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속아온 뇌과학의 신화
우리가 속아온 뇌과학의 신화
뇌과학의 눈부신 발달 이후 몇몇 나라에서는 ‘과학에 기반한 교육’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엔 아직도 뇌에 관한 엉터리 선전이 나돈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 이후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라고 신성욱씨는 말했다. 인공지능의 진화를 꾸준히 다뤄온 과학 저널리스트지만 이를 현실에서 직접 목격하는 충격이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부모들이 지금처럼 인지교육·조기교육에 매달린다고 그 미래에 대처할 수 있는 걸까? 신씨가 4회 연속으로 진행하는 뇌과학 강좌는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다. 3월8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열린 첫 번째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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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 ||
강의에 앞서 영상부터 하나 보여드리겠다. 검은색 옷을 입은 여학생 3명과 흰색 옷을 입은 여학생 3명이 등장해 공놀이를 한다. 이들의 게임 규칙은 간단하다. 같은 색깔 옷을 입은 학생끼리만 공을 패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중 흰색 옷을 입은 팀이 공을 몇 개나 주고받는지 세어보시라(약 40초간 동영상 상영). 모두 세어보셨나? (청중 “15개요” 또는 “16개요”라고 답변) 정답은 16개다.
진짜 퀴즈는 다음부터다. 혹시 영상에서 고릴라를 보신 분? (몇 명이 손을 듦) 절반도 안 된다. 오늘 청중 수준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다(웃음). 영상을 다시 돌려보면 여학생들이 공을 던지는 동안 덩치 큰 고릴라가 아주 천천히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청중의 절반 이상은 이걸 왜 못 보았을까? 이는 머리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가 아니다. 주의력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도 아니다. 그저 흰옷 입은 학생들에 주목하다 보니 한 화면 속에 나온 고릴라를 못 보았을 뿐이다.
우리 뇌가 작동하는 방식이 바로 이렇다. 이름하여 ‘뇌의 지향성’이라는 특성 때문에 우린 매 순간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보고 산다. 오늘 내가 좀 이르게 도착해 이 동네(서울 용산구 삼각지)를 산책했는데 유독 화실이 여럿 눈에 띄었다. 그 결과 아마 난 앞으로 삼각지를 화실 골목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매 순간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면서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의 뇌가 가진 숙명이다.
좀 전의 영상에는 몇 가지 퀴즈가 더 남아 있다. 자세히 보면 공놀이가 진행되는 동안 무대 뒤쪽에 있던 커튼 색깔이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했다. 검은 옷 입은 여학생 3명 중 1명도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런데도 이걸 알아챈 사람이 거의 없다. 그만큼 우리 뇌에 한계가 많다는 얘기다. 이런 한계를 극복할 방법은 없을까? 간단한 방법이 있긴 하다. 옆 사람에게 서로서로 물어보는 것이다. “난 이런 걸 봤는데 넌 뭘 봤니?” 이렇게 묻다 보면 자신이 못 본 것이 있더라도 남을 통해 이를 알 수 있게 된다. 나는 이것을 지혜라 부르고 싶다.
뇌에 관한 최첨단 연구를 이끌고 있는 과학자들이 최근 자주 사용하는 표현이 ‘소셜 브레인’이다. ‘사회적인 뇌’라니, 무슨 뜻일까? 관계를 맺는 뇌라는 뜻이다. 인간 자체가 사회적 동물인 만큼 뇌도 마찬가지다. 관계가 단절되면 외로워지고 고독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멍청해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는 역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더없이 풍요롭고 편리해졌는데 너도나도 아이 키우기가 힘들다고 아우성이다. 지식과 정보는 넘쳐나는데 지혜는 줄고 있기 때문이다. 내 아이만 바라보며 우물파기 식 경쟁을 하려 든다. 뇌는 이런 걸 원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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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지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의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위)은 인간 인지능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같은 제목의 책도 출간되어 있다. | ||
퀴즈 하나 더 내겠다. ‘ㅇ ㅂ ㅌ’이라는 한글 초성을 보고 떠오르는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있으신가? 대부분이 <아바타>라고 답하셨다. 실은 내가 여러분 뇌를 갖고 살짝 트릭을 부린 것이다. 이들 초성이 영화 제목이라고 말한 순간 여러분 머릿속에서 곧바로 맥락이 생겨난다. 내가 가진 지식과 정보들을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여기저기 갖다 붙이는(categorizing) 것이다. ‘ㅇ ㅂ ㅌ’을 보면서 혹시 <오발탄>을 떠올리신 분도 있나? 아마 이런 영화가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분도 있을 거다. 1950년대 영화인 <오발탄>은 최근에 익숙한 정보가 아니다.
