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박근혜 사면? 전두환을 보라” - 전두환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

일취월장7 2017. 5. 3. 13:11

“박근혜 사면? 전두환을 보라”

전두환씨는 최근 2000쪽에 달하는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나간채 전남대 교수(사진)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해 왜곡된 부분이 많다고 지적했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7년 05월 01일 월요일 제502호


1997년 4월17일 대법원은 “12·12는 군사반란으로, 5·17 비상계엄 확대와 5·18 광주 유혈 진압은 국헌 문란 목적으로 진행한 내란”으로 규정했다. 대법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헌법기관인 대통령·국무위원들에 대해 강압이 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해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헌정 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로 판시했다. 또 대법원은 “헌정 수호를 외친 광주시민에 대한 진압작전 중의 무자비한 살상행위는 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직접 수단”이라고 판결문에 담았다. 1997년 12월22일 김영삼 당시 대통령은 전두환·노태우씨를 특별사면했다.

2017년 전두환씨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20년 전 대법원 판결마저 부인했다. 그는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발포 명령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주장했다. 전씨는 자신을 “(광주사태) 치유와 위무를 위한 씻김굿에 내놓을 제물”로 표현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담은 기록물은 2011년 5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85만여 점에 이르는 자료는 현재 광주 금남로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기록을 지키는 사람은 33년 동안 전남대 사회학과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구해온 나간채 교수다. 나간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관장을 만나 전두환씨의 역사 왜곡을 짚었다.


ⓒ시사IN 신선영
지난 33년간 5·18을 연구해온 나간채 전남대 사회학과 교수(5·18민주화운동기록관 관장)는 85만여 점에 이르는 관련 기록물을 관리하고 있다.


전두환씨 회고록을 보았나?

전두환씨와 이순자씨 회고록을 다 봤다. 한마디로 그들은 회고록을 통해 범죄에 대한 반성은커녕 기본적인 민주 헌정 질서마저 부정했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전두환씨는 군사반란과 내란수괴죄로 처벌받았다. 그런데 회고록에서 대법원에서 처벌받은 것도 정치적 희생양이라 했고, 부당한 투옥과 재산 몰수의 수난을 겪었다는 식으로 주장하고 있더라.

전두환씨가 이제 와서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가 뭘까?
그 배경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사면이 자리 잡고 있다고 본다. 대법원 확정판결 8개월 뒤 사면을 받으면서 자신의 범죄에 대해 반성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전두환씨나 파면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나 비슷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서 파면되었고 전두환씨는 대법원에서 처벌을 받았지만 둘 다 똑같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박정희 유신’의 그늘 아래서 아집과 독단, 폭력성을 보인다. 벌써부터 박근혜 사면론이 거론되는데, 대통령 사면권에 대한 재검토가 분명히 필요하다. 또 전씨의 회고록으로 다시 한번 철저한 과거 청산이 중요한 시대적 과제로 떠올랐다. 2000쪽에 달하는 전두환 회고록을 보면 자기의 행위를 강변하는 말만 쓰여 있지 그 행위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죽어갔는지 그 고통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없다.

회고록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가장 왜곡된 부분은?
전씨는 이미 밝혀진 사실관계마저 부인했다. 가령 회고록 앞부분에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양민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썼다. 하지만 이미 많은 증거가 나왔다. 1980년 5월19일 광주시내 화니백화점 앞길을 걸어가던 김경철씨를 계엄군이 무차별 구타해서 턱이 나가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또 광주시 외곽 송암동 저수지에서 목욕하던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M16 소총을 집중사격해 희생되었다. 골목에 나와 있는 임신부를 쏴서 살해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은 5·18 당시 양민 학살의 아주 전형적인 사례다. 그런데도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재임 중 자기는 군대의 힘을 빌리거나 계엄령을 내린 사실이 없다는 점을 애써 강조하고 있다. 정당하고 평화롭게 나라를 운영했다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전두환씨는 5·18 발포 책임자로서 자유롭지 않은데?
전씨는 회고록에서 당시 광주에 내려온 적도 없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든지 계엄군에 영향을 행사한 일이 없다고 주장한다. 즉 최규하 국무총리, 주영복 국방부 장관 등 형식적인 지휘 라인이 가동됐다면서 자신은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뺌했다. 우리가 학문적이고 역사적인 평가를 할 때 전두환씨에게 내란 수괴로서 총괄적인 최고의 책임을 따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가 5·18 전후로 실권을 쥐고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군 내부 증언도 많다.

