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일취월장7 2018. 5. 23. 15:44

이승만 하야, 미국의 내정간섭 결과였다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2018.04.05 03:57:21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을 주제로 연재를 시작한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2018년 현재까지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 절대적이거나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한국은 비굴할 정도로 미국에 의존적이거나 종속적이었다. 나라 안팎에서 '미국의 51번째 주 (the 51st state of the United States)'라고 조롱당할 정도였다. 이러한 과거를 되돌아보면 앞으로 미국과의 대등한 관계를 지향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1945년 8월 한반도 해방과 분단부터 미국이 어떻게 개입하고 무슨 역할을 했는지 주로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를 바탕으로 들여다보려고 한다. 미국 국무부는 외국과의 중요한 관계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를 대략 30~40년 뒤 당시 비밀에 부쳤던 외교문서를 풀어 공개한다. 2018년 4월 현재 1970년대 한국과의 관계까지 비밀 해제한 상태다.

반세기가 훨씬 지난 오래 전부터의 역사이기에 연대순으로 소개하기보다 기념일에 맞춰 연재를 이어갈 계획이다. 4월엔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을, 5월엔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을, 6월엔 '6.3사태'를 떠올리며 "한일협정과 미국의 압력"을 다룬다.

이어 7월엔 '7.27 휴전협정'을 맞아 최근 논의되고 있는 남북미 정상회담과 종전협정을 염두에 두고 "미국이 주도한 한국전쟁과 정전협정"을, 8월엔 '8.15광복절'을 기념하며 "한반도 해방 및 분단과 미국"을 연재할 예정이다. 많은 조언과 비판을 기대한다.

1. '4월 혁명'이란 명칭에 관해 

나는 '4월혁명'과 '4.19혁명'이라는 명칭 사이에서 '4월 혁명'을 선호한다.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부정선거에 따른 시위가 4월 19일 하루에만 일어난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날 시작되거나 끝난 것도 아니다.  

1960년 2~4월 전개된 상황을 간단히 소개한다. 2월 28일, 대구의 고등학생들이 자유당의 부정선거 운동과 관련해 최초로 데모를 일으켰다. 투표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시위가 일어났다. 4월 11일, 3월 15일의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고 1학년 김주열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마산 앞마다에서 발견되자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총궐기선언문을 발표하고 서울 시내를 행진하고 돌아오다 대한반공청년단 소속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았다. 4월 19일, 서울의 대학생들과 중고등학생들이 대규모로 데모를 벌이며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까지 몰려갔다. 경찰은 총과 포를 쏘고 이승만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다.  

4월 23일, 이기붕이 부통령 당선자 사퇴를 고려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5일,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서도 서울에서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과 시위행진을 했다. 이는 대규모의 군중 데모로 이어졌다.  

4월 26일, 아침부터 최소 5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의 중심부를 행진했다.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조건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4월 27일, 이승만이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이러한 상황 전개를 '4.19혁명'이라고 부르는 게 적절할까? 

이와 관련해 당시엔 가장 많은 발행 부수와 영향력을 자랑하던 <동아일보> 1960년 7월 28일자 기사를 그대로 소개한다.  

"문교부에서는 4.19혁명의 용어를 각양각색으로 호칭하고 있어 아동 교육에 적지 않은 혼동을 가져오고 있는데 비추어 이러한 폐단을 일소하기 위하여 그간 동부 (同部)에서는 언론계인사와 대학교수 110여명으로부터 통일 방안을 설문하였던 바 그 다대수가 '4월혁명'이라는 데 찬동하였으므로 이를 채택하여 (중략) 전국 각급학교에 그 취지를 통고하여 통용화할 것 (중략) 신년도 교과서에도 전기와 같이 통일 호칭으로 편찬할 것"

그 후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이를 '5.16혁명'으로 미화하면서 4월 혁명을 '4.19의거'로 깎아내렸다. 1993년 김영삼이 이른바 '문민정부'를 세우고 '4.19의거'를 '4.19혁명'으로 고쳐 불렀다. 

2. 4월 혁명에 관한 정부 자료와 왜곡된 사실 

1960년 4월 혁명에 관해 한국과 미국 정부가 외교문서를 공개한 현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케네디 대통령 기념도서관 (JFKL)이 1980년대부터 장면 정부에 관한 문서를 부분적으로 공개하기 시작했다. 둘째, 국무부가 4월 혁명 전후의 한국 상황을 다룬 외교문서를 1994년에 비밀 해제하여 책으로 출판했다. (책 제목은 ) 셋째, 한국 외무부 (지금의 외교부)가 1995년과 1996년 4월 혁명에 관한 문서를 부분적으로 공개했다. 

위의 자료를 바탕으로 우선 그 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왜곡된 사실이나 해석 몇 대목을 지적한 뒤 자세한 내용을 밝힌다. 

1) 이승만의 하야 성명에 관해 

이승만이 1960년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그러나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단서를 단 '조건부 하야' 또는 '하야 고려' 성명이었다.

매카노기 (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매그루더 (Carter Bowie Magruder) 주한미군 사령관과 함께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에게 "국민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서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하겠느냐며 그 성명이 유보적이고 단서 조항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승만이 계속 미적거리자 매카노기는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뿐만 아니라 "미국의 근본적 이익"까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이승만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연로한 대통령을 죠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에 비유하며 회유하기도 하고 압력을 넣기도 하며 은퇴하도록 이끌었다. 이에 이승만은 다음날 4월 27일 대통령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2) 이승만의 하야 배경에 관해 

언론인 이상우는 1988년 펴낸 <군부와 광주와 반미>에서 다양한 자료를 제시하며 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의 글을 그대로 옮긴다.

"26일 아침 매카나기 대사의 세 번째 경무대 방문은 이승만의 부름에 따른 것이었다(중략) 매카나기 대사의 마지막 경무대 방문이 시간적으로 하야 성명과 비슷하게 중복되었기 때문에, 국민들 가운데는 이승만의 하야 결단이 매카나기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러한 오해는 그 후로도 꽤 오래 계속되었다 (중략) 어느 미국인도 이승만을 상대로 직접 하야를 권유한 적은 없었다 (중략) 미국이 아무리 한국의 후견국이었다고는 할망정, 그리고 4.19 당시의 사태가 미국의 극동정책과 관련하여 몹시 급박한 상황이었다고 할지언정, 현지 대사가 대통령을 맞대놓고 그만두라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한우 <월간조선> 기자 역시 1995년 4월호에 실은 '4.19시위대 대표 유일라씨의 시간대별 증언'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 의해 물러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 1960년 4월 26일 오전 10시 20분 마지막으로 이승만(오른쪽) 대통령에게 하야를 권고하는 맥카나기 미국대사. ⓒ연합뉴스


1960년 4월 26일 아침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면담했다는 유일라 당시 학생대표를 인터뷰한 뒤 그가 대통령의 하야를 건의한 후 이승만이 성명을 발표했다는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국민의 뜻에 따라 하야를 결심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단언한 것이다. 

여기서 이상우와 이한우는 매카노기 대사와 실바 (Peer de Silva) 미국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이 4월 25일부터 전화로 이승만에게 압력을 넣은 사실을 몰랐거나 빠뜨렸다. 이승만이 26일 학생대표단을 만난 것이나 미국 대사를 부른 것은 매카노기와 실바의 전화를 통한 압력이 가해진 이후였다. 

3) 미국의 개입 강도에 관해 

이승만이 4월 27일 대통령직을 사임하자 워싱턴 정가에 한국에 대한 미국의 내정간섭이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에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대통령이 4월 27일 기자회견을 갖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부정선거에 관한 우려를 "우호적인 태도로" 표명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 뉴욕타임스>는 1960년 4월 28일 아이젠하워가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 (no interference of any kind was ever undertaken by the United States)"고 단호하게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이와 달리 미국 외교문서는 4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이 지나친 간섭과 도를 넘는 압력을 지속적으로 행사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앞에서 밝혔듯,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 그리고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 등이 깊이 개입했다.  

