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덩샤오핑 시대, 중국 이해의 출발점
일취월장7
2017. 2. 1. 11:44
덩샤오핑 시대, 중국 이해의 출발점 백승욱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프레시안 books]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2017.01.13 17:08:38
중국의 급부상을 지켜보면서 이를 어떻게 이해할지 곤혹스러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중국 이해의 곤혹함은 독서대중이나 중국과 거래하는 사업가뿐 아니라, 중요 국가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에게서도 광범하게 확인된다.
그렇지만 실체를 꿰뚫어 보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각자의 고정관념을 가지고 뭔가 이해했다 만족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몇 가지 관점을 살펴보자. 첫 번째는 냉전시기의 이념적 잣대로 중국을 보는 경우로, 공산당이 지령하면 모두 일사불란하게 따르는 전체주의 사회로 여기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내부적 논쟁이나 균열도, 역사적인 탐색도 별 의미가 없으며 '사회주의' 중국은 늘 그렇게 똑같은 사회다. 두 번째는 자신이 읽은 <삼국지연의> 등 옛 소설이나 중국 역사서, 제자백가 서적 등으로 중국을 이해하는 태도로, 중국이 몇 천 년 전부터 제왕적 통치가 통한 제국이었으니, 현재도 그런 관점으로 보면 된다는 태도다. 늘 황제가 명령하면 따르는 잘 갖춰진 관료 체계가 보좌하고, 백성은 천자를 따르다가 때로는 반역하는 구도의 반복이 지금도 되풀이 될 뿐이라는 듯 말이다. 이도 저도 아닌 세 번째 입장은 심층적 구조는 잘 모르겠고, 중국은 거대한 시장이라 큰 돈 벌 수 있는 '대박'의 공간이지만, 막상 가보면 돈만 아는 중국인을 신뢰하기 어렵고 제도도 도통 이상해서 장사하기 너무 어렵다는 불만의 토로다. 그래도 "중국은 내가 좀 겪어봐서 잘 안다"는 태도는 버리지 않는다. 셋 어느 누구도 가까운 역사 시기를 심층적으로 들어가 이해해 보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가진다.
시진핑(習近平) 체제가 앞선 후진타오(胡錦濤) 체제와 어떻게 다른지, 중국 정치구조에서 중요한 정책결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중국은 자본주의 국가인지 아니면 사회주의 국가인지, "중국의 꿈"이란 대체 무엇인지, 중앙정책과 지방정책은 일치하는지, 개혁개방은 중국 사회에 어떤 구조적 변화를 초래했는지, 중국 사람은 만족하며 사는지 등 알고자 하는 질문은 많지만 맘에 쏙 드는 답을 구하기는 쉽지 않다. 쏟아지는 방송 정보도 심도 있는 이해를 막기 십상이다.
왜 이처럼 중국을 이해하는 일이 어려운지 생각해본다. 중국의 정치사회체제가 지닌 특성이 우리나라나 여타 서방 국가와 많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차이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치·사회 구조를 여러 영역으로 쪼개어 깊이 있게 분석해보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는 일은, 이런 복잡한 중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사적 뿌리로 나아가는 노력 또한 항상 병행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현재 나타나는 우리와의 차이점을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런데 역사적 뿌리를 보면 짚어야 할 곳이 하나 둘이 아님을 알게 된다. 현재 시진핑 체제의 특징을 이해하려면 그에 앞선 후진타오와 장쩌민(江澤民) 시대로 돌아가서 이해해 보아야 할 뿐 아니라, 개혁개방이 전개된 덩샤오핑(鄧小平) 시대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개혁개방의 덩샤오핑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에 앞서 전개된 마오쩌둥(毛澤東) 주도 하의 사회주의 시대 전체를 이해야 한다. 또 마오쩌둥 시대를 이해하려면 그에 앞선 중국 혁명기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그에 앞선 2천년 이상의 중국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히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중국 좀 알자고 이 어마어마한 작업을 모두 감당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최소한 현 시기 중국의 특성과 변동을 이해하려면 덩샤오핑 주도의 개혁개방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그에 앞선 시기 마오쩌둥 하의 사회주의 건설이 어떻게 진행되어 어떤 문제를 낳았는지 기본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렇듯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의 뿌리를 찾아가다보면, 그 작업이 꼭 중국에만 한정되지 않고 내가 선 시공간을 이해할 때도 꼭 필요한 작업임도 부수적으로 깨닫게 된다.
집단지도체제는 개혁개방 이후 안착했다
총 1361쪽에 이르는 조영남 교수(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의 대작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민음사 펴냄) 3부작은 현대 중국의 가까운 역사적 뿌리인 개혁개방 시대가 어떻게 탄생했는지를 세심하고 치밀하게 분석한 역작이다. 중국 사회주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깊이 있게 연구해본 사람이라면 이런 작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때로는 책 한 쪽 분량을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자료를 뒤져 읽고 다시 생각해봐야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야말로 피와 땀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성과물이다. 조영남 교수는 중국 정치 연구 영역에서 독보적 역량을 보이는 토종학자이면서 출중한 국제적 학자이기도 하다. 조 교수는 개혁개방기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 연구에서 출발해 중국 공산당 지도부의 변천을 <후진타오 시대의 중국 정치>, <21세기 중국이 가는 길>(이상 나남출판 펴냄), <용과 춤을 추자>, <중국의 꿈>(이상 민음사 펴냄) 등에서 분석하였고, 중국 국가기구의 변천과 정치제도 개혁을 <중국의 법치와 정치개혁>(창비 펴냄), <중국의 법률 보급 운동>, <중국의 법원개혁>(이상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등에서 다루었다. 영어로도 <China Quarterly>를 비롯해 유수 해외 저널에 글을 실었고, 그간 연구 성과를 2009년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에서 <Local People's Congresses in China: Development and Transitio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국 공산당의 엘리트 정치와 정치제도 변천에 관한 심도 있는 성과를 쌓아온 조영남 교수가 20년 연구사의 결실을 개혁개방 정책의 형성기로 확대한 이 3부작은 값지고 흥미로운 성과라 할 수 있다. 다루는 시기는 30여 년 전의 역사이지만, 이야기하고자 하는 분석의 내용은 현재의 중국 정치와 뗄 수 없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40여 년 전으로 돌아가 역사적 출발점을 이해하지 못하면 현재의 중국 정치도 이해할 수 없다.
개혁개방 시기나 현 시기 중국의 구조와 변동에 관한 분석을 주로 미국 학자들의 번역서에 의존하는 우리 현실을 보면, 조 교수 3부작의 의미는 각별하다. 그 범위와 심도, 서술 방식 모두에서 앞으로 학계 연구자들과 중국을 이해하려는 학생, 그리고 일반 독자 모두에게 중요한 선물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이 3부작은 1976년부터 1992년까지 덩샤오핑이 주도한 개혁개방 체제의 성립과정을 다룬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통상적으로 개혁개방의 출발점이라 부르는 11기 3중전회(中全會, 중국공산당 11차 당대회 3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가 아니라, 그보다 3년 앞서 1975년 마오쩌둥 하에서 덩샤오핑이 주도한 경제 정돈과 화궈펑(華國鋒)의 1977년 약진 정책에서 이야기를 출발하고, 1992년 덩샤오핑의 남순강화(南巡讲话)에서 이야기를 맺는다. 첫 권은 1982년까지, 둘째 권은 1987년까지, 셋째 권은 1992년까지 시기별로 나뉘지만, 책의 내용은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다. 중국공산당 지도부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안에 관한 쟁점을 각종 사료를 총동원해서 저자 나름의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서술로 진행된다.
'개혁개방'이라는 제목이 붙은 첫 권은 1부에서 먼저 개혁개방 정책 방향의 수립과 농가생산책임제라는 농촌개혁 방안 등장, 경제특구 설치, 도시개혁 추진 등이 어떻게 개시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아래로부터의 이니셔티브와 위로부터의 결정이 어떻게 만나는지를 강조한다. 이어 2부와 3부에서는 덩샤오핑이 마오쩌둥이 지명한 공식 후계자인 화궈펑과 연합해 4인방을 무너뜨리는 데서 출발해 이후 어떻게 화궈펑의 주도권을 꺾고 자신의 권력을 장악해 개혁개방 체제를 수립하는지 자세하게 보여준다.
