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의 ‘거대한 전환’, ‘칼 폴라니’에게서 배우다
[복지국가SOCIETY] 우리 시대 노동의 본질과 해법을 생각한다
한바탕 흐드러진 봄꽃 잔치에도 꾸물꾸물 기지개만 켜던 뭇 생명들이 어느 날 일제히 이 계절을 점령해버렸다. 깊은 겨울 끝에 모습을 드러낸 계절의 향연은 인간이 살면서 느끼는 중요한 유희거리 중 하나다.
허나 삶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잠깐의 호시절을 즐기려면 나머지 호된 시간을 견뎌야 한다. 태어나 자라서 결혼하고 자식을 양육하고 노후를 보냄으로써 생을 마감한다는 인간의 생애 주기를 보면, 삶의 모든 여정이 경제력(돈)으로 점철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인생은 경제력을 확보하기 위한 노동이라는 굴레 자체일 뿐, 유희의 기억은 잠깐씩 스치는 추억이었다.
자본주의의 결함을 바로잡겠다는 세계의 부호들
그래서 사람들은 한량이고 싶고 한량스러운 삶을 꿈꾸는지 모른다. 이 충만한 계절을 즐기는 기분이 한량스러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5월 첫날이 노동절인 탓일까, 계절의 유희를 즐기는 순간에도 어딘가에 묵직한 강박이 있다. 이 잠깐의 유희조차도 허락되지 않은 수많은 김용균(태안화력발전 노동자)들이 여전히 질병과 사망 사고에 방치된 채 우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은 그렇게 우리 삶의 전부가 되어 우리 삶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자본의 노동자들을 향해 '구해주겠노라'며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세계적인 부호들이다.
세계적인 거부들이 자신들을 부자의 반열에 올려놓은 이 자본주의를 걱정하고 있다. 지난해 갤럽 조사에서 18~29세 미국인 중 사회주의에 긍정적이라는 비율이 51%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들이 걱정할만한 현실임은 분명해 보인다. 지난 29일 '미국판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밀컨 글로벌 콘퍼런스'에서도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불평등 심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 공격 현상을 지적했다. 자본주의의 결함을 바로잡아 그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잇달아 제기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들의 문제의식에서 희망을 기대하긴 어렵다. 여전히 법인세 삭감을 지지하고, 최저임금 인상에 인색하며, 분배를 거부하면서도 기술의 발전은 독점하겠다는 이들 자본가들이 인식하는 자본주의 결함이 도대체 무엇일까 궁금할 뿐이다.
인간 노동의 상품화, 자본을 종교화하다
종교가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과 행위를 규율하는 시대가 있었다면, 오늘날 인류의 의식과 행위를 규율하는 근간이 자본주의 경제 체제임을 의심할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상반된 가치인 듯 보이는 종교와 경제가 어떻게 같은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일까? 바로 '경제의 종교화'다. 원시 종교 사회 이후 인류가 이루어온 정치, 문화, 경제, 철학 등의 역사적 산물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발전해왔지만, 지금의 자본주의 경제는 일방향의 영향력으로 우리의 삶을 온전하게 규정하는 보편적・절대적 가치다. 즉 법·도덕·관습 같은 규율 체계를 포함한 이들 역사적 산물들이 각자 고유한 기능으로 인간 사회에 영향을 미쳐왔다는 오랜 상식이 깨졌다. 이제 이들 역사적 산물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보조하고 강화하는 수단일 뿐이다.