어떤 증언들이 있었나?
광주에서 지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이원화됐다는 점은 당시 호남 지역 계엄사령관이던 윤흥정 중장과 정웅 31사단장이 증언했다. 또 주영복 당시 국방부 장관은 1980년 5월16일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자기에게 다음 날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위한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달라고 요구했다고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조사에서 증언하기도 했다. 소준열 전남북계엄분소장은 5월24일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자기에게 전두환 보안사령관 친서를 전달했는데 거기에 “공수부대 사기를 죽이지 말라”는 지시 내용이 들어 있었다고 증언했다. 전두환 회고록과 배치되는 증언들이다. 그 밖에 우리가 입수한 미국의 기밀문서도 전두환씨가 5·18 당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미국 정부의 기록이란?

5·18 관련 미국 정부의 극비 문서를 최초 입수·공개했던 팀 셔록 기자가 그 자료를 광주시에 기증했다. 그는 이른바 ‘체로키 문서’ 등 미국 정부기관의 극비 문서 2000여 건을 정보공개법에 따라 최초 입수·공개한 저널리스트인데, 4~5월 두 달간 여기 기록관에 머물며 우리와 함께 분석하고 있다. 1980년 5월 미국 국방부 정보국이 작성한 문건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를 역임하며 한국 정부의 실질적인 수뇌 구실을 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 자료는 계엄군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조종자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고 지목하고 있다. 1980년 6월4일자 국방부 정보국 문서에는 계엄군의 광주 발포와 학살 배후에 전두환이 있다고 적시했다. “계엄군이 과잉 반응을 했고, 이것은 전두환의 게임 플랜이었다”라고 적었다. 또 1980년 6월9일 문서에는 계엄군이 광주에서 베트남 전투 경험을 반영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전씨 회고록에 북한군 개입 의혹도 들어 있는데?
주로 북한 관련 문제는 지만원씨 논리를 밑바탕으로 쓰고 있다. 지씨처럼 북한군 특수부대라는 말은 안 썼지만, 전씨는 당시 광주시민 시위대 가운데는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참여해 그 사람들이 무장투쟁을 주도했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밀 자료에는 5·18 당시 북한과의 관련을 어떻게 보았나?

글라이스틴 대사가 1980년 6월10일 미국 국방부 정보국에 보낸 공문에는 “광주시민들의 행동은 공산주의자가 선동하거나 개입한 것이 아니다. 보스턴 차 사건과 같이 자유로운 시민들의 자발적 발화로 타올랐다”라고 표현했다. 또 국방부 정보국 6월2일자 문서는 “공산주의자 개입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이 보인 주요 행동의 동기는 공산주의자가 불어넣은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공산당의 노리개가 아니었다”라고 분명하게 적고 있다.

지만원씨의 북한군 침투 주장에 대해 법적 대응을 하지 않았나?

지만원씨 등 극우 세력이 5·18 당시 전남도청 앞 시민군 사진 가운데 황장엽·이을설 등 북한 고위층 인사들이 있다고 지목했었다. 황당한 왜곡과 폄훼를 보다 못해 5·18기념재단에서 그 사진을 확대해서 사진 속 실제 인물들이 나서달라고 공개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우리 기록관에도 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광주에 사는 고광덕씨였다. 재단에서 찾아낸 그런 피해자가 8명인데 이들과 함께 지만원씨 등 극우 세력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진행 중이다.