우리 뇌는 이처럼 내게 익숙한 정보를 갖고 제멋대로 해석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우뇌가 받아들인 정보를 가지고 좌뇌가 얘기를 지어내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기의 생각이나 판단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다. “내 판단이 맞아!” “내 말대로 해!” 하면서. 심지어는 ‘인간의 뇌는 무한하다’며 뇌를 신비화하는 경향마저 있다. 전혀 그렇지 않다. 인간의 뇌는 늘 특정 맥락에 의해 움직인다. 독자적·주체적인 판단은 불가능하다. 어찌 보면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허술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소셜’이 중요하다.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세 살 무렵이면 뇌가 완성된다고?
얼마 전 외신에 ‘400만 달러의 교사’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1년에 50억원가량을 버는 한국의 사교육 강사를 소개한 기사였다. 이걸 보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인류 역사상 교사가 돈을 많이 버는 직업인 적은 없었다.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는 데서 보람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완벽한 교육의 산업화를 이뤄냈다. 과거 가정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아무 대가 없이 이뤄지던 교육이 불과 20~30년 사이 급격하게 시장의 영역으로 넘어간 셈이다.
이로 인한 긍정적 측면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뇌과학 측면에서는 얼토당토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뇌 발달’을 ‘지능 계발=성적 향상’으로 연결시킨 것이 대표적인 예다. 세 살이면 아이의 뇌가 거의 완성된다? 그러니 부모가 제때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아이 지능이 계발되지 않는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신경망 최소 단위인 시냅스의 밀도가 일생 동안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면 생후 2~12개월 무렵 최고조에 달했다가 그 뒤로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1980년대까지는 이것만 보고 3세 이전에 뇌가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 뒤 뇌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시기 시냅스가 툭툭 끊어져 있음을 알게 됐다. 씨에서 싹이 나면 농부가 쭉정이를 골라 버리듯 뇌 또한 일단 시냅스로 가설공사만 해놓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나가며 뇌의 성능을 향상시키는데, 뇌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초창기에는 시냅스가 많을 때 뇌 성능도 최고조에 이르는 것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이런 옛날 얘기를 시장은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고 있다. 언론도 이를 거든다. 1990~ 2010년 주요 일간지를 분석해보니 기사에서 뇌과학을 가장 많이 언급한 사람은 의사나 과학자가 아니었다. 사설 학원장이었다. 뇌과학 기사를 사실상 사설 학원장들이 쓰고 있었던 것이다. ‘좌뇌와 우뇌를 고루 발달시켜야 한다’ 따위 선전에도 속지 마시라. 요즘 뇌과학자들은 좌뇌·우뇌라는 말 자체를 쓰지 않는다.
오늘날 많은 뇌과학자들은 우리가 시장에서 흔히 듣던 얘기와는 전혀 다른 얘기를 들려준다. 열두 살이 되기 전까지 아이들의 뇌는 온전한 인간의 뇌가 아니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 시기 아이들의 뇌는 공사 중이다. 인간이라는 집을 잘 짓기 위해서다. 열두 살이 지났다고 뇌의 준공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사춘기부터는 뇌가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가면서 한 차례 뒤집어지는 과정을 거친다. 그 바람에 사춘기의 ‘발광’이 나타나긴 하지만, ‘나는 어디서 왔을까?’처럼 이전에 없던 질문을 하는 것도 이때부터다. 이때부터 우리의 뇌는 인간의 뇌로 본격 도약하기 시작한다. 이성에 대한 생각을 비롯해 세계관·인간관·종교관 등 인간만이 갖는 특질들이 이 시기 이후 발달하면서, 인간으로서의 자아가 본격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를 두고 뇌과학에서는 ‘전두엽이 발달한다’고 표현한다.
그러니 부모들이 기억하셔야 할 게, 열두 살 이전의 아이는 인간 취급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웃음). 이 시기에는 동물적 본능이 훨씬 우세하다. 전 세계 아이들은 ‘다다다다’ 뛰어다닌다. 인종·문화에 관계없이 모두가 그렇다. 심지어는 전쟁터의 아이들도 뛰어다닌다. 이것이 뇌 발달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은 이를 허용치 않는다. ‘사뿐사뿐 걸어라’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반복한다. 한국은 더 그렇다. 학교에 가면 ‘정숙씨’가 늘 아이들을 노려보고 있다(웃음). 그 결과 아이들은 ‘눈 뜨고 자는’ 유체이탈 능력만 향상시킨다.
