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책에 아이를 가둬서는 안 된다

일취월장7 2016. 4. 7. 10:17


아이들은 학교에 ‘놀러’ 간다

아이들은 학교에 ‘놀러’ 간다.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노력하지도 않지만, 분노하거나 저항하지도 않는 학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조회수 : 303  |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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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6호] 승인 2016.04.06  20:40:38

가끔 고등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대학에서 같이 공부하는 학생들과도 고등학교 때로 기억을 돌려 이야기를 나눈다. 한국의 가혹한 입시제도와 두발이나 복장 등 반인권적인 통제에 대해 말하면서 한국의 학교가 얼마나 힘든 공간인지를 토론하곤 한다. 재미있는 것은 몇 년 전부터 이런 이야기에 대한 학생들의 반응이 상당히 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이런 말에 대다수 학생들이 공감을 했다. 학교생활에 소소한 재미는 있었지만 학교는 기본적으로 가기 싫고 힘든 곳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지도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공부를 억지로 하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어두운 곳으로 이야기되었다. 학교폭력의 경험이 있는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학교에서 아무런 존재감이 없던 친구들일수록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했다는 ‘분노’가 컸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양상이 제법 바뀌었다. 자기들은 그리 힘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부 시간이 졸리고 지루하지만 그냥 자면 된단다. 잔다고 야단치는 교사들이 간혹 있지만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고 다수의 교사가 깨우지 않는다고 했다. 화장을 하거나 염색을 하는 등 교칙을 위반하더라도 요령이 생겨서 적당히 피하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학교도 정도가 심하지 않으면 눈을 감아주기 때문에 그리 통제가 심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쁘지 않다’를 넘어 ‘재밌다’고까지 말하는 학생도 눈에 띄게 많이 늘었다. 자기들은 학교에 놀러 간다는 것이다. 학교에 가야 재미있다. 학교에 가야 친구들도 있고, 그 친구들과 노는 게 재미있고 요새는 급식도 좋아져서 괜찮다고 한다. 한 학생은 밥도 주고, 잠도 자고, 친구도 있고, 그런데 왜 학교에 가지 않겠느냐고 능청스럽게 되묻기도 했다. 그 친구만의 특별한 이야기인가 싶어서 두루두루 물어봤더니 정말 ‘놀러’ 학교 가는 친구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해성 그림</font></div> 
ⓒ박해성 그림

이처럼 교사나 학부모가 아무것도 안 할수록 학교가 어떤 학생들에게는 ‘갈 만한’ 곳이 되면서 당황하게 된 쪽은 부모와 교사들이다. 보수적인 사람들은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고 공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곳인데 그냥 놀다 오는 곳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반면 진보적인 교사나 학부모는 학생들에게 억압적인 공간에 대해 학생들이 ‘분노’하고 ‘저항’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는다고 절망한다. 보수적이나 진보적인 양쪽 모두가 보기에 학교에 쉬러 오고, 자러 오고, 놀러 오는 이 친구들은 ‘가망’이 없는 존재 같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대로 ‘노력’하지도 않지만 진보 세력이 바라는 방식대로 ‘분노’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이 학생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실 학부모가, 교사나 교수들이 이 학생들을 보면서 느끼는 당혹감은 이들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외려 이들은 교사가 아무것도 안 할수록 ‘행복’해한다.

그 어떠한 ‘교육적 행위’도 모두 거부합니다?

이 학생들이 피곤해하는 것은 너무 열심히 하는 교사들이다. 지방에 있는 한 학교에 강의를 간 적이 있는데, 학기 초에 한 교사가 ‘제가 어떤 담임이 되었으면 좋겠는가’라고 학생들에게 물었더니 한 학생이 ‘너무 많은 것을 하려 하지 마세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당연히 그 교사는 충격을 받았다.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게 해주고 싶었는데 그걸 거부한 것이다.

학교가 과거에는 가는 것조차 괴로운 곳이었다면 지금은 ‘공부만 안 하면 재미있는 곳’이 되어가고 있다. 한 교사는 이에 대해 학생들이 “어떠한 교육적 행위도 거부”하고 있다며 당혹스러워했다. 그냥 재미있다고 말하는 학생들 역시도 드문드문 “재밌긴 한데, 이래도 되는 것일까요?”라고 불안감을 나타낸다. “뭔가 배우고 장래를 준비하긴 해야 하는데…”라고 말끝을 흐린다. 새 학기가 시작됐다. 교육의 희망은 이런 교사의 당혹감과 학생의 말줄임표가 엇나가지 않고 만나는 순간 만들어질 것이다.



