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이 위험하다
미국 대선 후보로 확정된 트럼프와 클린턴이 각각 제시하는 미국의 미래는 판이하다. 기존 아메리칸 드림을 지지하는 클린턴과 달리 트럼프와 지지자들이 외치는 위대한 미국의 바탕은 ‘두려움’과 ‘배척’이다.
| [465호] 승인 2016.08.18 22:07:17 |
미국 공화당과 민주당은 각각 전당대회를 열고 대선 후보를 확정했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와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는 남성과 여성, 평생 정치 무대에 직접 뛰어든 적이 없는 후보와 평생을 정치 무대에서 대중의 환호와 비난을 함께 받아온 후보라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두 전당대회에서 각 당의 후보자보다 더 확연히 드러난 차이는 바로 공화당과 민주당이 현재의 미국을 바라보는 시각과 그를 토대로 그린 미래 미국의 모습이었다.
7월18일부터 21일까지 나흘간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는 트럼프의 캠페인 슬로건 “다시 미국을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를 주제로 안보·경제 정책, 국가 경쟁력, 화합에 관해 이야기했다. 하지만 공화당 전당대회를 관통한 키워드는 바로 ‘두려움(fear)’이었다. 전당대회 내내 연설은 대부분 현재 미국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지난 8년 동안 범죄가 크게 늘었고 경제는 몰락했으며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불법 이민자들이 살인을 저지르고 미국인들의 일자리를 빼앗았다”라는 규탄이 이어졌다. 외교정책도 비판 혹은 비난 일색이었다. 경제위기를 타개하고 안보를 위협하는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공화당은 트럼프가 내세우는 정책을 선택했다. 트럼프의 정책을 거칠게 요약하면, 미국인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중국에 경제 보복을 가하고 중국산 수입품에 높은 관세를 매기며, 불법 이민자를 막으려 멕시코와의 국경에 대대적으로 장벽을 세우고, 잠재적 테러리스트를 막기 위해 임시로 모든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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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 지난 7월21일 후보 지명 수락 연설을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 그는 유권자들의 ‘두려움’을 자극한다. |
2065년 미국의 백인 비율 46%
미국 언론은 주요 인사들의 연설과 발언이 나올 때마다 부지런히 사실관계를 검증해 보도했다. 사실 확인 결과를 보면, 이들 주장의 근거 가운데 실제가 아닌 것이 꽤 많았다. 먼저 FBI 범죄 통계를 살펴보면 미국의 범죄율은 꾸준히 줄어들었다. 대공황 이후 가장 큰 경제위기였던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실업률은 10%에 육박했지만 오바마 대통령 집권 기간 실업률은 5%로 금융위기 직전보다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고,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한 뒤 일자리 870만 개가 창출되었다(물론 트럼프는 공식적으로 발표하는 실업률은 순전히 사기라고 일축한 바 있다).
불법 이민자의 숫자도 2007년에 1200만명으로 정점을 찍고는 계속 감소 중이며, 시리아 내전이 발발한 2011년 이후 미국이 받아들인 시리아 난민은 2290명에 불과하다(참고로 유엔 난민기구가 집계한 시리아 난민은 총 480만명으로 이 중 300만명이 레바논·요르단·터키에 있다. 2016년 4월 기준 독일은 60만명에 이르는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였다).
전당대회 무대를 장식한 주장들을 토대로 지금 공화당이 가는 방향을 가늠해보면 과거의 공화당과는 확실히 다른 길을 선택한 듯하다. 전통적으로 공화당은 미국 예외주의를 강조해왔다. 누구나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을 강조하며 미국을 기회의 땅으로 그려왔다. 현상 유지나 기득권 체제에 대한 불만은 늘 진보와 민주당의 몫이었지만, 이번 선거는 그 역할이 민주당에서 공화당으로 넘어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종과 종교의 다양성이 증가하고 지금까지와 달리 백인이 살던 방식이 주류의 지위를 잃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두려움이 공화당,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 사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미국은 변화하고 있다. 1965년에 미국은 인구의 80% 이상이 백인이었다. 이 비율은 2016년 현재 64%로 낮아졌고, 2065년에는 46%까지 떨어질 전망이다. 반면, 지난 50년간 미국으로 이주한 이민자는 5900만명으로 대부분이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출신이다. 현재 히스패닉(중남미계 이주민) 인구는 미국 전체 인구의 18%를 차지하지만 2065년에는 24%로 높아질 전망이다. 아시아계 인구도 현재 5%에서 2065년에는 전체 인구의 14%로 급격히 상승할 것으로 보인다. 1965년에는 미국 인구 가운데 미국 밖에서 태어난 사람의 비율이 5% 정도였다. 이 비율은 오늘날에는 14%에 이른다. 인구 구성의 변화는 곧 유권자 지형의 변화를 뜻한다. 2000년 대선에서 전체 유권자 가운데 백인은 78%였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이 비율이 69%로 떨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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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UTER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의 선거 구호는 ‘함께할 때 더 강하다’이다. 지난 7월31일 애슐랜드 유세 장면. |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여론도 급격하게 바뀌었는데 대표적인 것이 동성 결혼에 관한 여론이다. 2001년만 하더라도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의견이 찬성하는 의견보다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오늘날 미국 인구의 55%가 동성 결혼을 찬성한다. 특히 1980년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는 네 명 중 세 명이 동성애를 지지한다. 종교 역시 마찬가지다. 2007년만 해도 아무런 종교가 없다고 말한 사람이 전체 인구의 16%였지만, 이 비율은 2014년에 23%로 늘었다. 자신을 기독교인이라고 답한 사람은 같은 기간 78%에서 71%로 줄었다.
이렇게 인종과 종교, 그리고 삶의 방식에서 다양성이 증가하는 현실에서 공화당과 민주당은 정반대 선택을 했다. 공화당은 여전히 백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미국적인 삶이 곧 백인의 삶이었던 ‘전통적인 미국’을 이상화한다. 선거분석 전문 기관인 업샷에 따르면, 트럼프 지지자들에게 미국이 가장 위대했던 시절이 언제인지를 물었을 때 75%는 지금보다 1960년대 중반이 훨씬 좋았다고 답했다.
