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통일 문제

[국경을 걷다, 2015] 압록강 철교 가보니,

일취월장7 2015. 9. 24. 12:23

 

 
압록강 철교 가보니, 레미콘 트럭이 줄줄이…
[국경을 걷다, 2015] <1> 대북 제제에도 신의주는 건설 중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의 북중 접경지역 답사기 '국경을 걷다 2015' 연재를 시작합니다. 황 부원장은 지난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을 주제로 접경지역의 모습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3년 뒤 황 부원장은 당시와 같은 경로로 지난 8월 15일부터 7박 8일 간 일정으로 다시 한 번 접경 지역 답사에 나섰습니다. 다시 찾아간 북·중 접경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번 연재를 통해 3년 동안 변화된 북한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한 북·중관계 변화 양상을 짚어보려 합니다.

3년 만에 다시 압록강 하류에서 두만강 끝자락까지 횡단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적잖은 비용을 들여 7박 8일이란 짧지 않은 시간에 척박한 곳만을 찾아다니는 것이 사실 힘들었다. 그러나 비록 강 건너이지만 북한의 변화를 직접 보고 느끼고 싶었다. 문헌과 언론을 통해 직·간접으로 입력된 지식과 정보를 검증하는 차원에서 3년 전 갔던 길을 그대로 다시 밟았다.

8월 15일 인천공항을 떠나 랴오닝(遼寧)성의 다롄(大連) 저우수이쯔국제공항(周水子国际机场)에 도착했다. 3년 전보다 많은 사람들이 입국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롄 공항은 중국 변방에 위치한 공항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국제적인' 냄새도 풍겼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의 경제를 실감할 수 있었다. 1980년대 개혁개방 이래 중국 동북부 지방에서 가장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룬 곳이 다롄이고, 중국 3대 조선업 기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560만 명의 랴오닝성 인구 중 조선족은 2만 명이라 한다. 주말이라 다롄시는 거리마다 공원마다 휴일을 즐기는 중국인들로 넘쳐났다.

▲ 다롄시 싱하이광장 ⓒ황재옥


관광지를 개발하고, 동북 3성의 산업을 발전시키면서 많은 도로망이 연결되고 있었다. 단둥(丹東)으로 가는 길에 3년 전에 차창 우측으로 보였던 어촌과 바다가 보이지 않았다. 3년전 갔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다롄에서 가이드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소비한 탓에 어둑해진 도로를 달리다 황금평에 다다랐다.

황금평 특구는 중국의 '일교양도'(一橋兩島, 일교는 신(新)압록강대교를 지칭하고 양도는 황금평과 위화도를 지칭)개발의 일환으로 2011년 말 개발이 시작됐다. 그런데 황금평 특구는 2013년 12월 처형된 중국통 장성택이 추진했었다. 그래서 2013년 12월 이후의 특구 개발 상황과 북·중 경제 관계가 궁금했다. 황금평 특구는 북·중 경제협력의 단면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으며, 최근 북·중관계의 특성이 잘 나타나는 곳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가보니 3년 전에는 없던 육중한 철문이 생겼다. 철조망 넘어 북쪽으로는 불빛을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칠흑같이 어두웠다. 3년 전 북한과 중국 경계에 높이 세워진 입간판-"중조목린우호 공촉경제번영, 군지제심협력 동건화해변경"(中朝睦邻友好 共促经济繁荣, 军地齐心协力 同建和谐边境), 이는 "중국과 조선이 우호 관계를 두텁게 하여, 경제번영을 함께 촉진하자. 군대와 지방이 마음을 모으고 협력하여, 사이좋은 국경지대를 함께 건설하자"는 뜻이다-은 철문과 어둠 때문에 지금도 세워져 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 2012년 당시 황금평 특구에 세워졌던 입간판 ⓒ황재옥