극우 세력은 무슨 근거로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했다고 보는가?

자료를 다 조사해봤지만 증거는 없고 다만 선입견이 크게 작용했다. 지만원씨의 책을 보면 평생 군대생활을 한 사람들이 볼 때, 무장한 계엄군에 맞설 수 있는 민간인이란 있을 수 없고, 특수훈련을 받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보는 판단을 전제로 삼고 있다. 군부대 근무를 하면서 가졌던 고정관념으로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라는 상상의 소설을 쓴 것이다. 그것이 전두환의 회고록에까지 이어졌다.


ⓒ연합뉴스
1996년 12월16일 오전 서울고법에서 전두환·노태우씨 등에 대한 12·12 및
5·18 사건 항소심 선고공판이 열렸다.


전두환씨 회고록에 대한 대응 계획은?

<전두환 회고록>은 정밀하게 분석해서 철저하게 비판되고 재검토되어야 한다. 공적인 평가와 아울러 회고록을 만들게 했던 근거들을 확인하기 위해 비공개 군 자료를 공개해서 재조사해야 한다. 5·18 진실 규명을 정부가 주도해서 실행하고, 종합보고서를 내야 한다. 또 의도적인 왜곡 폄훼를 처벌할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본다. 독일과 프랑스 등에서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인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면 원칙적으로 처벌하는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이 시행되고 있다. 자료를 보니 2014년 스위스에서도 홀로코스트를 부인하는 글을 올린 작가에게 징역형을 선고했다. 거짓이라고 왜곡한 사람에게도 명예훼손죄를 적용했다. 그래서 우리도 사자 명예훼손까지 포함하는 한국판 홀로코스트 부인 처벌법 법안이 만들어져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좀 더 민주적이고 품위 있는 사회를 지향한다면 그러한 법안을 적극 강화해나가야 한다.

5·18 기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랐다.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면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성이 전 인류사적 보편성을 갖게 되는 것이어서 추진했다. 그렇게 되면 왜곡·폄훼 세력에 대한 하나의 좋은 반증 자료가 될 수 있지 않겠나 싶었다. 우리 스스로 한국 역사를 세계사적 수준으로 업그레이드함으로써 사회 전반과 국가의 위상은 물론 지역민의 정신 모두에 긍정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등재 작업을 했다. 5·18 당시 시민들의 성명서, 선언문, 일기, 취재수첩 같은 자료와 관공서 공식 기록들이 등재되었다. 가장 많은 자료가 피해자 부상자 진료 기록과 그 사람들을 수사하고 재판한 기록, 그리고 청문회 기록과 증언 자료다. 그 밖에 미국 문서와 기록물로, 사진과 오디오 등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5·18과 관련한 가짜 뉴스도 적지 않은데, 앞으로 기록관이 할 일은?
국제적으로 인류 보편적 문화자산으로 5·18 기록이 평가받았고 전 인류의 값진 기록유산으로 존경받으며 향유되고 있기 때문에 왜곡·폄훼 세력의 준동이 먹혀들 부분이 그만큼 줄어든 건 사실이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정부 차원에서 5·18 종합보고서를 내야 한다. 5·18 관련해서는 부분적 이슈에 따라 법안을 만들고 그 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려다 보니 종합 정리가 안 돼 있다. 가령 ‘제주 4·3 사건 진상 보고서’는 정부의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주체가 되어 종합적으로 정리해서 보고서를 냈다. 그것이 정부 입장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왜곡이나 폄훼 현상이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5·18은 정부 차원의 보고서가 없다. 그래서 새 정부가 출범하면 진정한 민주정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차원에서 정부가 주체가 되는 5·18 종합보고서를 발표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재 5·18 기록물들도 국가 문화재로 만들고, 헌법 전문에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명시해야 한다. 그래야만 허무맹랑한 왜곡과 폄훼 현상도 불식할 수 있다.