민주당의 전략은 달랐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여실히 드러났듯이 민주당은 인종과 종교, 그리고 삶의 방식에서 다양성을 포용했고 이를 당의 정책에도 적극적으로 반영하려 노력했다. 다양성의 포용은 민주당을 하나로 통합하는 강력한 의제가 되었다. 민주당 의원이라고 해서 모든 정책에서 같은 목소리를 내는 것은 아니다. 경선 기간 드러난 힐러리 클린턴과 버니 샌더스의 정책에도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차이를 인정하면서 다양성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것은 어느새 민주당의 브랜드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선거 구호 “함께할 때 더 강하다(Stronger Together)”는 이를 단도직입적으로 보여준다. 힐러리 클린턴은 후보 수락 연설에서 쉽지 않은 도전을 헤쳐나갈 수 있는 힘의 핵심은 바로 미국이 전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에 누가 표를 주는지를 살펴보면 민주당이 다양성을 핵심 가치로 내세우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소수 인종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를 살펴보면 흑인의 95%, 히스패닉 유권자의 70%가 민주당을 지지한다. 지난 20년간 아시아계 유권자들의 투표 행태 변화는 훨씬 더 극적인데, 대체로 학력과 소득 수준이 높고 종교 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공화당의 지지층과 유사한 면이 많았다. 실제로 과거 대선에서 아시아계 유권자들은 공화당을 지지했다.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였던 빌 클린턴은 아시아계 유권자들로부터 36%의 지지밖에 받지 못했다. 하지만 2012년 선거에서 오바마 후보는 아시아계 유권자들에게 73%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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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A 2010년 4월15일 미국 국회의사당 앞에 모인 공화당 지지 티파티 운동원들. |
공포, 공화당의 강력한 선거 도구가 되다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다른 인식은 자연히 다른 정책 대안으로 이어졌다. 전 세계에서 기회를 찾아 미국으로 이민 오는 사람들을 미국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하는 민주당은 이민을 확대하고 불법 이민자들의 자녀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는 쪽으로 이민 정책을 개혁하고자 한다. 반면, 이민자들이 들여오는 ‘다른 방식의 삶’과 종교가 ‘전통적인’ 미국인의 가치를 위협하고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아가며 미국의 안보에 위협을 가한다고 생각하는 공화당은 미국에 와 있는 이민자들을 다시 돌려보내거나 앞으로 들어올 이민자들을 최대한 차단하는 정책을 제안하고 있다.
공화당 지도부와 주요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공화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트럼프를 둘러싼 분열과 불신이 감지되지만, ‘타인에 대한 두려움’은 트럼프 지지를 이끌어낸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의 원천은 어디이고, 왜 이런 두려움이 트럼프가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일까? 학자들은 진보와 보수가 경계심을 느끼는 정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다양한 실험을 통해서 증명해왔다. 특정 이미지나 자극을 주었을 때 뇌파나 눈동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통해서 학계 연구는 보수적인 사람이 훨씬 더 경계심이 강하며 자신과 다르거나 불편한 이미지를 보았을 때 보수적인 사람일수록 스트레스 수치가 올라간다는 것을 밝혀내기도 했다.
하지만 생물학적 차이에 주목한 설명은 왜 트럼프가 공화당 대선 후보로 떠올랐는지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경계심이 강한 건 원래 보수적 유권자들의 특징이었는데 왜 이번 선거에서는 두려움을 공략한 전략이 먹혔을까? 공화당 지도부가 탐탁지 않게 여기는 트럼프를 대통령 후보 자리까지 끌어올린 구조적인 원동력이 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20년간 공화당의 정책과 지지 기반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화당은 시장경제와 작은 정부를 외치며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책을 지지해왔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서 최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이르기까지 모든 자유무역협정을 지지했고 부자 감세와 탈규제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미국 인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소득이 높을수록 공화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높긴 하지만, 2008년 오바마 대통령 취임 이후 소득이 낮고 교육 수준이 낮은 블루칼라 백인들이 공화당을 지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늘어났다.
오바마 집권 이후 시작된 공화당 내의 풀뿌리 조직 티파티의 영향으로 교육 수준과 소득 수준이 낮은 유권자들이 공화당 예비 경선 과정에서 더 많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은 세계화와 기술 발전의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었거나 과거보다 실질임금이 줄어든 사람들이다. 티파티의 주장은 공화당 지도부나 전통적인 공화당 정치 엘리트들의 정책과 다르지만, 공화당 지도부는 상·하원 선거에서 이들의 지지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당내 지지 기반 사이에 큰 균열이 있음에도 이를 계속해서 묵인해왔다. 공화당 내 블루칼라 유권자들은 지속적인 실질임금 감소와 일자리 감소, 불안한 노후 대책이 가장 중요하지만, 공화당 의원들은 이런 문제에 장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 대신 여전히 기업과 부자를 위한 세금 감면 정책을 펴면서 선거 국면에서는 이민자의 증가와 관련해 보수 성향 유권자들이 가진 두려움을 적극 활용했다.
1873년부터 2009년까지 의회 연설문을 분석한 최신 논문에 따르면, 실제로 공화당 의원들이 1994년 중간선거에서 1952년 이후 처음으로 하원 다수당이 된 이후로 사람들의 불안을 조장하거나 당파성이 짙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Matthew Gentzkow, Jesse M. Shapiro, Matt Taddy. <Measuring Polarization in High-Dimensional Data:Method and Application to Congressional Speech>).
사회안전망 부족했던 미국이 맞을 부메랑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의 등장은 공화당을 지지했지만 친기업 부자 중심의 정책에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했던 공화당 내의 저소득·저학력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을 제시했다. 트럼프 지지자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집단은 백인이면서 고등학교 이하의 학력, 그리고 과거 제조업이 중심일 때 경제 번영을 누렸지만, 기술과 정보, 서비스 중심의 경제로 전환하면서 적응에 실패한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유가 이민자들 때문이고, 중국이 미국과 공정하지 않은 무역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민자를 제한하고 중국에 무역 보복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트럼프를 지지한다. 세계화가 제조업과 같은 전통적인 일자리에 타격을 준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지만, 트럼프가 제시하는 정책이 공화당의 블루칼라 유권자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해줄 수 없다는 것은 상식적인 수준에서도 판단 가능하다.
