않고 반복된다. 무려 70여 년을 민주화 세력들까지 흡수하거나 무력화 시키면서 변함없이 공고한 성벽을 유지해 왔다.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결국 희생자의 명예회복은 피해 집단 스스로의 단결력에서 나올 수밖에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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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도 모르는 누구나 아는 죽음> | |
ⓒ 신기철 |
- 이번 저서를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다음 구상하고 있는 집필 분야나 계획을 소개해 줄 수 있는지?
"나한테는 피해자 편향이 있는 것 같다. 진실화해위원회 근무할 때와 달리 지금은 객관성을 유지할 필요는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면담의 깊이가 내면으로 더해 갈수록 객관적 태도의 필요성을 잘 알겠더라. 슬픈 이야기인 만큼 나로서도 더 힘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사실 피해 사실에 대한 정리 없이 가해자의 범죄를 논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방식이라고 본다. 축적된 자료를 활용한 인권침해범죄자 열전이나 반민족행위자 사전 같은 것이 꼭 필요하겠지만 피해조사 역시 소홀히 하지 않았으면 한다. 위안부 할머님들의 명예를 논하는 거야 지극히 당연하지만 상대적으로 그 사이 일제가 저질렀던 잔혹한 범죄를 규명하는 일도 함께 되었으면 한다.
고양시만 봐도 적지 않은 돈을 들여 매년 위안부 할머니를 위한 상여 행렬을 광화문에서 열었지만 정작 일제시기 피해를 조사하거나 항일운동가들을 지원한다든가 하는 데는 소홀히 했다. 할머니들을 이용해 주목받기 위한 정치쇼에 불과해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조금 내성이 생긴 것 같다. 다음은 가혹행위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한다. 서구 심리학자나 언론인들이 이에 대해 실험적 시도를 하던데, 나는 일단 사례부터 모아보려고 한다. '한국전쟁과 인권'이라는 큰 틀 아래에서 정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 신기철은 5.16쿠데타를 피해 무작정 상경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독재는 물론 권위를 매우 싫어했으니 아나키스트라는 별명이 있다. 1985년 이래 기계금속노동자로 인천과 구로, 영등포 등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1997년 이후 고양지역 시민운동에서 금정굴 민간인학살 사건을 만났다. 이를 인연으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와 진실화해를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두 조직 활동기간을 합쳐 무려 6년 동안 국가범죄, 전쟁범죄를 다뤘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연구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새로 나타난 사건은 물론 이미 진실규명된 사례들을 인권의 관점에서 심층 재구성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진실 역시 놓칠 수 없는 관심사이다. 저서로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 <전쟁범죄>, <멈춘시간1950> 등이 있다.
"이승만 정권, 국민들 적으로 보고 대량학살"
[인터뷰①] <전쟁범죄> 펴낸 신기철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인권평화연구소장
▲ <전쟁범죄>의 저자 신기철 | |
ⓒ 신기철 |
그는 1980년대 남들이 부러워하는 서울대학교에 당당히 합격했다. 공부를 잘했고 마음도 착했으니 그냥 조용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해서 착실히 다녔으면 지금 그는 물질적으로는 무척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온하고 안락한 삶의 길을 걷지 않았다. 일류대학을 졸업하고 그가 찾아간 곳은 번듯한 대기업이 아니라 1980년대 당시 열악한 인천, 구로, 영등포지역의 공장들이었다. 여러 공장들을 전전하며 그는 노동운동에 몸을 던졌고 그 후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내가 신기철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지난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였다. 내가 기억하는 신기철의 첫 인상은 참 초라했다. 옷차림과 외모가 검소와 수수 그 자체,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 순수와 소탈 그 자체였다. 그는 달변가도 아니고 성격이 원만한 편도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조금이라도 더 그를 알아갈수록 '초라한' 겉모습 뒤에 가려져있는 '위대한 정신'과 '뜨거운 정의감'을 지닌 신기철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지난 2010년 말 진실화해위원회가 이명박정권에 의해서 '폐업처리'되었다. 정부차원의 과거사정리가 막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길거리로 나온 40대 중반의 부인과 딸 셋을 둔 '무직' 가장 신기철의 과거사정리는 이제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학자가 아니라 조용한 행동가다. 진실화해위원회를 나온 뒤 그는 들판에서 벌써 3권의 책을 썼다.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에 이어 최근 이승만정권이 한국전쟁기 저지른 민간인학살 사건 <전쟁범죄>를 발간했다. 역사학 전공자인 기자가 그의 앞에서 숙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이유다.
