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금수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 [438호] 승인 2016.02.18 02:22:33 |
<해리 포터>를 쓴 조앤 K. 롤링이 ‘중국 무협지 덕후’라는 데 돈을 걸어도 좋다. 이 소설은 세상 사람을 마법사와 머글(일반인)로 나눴는데 이는 강호인(무림인)과 백성을 구분한 무협지의 설정을 빼닮았다. 볼드모트는 흑도의 절대 고수이고 덤블도어는 백도의 전설이다. 퀴디치 경기 장면은 이른바 4대 문파의 고수들이 기예를 겨루는 비무 대회를 떠올리게 한다. 기화요초·괴수·귀식대법(오랫동안 숨을 멈출 수 있는 기술)·기문진식 등도 이름만 서양식으로 바뀌어 소설 전편에 포진해 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부모를 살해한 원수를 갚으려고 간난신고를 겪는 그 뼈대에 눈길이 간다. 이는 예전의 서양 판타지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줄거리다.
작가는 완성한 소설을 들고 여러 출판사 문을 두드렸다가 퇴짜를 맞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편집자들 눈에는 그런 플롯이 거슬렸는지 모른다. 부모 원수를 처단하고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는다는 것은 전형적인 유교의 가치관, 수신제가치국평천하다. 조상신을 믿는 나라에서는 누구나 감정이입할 수 있는 마약 같은 주제지만 서양에서라면 좀 다르다. 기독교를 믿는 이들에게 진정한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뿐이다. 부모는 신의 어린 자식을 맡아 기르는 대리인 자격이다. 그러니 부모 죽인 원수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절대 선(신)을 위협하는 악의 무리를 무찌르려고 먼 길을 떠나는 게(<반지의 제왕>에서처럼) 더 성미에 맞는다. 어둠의 편에 붙은 자와는, 설령 그가 부모라고 할지라도 맞서 싸워야 한다(영화 <스타워즈>에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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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원 그림 |
산업화에 뒤처진 아시아 국가들이 열심히 자신들을 따라 배우는 걸 바라보며 서양인들은 감탄하면서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어하던 부분이 있었다. 뼛속까지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되던 사람들이 보여주던 뜻밖의 태도, 바로 자식 문제였다. 권력자건 기업인이건 할 것 없이 피붙이에게 자기가 가진 모든 걸 물려주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서양인들은 어처구니없어했다. 성직자마저 교회를 자식에게 넘기지 못해 안달인 걸 보고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태도였다. 아닌 게 아니라 유일신을 모시는 교회 목사가 성직을 대물림하려고 덤비는 것은 신성모독에 가까운 짓이다. 그런데 출판을 거절했던 편집자들이 죽고 싶어 할 만큼 <해리 포터>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팔려나갔다는 사실은 서양의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준다. 이제 그곳에서도 가족이 신의 자리를 위협하게 된 걸까.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삼성의 유력 계열사 중 한 곳에 다니는 고졸 여사원들과 꽤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여고를 졸업하고 곧바로 삼성에 입사한, 학교 다닐 때는 전교 1~2등을 다투던 우수한 인재들이었다. 당연히 최고 기업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웬걸, 그들은 듣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오지게 회사 욕을 해댔다. 삼성 제품은 꿈에도 안 산다, 그만큼 회사에 정나미가 떨어졌다, 월급 받으러 다니지 다른 미련은 없다, 회사 상사 중에 제정신인 사람이 없다, 일이 많아서 야근하고 일요일에도 근무하면 불만이 없겠는데 그게 아니다, 윗사람 눈치 보느라 그냥 일하는 ‘코스프레’하는 거다, 그런 걸 강요하는 상사가 널렸는데 그런 사람들과는 눈도 마주치기 싫다. 본래 삼성에 유감이 많으니 좀 보탰겠거니 생각할 분도 있겠지만 맹세코 들은 그대로다. 내가 기자라는 걸 알면서도 거침이 없어서 더욱 놀랐다.