나아가 이승만이 물러난 뒤 들어선 허정 과도정부는 미국의 더 적극적 간섭을 요구하며 장관 임명에 대해서까지 주한미국대사의 동의를 구할 정도였다.

4) 미국의 개입 의도에 관해 

많은 한국인들은 독재정권 전복이라는 목표 때문에 미국의 내정간섭에 의혹이나 불만 또는 분노를 터뜨리기는커녕 열렬하게 환영했다. 4월 26일 아침 매카노기가 경무대를 향할 때 시위군중은 박수를 치며 환영했고, 그가 나올 때는 "미국 만세"와 "매카나기 만세"를 부르며 그의 차를 따라 미국대사관까지 행진했다.  

< 뉴욕타임스> 1960년 4월 27일 자에 따르면, 그 날 저녁 학생들이 이기붕의 집에 들어가 가재도구를 꺼내 불태울 때 대형 성조기를 발견하고는 취재 중이던 미국인 기자에게 건네주기도 했다.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미국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준 '세계 평화와 자유의 수호자'로만 보였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3년 출판된 <4월혁명론>에 실은 '4.19의 역사적 의의와 현재성'이란 논문에서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각서를 전달하고 항의한 것은 미국이 "안보와 미국의 국가이익"보다 "(한국인들의) 인권"을 중시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잘못된 해석이다. 미국은 예나 지금이나 안보를 비롯한 미국의 이익을 앞세우지 않은 대외정책을 펼친 적이 전혀 없다. 미국은 1961년 5월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와 1980년 5월 전두환의 광주학살까지 용인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기 나라의 안보와 이익보다 다른 나라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대외정책을 펼치는 나라가 어디 있겠는가.

참고로, 1950년대 진보당 서울시당 간부로 일했던 정태영 박사는 <역사비평> 1990년 겨울호에 실은 '조봉암 사형, 미국은 왜 침묵을 지켰나'라는 글에서 조봉암 진보당 당수 처형에 대한 미국의 불간섭 의혹과 불만을 드러냈다.  

정 박사는 "제3세계의 친미독재 체제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는 정치 인사에 대해 정치적인 살인을 가했을 때 '의례적인 항의'를 표시하던 미국이 유독 진보당 사건에 대해서만은 왜 한 마디의 논평조차 하지 않았을까"라며, 조봉암이 이미 미국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이다. 

아니다. 미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했지만 실패했다. 물론 조봉암을 비롯한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미국의 안보와 이익을 위해서 개입했다. 1958년 다울링 (Walter C. Dowling) 주한미국대사가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조봉암 사형을 막아달라고 두어 번 요구하면서 경고하기도 했던 것이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한국 정부가 조봉암의 평화통일론을 반역죄로 규정할 경우 미국이 유엔에 상정한 한반도 통일방안에 대한 지지조차도 범죄시 될 수 있었고, 유엔총회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미국의 영향력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조봉암에 대한 사형 집행이 1950년대부터 일어난 비동맹운동에 부정적인 영향을 초래할까봐 우려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한국을 '자유 세계의 진열장'으로 삼아 비동맹국가들에게 이념 공세를 취하고자 했는데, 조봉암 사형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훌륭한 선전거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3.15 부정선거는 이승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2)
2018.04.11 16:41:09

3. 자유당 독재와 3.15 부정선거

1945년 8월 한반도 해방과 분단에 이어 1950년 6월 전면전으로 확대된 한국전쟁은 남한에 극심한 친미반공 체제가 구축되도록 이끌었다. 1945년 9월 미 군정이 시작되면서부터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된 이승만 대통령은 남한 민중의 지지보다는 미국의 지지와 막대한 원조를 기반으로 정권을 유지하면서 철저한 반공정책을 무기삼아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전횡은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된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극에 이르렀다. 

1958년 폭력적인 총선 실시와 국가보안법 파동 그리고 1959년 <경향신문> 폐간 및 조봉암 진보당 당수 처형 등을 꼽을 수 있다. 

첫째, 자유당은 1958년 5월 2일 총선거를 유례없이 부정과 폭력으로 이끌었다. 그 무렵 <동아일보>에 따르면, "백주 장안에 집단 테로"와 "언론인 피습 등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투표를 진행하는 등 "폭력이 난무한 피의 투표일"을 만들었다. 서울과 지방 곳곳에서 선거 부정을 밝히라고 "수만 명의 군중(이) 철야 농성"을 하거나 시위를 벌였다.

장면 부통령은 5.2 총선거가 그때까지 한국 역사상 최악의 선거였다며 자유당의 부정을 지적했다. 그러나 자유당의 이재학 국회부의장은 "이 정도면 참 잘되고 있다. 외국서는 살인도 있는데"라는 망언을 남겼다. 국무위원들은 5.2 총선거가 한국 역사상 "가장 명랑한 선거"였다고 억지를 부렸다. 

둘째, 자유당은 민심의 이반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 야당과 언론을 강력하게 규제하기 위해 1958년 8월 국가보안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1948년 제정된 국가보안법에 비해 이적행위 개념과 적용 대상을 확대하고 처벌 규정을 몇 가지 추가한 것이었다. 야당은 이 법안이 "공산분자를 더 잡을 수 있는 이점(利點)보다는 언론 자유를 말살하고 야당을 질식시키며 일반의 공사 생활을 위협할 해점(害點)이 심대하다"며 법조계 및 언론계와 함께 문제점을 지적했다.  

자유당은 "반공 투쟁의 태세를 가일층 강화하여 일체의 용공.회색적 정치 세력을 타도한다"며 야당을 비롯한 사회 각계의 반대에 반공이란 이름으로 위협을 가했다. 그리고 1958년 12월 국회 법사위에서 야당의원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날치기로 통과시켰다. 본회의에서는 무장경찰관들이 국회의사당을 에워싼 가운데 경위권을 행사해 농성 중인 80여 명의 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국가보안법 개정안뿐만 아니라 지방자치법 개정안과 예산안까지 무더기로 통과시켰다. 

셋째, 1959년 4월 그 무렵 일간지 중에서 두 번째로 많은 발행 부수를 기록하며 자유당 정권에 비판적인 <경향신문>을 1959년 2월 4일자 '여적(餘滴)' 기사를 구실로 폐간시켰다. 이른바 "여적 필화사건"으로 "제1공화국 최대의 언론탄압"이었다. 문제 삼은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국의 현실을 논하자면, 선거가 올바로 되느냐 못 되느냐의 원시적 조건부터 따져야 할 것이다. 물론 '진정한 다수'라는 것이 선거로만 표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거가 진정 다수결정에 무능력할 때는 결론으로는 또 한 가지 폭력에 의한 진정 다수결정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을 가리켜 혁명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된 다수라는 것은 조만간 진정한 다수로 전환되는 것이 역사적 원칙일 것이니 오늘날 한국의 위기의 본질을 대국적으로 파악하는 출발점이 여기 있지 않을까." 

이승만 정부는 이 구절을 "혁명에 의해서라도 진정한 다수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폭력을 선동했다"며 헌법에 규정한 선거제도를 부정하고 폭력을 선동했다는 죄목으로 글쓴이를 포함한 관련자들을 구속하고 경향신문사 문을 닫게 했다.

넷째, 1958년 1월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을 국시 위반이라 하여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후보였던 조봉암 당수를 비롯한 당 간부들을 검거했다. 1958년 6월엔 조봉암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미국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조봉암을 구명하기 위해 배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했다. 다울링 (Dowling) 대사가 두 차례 이기붕 국회의장에게 미국의 뜻을 전달해 조봉암에 대한 사형선고를 막아보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그러나 조봉암은 1959년 2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을 받고 그해 7월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러한 자유당 정권의 전횡이 지속되는 가운데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1960년 3월 15일의 정‧부통령 선거는 최소한 한 달 전부터 파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야당인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1월 29일 신병 치료차 도미하여 2월 15일 워싱턴에서 위암 수술을 받은 직후 갑자기 사망해 버린 것이다.  