다음은 지난 한 달간 신기철 선생과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승만정권의 학살행위는 '전쟁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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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범죄> 책 표지. | |
ⓒ 인권평화연구소 |
"한국전쟁 전후 벌어진 민간인학살은 군경에 의한 대량학살이었다. 서구학자들은 이를 메서커(massacre)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이 표현은 개별사건들에게는 적당해 보이지만 한국전쟁처럼 100만 명의 다양한 희생자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많이 부족한 개념 같다.
민간인에 대해 한국전쟁의 경우 전투에 방해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잠정적인 적으로 여겼다는 데 문제가 있다. 전쟁 전 빨치산에게 협력했다는 이유로, 전쟁 후에는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이라거나 협력했다는 이유로 국민보도연맹사건이나 부역혐의사건이 저질러졌다. 민간인조차 아군 편과 적군 편으로 가르면서 벌어진 집단살해행위라는 점에 주목한다.
한국전쟁 전후시기 이승만정권에 의한 민간인학살을 포괄적인 전쟁범죄로 보는 데 이견은 없어 보이지만 좁은 의미에서 '반인륜범죄'와 어떻게 구별할 것인지 논란이 있을 것 같다. 생명권의 측면에서는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겠다. 하여튼 좁은 의미에서 전쟁범죄는 점령지 민간인살해를 규정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국민에게 저지른 고문이나 학살행위를 '반인륜범죄'라고 하며, 점령지 적국민에게 저지른 집단학살행위를 '전쟁범죄'로 본다는 해석이 있다.
한 가지 비교해 보고 싶은 사례는 후퇴하는 인민군 측에 의한 민간인 학살행위, 곧 '적대세력에 의한 학살'이다. 국군 수복 직후부터 조사되었던 이 사례는 KWC(Korean War Crimes, 한국전쟁범죄)라는 문서로 보고되었다. 점령군인 인민군이 저지른 민간인학살 행위였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대구10월항쟁이나 제주4․3사건, 여순14연대사건, 그리고 이에 이어 10만여 명을 학살했던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전쟁범죄에서 봐야 사건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8․15해방 직후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은 스스로를 '해방자'가 아닌 '점령자'로 표현하였으며, 이를 계승한 이승만정권의 입장 역시 같았던 것은 아닌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
-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승만정권이 '국민과의 전쟁'을 시작하여 '전쟁범죄'를 저질렀다고 평가하는 이유와 근거는?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 협상 결렬을 계기로 남과 북은 서로 다른 길을 가기 시작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해방 후 미군이 한반도에 도착했을 때 이들은 일본식민지를 해방시켰다기보다는 점령했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친일세력을 이용하면서 일반 국민들과는 적대적 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대구 10월항쟁이나 호남지역의 추수봉기를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집단학살사건을 저질렀지만 이를 일반적인 방식으로까지 발전시키지는 않았다고 본다.
하지만 미군정을 승계한 이승만정권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직후부터 한국전쟁발발 직전까지 민간인학살 방식을 일반화시켰다. 예를 들어 제주 4․3사건을 생각해 보면, 토벌작전과 함께 민간인 3만 명이 희생되는 시기는 사건 직후인 1948년 4월이 아니라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였다. 여순사건과도 맞물려 있지만 이 시기는 이승만 단독정부의 수립 직후였다.
