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약속’의 핵심은 무엇일까. 아베 총리의 말대로 한국은 국가 간 약속을 가볍게 여긴 걸까. 우선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문제부터 살펴봐야 한다.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해결과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다. 여기서 양국은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고 협약했다. 아베 총리를 비롯한 일본 우익은 상대방 국가에 대한 개인 청구권까지 이 협정에 기초해 일괄 해결되었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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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
2000년부터 개인 청구권 소멸 논리 펼쳐
이 모순된 인식에 꾸준히 문제를 제기해온 대표적 인물이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다. 청구권 문제에 관한 전문가이자, 1990년대 위안부 소송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법률 대리를 맡았던 인물이다. 야마모토 세이타 변호사는 2014년 <한일 양국의 한일 청구권협정 해석의 변천>이라는 논문에서 ‘개인의 청구권이 1965년 한일협정으로 소멸했다’는 논리는 비교적 최근에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1990년대 위안부, 피폭 피해자, 강제징용 피해자 등 한국인 피해자가 각종 ‘전후 보상 재판’을 청구했는데, 일본 정부는 이때까지 ‘1965년 한일협정 때 다 해결되었다’라고 하지 않았다.
흐름이 바뀐 것은 2000년 11월부터다. 당시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주법(일본강제노동손해배상특례법)을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배상받을 길을 마련해두었다. 당시 미국에 사는 강제동원 피해 한인이 일본 기업에 소송을 제기하자 일본 정부는 이 소송에 대한 의견서를 2000년 11월17일에 제출한다. 이 의견서에서 일본 정부는 처음으로 개인의 청구권이 1965년 한일협정으로 소멸되었다는 논리를 동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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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동통신 1965년 12월18일 한일협정 비준서를 교환하는 이동원 외무장관(왼쪽)과 시나 일본 외무장관. |
일본 정부 역시 유사한 판단을 내놓은 적이 있다. 1991년 3월 다카시마 유슈 당시 외무대신 관방심의관은 참의원 내각위원회에서 “일·소 공동선언에서 청구권 포기는 국가 자신의 청구권 및 외교 보호권의 포기일 뿐, 개인의 청구권까지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1990년대까지 일본 정치권에서 ‘개인 청구권’은 상대국을 막론하고 조약과 별도로 널리 인정되던 권리였다.
아베 총리가 주장하는 ‘약속’의 의미는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됐다. 2019년 현 시점에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주장은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나아가 일본은 추가 명분을 하나 더 세우고 있다. ‘안전보장’이라는 키워드다.
세코 히로시게 일본 경제산업장관은 7월9일 국무회의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번 조치는 안보를 위해 수출 관리의 국내 운용을 검토하는 것이다. 협의할 대상이 아니며 철회도 고려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전날인 7월8일 문재인 대통령이 ‘양국 간 성의 있는 협의’를 촉구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다. 한국이 장기적으로 일본 안보에 위협이 되는 존재라는 주장이다.
마침 일본 언론에서 안보상 위험 요인이 생겨 이번 수출규제가 추진되었다는 식으로 보도를 내기 시작했다. 7월9일 일본 NHK 방송은 일본 정부 관계자 발언을 인용해 “수출규제를 한 원재료는 화학무기인 사린 등으로 전용될 가능성이 있다”라고 보도했다. 이 보도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보도 내용에 등장하는 일본 정부 측 관계자는 이번 수출규제 품목 중 하나인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가 사린가스 제작에 쓰일 수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지만 사린가스는 저순도 불화수소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다. 1995년 옴진리교가 저지른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의 기억을 노려 내부 여론을 자극하기 위한 정치적 발언으로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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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7월10일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30대 기업 총수들이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했다. |
아베 총리는 공세를 이어갔다. 7월7일 후지TV에서 진행된 참의원 선거 당수 토론에서 아베 총리는 “한국은 대북 제재를 지키고 있다고 말하지만, 징용공(강제징용 피해자) 문제에 대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명확하게 됐다. 무역관리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당연하다”라며 일본에서 수입한 물품이 북한으로 흘러 들어간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 7월11일 국회 국방위 소속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이 과거 불화수소 등 전략물자를 북한에 밀수출한 사실이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 자료에서 확인됐다”라고 발표했다. 오히려 무기 제조에 이용되거나 군사용으로 활용 가능한 전략물자가 일본에서 밀반출됐다는, 따라서 일본이 적반하장식 대응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었다.
발표 열흘 만에 일본의 무역규제 문제는 한·일 양국 간에 돌이킬 수 없는 거리감을 만들었다. 특히 한국을 ‘위험국가’ 수준으로 판단할 것이라는 일본 정부의 방침이 드러남에 따라, 한국 정부 역시 대응 강도를 높이고 있다. 7월10일 청와대에서 30대 기업 총수 및 경제단체장과 회동한 문재인 대통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우리 경제에 타격을 주는 조치를 취하고 근거 없이 대북 제재와 연결시키는 발언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본이 더 이상 막다른 길로만 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협의를 제안했던 7월8일 첫 메시지와 달리 매우 강경한 톤이었다.
정부는 아직 외교적 해결을 최우선으로 삼고 있지만 사태가 빠른 시일 내에 해결되기는 쉽지 않을 전망이다. 일부 야당 인사들은 강제징용 배상 청구를 한국 정부가 처리하는 형태로 특별법을 만들자고 제안하지만 이는 대법원 판결 자체를 무력화할 우려가 있다. WTO 제소, 추경 확보, 부품 국산화 등이 대안으로 제기되고 있으나 핵심은 일본의 변화일 수밖에 없다. 대북 문제, 미·중 무역전쟁만큼이나 어려운 외교적 문제가 동아시아에서 동시다발로 펼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