그러나 인류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가 된 경제도 실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시스템들 중의 하나였을 뿐이다. 따지고 보면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물물교환이 경제 활동의 시작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이 경제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가치 체계로까지 등극할 수 있게 된 것일까? <거대한 전환: The Great Transformation>(홍기빈 역)의 저자 칼 폴라니는 모든 사회와 문명은 그들이 존속하기 위한 여러 물질적 조건과 경제적 요소에 의해 제한 받기 마련이지만, 19세기 문명이 경제적 문명이었다는 말은 이와 완전히 구별되는 의미를 갖는다고 말한다. 인간 행동의 무수한 동기들 가운데 일상적 행동과 행위를 정당화하는 수준으로까지 올라선 적이 거의 없었던 '이익'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해 문명 전체의 기초로 작동하게 만든 이 메커니즘은 순식간에 지구의 일부를 뒤덮어버린 가장 거친 종교적 열광의 폭발만이 비견될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자본주의는 산업혁명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그 씨앗은 사유재산과 상업자본이 활발히 형성되던 15세기로 거슬러간다. 자원의 유한함을 극복하려는 행위인 축적과 사유화는 이미 독점의 가능성을 내포했고, 자본력은 독점적 지배를 가능하게 했다. 자본주의가 인류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로까지 작동할 수 있게 된 기반에 바로 초국가적 금융자본이 있었던 것이다. 한편, 노동의 역사는 어떤가. 고대와 중세를 거쳐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노동의 형식도 변해왔지만 더 많은 자원 획득의 수단으로 공히 타인의 노동을 지목했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결국 노동의 상품화와 함께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 자체를 경제 활동과 완전히 등치시키는 데 성공하게 되고, 노동의 상품화도 더는 이상할 것 없다는 인식으로 확산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자기조정 시장에 순종해야 한다는 맹목적인 분위기에서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초기의 혼란기를 딛고 성숙하게 되는데, 폴라니는 "불과 한 세대 만에 온 인간 세상이 그 메커니즘의 영향력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그 앞에 무릎 꿇고 말았다"고 말했다. 결국 경제는 더 이상 사회를 움직이는 부분적 요소가 아니라 전부가 되었다. 자연히 인간의 모든 문명의 산물들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내는 자본의 하부구조가 된다.
산업혁명 전후, 노동의 모습은 어떻게 달라졌나?
상품의 가치란 각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부가가치의 총합이다. 즉 '투여된 노동력의 합'인 셈이다. 이 노동력을 지배하게 되면서 시작된 자본주의는 노동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이익을 창출해낼 수 있는가의 역사였다. 따라서 자본이 이익을 창출하는 방식의 전환기마다 노동을 통제하는 방식도 변화했다.
먼저 산업혁명기를 전후해 자본이 노동을 관리하는 방식은 어떻게 변했을까? 산업혁명 이전의 시기가 노동 시간을 연장하려는 자본가의 투쟁 시기였다면, 이후는 노동 시간을 줄이려는 노동자의 투쟁 시기였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 바로 기계의 발명이 있었다. 노동자 스스로 생산 과정의 리듬을 주도했던 숙련 노동이 기계의 리듬에 귀속되었고, 이로써 자본의 노동에 대한 실질적인 포섭이 가능하게 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초기 자본주의 시기, 자본가는 노동자를 공장에 모아 놓았을 뿐이지 노동을 자신의 뜻대로 장악하고 통제할 능력은 없었다. 노동이란 노동자의 의지와 능력, 노동 방법에 따른 것이었기에 자본가는 게으름, 태업, 자의적인 휴식과 중단 등에 실질적으로 대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본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일할 시간을 최대한 길게 연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계의 발명으로 노동자의 노동 방법과 태업이나 휴식은 물론 노동자의 의지까지도 통제할 수 있게 되자, 반대로 노동자가 과잉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노동 시간 제한을 요구하게 된다. 어쨌든 기계를 통한 노동의 완전한 장악으로 생산성은 향상되었고, 생산성은 그대로 자본에 더 많은 부의 축적 기반이 된다.
그러나 산업 생산 기반이 보다 완전한 모습을 갖추려면 극복해야할 문제가 더 있었다. 바로 산업혁명 당시 극히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근로환경이다. 특히 여성·연소 노동자의 참상은 자본주의 발전 자체를 위협할 수준이었는데, 그래서 이를 개선하고 규율할 공장법이 제정된다. 이로써 자본과 노동, 그리고 이들을 규율하는 법률 체계라는 형식이 완성된다. 공장법은 이후 노동운동의 진전과 함께 본래의 노동력 보전이라는 방향으로 근로환경을 끌어올리고 보다 진보한 내용을 갖추면서 오늘날의 노동법으로 발전해왔다.
단계적 노동 착취를 의미하는 아웃소싱
그러나 노동법은 대체로 근로관계를 맺은 이후의 노동자를 보호 대상으로 삼았다. 기계를 통해 노동을 장악해온 자본은 근로관계 이전 단계에서 노동자들을 노동 현장에서 제외하거나, 노동력의 일부만을 수령하는 방식(비정규직 형태)으로 노동을 더욱 통제함으로써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 이는 각종 규제완화 정책을 통해 실현된다. 1980년대 후반 규제완화 정책의 시작과 함께 세계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미국 발 아웃소싱(오프쇼링 포함)이 그 시작이었다.