굳게 닫힌 철문과 녹슨 컨테이너 박스는 그동안의 황금평 특구 개발이 소강상태였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북쪽 지역에 중국의 투자로 6층 건물이 올라가고 있다는 가이드의 설명은 향후 북·중 관계의 변화를 말해주는 듯 했다. 소강상태의 북중 경협이 꿈틀거리기라도 하듯, 북측 지역에 중국의 투자로 건물이 신축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은 북·중 접경지역을 방문해 동북 3성 지역의 경제발전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 지역의 북·중 경협이 한층 활성화될 것이라는 기대감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단둥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신압록강대교가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북측 구간이 완성되지 않은 관계로 중국 측만 불이 켜져 있다고 했다. 북한의 경제사정으로 완공되지 못한 신압록강대교는 아직까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압록강 단교를 걸었다. 1911년에 완공된 다리는 6·25전쟁 때 파괴되어 중국측 절반만 남아 있다. 우리는 단교에서 1943년에 개통된 압록강철교를 바라봤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다리 위에는 북한으로 들어가는 레미콘 차들이 10여 대나 줄지어 있었다. 신의주로 건너가는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3년 전에는 컨테이너 화물트럭들이 줄을 지어 북한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레미콘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 줄지어 북한으로 들어가는 레미콘 차 ⓒ황재옥


아니나 다를까 강 건너 신의주 쪽에는 3년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광경들이 눈에 들어 왔다. 저 멀리 제법 높은 건물이 공사 중이었고, 놀이기구 양옆으로 하늘색 지붕의 새 건물이 들어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모란여행사'라고 쓴 연두색 관광버스가 하루 일정으로 신의주 관광을 하려는 관광객을 태우고 압록강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 위에는 2012년 모습. 3년이 지난 2015년 관람차 주위에 건물이 들어섰고 그 건물 옆으로 또다른 놀이기구가 공사중이다. 뒷편으로 크레인을 이용해 고층 건물을 건설하는 모습도 보인다. ⓒ황재옥


 


▲ 신의주 관광을 하기 위해 들어가는 연두색 관광버스 ⓒ황재옥


3년 전 강 건너 신의주 부두 쪽에 서있던 "선군조선의 태양 김정은 동지 만세"라고 붉은 글씨로 쓰여진 김정은 찬양 입간판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3년 전에는 압록강·두만강 건너 심심치 않게 서 있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주제로 한 우상화 대형 입간판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3년 만에 달라진 북한 최변방의 모습, 이는 분명 북한 변화의 한 단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은 만세"에서 "산림애호"…달라지는 북한?

[국경을 걷다, 2015] <2> 압록강 특색을 지닌 시장 사회주의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의 북중 접경지역 답사기 '국경을 걷다 2015'를 연재합니다. 황 부원장은 지난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을 주제로 접경지역의 모습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3년 뒤 황 부원장은 당시와 같은 경로로 지난 8월 15일부터 7박 8일 간 일정으로 다시 한 번 접경 지역 답사에 나섰습니다. 다시 찾아간 북·중 접경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번 연재를 통해 3년 동안 변화된 북한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한 북·중관계 변화 양상을 짚어보려 합니다. 


압록강 주변을 둘러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압록강 단교 위를 걷거나, 수풍댐까지 가는 배나 보트를 타고 강 주변의 북한 산야와 마을, 그리고 북한 주민의 일상을 보는 것이다. 수풍댐까지 올라가는 관광상품이 그새 더 다양해졌다. 수요가 늘어나니 자연스레 공급도 많아진 것 같다.

3년 전에는 압록강 단교 근처에서 한 번, 마오안잉(毛岸英) 동상이 있는 칭수이(淸水)에서 한 번, 이렇게 두 번 보트를 타고 압록강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오안잉 동상이 있는 곳에서 한 번만 보트를 타고 강 주변을 보기로 했다. 수풍댐 근처 접근을 중국 당국이 막는 바람에 가까이서 수풍댐을 볼 수는 없었다. 날이 갈수록 북·중 접경지역에서의 중국의 통제와 감시가 심해지는 것 같다.

어제는 날씨가 흐려 안개 낀 신의주를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나 다행히 오늘은 날씨가 쾌청해 강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까지 읽을 수 있었다. 유람선에는 우리 일행을 빼곤 전부 중국인들이었다. 가족단위로 관광선을 타고 유람을 하러 온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사람들이 북한에 관심을 갖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만, 분명한 것은 북한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과 우리의 마음은 분명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시동이 걸려 배가 출발하자 나는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호기심과 연민, 착잡함 등으로 가슴은 먹먹하고 눈은 바빠졌다.