영호남지역의 토벌작전 피해 역시 같은 시기에 시작되어 1950년 초까지 진행된다. 이는 잘 주목받지 않고 있는 측면이다. 같은 시기 민간인 인명피해는 10만 명이 넘으며,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전국 각 지역 형무소에 수용되었거나 국민보도연맹원이 되었고 이들은 전쟁 발발 직후 모두 학살당하게 된다.
나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성공한 이승만정권이 남북화해정책보다 적대정책을 택했으며 자신의 반대자들을 모두 적을 돕는 세력, 또는 적으로 보았다는 데에 주목하고 있다. 결국 이승만정권은 반정부 세력 탄압의 관점이 아니라 적을 제거한다는 관점에서 증오심에 가득 차 민간인을 학살했다고 본다.
그리고 '국민과의 전쟁'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측면은 물리력의 정비, 곧 국군의 정비다. 전방 4개 사단을 제외한 후방 4개 사단과 지역 경찰력이 후방 토벌을 빌미로 민간인학살에 동원되었고 결국 1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대량학살을 초래했다. 이는 국민을 적대시한 정책의 결과가 아니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제노사이드(인종 학살) 연구자들은 집단학살 발생의 가장 큰 요인으로 물리력의 준비를 들고 있다. 학살 주체와 무기가 준비되어야 제노사이드가 일어난다는 것인데, 국민이 제어하지 못하는 군대가 준비된다는 것은 이미 국민에 대한 국가범죄가 시작됨을 의미한다고 본다."
"국군의 민간인학살이 인민군 학살행위로 왜곡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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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
ⓒ 신기철 |
-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진실화해위원회 이영조 상임위원(나중에 위원장)은 '미군전범조사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저자(당시 조사관)에게 '악의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당시 미군보고서의 어떤 점이 왜곡된 것을 지적했나?
"양평에서는 1950년 9월 28일 후퇴하던 인민군 측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집단학살이 있었다. 내가 직접 인터뷰한 양평경찰서 사찰계 형사는 당시 희생자 수가 150명 정도였다고 했고, 반면 수복 당시 현장을 목격한 미군 장교는 700명이라고 보고했다.
나는 양평지역 사건을 조사하면서 미군전범조사보고서(KWC#33) 내 사진자료를 보게 되었다. 여기에는 1950년 9월 말 후퇴하는 인민군 측이 학살했다는 증거로 쓰인 사진들이 있었다. 이중 2장의 사진을 보자.
위 사진들은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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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
ⓒ 신기철 |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여기서 일단 눈에 띄는 점은 사망한 지 4~5개월 되었다는 미 조사관의 법의학적 소견이었다. 1951년 3월 발견했으니까 4~5개월 전이면 1950년 10~11월이 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이 사진은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학살사건의 희생자들을 촬영한 것으로 봐야 한다.
또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자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다는 증언과 정황을 주목할 수 있다. 두 번째 사진의 백골화된 시신은 발견 당시까지 노골적으로 방치되었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시신이 방치되는 경우는 대부분 1950년 9월 28일 국군 수복 후 한국 민간인이 국군에 의해 부역혐의로 총살당한 경우이며,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의 시신이 방치된 경우는 확인된 바가 없다.
희생지역도 문제가 되었다.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지역과 국군 수복 후 부역혐의사건 피해지역이 1km 정도 차이가 나는데, 위 시신을 발견한 지역은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지역이 아니라 국군 측에 의한 부역혐의 피해지역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이 사진의 시신들은 인민군 측에 의한 희생자가 아니라 국군 수복 후인 1950년 10월 중순경 이후 희생자로 판단된 것이다. 결국 미군 측의 사진자료는 해당 사건과 상관없는 것으로 나는 진실위 근무당시 오히려 국군 수복 후 벌어진 부역혐의사건의 일부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임명한 이영조 위원장 체제의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의혹 제기 수준에서 서술하라고 결정했다."
- 그러면 당시 미군보고서의 왜곡을 지적한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저자)에게 왜 이영조 상임위원은 '악의적'이라고 지적했다고 생각하나?