책에 아이를 가둬서는 안 된다

늦잠 자고 땡땡이를 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일을 저지르는 게 인간이다. 인간의 지적 능력만 강조하는 교육은 당장 그만둬야 한다. 책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책에 아이를 가둬서는 안 된다.

  조회수 : 463  |  신성욱 (과학 저널리스트)  |  webmaster@sisain.co.kr


“3세 이전에 아이의 뇌가 완성된다” “모든 아이는 천재로 태어난다”. 부모를 솔깃하게 하는 말들이다. 그 덕분에 영·유아 사교육비는 해마다 치솟는다. ‘0세 영어’ ‘0세 수학’ 따위도 등장했다. 신성욱씨가 뇌과학 연속 강좌에 나선 이유다. 그는 시장이 왜곡한 ‘뇌의 신화’가 오늘날 부모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고 일갈한다. 3월15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열린 두 번째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여러분은 혹시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나? 우리 모두 영화 같은 일을 눈앞에서 목격하고 있다. 장차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렵다는 분도 계셨다. 바둑 한 판이 우리에게 이렇게 깊은 사색을 하게 만들었으니 사건은 사건인 셈이다.

개인적으로는 충격을 받아서 잠도 잘 못 잤다. 지난 5~6년간 뇌과학 강의를 다니면서 늘 강조한 얘기가, 앞으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리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이를 텔레비전 생중계로 지켜보고 있자니 그 충격이 너무나 크고 생생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신선영</font></div>이세돌과 알파고가 펼친 다섯 번의 바둑 대국은 알파고 승리로 끝났다. 위는 3월12일 세 번째 대국 현장. 
ⓒ시사IN 신선영
이세돌과 알파고가 펼친 다섯 번의 바둑 대국은 알파고 승리로 끝났다. 위는 3월12일 세 번째 대국 현장.

내가 바둑을 끊은 게 중2 때였다. 그 아득한 경지에 빠져들었다간 도저히 헤어날 수가 없겠다 싶었다. 보통 사람들은 웬만해서 9단에 이를 수 없다. 말 그대로 ‘입신의 경지’니까. 그런데 바둑 9단이 인공지능에게 패했다? 이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본래 인공지능 연구는 1950년대에 시작됐다. 1990년대에 등장했던, 말로 전화 거는 휴대폰을 기억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 휴대폰이 바로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기였다. 당시의 인공지능은 기대 이하였다. 휴대폰에 “아빠”라고 부드럽게 음성을 저장했을 때와 달리 조금 짜증난 목소리로 “아빠” 하고 부르면 그 음성을 못 알아듣고 헤매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침체기에 빠져드는 듯했던 인공지능이 알파고로 다시 화제의 중심에 선 것이다.

인공지능이 현재 수준에서 완벽하게 인간처럼 직관하고 추론하고 상상하고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알파고가 입증했듯, 그 문이 열린 것만은 분명하다. 이미 인공지능 컴퓨터가 소설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작곡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풍경 사진을 입력한 뒤 이를 고흐 풍으로 그려달라고 요구하면 되는 식이다. 고흐 작품과 관련된 데이터를 잔뜩 입력해놓으면 인공지능이 알아서 추론과 상상 기능을 발휘하며 새로운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수천 년에 걸쳐 획득한 휴먼 스킬을 알파고는 뚝딱 습득해버렸다. 이걸 보며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에 두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는 인간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인간이 오로지 지적인 존재일 것이라는 오해가 그것이다. 인공지능 컴퓨터를 예로 들어보자. 혹시 과학자들이 늦잠 자는 로봇이나 농땡이 치는 로봇, 실수하는 로봇 따위를 만들려 할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을 지적 존재로 여기면서 잠 따위는 액세서리 정도로 여기는 게 근대적 사고방식이다. 알파고는 이세돌 9단이 잠을 자는 동안 밤을 새워 120만 판을 복기한다 하지 않나? 우리 또한 아이들에게 “넌 잠잘 것 다 자면서 공부는 언제 할래?”라고 잔소리를 하곤 한다. 그런데 이게 인간이다. 늦잠 자고 땡땡이를 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일을 저지르는 게 우리 인간인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공지능은 이런 인간을 결코 흉내 낼 수 없다. 지적인 측면만 가지고 인간이 인공지능에 맞선다는 건 비유컨대 말과 인간이 경주를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달리기로 말을 따라잡을 수 없다. 그렇다고 말의 지배를 받을까 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인공지능은 왜 그토록 두려워하나? 결국 인간의 뇌를 생각하는 기관으로만 여기면서 능률·효율을 최고로 쳤던 근대적 사고에 압도되어 있기 때문이다.