장면 부통령은 이틀 후 조문차 방문한 매카노기 주한미국대사에게 자유당의 선거 부정행위가 점증하고 있으며 자신에 대한 암살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부통령 후보를 사퇴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선거를 둘러싼 "공포 분위기"에 대한 두려움을 미국대사관 인사들에게 전달하며 도움을 구했던 것이다. 

실제로 1956년 9월 28일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저격 사건을 당한 적이 있는 장면은 1958년 6월에도 자신에 대한 암살 음모에 대하여 다울링 당시 주한미국대사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었다.  

매카노기는 전임자인 다울링이 1958년 5.2 총선거 후 장면에게 주문했듯이, "양당제도의 민주적 절차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미국은 민주당을 "충성스러운 야당"으로 간주하고 있다며 야당이 반드시 선거에 임하도록 촉구했다. 양당제와 선거, 즉 야당의 존재와 여야 후보 간의 경선은 미국이 한국을 "민주주의의 진열장"으로 만들기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것이다.

조병옥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워싱턴 정가 일각에서 민주당이 대통령 후보를 다시 내세울 수 있도록 선거를 연기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자,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는 2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에게 비밀 서한을 보내 선거 연기를 건의했다.

선거를 연기하면 자유당과 이승만이 매우 공정하다는 인상을 대외에 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956년 5.15 정.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신익희 대통령후보의 사망이 장면의 부통령 당선에 영향을 미쳤듯, 조병옥의 죽음이 장면에게 또 다시 동정표를 안겨주는 "비극"을 막을 수 있다는 취지에서였다. 양유찬은 그 때 이미 서울과 그 주변 지역에서는 80%의 유권자가 자유당의 이기붕 부통령 후보를 반대한다는 비밀 정보를 입수했다며 이기붕은 농민들의 표에 의존해야만 할 것이라는 건의를 덧붙였다. 

이승만은 3월 10일 양유찬에게 보낸 회신에서 민주당이 다른 대통령 후보를 내세우는 것은 선거법에 따라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민주당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고 알렸다. 이승만은 민주당에서 누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든 자신을 누르고 당선될 가능성이 없으며, 부통령 선거에서 이길 수 있는 민주당의 "유일한 사람"은 장면이라고 믿었다. 장면을 제외한 민주당의 어느 누구도 대통령으로든 부통령으로든 당선될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이승만과 자유당은 애초에 민주당이 장면을 대통령후보로 그리고 조병옥을 부통령후보로 내세우길 원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장면이 부통령에 당선되면 법에 따라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밝힘으로써 연로한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임기는 채우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으며,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현 체제의 변경을 원하지 않는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동양의 관습에 따라 조병옥의 사망에 따른 동정표는 막을 수 없는 것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이승만과 자유당이 3월 15일 선거에서 유례없는 부정을 저질렀던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때는 미국처럼 대통령과 부통령이 한 조를 이루어 출마하는 게 아니라 따로따로 선출했다. 대통령으로는 자유당 이승만이, 부통령으로는 민주당 장면이 당선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이승만이 1875년으로 만 85세여서 당선되더라도 4년 임기를 다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가 임기 중에 사망하면 부통령이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아야 하기 때문에 장면이 아니라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했다. 3.15 부정선거는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부정선거는 결과적으로 부통령 당선자가 자살하고 대통령이 쫓겨나는 4월 혁명을 불러왔다. 


"미국의 사람"이었던 이승만, 결국 미국에 버림받다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3)
2018.04.18 14:59:38

4. 민중의 저항과 미국의 개입에 따른 이승만의 하야

1960년 3.15 부정선거로 마산에서 대규모 군중 데모가 일어나자 주한미국대사관은 미국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한국 사태에 개입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4월 2일 매카노기 대사는 미국이 세계 다른 어느 곳보다 한국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했다. 미국은 한국의 현재와 미래에 중대한 책임을 지고 있으며, 한국은 미국의 "피와 돈"이 엄청나게 투자되고 안보가 심각하게 걸려 있는 곳이라는 이유였다.

4월 17일 매카노기는 한국 정세의 악화에 따라 "즉각적인 조치의 시급한 필요성"을 인식하고 국무부가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할 것을 거듭 주문했다. 그는 미국 정부의 우려를 나타내면서 한국 정부가 취해야 할 조치를 권고하는 각서를 본인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하고, 허터 국무부 장관은 양유찬 주미한국대사에게 전달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4월 18일엔 시위의 주도 세력이 고교생들에서 대학생들로 바뀌고, 19일엔 데모가 대규모로 확산되었다. 주한미국대사관은 시시각각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면서 그런 보고를 미국 군부에도 전해달라고 요구했다. 주한유엔군사령부는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송요찬 육군참모총장이 경무대에서 요청한 한국군 제15사단의 병력 이동을 승인했다.

4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되는 등 정세가 급변하자 매카노기는 시위자들과 당국이 폭력을 자제하고 법과 질서를 되찾아 "정당한 불만"이 해결되기를 바란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경무대에 긴급하게 요청해 김정렬 국방부 장관과 홍진기 내무부 장관이 배석한 가운데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이승만은 매카노기에게 장면 부통령과 민주당 지도자들이 봉기를 선동하고 있다며 그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매카노기는 봉기의 근본 원인이 3월 15일의 광범위한 선거 부정과 경찰의 강압에 있다면서, 유혈 사태를 방지하고 민주당 지도자와 학생 시위자들에게 가혹한 처벌을 하지 말도록 권고했다.  

아울러 유엔군사령부의 책임이 한반도에서 "안전하고 안정된 작전기지를 유지하는 중대한 이익을 미국에 제공하는 것"인데 이것이 위험에 빠져 있다고 강조했다. 이승만이 최근 사태에 유감을 표명하고 정부가 국민의 불만 해소책을 강구하리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방송 메시지를 직접 녹음해 발표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4월 19일 워싱턴에서는 허터 국무부 장관이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한국의 정세변화를 보고하며 1-2일 후 이승만 대통령과 통화할 것을 건의했다. 미국이 "기술적으로는"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고 있지만 "특별한 정당성"이 있다면서, 최소한 부통령에 대한 재선거만 한국의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는 매카노기의 견해를 보고했다.  

아이젠하워는 미국이 이승만에게 강경하게 대응하도록 하고 매카노기가 그의 의견을 이승만에게 전달하도록 지시했다. 허터는 양유찬 주미한국대사를 불러 각서를 읽으며 한국의 불안한 정세 때문에 미국 국민과 의회가 아이젠하워의 6월 방한에 회의적이라고 경고했다.

4월 21일 매카노기가 국무부 훈령을 받아들고 다시 경무대를 방문했다. 이미 전날 워싱턴의 양유찬으로부터 허터와의 면담을 보고받은 이승만은 우선 4.19 봉기에 대한 미국의 반응에 놀라움과 우려를 표명했다.  

이승만은 한국의 사태는 국민의 불만이 반영된 게 아니라 일부 천주교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는 "장면의 음모"라고 거듭 강조하며, 미국이 이러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채 대한정책을 추구한다면 엄청난 혼란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언론이 한국의 봉기를 집중 보도함으로써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는 불만도 토로했다.  

이에 매카노기는 미국의 모든 정보망을 통해 볼 때 장면이 봉기의 선동자가 절대 아니라 오히려 "충성스러운 야당의 충실한 지도자"이며, 봉기는 민중의 정당한 불만에 근거하여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반박했다. 

4월 25일엔 계엄령에도 불구하고 대학교수단의 시국 선언과 시위행진이 대규모의 군중 데모로 발전하고, 4월 26일 아침에는 최소한 5만 명의 시위대가 서울 중심부를 행진하는 "극도로 심각한 상황"이 발생했다.  