올해 5·18 기념행사를 유엔 본부에서 개최하려고 추진하던데?

민간재단인 5·18기념재단이 주축이 되어 광주 지역 공동체가 힘을 모으고 있다. 5·18은 전 인류의 자산이므로 유엔 본부에서 기념행사를 하는 게 의미가 있고 또 가능하다고 본다.

5·18 진상 규명과 관련해 남은 숙제가 있다면?

이번에 새롭게 제기된 도청 앞 전일빌딩에 대한 헬기 기총소사 문제와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행방불명자 혹은 암매장 문제, 그리고 지휘체계에 관련된 군 내부의 실체적 진실 등이 밝혀져야 한다. 헬기 기총소사는 군의 자위권이라고 보기 어렵고 명백한 양민 학살 증거이다.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5·18 진상 규명에 한 발짝 다가서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본다.

그동안 군은 헬기 사격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그렇다.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번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사 결과 총탄의 하향 각도 등으로 보면, 그 당시 전일빌딩 10층이었는데 주변에 10층 이상 건물이 없었기에 위에서 아래로 총알이 박혔다는 것은 공중사격을 했다는 뜻이다. 공중사격이라는 것은 헬기가 가장 가능성이 높지 않으냐는 것이 국과수 의견이다.



전두환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

전두환씨는 ‘회고록’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 ‘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우겼다. 그가 이끈 ‘대망의 1980년대’에 무고한 국민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되새길 필요가 있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5월 03일 수요일 제502호

요즘은 초등학교에 학생이 줄어서 걱정이 태산이라지만 아빠 어릴 적엔 정말 ‘드글드글하게’ 아이들이 많았단다. 골목마다 축구하는 어린이들로 넘쳐났고 집집마다 아이들 울음소리 웃음소리가 가실 날이 없었어. 1970년생 아빠 또래들은 학교에서 오전반 오후반 수업을 나눠서 하는데도 70명씩 꽉꽉 채워 열서너 개 반이 있었지. 가끔 교무실에 가면 눈매가 날카롭고 이대팔 가르마를 탄 가무잡잡한 얼굴의 사진 하나가 걸려 있었어. 박정희 대통령이지. 그런데 박 대통령은 1979년, 아빠가 열 살 되던 해 총을 맞고 돌아가셔. 아빠는 며칠 뒤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을 발표한다면서 등장한 한 장군을 텔레비전 너머로 만나게 돼. 그의 이름은 전두환이었어. 그런데 그해의 크리스마스가 오기 전 아빠는 이웃집 형에게서 이상한 얘기를 듣게 돼. 그 장군 때문에 서울에서 난리가 났다는 거야.

ⓒ연합뉴스
2016년 4월13일 전두환·이순자 내외가 제20대 국회의원 총선거 투표를 하고 있다.

“그때 일발 발사하고 캤던 그 대머리 장군 있재? 그 사람하고 친한 장군들이 계엄사령관 정승화를 잡아갔는데 그때 정승화 편하고 그 대머리 장군 편하고 총싸움이 붙어 가지고 쫄다구들 몇 명이 죽었다 카더라.”

당시는 비상계엄령 상태였기 때문에 계엄사령관인 육군 참모총장 정승화의 이름은 친숙했지만 아직 ‘전두환’은 낯선 이름이어서 ‘대머리 장군’이라고 불렀지.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이 관련이 있다며 상관을 체포하는 하극상을 저질렀어. 이걸 12·12 군사 반란이라 부르는데, 젊은 군인 3명이 죽었어. 반란군에 맞선 정병주 특전사령관을 끝까지 보호하다가 죽어간 김오랑 소령과 전역을 2개월 남긴 최고참이었는데도 반란군에 맞서다가 죽어간 정선엽 병장, 그리고 반란군 측에 동원된 박윤관 상병.