지난 30년간 대부분의 선진국은 세계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영국·캐나다·독일·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 비해 미국에서 세계화와 자유무역에 대한 지지 여론은 현저히 낮은 편이다. 그 이유 중 하나로, 학자들은 정부가 세계화로 인해 제조업이나 농업에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직업교육을 제공하거나 충분한 사회안전망을 보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유무역과 세계화가 가져오는 문제를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식은 무역과 사람들의 국경을 넘어선 이동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교육 관련 지출을 늘리거나 최저임금 인상 등 사회보장 제도를 확충해 큰 변화를 겪게 될 사람들이 받는 충격을 줄여주는 것이다.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드러난 공화당의 기조, 그리고 트럼프의 정책은 그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을 오히려 트럼프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로 만들 가능성이 높다. 기회주의적인 정치인들이 선거 승리를 위해서 만들어낸 두려움의 수사는 공화당에서 가장 소외되었던 계층에 대통령 후보를 선출할 권한을 줬지만, 역설적으로 이 유권자들은 트럼프가 당선되면 자신들의 선택 때문에 경제적으로 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할 수도 있다.
공화당의 위기가 곧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
19세기 말부터 미국은 양당 체제로 굴러왔다. 양 날개 중 하나가 망가지면 안전 비행을 못할 수 있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미국을 분단으로부터 구해낸 링컨의 정당인 공화당이 오늘날 처한 위기는 곧 미국 민주주의의 위기다.
조회수 : 3,459 | 정승구 (영화감독·작가)
240년 전 여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낭독된 한 문서가 세계사를 바꿔버렸다. 그 유명한 독립선언문이다. 영국 군주제의 폭정을 성토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자유주의자이자 공화주의자이며 민주주의자였던 토머스 제퍼슨이 작성했다. 그리고 몇 년 후 미국은 혁명전쟁에서 승리했다. 미국이 탄생한 필라델피아에서 지난 7월28일 민주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올해 대선의 정·부통령 후보로 힐러리 클린턴과 팀 케인을 지명했다.
전당대회의 시작은 매끄럽지 않았다. 민주당 수뇌부의 편파적인 경선 관리 정황에 대한 위키리크스의 폭로로, 반(反)클린턴 항의 시위와 야유가 끊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마지막 날, ‘투게더(함께)’를 강조하며 부드럽고 하얀 투피스를 입은 클린턴은 이미지 세탁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는 내용·구성·연출 모두 훌륭했다. 현직 대통령 내외, 할리우드 스타들, 소수자와 일반인 이민자들까지 출연해 대선 프레임을 ‘클린턴 대 트럼프’가 아닌 ‘정상 대 비정상’으로 짰다. 민주당의 ‘빅텐트(Big Tent)’에는 세계적인 갑부 마이클 블룸버그부터 민주적 사회주의자 버니 샌더스까지 들어왔다. 새로 쓰인 정강 정책에는 최저임금 인상, 금융계 규제, 탄소세 제도 등 샌더스가 주창해온 다수의 정책이 추가됐다. 물론 이런 공약들은 월스트리트를 대변하는 클린턴이 선심으로 넣어준 것이 아니다. 지난 1년간 샌더스의 ‘정치적 혁명’에 동참한 이들이 치열하게 싸워 얻어낸 결실이다. 개방형 체제에 안착한 민주당이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실현하는 모습은 나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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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위키 19세기 중반 ‘노예제 반대’라는 도덕적인 노선으로 급성장한 미국 공화당은 1860년 대선에서 링컨(왼쪽에서 세 번째)의 선전으로 처음 정권을 잡았다. |
한 주 먼저 치러진 공화당 전당대회는 완전히 다른 ‘대안 우주’였다. ‘미국의 위기’를 거듭 강조한 공화당 전당대회는 분노와 증오로 충만했지만 유희는 찾기 힘들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불안한 미래를 우려했지만 정작 트럼프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공화당 전당대회를 지켜본 많은 이들은 아마 이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아니! 어쩌다 노예제를 폐지하고 미국을 분단으로부터 구해낸 링컨의 정당인 공화당이 인종차별주의자 트럼프를 대선 후보로 배출했을까?’
오늘날의 공화당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정부의 시장 개입을 반대하며 친기업 정책을 선호한다. 당원 및 지지자의 다수는 백인이고 남부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다. 하지만 늘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세기 중반 미국은 서부로 확장하며 개척지에 노예제를 허용할 것인지를 두고 뜨거운 논쟁에 휩싸였다. 당시 노예제가 합법이던 남부에 지지 기반을 둔 민주당은 찬성했다. 그러나 북부를 본거지로 삼은 휘그당(Whig Party)은 찬반으로 나뉘었다. 1854년에 휘그당에서 분당해 창당한 공화당은 백인들의 노동시장에 엄청난 타격을 주는 노예제가 서부에서도 허용되면 남부의 영향력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것을 우려했다. 그렇게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노선으로 급성장한 공화당은 1860년 대선에서 링컨의 선전으로 처음으로 정권을 잡는다. 그러자 노예제 폐지에 반발한 남부의 11개 주는 미합중국을 탈퇴하며 남부연합국가(Confederate States of America)를 만들었고, 이는 남북전쟁으로 이어졌다. 북부의 승리로 노예제는 폐지됐고, 공화당은 해방된 흑인들의 인권 향상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남북전쟁과 재건 시대에 이뤄진 막대한 정부 지출로 엄청난 부를 챙긴 북부의 신흥 부자 계급은 공화당의 후원과 지도부 역할을 도맡기 시작했다. 이런 공화당의 변화는 백인들이 다수인 국가에서 가난한 흑인들을 위해 자원을 낭비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여론을 조성한다. 같은 시기에 민주당의 남부에서는 체계적이고 폭력적으로 인종차별이 이뤄졌다. 공화당은 미국이 연방제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이런 작태를 방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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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루스벨트 대통령 취임식 장면. 이때부터 민주당이 20년간 집권했다. |
우리가 아는 공화당은 1980년 레이건이 완성
20세기가 되자 공화당은 아예 대기업들의 당이 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초의 호황은 대공황으로 막을 내렸고, 1932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뉴딜 정책으로 대대적인 사회개혁을 이뤄낸다. 그러면서 연방정부의 역할과 크기는 거대해졌다. 민주당의 20년 장기 집권은 공화당을 ‘큰 정부에 반대하는 당’으로 변신시킨다.
