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대한민국, 길을 묻다, 배우 손숙

일취월장7 2019. 8. 14. 14:15
[손숙 인터뷰①] “장관 일찍 내려놓은 것은 축복…요즘 여성 정치인들 모습 절망스럽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4 10:00
[창간30주년 특별기획 ] 대한민국, 길을 묻다(26) 55년 차 배우 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
“정부, 문화예술 지원 매우 실망…이희호 여사, 내가 존경하는 단 한 분”

“원로 아니고 현역. 원로라는 말 너무 싫어(웃음).”

가만있어도 지치는 여름, 서울과 경남을 오가며 쉼 없이 연극무대에 오르는 현역 배우에게 ‘원로’ 타이틀은 실례였다. 전국 공연에 드라마·영화 출연도 하고 틈을 내 미국 여행도 다녀온 손숙 예술의전당 이사장은 “아직 힘에 부친다, 못 하겠다 생각해 본 적 없다”며 단단한 여유를 보였다.

몸은 바빠도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비결은 다섯 개 넘게 구독하던 신문을 끊고 저녁 뉴스를 보지 않는 것. “눈에 황반변성이 와서 글을 거의 잘 못 읽어요. 돋보기를 써도 책 한두 페이지 보면 너무 어지러운데, 난 이게 하나님이 준 축복 같아. 너무 고요하고 평온해요. 아침마다 화가 안 나.” 젊었을 적 출연을 주저했던 드라마 장르에 요즘 활발히 얼굴을 비치는 것도 “쓸데없는 까탈이나 고집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손 이사장은 얘기한다.

일상의 불편마저 축복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그는 배우로서, 그 밖에 붙은 타이틀로서 여러 번 곡절과 고비를 경험했다. 평생 잊지 못할 공연 날, 뜻밖의 뇌물수수 의혹에 휘말려 일생의 절망을 맛보았다. 50년 넘게 몸담은 분야의 ‘블랙리스트’에서 이름이 발견되기도 했다. 7월12일 시사저널은 서울 예술의전당 이사장실에서 막 부산 공연을 마치고 올라온 손 이사장을 만났다.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던 과거 기억조차 덤덤하게 풀어낸 그는 “인생의 절반을 (무대에서) 남의 인생으로 산 덕에 이해가 넓어졌다”며 지난 여정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여행 자주 다니시나요?

“이전엔 혼자 많이 다녔는데 이제 나이도 있고 해서 여행팀을 하나 만들어 같이 다녀요. 이번에도 미국 뉴욕을 다녀왔는데 바깥에 나갈 때마다 참 우리나라가 잘사는 거 같아. 예전엔 미국 공항 가면 ‘우와’ 했는데 이젠 별로예요. 이 작은 분단국이 이렇게 잘사는 건 기적인 거 같아요.”

젊은 친구들은 삶이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고 하는데요.
“고생을 안 해 봐서 그래(웃음).”
연극 계속 바쁘게 하고 계신데, 요즘도 시작 전에 긴장 많이 되세요?
“공연 전엔 늘 똑같이 설레고 긴장돼요. 오늘은 또 어떤 관객일까, 늘 관객은 새로우니까요. 연습실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고 행복하고… 이런 게 연극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인 거 같아요.”
처음 배우 한다고 했을 때 그 당시엔 굉장히 반대가 심했을 것 같아요.

“우리가 1년에 제사 열 몇 번씩 지내는 아주 극보수적인 집안이었어요. 당시 배우는 기생 비슷하게 생각하던 풍토가 있어서, 내가 대학 들어가 연극하면서 배우 되겠다 하니까 우리 어머니는 난리가 나셨죠. 그 반대가 오래갔어요. 거의 돌아가실 때까지 못마땅하고 창피하게 생각하셨어요. 누구는 군수 마누라가 됐다더라 하면서. 공연장도 몇 번 안 오셨어요.”

