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모범생 큰 애에게 '휴학하고 세계여행' 제안했더니…" - 학교를 그만두라 꼬셨다고?

일취월장7 2015. 3. 7. 11:48

"모범생 큰 애에게 '휴학하고 세계여행' 제안했더니…"

[온 가족 세계여행기] "언제까지 '현재의 행복'을 저당잡혀야 하나"

가온가람이 가족 2015.03.06 10:59:07

사람들이 묻곤 한다. 어떻게 1년간 가족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냐고? 

마땅히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말하자면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지연시키지는 말자'였다. 카르페디엠(Carpe diem)! 

우리는 흔히 묻곤 한다. "왜 일을 하는지? 왜 돈을 버는지?" 
사람들은 대답한다. 누구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아이들을 교육시키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은 노후준비를 잘 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돈을 벌어 생계를 유지하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약간의 노후준비를 하는데 필요한 돈은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필요경비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데도 돈이 많건 적건 관계없이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왜? 현재의 행복을 위해서 지불하는 돈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미래의 불안감을 채우는데 쓰고 있었다.  

더불어 사람들 대부분의 소망은 한결같이 "돈 많이 벌어서 나중에 유유자적하게 여행하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며, 현재의 행복을 미래의 소망으로 대체하고 있었다. 지금의 행복을 너무나 많은 이유로 미래로 더 나은 미래로 지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를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 오늘을 행복하게 살면 어릴 적 우화인 "개미와 베짱이"의 베짱이처럼 미래에는 불행해질까? 우화와는 달리 만약 오늘이 행복하면 그 다음 내일이 또 다시 오늘이 될 테니까 매일 매일 행복해지지 않을까? 

이런 의문으로 가득하던 2~3년 전 어느 날 문득 라디오에서 50세가 넘은 중년가장이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라는 중학생과 고등학생을 모두 데리고 5인 가족이 유라시아 횡단 세계여행을 한다는 내용의 인터뷰를 듣게 되었다. 잘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학교도 자퇴하면서까지 말이다. 이유는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인 사춘기를 가족과 함께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띵해왔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20여년 직장생활을 하며 가정을 꾸리고 애를 낳아 키우며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었다. 모든 맞벌이 부부가 그렇듯 어른들은 직장에서 하루 종일 일한 것도 모자라 이어지는 회식 등은 사회생활의 필수조건이 되어 버렸다. 그 사이 아이들은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하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다.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아이들과 하는 얘기라곤 "밥 먹었니?, 숙제했니?, 씻었니?" 정도의 형식적인 이야기가 전부였다. 그나마 주말에는 어른은 어른대로 직장에서의 피로감으로 쉬느라 여념이 없고 주중에 채워지지 못한 애정을 원하는 아이들에게 매번 "엄마, 아빠 피곤해. 조금만 더 쉬고 나서 나중에"라는 말을 반복하곤 했다.  

언제나 입버릇처럼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가장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이들과 행복을 같이 나눌 생각을 해보지는 못했다. 그 인터뷰를 듣는 순간 "그래! 맞아!" 나는 그동안 아이들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보내줄 생각은 안하고 학생들은 공부하고 어른들은 일하는 것만이 사회가 원하는 선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뉴스를 들을 때는 마냥 남의 일 같기만 했다. 왠지 나와 다른 대단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고 나는 할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무력감에 빠져있었다. 20년 남짓 일했지만 직장은 여전히 더 더욱더 열심히 일하라고 재촉하고 매일 매일의 피곤함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원동력이 아니라 무기력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부터 영어니 수학이니 하며 학원을 다니다가 거의 모든 시간을 학원에서 상주하고 집에서는 잠만 자는 이른바 '하숙생'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회는 왜 우리에게 더 열심히 일하라고만 하는 걸까? 지금까지 열심히 일해 왔고 지금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앞으로도 더 열심히 일하라고 채근하기만 하는 걸까? 20여년 청춘을 바쳐 일했으면 한번쯤 쉬면서 인생을 돌아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이런저런 달콤 쌉쌀한 세상얘기도 좀 나누고 하면 좋을 텐데…. 50세가 넘는 중년가장도 현재의 행복을 미래로 지연하지 않는데 그보다 젊은 나는 왜 지금의 행복을 접어두고 나중을 기약하는지? 그러나 여전히 해답을 찾지 못하고 쳇바퀴만 뱅뱅 돌고 있었다. 