그 친구들 얘기를 듣다 보니 더럭 겁이 났다. 오랫동안 삼성을 잊고 지냈다는 생각을 했다. 1968년생, 원숭이띠, 3대 후손인 이재용씨가 물려받은 삼성은 과연 안녕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병철 회장의 유전자 4분의 1, 이건희 회장의 유전자 2분의 1을 이어받았다는 것이 대한민국 수출의 25%를 감당하는 기업의 총수를 맡는 가장 큰 이유가 되어도 좋은지 생각했다. 내친김에 이재용씨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봤더니 ‘현장 중심, 실용주의 노선’을 걷는다는데 어떻게 하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혼자 캐리어를 끌고 공항을 들락날락하는 걸 보고 웬 누리꾼이 ‘홀로 위풍당당, 멋진 재용님’이라고 트위터에 올렸다는 기사가 잔뜩 떴던데 눈 뜨고 보기에 심히 민망했다. 기사 상태를 보면 그는 아버지 못지않은 은둔형임에 틀림없다. 그는 소박하지도 검소하지도 않고 머글은 더구나 아니다.
좋은 현상인지 모르겠으되 권좌나 기업을 자식에게 대물림하는 데 대한 서양의 거부감은 많이 누그러진 듯하다. 마침 이 문제를 <이코노미스트>에서도 지난해 4월 스페셜 리포트로 다룬 적이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 전 세계적으로, 잘나가는 집안들이 힘깨나 쓰는 중이다. 최근 미국 대통령 후보를 뽑는 예비선거 9차례 가운데 클린턴 가문과 부시 가문 사람이 포함된 경우가 7회나 되었다. 한국·일본·필리핀·방글라데시의 최고 권력자는 과거 최고 권력자의 핏줄이다. ‘탄’자가 들어가는 중앙아시아 국가원수 거의 모두가 정치인 가족 출신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는 간디와 부토라는 낯익은 이름을 물려받은 이들이 권력의 정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중이다. 젊어진 캐나다의 트뤼도와 함께.
중국의 태자당 명단은 갈수록 길어지는 가운데 그 정점에 바로 시진핑 주석이 버티고 있다. 영국 의회의 650명 의원 가운데 57명이 전·현직 국회의원과 같은 성을 쓴다.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세골렌 루아얄과 27년간 동거하면서 네 자녀를 낳은 사이다. 관계가 복잡하긴 하지만, 이 집안도 프랑스 정계에서 힘깨나 쓴다. 역시 가족이 운영하는 <뉴욕 타임스>가 열심히 계산한 바에 따르면 보통 베이비부머 남성에 비해 주지사 아들이 주지사가 될 확률은 6000배, 상원 의원 아들이 상원 의원이 될 확률은 8500배나 높다.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가족 운영의 기업들’
패밀리 기업 역시 현대의 귀족이 되어간다. 패밀리 기업이란 지분 이동과 경영에 가족이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회사를 말한다. 쉽게 말해 회장님을 가족이 뽑는 기업이다. 2대, 3대에 걸쳐 소유권과 경영권을 이전했거나 그럴 계획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포드나 월마트, 우리나라의 재벌과 언론 기업 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고전경제학자와 사회학자들은 이 패밀리 기업이 자본주의가 성숙하면 곧 도태하리라고 예상했다. 자본시장이 개방되고 커지면 익명의 다양한 주주가 소유하고 직업적인 경영자가 운영하는 ‘공개 기업(public company:소유권을 주식 매매 등을 통해 누구나 사고팔 수 있는 기업)’이 대세를 이루리라고 봤다. 19세기 말과 20세기에 들어와 성공적인 초대형 공개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경제학자들의 이런 예측은 맞아떨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뉴욕 타임스>나 <월스트리트 저널>을 읽고, 삼성이나 LG 휴대전화를 쓰며, 포드나 피아트 자동차를 타고, 월마트에서 저녁거리를 사온다. 종편에 넋이 빠져 있을 수도 있다. 모두가 가족이 운영하는 기업이 제공하는 서비스다. 보스턴 컨설팅그룹이 계산한 바에 따르면 10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미국 기업의 33%, 프랑스와 독일 기업의 40%가 패밀리 기업이다. 아시아와 브라질에서는 그 비율이 50%가 넘는다.