날씨가 맑아서인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온 북한 남성들이 보인다. 작은 모터로 움직이는 배였다. 기름으로 움직이는 모터 달린 배는 3년 전에는 볼 수 없었다. 압록강에 떠 있는 작은 배 서너 척은 고기를 잡거나,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배였다. 우리가 타고 있는 유람선에 모자를 쓴 건장한 북한 남성이 접근해 왔다. 관광객을 상대로 북한 술과 담배를 팔고 있었다. 개성 소주는 50위안, 우리 돈으로 만원 정도 했고, 산삼술은 100위안이었다. 압록강에서 북한사람이 장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 압록강변에서 작은 배 한척을 이용해 장사를 하고 있는 북한 상인(위). 아래는 북한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개성 소주 ⓒ황재옥


저 멀리 북한초소가 버젓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유람선은 장사하도록 강 중앙에 정지해 주었고, 북한 상인은 장사를 한다. '압록강 특색을 지닌 시장 사회주의'가 바로 눈앞에서 펼쳐졌다. 아마 북한 상인과 관광선 운전자, 북한 군인이 4:3:3 정도의 배분으로 이익을 나누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장 사회주의'의 물을 먹은 북한 상인의 때깔이 좋아 보였다. 중국인들도 북한 상품이 신기한지 담배와 술을 샀다.

수풍댐 주변의 압록강변은 3년 전과 비교했을 때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북한 마을과 사람들도 변했다. 강가에 나와 있는 사람들의 표정과 눈에 들어오는 산과 들, 그리고 주민들의 일상에 변화가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가에 나와 있는 사람 수에 비해 그 옆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 수가 늘었다. 거의 대부분이 자전거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바람에 날아갈 듯한 회색 지붕은 파랑, 주황의 양철지붕으로 바뀌었다. 마을 전체의 지붕이 다 개량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개인 능력의 차이에 따라 집도 수리하고 사는 듯했다. 새롭게 페인트칠을 한 가옥들도 눈에 띄었다. 강가에 나와 있는 염소와 오리 수가 생각보다 많은 것도 놀라웠다.

▲ 지붕을 개량한 북측 가옥 ⓒ황재옥


한편, 이번 답사 내내 내 눈을 놀라게 한 것은 지난 답사 때에 비해 소를 비롯한 가축 개체 수가 부쩍 늘었다는 점이다. 1998년 압록강 건너 북측 지역에는 염소 한 마리, 소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그 당시 강가에는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떼 지어 나와 앉아 있었던지. 퀭하고 초점 없는 눈으로 강 건너를 응시하는 그들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웠던 기억이 났다. 지금은 강에서 고기를 잡거나 빨래를 하거나 물놀이를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강을 오르다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이 들어왔다. 현재 가동되는 것처럼 보이는 공장 건물이었다. 파랑과 주황으로 지붕과 벽을 새롭게 칠한 제법 규모가 큰 공장이 가동되고 있었다. 2개의 높다란 굴뚝에서는 연신 연기가 내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공장이 무엇을 만들어 내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공장 마당과 창고에는 석탄과 자재꾸러미가 쌓여 있었다. 동행한 가이드 설명으로는 북한 측 공장을 중국인이 인수하여 가동하고 있는 것이라 했다. 알록달록한 색깔만으로도 '회색빛 마을'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 중국인이 인수해 가동중인 공장 ⓒ황재옥


접경지역에서 중국과 북한을 구별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의 뙈기밭이다. 중국 측 산은 나무로 무성한데 반해 북한 측 산은 뙈기밭으로 모자이크 모양을 하고 있다. 현재에도 뙈기밭 경작지는 줄어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 이후 근 20여 년간 뙈기밭 경작의 노하우가 생겼는지 산 중턱까지 옥수수 같은 작물이 재배되고 있는 듯했다. 산꼭대기 뙈기밭까지 사람이 손길이 닿은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3년 전 수풍댐이 가까워지면서 북한 쪽 산야에서 볼 수 있었던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만세", "위대한 령도자 김정은 동지 만세"라는 구호를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산림애호"라는 구호가 나왔으며, 붉은 글씨는 흰 글씨로 바뀌었다.

▲ 산 중턱에 걸려있는 '산림애호' 구호 ⓒ황재옥


수풍댐에서 돌아오며, 북한 사회가 3년 동안 정지된 채로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2013년 3차 핵실험으로 인한 유엔의 대북제재, 소원한 북·중 관계, 그리고 경색된 남북관계 속에서도 북한 주민의 살림이 더 나빠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혹자는 북한 사회, 경제적 변화의 요인으로 1990년대 대기근을 꼽기도 한다. 이때 생겨난 '장마당(암시장) 세대'가 북한의 사회, 경제적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하는데, 새삼 실감 났다. 이들은 김일성의 사망과 1990년대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고난의 행군, 2009년 화폐 개혁과 현재 김정은 집권 등을 겪으면서 이념과 사상보다는 먹고사는 문제에 더 관심이 많은 세대이다. 물론, 장마당 세대를 젊은 세대에만 국한하지 않고 암시장 거래를 경험한 모든 북한 주민을 지칭하기도 한다.