그런데 뇌과학의 눈부신 발달 이후 교육에 이를 접목해 ‘과학에 기반한 교육(SBE:Science -Based Education)’을 시도하는 나라들이 있다. 독일·스웨덴·덴마크 등이 대표적인데, SBE를 받아들인 이들 나라는 교실 디자인부터 다르다. 우리처럼 교사가 앞에 서 있고 학생들은 뒤에 일렬로 앉아 있는 방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책걸상을 아예 없앤 학교도 있다. 50분 수업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의 뇌는 10분 이상 집중하면 ‘멘붕’이 오기 때문이다.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세계 최고 수준 성적을 거뒀다고 떠들어대는 한국이나 중국과 달리 이들 나라는 PISA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관점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열두 살 이전의 아이에게는 무엇이 중요할까?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충격을 받는 한국어가 ‘24시간 할머니 뼈다귀 해장국’이라고 한다(웃음).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한국인들은 이렇게 쓰인 간판을 보는 순간 침이 고인다. 이와 같이 서로 다른 반응은 쉽게 말해 먹어본 자와 먹어보지 않은 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문자 해독력과는 별개로 ‘내가 몸으로 경험했느냐 경험하지 않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열두 살 이전의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이 시기 아이들에게는 몸으로 하는 경험이 가장 필수적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한다.
여러분은 ‘물’ 하면 어떤 기억이 떠오르시나. 어떤 이는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우산을 들고 나를 마중 나왔던 엄마를 떠올리고, 어떤 이는 할아버지와 날마다 갔던 뒷산 약수터를 떠올릴 것이다.
‘다른 것과 관계 맺기’가 뇌를 만들어간다
뇌를 공학적으로 연구하는 인지공학자들은 이를 ‘언어의 풍경’이라 표현한다. 내가 몸으로 기억한 모든 것이 언어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언어의 풍경이야말로 한 인간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인간의 성격·소양·창의성 이 모든 게 언어의 풍경으로 이뤄진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나라는 존재, 곧 자아는 언어의 풍경과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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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아이들에게는 뛰며 노는 활동처럼 몸으로 하는 경험이 뇌 발달에 필수적이다. 인지공학자들은 몸으로 기억한 모든 것이 ‘언어의 풍경’을 이룬다고 말한다. | ||
그런데 안타깝게도 요즘 아이들을 보면 언어의 풍경이 각박하기 이를 데 없다. 지난 설날 딸아이를 데리고 박물관에 갔더니 한지공예 체험 부스에 있는 여러 색깔 종이 중 짙은 하늘색 종이만 동이 나 있었다. 왜 그랬을까? 요즘 여자아이들은 이 색깔을 ‘엘사(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의 주인공) 색’이라 부른단다. 한국 아이건 미국 아이건 마찬가지다. 이런 식으로 언어의 풍경이 표준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다. 언어의 풍경은 유전자로 타고나는 게 아니다. 나 아닌 다른 데서 온다. 그런 만큼 누굴 만났고, 무엇을 보았고, 내 발로 뭘 디뎠는지가 중요하다. 곧 인간의 뇌는 나 아닌 다른 존재를 통해 계속 유지되고 발달된다. 물리적으로 보면 그 메커니즘은 간단하다. 뇌는 신경세포로 이뤄져 있다. 여기서 무수한 뉴런들이 뻗어나와 잔가지처럼 서로 얽혀 있다. 이들 잔가지는 일종의 전깃줄로 이해하시면 된다. 실제로도 전기가 흐른다. 이들 전기가 새지 않으려면 뉴런을 보호하는 껍질이 잘 생성돼야 한다. 그런데 이 껍질을 만드는 재료는 우리 밖에 있다. 곧 밖에 있는 다른 것들과의 관계 맺기가 뇌를 만들어가는 셈이다. 뉴런이 무수한 가지를 뻗고 있는 자체가 다른 신경세포와 연결되기 위해서다. 이렇게 밖에 있는 재료를 만나 그 정보를 기억하고 저장하고 처리하기 위해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뇌가 발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에게 관계를 맺지 말라, 놀지 말라고 말한다. 부모들도 고립돼 있다. 함께 아이를 길러주던 삼촌·이모들은 오늘날 모두 노량진에 가 있다(웃음). 아이를 기른다는 건 결국 밖에 있는 다른 존재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끔 도와준다는 뜻이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교육이다. <중용>은 “하늘 아래 나 아닌 다른 존재들과 만나는 것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이요(天命之謂性), 이를 따르는 게 인간의 길이며(率性之謂道), 이를 한평생 갈고 닦는 게 교육(修道之謂敎)”이라고 말한다. 현대 뇌과학자들이 찾아낸 인간의 가장 중요한 특질을 2500년 전 공자님은 다 간파하고 계셨던 셈이다.
