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나는 소비한다 고로 교무실을 뒤엎어도 된다?

일취월장7 2016. 3. 25. 10:10

나는 소비한다 고로 교무실을 뒤엎어도 된다?

교육 현장에서 가르치는 이를 무시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선생’에 대한 존경이 사라진 자리에 최소한의 존중이나마 들어서길 바란다.

  조회수 : 368  |  해달 (전 입시학원 강사)  |  webmaster@sisain.co.kr


가끔 “선생 주제에” “네까짓 게 감히” 하며 상대를 굴복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학교와 학원을 가리지 않고 일어난다. 그들은 선생이 자신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못할 것을 안다. 나아가 자신이 비용을 지불하고 구입한 ‘선생’이라면 더 확실한 우위에 선다.

만일 아이를 인격적으로 무시했다면 선생이 그보다 심한 대접을 받아도 할 말은 없다. 수강생의 불편 사항에 대해 사과하고 시정하는 것은 그들의 업무다. 하지만 통상적인 업무에 이런 반응이 돌아올 때가 있다. 교사 ㄱ은 과제를 안 해온 아이를 불러내 발바닥을 한 대 때렸다. 사전에 아이들과 규칙으로 정한 것이었다. 다음 날 발에 깁스를 한 아이와 그 부모가 찾아왔다. 부모는 교사 ㄱ의 처벌을 요구했고, ㄱ은 부모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강사 ㄴ은 수업 태도가 불량한 아이를 교실 뒤로 내보냈다.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학부모가 학원에 찾아왔다. “ 선생이 누구야? 감히 우리 애를 벌줘?”라며 강의실 문을 벌컥 열었다. 그는 전 직원이 나와 사과를 한 후에야 돌아갔다.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가 추락한 것을 한탄하고 싶지는 않다. 존경이나 권위는 강요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 선생들은 아이들에게 전문가로서의 신뢰를 얻도록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이것이 불쾌한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인간적인 존중의 결여다. 여기에는 상대의 의견을 들어보려는 시도가 없다. 상대도 충분히 판단하고 조치를 취한 것일 텐데, 그의 영역을 함부로 무시하고, 동등한 인격체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학부모인 자신은 화를 내도 되고, 선생은 ‘감히’ 그럴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해성 그림</font></div> 
ⓒ박해성 그림

“우리 가족은 다 서울대 출신인데 선생들은?”

일단은 돈을 냈기 때문이다. 소비자로서 비용을 지불했으니, 그에 따라오는 유무형의 자산은 당당히 누려도 되는 몫이 된다. 내 아이가 선생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소비자로서의 권리를 훼손당한 것이기 때문에 따질 수 있다. 선생의 역할은 부모가 원하는 형태로 공부를 시킬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해내는 것이지, 선생 스스로의 규칙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부모가 선생의 전문성을 존중한다면, 자신의 교육철학을 피력하고 협의해나가면 된다. 아이는 어차피 혼자 키우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하며 맞춰갈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소비자가 되면 그런 귀찮은 일을 할 필요가 없다. 원인은 돈에 국한되지 않는다.

학부모 총회에서 “우리 가족은 다 서울대 출신인데, 여기 선생들은 어디 출신인가?”라고 공공연하게 언급하는 부모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만큼의 성취를 이루지 못한 교사들이 미덥지 못하다. 상대가 그 분야에서 갖고 있는 전문성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그렇기에 선생이 내 자식에게 맘에 들지 않게 행동했을 때, “내 자식이 어떤 아이인데! 너 따위가!”라고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교양이 없어서’ 선생을 막 대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맞지 않다. ‘저런 부모 밑에서 애들이 뭘 배우겠냐’고 말하는 것도 어폐가 있다.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잘 알고 있기에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똑같이 가르쳐도, 그 아이들 역시 별 피해 없이 클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자신이 굽혀야 할 사람과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구분된 결과다. 자신에게 어떤 영향력도 미칠 수 없는 선생을 무시하는 것이 위협이 될 리 없다. 선생의 판단을 존중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물론 교육 서비스업이니, 이런 일들은 서비스업에서 마땅히 감수해야 하는 일일 것이다. 실낱같긴 하지만 아직 선생에 대한 존중이 남아 있기도 하니 다른 서비스업보다는 존중받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만연한 현상이라고 옳은 일은 아니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며 위안 삼을 일도 아니다.

사회적인 상하관계는 어디서나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혀 모르는 타인의 업무와 그 영역을 짓밟을 이유는 되지 않는다. 선생에 대한 존경이 사라진 자리에 상대방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 들어서길 바란다. 이렇게까지 서로를 할퀴고, 약점을 잡고, 감시하며 만들어내는 존중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모두가 더불어 살아가지는 못하더라도, 마주 보는 사람을 조건 없이 존중하는 것이 귀찮은 일로 여겨지지 않기를 바란다.