그동안 사회는 더욱더 각박해져갔고, 매일같이 쏟아지는 뉴스에는 학생들의 왕따, 사회적 폭력, 살인 심지어 OECD 1위의 자살률까지…. GDP 규모 면에서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라는데, 사람들의 생활은 이런 경제력을 전혀 체감할 수 없는 현실! 오히려 오르는 물가와 애들 학원비, 대학등록금, 천정부지로 오르는 전셋값 등을 대응하며 생활하기도 벅차서 숨이 턱턱 막혀오는 것이 현실이었다. 

문득 나는 매우 궁금해졌다. 과연 다른 세상도 이렇게 괴롭고 힘이 들까? 그나마 과거 며칠간의 짧은 해외여행으로도 다른 세상은 우리와 사뭇 달라보였다. 다른 세상은 어떤지 한번 보지 않고는 지금 우리의 현실이 보편적인 것인지 이상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을 듯 보였다.  

'그래! 세계 속으로 한번 튀어보자'  
본격적으로 여행을 생각하며 아이들에게 물었다. 중학생인 큰 아이는 묵묵히 자기에게 주어진 공부를 착실히 하는 모범생이었고, 초등학생인 작은 아이는 항상 엄마의 사랑에 목말라하며 학원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자유영혼이었다. 둘째 애는 여행가자고 하면 좋아할게 뻔하고 모범생인 우리 큰 아이에게 물었다.

"공부하기 힘들지! 근데 넌 왜 공부를 하니?"  
큰 아이는 시큰둥하게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해야 하는 거니까 하는 거지! 뭐."

부모속 안 썩이고 착실한 모범생으로 보였던 큰아이도 남들이 공부하니까 그냥 공부하는 거였다. 내가 뭘 잘 하는지? 내가 뭘 원하는지? 내가 하기 싫은 건 뭔지? 이런 고민 따윈 공부하는 학생들의 머릿속에 들어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한창 사춘기를 겪으며 좌충우돌도 해보고 부모에게 이런 공부가 무슨 소용이 있냐며 대들기도 하고 때론 이런 충돌로 가출도 생각해 볼만한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중요부위를 거세당한 듯 그렇게 감정 없는 표정과 심장 없는 회색얼굴로 학교와 학원 그리고 집을 오가고 있었던 것이다. 가슴이 아팠다. 

적어도 아이를 이렇게 키우는 건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이를 죽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최선인 사회에서 뒤쳐짐이나 낙오는 그저 패배일 뿐이었다. 다양한 사고를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무리지어 사는 것이 사회일 텐데 이미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오로지 단 하나의 정해진 길만을 걸어가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었다.  

길 밖으로 나가야만 했다. 그 길 안에 갇혀서는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했다. 탈출이다.

이렇게 우리의 여행은 계획되었고 여행을 위한 출발을 준비했다.  

1년 간의 세계여행에서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여행자금을 마련하는 것이었고, 다음은 주변의 가족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 외에 우리의 직장과 아이들의 학교문제를 해결하고 1년 간의 여행일정에 대한 계획은 큰 줄기만 정해놓고 나머지는 그냥 닥쳐서 해결하기고 했다.  

먼저 1년 간 여행에 소요될 경비를 마련해야 했다. 최대한 절약한다면 한국에서 4인 가족이 1년을 지내는 생활비면 얼추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여행경비는 그동안 가입하고 있었던 적금과 미래를 위해 대비했던 보험과 연금 그리고 실생활에 아무 쓸모도 없이 가지고만 있었던 패물을 모두 처분하였다. 생각 이상으로 상당한 돈이 마련되었다. 그동안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히며 얼마나 많은 금액을 미래로 지연했는지를 단번에 확인할 수 있었다. 부족한 돈은 부채로 남긴 후 돌아와서 일해서 갚으면 되는 것이다. 미흡하지만 여행자금 마련 과제 해결.  