'파벌과 투쟁'이라는 제목의 둘째 권은 이렇게 형성된 덩샤오핑 체제 하에서 책의 제목이 보여주듯 파벌이라는 내적 균열이 어떻게 발생하고 파벌간의 투쟁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보여준다. 핵심 내용은 덩샤오핑이 화궈펑을 밀어낸 대신 옹립한 총서기 후야오방(胡耀邦)을 놓고 일어난 당 지도부 내의 대립이 어떻게 후야오방의 실각으로 귀결되는지의 이야기이다. 특히 이를 이중정치, 즉 원로정치와 공식정치가 결합한 집단지도 체제 내의 모순적 작동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톈안먼 사건'이라는 제목의 3권은 제목 그대로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비극으로의 과정을 자세히 보여준다. 이미 2권에서 분석한 당 내부 정치의 모순 때문에 후야오방 총서기가 하야했는데, 대립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를 대신해 덩샤오핑의 추천으로 자리를 차지한 자오쯔양(趙紫陽) 총서기 또한 톈안먼 민주화운동에 부딪혀 이중 정치구조의 난점을 돌파하지 못하고 실각한다. 이른바 '보수파'와 '개혁파'로 지칭된 당내 대립 구도 하에서 "정치개혁 없는 경제개혁 추진"이라는 덩샤오핑의 일관된 입장이 개혁개방 과정에서 불거진 대중적 불만과 마주쳤을 때 어떤 비극적 사건을 일으키는지, 이것이 당내외의 정치에서 어떻게 폭발하는지 잘 분석했다.
이 3부작에서 특히 흥미로운 부분은 1권 2부에서 2권(그리고 3권 일부)에 이르는 당내 고위 지도부 내부 정치 동학에 관한 분석이다. 이 내용이 값지고 흥미로운 이유는 그간의 개인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조 교수가 개혁개방 시기 중요한 국면에 관해 새로운 논점과 해석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띄는 몇몇 중요 쟁점을 추려보면, 화궈펑과 덩샤오핑의 단절이 과대평가된다는 지적, 11기 3중전회는 개혁개방으로의 전환보다 덩샤오핑 중심의 새로운 지도부가 구성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는 지적, 덩샤오핑이 1980년 12월 정치개혁을 중단하고 4항 기본원칙으로 돌아선 것은 무엇보다 화궈펑 퇴진이라는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라는 지적, 보수파와 개혁파의 분화는 1981년 6월 이후 표출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 1983년 무렵까지 후야오방이 보인 자유주의적 태도 때문에 덩샤오핑의 후(후야오방) 지지가 철회되고 자오쯔양도 이 무렵 후와의 거리를 두었다는 지적, 국가 지도급 인사 인선은 덩샤오핑이 주도했지만 원로들의 동의를 얻지 못하면 어느 누구도 임명하지 못했다는 지적, 후야오방과 비교해 자오쯔양 처분이 달랐던 이유는 톈안먼 처리 과정에서 자오쯔양이 당의 결정에 반발한 자신의 잘못을 끝까지 인정하기 않았기 때문이라는 지적, 본래 장쩌민은 보수파 의견에 기울었으나 1992년 남순강화에서 제기된 덩샤오핑의 경고를 인식하고 덩샤오핑 방향으로 입장을 정리했다는 지적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주장들을 바탕으로 이 3부작에서 다루는 분석 내용을 다소 무리임을 알면서 간단히 정리해 보자면 다음 네 가지 주장으로 압축되지 않을까 싶다.
첫째, 개혁개방 이후 중국 정치는 공산당 지도부의 집단지도체제라는 특징을 보인다. 이 책이 다루는 시기에도 덩샤오핑 단독 주도가 아니라 집단지도체제가 작동했으며, 이는 원로정치와 공식정치가 결합한 이중 정치구조의 특징으로 나타났다. 이 이중구조는 장쩌민 체제가 수립되는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해소된다.
둘째, 공산당의 집단지도체제는 내부적 대립이나 이견이 커질 때 교착상태에 빠지는 문제를 일으킨다. 이런 위험에 대비해 한 명의 최고 지도자에게 최종결정권을 부여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으로 '핵심'을 두게 된다. 덩샤오핑이 2세대 지도자의 핵심 역할을 했고(1권 343쪽, 2권 212쪽), 이후 장쩌민으로 그 역할이 이전되면서 3세대로 세대교체가 일어났다(3권 228쪽). 이는 지금 시진핑을 둘러싼 '핵심'의 논의를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 이 책이 다루는 시기 집단지도체제 고유의 난점 때문에 내부적 대립과 균열이 발생하였고, 이는 보수파와 개혁파라는 지속적 대립구도로 이어졌다. 그러나 정치풍파와 무관하게 개혁개방정책은 지속되었는데, 이는 정치적 보수주의와 경제개혁의 결합이라는 중국 개혁개방의 특성을 낳았다.
넷째, 중국 정치의 변화는 정치민주화가 아니라 정치 제도화라는 특성을 중심으로 이해해야 한다.

▲ 덩샤오핑 시대 중국은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아간다. ⓒwikimedia.org
덩샤오핑 시대 지도부와 국가정책
그런데 이 3부작의 서술을 더 살펴보면 조금 상이한 서술 방식이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중국 공산당 엘리트 정치 분석이다. 1권 2부와 3부, 2권 1부, 3권 전체가 해당한다. 조 교수의 장점인 충분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논쟁 개입식 서술이 두드러진다. 두 번째는 국가기구와 정치제도 변천사를 다룬 부분이다. 2권 2부에 집중되며, 다른 곳에서도 부분부분 발견된다. 이는 최근 법원이나 법치에 관한 조 교수의 다른 연구와도 연관되는데, 꼼꼼한 사료보충에 따른 세부적 분석이 두드러진다. 그렇지만 여기서 서술은 첫 번째 부분의 서술방식과 다소 차이를 보인다. 예를 들자면, 앞선 서술에서는 '민주'에 관해 장애물이었던 중앙 당 지도부가 촌민위원회 서술에서는 민주의 추동자처럼 보이는 불일치가 보인다. 세 번째는 개혁개방 정책사라 할 수 있는 부분으로 1권 1부가 여기 해당한다. 이 부분은 다른 부분에 비해 비판적 논쟁 개입이 덜 두드러지고, 중국 개혁개방사의 공식적 입장에 관한 보완적 서술처럼 보인다. 1권 1부를 3권 1부와 비교해보면 강조점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 부분의 아쉬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다.
이처럼 서술의 불균등이 관찰되는 이유는 당대 중국사를 다룰 때 생기는 어떤 난점 때문일 것이다. 이는 이런 중요한 성과를 마주할 때 감탄과 더불어 어쩔 수 없는 아쉬움을 유발하기도 하는데, 아래에 개인적 아쉬움의 소회를 기록해두고자 한다. 굳이 아쉬움을 기록해 두고자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이 3부작이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이라는 야심적 통사를 쓰려는 의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당대 역사를 다룬 책들 중 이미 고전이라 할 수 있는 책이 적지 않은데, 나는 주저 없이 대표작으로 모리스 마이스너의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1, 2>(김수영 옮김, 이산 펴냄)를 꼽는다. 첫판이 1977년에 나온 이후 10여년 간격으로 1986년, 1999년에 개정판을 발간한 이 책은 다루는 범위, 역사를 보는 입장, 이론적 함의 등에서 여전히 고전적인 통사의 대표격으로 인정받을만하다.
이런 통사류에 비추어볼 때, 조 교수의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에 대한 아쉬움은 이 책을 과연 1976~1992년 중국 개혁개방체제 수립을 다룬 통사로 볼 수 있느냐는 질문과 연관된다. 차라리 책의 제목을 좀 길긴 하지만 <덩샤오핑 시대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국가정책> 정도로 좁게 한정했더라면 이 책이 실제 다룬 내용에 좀 걸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제목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재나 부족은 그 시기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또한 이 책의 기본 질문과 연관된 저자의 다소의 동요와도 연관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이해하는 이 책의 기본 질문은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주도하는 개혁개방 체제는 어떻게 상당한 성과를 거두며 유지되는가"일 것 같다. 정치 과학이 기본적으로 던지는 질문인 이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관한 문제를 규명하기 위해서는 중국 정치제도의 특성과 역사를 잘 살펴야 한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이 책은 조금 변형된 다른 질문도 병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어떻게 개혁개방에 성공했는가"라는 질문이다. 후자의 질문은 특히 '고속성장'을 중심에 두고 보는, 가치판단이 훨씬 많이 개입된 질문이다. 두 질문이 어떻게 다른가를 한국에 가져다 이해해 보려면, 박정희 시대의 예를 들어볼 수 있다.