3년 전 김정숙군에 위치한 장마당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신기해했다. 북한에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것도 옛말이 돼버렸다. 현재 북한에는 400개 정도의 장마당이 있다고 한다. 구글 위성사진으로 파악된 북한 내 장마당이 396개로, 2010년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사회주의 배급체제의 붕괴와 이에 따른 자본주의·시장의 경험이 장차 얼마나 북한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지 현재로썬 예측하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변방 지역에서 시작된 '시장화'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아닌가 싶다. 북한의 배급체제 붕괴는 더 이상 주민들에게 체제에 대한 헌신과 충성을 강요할 수 없게 됐고, 정권의 주민 통제가 어려워지면서 시장에 노출되는 주민들은 점점 많아질 것이다. 마을 중간중간에 양철지붕으로 개량된 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른 주민들보다 먼저 '시장화'를 경험하고 경제적 여유를 누리는 듯했다.

 

북한과 중국 사이, 철조망 세워진 이유는…

[국경을 걷다, 2015] 북한으로 들어가는 길 막은 중국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의 북-중 접경 지역 답사기 '국경을 걷다 2015'를 연재합니다. 황 부원장은 지난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에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을 주제로 접경 지역의 모습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3년 뒤 황 부원장은 당시와 같은 경로로 지난 8월 15일부터 7박 8일간 일정으로 다시 한 번 접경 지역 답사에 나섰습니다. 다시 찾아간 북-중 접경 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번 연재를 통해 3년 동안 변화된 북한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한 북-중 관계 변화 양상을 짚어보려 합니다.

국경을 걷다, 2015
 

① 압록강 철교 가보니, 레미콘 트럭이 줄줄이…
② "김정은 만세"에서 "산림애호"…달라지는 북한?


수풍댐의 위용을 가까이서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안(集安) 으로 향했다. 잘 닦여진 도로를 달리면서, 중국이 동북 3성의 인프라 투자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2009년 중국 정부는 지린(吉林)성 지역 발전 전략을 발표하면서 북-중 접경 지역의 개발을 본격화했다. 이후 북-중 접경 지역의 철도와 항만 등 인프라 투자가 지속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변방 구석구석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새 길이 열리고 있었다.

지안에서 고구려 유적을 답사한 후, 우리는 지안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 '묘향산'에서 점심을 먹었다. 북한 식당은 중국 식당에 비해 가격이 비싸 중국인들에게도 대중적인 식당은 아니라고 한다. 그들에게도 북한 음식을 먹고 공연을 보는 것은 특별한 날에나 가능해 보였다.

▲ 북한 식당 '묘향산' 입구(왼쪽). 식당 안에서 공연하는 직원들. ⓒ황재옥


이 식당에는 지안 바로 건너편 지역인 북한의 강계에서 온 젊은 여성들이 접대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색한 듯 미소 짓는 젊은 북한 여성의 표정에서 쑥스러움과 호기심을 읽을 수 있었다. 통역 없이 시원시원하게 같은 언어로 소통하니 식사 시간이 유난히 즐거웠다.

식사 후 우리는 북한의 만포(滿浦)로 통하는 철교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만포'란 지명은 압록강을 오가는 배들이 가득(滿) 몰리는 포구(浦口)라는 뜻에서 유래했다. 3년 전 나는 지안과 만포를 연결하는 약 200미터 되는 철로 위를 걸어 북-중 국경선이 그려진 앞까지 갔었다. 이번에도 그 같은 기대를 갖고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우리 일행은 외국인이란 신분 때문에 표 사는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출입조차 거절당한 것이다.

지안은 단둥(丹東)과 함께 한국 전쟁 때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이 북한에 들어간 의미 있는 지역이다. 단둥의 펑더화이(彭德懷, 당시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동상 밑에는 1950년 10월 19일에 중공군이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3년 전 봤던 지안과 만포를 잇는 철교 앞 비석에는 "1950년 10월 11일 중국인민지원군 선발대가 비밀리에 이곳(지안)을 통해 가장 먼저 조선에 들어갔다"고 적혀 있었다. 중공의 한국 전쟁 참전이 사전에 비밀리에 이뤄졌다는 것을 실토한 기록이 지안에서 만포로 건너가는 철교 시작점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는 그곳을 갈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입구에서 철교까지 길을 따라 세워놓은 벽면의 사진들과 설명문도 볼 수 없었다. 1950년 이래 북-중 간에 있었던 우호적인 주요 사건들, 그리고 3년 전까지 중국 지안시와 북한 만포시 사이에 관광 협력이 합의됐다는 점 등을 설명해 놓은 벽면이 통째로 온데간데 없어지고 회색 칠이 되어 있었다. 북-중 관계, 남북 관계, 한-중 관계에서의 의미 있는 장소를 앞으로는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다.