"진실화해위원회는 3개의 조사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사1국은 항일독립운동과 인민군 측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2국은 (한국)군경에 의한 집단희생사건, 조사3국은 인권침해사건을 조사했다. 당시 조사1국의 조사를 총괄 지휘했던 분이 이영조 상임위원이었다.
그런데 조사1국의 인민군 측에 의한 사건의 상당부분은 이미 사건 직후에 미군과 경찰이 조사한 사건이었으므로 당시 조사보고서인 KWC조사자료가 가장 결정적인 입증자료였다. 그러니 나의 지적이 이영조 상임위원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KWC 조사자료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것으로 여기지 않았나 생각한다.
하여간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한다면 한 자료에서도 많은 진실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방부에서 조사한 증언록 역시 진실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고 보고 있다. 자료를 올바로 해석하자는 게 과연 '악의적'인지 여부는 독자들이 판단하리라 믿는다."
"김구 선생 지지했던 군인들,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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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형무소에서 이승만정권에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 | |
ⓒ 신기철 |
- 한국전쟁기 형무소에 이미 갇혀있던 주요 반정부인사의 학살사례를 소개하면?
"진실화해위원회 조사를 토대로 19개 형무소 희생자 수를 추정해 보면 적어도 2만 명을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모두 전쟁 전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거나 재판과정에 있던 분들이다. 학살된 분들 중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했던 분들도 많아서 이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 아마 근현대사를 다시 정리해야 하는 수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집단학살사건에 있어서 반정부인사의 죽음을 따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 없어 보이지만 그 동안 알려져 있던 것에서 벗어나 있는 사례들이 있다. 형무소에서 희생되신 분들을 구분지어 본다면 제주4·3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과 여순토벌작전에서 연행되신 분들이 가장 큰 규모다.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인 숙청 군인들도 한 그룹이 될 수 있다.
마산형무소에서 희생당한 해군 창설 멤버 전호극 소령(1913년생)을 예로 들어보자. 전쟁 전 숙청당한 군인들 수는 장교 242명을 포함하여 4400여 명이 된다. 김구 계열인 전 소령은 1949년 2월 여순사건과 관련 있다며 연행되는데, 같은 해 6월 김구 선생의 암살 후 징역 6년형을 선고받는다. 전 소령은 같은 해 5월 6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된 후 강제 퇴역당해 민간인 신분으로 마산형무소에서 수용생활을 했다. 그런데 마산형무소에는 같은 이유로 수용당한 군인들이 40여 명이나 되었다. 이들 숙청당한 군인들은 1950년 7월 초 마산과 거제 사이 괭이바다라는 곳에서 동료 해군 헌병대들에 의해 학살당한다. 결국 김구 선생을 지지했던 군인들이 이승만정권 아래서 전부 학살당한 것이다.
전쟁 직전 국군의 수가 9만 8천 명이었으니 숙청당한 군의 규모가 무척 컸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승화 장군 등의 수기를 보면 당시 용감하고 실력 있는 군인들이 숙청당해 안타까워하는 내용을 종종 볼 수 있다. 나는 이것이 한국전쟁 초기 왜 국군이 그렇게 일찍 붕괴되었는지 설명해 주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전호극 소령이라고 생각한다."
- 인민군 후퇴시기 민간인학살과 관련하여 진실이 왜곡된 사례가 있었는가?
"경찰의 공격으로 희생당한 영광 오길종 일가족 3명이 좌익에게 살해당했다고 기록된 경우는 진실이 완전히 왜곡된 사례라고 하겠지만 이렇게 명확히 확인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내가 진실위에서 조사한 민간인학살사건 대부분의 경우는 기본적인 진실조차 규명되지 않았다. 여러 제약으로 정부 측 기록에서 확인되는 의문점을 지적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민군 후퇴시기의 학살명령이다. 인민군 측에 의한 학살 중 84.6%가 1950년 9월 26~30일 사이에 벌어졌으니 조직적인 명령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조차도 당시 순차적으로 수복되는 전황을 보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수복 후나 같은 시기에 발생하는 사건들이 많다.