이 책이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
조 교수의 3부작에 두 질문이 섞여 있고, 이는 서술의 불균등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떻게 유지되는가"라는 전자의 질문이 3분의 2 정도 서술 비중을 차지하지만, "어떻게 성공했는가"라는 후자의 질문도 3분의 1 정도 영향을 끼친다고 보인다. 이런 혼재가 발생하는 이유는 단순한 개인적 가치평가의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사회주의 전 시기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역사적 분석과도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된다.
2012년 18차 당대회에서 시진핑 중심의 지도부가 등장했을 때 중국연구자들이 모여 그 함의를 토론한 적 있는데, 이 때 흥미로운 대립점이 관찰되었다. 당시 조영남 교수를 비롯해 정치 연구자들은 시진핑 지도부 하의 제도적 안정성에 초점을 맞추어 전망했고, 사회학·인류학 배경의 중국 연구자들은 중국 사회의 불안정성과 위기를 더 강조하는 입장을 보였다. 질문을 어떻게 던지는지, 어느 정도 영역을 관심의 범주에 담는지는 현실 분석과 역사 서술에서 늘 문제가 된다.
통사로서 역사 분석의 관점과 관련해 이 책에서는 네 가지 부재 또는 부족이 두드러진다고 생각된다. 나로서는 이 3부작의 완성을 위해 이 부재한 영역이 보충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고 보이지만, 저자의 입장이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첫 번째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관한 비판적 연구의 부재, 둘째는 개혁개방 정책사에 관한 비판적 접근의 부족이다. 셋째는 노동 영역 분석의 부재며 넷째는 당 지도부를 제외한 기타 영역, 특히 민간 사회 논의의 부재 또는 부족이다. 다섯째로 동아시아 경제 분업구조와의 관계에 관한 관심도 부재하다.
첫 번째 문화대혁명 시기의 문제를 먼저 살펴보자. 이 책이 발간된 2016년은 문화대혁명 발발 50주년으로 국내외에 다양한 학술 대회가 개최되었고, 문화대혁명의 복잡성에 관한 많은 연구가 새롭게 발표된 시기다.
조 교수의 3부작은 1981년 중국공산당 '역사결의(1981년 11월의 11기 6중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당의 일부 역사 문제에 관한 결의',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인정한 결의로 평가됨. 편집자.)'의 관점을 비교적 충실하게 수용해 문화대혁명과 개혁개방 시기의 이분적 구도를 설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대혁명의 '10년 동란' 대 그 극복의 성과로서 개혁개방이라는 구도,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가해자인 마오와 조반파(造反派) 대 그 피해자인 개혁개방 주도세력이라는 구도가 핵심이다. 하지만 개혁개방에 앞선 사회주의의 역사를 과연 이처럼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로 이해할 수 있느냐는 학계에서 계속 비판적 문제제기가 이어지는 논점이다. 특히 이분법으로는 개혁개방시기에 왜 '민주'를 둘러싼 쟁점이 40여 년 동안 그토록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로 착종(錯綜)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에 관한 조 교수의 입장이 이 책 내에서 다소 동요하거나 앞뒤 불일치하는 것으로 보이는 이유도 개혁개방 이전 시대의 평가와 관련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이 책에서 다루는 몇몇 문제를 중심으로 문화대혁명에 관한 비판적·복합적 해석이 덩샤오핑 시대 평가의 전제로 왜 중요한지 이야기해 보자. 첫째로 1957년 반우파 투쟁의 문제가 있다. 이 책도 반우파 투쟁의 주도자가 덩샤오핑이라는 점을 여러 곳에서 지적한다. 그런데 1957년 상황은 개혁개방 시기에 이르러 비로소 다시 문제가 된 게 아니다. 문화대혁명 격화의 촉발제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잘 알려졌다시피, 1966년 문화대혁명 '초기 50일'(1966년 6월 1일부터 7월 후반까지 시기)의 문제는 공작조 파견을 둘러싼 갈등이었고, 공작조의 작풍이 문제를 일으킨 것은 1957년 반우파운동의 성분 문제를 다시 끄집어내 격화시켰기 때문이었다. '4항 기본원칙(사회주의·무산계급독재·공산당의 지도·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덩샤오핑식 대응의 전사는 이미 1956~57년에, 1966년에, 1974년과 1978~79년에 지속적으로 반복된 문제였고, 이런 억압에 대립한 이단적 사조의 '민주'라는 질문은 이미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시작해 문화대혁명 시기 전체를 관통해 제기됐다. 문화대혁명을 단순화하면 덩샤오핑 정치보수주의의 뿌리를 이해하기 어려워진다.
둘째, 이와 연관해 혈통론 쟁점이 제기된다. 문화대혁명의 공작조가 문제가 된 '초기 50일'의 또 다른 중요 쟁점은 출신 성분을 계급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혈통론이었다. 이는 1957년 문제의 지속과 함께 현재까지 중국 정치의 쟁점이 된다. 2012년 시진핑 지도부 출현을 바라보며 중국의 대표적 자유주의 지식인인 첸리췬(錢理群)은 혈통론이 시진핑 주변의 지도층에서 긴 시간 지속됨을 우려한 바 있다. 문혁 초기 혈통론을 강조한 초기 홍위병은 당 조직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이들이 문화대혁명 초기의 첫 가해자였지만, 나중에 정세가 변하자 피해자로 위치가 바뀐다. 문혁 시기 혈통론의 가장 큰 역설은 위뤄커(遇羅克)의 액운이었다. <출신론>이라는 글을 발표해 혈통론을 반박한 위뤄커는 사형을 당했고, 이 위뤄커의 입장을 일관되게 지지한 조반파 또한 문혁의 가해자로 역사적 평결을 받은 반면, 혈통론의 주도자들은 결코 가해자 평결을 받지 않았다. 이 착종된 구도가 이후 민주 논점에 장애물이 된다.
셋째, 인민해방군 문제가 제기된다. 이 책 3권 '톈안먼 사건'에서 조 교수는 인민해방군의 톈안먼 민주화운동 진압을 다루지만, 그 전사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또한 문혁의 전사와 뗄 수 없으며, 군 개입은 문혁의 가장 큰 난점을 보여준 측면이다. 그 난점은 1967년 초 마오쩌둥이 군에 내린 좌파 지지 명령의 모호함에 기인한다. 1967년 2월 칭하이성(靑海省)에서 자오융푸(趙永夫)가 조반파를 학살한 2.23사건으로 시작된 군의 잘못된 개입은 1967년 말에서 1968년 여름까지 인민해방군 광시성(广西省) 군구 사령부가 웨이궈칭(韋國淸)의 주도적 개입으로 9만여 명의 인민을 학살한 사건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이 문제는 이후 조반파 해체 과정에서도 되풀이되었다. 반당-반사회주의-반혁명으로 규정된 세력을 적대하는 당과 군의 일관된 태도는 1968년 이후 바뀐 적이 없었다. 여기서도 문혁 10년 시기를 구분 없이 동일하게 보면 곤란하다는 문제가 생긴다.
넷째 '삼종인' 문제를 좀 더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책에서는 문화대혁명의 잔당 처리를 이유로 삼종인 숙청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음을 보여준다. 개혁개방 초기뿐 아니라 1980년대에 이르러서까지 진행된 삼종인은 누구인가? 조 교수는 이 문제를 가볍게 다루고 있지만, 사실 이는 이후 중국에서 민주에 관한 문제제기의 뿌리를 제거한 중요한 사건이다. 이는 당 관료제가 주도한 문혁 방식의 정풍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삼종인은 이미 문혁시기에 전사가 있었다. 그 출발점은 1969년경부터 시작된 5.16 병단 색출, 계급대오 정리 등이었다. 이는 복구된 당 관료제가 당에 공격의 창을 겨눈 대중세력을 청산하는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 비껴있거나, 문혁 수혜자가 되어 오히려 동료들에게 창을 겨누었던 잔여 세력이 다시 정리된 과정이 삼종인 숙청이었다. 따라서 이는 문혁의 역사에서 당에 도전했던 조반파를 제거하고 조반파를 통일적 가해자 집단으로 정리한 일련의 과정으로 정리되는데, 짧은 조반과 긴 청산의 시기가 보여주듯, 여기서 가해자와 피해자 구도는 이미 상당히 복잡해진다.