다음은 가족들에게 우리의 여행계획을 알리고 상황을 교감하는 것인데, 우리의 경우는 이 부분에서 상당한 난관을 겪었다. 여행계획을 듣자마자 부모님들이 밤잠을 안주무시고 식음을 전폐하시며 온갖 걱정을 태산같이 쌓아놓으셨다. 그 모든 만류의 이유는 걱정되어서이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고 되돌릴 수 없다고 말해도 가는 날까지도 '오래 못 버티고 한달 안에 돌아올 것'이라 기대하셨다. 물론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우린 알고 있었지만, 부모님들은 모르셨다. 다음 과제도 우리 맘대로 해결. 

▲ ⓒ가온가람이 가족

▲ ⓒ가온가람이 가족  

우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들 학교에 휴학을 신청했다. 복직 여부는 불투명했지만 그건 돌아와서 생각하기로 했다. 많은 걸 버리고 비운 자리에 자신감을 채운다면 못할 것이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 다음은 아이들의 학교문제다. 초등학생은 돌아와서 주요 과목을 시험 봐서 통과하면 제 학년으로 진급하는 것이 가능하다. 단 중학생은 조건 없이 유급 처리 된다. 큰 아이는 친구와 헤어질 걱정과 유급에 대한 불안감까지 겹쳐서 너무 많은 걱정을 하다가 결국 학교에서 선생님과 상담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00가지 기우 중 99가지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듯이 걱정도 부딪쳐봐야 넘을 수 있는 산인지 아닌지 판가름할 일이다. 직장과 학교 관련 과제도 부분 해결.

1년 간의 여행계획은 대충대충. 비행기 표도 한국출국과 동남아 출국만 정해놓고 세부적인 것은 현지에서 해결한다. 마지막 과제 현지해결. 

이렇게 출발 전 태산처럼 산적한 과제를 해결하고 2014년 3월, 우리는 세계 속으로 튀어! 나갔다.

 

 학교를 그만두라 꼬셨다고? 누구냐, 넌?

[민들레] 공부와 밥과 우정의 공동체, 파지스쿨

이희경 문탁네크워크 연구원 2015.03.06 18:05:32

 
아이들과 만나고 싶다

마을에서 만나는 인문학 공간 '문탁네트워크(문탁)'가 생긴 지 만 5년이 지났다. 동네 친구 몇 명이 모여 아파트 거실에서 꾸렸던 소박한 공부 모임은 이제 50평짜리 공간 세 곳을 꽉 채울 정도로 커졌다. '인문학 공간'에서는 현재 한 달에 100명 정도가 정기적으로 세미나를 하고 있고, '마을작업장'에서는 시장경제와 다른 마을경제를 꿈꾸는 다양한 생산 활동이 일어나고 있으며, '마을공유지'에서는 '파지사유'라는 마을 카페를 운영한다. 

그 과정이 순탄했던 건 아니다. 공부와 관련해서 누구는 문턱이 너무 높다고 투덜댔고, 또 누구는 반대로 너무 느슨하다고 불만을 터뜨렸다. '마을작업장'과 '마을공유지'가 생긴 후에 한편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공부만 챙기느라 공동 활동을 등한시한다고 날을 세웠고, 다른 한편에서는 우리 활동이 너무 번잡스러워 진득하니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없다고 깊은 한숨을 내쉬곤 했다. 한 가지도 쉬운 일이 없었고, 하루도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매번 벽에 부딪혔기 때문에 우리는 다시 질문할 수 있었고, 늘 흔들렸기 때문에 단단하게 우정을 쌓아갈 수 있었다. 지난 5년간은 그렇게 비틀거리며 걸어온 깨달음과 우정의 길이었다. 