1960년대에 미국은 다시 인종 갈등으로 흔들렸다. 1964년 존슨 대통령(민주당)은 민권법(Civil Right Act)을 통과시켰다. 사실 이 법은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중심으로 수많은 흑인 인권운동가들의 피와 희생으로 이뤄낸 역사적인 승리였다. 이 법 통과로 민주당은 흑인들을 얻었지만, 남부를 공화당에 빼앗겼다. 이어서 1980년 대선에서 레이건이 친기업, 감세, 보수적 가족관 등에 기반한 정책들을 내세워 당선되면서 오늘날 우리가 아는 공화당의 정체성이 확립됐다.
21세기로 접어들며 미국의 인구 구성은 급변한다. 원래 미국은 태생적으로 이민자의 나라다. 1980년 2억2650만 인구 중 1460만명이던 히스패닉계가, 2010년에는 3억900만 인구 중 5000만명 이상을 차지하게 된다. 오바마는 친이민 정책으로 1000만명에 달하는 불법 이민자들이 미국에 안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다. 이와 반대로 공화당은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강경 노선을 고수한다. 두 당의 이런 차이는 2012년 대선 득표로 나타났다. 히스패닉계의 70% 이상이 오바마를 찍었다. 같은 선거에서 여성·흑인·소수자들과 젊은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공화당은 민주당에 패했다. 백인이 줄어드는 미국에서 공화당은 점점 더 백인에게만 의존하는 당이 되어버렸다.
위기의식을 느낀 공화당 상원의원 존 매케인과 마르코 루비오는 2013년 민주당과 협력해 이민법 개혁안을 추진한다. 그러자 공화당의 중년 백인 남성들은 지도부가 자신들의 일자리를 불법 이민자들에게 넘겨준다며 거세게 반발했다. 이런 공화당 내의 분열과 불신, 분노와 불안은 트럼프라는 고립주의 선동가가 출몰할 수 있는 토양을 조성했다.
반면 민주당은 이미 오래전 인종차별주의 정당에서 벗어나 오바마의 당으로 진화해오며 역사의 방향과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았다. 1992년 빌 클린턴의 후보 수락 연설과 2016년 힐러리 클린턴의 연설을 비교해보면 민주당의 변천사를 단박에 알 수 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중도 보수에 가까운 빌에 비해 힐러리는 상당히 좌클릭되어 있다. 남편 빌이 재임 시절 폐기한 글래스-스티걸법(대규모 금융복합체 설립을 막기 위해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합병을 금지한 법률)을 부활시키겠다는 힐러리의 공약이 이를 증명한다.
공화당의 위기는 오는 11월 선거 이후, 더욱 심화될 것이다. 트럼프와 그의 패거리들은 퇴장할 것이고, 그 뒷수습은 고스란히 당원들 몫이 된다. 당 지도부와 당 원로 대부분이 불참한 올해 공화당 전당대회는 근대사에서 보기 드문 사건이다. 당의 구심점이 없는 상황에서 단기간에 당을 재건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무엇보다 공화당의 가장 큰 문제는 시대에 걸맞은 철학이 없다는 것이다. ‘21세기 보수란 무엇인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하다. 어쩌면 이는 이미 가진 것 또는 옛것을 지키려는 보수의 생리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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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P 지난 5월1일 로스앤젤레스 시내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히스패닉 이민자들의 시위가 열렸다. |
이변 없는 한 클린턴이 당선되겠지만…
공화당의 몰락은 미국 민주주의의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양당 체제가 제도화된 미국은 건실한 두 정당에 의존한다. 미국은 양 날개 중 하나가 망가지면 안전 비행을 못할 수 있다. 특정 세력만을 위해 제도적인 견제 없이 권력을 누리는 이는 누구나 폭군이 될 수 있다.
석 달 남은 미국 대선의 결과를 예단하기는 이르지만, 이변이 없는 한 클린턴이 당선될 것이다. 플로리다·오하이오·펜실베이니아 세 주 모두에서 그녀가 승리하리라 예상된다. 어차피 미국의 간선제 대선은 몇몇 경합 주에서 결판이 난다. 오히려 이번 선거에서 주목할 부분은 하원 435명, 상원 34명과 주지사 12명을 선출하는 총선이다. 민주당이 2016년 총선에서 선전하더라도 차기 클린턴 정권에게는 무거운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의 참여가 많을수록 숙의민주주의를 실현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대중을 이끌어내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 그들을 이끌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대선은 결코 먼 나라에서 일어나는 남의 일이 아니다. ‘고난을 벗 삼아’ 국정을 운영하는 박근혜 대통령이나, 집권 의욕으로 ‘반대’를 외치는 야당 정치인들은 다들 사드 배치를 돌이킬 수 있는 최종 결정권자가 아니다. 전시작전권만이 아니다. 대미 통상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그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조만간 한국의 정당들도 전당대회를 연다. 대다수 국민은 관심이 없다. ‘빅텐트’는커녕 지난 대선의 후보들 이름을 딴 계보로 몰려다니는 행태를 보면 ‘폐쇄적 떨거지들’이라는 욕이 절로 나온다. 미국 정당들이 역사의 흐름에 맞춰 변해왔다면,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 정당들은 몇 년마다 갈아치우는 당명 말고 해방 이후 본질적으로 얼마나 진화했는지 의문이 든다.
정당들이 건강해야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한다. 폭정을 일삼는 이들만이 폭군이 아니다. 제도적 이익을 착복하며 정부(government)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않는 ‘세금충’이야말로 더 음흉하고 위험한 폭군일지도 모른다.
제퍼슨은 인간 사회가 만들어낸 ‘필요악’ 정부를 견제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부가 정녕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그는 이런 대안을 제시했다. “자유의 나무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때때로 애국자들과 폭군들의 피가 필요하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 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다.
미 대선을 뒤흔드는 러시아 해킹 배후설
미국 민주당 전산 시스템이 최근 연달아 해킹을 당했다. 그 배후로 러시아가 강하게 의심받고 있다. 클린턴과 깊은 악연을 간직한 푸틴이 벌인 일이라는 정황이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보복할 만한 수단이 마땅치 않다.