▲ 문화대혁명은 사후 반혁명 규정 과정에서 중국 현대사에 긴 모순을 낳았다. 홍위병이 산둥성 취푸 공자 사당의 대리석 기둥을 부수는 모습. ⓒ북폴리오 제공
농민공 문제를 제외할 수는 없다
아쉬움을 느낀 두 번째 영역은 개혁개방 정책사에 관한 비판적 접근의 부족이다. 앞서 나는 이 책의 값진 분석이 1권 2부부터 시작된다고 이야기했다. 그 말은 1권 1부에 아쉬움이 남는다는 이야기이다. 2부 이후 본격적으로 논쟁에 개입하는 서술이 전개됨에 비해 3부작을 시작하는 1권 1부는 의외로 평이한 서술을 보인다. 개혁개방사의 공식적 입장을 소개하면서 더 구체적 층위로 내려가 자세한 소개가 첨부된다는 인상을 넘어서기 어렵다. 이를 문제로 보는 이유는 이 대목에 특히 이 책의 두 가지 질문 중 "개혁개방은 어떻게 성공했는가"와 그 대답이 집중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래로부터의 창의와 위로부터의 지원, 문혁을 극복하려는 전국적 열망, 공산당 지도부의 열성적 노력 등이 이 1부의 서술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개혁개방 시기는 고도성장의 과정인 동시에 여러 가지 사회구조적 문제가 발생한 과정이기도 하다. 양극화 심화, 부패, 군체성(群體性) 사건(1990년대 이르러 사회 곳곳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대중시위. 편집자.)을 세 가지 대표적 문제로 제기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뿌리가 개혁개방의 어디서부터 어떻게 자랐는지 이야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1권에서 이를 찾기는 어렵고, 3권 '톈안먼 사건'에 이르러 그 배경으로 간단히 언급된다. 그렇지만 3권에서도 부패의 뿌리는 이중가격제(1983년 도입되어 중국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꼽힌 제도로, 국영 기업이 석탄과 철, 기계장비, 주요 자본재의 가격을 정부가 정한 가격으로 판매하도록 하는 한편, 목표 이상 생산한 제품은 시장에서 자유롭게 팔 수 있게 허용한 제도. 편집자.)에 한정된다는 느낌인데, 이중가격제가 극복된 1990년대 이후의 부패는 개혁개방 초기의 설계와 무관했을까?
세 번째 아쉬움은 노동영역에 관한 논의가 부재하다는 점이다. 이는 사실 좀 놀랍다. 이 책을 덩샤오핑 체제의 통사로 쓰고자 했다면 더욱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에는 단지 인민공사 하의 농촌만 존재했던 게 아니다. 사회주의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는 무엇보다 노동자 삶의 변화와 관련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개혁개방의 함의도 이 영역의 근본적 변화와 관련된다. 이 책은 인민공사의 해체와 관련해 비교적 상세히 언급하고, 도시로 들어와 공유제 기업의 관리방식 개편과 관련해 다소 언급하지만, 정작 그 아래 단위 체제라고 부르는 영역에서 살아온 다수 노동자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1986년 노동계약제 도입으로 종신고용 체제가 무너지고 단위 내에 두 가지 종류의 고용제도가 공존하는 큰 변화가 발생하며, 고용제도의 변화는 임금제도 개편, 단위복지 체제의 해체 등과 병행해 진척된다. 1990년대 초에는 단위 외부 공간의 확장과 더불어 단위체제의 특징이 상당히 약화된다. 이런 변화에 따라 노동자 지위는 노동자 스스로 말하듯이 "주인공에서 피고용자의 지위로 하락"한다. 이런 역사적 배경이 있기에, 1998년부터 2002년에 국유기업 노동자 3분의 1을 대상으로 한 구조조정이 진행되어 면직(下崗)과 그에 반발한 노동 소요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발생했다.
이뿐 아니라 1989년에는 '농민공의 파도'라는 큰 사회 문제가 발생한다. 쓰촨성(四川省) 등지의 농민들이 춘절에 100만 명 넘게 광둥성(廣東省)으로 몰려드는 새로운 노동문제다. 이는 기존의 도-농 관리 구조 전체를 뒤흔들 만큼 큰 사회문제가 되는데, 중국 정부는 사실상 2000년대 중반까지 이들을 ‘불법체류자’로 간주하였을 뿐, 공식적인 사회정책을 수립하지 않았다. 그저 법률 사각 지대의 불법체류 저임금 노동자로서 이들을 활용하였을 뿐이다. 이들은 재정 수입을 늘리려 자구책을 강구하던 지역정부로부터 활용 가능한 '비인민' 군체 대접을 받았을 뿐이다. 농민공 문제는 개혁개방의 가장 큰 어두운 그림자로 지적되는데, 이를 다루지 않고 개혁개방의 성공을 논하는 것은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는다.
노동문제를 별도로 다루어야 할 전문 영역으로 간주해 3부작 서술에서 배제할 수 있다 하더라도, 노동의 부재는 톈안먼 민주화운동을 다룬 부분에서도 의외로 걸림돌이 된다. 이 책 3권의 톈안먼 민주화운동 서술에서 확인되는 몇 가지 사실만 연결하더라도 저자는 노동과 관련해 어떤 해석을 제기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①전국총공회(全國總工會, 중국의 노동조합 전국 조직)는 톈안먼 시위자들에게 10만 위안이라는 거액을 기부하였다. 톈안먼 민주화운동이 당시 전총의 정세인식이나 공회개혁 방안 추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는 말이다. ②베이징 공자련(베이징 노동자자치연합회)을 비롯해 5월말부터 기존 공회를 부정하는 새로운 노동자 조직이 결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는 그에 앞서 10여 년 동안 전개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③1989년 당 지도부의 5.10 회의에서 자오쯔양과 리펑(李鵬)은 노동자 문제를 함께 책임지게 되었다. 총서기와 총리가 함께 노동자를 담당해야 할 만큼 톈안먼 민주화운동은 중대한 문제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④톈안먼 민주화운동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은 모두 노동자였다. 이를 단지 노동자를 비하해 말하듯 불량배로 간주해도 좋은 것일까?
앞서 이야기한 1980년대 후반의 노동개혁과 농민공의 대량 이주 문제를 서술에 포함해 분석하지 않았다면 1989년 톈안먼 민주화운동 시점에서 노동자의 동향은 그저 무시해도 좋을 변수밖에 안되겠지만, 이런 상황을 고려한다면 우리에게 조금 더 복잡한 구도의 설명이 요구됨을 알 수 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당내 보수파와 개혁파 논쟁의 이면에 관해 상이한 분석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실성을 상실한 '골통 좌파'인 보수파가 주도한 이 시기의 "성이 자본주의인지 성이 사회주의인지" 논쟁은 부적절한 논쟁구도와 논쟁주도자라는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의 사회적 변화를 보여준 징후로 이해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1980년대가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양극화 문제가 시작되고 사실상 계급 문제가 새롭게 다루어져야 하지만, 그 개념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잃어버리게 되는 이 시기는 중국에서 이후 현실 상황을 분석할 때 어떤 난점이 발생할지 보여준 중요한 계기였다. 논쟁의 표면과 달리 이 시기의 논쟁에서 우리는 '계급'이라는 용어로 포장된 은폐된 당 권력의 이해관계라는 문제를 읽어낼 수도 있다. 문제가 부적절한 방식으로 부적절한 이들에 의해 제기된다고 문제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1966년부터 1977년까지 사실상 대학생 모집이 중단되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1989년 시기란 대학이 다시 문을 연지 겨우 10여년 지난 시점이고, 그럼 그 당시 이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대학원생 정도 나이 대 청년을 보자면, 과거 상산하향(下鄕運動) 경험과 문혁시기 다양한 정치 경험을 한 노동자나 농민 경험자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 분명하다. 1970년대의 민주화운동에서 주요한 글을 남긴 사람들은 당연히 노동자 출신일 수밖에 없다는 점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회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당시의 사회조건 하에서 노동자라는 '특권적 주인공'의 위상이 이 시기 이해에서 빠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2, 3권(조영남 지음, 민음사 펴냄) ⓒ프레시안
중국 이해를 위한 필독서 되길
네 번째 부재의 아쉬움은 당 지도부를 제외한 기타 영역, 특히 민간사회에 관한 논의의 부재 또는 부족이다. 두 가지 측면만 언급해 두자. 첫 번째는 이단사조와 사상촌락이라는 배경이다. 1956년 '쌍백' 시점부터 중국 사회주의사에서 이단사조의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특히 마오쩌둥 시기에는 그것이 늘 당내로 유입되어 마오의 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이단사조는 문화대혁명 시기 두드러지게 부각되었고, 상산하향 시기에는 사상촌락 운동으로 이어져, 1974년의 리이저 대자보(李一哲 大字報) 사건, 1978~79년 베이징의 봄, 그리고 1980년 학원 민주화운동까지 이어진다. 1978~79년 덩샤오핑이 이들과 선별적 연합 후 연합을 폐기한 것은 그 이후에도 큰 궤적을 남긴다.