하여튼 약간 차이가 있지만 국방부나 진보 학자집단 모두 인민군의 학살명령이 있었다는데 견해가 일치된다. 하지만 나는 양쪽 다 주장의 근거가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국방부나 검찰은 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책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그 근거로 체포된 군산(당시 옥구군) 미면 신관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을 들고 있다. 문서 한 장 남은 것이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해도 그 시기 전국의 희생사건을 일개 리 인민위원장의 자백으로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게다가 군산에서 사건이 발생하던 1950년 9월 28일 서울 영등포에서 체포된 이 인민위원장은 재판 출석자 명단에서는 다른 10여 명과 함께 사라진다. 나는 이미 부역혐의로 학살당한 뒤였기 때문에 생긴 현상으로 추정한다. 갖은 고문이 횡행하던 시대였고 재판도 받기 전에 처형이 이루어진 시대의 자백, 그 조차 입증자료도 없고. 이걸 믿는 것이 과연 상식적일까?"
- 한국전쟁기 민간인들에 대해 일부 미군들이 저지른 행위는 '전쟁범죄'로 볼 수 있는가?
"'전쟁범죄'는 가해자 의도를 규명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폭격의 경우 가해자 의도를 피하기 위해 '부수적 피해'라는 용어가 개발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용어는 '아무나 죽어라' 하는 식이 될 수밖에 없는 '폭격'이나 '적과 구별되지 않는다'는 식으로 피난민간인을 살해하는 '토벌작전'을 합리화한다. 그러다 보니 이 자체가 전쟁범죄라는 주장이 제기된다. 한 번의 우발적인 사건이어도 문제가 있지만 학살이 반복되었다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부수적 피해'와 '전쟁범죄'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를 제외하더라도 민간인을 적으로 여기고 공격한 행위는 충분히 입증된다. 1950년 7월 26일 미 지상군이 자신들이 소개시킨 피난민임을 알면서도 공격했던 영동 노근리 사건은 이미 전 클린턴 대통령이 사과 비슷한 '유감' 표명을 했다. 규모는 작지만 비슷한 사건이 1950년 7월 10일 연기군 서면 월하리에서 있었으며, 8월 12일에는 창원(마산) 진전면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에서 피난하던 주민 86명이 미군에게 살해당했다. 기록을 보면 미군들은 희생자들이 모두 민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민군 점령 지역의 민간인이나 민간시설을 공격한 행위도 많았는데, 이를 전선의 이동과 비교해 보면 국민보도연맹사건과 미군폭격사건이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국민보도연맹학살사건을 미군 항공기가 감시하는 모습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 한국전쟁 중 남쪽 민간인들이 입은 피해는 불가피한 '부수적 피해가'가 아니라 민간인학살이 이승만정권의 '주대상'이었다고 볼 수 있나?
"전쟁기의 민간인피해를 대개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라고 표현한다. 전쟁은 군인들 사이의 목숨을 건 경쟁이라고 보기 때문에 민간인들의 생명과 무관하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다. 하지만 이는 전쟁의 참상을 숨기기 위한 완곡어법에 지나지 않는다. 십자군전쟁 등 많은 기록이 남아있는 옛 전쟁에도 점령지역의 민간인을 몰살시키는 사례가 예외 없이 벌어졌다. 이는 오늘날의 전쟁범죄에 해당한다.
나는 국방부의 <한국전쟁사1권> 39쪽에서 군인과 민간인의 피해를 각각 사망, 부상, 실종으로 구분한 통계를 보고 놀랐다. 군인 경우 사망 22만 8천 명, 부상 71만 7천 명, 실종 4만 4천 명이고, 민간인의 경우 사망 37만 4천명, 부상 23만 명, 실종 38만 8천명이었다.