학대와 체벌은 다를까?
현행 법령은 아동(학생)에게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금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체벌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는 미약하다. 체벌이 학대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을 잊지 말자.
몸체(體)자와 벌벌(罰)자의 합인 ‘체벌’은 글자 그대로 ‘몸에 직접 고통을 주어 벌한다’라는 의미다. 영어로도 ‘corporal punishment(신체적 처벌)’인데, 이처럼 ‘신체성’은 체벌의 핵심이다. ‘사랑의 매’나 ‘교육적 체벌’ 등 은유나 수식으로 포장되기도 하지만, 결국 타인의 신체에 물리력을 가한다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체벌이란 다른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자 폭행이다.
아동·청소년은 ‘미숙’하기 때문에 때려서라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체벌을 지지하는 이들의 논리다. 폭력의 대상을 열등한 것으로 규정해, 그 정당성을 찾는 오래된 방식이다. 그러나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이 교육을 위해 불가피하다는 구체적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수많은 경험적 연구를 통해 체벌의 교육적 효과가 없다는 점, 체벌을 통해 아동·청소년이 폭력과 복종을 내면화하고 학교폭력 문제로 이어진다는 점 등이 명확하게 입증되고 있을 뿐이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의 감정을 조사한 한 연구에서, 그 어떤 아이도 체벌 이후 ‘반성’이나 ‘미안함’을 느꼈다고 응답하지 않았다. 체벌을 당한 아이들이 품었던 감정은 당연하게도 무서움·화남·끔찍함·창피함·외로움이었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에서 아동·청소년에 대한 모든 형태의 체벌을 금지하자는 목소리는 희박하기만 하다. 여론조사에서 체벌이 필요하다고 응답하는 비율은 늘 80%를 상회하고 있으며, “말이 안 통하는데 어떻게 가르치느냐” “맞을 만한 짓을 하면 때려야 한다” 같은 언어가 단단한 상식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연일 언론을 채우는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들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학대 행위자에게 ‘살인죄를 적용하라’고 외치고 피해 아동의 사연에 가슴을 치면서도, 학대와 체벌은 다르다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사랑의 매와 분노의 매가 다르다는 것은 전형적인 가해자의 논리다. 자신의 의도에 따라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는 논리. 아이들에게는 맞는 이유가 사랑이든 분노든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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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그림 | ||
학대는 텔레비전에 나오는 수갑 찬 괴물에 의해서만 일어나지 않다. 2014년 아동보호 전문기관에 접수된 사례를 기준으로 아동학대는 1만72건이었고, 이 중 81.8%가 부모에 의해서 발생했다. 실제 건수는 신고된 건수보다 훨씬 많을 수밖에 없기에 2014년 한 해만 해도 수만명의 부모가 아동학대를 저지른 것이다. 체벌이 부모의 당연한 권리로 인정되는 나라에서, 가정 내 체벌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때리는 자는 무뎌지고 맞는 자는 자포자기하게 된다. 이처럼 학대는 체벌의 과정이자 합으로서 발생한다. 체벌이 근절되지 않는 한 아동학대를 막을 수 없다.
꾸준한 캠페인으로 아동의 ‘체벌 경험’을 한 자릿대로 줄인 스웨덴
학대에 대한 신고와 처벌은 사후적일 수밖에 없다. 사회적 거부감은 있겠지만 아동·청소년에 대한 체벌 금지를 논해야 한다. 이미 아동복지법이나 초·중등 교육법 시행령에서는 아동(학생)에게 가하는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금지하고 있지만 이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드물다. 법으로 ‘금지’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인식을 바꾸는 것이다.
스웨덴은 1979년 부모에 의한 체벌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면서 2년 동안 90%의 가정에서 아이·청소년을 때리는 것이 적법하지 않다는 인식을 갖도록 하겠다는 구체적 목표를 설정했다. 제정 당시 70% 이상의 반대 여론을 뚫고 겨우 제정되었으나, 꾸준한 캠페인 결과 2000년 이후 스웨덴 아동의 체벌 경험은 한 자릿대로 떨어질 수 있었다. 아동학대 문제가 해결된 것은 물론이다. 우리의 체벌금지법도 그러해야 한다. 인식의 전환, 긍정적이고 비폭력적인 형태의 교육으로 옮아갈 수 있게 하는 사회적 지원과 정책이어야 한다.
제대로 된 ‘저출산 대책’이 궁금하세요?