조회수 : 1,033 |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오는 11월 대선을 3개월 앞둔 미국이 때 아닌 ‘러시아 커넥션’으로 시끌벅적하다. 최근 미국 민주당의 전산 시스템이 잇따라 해킹당하는 해괴한 일이 벌어졌는데, 그 배후로 러시아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를 그대로 방치할 경우,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까지 개입해서 자국에 유리한 후보로 투표 결과를 조작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 연방수사국(FBI)이 공식 수사에 착수한 데 이어 해외 감청 전문기관인 국가안보국(NSA)은 물론 중앙정보국(CIA)까지 측면 지원에 나서며 해킹의 배후를 추적 중이다.
폭로 전문 웹사이트인 위키리크스는 민주당 전당대회 사흘 전인 7월22일, 민주당 전국위원회(DNC:대통령 후보 경선 등 민주당의 각종 행사를 주관) 지도급 인사 등의 이메일 1만9252건을 폭로했다. 공개된 내용들에 따르면, DNC가 그동안 대선 후보 경선 국면에서 힐러리 클린턴을 일방적으로 편들며 버니 샌더스 진영의 선거운동을 방해했다는 의혹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데비 슐츠 DNC 위원장이 전격 퇴진했다. 7월25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는 한때 흥분한 샌더스 지지자들의 야유와 시위로 혼란스러웠으나 피해 당사자인 샌더스가 직접 나서 클린턴 지지를 호소하면서 봉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민주당 전당대회 마지막 날인 7월29일, 민주당 하원선거위원회(DCCC:당 소속 하원 후보들을 위해 모금 등 각종 지원활동을 제공하는 조직)도 자체 컴퓨터 시스템에서 해킹 흔적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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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미국 워싱턴 D.C.의 민주당 중앙당사 건물. 최근 민주당 전산 시스템이 잇달아 해킹 공격을 받았다. |
민주당이 이처럼 사상 초유의 해킹 사건에 휘말린 가운데 러시아 푸틴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칭찬한 바 있는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러시아가 해킹했다면 클린턴이 국무장관 시절 불법으로 주고받은 이메일 3만3000건도 찾을 수 있길 바란다”라며 오히려 러시아의 해킹을 부추기는 황당 발언을 해 빈축을 샀다. 이에 맞서 클린턴은 보수 방송인 <폭스 뉴스>에 출연해 “러시아 정보기관이 DNC를 해킹해 많은 이메일이 유출됐다. 트럼프 후보가 푸틴을 지지하는 것 같아서 매우 우려스럽다”라며 해킹의 배후로 러시아를 지목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NBC 뉴스 측이 “러시아가 미국 대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가?”라고 질문하자 “무엇이든 가능하다”라고 답변했다.
오바마 대통령까지 이번 해킹의 배후로 러시아를 암시하면서 수사 당국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최근 ABC 뉴스 보도에 따르면, NSA 해킹 전문팀은 이번 사건의 용의자를 확정하기 위해 ‘역해킹’ 작전을 추진하고 있다. CIA도 신설된 디지털혁신국 주도로 수사에 공조하고 있다. 현재 미국 정보·수사 당국은 비록 공식적으로 러시아를 ‘배후’로 지목하지는 않았으나 러시아 정보기관인 연방보안국(FSB)과 군정보국(GRU)을 주요 용의선상에 올려둔 상태다.
만일 이번 해킹 사건이 러시아 측의 소행이라면,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목적으로 이런 일을 벌였을까? 현재 워싱턴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설(說)은 ‘클린턴과 푸틴 간 뿌리 깊은 반목과 불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 전문 매체인 <폴리티코>에 따르면, 클린턴은 연방 상원의원 시절인 2008년 푸틴을 ‘영혼이 없는 인간’으로 폄하한 바 있다. 푸틴의 KGB(옛 소련 시절, 비밀경찰 및 첩보조직이었던 국가보안위원회) 경력 때문이다. 클린턴은 오바마 행정부 1기의 국무장관으로 취임한 2009년 1월 이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푸틴에 대한 경멸감과 증오감을 표현한 바 있다. 특히 2011년 12월 러시아 총선이 부정 시비에 휘말리면서 모스크바 시민 수만명이 거리로 몰려나와 격렬한 푸틴 반대 시위를 벌였을 때, 푸틴은 시위를 부추긴 ‘주범’으로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던 클린턴을 지목했다. 당시 라트비아를 방문한 클린턴이 “러시아 국민은 자유롭고 공정하며 투명한 선거로 책임 있는 지도자를 선출할 권리가 있다”라며 시위 군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이다. 당시 격노한 푸틴은 여러 경로를 통해 오바마에게 강력히 불만을 토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건 이후, 클린턴과 푸틴 사이의 악감정은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됐고, 결국 이번 같은 ‘보복 해킹’으로 이어졌을 공산이 크다는 지적이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러시아 담당 국장 출신으로 주 러시아 대사를 지낸 마이클 맥폴은 <폴리티코>에 “푸틴은 당시 클린턴에게 크게 격노했는데 이후에도 오랫동안 분을 삭이지 못했다. 이번 해킹이 (푸틴의) 보복일 개연성은 충분하다”라고 밝혔다. 시사주간지 <타임> 최근호도 “러시아가 정말 트럼프를 위해 미국 대선에 개입하기 시작했다면 클린턴에 대한 푸틴의 악감정이 충분히 동기가 될 만하다”라고 지적했다.