실종자를 모두 사망으로 볼 수 없겠지만 민간인학살 희생자 대부분이 실종처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고 일단 사망자와 실종자 수를 합해 부상자 수와 비교해 보았다. 군인의 경우 사망실종자에 비해 부상자 수가 2.6배를 넘는 반면 민간인의 경우는 0.3배에 그친다.
전투를 치러야 하는 국군은 최소한의 자기 방어 장비를 갖추고 있고 작전상의 지휘자가 있으므로 부상자가 많은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민간인들의 사망과 부상이다. 단순히 본다면 부상자 비율이 매우 낮은 이유가 보호 장비가 없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국군의 경우와 북한지역의 경우를 비교한다면 전혀 다른 결론이 나온다.
전투와 관련 없는 민간인희생자 수가 국군보다 훨씬 크다. 27만 2천 명 대 76만 2천 명. 희생자 상당수는 부상이 없이 사망에 이르렀다. 폭격이 심했던 북한 경우 민간인 부상자는 사망실종자보다 1.6배에 이른다. 남한의 0.3배에 비교하면 큰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민간인이 군인보다 2.8배 더 희생되었으면서도 부상자 수는 오히려 0.32배였다. 그래서 남한의 민간인희생자 상당수가 전투에 따르는 '부수적 피해'가 아닌 '고의적 학살'에 의한 것이라고 논리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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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와 이승만. | |
ⓒ 국가기록원 |
- 한국전쟁기 남한 민간인 학살 희생자(혹은 피해자)의 규모를 '100만 명' 수준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먼저 상식처럼 알려져 있는 통계를 볼 수 있다. 제주나 여순, 이후 토벌작전으로 보아 전쟁 전 10만 명이 희생되었다는 데 큰 이견은 없어 보인다.
국방부의 <한국전쟁사4권>, 760쪽에는 남한비상경비사령부가 1950년 6월부터 10월 사이에 106만 명의 민간인이 피살되었다고 발표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인민군 측에 의한 피해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같은 책 1권 39쪽과 상당한 차이를 보여준다. 나는 106만 명의 피살자 발표에 대해 이후 어떤 설명이나 반박의 경우를 못 봤던 것 같다.
한편, 4․19혁명 직후 전국유족회가 주장했다는 114만 명이 있다. 아직 이 근거를 확인한 바는 없지만 당시 이 통계를 유족회가 수집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전국유족회를 구성한 유족회는 대부분 영남지역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인데, 아마 이 통계는 정부 측에서 흘러나온 것이 아닐까 추정한다.
나는 부역자가 55만 명, 국민보도연맹원이 30만 명이라는 정부 측 자료나 인사들의 발언에 주목한다. 여기에 더해 5만 명 정도의 재소자가 형무소에 있었다는 사실, 11사단과 8사단으로 이어지는 영호남 토벌작전, 미군폭격의 희생자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전쟁 전 10만 명의 희생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기에는 부역을 의심받은 주민들이나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모두 학살당했다는 말이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국민보도연맹원 생존자가 부역혐의 희생자와 중복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 중 생존자가 과연 얼마나 되는지를 고려한다면 이것만으로도 100만 명 희생자 주장이 지나치지 않다고 본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든 정부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1953년이면 희생자명부와 가족명부가 작성되어 전국 경찰서에 배포되었음이 확인되는 문서가 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
- 한국전쟁기 이승만정권이 선포한 '비상조치령'이 무엇이고 그것을 왜 '위헌'이라고 판단하는지?
"'비상사태하 범죄처벌에 관한 특별조치령'은 1950년 6월 25일 공포된 제1호 대통령령이었다. 주요 내용은 1심만으로 증거 설명을 생략한 상태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고의 악법이었다. 그런데 알려지지 않은 가장 심각한 측면은 1949년 2차 개악하려던 국가보안법의 내용이 바로 이 비상조치령의 것과 같았다는 점이다. 당시 정치적 부담 때문에 시행하지 못했는데 전쟁의 발발이 이 악법의 재사용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었다. 이런 측면에서 전쟁은 이승만에게 반대세력 제거를 위한 '절호의 기회'였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법령은 50년 6월 28일자 공보에 실렸는데, 이 때문에 전쟁발발로 정신없던 이승만정권이 25일에 공포할 수 없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것 같다. 하지만 6월 25일 공포한 법령이 당일 공보에 실려야 했다고 보는 것은 무리 아닐까 싶다.