그 죽음들로부터 6개월도 안 돼 전두환 장군은 대한민국에 또 하나의 피바람을 불러와.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이야. 네가 태어나기 20년 전에 있었던 일인 만큼 네게 6·25전쟁이나 3·1운동 비슷하게 들릴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아빠로서는 그 전두환이, 그 피 묻은 손으로 놀랍게도 ‘회고록’을 써서는 “빼앗은 장갑차를 끌고 와 국군을 죽이고 무기고에서 탈취한 총으로 국군을 사살했다”라며 ‘폭동은 폭동일 뿐’이라고 우겨대는 데에 이르러서는 참을 수 없는 욕지기에 온몸을 떨게 된다. 오늘부터 네게 전두환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입을 빌리는 형식으로 전해주고자 해. 그가 등장했던 ‘대망의 1980년대’ 이후 무고한 한국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었고 용감한 이들이 어떻게 죽어갔는가를 다시 한번 되새기고자 하는 뜻이지. 먼저 아빠와 동갑이었던, ‘드글드글하게’ 많았고 ‘5월은 푸르고 우리들은 자라는’ 줄만 알았던 한 어린이의 이야기야.

초등학교 4학년 전재수는 이렇게 죽었다

나는 1970년생, 개띠였어요. 가난하지만 단란한 가족들하고 오순도순 살면서 학교에 충실히 다니던 효덕초등학교 4학년생이었지요. 형도 있고 누나도 있고 여동생도 있었지만 학교에서 상 타오는 건 나밖에 없었어요. 아버지는 엄한 분이셨지만 타온 상장을 내놓으면 기분이 좋아지셔서 아이스크림 값도 적잖이 쥐여주시곤 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하셨어요. 일도 못 나가시고 집에 누워 계셨는데 저랑 여동생이랑 놀다가 좀 다퉜어요. 꼬맹이가 울고 난리를 치니까 아버지가 버럭 하셨지요.

아버지 얼굴을 보니 목침이라도 날아올 것 같더라고요. 아버지는 소작농이었죠. 한창 일할 것 많은 봄에 자리보전하고 계시니 그 속이 얼마나 갑갑하셨겠어요. 냉큼 집을 나섰죠. 잽싸게 고무신부터 챙겼어요. 9일 전이 내 생일이라 어머니가 사주신 신발이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그날은 일요일도 아니었는데 학교에 가지 않았어요. 광주 시내에서 큰 일이 벌어져서 학교를 쉰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우리 집 앞으로 난 도로에 트럭들이 먼지 무지하게 뿜어내면서 지나갔어요. 거기엔 군인 아저씨들이 많이 타고 있었죠.

우리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으면 꽤 많은 애들이 군인 아저씨라고 그랬어요. 그 멋진 군인 아저씨들이 그야말로 트럭 타고 지나가는 걸 보고 어떤 애들은 깡충깡충 뛰며 손을 흔들기도 했어요. 이상한 건 아저씨들이 꼭 우리 아버지처럼 화난 얼굴을 하고 우릴 거들떠도 안 보는 거였지만.

ⓒ연합뉴스
1980년 5월27일 계엄군이 시민군의 거점이었던 광주 금남로 전남도청을 다시 장악했다.

갑자기 탕탕 총소리가 온 마을을 울렸어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건 군인 아저씨들끼리 싸움이 난 거였어요. 트럭에 실려 오던 군인 아저씨들을 적으로 오해한 또 다른 군인 아저씨들이 방아쇠를 당겼고 그러다가 여러 명이 죽어버렸지요. 트럭에 탔던 군인들은 공수부대라고 했고 오해해서 총질한 군인들은 보병학교라는 곳의 군인이라더군요.