오전 9시 10분, 매카노기가 김정렬 국방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경무대로 가서 대통령이 즉시 학생대표단을 만나고 선거 재실시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도록 촉구하라는 것이었다. 주한미국대사가 최대한 빨리 대통령을 만나고 싶다는 뜻도 강력하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9시 20분엔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에게 전화해 곧 경무대를 방문할 예정이니 함께 대통령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9시 40분이 되도록 경무대에서 연락이 없었다. 그 사이 시위군중이 늘어나고 발포 결정이 내려졌다. 이젠 실바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 경무대의 박찬일 대통령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카노기와 매그루더가 함께 경무대로 갈 텐데 지금 즉시 대통령과의 면담이 이루어지기 바란다고 독촉했다.  

9시 45분 매카노기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민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당국을 지지할 책임이 있고, 당국은 국민의 정당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즉각적이고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할 책임이 있으며 지금은 미봉책을 쓸 때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10시 15분 김정렬이 매카노기에게 전화했다. 이승만이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과 선거 재실시를 명령했다는 내용의 성명을 준비해놓고 발표 여부를 고려하고 있으며 매카노기를 만나고 싶어 한다고 했다. 10시 27분 매카노기와 매그루더가 경무대로 출발하고, 10시 30분 이승만의 '하야 고려' 성명이 발표되었다.  

10시 35분 주한미국대사와 주한미군사령관이 경무대에 도착했다. 매카노기의 요청대로 이승만이 학생대표단과 면담을 마친 직후였다. 김정렬이 건네 준 영어로 번역된 성명의 내용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1) 만약 전 국민이 바란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If it is the wishes of the whole people, I am glad to resign from the presidential office.) (2) 3.15 선거가 불법으로 치러졌다고 들었기 때문에 대통령선거를 재실시하라고 이미 명령했다 (3) 선거에 개입된 모든 불법성을 제거하기 위해 이기붕에게 모든 정치적 지위에서 물러나도록 명령했다 (4) 만약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로 헌법을 개정하겠다. 

이에 매카노기는 각 항목에 대해 분명한 뜻을 요구했다. 특히, 첫째 항목과 관련해, 이승만이 "내가 만약 (국민) 여러분에게 방해가 된다면 물러나겠다 (if I stand in your way, I will resign)"는 의미라고 설명하자, 매카노기는 이 경우에 국민의 뜻을 어떻게 결정할 것이냐며 그의 성명이 유보적이고 단서 조항이 전적으로 분명하지 못하다고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에게 현재 "매우 위험하고 폭발적인" 정세가 "명확하고 만족스런" 결의의 표명을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위의 네 가지 조항이 국민의 요구에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것 (we doing all we can)"이라는 이승만의 대답에 매카노기는 "명확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의지의 표명이 꼭 필요하다고 반복해서 단호하게 지적하며 현 상황에서 "애매한 표현과 임시변통"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승만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것(government doing all it could)"이라며 계속 명확한 대답을 피하자, 매카노기는 한국민의 "정당한 요구"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미국의 이익"까지 위험에 처해 있다는 미국의 우려를 드러냈다.  

나아가 이승만을 "평생 동안 어떤 한국인보다 더 공경받고 존경받아온 한국 민족의 진정한 아버지"라고 추켜세우며 회유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을 조지 워싱턴과 비교하기도 하며 다음과 같이 물러나라고 권유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그의 책무로부터 벗어나서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고, 특히 지금같이 복잡하고 어려운 시기에는 정부의 부담을 젊은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국민이 믿는 때 (when people believe that elder statesman, having carried so many burdens for so many years, should step away from his responsibilities, retire to position respect, and turn burdens government, especially in these complicated and difficult times, over to younger men)"가 한국에 도래했다.

이승만이 미국의 우려 표명에 대해 깊이 인식한다며, 그러한 우려가 한국을 돕기 위한 미국의 욕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한다고 대꾸했다. 이에 매카노기는 김정렬을 다그쳤다. 대통령이 서울 시민들과 현재 시위 중인 사람들의 심정을 진정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승만이 직접 대답했다. 자신이 젊었을 때는 분명히 국민을 잘 알았으며 지금도 물론 그렇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4월 27일 이승만은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하고 마침내 사임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1945~1948년의 미군정 기간에 "미국의 사람"으로 선택되어 "미군과 달러와 경찰"로 남한을 지배해오다, 독재정치와 휴전 반대 때문에 1952~1953년 사이 적어도 두 번에 걸쳐 미국에 의해 극비리에 제거될 위기를 넘겼지만, 1960년 4월 결국 미국의 버림을 받은 것이다.


'미국의 충고'로 수습된 4.19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4월 혁명과 미국의 개입 (4)
2018.04.25 16:04:03

5. 허정 과도정부와 미국의 내정간섭

4월 27일 이승만이 물러나자 미국의 내정간섭은 더욱 다양해지고 심해졌다. 그날 즉각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허정 과도정부가 일본과 관계 개선을 꾀하고 미국과 더욱 밀접한 관계를 추구하도록 했다. 그리고 송요찬 장군이 한국의 안정과 안보를 위해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대학교수들은 학생들의 데모 방지를 위해 힘쓰도록 당부할 것을 주문했다.

4월 28일 허정 외무부장관은 대통령 대행으로서 매카노기 주한 미국대사를 초청해 미국의 내정간섭을 자청했다. 이틀 전 경무대에서 대사 신분으로 주재국의 노련하고 완고한 대통령을 위압적으로 굴복시킨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그는 미국의 실체와 위력을 분명하게 인식했을 것이다.  

허정은 매카노기에게 미국과 밀접하게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며, "모든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을 지지하고 도와줄 것을 간청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4월 27일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은 어떠한 종류의 간섭도 절대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한 것과 관련해, 그는 미국의 행위가 내정간섭이 아니라 "상황에 따른 적절한 충고"였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며, 자신은 "미국의 충고와 도움"에 지속적으로 의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고 했다.

또 미국이 지난 날 한국의 많은 문제에 대해 "충고"를 해왔지만 이승만의 완고함 때문에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다며, 자신은 미국의 "충고"를 전적으로 받아들일 것은 물론 그러한 "충고"를 간청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는 뜻을 거듭 명백히 밝히기도 했다. 

허정은 나아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문제를 즉각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첫째, 곧 발표할 내각 구성과 관련해 매카노기의 의견을 물으며 그 인선이 만족스럽다면 미국이 호의적 견해를 발표해달라고 부탁했다. 둘째, 계획 중인 경찰과 군대 및 방첩대의 개편과 관련해 미국의 경험에 근거한 즉각적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셋째, 이승만 정부가 반대한 한일 수교와 관련해 자신은 미국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며 누구보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특별히 바란다고 밝혔다. 그리고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가는 것을 일본 정부가 막는 데 미국이 영향력을 행사해 달라고 부탁했다. 

매카노기는 "충고와 도움"에 관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겠지만,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의 중대한 이익이 걸려있는 한국에서 모든 가능한 방법으로 한국 정부를 돕는 것은 당연해도 내정간섭으로 비추어지면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그는 허정에게 "한국의 반공 입장을 유지하겠다는 확고한 결의"를 빨리 공표하도록 촉구했다. 신속한 질서 회복을 위해 이승만 정부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인사들에 대한 처벌은 신중하게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허정은 매카노기의 "충고와 도움"을 전적으로 받아들여 5월 3일 다음과 같은 ‘5대 시책’을 발표했다. (1) 반공주의 정책을 더욱 견실하게 추진한다. (2) 부정선거 처벌 대상자를 책임자 등으로 제한한다. (3)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 방법으로 단행한다. (4) 4월 혁명 과정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 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한다. (5) 한일관계 정상화를 위해 노력한다.  

결국 4월 혁명이 "유산"되거나 "미완"으로 흐른 데는 혁명적 방법이 불러올지 모를 혼란이 한국의 안보와 미국의 이익에 도움 되지 않는다는 미국의 "충고와 도움"이 큰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매카노기는 허정이 한편으로는 과단성과 진취성 그리고 지도력과 조직력이 부족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성실하고 신중하며 객관적이고 침착하다고 평가했다. 특히 미국의 "충고와 도움"을 요청하는 진지함에 감동받고 한일 관계에 대한 언급에 고무되어, 한일 국교 정상화에 실질적 진전을 꾀할 수 있는 진정한 기회가 왔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매카써 주일미국대사 역시 한일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한국의 새 정부를 이용해야 한다고 국무부에 권고했다. 