알파고 충격 이후 나를 사로잡은 생각은 ‘내 자식을 어떻게 키워야 하지?’ 하는 것이다. 10년 뒤에는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가 50% 사라질 것이다? 이런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이것이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지금이야말로 우리 스스로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고민할 시점인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이를 키운다는 게 뭔지, 교육의 본질을 돌이켜볼 시점이 된 것이다.

  
 

하루 8시간 책 읽는 아이가 발달지체라니…

그렇다면 교육이 뭘까? 인간의 뇌가 허점투성이라는 건 지난 강의 때 이미 말씀드렸다(<시사IN> 제445호 ‘좌뇌·우뇌라는 말에 더 이상 속지 마라’ 기사 참조). 인간은 본래 1000억 개에 이르는 신경세포를 갖고 태어난다. 머리가 좋건 나쁘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태어난 직후 느슨했던 이들 신경세포는 시간이 흐르면서 솎아내고 가지치기하는 과정을 거쳐 서로 연결돼 나간다. 이들 세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무엇을 경험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렇게 외부의 자극과 만나면서 아이들은 인간의 방식(human skill)을 익혀가는 것이다.

인간의 뇌를 설명하는 모델을 보자. 미국의 신경학자인 폴 매클린은 인간을 포함한 고등 영장류의 뇌가 크게 세 부위로 이뤄져 있음을 밝혀냈다(위 그림 참조). 뇌 가장 깊숙이 자리 잡은 ‘파충류의 뇌’는 ‘생존의 뇌’라고도 불린다. 심장박동, 호흡 조절 등 생명 활동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역할을 이 부위가 담당한다. 이를 감싸고 있는 것이 ‘포유류의 뇌’라고 불리는 대뇌변연계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을 구분하기에 ‘감정의 뇌’라고도 불린다. 포유류는 감정의 뇌가 발달해 있다. 강아지가 귀가한 주인을 맞으며 좋아 날뛰는 것은 감정의 뇌가 발달해 있어서다. 반면 어항 속 물고기는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감정의 뇌가 없거나 미약해서다.

마지막 뇌 부위는 가장 바깥에 위치한 대뇌피질 혹은 신피질이다. 이 부위를 일러 흔히 ‘생각하는 뇌’라 말한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고차원적 의식과 관계된 뇌다. 지능·생각·의식·언어 등을 관장한다. 여기서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우리 교육의 경우 지나치게 신피질 쪽에 치중해 있다는 것이다. 인간다운 뇌라면 본능·감정·의식 이 세 가지가 조화를 이뤄야 할 텐데 우리는 어려서부터 의식(이성)만 지나치게 강조한다.

오늘 주제가 ‘읽기와 뇌 발달’인데, 이른바 독서 교육이 대표적이다. 독서를 강조하는 건 보수든 진보든 다를 게 없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더 많이 읽히자는 공통된 지향점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게 초(超)조기교육 현상으로 이어진다. 본래 조기교육의 필요성은 미국에서 먼저 거론됐다. 소득·계층별로 학력 격차가 너무 벌어지다 보니 최소한 글은 떼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게끔 조기교육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한국에 와서는 ‘울트라 얼리 러닝’ 내지 ‘하이퍼 얼리 러닝’ 양상으로 바뀌었다고 학자들은 지적한다. 1세 아동 27.3%, 3세 아동 24.3%가 문자 교육을 받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심지어 시중에는 ‘0세 영어’ 따위 신생아를 위한 문자 학습 교재까지 나와 있다.

언제부터인가 ‘독서 영재’라는 말도 등장했다. ‘모든 아이들은 천재로 태어난다’는 ‘뻥’을 전제로, 아이들이 말은 못해도 책은 읽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룹도 있다. 이들에 따르면, 만 18개월가량 된 아이는 새벽 4~5시까지 책을 읽을 수 있다. 엄마는 아무리 졸려도 그런 아이를 지켜줘야 한다. 36개월까지 이렇게 하다 보면 아이가 독서 영재의 길로 접어든다는 것이다. 방송작가 겸 PD로 다큐멘터리를 만들던 시절 나도 그런 아이를 만난 적이 있다. 태어나서 만 25개월까지 1만 권가량의 책을 읽었다는 민지(가명)였다. 내가 만났을 때 민지는 하루 8시간 정도 100~200권에 달하는 책을 읽고 있었다. 당시는 이런 아이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그런데 독서 영재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민지를 찍은 동영상을 들고 미국의 독서 수업 전문교사(리딩 스페셜리스트)들을 만났더니 대뜸 하는 말이 “누가 아이한테 이런 짓을 시키나요?”였다. 아이를 데리고 당장 병원엘 가보라고도 했다. 반신반의하며 민지 엄마를 설득해 병원을 찾았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민지는 영재는커녕 지능발달 지체 상태라고 했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시사IN 자료</font></div>글씨를 읽어주는 대신 그림을 보면서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 
ⓒ시사IN 자료
글씨를 읽어주는 대신 그림을 보면서 대화하는 게 중요하다.