그래도 우리는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고 놀았어요. 트럭에 탄 군인들이 다시 우리 쪽으로 다가서는 것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뛰어놀았어요. 그때 군인 아저씨들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한 번이라도 봤더라면 눈치 빠른 나는 살았을지도 몰라요. 시퍼런 눈을 하고 이를 득득 갈면서 우리 쪽을 향해 다가오던 그 모습을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봤으면 나는 친구들에게 “튀자!” 외치고 내가 먼저 달음박질쳤을 거예요. 하지만 그러지 못했죠.

드르륵 뭔가 기분 나쁜 소리가 귓전을 때렸어요. 학교 운동장 끝에서 끝까지의 반도 안 되는 거리에서 군인들이 우리에게 총을 겨누고 있었죠. 워매 우리를 쏜다! 아이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 뛰기 시작했죠. 그런데 내가 운이 없었어요. 고무신이 벗겨진 거죠. 맨발이라도 뛰었으면 살았을 텐데 그만 고무신을 줍겠다고 멈춰 서고 말았어요. 그리고 내 몸에는 “들어가는 구멍은 볼펜 구멍만 한데 나올 때 구멍은 접시만 해진다”는 그 무서운 M16 총탄이 열 발 가까이 틀어박히고 말았어요. 열한 살, 내 이름 전재수는 그렇게 너덜너덜한 시체가 되고 말았어요.

왜 쏘았냐고 묻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 와서 이유를 따져봐야 뭘 하겠어요. 하지만 지금까지도 묻고 싶은 질문 하나는 있어요. 그때 날 죽인 아저씨들은 내가 뭐로 보였을까요. 열한 살이었던 제 가슴에 십자 조준을 맞추면서 그 아저씨들은 날 뭐로 봤을까요. 내가 커 보였을까요. 어른으로 보였을까요. 전두환 아저씨(내가 살았을 때 당신은 아저씨 나이였으니까), 당신 눈에는 내가 폭도로 보이나요? 아군끼리 치고받은 화풀이로 몇 마리 죽여도 되는 오리로 보이나요? 내가 들고 있던 고무신을 보면서 엄마는 정신을 잃었어요. 아버지는 자기가 나가라고만 하지 않았으면 죽지 않았을 거라며 울었죠. 아버지는 술이라도 마셨지만 엄마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그만 4년 만에 화병으로 내 곁에 왔어요. 그때 날 죽인 군인 아저씨들은 우리 엄마도 함께 죽인 셈이죠.

1980년 5월24일 만 열 살 하고 9일을 더 산 광주 효덕초등학교 4학년생 전재수는 그렇게 죽었어요. 그런데 대머리 장군. 대한민국 군인더러 대한민국 국민 머리를 수박처럼 깨고 대검으로 찌르고 군홧발로 뭉개라고 명령했고, 그 “사기를 살려주라”고 했던, 세상에 자기 나라 국민들에게 헬기에서 기관총까지 쏘는 참극을 연출했던 대머리 아저씨는 아직도 살아 있네요. 나라에서 돈 대서 경호해주고 있네요. 나라에 바칠 돈은 수백억원인데 29만원밖에 없다고 하네요. 그래도 고향을 방문해서 모교 체육대회에 가면 그 앞에서 모교 학생들이 큰절을 올린다지요. 다시 아저씨에게 물을게요. 아저씨 나는 왜 죽었나요. 그리고 더 궁금한 것 하나. 아저씨는 왜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나요? 왜 호의호식하며 잘살고 있는 건가요.



광주의 죽음 알린 청년 김종태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던 김종태씨는 1980년 광주의 진실을 알기 위해 직접 광주에 내려갔다. 서울로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유인물로 만들어 거리에 뿌렸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5월 10일 수요일 제503호


1980년 당시 광주는 철저하게 고립돼 있었어. 광주에서는 하늘이 무너졌지만 광주 밖 국민들은 아무도 몰랐단다. 그때는 인터넷도 SNS도 없었고, 신문과 방송도 군사정권이 통제했지. 오늘 네게, 그리고 <시사IN> 독자에게 전해줄 편지는 아무것도 모르고 일상을 누리던 국민에게 광주를 대신해 광주의 상처와 비명을 전달하려 애쓰다 죽어간 이의 목소리야.


