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연구소

적당한 거리와 소속감을 원하는 현대인의 모임 문화

일취월장7 2018. 12. 13. 17:35

적당한 거리와 소속감을 원하는 현대인의 모임 문화

  • AhnLab
  • 2018-12-12

30대 후반인 최 모 과장은 예전보다 야근이 줄어든 틈을 타 저녁 시간을 쪼개 자기 개발 겸 업무와 관련된 외부 교육을 두 달간 받기로 마음 먹었다. 조별 토론과 과제로 진행되는 주 2회 수업이었는데, 매번 반갑게 인사하고 열심히 토론도 했다. 그런데 뭔가 예전과는 다른 점이 느껴졌다. 예전 같으면 교육 첫날, 하다못해 조별 과제가 생기면 “끝나고 가볍게 맥주라도 한잔 하자”는 분위기가 이어졌을 법한데 아무도 그런 말이 없었던 것이다. 다들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가 싶어 최 과장이 슬쩍 운을 띄워봤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시큰둥. 심지어 불편한 기색까지 보였다. 문득 ‘이런 게 세대차이인건가’ 싶은 최 과장이다. 

 

 

 

어느 새 12월도 중반을 향해가고 있다.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1년에 대한 아쉬움의 깊이만큼 여기 저기 송년 모임을 추진하느라 손가락이 바삐 움직일 시기다. 그런데 올해는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전체적으로 송년 모임에 대한 반응이나 형태가 예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다. 최근 모 구직 사이트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성인 남녀 47%가 올해 연말 모임 대신 혼자 보낼 계획이라고 답했다. 그런가 하면 지인들을 만나는 것도 아닌데 돈까지 내야하는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아이러니한 현대인들의 모임 문화에 대한 변화를 짚어본다.

 

사적인 모임이지만 상대방은 나를 모른다?

요즘 각종 TV 프로그램에도 자주 등장하는 신조어 중에 ‘핵인싸’, 또 이 보다 앞선 ‘아싸’라는 표현이 있다. 각각 영어 표현인 인사이더(insider)와 아웃사이더(outsider)를 차용한 표현으로, 집단이나 모임 등에서 분위기를 리드하거나 주목받는 사람이 ‘핵인싸’라면 겉도는 사람을 ‘아싸’라 할 수 있다. 

 

‘집단’을 기준으로 개인의 위치를 정의하는 이들 신조어는 현대인들의 미묘한 이중적인 심리를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핵인싸’가 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단체에 소속되어 있고자 할 때도 있지만 타인과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다른 사람과 구분되고 싶어 자발적인 ‘아싸’를 택하는 순간도 있다. 이런 경향이 동호회 커뮤니티의 트렌드도 변화시키고 있다.

 

한때는 오프라인에서의 모임을 위해 온라인 커뮤니티를 찾았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온라인에서만 만날 뿐 오프라인 모임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최근 일정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단다. 그러나 과거의 온-오프라인 모임과는 컨셉은 물론 모이는 과정도, 결과도 전혀 다르다. 

 

대표적으로 ‘트레바리’라는 커뮤니티 서비스를 들 수 있다. 독서모임 기반 커뮤니티인 트레바리는 스스로를 ‘커뮤니티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라고 정의하는데, 말 그대로 돈을 받고 모임(커뮤니티)를 만들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적게는 19만원, 많게는 한 시즌에 30만원에 달하는 가입비를 내고 특정 분야의 책을 읽은 후 독서 토론회에 참여하는 방식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친한 사람들도 아닌데 적지 않은 돈을 내가며 책을 읽고 독후감을 써서 토론회까지 참여할 이유가 있을까 싶지만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얻고 있다. 2015년 4개 클럽, 회원 80명으로 시작한 트레바리는 2018년 현재 200개 클럽에 회원 2500명, 누적 가입자 1만 3천여 명에 달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또 직장인 대상으로 오프라인 모임을 형성하는 ‘2교시’라는 네트워크 커뮤니티 사이트도 인기다. 2교시는 직장인을 대상으로 자기개발, 취미 생활, 재테크 등의 콘텐츠를 중심으로 스팟모임을 제공하는 서비스다. 2013년 오프라인 모임에서 시작해 3년만에 5천 명에 달하는 회원이 가입했는데, 올해 1월부터 5만원~25만원 상당의 회비를 받는 유료 모임으로 전환했다. 

 

그렇다면 이들 유료 커뮤니티 서비스가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업계 관계자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꼽았는데, 여기에서 또 다시 이중적인 현대인의 정서를 확인할 수 있다. 즉, 요즘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친분도 없는 사람을 굳이 돈까지 내가며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SNS 기반의 인간 관계가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는 점 ▲자기 개발을 원하지만 과거와 같은 일방적인 강의 방식은 원치 않는다는 점 ▲자발적인 것을 원하지만 자율적인 꾸준함을 실현하기 어렵다는 점 ▲모임은 원하지만 지나치게 친밀한 관계나 사적인 정보 공개는 원치 않는다는 점 등이다. 

 

모르는 사람들과 진짜 ‘달리는’ 자유

단체 종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취미로 혼자 하기에는 어려운 종목이 있다. 바로 마라톤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취미로 마라톤을 꾸준히 하기 위해서는 동호회에 가입해서 활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간혹 단체로 달리는 것보다 단체로 식사나 음주를 하는 2차 모임의 비중이 커지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동호회에 가입하지 않아도 ‘달리기’가 취미인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환경이 무르익었다. 계절을 막론하고 주말마다 한강 주변과 지방 주요 도시에서 개최되는 마라톤대회가 그것이다. 정부기관이나 지자체에서 주관하기도 하고 언론사에서 개최하는 국제대회 규모의 달리기 대회도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호응을 받는 달리기 대회는 주요 스포츠 브랜드에서 개최하는 마라톤 대회다. 일반적인 달리기 대회의 경우 절반 정도가 의무적으로 참가한 사람들로 구성되는 반면 이들 스포츠 브랜드의 달리기 대회는 거의 100%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에 의해 이뤄진다. 대회 참가 신청을 받기 시작한 몇 분 만에 웹사이트 신청은 마감되기 일쑤다. 

 

스포츠 브랜드 등 기업이 주최하는 마라톤 대회는 제품이나 브랜드를 알리는 홍보 목적이 크다. 참여한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심어주기 위해 다양한 선물이나 혜택을 주기도 한다. 마라톤 대회를 개최하는 업체가 늘어남에 따라 참여자들을 확보하기 위한 다양한 이벤트와 아이디어가 쏟아지고 있다. 덕분에 마라톤이 취미였던 사람들은 다양한 대회를 즐길 수 있고, 달리기가 취미가 아니었던 사람들까지 이색적인 이벤트로 관심을 가는 등 일반인 마라톤의 저변이 확대되는 효과도 낳고 있다. 

 

‘적당한 거리’ 원하는 현대인의 모임 문화 

커뮤니티(모임) 트렌드의 변화는 경제적인 원인과 함께 현대인들의 라이프 스타일 변화에서 기인한다. 직장이나 나이, 사는 지역 등 내 정보를 굳이 공개할 필요가 없어 내 사생활을 보호할 수 있으면서도 신원이 확실한 사람들과 안전하게 만날 수 있다면 돈을 내는 것이 아깝지 않다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혼밥, 혼술 등 ‘나’에 집중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처럼 타인과의 관계도 ‘나’를 침범 당하지 않는 선에서 형성되길 원한다. 이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이들과 소통이 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길 원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얘기다. 현대인들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렇게 변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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