비상조치령의 처벌대상은 수복 후 부역혐의를 받은 민간인들이었다. 반면, 같은 시기 조금이라도 무장했다고 판단되면 군법회의가 적용되는 '국방경비법'에 의해 처벌 받았다. 국방경비법 역시 1심만으로 사형까지 선고할 수 있는 법이었다. 정부자료에 따르면, 비상조치령에 의해 처벌받은 민간인들은 2만 명이 넘는 것으로 나타난다. 여기에 국방경비법에 의한 피해까지 합치면 전체 피해규모는 대략 3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
비상조치령이 위헌이라고 판단한 것은 내 주장이 아니고, 1952년 9월 9일 헌법위원회가 판단한 것이다. 이 결정문은 헌법재판소 도서관 자료집에서 볼 수 있다. 주요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은 비록 1심 재판일지라도 대법원의 판단을 받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런데 비상조치령은 이를 어기고 대법원 판단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어 위헌이라는 것이다."
- 스페인 등 외국의 부역자 처리과정과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과정을 비교하면 어떤 차이와 특징이 있는지?
"한국전쟁 부역자처리의 대상은 55만 명이었다. 인민군 점령기 불과 3개월 동안의 부역자들이었다. 2만~3만 명이 1심 재판을 받았고 최소 20만 명이 학살당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나는 한국전쟁기간 중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3개월 동안 '부역'한 행위 때문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죽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먼저 비슷한 사례가 있을까 고민했다.
먼저 내전을 치른 스페인을 조사했다. 1936년에서 1939년까지 3년 동안의 내전에서 20만 명으로 추정되는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희생자 대부분이 공화파를 지지했다는 이유였고 당시 프랑코는 이들을 부역자로 간주했다. 이에 비하면 3개월 부역했다는 이유로 희생된 한국전쟁 민간인학살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나치에서 해방된 프랑스는 나치 부역자를 어떻게 처리했을까. 나치에게 점령당한 기간은 1940년부터 1944년이었고 처리대상은 35만 명이었다. 처리결과는 학살이 9천 명, 재판이 1600명. 학살당한 9천 명은 수복 초기에 벌어진 경우로 유대인학살 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이는 우리의 경우와 크게 다르다. 수복하던 국군은 여성동맹위원장 등 '장'자만 붙어도 총살하고 북진했지만 이후 경찰이 복귀하기 전까지 무차별 보복은 크게 없었다. 본격적인 학살은 경찰서 사찰계 주임의 복귀와 함께 체계적으로 시작되는데 대략 50년 10월 6일경에 시작된다.
비교사례로 가장 끔찍한 경우가 우리의 친일파 청산과정이었다. 무려 35년간의 식민지 지배를 청산하면서 청산대상은 고작 7천 명에 그쳤다. 이들이 바로 1949년 설립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조사대상이었는데 이들 중 처형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이에 비한다면 1950년 있었던 이승만정권의 부역자 처리는 그 자체가 동족 증오에 기초한 터무니없는 대량학살 전쟁범죄였고 자기부정에 해당하는 국가범죄였다."
- 이승만 정권이 한국 민간인들에게 저지른 국가범죄가 단순하게 우발적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는지 아니면 고의성이 있다고 보는지?