러시아가 미국 대선 전산 시스템을 공격한다면…
문제는, 러시아가 이 해킹의 ‘진범’으로 판명된다 해도 미국 정부가 보복할 만한 수단이 뚜렷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바마 행정부 내에선, 러시아 FSB와 GRU에 대한 보복 사이버 공격에서부터 경제제재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조치를 단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최근 미국 처지에서는 시리아 내전 등 굵직한 국제 현안을 풀어나가려면 러시아의 협조가 절실한 상태다. 그래서 미국 정부가 이 같은 외교적 고려를 무시하고 단호한 보복조치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관측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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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2012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푸틴(왼쪽)과 클린턴. 둘은 사실 앙숙이다. |
미국 정부는 예전부터 러시아에 관해서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여왔다. 2014년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 측의 ‘산업 스파이’ 행위를 거론하며 시진핑 주석을 압박한 바 있다. 올해 3월에는 이란이 미국 은행들을 해킹했다고 주장했다. 지난해 초에는 북한이 소니 영화사를 해킹했다며 경제제재를 했다. 이런 나라들에 비해 러시아는 지금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에 사이버 공격을 가했다는 혐의를 받아도 별 제재를 받지 않았다. 미국 국방부 합참본부실 이메일 시스템(지난해 8월), 미국 국무부 고위 관리와 우크라이나 주재 미국 대사 간의 통화 내용(2014년), 백악관 컴퓨터 시스템(2013년 10월) 등을 해킹한 주범이 러시아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러시아를 해킹 배후로 지목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이번 해킹의 주범이 러시아로 밝혀질 경우, 미국 정부가 어떻게 대응할지도 관심사다. <뉴욕 타임스>는 “미국 정부가 대응하지 않는다면 무거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앞으로 (해킹 등) 불장난할 기회가 더 많아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라고 경고했다. 미국 외교협회(CFR) 제니퍼 해리스 선임연구원은 “오는 11월 대선 직전 이런 해킹이 재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라고 우려를 표시했다. 예컨대, 러시아 해커들이 대선 직전 플로리다나 오하이오 같은 경합 주의 투표 시스템이나 전력망을 공격해서 미국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사이버 보안 전문가인 로버트 리는 인터넷 인기 시사 매체 <시커(Seeker)>와 인터뷰하면서 “가능할 것이다. 투표 시스템 제작회사들과 이들의 보안 체계를 들여다보면 아주 문제가 많다”라고 우려했다. 지난 7월 말, 전·현직 정보 당국 및 국가안보 고위 관계자들이 참석한 아스펜 안보포럼에서 존 칼린 국가안보담당 법무차관보는 “우리가 억제적 조치도 취하지 않고 해킹을 묵묵히 참고 견딜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코다치게 될 것이다”라고 러시아에 은근한 경고를 보냈다.
"SNS가 트럼프 괴물을 만들었다. 우리는?"
2016.08.19 08:38:39
[프레시안 books] <도널드 트럼프>
지난 3월 28일, 미국 배우 수전 서랜던(Susan Sarandon)의 MSNBC와 인터뷰가 논란을 일으켰다. 이번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중 누구에게 투표하겠느냐는 질문에 관한 대답이었다.
"모르겠다.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겠다. (…) (힐러리 클린턴이 당선된다면 예상되는) 현상 유지는 이제 작동하지 않는다. 군사화된 경찰력, 민영 교도소, 사형제, 낮은 최저 임금, 여성 권리에 대한 위협 등(은 유지 가능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계속 갈 수 있고, 그런 걸 되돌리는 큰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하다."
논란이 된 이유는 자명하다. 수전 서랜던은 미국을 대표하는 진보적 영화배우다. 그는 단순한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다. 그는 과거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 대신 랠프 네이더와 같이, 그간 미국 주류 사회가 받아들이지 못한 인물을 누구보다 앞장서 지지했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서랜던은 버니 샌더스를 지지했다.
그런 수전 서랜던이 혐오로 뭉친 듯한, 삼류에 불과해 보이는 도널드 트럼프와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가능한 힐러리 클린턴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고 실토했다. 단순히 샌더스 탈락에 관한 분풀이가 아니었다. 서랜던은 "일부 사람들은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되면 즉각 혁명을 할 거라고 느끼고,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 거다. 세상이 뒤집힐 거다"라고 말했다. 트럼프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는 말이다. 미국 언론은 서랜던의 이와 같은 발언을 두고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대부분 유력 보수 언론도 도널드 트럼프에 등을 돌린 마당이었다.
트럼프는 위험하다. 하지만,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된다손 쳐도 악의 제국이 된 미국이 바뀔 건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기존 시스템에 균열을 낼 가능성을 보여준 트럼프가 차악으로 나을 수도 있다는 게 서랜던의 고민이었다. 서랜던은 "트럼프가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꺾고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가 상상해온 어떤 공약도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상의 에피소드를 포함해, 강준만 전북대학교 교수의 새 책 <도널드 트럼프>(인물과사상사 펴냄)는 이번 미국 대선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을 둘러싼 미국의 고민과 기대를 여과 없이 드러낸다. 아울러 도널드 트럼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어떻게 미국 대선이라는 큰 무대로 이어졌는가도 살핀다. 강준만 교수 특유의 엄청난 분량의 자료 조사 결과가 책에 꽉 들어찼다. 강준만 교수는 이 조사의 결과로, 특히 언론과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도 트럼프를 만들고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책을 읽으면, '정치의 죽음'이라는 이 책의 부제가 어떤 의미인가가 손에 잡힌다. 말 그대로 트럼프는 기성 정치에선 도저히 상상하기 힘든 수준의 저질 인간이다. 이런 사람이 미국을 통솔한다면, 이는 인류에 재앙이 되리라는 건 너무나도 합리적 추론으로 보인다. 이런 사람이 링컨을 낳은 공화당 경선을 완주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정치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의 정신 구조를 드러내는 막말 수준은 이미 일정 선을 넘어섰다.

▲ 세계의 극우화와 맞물려 일어난 트럼프 현상은, 어쩌면 이제 본격적인 시작인지 모른다. ⓒflickr.com
"낙태 여성들을 처벌해야 한다." (2016년 4월 5일 위스콘신주 경선 직전)
"폭스 시청자들이 빔보(bimbo, 지적이지 않은 금발 백인 여성을 대상화하고 폄하하는 속어)에게 낮은 점수를 줄수록 켈리는 (인기 프로그램 진행자에서 물러나) 다른 프로그램을 고려해야 할 것." (2015년 8월 6일 폭스뉴스 주최 공화당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회 직후 트위터에서. 트럼프는 이밖에도 폭스뉴스 진행자 메긴 컬리를 성적으로 비난하는, 인용하기 힘든 수준의 막말을 트위터상에 마구 쏟아냈다.)
"미국에 있는 무슬림들을 반드시 (국가 감시 명단에) 등록해 데이터베이스화해야 한다." (2015년 11월 19일 아이오와주 유세에서)
"(저런 놈은) 두들겨 맞았어야 한다." (2016년 2월 22일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선거 유세에서 자신의 지지자들과 충돌한 인종 차별 비판 인권 단체 '블랙 라이브스 매터' 회원을 두고.)