▲ 2012년 당시 북-중 간 우호적 사건들을 설명한 벽면. 2015년 8월 현재 이 설명과 그림은 사라졌다. ⓒ황재옥


65년 전의 혈맹 관계가 일반적인 국가 관계로 변화돼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중국인들에게 예전에 설명해 오던 북-중 관계만으로는 현재의 북-중 관계를 이해시킬 수 없어서 인지는 그 속을 알 수 없다. 다만 이런 변화도 양국 간에 갈등은 다소 있지만 기본적으로 우호에 기반을 둔 현 북-중 관계의 한 측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고 철교를 떠났다.

한편, 지안을 떠나 다음 목적지로 가는 동안, 동북 3성에서의 도로 신설 등 인프라 확충에 박차를 가하는 중국이 접경 지역 북한 쪽 구간 접근에 대해 통제를 강화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3년 전에는 어떤 다리든, 노란 선을 그어 놓은 중간 지점까지 어떤 제재도 받지 않고 걸어갔다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 우리는 중간 지점은 고사하고 다리 초입도 접근하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또 민감한 지역으로의 진입 지점에는 반드시 중국 공안의 검문이 있었다.

국경을 철저히 통제하는 모습을 보며, 최근 탈북자 수가 줄어든 이유 중 하나가 국경에서 중국 당국의 감시가 강화됐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압록강보다 탈북자의 탈출이 용이한 두만강 전 지역은 3년에 걸쳐 철조망 공사를 다시 했다고 한다. 달리는 차창 너머엔 3년 전에 없던 장소에 국경 철조망이 새롭게 설치되어 있었다.

▲ 철조망이 설치된 두만강 유역 ⓒ황재옥


이런 변화의 원인은 무엇일까? 중국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환구시보(環球時報)>는 "현재의 북-중 관계는 비교적 미묘하지만 양국이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다"고 평가했다. 관광객들이 북한을 좀 더 가까이 볼 수 있는 다리나 철교 접근을 북한의 요청에 의해서 중국이 통제하는 것일까? 예컨대 관광객들이 북한 쪽 가까이 다가와서 사진 찍고 떠들썩하게 북한주민에게 말이라도 거는 것이 북한의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때문일 것이다.

접경 지역에서의 북-중 관계가 3년 전과는 달리 최근에는 다른 분야에서도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의 관계로 유지되고 있는 것 같았다. 랴오닝(遼寧)성, 지린성, 헤이룽장(黑龍江)성 등 동북 3성에 대한 중국 정부의 투자가 '미묘한' 북-중 관계의 현실을 반영하듯 최근 약간 더디게 진행되는 측면도 있지만, 그래도 북-중 관계는 '통제 가능한 범위'내에서 일단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