평등한 국가라고 널리 알려진 스웨덴에서조차 빅 패밀리인 발렌베리 가족이 전체 주식시장에서 절반가량의 가치를 지니는(에릭손을 포함) 기업군을 거느리고 있다. 이탈리아의 아그넬리 가족 역시 주식시장의 10.4%를 차지했다. GDP 대비 홍콩에서는 85%, 말레이시아에서는 76%, 싱가포르에서는 48%, 필리핀에서는 47%가 15대 가문의 소유이다.
미국·일본·중국에는 ‘3대째 바보 아닌 놈 없다’ ‘재물은 3대까지 살아남지 못한다’ 등 각기 다른 버전으로 ‘부는 영원히 상속되기 힘들다’는 의미의 속담이 있지만, 패밀리 기업의 위세는 더욱 당당해져간다. 패밀리 기업이 재계를 지배하는 아시아가 점점 세계의 경제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가족의 영향력은 커져간다.
패밀리 기업의 강점은 이상적인 모델로 보였던 공개 기업이 가진 약점에서 비롯된다. 공개 기업의 월급쟁이 사장은 여간한 열정이 있지 않고서는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기 힘들다. 분기별 단기 수치에 연연해할 수밖에 없다. 2000년 평균 10년이었던 공개 기업 최고경영자의 임기는 현재 8년으로 줄었고 앞으로 더욱 짧아질 추세이다. 오너와 프로페셔널 경영자의 이해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반면 패밀리 기업의 경영자는 당연하게 기업이 몇 대째 계속되기를 바란다. 단기 이익을 바라는 투자자의 이해에 반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혈연이라는 놀랍도록 강인하고 유연한 결속력을 바탕으로 가문의 이름이 가지는 인적 유대관계를 활용해 장기 계획을 세워나간다. 패밀리 기업은 경기가 좋을 때 적게 버는 대신 경기가 나쁠 때 타격을 덜 받는다. 아시아 부의 빠른 성장은 패밀리 기업이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을 지녔다는 걸 증명한다.
누구나 알다시피 패밀리 기업에는 어두운 면이 있다. 품질 혁신이나 신제품 개발보다 상속이 어렵다. 때가 되면 감정을 통제하기 어렵다. 미국의 소프 오페라나 한국의 막장 드라마 작가는 이들 덕분에 먹고산다. 상속 과정에서 패밀리 기업은 거의 예외 없이 위기를 맞는다. 반드시 학위를 소지해야 하고, 5년 이상 가족과 무관한 회사에서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등 그럴듯한 ‘정실 채용 기준’이 있는 집안도 있지만 대개는 대책이 없다. 그래서 컨설팅 회사는 상속이 안정되는 5년 정도까지는 투자를 삼가라고 조언한다.
세습 왕의 굴레에서 벗어나려고 전쟁까지 치른 나라답게 미국은 소수 가문에 돈과 힘이 집중되는 걸 막으려는 장치를 마련했다. 작은 지분으로 큰 덩어리를 지배할 수 있는 순환출자나 피라미드식 경영을 규제하는 법안을 이미 1930년대에 마련했다. 1960년대에 영국과 이스라엘이 그 뒤를 따랐다. 그 때문에 앵글로색슨 지역에서는 비교적 가족 기업의 지배율이 떨어진다.
앵글로색슨 지역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가족 지배의 폐해가 드러나리라고 점찍은 나라는 어딜까. 우리야 무감각하지만 바로 대한민국이다. 20개 가족(재벌)이 주식시장 가치의 60%를 움켜쥐고 있고 그 정점에 삼성이 있다. 40개 재벌 중 17개에서 상속 분쟁이 터졌다. 주변에 ‘가족 언론’이란 치어리더가 있다. 흙수저의 비명이 클 수밖에 없다. 적어도 이재용의 삼성에는 메리엇이나 이케아처럼 직원이 틈만 나면 고객을 붙들고 회사 자랑을 하는 진짜 가족 같은 문화는 없다. 그나마 멀리 보는 재주만이라도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