5월 초까지 한국 정세는 예측하기 어려운 불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노동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국회 해산을 요구하는 학생데모와 아울러 어용교수 퇴진 등을 위한 학원 민주화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국무부는 한국에 "또 다른 폭발"이 발생할 경우 1958년 9월 쿠데타를 통해 버마의 과도정부 수반이 된 "네윈 유형의 잠정적 통제 (Ne Win-type of interim control)"가 필요하다고 주한미국대사관에 지시했다. 한국의 안보와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는 민중혁명의 발전을 강력한 군사독재로라도 저지해야 한다는 미국의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국무부는 주한미국대사관에 전문을 보내 미국이 한국 내에서 한미관계 및 한일관계를 통해 커다란 이득을 보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을 허정에게 명확히 알리라고 했다. 아울러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극도로 신경 쓰도록 강조했다.

5월 초부터 진보 세력의 정당 결성 움직임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허정은 매카노기에게 다가오는 총선거에서 "좌익분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선전할 것 같다고 예상했다. 다음 국회에서는 상당한 세력이 "반미감정을 표출하고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며 남북한 정부 간 협상을 제안할" 것 같다는 우려를 표명하기도 했다.  

미국은 한국에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실시되면 "좌익분자들"이 정부를 통제할 수 있다는 징후에 몹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무부는 미국과 자유 세계의 안보 이익을 지키기 위해 "좌익분자들이나 진보 세력"의 권력 장악을 막으려면 총선거가 될수록 늦게 실시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입장을 매카노기에게 전했다.

한편, 그 무렵 자유당 일각에서는 국회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재추대하려는 은밀한 움직임이 있었다. 국무부는 그가 여전히 정부의 일에 개입하며 심복을 통해 허정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이승만에 대한 미국의 경계는 5월 말에야 풀릴 수 있었다. 5월 25일 그의 부인 프란체스카가 매카노기의 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이승만과 자신이 미국 군용기편으로 하와이에 망명할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승만이 지지자들과 동료들로부터 정계에 재진출하도록 "커다란 압력"을 받고 있는데, 그는 그러한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이유였다.

다음날 매카노기로부터 이를 전해 들은 허정은 이승만 때문에 정국이 동요되고 정권이 약화하고 있으므로 그들이 "가급적 빨리" 한국을 떠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승만 부부가 한국의 법이나 사법절차를 회피하는데 미국이 도와준다는 오해를 받을 만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고 싶지 않다는 매카노기에게 허정은 그들의 출국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가 전적인 책임을 지겠노라고 했다.  

국무부는 매카노기의 의견대로 이승만 부부에게 초청장과 비자는 연장할 수 있지만 공식적인 교통편은 제공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이승만 부부는 5월 29일 전세기편으로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제2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할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6월 10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고 6월 15일 통과되자, 허정 과도정부는 6월 27일 민의원과 참의원 선거를 7월 29일 실시한다고 공고했다.  

국무부는 이 헌법 개정안의 통과를 예상하고 이미 6월 11일 선거 개입 전략을 마련해 주한미국대사관에 하달했다. 국무부는 1인 독재 지배를 받아온 한국인들이 원할 뿐만 아니라 뚜렷한 지도자가 부각되지 않고 있으므로 내각책임제를 시험 삼아 실시해 볼 만하다고 믿던 터였다. 

내각책임제는 지도자들을 전면에 부상시켜주고 제도를 다시 개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며, 미국은 국회에서의 "정치적 책략"을 통해 한국의 발전 과정을 관찰하고 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이유였다. 미국의 이익과 한국의 안정을 위해서는 "온건 지향적 다수파"가 필요한데, 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그룹은 민주당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민주당이 다수파가 되도록 지지하되 미국의 개입에 대한 증거나 소문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무부가 이상적으로 삼은 한국 국회는 온건 지향적 민주당이 다수파가 되고, 보수 그룹이 소수파가 되며, 공산주의자들이 아닌 진보 그룹이 제3세력으로 구성되는 것이었다. 보수 그룹은 나중에 정부가 교체될 경우 옛 자유당 의원들을 포함한 야당 의원들을 포용할 수 있고, 진보 그룹은 사회주의 지향적인 사람들에게 의사를 표현할 기회를 주어 그들이 지하로 잠복하거나 열사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의도였다. 특히 이 진보 그룹은 공산주의자들의 명확한 목표가 될 것이므로 보안 감시의 초점을 편리하게 맞출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7월 29일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자유당과 혁신 세력은 참패했다. 미국의 선거 개입 전략이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선거 결과는 미국의 예상과 기대를 훨씬 뛰어 넘었다. 7월 초 매카노기는 민주당이 민의원 233석 가운데 약 120석을 얻어 겨우 다수당 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는데, 177석이나 얻었던 것이다.     


미국 외교문서에는 없는 5.16 쿠데타의 기록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1)
2018.05.10 10:35:46

1. '5.16쿠데타' 명칭에 관해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즉각 정부를 장악하고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반공을 국시로 삼는다는 '혁명 공약'을 발표했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미화한 것이다. 아울러 1년 전의 '4월 혁명'은 '4.19의거'로 깎아내렸다.

'5.16혁명' 또는 '5.16군사혁명'이 '쿠데타' 또는 '군사정변'라는 올바른 명칭을 갖게 된 것은 한 세대가 흐른 뒤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 운동을 펼치면서 '사월혁명'과 '5.16쿠데타'를 복원한 것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5.16군사정변'으로 표기되기 시작했다.

저항과 반동도 일어났다. 199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이른바 '박정희 신드롬'이 생기면서다. 1979년 죽은 박정희의 인기가 전직이든 현직이든 어느 대통령보다 훨씬 높았고, 박정희 독재 아래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이인제 대통령 후보까지 박정희와 닮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5.16쿠데타의 주역으로 박정희의 조카사위이자 박근혜의 사촌형부인 김종필은 "5.16이 쿠데타나 혁명이냐"는 질문에 "영어로는 쿠데타고 우리말로는 혁명"이라는 명언 겸 궤변을 남겼다. 

그는 1961년 미국의 중앙정보국 (CIA)을 본떠 지금의 국가정보원인 중앙정보부를 만들어 제1대 부장을 지내고, 1963년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 이름을 합친 민주공화당을 만들어 제1대 당 대표 (당의장)를 맡았으며, 1970년대 초 박정희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내고, 1998년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오른 특이한 인물이다.

박근혜는 2007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서 아버지의 5.16쿠데타를 '구국의 혁명'으로 치켜세웠다. 2012년 대통령선거 과정에선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했다가 부정적 여론이 일자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킨 결과를 가져왔다"며 물러서기도 했다.  

이런 박근혜가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자 '쿠데타'가 사라지고 '혁명'이 되살아났다. TV 방송에서 '군사혁명'이란 말이 나왔다. 총리나 장관 후보들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야당 의원들이 '5.16이 쿠데타인지 혁명인지' 물으면, 후보들은 답변을 거부하기 일쑤였다. 교육부장관 후보들도 그랬고, 교수 출신 장관 후보들도 소신 없긴 마찬가지였다.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관련해 2017년 12월 구속 기소된 이병기 전 국가정보원장이 2014년 7월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5.16을 쿠데타라고 소신껏 답변했다가 청와대로부터 질책을 받았다는 사실이 2018년 재판 과정을 통해 알려지기도 했다. 

2.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 정부 자료와 미국의 역할에 관한 연구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 정부의 외교문서는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에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외교문서집의 한국 부분에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의 역할을 자세히 밝힐 수 없게 된 것이다.

국무부가 30여 년이 지난 기밀문서를 비밀 분류에서 풀어 펴내는 외교문서집은 미국 정부의 외교정책 결정과 외교활동에 관한 "철저하고 정확하며 믿을만한" 공식적인 역사 기록이다.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취지로 펴내는 것이다. 당시 기록을 공개하고 편집하는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고칠 수는 없다. 그러나 국익을 해칠 수 있거나 관련자의 신변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문서는 부분적으로 내용을 삭제하기도 하고 통째로 빠뜨리기도 한다.