“뇌물 의혹, 예술가 만만하게 보나 생각했다”

배우 경력 55년. 손 이사장의 ‘인생 연극’은 무엇일까. 그는 그동안 이 질문에 망설임없이 연극 《어머니》를 꼽았다. 그에게 《어머니》는 1999년부터 15년간 꾸준히 해 온,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연극이었다. 그럼에도 손 이사장에게 있어 이 연극은 ‘쓰라린 생채기’로 남았다. 극을 만든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미투’로 구속되면서 더 이상 무대에 올릴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손 이사장이 이 연극을 아프게 기억하는 이유는 한 가지 더 있다. 1999년 5월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환경부 장관으로 임명된 직후 그는 연극 《어머니》의 러시아 모스크바 초청 무대에 올랐다. 성황리에 공연이 끝나고, 당시 대통령을 따라 순방 온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소속 기업인들로부터 그가 격려금을 받은 사실이 논란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장관 임명 한 달 만에 사표를 내고 평생 가장 어둡고 좌절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다.

99년 모스크바 공연, 여러모로 잊을 수 없는 날일 것 같습니다.

“그날 공연은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공연 후 10분 넘게 전 관객이 기립박수를 치는데 울컥하면서 ‘이들을 위해 죽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그때 전경련 몇 분이 무대로 올라와 자신들이 걷은 돈을 흰 봉투에 넣어서 나에게 대표로 전한 건데 그게 그렇게 뇌물수수라는 무서운 이름으로 커질 줄은 몰랐어요.”

그 후 장관에서 바로 물러나시고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운 시간을 보내셨다고 들었어요.

“일단 너무 터무니가 없으니까. 뇌물의 뜻을 모르는 거 같아. 관객들이랑 기자들 다 있는 곳에서 준 걸 그렇게 언론이 공격하니까, 한편으로는 ‘예술가를 만만하게 보는구나, 얘 하나쯤 희생시켜도 괜찮겠구나’ 생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했어요. 내가 장관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지만, 평생 내 신념이 와르르 무너진 것 같아서 정말 죽고 싶었어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서 생각하면 오히려 그때 사건이 감사하기도 해요.”

어떤 점이 감사하세요?

“그 사건이 안 터졌다면 내가 몇 년이고 그 장관 자리에 있었을 거고, 그럼 과연 내가 다시 연극계로 돌아올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 하면 너무 감사해요. 다만 (김대중) 대통령님이 미안해하셨어요. 그건 좀 맘에 걸리죠.”

짧게 끝나버린 정치활동에 대한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으세요?

“전혀! 전혀 없어요. 빨리 돌아온 게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얘기 해도 되나 모르지만, 요즘 정치하는 여성들이 하는 일련의 언행을 보면 너무 절망스러워요. 여자들이 정치하기 시작하면 뭔가 다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떨 땐 더 나쁘고 터무니없는 말들을 해요. 그냥 아무 말 대잔치! 저렇게 하고 집에 돌아가면 얼마나 공허할까 싶고. 바야흐로 여성의 시대인데, 좀 더 멋있게 하면 안 되나 안타까워요.”

정치권을 곧장 떠났지만, 최근까지 이사장님이 어떤 후보를 지지한다 또는 지지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들이 계속 돌았어요.

“피곤하죠. 내가 누구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건데 그게 왜요. 누구를 지지하면 또 어때, 자유가 있는데. 그런데 왜 배우가 누굴 지지하면 그걸 그렇게 색안경 끼고 예민하게들 보는지. 우리 같은 연극하는 동료들 보수, 진보, 극우, 극좌 다 있어요. 무슨 상관이야.”

대통령부터 무명 시민까지 인터뷰 경력 30년
손숙이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사연’은…

손숙 이사장은 1989년 MBC 라디오 《여성시대》를 시작으로 30년 가까이 라디오방송을 진행했다. “당대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다 만났다”는 그의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엽서로 또는 전화로 그는 매일 다양한 사람과 마주했다. 이 역사를 엮어 《손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라는 책도 3권 냈다. ‘어떤 사연이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어려운 질문에 손 이사장은 큰 고민 없이 한 사람의 얘기를 꺼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죽겠다’는 우편이 쏟아지던 IMF 무렵, 무명의 시민에게서 온 ‘유서’에 가까운 편지였다.