이번 답사 기간 동안 접경 지역에서 북-중을 잇는 다리들을 보면서, 시진핑(習近平) 주석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도 관심이 깊어졌다. 이유는 이 정책이 중국의 서북 변경 지역 개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계 중국 전문가인 이창주 박사는 "중국이 북한에 투자하는 것은 북한이 최종 목적지가 아니다. 한국이나 동해로 그들의 인프라를 연결하는 경우까지를 염두에 둔 것이다"라고 기고문에서 밝힌 바 있다. 이 박사의 말대로 시진핑의 일대일로가 한국까지 포함된 것이라 치더라도, 우리로서는 그 이전에 북-중 경협이 어느 수준까지 진전될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북-중 간 경제 관계의 심화는 남북 관계 개선과 발전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발표되는 보고서들은 중국과 북한이 정치적으로는 다소 멀어졌지만 경제적으로는 밀착 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중국의 대(對)북한 직접 투자 금액이 2003년 1000만 달러에서 2013년 5억 9000만 달러로 급증했고, 중국이 북-중 접경 지역에서 추진하는 인프라 개발이 총 12건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북-중 교역 총액은 2010년 34억 7000만 달러에서 2014년 68억 6000만 달러로 5년간 연평균 18.6%씩 증가했다. 이같은 수치로 우리는 북한의 대중국 무역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대북 투자 증대와 북-중 접경 지역의 인프라 확충, 북한의 대중 무역 의존도 심화라는 현상들이 반갑지만은 않다. 우리가 차지해야 할 자리를 중국이 차지하고, 그 크기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이 내심 못마땅하다. 북한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 결국 이것이 우리의 남북 관계나 통일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강변을 따라 달리는 동안 이 같은 내용이 사실임은 접경 지역 곳곳에서 확인된다. 신의주의 신압록강대교를 비롯한 다리와 철교, 그 위를 오가는 트럭들, 중국인의 자본으로 가동되는 수풍댐 근처 공장 등. 중국 성 정부나 현 정부 차원의 투자와 민간 투자가 활성화되고 있음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남북 간에는 7·4 공동 성명, 남북기본합의서, 6·15 공동 선언, 10·4 정상 선언 등 한반도 평화 정착과 남북 관계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남북 정상급 합의들이 있다. 최근에는 이 같은 합의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만을 장식하고 있는 듯하다. 북-중 관계를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으려면 이 같은 합의들이 다시 제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남북 간에 평화가 정착되고 남한의 자본과 기술이 북한에 들어가고, 남한 주도의 국제 컨소시엄으로 남북한을 잇는 인프라를 구축해 나간다면, 현재 '정지된 듯 정지된 것이 아닌' 북-중 관계를 하등 우려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해양과 대륙을 있는 한반도의 지리경제학적 가치를 한껏 살리는 남북 간 교류와 협력이 남한의 주도로 가능해진다면, 요사이 자주 듣는 '통일'도 요원한 꿈만은 아닐 것이다.

 

압록강 위를 흐르는 뗏목…정체는?

[국경을 걷다, 2015] 북한의 산림 녹화와 혜산의 자율 경영제
 
황재옥 평화협력원 부원장의 북-중 접경 지역 답사기 '국경을 걷다 2015'를 연재합니다. 황 부원장은 지난 2012년 9월부터 12월까지 총 13회에 걸쳐 <프레시안>에 '압록·두만에서 바라본 북한의 오늘'을 주제로 접경 지역의 모습을 소개한 바 있습니다.

3년 뒤 황 부원장은 당시와 같은 경로로 지난 8월 15일부터 7박 8일간 일정으로 다시 한 번 접경 지역 답사에 나섰습니다. 다시 찾아간 북-중 접경 지역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이번 연재를 통해 3년 동안 변화된 북한의 모습을 살펴보고 이를 통한 북-중 관계 변화 양상을 짚어보려 합니다.

국경을 걷다, 2015

① 압록강 철교 가보니, 레미콘 트럭이 줄줄이…
② "김정은 만세"에서 "산림애호"…달라지는 북한?
③ 북한과 중국 사이, 철조망 세워진 이유는…


북-중 접경 지역 답사 일정이 어느덧 절반을 넘기고 있었다. 내일은 백두산(장백산)에 오를 것이다. 2012년에는 남파와 북파 코스를 통해 천지를 두 번이나 보았는데, 올해는 서파를 통해 올라가서 천지를 볼 예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그 전진기지인 창바이(長白)까지 들어가야 한다.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언제 다시 압록강을 보게 될지 갑자기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압록강 중·상류 지역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에 눈에 들어오는 풍광은 우리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어 준다. 사는 형편이 어렵다는 강 건너에도 햇살만큼은 따뜻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그 따뜻한 햇살 아래 펼쳐진 옥수수밭과 담이 없는 협동농장 농가들,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푸른 산은 낯설지 않았고, 순간순간 눈과 마음을 편하게 해줬다. 우리 오른쪽으로 흐르는 압록강은 8월의 햇살 아래 반짝이는 생선 비늘처럼 강 건너에 사는 사람들의 모든 시름을 뒤로한 채 신의주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번에 우리를 안내하는 가이드와 기사는 "이런 일행은 처음 본다"고 말했다. 끊어진 다리만 찾아다니고, 본인들이 지금까지 안내한 적 없는 곳을 찾아가라고 하니 좀 이상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남들이 찾는 관광지는 마다하고 척박한 오지만을 찾아다니니 그리 생각할 만하다. 그래서 가끔은 길을 잘못 드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의 중강진을 건너다볼 수 있는 린장(臨江)의 망강루(望江樓)를 찾아 갈 때도 그랬다. 내비게이션이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바람에 한참을 가다가 차를 다시 돌려 3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원래의 목적지 망강루에 오를 수 있었다. 오히려 우리가 가이드와 기사를 안내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예정된 시각보다 훨씬 늦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2012년 중국의 린장과 그 건너편 북한의 중강진을 찾아갈 때 뗏목을 보고 흥분했던 기억이 새롭다. 사실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도 뗏목은 우리 눈앞에 갑자기 나타났다. 일행 중 처음으로 뗏목을 보는 사람도 있었지만, 뗏목이 내려가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나는 차 안에서 벌떡 일어섰다. 흘러가는 뗏목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계속 사진을 찍었다.