그리던 중 우리는 '문탁'을 통해 얻은 경험, 즉 '공부의 길'을 새로 내면 그 길이 '밥의 길'이 되기도 하고, '우정의 길'이 되기도 한다는 경험을 10대나 20대와도 나누고 싶어졌다. 우리가 할 수 있다면 그들도 할 수 있다! 아이들에게도 우리와 함께 새로운 공부의 길, 밥의 길을 가자고 현혹하리라. 아이들을 현혹하는 데, 우리의 경험과 돈을 아낌없이 쓰리라! '문탁'의 청년·청소년 프로그램은 그렇게 시작됐다.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초창기 청소년 인문학에 참여한 한 친구의 통화 내용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 지금 학원 왔어. 여기 논술학원 같은 덴데 값도 싸고 무지 좋아." 우리는 그날 '집단 멘붕'에 빠졌다. 물론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사정이 나아진 것도 아니었다. 지난 1,2년간 우리는 최선을 다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프로젝트를 기획했지만, 청년과 청소년들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졌다. '문탁'에 10,20대 회원이 생기기를 바랐지만, 실제로 '우리는 프로그램 제공자-그들은 프로그램 이용자'라는 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비록 소수가 모이더라도 좀 더 긴 호흡으로 일상을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우리는 1년 과정 단기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바로 '파지스쿨'이다.

'파지스쿨', 넌 누구니? 

'문탁'에서 청년·청소년 활동을 주로 고민했던 팀(이 단위를 우리는 '주권없는학교'라고 부른다)이 1년 과정의 학교를 만들겠다고 나서자, 안팎에서 다양한 반응이 쏟아졌다. 가장 큰 논란은 이 학교의 정체성이었다. '이 학교는 대안학교인가? 대안학교라면 기존의 대안학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은 늘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서의 교육철학이나 이념 같은 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도 그렇지만, 아이들은 특히 다양한 인연과 사건 속에서 매번 자기와 세상을 함께 변화시켜 나가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이런 학교를 통해 이렇게 아이들을 키우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정말 '교육적 오만'이다.  

따라서 누가 이 학교의 정체를 묻는다면, 우리는 부정어법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근대학교처럼 연령별 분화에 기초한 교육을 하지 않습니다, 위계화된 지식의 꾸러미를 소비하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소년은 공부, 어른은 일이라는 분할된 세계를 반대합니다"라고 말이다. '파지스쿨'이라는 이름은 이런 생각을 담고 있다. '파지스쿨'은 파지(破地), 자신이 딛고 선 지반, 생각을 무너뜨리는 배움터다. 교육학적 진리가 아니라 우리의 소박한 깨달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조차 매번 되묻고 깨면서 앞으로 나간다. 

한편 '파지스쿨'은 '파지사유'를 거점으로 마을의 모든 자원과 능동적으로 접속해 나간다는 지향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파지스쿨'을 '교사의 진실 말하기'라는 뜻의 '파르헤지아'의 준말로 읽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학생보다 더 열심히 공부하면서, 배운 대로 말하고 살아가는 것이 '파지사유' 교사의 바람이고 의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업을 일주일에 두 번만 하기로 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나머지 시간에는 뭘 하느냐고? 대학 가고 싶은 아이들은 검정고시 준비를 할 것이며, 영화를 찍고 싶은 친구들은 영화동아리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공부를 하면서 촉이 오는 대로, 필 받는 대로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와 삶을 꾸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인문, 고전, 외국어, 프로젝트라는 4개의 커리큘럼을 만들었다. 인문은 읽고 쓰는 데 초점을 맞추었고, 고전은 동양 고전을 원문으로 읽는 데 방점을 찍었으며, 외국어는 몸으로 익히는 방식으로 연극을 택했다. 프로젝트는 '내가 만드는 N개의 공부'라는 주제로 학생들이 스스로 꾸려나가는 수업이다.

과연 아이들이 올까? 