당시 미국 제조업 분야에서 시작된 아웃소싱 바람은 경영 합리화의 대명사였고 거스를 수 없는 흐름으로 인식되었다. 이것이 미국식 자본주의를 맹목적으로 추종했던 우리나라에 상륙한 시기는 그로부터 10년쯤 지난 1997년 경제위기(IMF) 직후다. 효율성, 비용절감으로 위기를 돌파해야 한다는 명분하에 대기업을 시작으로 소사장, 하도급, 용역, 파견 등의 이름으로 구석구석에서 아웃소싱이 시작됐다. 기계 혁명이 인간의 노동력 통제를 통해 생산성 증대를 기했다면, 아웃소싱은 노동의 단계적 착취를 통해 만들어낸 잉여 노동력을 퇴출시킴으로써 생산성을 증대시켰다. 따라오는 인원 감축, 해고, 임금 차등화 등의 비용절감 정책은 노동자가 감내할 덕목이 되었고, IMF 외환위기라는 경제 충격은 노동조합 등의 저항조차 무력화하며 산업 전반으로 확대됐다. 그 결과가 고스란히 지금의 비정규직 문제, 노동의 양극화, 상시적 정리해고, 무한경쟁 체제, 성과 지상주의, 무지막지한 원·하청 관계와 같은 고질적인 사회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

▲ 네스카페 매장에서 서빙하는 로봇 페퍼. 자본은 이제 노동에서 인간을 배제하길 원한다. 도래할 신산업 시대에서도 '인간이 세상을 풍요롭게 살아갈 권리'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 ⓒwikipedia.org
다시 거대한 전환, 어쩔 수 없는 대세이니 받아들여라?
이런 와중에 우리 사회는 다시 4차 산업혁명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맞이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기반으로의 전환기마다 익숙했던 구호도 들린다. '어쩔 수 없는 대세이자 흐름이니 받아들여라!' 과연 변화는 숙명인가? 칼 폴라니가 바라본 거대한 전환기의 산업혁명 당시에도 변화에 대한 맹목적인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했다. 경제 성장이 무의식적인 방향으로 이뤄진다 해도 결국 스스로를 치유하리라는 근거 없는 맹목적 믿음이 형성되면서 '사회적인 사건들을 경제라는 관점에서 판단'하려 했다. 이런 맹목적인 사회 흐름에서 폴라니가 주목했던 것은 영국 튜터 왕조 시기의 종획운동이었다.
종획운동(인클로저운동)은 영국의 영주와 귀족들이 토지에 경계 표시를 시작하면서 사회 질서를 뒤집어버려 사회 조직의 근간이 무너졌던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폭력과 압력·위협 같은 수단이 거침없이 사용되고, 사람들이 살던 집들이 쓰레기더미로 무너진 광란의 시기였다. 폴라니는 당시 종획운동의 처참함이 가공할만했음에도 그나마 이 재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속도의 제어'가 작동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즉 튜터 왕조와 초기 스튜어트 왕조가 왕권을 발동해서 사회가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경제 개발의 속도를 늦추었기 때문인데, 이는 변화의 과정에서 속도가 방향 자체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의미한다. 변화의 방향은 우리의 의지로는 피할 수 없을 때가 있지만, 어느 정도의 속도 조절은 우리의 의지에 따라 크게 좌우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에서 속도를 높이거나 늦출 수 있는 것이 바로 정부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부의 집중화로 중산층까지 무너져버린 우리 경제는 더 이상 짤 것도 없는 마른 수건이지만, 세계는 또 다시 거대 자본이 이끄는 거대한 전환의 풍랑 앞에 놓여 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수용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공포감도 가세한다. 자유 시장 경제에 순응해야만 한다는 산업혁명 당시의 맹목적 분위기와 너무도 닮아 있다. 그러나 국가 간 치열한 기술 경쟁의 환경에서 기술을 독점한 채 비집고 들어오는 자본의 모습은 산업혁명 시기의 모습과 더 이상 견줄 수준이 아니다.