특히 중앙정보국은 매우 민감하고 보안을 지켜야 할 기록을 쉽게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사월혁명과 미국의 개입'을 보여주는 의 한국 부분에서는 국무부 역사편찬실이 요구한 문서 가운데 1.2%가 비밀 해제되지 않았고,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을 다룬 의 한국 부분에서는 5.9%의 문서가 공개 보류된 배경이다.  

이런 경우엔 사건 전후의 문서를 바탕으로 추정하거나 사건 관련자들의 회고록과 증언 등을 보조 자료로 삼아 조금이라도 더 역사의 진실을 밝힐 수밖에 없다. 물론 사건 관련자의 회고록이나 증언에는 잘못된 기억이나 의도적 왜곡이 곁들여질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이런 탓인지 5.16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역할이나 대응 전략을 다룬 연구결과가 많이 출판되지 않은 듯하다. 먼저 정치학자 김세진이 1971년 미국에서 (한국 군사혁명의 정치)라는 책을 펴냈다. 5‧16쿠데타에 관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분석을 담고 있다.

쿠데타의 배경을 설명하며 미국의 역할에 관해 1970년 무렵까지 널리 통용되던 두 가지 견해를 간단하게 소개한다. 첫 번째 견해는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국의 동의 없이는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수 없기 때문에 미국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지원했으리라는 한국 지식인들의 추리다. 두 번째 견해는 미국이 주한미군사령부를 통해 5.16쿠데타를 진압하려 했지만 윤보선 대통령의 반대로 어쩔 수 없었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이다.

언론인 이상우는 1984년 펴낸 <제3공화국 외교비사>에서 미국이 "한국의 정치과정을 규정하는 단순한 요인의 하나가 아니라 한국의 운명 그 자체를 결정지어 온 배경"이라며, "해방 후 역대 한국정권의 흥망기에도 결정적인 작용을 해온" 미국의 역할을 취재기자의 눈으로 살펴본다.  

다양하고 풍부한 취재자료를 이용해 긴박하게 펼쳐졌던 1961년 5월 16일 전후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추적하고 있다. 첫째, 미국이 한국에서 어떤 형태의 쿠데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보았지만 누가 언제 일으킬지는 구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둘째,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나자 그린(Marshall Green) 주한 미국 대리 대사와 매그루더(Cater B. Magruder) 주한 미군사령관이 장면 정부를 지지하며 쿠데타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셋째, 장면 총리는 잠적해버리고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진압을 반대하는 가운데 이한림 제1야전군사령관은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넷째, 5월 17일 아침 매그루더는 구체적인 쿠데타 진압 작전을 세우고 주한 미8군에 임전 태세를 갖추도록 했지만, 그날 밤 워싱턴으로부터 작전을 취소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한편, 워싱턴에서는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 케네디 (John F. Kennedy) 대통령을 비롯하여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 책임자들이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쿠데타 주동자들의 정체와 그들의 목표를 궁금해하며, 특히 공산주의 활동에 관련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정희와 김종필의 사상적 배경에 의혹을 품었다.  

그러나 쿠데타 주동자들이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반공 친미적"이라는 점을 파악하고, 쿠데타가 비합헌적이지만 미국 정부에 적대적 정권이 들어서지 않으리라고 판단했으며, 이미 한국의 대세가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해 쿠데타를 인정하고 말았다.

정치학자 손호철은 1991년 펴낸 <한국정치학의 새 구상>에서 "5.16쿠데타를 재조명"했다. 실바(Peer De Silva)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 쿠데타 음모계획을 제보 받아 미국대사관과 한국정부에 알렸으나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쿠데타가 성공했다고 증언한 내용 등을 바탕으로 5.16쿠데타의 발발에 미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는 않았다고 분석한다.

언론인 조갑제는 <월간 조선> 1991년 12월호에 '미국대통령 기밀문서 속의 박정희와 케네디'라는 글을 발표했다. 1980년대에 비밀 해제된 1960년대의 미국정부 기밀문서들을 바탕으로 미국이 5.16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탐지하지는 못했지만 사후에 신속하게 대응한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이 쿠데타가 일어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장도영 육군참모총장, 장면 총리, 윤보선 대통령의 지도력에 회의를 갖고 "망해가는 정부"와 운명을 같이 하지 않겠다는 계산을 재빨리 내렸다고 주장한다. 

정치학자 박명림은 1996년의 공저 <제2공화국과 한국민주주의>에서 '제2공화국 정치균열의 구조와 변화'라는 글을 통해 "미국의 소극적 방임 또는 무개입"이 5.16쿠데타가 성공할 수 있었던 한 요인이라고 분석한다. 그는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외교문서집을 근거로 미국이 늦어도 1961년 4월 박정희와 이범석이 각각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특히 박정희는 1960년 2월부터 쿠데타를 준비했고, 사월혁명 이후 수차례나 쿠데타를 기도했으며, 이러한 쿠데타 음모가 서울에서는 "널리 알려진 소문난 비밀"이었는데 미국이 이를 몰랐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박정희를 지속적으로 주시하고 추적하면서도 적극적으로 경고하거나 저지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언론인 권영기는 <월간 조선> 1996년 12월호에 '장도영, 쿠데타 음모 알고도 장면 총리에게 은폐'라는 글을 발표했다.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외교문서집, 실바의 1978년 회고록, 장면의 1966년 증언, 장도영의 1984년 회고록, 박정희의 1961년 증언, 김종필의 1986년 증언 등을 토대로 5월 16일 전후의 상황을 추적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 중앙정보국은 1961년 4월 장면 정부를 뒤엎으려는 2개의 쿠데타 음모가 추진되는 것을 파악했다. 하나는 박정희와 그의 추종자들이, 다른 하나는 이범석과 민족 청년단이 주도하고 있었는데, 특히 박정희의 쿠데타 음모는 한국군부와 학생 그리고 개혁가들의 지지를 받고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둘째, 장도영은 박정희의 쿠데타 모의를 훤히 알고 실바와 자주 만나 이에 대해 의논하는 한편, 장면에게는 고의로 쿠데타 정보를 은폐하고 그에 대한 수사를 방해했다. 셋째, 미국은 쿠데타가 일어난 다음날 주한미군사령관 지휘 하의 진압작전은 내정간섭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쿠데타를 인정했다.

재야 사학자 김상구는 최근 2017년 12월 <5.16청문회>를 펴냈다. "누구나 알고 있고, 아무도 말리지 않았던 쿠데타"라는 부제가 붙은 760쪽의 방대한 저서다. 프롤로그에서 중앙정부국장을 지낸 덜레스(Allen W. Dulles)가 "내가 재임 중 중앙정보국의 해외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은 이 혁명(5.16쿠데타)"라고 말한 대목을 소개하며, "미 군부 정보기관의 지원 아래 5.16쿠데타가 진행되었고, 쿠데타 후 CIA, 미 국무성, 백악관이 승인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에필로그에서 "미군은 한국 현대사에 깊숙이 개입해왔다. 모스크바3상회의, 미소공동위원회, 이승만의 남한단독정부, 한국전쟁과 정전, 사월혁명과 민주당정권의 출범과 몰락 등은 대개 미군부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5.16쿠데타도 마찬가지다"라고 결론 내린다.

위에서 살펴보듯, 학자들과 언론인들이 비슷한 자료를 갖고도 조금씩 다른 주장이나 분석을 내놓았다. 대체로 학자들은 역사를 이론적 틀에 꿰어 맞추려 하기 때문에 숲을 보려는 측면이 강하고, 언론인들은 역사를 사건 중심으로 파헤치려 하기 때문에 나무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크다고 할까. 필자는 국무부가 공개한 비밀 외교문서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5.16쿠데타와 미국을 역할'을 좀 더 깊이 파헤쳐보고자 한다.