학교 이름도 만들고, 커리큘럼도 짜고, 홍보물도 만들었다. 자, 이제 아이들만 오면 된다. 음, 그런데 어디서 아이들을 데려오나? 우리는 주변에서 17살 이상 아이들을 열렬히 찾기 시작했다. 학교를 멀쩡히 잘 다니는 아이들에게 학교를 그만두라고 꼬셨고(?), 학교를 그만둔 아이들에게는 '파지스쿨'에 입학하라고 설득했다. 첫 공식행사로 주변의 대안학교와 혁신학교 교사, 홈스쿨링 부모를 초대해서 '파지스쿨'에 대해 설명하고 조언을 듣는 간담회도 열었다. 그런데 그 간담회가 정말 '핫'했다. 우리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그날의 쟁점은 커리큘럼이었다. 

일반학교 부모 : 소비자를 겨냥한 느낌이다. 아이들에게 와 닿지 않을 것 같다. 부모의 뒷받침이 없어도 학생들이 갈 수 있는 학교였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아 안타깝다. '파지스쿨' 또한 대안학교의 한계에 갇혀 있는 것 같다. 

혁신학교 교사 : '파지스쿨' 프로그램은 국제학교와 비슷하다.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홈스쿨러 부모 : 성남의 ○○학교도 고작 두 명 모였다가, 결국 없어졌다. 아이들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 프로그램은 어른인 내가 공부하기 좋은 프로그램인 것 같다.

결국 우리 프로그램이 너무 '하드'해서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올 것 같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파지스쿨'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피자(Pizza)스쿨'이 되어야 하는데, 지금은 '파지국제학교'같다는 것이다. '파지스쿨' 교사들의 응수도 만만치 않았다. 우리 프로그램에 기획의 냄새가 나서 좀더 '소프트'한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자체가 바로 '기획'의 패러다임에 갇혀 있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중요한 건 '하드한가 소프트한가'가 아니라,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라고. 즐겁게 시작할 수도 있고 뭣 모르고 시작할 수도 있지만, 함께 문턱을 넘어가는 경험을 하는 게 공부라는 것이다. 

나도 돌직구를 날렸다. 우리는 '이 땅의 청소년을 어떻게 키울까'라는 대의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그 점이 바로 우리가 기존 교육학적 패러다임과 단절하는 지점이라고. 그러니 교육감한테 할 이야기를 우리한테 하면 안 된다고. 공교육에서 지친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닿는 아이들과 우리가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공부하는 소박한 학교를 만들고 싶을 뿐이라고. 

재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이 반론은 주로 학교 교사들에게서 제기됐다. '파지스쿨'이 접속하려는 아이들은 탈학교 아이들인데, 이미 학교에서 상처를 받고 밖으로 뛰쳐나간 아이들은 결코 '파지스쿨'의 커리큘럼과 접속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원칙론과 현실론이 뒤섞이고, 욕망과 경험의 차이가 날카롭게 맞부딪혔다. 간담회가 끝난 후, 우린 더 많은 숙제를 떠안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숙제조차 아이들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파지스쿨'이 개교하기 위한 최소 인원을 다섯 명으로 잡았다. 부처님이 처음 제자들과 만든 승가 공동체가 딱 다섯 명이었다. 다섯 명이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우리의 다섯 명은 세상을 바꿀 다섯 명이 아니라, 누군가 아파서 결석을 하더라도 굴러갈 수 있는 최소 단위로서의 다섯 명이다. 어떻게든 다섯 명을 데려와야 했다. 

지난 5개월, 우리는 무엇을 배웠을까? 

말이 씨가 된 것일까? 정말 딱 다섯 명이 모였다. 6개월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띄운 '파지스쿨'은 학생 다섯에 교사가 여섯인, 학생보다 교사가 더 많은 학교로 출범했다. 그리고 고작 5개월이 지났을 뿐이기에 평가는 아직 이르지만, 그 짧은 경험 속에서도 도드라지게 드러난 '파지스쿨'의 몇 가지 특이점들이 보인다.