”일 다 망하고 처가, 친가까지 다 보증을 선 최악의 상황이라 자기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마지막으로 애청했던 《여성시대》에 편지를 보낸다면서…어떻게 이분과 전화 연결이 돼서 한 30분을 ‘죽는 건 패배다’ ‘당신보다 힘든 사람 많다’며 설득했어요. 그쪽도 울고 나도 울면서 난리를 쳤죠.“

시간이 흐르고, 이날의 충격은 가끔 잠깐 떠오르다 말 정도로 멀어졌다. 그 기억이 다시 살아난 건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2013년 대구 공연 때였다. “분장실에 있는데, 누가 나를 꼭 만나야겠다는 거예요. 이름을 들어보니 기억도 없고. 만났는데 그분이었어요. 부인하고 성인이 된 딸을 데리고 왔어요. 그때 나랑 얘기하고 다시 살아보자 결심했다고 하는데 그때 감동은 말로 다 못 해요.” 당시를 회상하는 손 이사장의 목은 어느덧 메어 있었다.

IMF 당시 라디오국은 벼랑 끝에서 온 편지들로 가득했다. 기막힌 사연들을 읽으며 하도 울어 당시 손 이사장은 ‘수도꼭지’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평생 흘릴 눈물을 그때 다 흘렸다”며 “라디오는 사람을 살리는 매체였고, 내성적이고 깐깐하던 나를 넓히고 키워준 존재였다”고 정의했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



[손숙 인터뷰②] “김대중 대통령 부부, 두 별이 졌고 한 시대가 갔다”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9.08.14 10:00   

손숙 이사장은 고 김대중 전 대통령, 고 이희호 여사와 생전 오랜 인연을 가져왔다. 1999년 환경부 장관 임명 전부터 친분을 쌓았고, 6월14일 이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에선 대표로 약력을 읊기도 했다. 카메라 밖, 청와대 밖에서 나타나는 김 전 대통령 부부의 숨은 면모들도 손 이사장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상자 기사 참고). 어느덧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손 이사장은 생전 부부를 기억하며 “두 별이 졌고 한 시대가 갔다”고 말했다.

장관으로 임명한 김대중 전 대통령, 그리고 이희호 여사와는 어떻게 인연이 시작되셨나요.
“두 분과의 인연은 굉장히 오래됐어요. 대통령님이 굉장히 문화예술에 관심과 애정이 많으셨어요. 그분이 진짜 끼가 많은 분이셨거든요. 장구도 좀 치시고 연극도 좋아하시고. 우연한 기회에 제 공연에 구경을 오셨었어요. 옛날 야당 시절에. 그래서 인연이 됐죠. 그리고 얼마 있다 감옥에 가셨어요. 너무 살벌하니까 난 너무 무서워서 그 근처도 못 갔죠. 그런데 감옥에서 나오시고, 누군가가 대통령님께 인사를 갔더니 제 안부를 물으시더라는 거예요. 그때 너무 죄송했어요. 그래서 제 다음 공연 티켓을 보내드렸어요. 설마 오시겠어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오신 거예요?
“내외분이 티켓을 갖고 오셨어요. 그때부터 인연이 됐고 제 공연은 꼭 오셨어요. 오시면 배우들 밥 사먹으라고 금일봉 주시고 작품에 대한 말씀도 해 주셨어요. 지역 행사를 하시면 제가 가서 사회도 봐 드리고 두 분과 밥도 따로 먹고 친하게 지냈죠. 그때 내가 신문에 칼럼을 많이 썼어요. 그거 읽으시곤 ‘그 내용은 손숙씨가 잘못 알고 있다’ 이런 얘기도 종종 해 주셨어요.”