린장의 주요 산업이 임업이라지만, 또다시 압록강 위를 흐르는 뗏목을 목격하다니 참으로 반가웠다. 이 지역이 백두산(장백산)과 가깝기도 하지만, 다른 지역과 다르게 목재를 쌓아 놓은 농가들이 꽤 많았다. 중국의 대표적 임업 도시다웠다. 2013년에 발간된 필자의 <국경을 걷다>에서는 이 뗏목이 중국 것이라 추측했다. 북한에는 이제 베어 낼 나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당시 일행들의 중론 때문에 그 같은 추측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번에 보니 그것은 오해였다. 강 위를 흐르는 뗏목들이 북한에서 만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입증해주는 장면을 세 곳에서 목격했기 때문이다.

압록강 상류 북쪽 강가에서 북한 주민들이 뗏목을 조립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상류에서 중류로 떠내려가는 장면, 중강진 근처에서 나무들을 하역해서 트럭에 싣는 장면까지 목격했다. 같은 날에 세 군데서 각기 다른 장면들을 목격한 것이다. 강 위를 흐를 때는 중국 것인지 북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강 건너에서 조립부터 하역까지 전 과정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나니, 그 목재들이 북한 것임이 분명해졌다. 결국 뗏목은 목재를 운송하는 북한식 방법이었던 것이다.

▲ 압록강 상류에 놓여있는 조립된 뗏목. ⓒ황재옥



▲ 중강진 근처에서 하역되는 뗏목. ⓒ황재옥

 
생각해보니 중국은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고, 목재를 실어 나를 운송장비도 충분하기 때문에 굳이 옛날 방식을 고수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북한과 중국이 30~40년의 경제적인 시차를 두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2000년대 초 평양 등 북한 지역에 갈 때마다 남북이 최소 30~40년의 경제적 시차가 있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북-중 간에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 했던 것이다.

압록강 중류에도 하류에서와 같이 관광객들을 태운 유람선과 모터보트가 운행되고 있었다. 물살을 거스르지 않고 천천히 흐르는 뗏목과 물거품을 내며 앞으로 나아가는 중국의 관광 보트가 압록강 위에 대조적인 풍광을 연출했다. 중국 관광객들은 북한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아마 아련한 기억 속에 남은 그들의 과거를 추억할 것이다. 방망이를 두드리며 강가에서 손빨래하는 북한 아낙의 모습이나 그 옆에서 멱을 감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는 부모 세대를 떠올렸다. 북한 쪽을 건너다보고 있노라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하는 착각에 빠진다.

중강진을 깊숙이 한눈에 내려다보기 위해 지난번 올라갔던 망강루를 다시 찾았다. 비슷한 절기에 왔건만 올해의 중강진은 옥수수가 더 푸르른 것 같았고, 지난번에는 안 보이던 건물들 몇 채가 더 들어섰다. 파란색 지붕을 한 건물은 3년 전 다녀간 뒤에 신축된 듯 보였고, 바로 강 앞에서도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고 있었다. 중강진을 바라보면서 상류 쪽으로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수리된 가옥들도 제법 눈에 띄었고, 강 옆 들판에는 20여 마리의 흰 염소, 5~6마리의 어미 소와 송아지들이 풀을 뜯고 있었다. 뗏목으로 수송된 목재들이 손질되어 뽀얀 살을 드러내고 쌓여 있는 집도 보였다.