▲ 탈핵 캠페인에 나선 '파지스쿨' 학생들. ⓒ파지스쿨

▲ 탈핵 캠페인에 나선 '파지스쿨' 학생들. ⓒ파지스쿨  

 
 

첫째, 파지스쿨의 공부는 결국 글쓰기로 수렴되고 있다. 아이들은 발제를 하거나 수업 후기를 쓰면서 일상적인 글쓰기를 한다. 또한 분기에 한 번씩 에세이를 써야 한다. 더구나 N프로젝트로 글쓰기를 택한 아이들은 매주 일정 분량의 글을 꾸준히 써야 한다. 아이들의 단체 카카오톡방에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지겨움에 대한 '글쓰기 괴담'이 횡행한다. 그런데 나는 확신한다. 혹시라도 아이들이 지난 몇 달간 배운 게 있다면, 잘 써지지 않는 글을 두고 자기의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커서가 깜빡거리는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하얗게 밤을 새운 시간들일 것이라고. 그 시간 속에서 까무룩하게 죽어가다가 다시 힘을 내서 그나마 자신의 힘으로 써낸 단 몇 줄이 아이들 공부의 고갱이라는 것을. 

둘째, 파지스쿨의 공부는 늘 수업을 넘어선다는 것이다. 지난해 가을 우리는 미금역에서 76.5일 동안 '탈핵 탈원전 탈송전탑' 1인 릴레이 시위를 진행했다. '문탁' 전체의 빅 이벤트였고, '파지스쿨'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이 과정에 휩쓸려 들어갔다. 아이들은 친구 따라 강남 가듯 시위에 나섰지만, 우연히 겪게 된 이 낯선 경험을 통해 자신의 신체가 변용되는 경험을 했고, 밀양이나 탈핵 같은 사회적 이슈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파지스쿨'의 공부는 늘 우연적 사건에 열려 있고, 그런 마주침은 수업 이상으로 아이들에게 배움을 일으킨다.

셋째, 파지스쿨의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늘 잠정적이라는 것이다. N프로젝트에서 글쓰기를 선택한 '파지스쿨' 학생 한 명은 '문탁'에서 개설된 '사기와 글쓰기'라는 프로그램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그런데 그 글쓰기 프로그램에는 그 '파지스쿨' 학생뿐 아니라, 교사도 참여한다. 그곳에서 둘의 관계는 사제지간이 아니라 동학(同學)관계가 된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위치는 늘 유동적이다. 

넷째, 현재 파지스쿨 학생 중 두 명이 '파지사유' 카페에서 매니저를 하거나 '월든의 찬방'에서 음식을 만들며 받은 활동비로 학비를 내고 있다. 물론 '파지스쿨' 학생들에게 이런 일은 아직까지는 단순한 아르바이트이다. 그러나 '문탁'의 어떤 활동도 단순한 돈벌이는 아니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언제라도 이런 일은 새로운 전망과 이어질 수 있다. 공부의 길과 밥의 길을 연결시킬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물론 어려운 일도 많았다. 딱 2주 수업을 하고 나오지 않는 아이를 잡아 오려고 교사들이 가정 방문까지 불사한 일(우리는 우리가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 정말! 상상도 하지 않았다). 숙제를 해오지 않는 아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썩는 일. 아이들 사이에서도, 교사들 사이에서도 서로의 생각과 습관이 부딪히면서 생기는 감정의 골….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런 일은 가르치고 배우는 공간이라면 어디에서라도 일어나고 또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면 늘 생기는 문제이다. 다만 '파지스쿨'은 제도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는 단 하루도 굴러갈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이런 문제를 적극적으로 사건으로 만들고, 그 사건에 함께 참여함으로써 질문을 다시 구성한다.  

'파지스쿨'은 정해진 커리큘럼을 소화하는 학교가 아니라, 사건이 벌어지면 그것을 배움의 현장으로 만드는 곳이다. 걸으면서 질문하기! 우리의 유일한 원칙이자 유일한 힘이다.  

우리는 이제 또 다시 길을 떠난다. 3월부터 시작되는 본격적인 '파지스쿨'에 더 많은 친구들과 이 길을 걷기를 기대하면서. 

*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민들레>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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