이뿐 아니라 1980년대 사상해방의 국면에서 전개된 지식인계 논쟁과 사회적 분위기 또한 이후 2010년대까지 이어지는 사상의 흐름을 형성한다. 마르크스주의 논쟁, 봉건과 계몽 논쟁, 국학열, 인문정신 논쟁 등이 그것이다. 톈안먼 민주화운동의 진압은 단지 운동의 진압이 아니라 사상의 진압이기도 했고, 사상의 분기점이 되기도 했다.
정치사를 다루기 때문에 각종 이단사조나 사상사조를 다루기 어렵다 해도, 이 책이 분석하는 당 최고 지도부의 결정을 보려면 그 바로 아래층에서 전개된 이론 논쟁 구도를 좀 더 포함할 수 있지 않았느냐는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한 예로 1992년 '사회주의 시장경제'라는 새로운 개념화가 등장해 그 이전과 단절점이 형성되는데, 이 용어는 많이 알려졌듯이 우징롄(吳敬璉)이 장쩌민에게 제시한 개념이었다. 우징롄은 '사회주의 시장경제'와 '사회주의 상품경제'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제시했으며, 이 시점에 앞서 1980년대부터의 오랜 이론 논쟁의 전사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정치적 풍파와 무관하게 경제개혁이 지속적으로 추진된다면, 그 지속성을 지도부의 의지에서만 찾기보다 이 논리를 뒷받침하는 이론·정책 핵심 세력의 지속성에도 초점을 맞추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한국 현실을 빗대어 말하자면, 신자유주의 연구에서 '모피아'가 중요한 이유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개혁개방의 지속성과 관련한 이론적 논점은 이후 국유기업 개혁 방향에 관해서, 중점 지원 부문에 대한 입장에서, 금융개혁에 관한 입장에서, 더 나아가 시진핑 이후 헌정개혁에 관한 입장까지 줄곧 이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그 출발점에서 이런 정책 결정에 핵심적 영향을 끼친 지식인들이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궁금해지기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다섯째, 이 책은 개혁개방 정책을 대체로 당 지도부의 결단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에 비해 개혁개방이 어떻게 동아시아 지역의 경제분업 구조라는 좀 더 큰 틀 속에서 진행되고 거기서 화교자본은 어떤 역할을 하였으며, 그에 따라 중국 정부의 대응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등에 관한 분석을 살펴보기는 어렵다. 이를 경제사의 별도 영역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이 이례적 구도와 개혁개방의 성공은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에 이를 무시하기는 어렵다. 이는 한국의 발전국가로서 성공을 냉전 정책과 떼어서 보는 것이 문제가 되는 이유와 마찬가지이다. 1985년 플라자 협정 이후 동아시아 '다층적 하청체계'의 하위고리들이 어떻게 급속하게 동남아시아와 중국으로 확장하였는지, 여기에 외채가 없었다는 중국의 전사가 어떻게 유리한 고리를 낳았고, 화교자본이 중국의 신호에 어떻게 기민하게 대응해 광둥과 푸젠(福建)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는지는 단지 지도부의 결단으로만 해석될 수 없는 더 큰 역사적 배경 아래에서 살펴야 한다. 이런 유리한 상황이 바뀌고 나서 중국의 성장률이 저하하고 2008년 세계경제위기의 영향 등이 문제되는 이유 역시 단순히 '덩샤오핑이 없기 때문'일 수 없는, 개혁개방의 경제체제가 어떤 세계경제와 지역경제의 구도 아래에서 출현했느냐는 질문을 제기한다.
이미 풍성한 분석을 쌓은 책을 놓고 이런 아쉬움을 던지는 것은 과도한 바람이거나 무리한 요구일 수 있다. 다시 한 번 말해두지만 이 책의 제목이 덜 야심적으로 <덩샤오핑 시대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국가정책>이었다면 굳이 아쉬움을 토로하지 않거나, 약간의 보충만 기대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개혁개방 체제의 출현 시기를 다루는 통사를 지향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에 이런 부재와 부족이 보충되기를 바라는 기대를 접기 어렵다. 앞서 마이스너의 작업을 언급했듯이 이 3부작 또한 10년, 20년을 지나면서 더 풍부하고 더 심도 있게 발전해 갈 것을 기대해 본다. 그 전이라도 이 책은 현재가 과거와 맞물려 진행된다는 기본적 진리를 확인케 하면서, 중국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가는 사람들에게 자기 서재에 꼭 꽂아 둘 소중한 자산으로 값어치를 확인해 줄 것이다.
백승욱 서평에 답함, 덩샤오핑 체제와 덩샤오핑 이후는 다르다 조영남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기고] 덩샤오핑 시대를 이해하는 길
2017.02.01 11:31:48
<프레시안>에 실린 백승욱 교수의 서평은 2017년 새해의 반가운 선물이었다. 학자에게 자신이 쓴 책은 긴 산고 끝에 낳은 자식과 같다. 길게는 10년, 짧게는 4년의 노력 끝에 '세 쌍둥이'(<덩샤오핑 시대의 중국>(민음사 펴냄) 3부작)를 출산했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 반대로 자기가 낳은 자식을 진심으로 축하해줄 뿐만 아니라 애정 어린 관심으로 더욱 건강하고 훌륭하게 자랄 수 있도록 조언해주고 격려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기쁘겠는가? 현재 내 심정이 그렇다. 특히 백 교수가 세파에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제주도로 휴양을 떠나면서도 내 책을 가지고 가서 꼼꼼히 읽고 장문의 서평을 썼다는 사실에 나는 백 교수의 깊은 우정과 진정한 학자의 풍모를 느낀다.
1990년대 중후반 서울대학교 사회대학에는 중국을 공부하는 예닐곱 명의 박사과정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의 전공은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인류학, 지리학 등 제각각이었지만 중국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다는 열망만은 모두 한결 같았다. 그 무렵 중국을 공부하기 위해 학생들이 미국으로 중국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들은 끝까지 서울대에 남아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부는 유학 갈 능력이 안 되고 조건도 갖추지 못해서, 일부는 '우리의 중국 공부'를 하겠다는 아집으로 그렇게 했다.
한국에 돈 벌러 온 조선족 동포를 중국어 선생님으로 모시고 함께 중국어를 공부했다. 한 학기에 한두 번 만나 소주잔을 기울이며 중국 공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쩌다 함께 중국에 가는 날이면 낮에는 '베이징의 나무꾼'이 되어 골목 구석구석을 누비며 문헌자료를 수집하고, 저녁에는 허름한 음식점에 모여 못다 한 중국 공부 이야기를 이어갔다. 끝까지 중국 공부를 포기하지 않도록 힘들고 지칠 때에는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했다.