책이 삶을 바꾼다면 어떤 모양일까

  조회수 : 245  |  박태근 (<편집자를 위한 실험실> 연구원

독서계에 유령처럼 떠도는 질문이 있다. “당신의 인생을 바꾼 책은 무엇입니까?” 누구나 아는 고전을 꼽자니 왠지 재미가 없고, 아무도 모르는 책을 이야기하자니 공감을 얻기 어려워, 종종 질문을 받으면서도 때때로 답이 바뀌는가 하면,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을 말하거나 책 한 권이 인생을 바꿀 만큼 삶이 가볍지 않다고 답하며 현명하게 질문을 피해가기도 한다. 책을 소개하는 일을 하다 보니 나 역시 이런 질문을 피할 수 없는데, 정말이지 그런 책이 있는가 싶어 종종 책장을 둘러보아도 마땅한 책을 찾지 못하는 터라, 헛된 독서 인생이었나 싶어 가끔, 아주 잠시 회한에 빠지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책으로 삶을 바꾸려 뜻을 모은 이들을 만났다. 이들을 그 자리로 이끈 책은 달리는 이들에게 경전으로 꼽히는 <본 투 런>(여름언덕 펴냄)이다. 저자 크리스토퍼 맥두걸은 달리기를 하는 사람 가운데 80%가 매년 부상을 입는 아이러니에 궁금증을 품고, 세계적인 울트라 러너(Ultra Runner)를 비롯해 멕시코 협곡에 숨어 사는 타라우마라 부족까지 곳곳을 찾아가 달리는 이들을 만난다. 인류는 달리기 위해 태어났고, 한때는 인류 모두가 달리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는 동시에, 오늘날 달리기가 이로부터 얼마나 멀어졌는지 알게 되고, 이야기는 이를 제자리로 돌리려는 도전으로 이어진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연합뉴스</font></div>2013년 10월 제주 서귀포시에서 제주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2013년 10월 제주 서귀포시에서 제주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가 열렸다.

책을 펴낸 출판사 박성식 대표는 이미 책이 말하는 세계, 즉 트레일러닝(Trail Running)에 빠져들어 지난해 ‘코리아 50K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와 제주 국제 트레일러닝 대회 100㎞를 완주했다. 이 과정에서 절판된 <본 투 런>을 다시 펴내고, 이 책이 전하는 달리기 방법과 정신을 구현하려 본투런 트레일러닝팀을 꾸렸다. 모인 이들은 이 팀에 함께하게 된 사람들로, 리더로 팀을 이끌 40대 한 명, 허리에서 중심을 잡을 30대 두 명, 뒤에서 이들을 밀고 갈 20대 두 명이다. <본 투 런>을 즐겁게 읽었고, “더불어 달리고, 자연스럽게 달리고, 더 멀리 더 오랫동안 달린다”라는 본투런 정신을 자신의 몸으로 실현하고자 도전에 나선 이들로, 모두 육상선수 경력이 없는 아마추어 러너이거나 동네 러너다.

“오래달리기를 할 때 세상에서 유일하게 중요한 일은 경주를 마치는 것이에요. 한동안 뇌가 멈춰요. 모든 것이 조용해지고 몸의 흐름만 남아요. 나와 움직이는 동작만 남는 거죠. 나는 그 순간이 좋아요. 야만인이 되어 숲 속을 달리는 순간이 너무나도 황홀해서 미칠 것 같아요.” “간단합니다. 그냥 다리를 움직이는 겁니다. 자신이 달리기 위해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역사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다행히 처음 만난 이들이 이렇게 멋들어진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앞선 문장이 나오는 책 <본 투 런>을 가져온 이도 없었고, 독후감을 끄집어내는 이도 없었다. 앞으로 1년 동안 함께 달리며 트레일러닝 대회에 팀으로 참여할 계획이지만, 1년의 계획을 짠다거나 훈련 방법을 나누지도 않았다. 달린다는 것 그리고 함께 달리게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정도였다. 하루 지나 생각해보니 책으로 소통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은 감상에 빠질 법한 광경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책을 읽고 설레기는 참 오랜만이다

참, 내가 그 자리에 함께한 건, 책으로 삶을 바꾸려는 이들이 어떤 생각으로 모여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해서는 아니다. 앞서 소개한 허리에서 중심을 잡을 30대 두 명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나다. 편집자로 책을 만들고 서점에서 책을 팔고 여러 매체에 책을 소개하는 일을 하면서도 막상 내가 그 책을 읽고 한 일이라고는 책을 소개하는 일뿐이었구나 싶어 답답하던 차에, 이 책은 이래서 좋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이 책으로 내 삶이 바뀌었다고 권하는 일도 한 번쯤 해보는 게 어떨까 싶은 마음에 도전하기로 했다. 1년 뒤에는 인생을 바꾼 책을 묻는 이에게 <본 투 런>을 답으로 건넬 수 있을까. 책을 읽고 설레기는 참 오랜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