"카슨이 여전히 치료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질병을 갖고 있다. 약을 제대로 먹지 않으면 비정상적인 질병은 낫지 않는다." (2015년 11월 12일 CNN의 <에린 버넷 아웃프론트>에 출연해 경선 경쟁자였던 의사 출신 벤 카슨의 어릴적 '과격한 성향'을 문제 삼으며)
"우리는 한국을 사실상 공짜로 방어하고 있다. 2만8000명의 미군을 (한국에) 두고 있으며, (미국의 보호를 받는) 한국은 부를 축적하고 있다." (2015년 10월 18일 폭스뉴스에 출연해)
"일본과 한국이 북한이나 중국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핵무기를 개발·보유하는 것에 관해 '열린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이 두 나라가 미국의 핵우산에 기대는 것보다 낫다고 본다." (2016년 3월 26일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미국은 법치 국가로서 국경을 필요로 한다. (미국과 멕시코) 국경에 대형 장벽을 설치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다." (2015년 11월 10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경선 후보 4차 텔레비전 토론에서)
"종교 지도자가 한 사람의 신앙에 의문을 제기하는 건 수치스러운 일이다. 나는 기독교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 만일 바티칸이 공격 받는다면 교황은 그제야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선출되길 바라며 기도할 것이다." (2016년 2월 11일 <폭스 비즈니스 네트워크>와 인터뷰에서 이주민 혐오 발언을 일삼는 자신을 비판한 프란치스코 교황을 두고.)
애초 트럼프는 정치권과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도널드 트럼프>는 대선 후보 이전 사업가 시절 트럼프의 삶을 정리했는데, 이 책에서 그는 무자비한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거부가 된, 전형적인 천박한 부자에 가깝다. 트럼프 삶의 이력을 살펴보면, 그가 진작부터 여성을 성적 대상 이상도 이하로도 여기지 않은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성공을 거침없이 자랑하고, 사업 성공을 위해서는 위법도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모습에서는 미국식 거부의 천박한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번 경선에서도 트럼프는 부를 숨기고자 하는 보통의 정치인과 달리, 부자 마케팅을 주요한 홍보 수단으로 사용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트럼프 검증팀이 제기한 '러시아 마피아 연계설'에 따르면, 트럼프타워 건설 당시 트럼프는 러시아계 마피아 펠릭스 세이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다. 건실한 기업가라기보다 넷플릭스 드라마 <데어데블>에 나온 악당 윌슨 피스크(킹 핀)의 모습에 가깝다. 아마존 CEO 제프 베저스가 인수한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중이다.
이런 인물이 올해 대선 무대에까지 오른 가장 큰 계기는 TV리얼리티 쇼 <어프렌티스>다. "넌 해고야! (You are fired!)"라는 말을 유행시킨 이 프로그램은, 출연자 16명이 15주 동안 경쟁을 벌인 후, 최종 승리자가 25만 달러의 연봉을 받는 트럼프 회사에 입사한다는 포맷의 리얼리티 쇼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는 매주 한 명에게 해고를 통보한다.
이 프로그램의 대성공으로 트럼프는 천박한 사업가에서 단숨에 카리스마를 지닌 사업가이자 성공 전도사로 변했다. 이제 대중은 트럼프의 말을 경청한다. 트럼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언론을 통해 전파된다. 트럼프의 생각이 대중의 가려운 곳을 긁는다. 대선후보라고 안될 것 없잖은가? 책을 읽다 보면, 트럼프가 대선 또한 리얼리티 쇼로 생각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다.

▲ 도널드 트럼프 영웅화의 기반이 된 TV 프로그램 <어프렌티스>. ⓒyoutube.com
트럼프의 등장이 '정치의 죽음'인 다른 이유는, 실제 경쟁자들과 트럼프가 별 차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치 무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공화당 대선 후보들은 그저 점잖은 트럼프일 뿐이다. 트럼프의 경쟁자였던 테드 크루즈 상원의원은 미국 극우단체 티파티의 기린아다. 공화당이 트럼프의 등장에 그토록 신경을 곤두세운 이유는, 트럼프가 너무나 솔직하게 자신들의 심정을 대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
이는 여론 조사, 정책 분석 등을 통해 드러난다. 2015년 12월 9일 <블룸버그 폴리틱스>에 따르면, "무슬림의 입국을 막아야 한다"는 트럼프의 막말을 지지한다는 공화당 유권자가 65%에 달했다. <폴리티코>는 "공화당 거물 일부는 트럼프의 주장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의 백인 우월주의 웹사이트 '스톰프런트(stormfront)'는 방문자 트래픽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서버를 업그레이드했다. KKK단도 트럼프에 친밀감을 드러냈다. 아직도 현존하는 KKK단은 수장인 '대마법사(직책명)' 데이비드 듀크를 이번 선거에서 상원의원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에 관해 강준만 교수는 "위축된 백인 중산층의 반이민 정서, 민족주의 성향은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트럼프가 해준다'는 대리만족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성 혐오, 비 백인 혐오, 무슬림 혐오, 중국 혐오 정서가 경제 침몰 후 미국 보수의 심리 기저에 자리 잡았으며, 이를 공화당은 적극 이용해왔다. 트럼프는, 그저 미국 보수 주류가 침묵으로 지지하던 진실을 선명하게 드러냈을 뿐이다.
공화당에서 누가 대선 후보가 되었든, 트럼프와 큰 차이 없었을 것이다. 지난 3월 2일, 영국 BBC는 공화당 대선 후보의 공약을 살펴본 결과, 트럼프는 대체로 중도적이었다고 보도했다. 세금 정책에서 트럼프는 크루즈 상원의원보다 중도적이었다. 국가 안보에서도 트럼프는 레이건 전 대통령보다 중도적 가치관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외교 정책은 트럼프-레이건-크루즈-루비오-조지 W. 부시 순으로, 트럼프가 역대 주요 공화당 대통령·대선 후보 중 가장 중도적이었다. 오직 이민 정책에서만 트럼프는 극우에 가까웠다.