▲ 2012년 중강진 협동농장(위) 모습. 아래 사진은 올해 촬영한 중강진. 건물들이 이전보다 많이 들어서 있다. ⓒ황재옥


저기가 북한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들의 얼굴에서 사라진 엷은 미소라도 다시 찾아볼 수 있다면, 필리핀이나 베트남의 어느 한적한 시골이라 해도 무방할 듯싶었다. 1998년 여름에 북한을 강 건너로 바라보던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국제 사회의 대북 제재가 아직 계속되고 있는 상황치고는 지금 북한이 2012년에 비해 그리 악화된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나아 보이기까지 했다.

린장을 벗어나 창바이현으로 향하다 보면, 독특한 지형에서 유래한 지명이 있다. '따오거우(道溝)'라는 것인데, 산과 산 사이에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가운데로 길(道)이 나 있고 그 옆으로 내(溝)가 흘러 압록강으로 흘러들어 가는 지형을 말한다. 압록강 중류에서 상류까지 중국 쪽에 23개의 따오거우가 있는데, 사람 살기에 적당한 지형이라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곳 건너편 북한에는 김일성 부자와 연관이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딴 마을이 있다. 빠따오거우(8道溝) 건너편에는 김일성의 아버지 이름을 딴 김형직군이 있고, 쓰얼따오거우(12道溝) 맞은편에는 김정일의 어머니 이름을 딴 김정숙군이 있다. 지난번 답사 때 쓰얼따오거우 건너편 김정숙군은 벽을 하얗게 칠한 집들과 잘 정돈된 도로 때문에 다른 마을에 비해 이름값을 하는 마을인가 싶었다. '역시 좀 다르다'라는 느낌을 받을 정도로 관리가 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서는 신의주나 중강진의 변화와 발전에 비해 김정숙군은 좀 퇴색한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른 마을에 비해 정지되어 있다 보니 오히려 퇴보한 것처럼 보였다. '한 다리 건너 천 리'라더니 김정은 시대에 증조할아버지나 할머니는 이제 '찬밥'이 되어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지금 김정은의 생모인 고영희에 대한 우상화가 한창이다.

해가 떨어질 무렵 창바이시에 도착했다. 눈앞에 펼쳐진 혜산시의 아우라는 석양인데도 불구하고 역시 다른 데가 있었다. 비록 강 건너에서 바라본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도시의 규모와 주민의 활동 등에서 다른 강변 마을에선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공동주택인 아파트도 많고, 공장으로 보이는 굴뚝 높은 건물들도 있었다. 혜산에서도 산 중턱에 걸려있던 입간판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만세'는 '산불 조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 2012년에 촬영됐던 김일성, 김정일 관련 구호(위). 하지만 2015년 현재, 과거의 구호 대신 '산불조심'이라는 구호가 놓여져 있다. ⓒ황재옥


올해 2월 김정은이 대대적인 산림 녹화 사업을 제기한 이후, 4월엔 이 사업을 책임진 내각 국토환경보호성 산하 산림총국이 국방위원회 산하로 재편되었다고 한다. 산림 폐해의 심각성을 알고 김정은의 지휘하에, 앞으로는 국방위원회가 산림조성계획과 산림보호계획을 총괄적으로 지휘해 나갈 모양이다. 산 중턱의 구호가 우상화 대신 '산림애호', '산불조심'으로 바뀌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은 아니지만, 그 많던 구호들이 접경 지역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변화라면 큰 변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해가 기우는 시간이라 3년 전처럼 강에서 멱을 감고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대신 이번에는 강둑의 작은 텃밭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허리 숙여 일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한둘이 아닌 여러 명이 각자 떨어진 장소에서 물을 주기도 하고 엎드려 일을 하기도 하는 등 텃밭의 작물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작물 재배가 될 것 같지 않은 곳에서까지 채소를 키우는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서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들이 일하는 모습이 하도 진지했기에 그 이유가 궁금했다. 거기서 수확되는 것이 오롯이 자신의 몫이 되기 때문에 저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정일 시대인 2000년대 중반 이른바 '7.1 경제 관리 개선 조치' 시대에 이미 총리를 지낸바 있는 박봉주가 김정은 시대에 다시 총리로 복귀한 뒤, 2014년 5.30조치를 발표하고 자율 경영제를 도입하더니, 그 효과가 저런 데서도 나타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재옥 (사)평화협력원 부원장은 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북한학과 석·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북한의 정치·사회문제, 특히 인권문제에 주된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면서 통일연구원 정책자문위원, 휴먼아시아 이사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현재 통일부 자문위원, (사)한반도평화포럼 운영위원, 원광대학교 초빙교수 등을 지내고 있으며 <프레시안>에 '황재옥 칼럼'을 연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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