내 이름은 김종태라고 합니다. 내 어린 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집이 워낙 가난해서 학교를 그만두고 열서너 살에 공장 문을 두드려야 했으니까요. 학교는 초저녁에 포기했어도 공부까지 손 놓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야학에 들어갔지요. 거기서 학교에서 못다 한 공부도 하고, 의롭지 못한 세상의 이치도 알았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 어렴풋한 윤곽을 그려내기 시작했죠.

1980년 당시 나는 방위병이었어요. 6월16일 제대였으니까 그해 광주에서 피바람이 일던 무렵이라면 방위병 말년의 여유를 즐기며 주변 친구들과 함께 조직한 ‘조나단 독서회’에서 이런저런 책을 읽고 있었을 겁니다. 군 제대 후 성인으로서 가정도 꾸리고 어머니도 편하게 모실 궁리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천둥 같은 소식을 듣습니다. 천둥의 진원지는 다니던 교회에 찾아온 한 낯선 사람의 강연이었어요.

ⓒ연합뉴스
4월20일 광주민주화운동 단체 관계자들이 서울 연희동 전두환씨 자택을 항의 방문해 ‘전두환 회고록’ 폐기를 촉구하고 있다.

그는 며칠 전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주었지요. 대한민국 군인이 곤봉으로 수박처럼 사람의 머리를 터뜨리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을 쏘아 죽였다? 정확한 숫자도 모를 사람들이 스러져갔고 아이들까지 희생됐다? 군인 신분이던 나는 울컥했습니다. “거짓말하지 마시오!” 딱히 그 증언자를 불신했다기보다는, 내가 투철한 군인이었다기보다는 진심으로 그의 말이 거짓말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다 날조된 증언이오. 어떻게 이런 선동을 하고 다니는 거요?” 그러는 내게 증언자는 울부짖듯 소리쳤지요. “광주에 내려가 보시오. 병원마다 죽은 사람, 다친 사람이 그득할 거요. 가보시오.”

그러는 와중에 또 한 소식을 듣게 되죠. 내가 교회에서 광주 관련 증언 번갯불에 온몸이 관통당하기 하루 전날, 5월30일 김의기라는 서강대 학생이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투신했다는 거였어요. 그는 광주의 비극을 알리는 유인물을 뿌리다가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그대로 6층에서 몸을 던졌다고 했지요. 누군가 전해주는 그 유인물 내용 한 자 한 자가 귀에 박힙디다. “피를 부르는 미친 군홧발 소리가 고요히 잠들려는 우리의 안방까지 스며들어 우리의 가슴팍과 머리를 짓이겨놓으려고 하는 지금,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래도 믿어지지 않았어요. 결국 제대를 보름여 남긴 방위병,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과 성남에서만 살았던 나는 어렴풋한 이름으로만 들었던 광주, 빛고을에 내려가게 됩니다.

ⓒ성남일보
고 김종태씨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방위병으로 복무 중이었다.

기차 안에서 “그럴 리가 없어”라고 얼마나 중얼거렸는지 모릅니다. 그럴수록 머릿속은 더 헝클어졌지요. 그럴 리 없어, 그러지 않아야 해. 만약 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지? 꼬리에 꼬리를 물던 어지러움은 광주에 발을 딛는 순간 끝장나고 말았습니다. 전두환이라는 괴물이 짓뭉개버린 광주 곳곳에서는 가시지 않은 피비린내가 났고 오가는 사람들의 가슴에 뚫린 커다란 구멍은 옷에 가려져도 훤히 보였습니다. 대충 땅을 파고 덮어버려 관 속에서 손이라도 튀어나올 듯 엉성했던 망월동 묘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내가 만든 독서회 이름의 주인공인 성경 속 ‘조나단(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다던가요. “내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오. …형의 그 남다른 사랑, 어느 여인의 사랑도 따를 수 없었는데, 아, 용사들은 쓰러지고, 무기는 사라졌구나(사무엘하 1장).” 그 구절을 되뇌며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만큼 흐느꼈습니다. “여러분은 쓰러졌는데 나는 무얼 해야 합니까.” 그때 머릿속에서 종소리처럼 울리는 한마디가 있었습니다. ‘알려야 한다.’ 내가 강연자를 믿지 못했듯 서울 사람들은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른다. 가서 전하자. 내 눈에 문신처럼 새겨지고 귀에 대못으로 꽂힌 참극을 생생하게 전하자.