그 인연이 이어져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신 거네요.
“대통령 되시고는 자주 못 뵀어요. 장관 물러나는 그 사건이 터졌을 때, 내가 그만두는 날 전화를 직접 주셨어요. 연극 잘하는 사람, 내가 나랏일 좀 하라고 불렀는데 힘들게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요. 그 후로도 청와대 나와 동교동 계실 때 가끔씩 찾아뵀어요. 아버지처럼 위로 많이 해 주신 분이에요.”

그렇게 이 여사와도 자연스럽게 인연이 된 거군요.
“그렇죠. 여사님은 내가 아는 여성 중 가장 존경스러운 분이에요. 그분은 정말 평생이 똑같으세요. 민주운동 하다가 감옥에 가 계셨을 때나, 청와대 계실 때나, 청와대에서 나오셨을 때나 늘 한결같으셨어요. 남편 대통령 됐다고 어깨에 힘주는 일 없으셨고, 힘들다고 절망하는 일도 없었어요. 대통령님 감옥에 계실 때도 그렇게 당당하셨어요. 여성계 이끌 때도 ‘나가자 싸우자’ 하는 게 아니라 소리 없이 강하게. 그만한 영부인은 다시 얻기 쉽지 않을 거예요. 영부인으로만 정의하기엔 크신 분이셨어요.”

올해가 김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네요.
“그러게요. 대통령이 너무 늦게 되셨어(웃음). 참 이상하게 남들은 쉽게 가는 길을 대통령님은 유독 어렵게 어렵게 가셨어요. 그것도 팔자신 거 같아. 굴곡이 너무 심해. 마음도 굉장히 여리시거든요. 그분이 웃으시면 되게 귀여워요. 그래서 내가 예전에 인터뷰를 하러 가서 ‘많이 웃으셔요. 잘 안 웃으시니 사람들이 어려워하죠’ 했는데, ‘웃을 일이 있어야 웃지’ 하시더라고요.”

손숙이 기억하는 고 이희호 여사
6월14일 고 이희호 여사의 사회장 추모식에서 손숙 이사장은 대표로 이 여사의 약력을 보고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 여사는 종종 손 이사장의 연극을 관람했고, 손 이사장 역시 때마다 동교동 자택을 방문하며 인연을 쌓아왔다. 이 여사 서거 사흘 전에도 그는 병실을 찾아 인사를 나눴다.

“의식이 계속 없으시다가 조금 괜찮아지신 거 같다고 한번 병실 와서 뵈라고 해서 갔어요. 내가 손을 잡고 ‘여사님, 저 왔습니다. 손숙인데 알아보시겠어요’ 했더니 제 손을 꾹 잡으시는데, 힘이 나보다 셌어요(웃음). 좀 더 사시려나보다 했는데 며칠 안 돼 돌아가셨어요. 가족이 모여 찬송가를 부르는 가운데 아주 편안히 가셨다고 들었어요.”

손 이사장은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면 모를 생전 이 여사의 소소한 모습을 하나하나 풀어냈다. 손 이사장이 기억하는 이 여사는 한마디로 ‘일관된 사람’이었다. “이건 많이들 모를 텐데, 동교동 집에 가면 항상 집 안이 어두컴컴했어요. 전기 아끼느라 불을 다 꺼놔서. 또 어디 식사하러 가시면 핸드백에서 여사님이 티슈를 꺼내잖아요. 그걸 꼭 반으로 잘라 썼어요. 아끼느라고요”.

손 이사장에 따르면 이 여사는 생전 자신의 장례식 비용을 우려하기도 했다. “정말 뭐 없으셨어요. 당신의 장례 비용이 부담될까 걱정스러워 하셨어요. 여사님 정신 있으실 때 내가 장난친다고 ‘여사님, 소문에 2조원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했더니 ‘그러게 말이에요. 지하실에 한번 가봐요’ 하시더라고요.” 이 여사와의 대화를 한참 되새기던 손 이사장은 “한 시대가 이렇게 끝났다”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출처 : 시사저널(http://www.sisajourn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