그 기술혁명의 신호탄이었던 우리나라 승차공유 사업이 처음 합의에 이르렀을 당시, 언론들은 일제히 칭찬 기사를 실었다. 앞으로도 신산업과 기존 산업의 이해 충돌이 계속 발생할 거라면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대화가 문제 해결 방식으로 자리 잡길 기대한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들 문제가 그렇게 도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었던 문제였는지는 의문이다.
영세 음식점 사업에 뛰어든 배달앱 플랫폼들이 열악한 자영업자들 전체 수입의 20%를 점령하고 있다. 공유경제 사업의 협상 테이블에 올라야 할 플랫폼 기술, 그리고 구현해갈 사업 메커니즘과 내용을 택시 기사들은 이해할 길이 없다. 애초 이들 사이에 대등한 협상관계가 성립될 수 없는 이유다. 당장의 생존을 걱정하는 상대방을 향해 당근을 든 채 머릿속에서는 신산업의 계산기를 두드리는 상황을 과연 담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새로운 질서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데도 새 질서에서의 삶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생각해볼 겨를조차 허락되지 않고 있다. 지금의 인류 사회를 가능케 한 것은 기술의 오랜 축적의 결과다. 그 인류의 오랜 축적물이 자본 축적의 새로운 수단이 되고 있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력을 착취해 자본에 기여해왔듯이, 인간을 위해 기여해야할 그 기술이 인간을 파괴하고 핍박하는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변화의 속도, 제어할 수 있을까?
산업혁명은 기적에 가까운 생산도구의 발명으로 촉발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보통 사람들의 삶은 뒤죽박죽으로 망가지는 파국이 함께 나타난 사건이었다. 새로운 조건들 아래 나타난 심각한 폐허와 이전의 사회 조직들이 파괴돼 버린 그 시기에 인간과 자연을 새롭게 통합해보려던 시도들이 왜 참담하게 실패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던 폴라니가 주목한 것이 있다. 바로 '변화라는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였다.
폴라니에 따르면, 어떤 변화가 나타났을 때 방향을 통제할 수 없고 속도도 지나치게 빠르다면 가능한 한 그 속도를 늦춰 공동체를 보호하려는 생각은 너무나 낯익으며, 복잡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데 19세기에 들어오자 이런 생각이 공리주의로부터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고, 경제 성장이 무의식적인 방식으로 벌어지더라도 결국은 스스로 치유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믿음과 경제 개발만 이루어진다면 어떤 결과든 달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신비주의적 태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처음 인간은 스스로 생존하기 위해 노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런 환경 기반이 사라진 채 '자본을 위한 노동'을 해야 했다. 다가오는 기술혁명은 다시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다는 신호를 보낸다. 불안한 인간은 다시 자기를 위한 노동을 되찾고 싶지만, 이미 그 환경은 복구할 수 없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폴라니가 말한 튜터 왕조 시기의 '속도'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에 대한 신념을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가 조정 능력이 무너지면서 겪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를 거대한 전환기로 보았다. 지금 우리는 기술혁명이라는 또 다른 거대한 전환기를 맞고 있다. 거대한 전환기마다 그 방향도, 방향의 원인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인간은 늘 엄청난 충격과 함께 망가지곤 했다. 인간의 의식은 늘 시대의 변화를 따라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는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사회 전반에 복잡하게 누적된 다양한 요인과 욕구로부터 촉발되어 나타난다. 복잡한 사회 현상을 파악할 길 없는 개인들은 변화에 대한 대응은커녕 혼란스러움 속에 그저 떠밀려갈 수밖에 없었다. 이제 방향을 바꿀 수는 없어도 속도를 늦춤으로써 최소한의 기반이라도 지켜냈던 종획운동 당시 '속도'의 교훈을 빌려와야 할 때가 아닐까?