트럼프 등장에 따른 '정치의 죽음'을 트럼프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트럼프 현상은 좌우 정책 대결이 불가능할 지경으로 닮은 미국 주류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보다 월가에 비판적 시각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는 월가의 돈을 받지 않고 경선을 치렀으나, 힐러리 클린턴은 일찌감치 월가의 앞잡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강준만 교수는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대표적 잣대인 사회복지에서 그는 공화당이 줄기차게 삭감하려는 미국의 노후 연금 소셜 시큐리티, 약자와 저소득층의 의료 보장 제도인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를 절대 축소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강조했다. 사회복지 정책관만 보자면, 트럼프는 오바마의 업적을 충실히 보완할 적임자다. 대외 정책 면에서도, 트럼프는 팽창주의적 정책, 전쟁 위주의 정책을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번 대선 경선 국면에서 공화당 지지자들은 대체적으로 '더 작은 미국'을 선호한 반면, 민주당 지지자가 '세계의 경찰 미국'을 더 긍정적으로 보았다.
따라서 트럼프의 등장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미국 정치의 현주소를 보여줄 뿐이다. 기성 정치에 분노한 미국 민중이 분노를 솔직하게 대변하는 트럼프의 말에서 정치 혐오를 투표로 행사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를 '정치의 죽음'이라 한다면 조금 이상하다. 기성 정치에 관한 분노만 따지자면, 이미 예전에 미국 정치는 죽었기 때문이다. 왜 이제야 트럼프가 대두한 걸까.
강준만 교수는 이 책의 '맺음말' 부분에서 미국 정치가 사망한 이유, 즉 트럼프가 떠오른 이유의 하나로, 특히 전공 분야인 언론의 역할을 중요하게 거론한다. 그는 "트럼프가 온갖 비난에도 끄떡없는 불사신이 된 데엔 미디어 혁명과 더불어 그 혁명에 대처하지 못한 언론의 문제, 아니 기존 저널리즘의 기본 작동 방식과 메커니즘의 근본적 결함도 도사리고 있다"고 강조했다. "순전히 사업적인 관점에서 보면, 기사가 나가면 항상 손해보다는 이득이 많기 마련"이라는 말을 트럼프는 고스란히 이번 경선 국면에서 실천에 옮겼다. 미국 언론은 받아쓰기 저널리즘에 빠져, 그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고스란히 대중에게 노출했다. 트럼프의 언론플레이는 피아를 명확히 구분하는 동시에, 아군의 응집을 도모하는 효과적 무기였다. 언론은 트럼프에 이용당했다.
강준만 교수는 이 때문에 '트럼프 현상', 즉 '정치의 죽음'은 "우선적으로 '미디어 현상'"이라고 단언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칼럼니스트 코니 슐츠는 온라인 매체 <더내셔널메모>에서 "우리, 저널리스트들이 괴물 트럼프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고 반성했다.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언론은 트럼프에 휘둘리는 동시에, 트럼프를 이용했다. 트럼프가 현상이 되자, 트럼프를 거론하기만 하면 시청률이 오르고 사이트 방문자 수가 늘어났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CNN의 올해 시청률은 전년대비 170% 뛰어올랐다. <뉴욕타임스>는 자신들도 마찬가지라고 고백하며 "독자층 발굴·확대라는 욕심으로 언론이 트럼프 거품을 키우고 있다"고 반성했다.

▲ <도널드 트럼프>(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펴냄.) ⓒ인물과사상사
강준만 교수는 이 대목에서 언론과 트위터로 대표되는 소셜미디어 열풍을 묶어 '편향 동화'가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는 주장을 편다. 편향 동화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은 어리석고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치부하고, 자신의 생각과 같은 주장만 현명하고 논리적이라고 받아들여 결국 자신의 기존 입장을 더 강화하는 현상을 뜻한다.
트럼프는 이번 미국 대선 경선에 나온 공화당·민주당의 모든 후보 중 가장 '초딩스러운' 언어를 사용했다. 2015년 10월 21일 <보스턴글로브> 보도에 따르면, 트럼프가 구사한 단어는 초등학교 4학년 수준이었다. 반면 힐러리 클린턴의 언어는 중학교 1.7학년 수준이었고, 버니 샌더스의 언어는 고등학교 1학년 수준이었다.
트럼프의 언어는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특히 위력을 발휘한다. 선명하고 간결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간결할수록, 보통 사람의 말일수록 대중은 더 주목하고, 무엇보다 정서적으로 동화한다. 강준만 교수는 앨빈 림 웨슬리언대학교 교수의 말을 인용해 "140자만 쓰는 트위터나 10초짜리 TV 언어가 일반화된 시대에는 간결한 언어가 유권자에게 주는 반향이 오히려 크다"고 강조했다. 트럼프는 정확히 시대흐름을 파고들었다.
우리는 불과 6년 전만 해도, 재스민 혁명을 통해 이슬람 문명권에서 소셜 미디어와 언론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어젖히리라는 희망을 봤다. 그러나 이제 소셜미디어는 물론, 언론도 민주주의의 적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트럼프까지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의 인터넷 지면을 뒤덮은 말은, 지금도 증오와 혐오로 범벅되었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도널드 트럼프라는 괴물의 모습을 세밀하게 조명함으로써, 괴물이 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도록 했다. 현실적으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하지만, 트럼프 현상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알기 위해서도 반드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당장 내년 대선에서 한국에도 트럼프 현상이 일어나지 마라는 법 없잖은가. 세계의 극우화라는 조류에서 보자면, 진짜 '트럼프 현상'은 이제 시작인지도 모른다.
"나는 '트럼프 현상'은 '미디어 혁명'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미디어에 더 방점을 두고 싶다. (…) 트럼프 현상은 그렇게 극에 이른 위선의 제도화에 대한 반동으로 사실상 '위선의 종언'을 선언하고 재촉하는 현상이기도 하며,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사회에도 광범위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사회학자 오찬호의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을 비롯하여 최근 출간된 일련의 청년 문화 분석서들은 '위선의 종언'이 '능력주의'라는 가면을 쓰고 당당하게 외쳐지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준다. (…) 트럼프 현상은 일반적인 비난과 단죄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바로 그런 성찰의 기회를 제공해주었다는 점에서 좀더 진지하게 대해야 할 현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