학생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농어촌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 정책과 예산 우선순위를 다시 설정해야 한다.
갓 입학한 아이들로 학교가 싱그럽다. 올해는 새삼스레 꼬박꼬박 학교에 와주는(?) 아이들이 대견하고 고맙다. 요즘 세상에 ‘아이를 낳고 기르는 엄청난 용기와 결단’을 보여준 학부모들도 존경스럽다.
학생 수가 급격히 줄고 있다. 학교는 이미 ‘낭떠러지’ 공포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인구절벽 상황을 맞았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금쪽같이 귀한 존재가 되어간다.
농어촌 초등학교 얘기가 아니다. 100만명에 가까운 성남시 인구는 매년 늘어나지만 학생 수는 줄고 있다. 성남시 관내 68개 초등학교 중에서 판교와 분당의 일부 학교를 제외한, 81%에 해당하는 55개 학교에서 학생 수가 작년보다 줄었다. 한 해에 100명 이상씩 줄어드는 학교가 나온다. 지방대학뿐 아니라 대도시 공립학교에서도 ‘학생 모셔오기’ 전투가 본격화되고 있다.
2010년 1000만명이 넘던 학령인구는 2015년 887만명을 거쳐 2020년에는 775만명으로 예상된다. 만 6세 이상부터 21세까지 인구를 일컫는 학령인구가 불과 10년 사이에 220만명이 줄어드는 것이다.
과밀학급 해소와 경쟁교육 완화에 도움이 된다는 좋은 면을 보기도 하지만, 실은 핵 위험이나 한반도 전쟁 못지않게 국가 존립의 근간을 위협하는 현상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1.2명 이하의 출산율로는 나라를 지탱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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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고 가르치는 일은 사람이 살아가는 가장 일상적인 삶의 형태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이 자연스러운 과정마다 엄청난 고뇌와 결단이 필요하다. 젊은 세대는 자식을 낳아 기르는 기쁨과 기대보다는, ‘흙수저’를 쥐게 할 부모로서의 원죄에 대한 자기검열을 먼저 할 수밖에 없다.
정부와 지자체에서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정책을 내놓으며 아이를 낳으라고 하지만, 이 말을 선뜻 믿고 아이를 낳을 부모는 많지 않다. 고용·보육·교육은 한 세트다. 특히 보육과 교육은 출산율 저하의 직접 원인이다. 지금의 무한경쟁 교육은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각종 씀씀이를 다 줄여도 교육비 지출은 늘어나는 이유다. 심지어 미혼 남녀 26.7%가 결혼도 하기 전에 사교육비 때문에 출산이 부담된다고 답했다 하니 말 다했다.
여당 대표의 표현대로 한국 인구 시계는 ‘파멸 5분 전’을 가리킨다. 문제는 해법이다. 상식을 뛰어넘는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조선족으로 저출산을 해결하고, 아이 많이 낳는 순서대로 공천’하는 방법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이긴 하지만, 조선족 180만명 중 가임기 여성 모두를 모셔온다고 한들 해결될 일이 아니다. 아마도 문제의 심각성을 부각하기 위한 레토릭이었을 것이다. 젊은 층 이민을 대량으로 받아들여 다인종 이민국가로 변신하기 위한 포석이 아니라면 말이다.
보육과 교육에 돈을 쓰면 일자리도 늘어나
출산율을 높이기 위한 정책은 이제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아이를 낳으면 보육과 교육은 국가가 전적으로 책임진다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토목과 건축, 부동산으로 향하는 돈을 보육과 교육으로 대폭 돌려야 한다. 무상보육, 아동수당 지급, 고교 의무교육, 대학평준화, 반값등록금 등 할 수 있는 모든 정책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도입 시기와 방법을 검토해야 한다.
2013년 국회예산정책처 자료에 따르면 정부가 똑같은 10억원을 보건교육복지 분야에 지출하면 16.85명의 일자리를 창출하지만, 건설 분야에 지출하면 13.17명에 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2000년대 보건교육복지 사업부문 총지출의 경제성장 기여율이 8.2%인 반면 건설업 기여율은 4%였다고 한다. 이는 보육과 교육을 위한 복지 지출이 저출산 대책을 넘어 고용 증대와 경제 선순환으로 이어지는 사회로 전환된 것을 의미한다.
당장 대규모의 학교 통폐합, 과원 교사 정리, 대입 정원이 지원자 수보다 많아지는 2년 뒤부터의 대학교 존립 여부도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아이들 노는 소리가 사라지는 마을에 미래는 없다. 대한민국의 학교와 사회, 미래의 희망까지도 아이들 소리처럼 희미해져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