은근히 5.16 쿠데타를 원했던 미국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2)
2018.05.16 14:57:54

3. 사월혁명 이후 5.16쿠데타까지 한국의 상황과 미국의 대응

(1)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

1960년 7.29 총선에 따라 들어선 장면 내각과 미국을 가장 곤란하게 만든 것은 4월혁명의 영향으로 불붙은 민족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이었다. 1960년 6월 재미동포 김용중과 일본에서 귀국한 김삼규가 통일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 가운데 김삼규는 1948년부터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주필을 지내며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다 1952년 일본으로 쫓겨가 평화통일문제를 연구해온 터였다.

7.29 총선을 계기로 진보 정당과 사회단체들에 의해 활발하게 전개된 통일 논의는 곧 언론과 문단 및 학원으로 폭넓게 확산되었다. 대부분의 통일론은 자주와 평화를 바탕으로 남북교류나 중립화를 표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초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족 자주는 외세의 배격을 의미했고 이의 핵심은 주한미군 철수였기 때문이다.

1960년 9월 3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가 만들어졌다. 11월부터는 대학생들도 통일 논의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에 장면은 11월 4일 정부 정책과 다른 통일운동에 대해 선도책을 펴되 과격한 행동은 법에 따라 처단하겠다고 발표했다. 미국 국무부는 다음날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을 달성한다는 결의를 재확인했다. 그러나 혁신세력과 학생들의 통일 논의는 중단되지 않았다.

11월 16일에는 연세대학교 학생들이 학내 분규와 관련해 미국인 이사장과 총장 서리가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외치며 미국대사관 앞에서 반미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나라와 학원의 민주화는 달러가 보증해 주지 않는다"며 "달러가 가져오는 노예근성"부터 막아야 한다는 결의문까지 나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일운동은 날로 확산되었다. 1961년 초까지 전국 거의 모든 대학교과 20여 개 고등학교에 '민족통일연맹'이 결성되었다. 사대당을 비롯한 혁신세력은 여전히 한반도 중립화통일을 주장하거나 남북교류를 촉구했다.  

1961년 2월 8일 체결된 '한미경제협정'은 한국전쟁 이후 남한 최초의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미운동을 불러왔다. "양키 고우 홈!"이란 구호도 등장했다. 진보적 정당과 사회단체 그리고 대학생들은 이 협정이 한국의 경제적 예속을 제도화하며 미국이 한국 내정에 공식적으로 간섭할 수 있도록 이끄는 불평등 조약이라며,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위원회'를 결성해 이 협정의 즉각 철회와 비준 거부를 요구했다. 이와 아울러 주한미군부대 종업원들은 2월 중순부터 한미행정협정 (SOFA) 체결을 촉구하는 데모를 벌이기 시작했다.

(2)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의 불만 

자주를 내세운 통일운동은 북한을 인정하지 않는 미국의 이익에 전적으로 배치되었고, 반미감정의 확산은 미국에 긴장과 불안을 안겨주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며 미국의 정책에 우호적인 장면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면서도, 자주적 통일운동과 반미감정의 확산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는 그에게 회의적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의 정세 불안이 지속되면 혁명 세력이 진출하고 사회주의 세력이 강화할 수 있으리라 우려하면서, 지도력과 결단력이 부족한 장면이 한국의 정치안정과 미국의 안보이익을 지켜줄 수 있는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장면의 지도력에 관한 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됐다. 매카노기는 장면이 우유부단하며 무능하다고 평가하며, 장면 정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취약하고 민주당이 과거의 자유당처럼 부패해지고 있다고 파악했다.  

매카노기는 주한미국대사 임기를 마치면서 1961년 4월 11일 한미경제협정 및 한미행정협정 문제에 따른 한국인들의 반미감정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미국이 장면의 지도력과 관련해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면이 성격상 강력한 지도자가 아닌데 그의 스타일을 바꾸기는 어렵겠지만, 미국은 그가 단호하게 행동하도록 지속적으로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카노기는 "특히 이러한 도발적인 시기" 또는 "준 비상시"에 장면이 정치력을 발휘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그에 대한 미국 관리들의 자문이 더욱 강력하게 행해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국에 대한 원조를 담당한 미국 국제협력국 (ICA) 기술원조 프로그램 책임자 휴 파알리 (Hugh Farley)는 백악관에 제출한 "1961년 2월의 한국 상황"이란 보고서에서 당시의 한국을 "병든 사회"로 단정했다. 한국사회 전반에 "뇌물과 부패와 사기"가 만연한 가운데 정부의 부패 때문에 4월혁명이 완결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한국 군부가 "미국의 치밀한 지도 아래" 정화운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히며, 최근의 반미데모와 관련해 미국이 한국의 내정에 적극 간섭할 것을 건의했다.

(3) 쿠데타 음모와 미국의 대응 

4월혁명 직후인 1960년 6월부터 한국에서 다양한 쿠데타 소문들이 나돌았다. 미국은 대응책을 마련하고 있었다. 장면 집권 3개월 만에 군부에 의한 정권교체를 막연하게나마 원했던 것이다.  

1960년 11월 22일 중앙정보국, 국무부, 육군, 해군, 공군, 그리고 3군통합 합동참모본부의 정보기관들이 공동으로 작성한 한국에 대한 전망 보고서는 당시엔 군사쿠데타가 성공할 것 같지 않다고 믿었다. 한국군부가 민간정권을 대체하려면 한국 상황이 더 악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알리도 앞에서 소개한 "1961년 2월의 한국 상황"이란 보고서에서 미국의 입장은 군사쿠데타나 "위험하고 가능성이 희박한" 극좌 혹은 극우 세력의 결합 말고는 장면 정부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것 같다고 했다. 미국의 정보 책임자들과 대한 원조 책임자 모두 장면 정권의 교체를 바랐던 것이다. 

한편, 중앙정보국은 늦어도 1961년 4월 박정희가 주도하는 쿠데타 음모에 대한 정보를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4월 21일부터 중앙정보국 한국지부가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본부에 보고했다. 그러나 덜레스 국장은 5월 16일 쿠데타가 일어난 직후에야 케네디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앞에서 얘기한 대로 국무부가 1996년 펴낸 의 한국 부분에 1961년 4월 12일부터 5월 15일까지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는 것과 겹치는 대목이다.


주제 : 1961년 4월 21일부터 26일까지 중앙정보국의 한국 쿠데타 관련 보고 

(1줄 미만 삭제) 중앙정보국이 박정희 소장에 의한 한국에서의 쿠데타 계획에 관해 4월 21일부터 다음과 같이 보고 했음.


4월 21일 : (1줄 미만 삭제) 한국정부를 뒤엎으려는 두 개의 쿠데타 중 하나는 2군부사령관 박정희 소장이 주도하고 있음. 다른 하나는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원들이 주도하고 있음. 계획은 사단장들을 포함해 한국육군 전체에서 논의되고 있음. 육군 지도자들은 현 정치인들이 부패하고 나약하다고 보며 군부가 집단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피해 받아온 상황을 그들이 초래하거나 방치했다고 믿음.

4월 21일 : (1줄 미만 삭제) 군사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요약. 명백한 위협이 있음. 그러나 정치가 더 안정되고, 폭력과 사회혼란이 없으며, 경찰력이 강해지면 쿠데타 시도는 저지될지 모름.

4월 23일 : (1줄 미만 삭제)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쿠데타를 논의하고 계획하는 중요한 집단이 있음. 그들은 대부분 거칠고 조급하며 단호할 뿐만 아니라 신속하고도 폭력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다고 판단할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고 믿음.

4월 23일 : 이 음모는 육군과 학생 그리고 개혁가들이 지지하고 있음. 지도자는 박정희 장군으로 보이는데 6관구사령관 서종철 장군도 가까운 지지자임. 군부 지지자들에 대해 상세하게 나와 있음.

4월 24일 : 군부 음모에 대한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견해. 박정희를 체포하고 싶지만 증거가 불충분함. 체포가 쿠데타를 촉발하게 될지 모른다고 믿음. 이범석과 민족청년단이 쿠데타를 지지할지 모른다고 믿음.