인간을 노동력 가치로만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 태동 이후부터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가 인식하는 인간의 노동은 더는 기술혁명 시대가 원하는 형상이 아니다. 그 자본주의적 인식의 끝자락을 붙들고 기술혁명의 시대를 건너려니 인식의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기술혁명의 도래가 인류를 위협할 것이라는 인식은 패배주의다. 새로운 가치 체계가 인간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면 그 세력에 맞서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려면 다시 속도에 집중해야 한다. 자본은 생명과학·의료, 공유경제, 빅데이터 등 미래 산업이 엄청난 규모의 새로운 시장이라며 광범위한 규제 완화를 서두르라고 압박한다. 모든 인간의 역사적 관점이 무시된 채 경제적 측면으로만 해석하려던 산업혁명기와 비슷한 분위기다. 이제 폴라니가 강조했듯, 정부는 경제 대신 인간을 중심에 두고 미래 사회를 준비해야 한다. 거스를 수 없는 방향으로 휩쓸리더라도 '인간'이라는 중심을 놓지 말아야 할 때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상에서도 자유로워져야 한다. 우리는 자본의 그늘에서 일하는 인간상을 세뇌하며 그로부터 생존할 권리도 주어진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노동은 인간의 삶에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사회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세상을 살아갈 권리와 풍요로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 권리는 자본이 주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태어난 인간의 천부적 권리다. 이 오랜 기억을 되살려 깨어나야 할 때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폼 나는' 복지 브랜드에 그치지 않으려면…
커뮤니티케어(Community Care)로 지역사회가 분주하다. 커뮤니티케어는 '돌봄이 필요한 국민이 살던 곳에서 본인의 욕구에 맞는 다양한 서비스를 통합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혁신적인 사회서비스 정책'으로 정의된다.
커뮤니티케어는 포용적 복지국가 건설을 위한 보건복지부의 핵심 과제로 탈시설과 지역사회 정착 지원을 골자로 한다. 병원과 시설에 의존해 온 노인, 장애인 등이 자택이나 소규모 그룹홈 등에 살면서 필요한 사회서비스를 제공 받을 수 있도록 재가·지역사회 서비스를 확충한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읍면동 주민센터에 전담창구(케어안내창구)를 개설하여 수요자의 욕구에 기반한 케어 플랜을 수립하고 보건소, 복지관 등 지역의 서비스 제공기관과 연계하여 지역 통합 돌봄 체계를 구축한다는 게 보건복지부의 기본 구상이다.
커뮤니티케어, 8개 지자체부터 시작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6월 '커뮤니티케어 추진방향' 발표 이후 수차례의 논의를 거쳐 지역사회가 자기 실정에 맞는 통합 돌봄 모델을 자주적으로 기획하고, 다양한 민관협력 전달체계와 사례관리 모델을 개발하기로 방향을 잡았다. 이에 지난달 8개 지방자치단체가 '커뮤니티케어 선도사업' 추진 지역으로 선정되었으며, 오는 6월 사업 실시를 눈앞에 두고 있다. 노인(광주광역시 서구, 경기도 부천시, 충청남도 천안시, 경상남도 김해시), 장애인(대구광역시 남구, 제주도 제주시), 정신질환자(경기도 화성시)를 주 대상으로 하는 커뮤니티케어 선도사업은 오는 6월부터 2년 동안 추진될 예정이다.
선도사업에 참여하지는 않지만 서울시도 ‘돌봄SOS센터’라는 자체 모델을 수립하여 오는 7월 5개 자치구(강서구, 노원구, 마포구, 성동구 은평구) 시범사업을 준비 중이다. 보건복지부는 지역주도형 사업 추진을 통해 통합 돌봄 모델을 개발하고 핵심 인프라를 구축하는 등 초고령사회로의 진입이 예상되는 2026년 전까지 커뮤니티케어 제공 기반을 구축한다는 계획이다.
'3만 불 시대에 걸맞은 선진국형 복지체계로의 개편'이라는 장밋빛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지역사회 통합 돌봄 구축 계획은 마냥 평안하고 미래지향적인 정책은 아니다. 오히려 고령화에 따른 재정부담(의료비 등 사회보험 지출)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1970년대 이후 여러 국가의 경험이 축적된 커뮤니티케어를 통해 이 문제에 대응하겠다는 위기관리 전략으로서의 성격이 짙다. 시쳇말로 '뽀대 나는 복지브랜드'가 아니라 가중되는 국가부담과 고령화라는 사회적 위험에 대한 대안으로 커뮤니티케어가 도출되었다는 의미다.