"이승만정권에 의해 100만 명 이상의 민간인들이 체계적으로 학살당했다. 전쟁 전 국가의 물리력을 동원하여 국민을 토벌하는 폭압에도 집권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전쟁이 발생했다. 이를 예상했다는 듯이 이승만정권은 비상조치령을 공포하였고 국민보도연맹원과 형무소 정치범들을 순차적으로 학살하면서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했다. 한 달 뒤 인민군의 수를 압도한 미군이 북진을 시작하자 인민군 점령지의 민간인들을 '부역자'라며 그 자리에서 학살했으며, 치안이 확보된 후에는 체계적으로 주민들을 연행하여 고문 후 특정지역에서 집단 총살했다. 같은 시기 영호남지역에서는 빨치산을 토벌한다는 국군 11사단이 피난민 등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잔혹행위를 저질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전쟁 발발 직후와 수복 직전 이승만정권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를 결정했던 문서와 증언들을 확보했다. 이 안에는 이승만정권의 고의적인 민간인처리 계획이 들어 있었다. 후퇴하는 동안 점령군에게 협력할 것으로 보이는 민간인들을 집단수용하라는 문서를 만들어 각 기관에 발송했으며, 수복하기 직전에는 처리할 부역자 명단을 작성하는 등 대책회의를 열었다. 전선을 오르내리면서 발생한 대규모 민간인학살 사건들은 이들이 세웠던 계획의 실행을 증명하는 것이다. 완전히 의도했다는 것 외에 다른 설명이 있을까?"
"대규모 민간인학살 계획 문서들 발견... 역사적 진실 규명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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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3월 다시 수복작전을 벌이던 미군에 의해 발견된 학살 장소를 촬영한 것들로서 다음과 같은 설명이 기록되어 있다. "조사관은 1951년 3월 9일 무덤과 노출된 사진을 찍었다. 시신들의 부패 정도로 보아 조사관은 시신들이 4-5개월 동안 그곳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약 35구의) 노출된 시신들은 동양인으로서 민간인 옷을 입고 있었다. 조사관이 검사한 시신들은 모두 유엔군의 표식은 없었다." | |
ⓒ 신기철 |
- 이 땅에서 발생한 민간인학살 혹은 '전쟁범죄'와 관련하여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유족 입장에서는 명예회복일 것이고 내 입장에서는 역사적 진실규명이다.
당장의 구체적 과제는 여전히 말 못하는 유족들의 입을 터주는 것이다. 희생자들이나 유족들의 고통을 풀어주자는 데에는 여야당 정치인들이 반대하지 않던데, 정책으로 결정할 때는 전혀 달라지는 것 같다. 그동안 진실을 은폐하면서 덕을 본 사람들이나, 그냥 그렇게 복종하면서 겨우 안정되게 살았던 유족들에게는 불편한 과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말을 못하면 병이 난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공포정치 이제 그만하고 말이나 좀 하게 해줬으면 한다. 전국의 각 지역사회도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희생자나 유족들에게 너그러웠으면 한다. 어디를 가나 어느 분야에서나 이분들을 소외시키는 게 보인다.
그리고 뜬금없는 말로 들리겠지만, 사건의 재발을 막기 위해서는 가해자 입장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을 '저런 평범한 자도 악인이 될 것 같다'가 아니라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도 저런 악인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성찰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심각한 과제는 인권이 존중되고 평화로운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실질적으로는 정통성 있는 정부를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한다. 관권 금권 부정선거에 다수의 시민들이 지게 되고 그 결과 부패하거나 독재성향의 지도자가 뽑히게 되면 결국 대부분의 시민들이 위험한 지경으로 몰려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을 적으로 여긴 이승만정권의 행태가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국민을 지배하는 자가 아니라 국민을 존중하는 지도자를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 저자 신기철은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심리학과에 다녔으며 인천과 구로, 영등포지역 노동운동과 고양 지역 시민운동에 참여했다. 2004년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2006년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일했다. 지금은 재단법인 금정굴인권평화재단에서 인권평화 연구소장으로 일하면서 지난 조사자료를 분석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 나타난 유족들을 심층면담하고 있다. 저서로는 <진실, 국가범죄를 말하다> <국민은 적이 아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