4월 25일 : 한국 육군방첩대가 쿠데타를 수사하고 있음. 만약 쿠데타가 4월 26일 시도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더 좋은 때를 기다릴 것임. 장도영에 따르면, 장면은 4월 24일까지 쿠데타를 모르고 있지만, 한 신문발행인이 4월 25일 그에게 알려줄 계획임.

4월 25일 : (1줄 미만 삭제) 4월 24일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을 1시간 동안 만남으로써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에 자발적으로 제공되었음. 매그루더 사령관에게 즉시 보고될 것이며, 그러면 매그루더는 아마 장면과 이 일을 논의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음. 장면은 박정희가 자신에게 일주일 전에 얘기했다고 밝혔음. 장면은 쿠데타가 즉시 일어날 것 같지 않다고 말함.

4월 26일 : 장면 총리는 육군내의 불만 집단이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소문을 알고 있음. 이러한 소문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며 상황이 결코 위험하지 않다고 믿음. 그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직무 수행에 만족함. 장도영이 강력하고 유능하며 미군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믿음. 그는 장도영을 2년 임기 내내 유임시키려고 계획함.

 


이와 관련해 당시 중앙정보국 한국지부장이었던 실바는 그의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한국지부는 쿠데타가 일어나기 며칠 전 지부 요원과 가까이 지내는 박정희의 측근 참모를 통해 알았다. 나는 매카노기 대사에게 알렸지만, 그는 이 보고를 가늠하지 못하고 관망하는 자세를 취하며 장면에게 알리도록 했다. 나는 출처를 대지 않고 장면에게 거사 날짜는 결정되지 않았지만 군사쿠데타가 계획되고 있다고 알렸다. 그는 이 보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겠지만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믿지 않았다. 지난 몇 달 동안 군사쿠데타에 관한 다른 소문들도 있었다."
     



1년만에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장면

[한반도문제와 미국의 개입] 5.16쿠데타와 미국의 역할 (3)
2018.05.23 14:38:45

4. 5.16쿠데타 발발과 미국의 대응

1961년 5월 16일 새벽 한국에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자 매그루더 주한미군사령관은 그날 상황을 분석해 렘니처 (Lemnitzer) 합참의장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경 매그루더 사령관은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으로부터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장도영은 미군 헌병들이 한국해병대를 막아주도록 요청했지만 매그루더는 거절했다.  

매그루더의 요청으로 장도영이 6시 30분경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다. 장도영은 자신이 쿠데타군의 일원이 아니라는 인상을 주었지만,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쿠데타군과 협상하기를 원했다.  

장도영은 군사령관들이 쿠데타에 반대하는 자신을 지지해줄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들과 대화하기를 원했으나 한국군 부대를 동원하기는 꺼려했다. 장도영은 박정희에 비해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도록 대통령에게 자신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해 계엄령을 선포하도록 요청하겠다고 밝혔다. 

매그루더는 10시 18분 미8군 공보처를 통해 자신의 지휘 아래 있는 모든 병력이 합법적인 장면 정부를 지지하기를 유엔군사령관 직권으로 요구했다. 한국군 수뇌들에게는 통치권을 즉시 정부 당국에 반환하고 군내 질서가 회복되도록 권한과 영향력을 행사해주도록 요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그린 (Green) 주한미국대리대사는 유엔군사령관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미국이 합법적인 한국정부를 지지한다고 명백하게 밝힌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매그루더의 성명에 이한림 제1군사령관은 한국정부에 충성하겠다고 발표했다.

10시 30분경 장도영은 윤보선 대통령과 집에 연금된 국방부장관을 방문했다. 대통령은 계엄령 선포 및 쿠데타 저지를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국방부 장관도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 동원을 바라지 않는다고 했다. 11시 15분 최경록 제2군사령관이 매그루더와 통화하면서 자신은 정부에 충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아침 렘니처는 매그루더에게 보낸 답신에서 캐나다를 방문하고 있는 케네디 대통령이 매그루더와 그린의 성명을 승인할 것인지 문제라며 한국 내정에 지나치게 휘말리지 말고 더 이상의 성명은 피하라고 충고했다. 

국무부도 워싱턴 시간으로 15일 아침 5시 21분 한국에서 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사실과 매그루더가 쿠데타를 진압하기 위해 미군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정에 그린 대리대사가 동의했다는 사실을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보고받았다. 그리고 워싱턴 시간으로 16일 밤 10시 45분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 

"한국에서 어떠한 이데올로기 문제가 개입되지 않았을지라도, 쿠데타는 한국의 안정과 명예를 침해할 것이기 때문에 한미 양국의 이해에 반한다는 것이 국무부의 입장이다.

그러나 대통령과 군부 지도자들이 쿠데타 진압을 이상할 정도로 꺼려하고, 총리와 장관들은 숨어버렸기 때문에 장면 정부가 위기를 무사히 극복할 것 같지 않다. 지도자들의 무기력과 일반인들의 무관심이 장면 정부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어렵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국무부는 기다려보자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한국정부가 스스로 일어서길 기대하며, 앞으로의 전망에 거스르는 행동은 피할 것이다. 나아가 미국이 어쩌면 '패배한 내각(lost cabinet)'의 운명과 함께 한다는 인상을 더 주지 않을 것이다."

국무부가 주한미국대사관에 이처럼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충고한 것은 매그루더 사령관과 그린 대리대사가 전날 장면 정부를 지지한다고 발표한 성명에 케네디 대통령이 불만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케네디는 그린이 자신의 재량권을 행사한 것은 승인했지만 더 이상의 논평은 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었다. 

매그루더는 한국 시간으로 5월 17일 오전 11시 40분 렘니처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미국 육군방첩대가 길거리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는 40%가 쿠데타를 지지하고, 20%는 지지하면서도 시기가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며, 40%는 반대한다. 장도영은 정부에 충성한다고 말하면서도 유혈 사태를 피하기 위해 단호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가 이중적이라는 징후는 많다. 그는 서울의 변두리까지에도 병력 동원하기를 꺼린다. 그는 적어도 쿠데타에 대한 어느 정도의 사전 지식을 갖고 있었다. 윤보선 대통령은 입으로는 헌법 준수를 말하면서도 쿠데타를 정적인 장면을 제거하고 새 정부를 세우기 위한 수단으로 고려하는 것 같다. 

요약하자면 모든 권력자들은 쿠데타 계획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최소한 반대는 하지 않는 것 같다. 반미나 친공 감정의 증거는 없다. 실제 지도자 박정희는 과거에 공산주의에 물들었고 이승만 정부에서는 공산주의자로 형을 받았던 강력한 장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는 데 협력했고, 반공주의자로서의 명성을 얻었다. 쿠데타 동료들 중에서도 공산주의자나 반미주의자로 알려진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이한림의 제1사단은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병력이다. 그의 부대는 명령대로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장면이나 매그루더가 쿠데타 진압을 요청하면 그는 수행할 것이라고 믿는다. 만약 총리가 한국군들로 하여금 쿠데타를 진압하도록 한다면 매그루더는 그를 지지하도록 할 것이다.  

한국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장 또는 국방부장관이나 합참의장이 반대해도 매그루더가 이한림에게 쿠데타 진압을 명령할 수 있다. 그러나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정부를 세우더라도 정부를 이끌 사람이 없고 국민의 지지도 받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매그루더는 제1사단에 쿠데타를 진압하도록 오직 그의 직권으로만 명령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듯 장면은 4월혁명의 발발에 힘입어 미국의 기대와 지지를 받고 총리가 되었지만, 1년도 되지 않아 미국으로부터 외면당했다. 반면에 반공 친미를 내세우며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미국의 승인과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앞에서 밝혔듯, 내가 이 글의 주요 자료로 참고하고 있는 5.16쿠데타에 관한 미국정부 외교문서집인 엔 5.16 군사쿠데타를 앞두고 한 달이 넘는 기간의 기록이 통째로 빠져 있다. 이 점을 유념하며 '미국'을 적어도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으로 나누어 그 역할을 분석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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