이렇게 해서 일군의 중국 연구자 집단이 형성될 수 있었다. 중앙대 사회학과의 백승욱 교수를 포함하여 성공회대 디지털콘텐츠학과의 전현택 교수, 인천대 중어중국학과의 안치영 교수, 전북대 지리교육과의 이강원 교수, 한국금융연구원의 지만수 연구위원, 그리고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문순철 연구위원이 바로 그들이다. 비록 이들과 자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경북대 사회학과의 이동진 교수와 인천대 중어중국학과의 장정아 교수도 비슷한 시기에 중국을 공부했다. 그밖에도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대에는 중국을 공부하던 몇 명의 대학원 학생이 더 있었다.
나도 지난 20여 년 동안 이들과 함께 하는 행운을 누렸다. 되돌아보면 어려움 속에서도 그나마 학위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지도교수의 따뜻한 가르침과 함께 이들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똥고집'을 빼고 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이 부족했다. 예를 들어, 백승욱 교수는 탁월한 외국어 실력(중국어, 영어, 일본어, 독일어, 프랑스어, 한문)에 치밀한 이론까지 갖춘 공부의 팔방미인이었고, 안치영 교수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중국 문헌자료 전문가였다. 그래서 백 교수와 안 교수는 내가 연구 과정에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도와주고 가르쳐주었다. 이번 서평도 백 교수가 나를 학문적으로 도와주기 위한 배려에서 쓴 것일 게다. 서평에 답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되어 이렇게 내 생각을 말하려고 한다.
서평에 대한 답글(rejoinder)에는 대개 두 가지가 들어간다. 하나는 서평자의 비판에 대한 저자의 반박(반비판)이다. 다른 하나는 서평자가 제기한 문제에 대한 저자의 해명이다. 이 답글은 주로 뒤의 내용으로 구성된다. 백 교수의 서평에는 내 책의 주요 주장을 비판한 내용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백 교수의 과도한 칭찬에 부끄러울 따름이다. 대신 백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 다시 말해 내 책이 마땅히 다루어야 하는데 다루지 않아서 부족함을 느꼈던 내용을 주로 지적했다. 후에 내가 책을 수정 보완할 때 참고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제기한 일종의 제안이다.
참고로 내가 어떤 배경에서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을 쓰게 되었는지, 이 책을 쓰면서 내가 중점을 둔 내용이 무엇인지, 이 책이 나의 다른 연구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성균 차이나 브리프> 통권 42호(2017년 1월)의 '저자노트'에서 설명했다. 중복을 피하기 위해 '저자노트'에서 말한 내용을 다시 쓰지는 않겠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내가 쓴 '저자노트'는 백 교수의 서평처럼 그렇게 길지도 않고 어렵지도 않아 독자들이 재미있게 금방 읽을 수 있다.
중국의 성공 요인 분석
먼저 백 교수는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의 성격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3부작이 "개혁 개방 시기의 통사(通史)"라기보다는 "덩샤오핑 시대 중국 공산당 지도부와 국가정책"에 대한 분석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도 이 3부작을 개혁기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을 모두 포괄하는 통사로 쓸 생각은 없었다. 정치학자로서 정치적 관점에서 개혁기를 분석했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은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정치'가 더 적절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책의 내용을 보면, 1권 '개혁과 개방'의 제1부가 농촌 개혁, 경제특구, 도시 개혁을 분석한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정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 3부작이 개혁기에 벌어진 공산당의 권력투쟁과 국가정책을 시간적 순서에 따라 기술한 책은 결코 아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중국 정치를 연구하면서 가졌던 질문, 즉 '중국은 어떻게 개혁 개방에 성공했을까?'라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쓴 것이다. 책을 집필하기 전 오랜 연구를 통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었고, 이를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동시에 독자들이 중국에서 일어난 사건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책의 내용을 재구성했다.
이런 이유로 이 3부작이 어떤 관점에서 어떤 내용에 초점을 맞추어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을 분석했는지를 이해하려면 1권 '개혁과 개방'의 1장에 나오는 분석틀에 주목해야 한다. 분석틀이 없다면 이 책은 개혁기의 정치 변화를 서술한 역사서에 머물 것이다. 이 점에서 분석틀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아쉽게도 백 교수는 이에 대해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분석틀을 중시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 내용이나 적절성에 동의할 수 없어서 그냥 넘어갔을 수도 있다. 그러다보니 백 교수는 내가 왜 어떤 항목은 중시한 반면 어떤 항목은 무시했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이 책의 주장, 즉 '중국은 어떻게 개혁 개방에 성공했을까?'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중국이 세 가지 요소를 갖추었기 때문에 개혁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첫째는 개혁 개방을 결정하고 지도했던 강력하고 통찰력 있는 정치 리더십이다. 이런 정치 리더십의 핵심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다. 둘째는 이들이 결정한 개혁 개방을 현실에서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추진했던 유능한 당정간부와 이를 뒷받침하는 적절한 정치제도다. 셋째는 중국의 특수한 상황과 변화하는 국제환경에 맞추어 수립한 개혁 개방의 전략과 정책이다. 북한도 이런 세 가지의 요소를 갖춘다면 개혁 개방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세 가지의 성공 요소는 그냥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덩샤오핑 체제가 정치개혁을 추진하면서 만들어졌다. 공산당 개혁과 엘리트 정치의 변화, 정치제도의 정비와 발전, 국민의 정치참여 확대와 통제, 통치 이념의 개혁과 새로운 정책의 결정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이런 정치개혁이 어떻게 추진되었고, 그것이 세 가지의 성공 요소가 형성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상세히 분석했다. 이처럼 이 3부작은 특정한 관점에서 중국의 성공 요인을 찾으려고 덩샤오핑 시대를 살펴본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분석틀을 기억하고 이를 가이드로 삼아 책을 읽는다면 중국이 어떻게 개혁 개방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톈안먼 민주화 운동을 강경 진압하면서 덩샤오핑 체제는 민간사상 배척을 공고히 했다.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에 대한 해명
이어서 백 교수는 "이 책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들"로 네 가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한다. 첫째, 문화대혁명(문혁) 시기(1966-1976년)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가 없다. 특히 1957년의 '반우파 투쟁', 문혁의 '혈통론(血統論)', 인민해방군의 정치개입, '삼종인(三種人) 청산'은 모두 개혁기 중국 정치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자세히 검토해야 했는데, 이 3부작은 이를 소홀히 했다. 둘째, 개혁 개방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부족하다. 199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나타난 '양극화의 심화, 부패, 집단소요 사건(群體性事件)'의 뿌리는 덩샤오핑의 개혁 정책에 있고, 따라서 이를 분석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셋째, '놀라울 정도로' 노동 영역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다. 덩샤오핑 시기에는 농촌 개혁뿐 아니라 기업개혁도 있었고, 그 결과로 노동조건의 악화와 실업, '단위(單位) 체제'의 해체, 농민공(農民工)의 대량 이주의 문제가 발생했는데, 이 3부작은 이를 분석하지 않았다. 넷째, 중국 공산당 내에서 진행된 개혁 논의뿐 아니라 민간사상(이단사상)에 대한 분석도 필요한데, 이 책은 이를 소홀히 했다.
먼저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이 문혁과 그것이 미친 영향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이유에 대해 해명하겠다. 백 교수의 지적처럼 문혁은 '현재'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건이다. 그만큼 문혁의 영향은 광범위하고 깊었다. 아니 영향 여부와 상관없이 문혁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연구할 가치가 있다. 10년 동안 국민을 혁명의 광풍에 몰아넣었던 정치운동은 인류 역사에서도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백 교수는 한국 학계에서는 선구적으로 이에 주목하여 다른 학자들과 함께 문혁을 연구했다. <중국 노동자의 기억의 정치: 문화대혁명 시기의 기억을 중심으로>(폴리테이아 펴냄),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살림 펴냄), <중국 문화대혁명과 정치의 아포리아>(그린비 펴냄)는 그 결과물이다. 이 중 세 번째 책은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아 대만에서 중국어로 번역 출판되었다.
참고로 문혁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백 교수의 <문화대혁명: 중국 현대사의 트라우마>을 읽어볼 것을 권한다. 100쪽이 안 되는 짧은 문고판 책이지만 문혁에 대해 알아야 할 내용이 대부분 다 들어 있다. 만약 문혁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을 듣고 싶은 독자라면 천이난의 <문화대혁명 또 다른 기억: 어느 조반파 노동자의 문혁 10년>(그린비 펴냄)을 권한다. 책은 조금 두껍지만 내용도 충실하고 번역도 훌륭하다.