전달체계 개편 중심 논의에 빠진 커뮤니티케어
인구구조 등 미래의 환경변화에 대한 공통된 인식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커뮤니티케어를 둘러싼 논의는 결코 단조롭지 않았다. 커뮤니티케어에 대한 상(象)이 이해관계자마다 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논의가 특정 제도를 도입하거나 하나의 서비스를 탑재하는 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서비스 정책의 목적과 방향을 바꾸는 문제라는 데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먼저 커뮤니티케어가 사회서비스 제공의 권한과 책임을 지방정부로 이양하는 행정상의 변화를 수반한다는 점에서 전달체계 개편은 그 자체로 커다란 이슈다. 돌봄 수요를 파악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구축하는 등 적절한 자원을 연계하고 역할을 배분하는 과정이 수월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서비스 구성 및 수가 체계 마련, 인력 확보 및 교육, 품질관리와 평가체계 마련, 유관 프로그램 간 연계프로세스 구축 등 뒤따르는 과제가 산적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뿐인가. 탈 시설과 정착 지원, 적절한 병원 이용을 위한 방안 모색 등 시설 중심 서비스에서 재가·지역사회 중심 서비스로의 이행에 따르는 현실적 문제 또한 만만치 않다.
이 많은 과제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항간에 커뮤니티케어가 전달체계 재편을 중심으로 추진되면서 의사, 간호사, 약사, 한의사, 물리치료사, 심리상담사, 사회복지사 등 이해관계자 간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는 소문이 들린다. 한가한 소리인 줄 모르겠으나, 이들의 갈등에 문제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 불가피한 과정이고 풀어야 할 숙제다. 오히려 궁금한 점은 최근 들어 왜 오직 전달체계를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되는가 하는 것이다. 자치센터에 전담창구가 개설되고 전문 인력이 배치된다고 해서 지역사회 돌봄 체계가 구축되는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
시선을 돌려 공급자가 아닌 수요자의 입장에서 커뮤니티케어를 바라보면 어떻게 다를까? 분명한 건 수요자의 입장에서 사회복지서비스는 욕구기반 접근이 아니라 권리기반 접근으로 오래전에 패러다임을 전환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하여, 세계보건기구(WHO)가 추진하고 있는 고령친화도시 네트워크 구축 프로젝트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WHO는 노인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경제적 부담을 ‘노화’에 대한 긍정적 대처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보고, 2007년부터 고령친화도시 조성을 위한 표준 가이드라인을 개발하여 세계 주요 도시에 배포하고 있다. <표 1>은 WHO가 제안하고 있는 고령친화도시 구축을 위한 8개 영역으로, 지역사회에 거주하는 노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다함께 살기 좋은 도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보여준다.

▲ WHO 고령친화도시 구축을 위한 8개 영역. 자료: WHO, Global Age-Friendly Cities: A Guide, 2007, '고령친화도시 행복한 노년', 2017. 재구성
인상적인 것은, 가이드라인과 고령친화도시들이 공통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고령친화적 조건이 새로울 것 없으나 아주 기본적인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도출되었다는 점이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
노인이라면 누구나 당면하고 있는 이 질문들을 쫓다 보면 고령친화적 조건이란, 건강·돌봄 서비스 뿐 아니라 이동, 주거, 생활환경, 일자리, 사회참여 등 삶의 여러 조건이 공동체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상태를 의미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WHO는 오랜 연구와 실천 경험을 통해 고령친화적 지역사회를 만드는 대전제로 ‘공동체성 회복과 새로운 공동체’를 꼽았다.
복지서비스를 넘어 지역사회를 바꾸는 일
다시 애초의 고민으로 돌아가 수요자, 즉 지역주민의 입장에서 커뮤니티케어를 바라보면, 우리는 행정의 전달체계 개편과는 별도로 어떤 지역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관련된 문제이자, 주민들의 필요에 맞게 지역사회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이러한 노력을 사회연대경제라고 불렀다.
이 점에서 커뮤니티케어는 사회적 경제와 마을공동체, 도시재생, 지역 주민 등 지역사회를 중심으로 모인 주체들이 함께 추구할 수 있는 공동의 목표가 아닌가 싶다. 지금은 그간 분절되었던 정책 간 경계를 허물고 포괄적인 거버넌스를 구축하여 커뮤니티케어 기반 조성에 적극 나서야 할 때다.
지방정부 역시 행정 중심의 전달체계 개편에서 한발 더 나아가 지역의 다양한 주체들과 함께 공동체의 포용성을 확장하는 전략적 노력에 힘을 실어야 한다. 마을의 역동이 일어나지 않고서 '커뮤니티'케어가 구현되기란 어렵다. 시선을 돌려 사람을, 지역사회를 바라보자. 커뮤니티케어는 전달체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가 누리고자 하는 삶의 형태, 행복에 관한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