애착에도 문제가 생긴 상태였다. 어린아이에게 애착이 중요한 것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관계를 맺는 첫 단추가 애착이다. 태어나서 처음 나를 돌봐준 사람과 애착을 맺지 못하면 그 뒤로도 계속 문제가 생긴다. 민지는 엄마와 하루 종일 함께 책을 읽었는데도 애착 반응 검사에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담당의는 민지에 대해 “동물원에서 쇼 하는 동물들과 비슷한 상태”라고 말했다. 돌고래가 묘기를 부리는 건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다. 사육사가 원하는 대로 행동이 통제된 것이다. 아이들 또한 주 양육자가 좋아하면 그 행동을 반복해서 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사랑받으니까. 민지도 그랬던 것이다. 민지에게는 유사 자폐 성향이 있다는 진단도 나왔다. ‘초(超)독서증’ 내지 ‘과잉언어증’으로 해석되는 하이퍼렉시아(Hyperlexia) 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사실 하루 종일 꼬맹이가 책을 붙들고 중얼거리고 있으면 의사들은 하이퍼렉시아를 먼저 의심한다.

영어 영재로 소문난 남자아이도 있었다. 이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폭력 성향이 강해지면서 정상적인 학교생활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 엄마는 어려서 외국어에 노출돼야 바이링구얼(이중 언어 구사자)이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하루 종일 영어 비디오를 켜놓았다고 한다. 텔레비전은 결코 애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 결과 아이의 감정을 담당하는 대뇌변연계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아이는 비디오를 보는 동안 아마도 속으로 ‘엄마, 나를 제발 좀 안아주세요’라고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이런데도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고 영어를 따라 하면 대단해 보이시나? 이건 인간의 뇌를 인공지능처럼 부리는 것과 다름없다. 인간의 지적 능력만을 강조하는 이런 교육은 집어치워야 한다. 뇌에 문제가 생기면 휴먼 스킬에도 문제가 생긴다. 뇌과학자들은 “매일 지구에는 70억 개의 달이 뜬다”라는 표현을 쓴다. 달은 한 개지만 이를 70억 인류가 각자 고유한 방식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이렇게 몸으로 경험하는 기억을 통해 아이들은 휴먼 스킬을 익히고, 어른으로 성장해 나간다.

우리가 돌부처를 보고 절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돌덩이에도 마음을 의탁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그런 방식으로 진화해왔다. ‘거울 뉴런 시스템’이라는 것도 있다. 쉽게 말해 인간의 뇌에 거울이 하나씩 들어 있다는 얘기다. 그 결과 갓난아이도 상대 표정을 흉내 낼 줄 안다. ‘테레사 효과’라고 누군가 선행을 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보는 이의 몸속 면역물질이 증가한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상대가 한 일을 뇌 속 거울에 비춰보고 내가 착한 일을 한 양 착각하는 것이다.

그림책 글씨에 검정 테이프를 붙여볼까?

이런 공감 능력은 책만 읽는다고 키워지는 게 아니다. 그래서 나는 과격하게 말하곤 한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라고. 특히 열두 살 이전 아이들에게는 독서를 강요할 일이 아니다. 아이가 글씨를 줄줄 읽으면 뭐하나. 이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 능력이 향상되다 보면 리딩의 최상 단계, 곧 읽는 내용을 분석하고 유추하는 단계에 이른다. 그런데 생물학적 뇌 발달로 볼 때 이건 열여덟 살쯤 돼야 가능하다. 이때부터야 비로소 제대로 된 독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책은 아이들의 장르가 아니다”라고 과격하게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렇다고 책을 아예 읽히지 말라는 건 아니다. 영상을 주로 접한 아이에 비해 텍스트를 주로 접한 아이가 더 풍부한 상상력을 보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거실을 서재로 만드는 등 유난을 피우면서 부모가 독서를 감시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아이가 글씨를 지겨워하면 책에 있는 글씨에 전부 검정 테이프를 붙여버릴 수도 있다. 대신 그림만 보면서 그와 관련된 부모의 경험을 들려주시기 바란다. 책은 이야기를 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책에 아이를 가두지 마시라.

정리·김은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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