문혁이 이처럼 중요한데 내가 3부작에서 이를 다루지 않은 것은 일차적으로 책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와 관련된 기술적인(technical) 이유 때문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은 말 그대로 '덩샤오핑 시대'에 벌어졌던 각종 정치현상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연구의 초점을 유지하려는 것이 첫째 이유고, 이 책이 '옛날을 회상하는 신파조 영화'로 전락하지 않도록, 다시 말해 이야기에 긴장감을 불어넣으려는 것이 둘째 이유다. 대신 마오쩌둥 시기에 있었던 사건이나 내용 중에서 개혁기 중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예를 들어, 1980년에 추진된 공산당의 당내 민주 개혁을 설명하기 위해 공산당사에서 '민주 집중제'(民主集中制)가 언제 등장하여 어떤 굴곡을 겪으면서 발전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핵심 기구인 정치국, 정치국 상무위원회, 서기처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이런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공산당 12차 당대회(1982년)와 13차 당대회(1987년)에 있었던 공산당 개혁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톈안먼 시위(1976년), 베이징의 봄(1978-1981년), 학생운동(1986-1987년), 톈안먼 민주화 운동(1989년)을 주도했던 학생과 노동자들의 사상적 뿌리를 이해하기 위해 서구 사상의 유입과 확산에 대해서도 간단히 언급했다. 마오쩌둥 시기의 민간사상(이단사상)에 대해서는 미국학자들도 연구했지만, 첸리췬(錢理群) 교수가 훌륭한 연구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래서 나도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첸 교수의 연구를 많이 참고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망각을 거부하라: 1957년학 연구 기록>(길정행·신동순·안영은 옮김, 그린비 펴냄), <모택동 시대와 포스트 모택동 시대 1949-2009>(상·하)(연광석 옮김, 한울 펴냄), <내 정신의 자서전: 나에게 묻는다, 지식인이란 무엇인가>(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펴냄)를 읽을 수 있다.

▲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1, 2, 3권(조영남 지음, 민음사 펴냄) ⓒ프레시안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성' 인식 문제
그런데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이 문혁을 깊이 있게 다루지 않은 것은 역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학술 용어로 말하면 '역사의 연속성과 단절성'의 인식 문제와 관련이 있다. 이는 곧 역사의 시기 구분 문제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말해, 개혁기의 중국을 마오쩌둥 시기와의 연속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할 것인지, 아니면 개혁기의 특수성을 강조하여 단절성에 초점을 맞추어 이해할 것인지의 문제다. 나는 뒤의 관점을 선택했다. 그것이 개혁기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책에서는 이런 관점이 필요하다. 물론 역사의 연속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한 개인의 삶도 그렇고 한 사회의 변화도 그렇고, 현재는 과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이후 중국 현대사는 크게 세 시대로 나눌 수 있다. 마오쩌둥 시대(1949-1976년), 덩샤오핑 시대(1977-1993년),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1994-2012년)가 바로 그것이다. 각 시대는 직면한 과제, 통치 집단의 성격, 추진한 정책이 다르기 때문에 각각 별도의 시대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논의가 필요하다. 장쩌민 시기(1994-2002년)와 후진타오 시기(2002-2012년)를 하나로 묶어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지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두 시기가 직면한 과제(뒤에서 설명), 통치 집단의 성격(기술관료), 추진한 정책(개혁 개방의 확대)이 유사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두 시기는 덩샤오핑 시대의 연장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나는 이를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라고 부른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사회주의 건설'이 중심 과제였다. 공산당 일당제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체제와 생산수단의 국유화(집단화), 계획경제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체제를 수립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주도한 마오쩌둥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세대'는 혁명적인 방식과 정책을 통해 이런 과제를 달성하려고 시도했다. 반우파 투쟁(1957년), 대약진 운동(1958-1960년), 문화대혁명(1966-1976년) 등의 중요한 사건은 그런 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이런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끝났다.
덩샤오핑 시대와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이와 다르다. 1권 '개혁과 개방'에서 언급했듯이, 덩 시대에 중국이 직면한 과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민생 문제의 해결과 경제 발전이다. 둘째는 역사 청산과 사회 통합이다. 셋째는 권력 분배와 정치 회복이다.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정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하는지를 놓고 덩샤오핑 세력과 화궈펑 세력 간에 권력투쟁이 벌어졌고, 결국 덩 세력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런데 덩 세력은 '혁명원로'가 주축이 된 혁명세대로서, 통치 집단의 성격 면에서는 마오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 정책은 마오 시대와 완전히 달랐다. 그것이 바로 시장화, 사유화, 개방화, 분권화를 핵심 내용으로 하는 개혁 개방이다. 이후 덩 세력은 다시 덩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후야오방과 자오쯔양)와 천윈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파(혁명원로 대부분)로 분화되어 치열하게 경쟁했다.
반면 1994년 장쩌민이 권력을 공고히 한 후 시작된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는 다른 과제에 직면했다. 첫째는 시장제도의 전면적인 도입과 대외 개방의 확대다. 1992년 공산당 14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 시장경제론'이 당론으로 확정되면서 시장제도가 전면적으로 도입되었다. 동시에 국유기업의 개혁, 금융기구의 정비, 국가 계획부서의 폐지와 정비, 유통체제의 개혁 등 개혁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1995년에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의 가입을 목표로 하는 대외 개방도 더욱 확대되었다.
둘째는 사회문제의 해결이다. 이는 첫 번째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 문제로, 노동자의 지위 저하와 실업, 삼농(三農: 농업·농민·농촌) 문제의 심화와 대규모 이농민(농민공)의 발생, 연해지역과 내륙지역 간 지역격차의 확대, 계층 간 빈부격차의 확대(소위 양극화 현상), 부패의 전면화가 바로 그것이다. 장쩌민 체제와 후진타오 체제는 경제발전과 함께 이런 사회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고, 실제로 중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셋째는 미국 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응하는 문제다. 19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미·소 양극체제가 붕괴되고 미국 주도의 패권체제가 수립되었다. 그 결과 중국이 소련을 대신하여 미국의 주된 견제 대상이 되었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시작된 서방국가의 중국 제재에 이어, 1990년대 초에는 중국위협론이 등장하여 중국을 위협세력으로 규정했다. 또한 냉전체제의 해체와 함께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이에 대응해야만 했다. 1987년 시작된 대만의 민주화와 독립 경향의 강화, 1997년 반환된 홍콩의 분리 움직임도 거센 도전이었다.