서울에 돌아온 나는 와들와들 떨리는 팔다리를 겨우 가누며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습니다. 한 명이라도 더 보게 하기 위해 종로나 신촌 등 사람들이 많은 곳을 찾아서 흩날려봤지만 사람들은 별 관심이 없었고 신문에는 한 줄도 나지 않았습니다. 되레 머지않아 미스유니버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요란했지요. 수백명이 살해된 마당에 세계 미녀들을 모아놓고 축제를 열다니, 유인물을 뿌리고 돌아가던 버스 안에서 나는 신문을 갈기갈기 찢으며 분노했습니다.

수백명 살해된 마당에 미인 대회라니

1980년 6월9일 저는 여느 날처럼 밤새 쓰고 타이프를 치고 등사기를 밀어 작성한 유인물을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이번 유인물은 특별했습니다. 특히 그 마지막 구절에서는요. 글자 하나 쓰면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고 마침표 하나 찍으면 앞으로 하고픈 일, 해야 할 일들이 시나브로 번져왔으니까요. “내 작은 몸뚱이를 불사질러(불싸질러) 광주 시민, 학생들의 의로운 넋을 위로해드리고 싶습니다. 아무 대가 없이 이 민족을 위해 몸을 던진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너무 과분한, 너무 거룩한 말이기에 가까이 할 수도 없지만 도저히 이 의분을 진정할 힘이 없어서 몸을 던집니다.” 유인물을 신촌 네거리에서 대놓고 뿌리자 거리에 서 있던 경찰들이 달려들었고 나는 가지고 있던 기름을 온몸에 뿌리고 불을 댕겼습니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를 쳐다보았지요. 타들어가는 목청을 쥐어짜 구호를 외쳤습니다. 제발 이걸 읽으라고. 광주의 비극을 마주하라고 악쓰고 싶었지만 불길 앞에서 사람의 육신은 약하게 바스러지더군요. 그렇게 나는 죽었습니다.

광주항쟁을 두고 전라도 사람들이 무기 들고 나대다가 일어난 것 아니냐는 사람도 일부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분들에게 제가 이승에서 배웠던 모든 욕을 다 쏟아붓고 싶습니다. 이것들 보시라고요. 나는 부산 출신이고, 나보다 먼저 광주를 고발하며 투신했던 김의기는 경북 영주 출신이었단 말입니다. 광주는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문제, 인간과 비인간의 문제였단 말입니다. 하물며 내가 죽어가면서도 잊지 못했던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이랬다지요.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그의 야욕 때문에 죽어간 수백 광주 영령과 그 참극 앞에서 살아갈 자신을 잃어버리고 우리들의 미래를 던져 세상 사람 한 명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죽어간 김의기 그리고 내 영혼 앞에서 어찌 그리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요. 세상이 왜 이렇게 된 겁니까. 도대체 나는 무엇 때문에 죽어갔던 겁니까. 내 죽음은 이제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겁니까. 깨문 입술에서 피가 나도록 서글프지만 원망하지는 않겠습니다. 후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저는 그렇게라도 알리고 싶었으니까요. 내 가슴속 비밀을 그렇게라도 풀지 않았다면 제풀에 속이 터져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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