넷째는 통치이념의 정비다. 국내적으로는 톈안먼 사건과 빈부격차의 확대, 국제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사회주의 이념은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사회주의 이념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럴 경우 공산당 일당독재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산당은 사회주의를 혁명이념에서 ‘발전이념’으로 수정하여 공산당 일당체제를 정당화했다. 또한 공산당 주도의 경제발전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족주의(중국식으로는 애국주의)와 유가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했다. 이런 통치이념의 정비 과정에서 공산당과 지식인 간에, 또한 지식인 사회 내의 다양한 집단 간에 격렬한 사상논쟁이 전개되었다.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를 이끌었던 통치 집단은 기술관료(technocrats) 출신의 지도자로 구성되었다. 이 점에서 이 시대는 마오쩌둥 시대나 덩샤오핑 시대와 확연히 구분된다. 이들은 혁명간부 출신의 혁명세대 지도자와 달리 대학에서 이공계를 전공한 후에 전문기술직에 오랫동안 근무하면서 경제발전과 국가건설에 필요한 전문성을 갖추었고, 실무 경험도 쌓을 수 있었다. 이들이 1990년대에 중국이 당면한 과제, 특히 1997년 아시아 경제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그 결과 중국이 세계 강대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의 내용
마지막으로 백 교수가 제기했던 둘째(개혁 개방의 정책에 대한 비판적 접근 부족), 셋째(노동 영역의 연구 부족), 넷째(민간사상의 분석 부족) 문제에 대해 해명하겠다. 백 교수의 이런 지적은 모두 타당하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에서는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책이 이런 문제를 다루지 않은 것은 이런 문제가 중요하지 않아서, 혹은 1980년대에는 이런 문제가 나타나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현재 준비 중인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이런 문제를 집중적으로 분석하기 위해 일부러 다루지 않았던 것이다. 백 교수의 말처럼 이런 문제의 기원은 1980년대(덩샤오핑 시대)지만, 이런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1990년대(덩샤오핑 이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사실 백 교수는 내가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을 준비 중인 사실을 몰랐다. 그래서 새 책에 담길 내용도 당연히 몰랐던 것이다. 그렇다고 백 교수의 지적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내 입장에서는 매우 고맙다.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이 무엇을 눈여겨보아야 하는지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은 매우 어려운 사회문제에 직면했다. 예를 들어, 부패 문제는 1980년대에도 국민의 불만 사항이었지만, 그것이 전 사회로 확산되어 공산당 통치의 정당성에 위협이 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였다. 그래서 이를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다루려는 것이다. 부패 문제를 깊이 연구한 페이(Minxin Pei) 교수에 따르면, 1980년대 중국은 비록 공산당 일당제의 권위주의 체제를 유지했지만 경제발전에 매진하여 국민의 삶을 향상시킨 업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그는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이 한국의 박정희 정부나 대만의 장제스 정부와 비슷한 발전국가(developmental state) 혹은 개발독재의 성격을 띠었다고 본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 중국은 국가가 국민의 재산을 강탈하고 국민을 착취하는 약탈국가(predatory state)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석유와 천연자원을 독점하여 막대한 통치자금을 확보하고, 그렇게 확보한 통치자금으로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장기 독재체제를 유지했던 아프리카의 많은 자원부국이 바로 약탈국가의 전형인데, 중국도 그렇게 변질되었다는 것이다. 농촌에서 벌어지는 당정간부의 무자비한 농민 수탈, 도시 지역에서 벌어지는 강제 철거와 개발사업, 정경유착을 통한 대규모 밀수와 막대한 국유재산의 유실 등이 대표적인 사례라는 것이다. 이것이 2000년대에 들어서는 정치권력과 자본이 결탁하여 부당하게 부를 축적하는 '정실 자본주의'(crony capitalism)로 발전했다고 페이 교수는 주장한다(Minxin Pei, China’s Trapped Transition (Harvard University Press, 2006); Pei, China’s Crony Capitalism (Harvard University Press, 2016)). 페이 교수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는 없지만, 그의 주장은 1990년대에 들어 부패 문제가 매우 심각해졌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노동문제도 마찬가지이다. 1990년대에 들어 국유기업 개혁이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노동자의 지위가 급속히 악화되었고, 수천만 명에 달하는 실업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더해 그동안 노동자의 주거와 복지를 담당했던 단위 체제가 해체되면서 노동문제는 경제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확대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백 교수가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상세하게 잘 분석했다(백승욱, <중국의 노동자와 노동 정책: ‘단위 체제’의 해체>(문학과지성사 펴냄)). 이런 변화를 배경으로 노동자의 파업과 시위가 1990년대 중후반에 들어 급속히 확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노동문제를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검토하는 것이 타당하다.
농민공 문제도 비슷하다. 농민의 도시 진출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나타난 시점은 1989년 무렵이지만, 그 규모가 급속히 확대되고, 이들에 대한 착취가 심해지면서 사회문제로 부각된 때는 1990년대 중반 이후였다. 특히 도시민과 농민을 법적으로 구분하고, 도시에 진출한 농민을 2등 국민으로 간주하여 합법적으로 착취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방조했던 호구제도(戶口制度)가 개혁되지 않으면서 농민공 착취는 계속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서울디지털대학교의 이민자 교수가 상세하게 잘 분석했다(<중국 호구제도와 인구이동>(폴리테이아 펴냄), <중국 농민공과 국가-사회관계>(나남 펴냄)). 그래서 이 문제도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다루려고 한다.
그밖에 민간사상에 관한 논의도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에서 자세히 검토할 예정이다. 덩샤오핑 시대의 사상 논쟁은 비교적 단순했다. 즉 논쟁의 대립 전선이 주로 공산당(국가)과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지식인 간에 형성되었다. 이런 지식인들은 1919년 5·4운동 이래 형성된 계몽주의의 전통을 이어받아 중국 전통과 봉건제도를 비판하고 서구의 사상과 문물을 도입하자고, 특히 민주화와 근대화를 동시에 추진하자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공산당은 '사항(四項) 기본원칙', 즉 공산당 영도,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사회주의의 길 고수로 대응했다. 1989년 톈안먼 민주화 시위와 정부의 유혈 진압은 이들 간의 충돌이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결과였다.
반면 덩샤오핑 이후의 시대에서는 공산당과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 간의 대립 전선뿐 아니라, 자유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과 보수주의를 옹호하는 지식인 간의 대립 전선도 형성되었다. 말 그대로 '민간사상'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는 1980년대의 계몽주의 운동에 문제가 많았다는 반성을 기반으로, 1990년대 들어 지식인 사회가 다양한 성향의 집단으로 분화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이다. 여기서 보수주의는 국수주의의 성격을 띠는 민족주의, 마오쩌둥 사상을 옹호하는 구좌파, 포스트모더니즘에 기반한 신좌파, 국가(특히 중앙 정부)의 강화를 주장하는 국가주의(statism), 유가사상의 부흥을 주장하는 문화 보수주의를 가리킨다.
중국을 제대로 공부하자
지금 우리 사회는 매우 어수선하다. 정치 리더십이 실종된 지 오래되었고, 새로 등장할 정치 지도자가 우리 사회를 바른 길로 이끌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도 없다. 이는 특정 지도자나 정치집단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다. 바른 길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이를 힘 있게 집행할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지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중국과 일본 등 전 세계가 혼란에 빠진 것 같다. 그래서 혹자는 현재를 '초불확실성(hyper-uncertainty)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공부해야 한다.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가 발전하며, 주변이 평화로울 때에는 공부가 절실하지 않다. 큰 고민 없이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계속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이 혼란스럽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에는 공부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세계의 변화에 대해 공부해야 한다. 그래야 가슴과 머리를 함께 쓰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그래야 초불확실성의 시대에 단순한 생존을 넘어 새로운 발전과 도약을 도모할 수 있다.
중국 공부도 마찬가지다. 우리 사회에서 중국만큼 실제로는 잘 모르면서도 '잘 안다'고 착각하는 국가도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간간이 배운 중국사에 관한 단편적인 지식을 가지고 중국 지식을 쌓았다고 생각한다. 중국에 여행간 것을 가지고 중국의 실상을 직접 체험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누적 인원으로 몇 십만 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단기 혹은 중장기로 중국에서 유학하면서 '중국을 안다'는 생각이 우리 사회에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는 익숙한 것과 아는 것을 혼동한 착각일 뿐이다. 중국에서 10년을 산 사람은 중국에 익숙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중국을 잘 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마치 한국에서 평생을 살았지만 한국의 정치와 경제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는 많은 수의 한국 사람처럼 말이다. 낮은 수준에서는 익숙한 것이 곧 아는 것이지만, 높은 수준에서는 양자가 완전히 별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처럼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완전히 다른 정치체제를 유지하면서 매우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국가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제라도 우리는 중국을 제대로 공부해야 한다. 우리에게 중국은 더 이상 아무렇게나 이해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학자는 공부에 필요한 지식을 제공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그것이 학자가 존재하는 이유다. <덩샤오핑 시대의 중국> 3부작을 집필할 때도 그랬고, 지금 <덩샤오핑 이후의 중국> 2부작을 준비하면서도 나는 학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지를 반성한다. 중국을 공부하면서 가졌던 초심(初心)을 여전히 갖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부족하지만 지금까지는 초심을 잃지 않고 학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려고 발버둥 치면서 노력해온 것 같다. 내 책은 이런 반성과 발버둥의 산물이다. 백 교수가 내 책을 평가하면서 "피와 땀이 구석구석 배어 있는 성과물"이라고 말했는데, 정확한 지적이다. 내 책이 우리 사회가 중국을 제대로 공부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날에는 옛 친구들과 함께 뜨거운 충칭 훠궈(火鍋) 국물에 술 한 잔 하면서 중국 공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