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마블 열풍] 어벤져스: 히어로들을 떠나보내며

일취월장7 2019. 5. 16. 10:32



[마블 열풍] 어벤져스: 히어로들을 떠나보내며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3 08:00
아이언맨과 로건, 그들과의 작별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히어로 영화를 향해 “3000만큼 사랑해”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경험은 희귀한 것이다. 그 드문 일이 《어벤져스: 엔드게임》(이하 《엔드게임》)에서 벌어지고 있다. 당최, 무슨 일인가.

《엔드게임》은 ‘지구 절반을 가루로 만들어버린 타노스에 맞서 잃어버린 5년의 시간을 회복하고자 하는 영웅들의 이야기’라고만 요약해 버리면 살짝 허무하다. 관객들의 정서를 건드리고 급기야 눈물 흘리게 하는 감흥의 정수는 아이언맨이라 불렸던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의 은퇴식이었다. 

토니 스타크는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머리가 비상해 15세에 MIT 공대에 입학했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스탁 엔터프라이즈’ 회장이 됐다.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그는 타인 공감 능력이 떨어졌다. 윤리에 둔감했다. 치명적인 살상 무기를 팔아 부를 축적했다. 사생활은 방탕했다. 술과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어벤져스: 엔드게임》

토니 스타크로 태어나 영웅으로 떠나다 

그러던 중 게릴라군에 납치돼 무기 제작을 강요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그곳에서 그는 전쟁 무기의 참상을 본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토니 스타크는 이전의 토니 스타크가 아니었다. 아이언맨 슈트를 입은 후 지구를 지키는 일에 앞장섰다. 영웅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트라우마도 겪었다. 상실감도 맛봤다. 그리고 세상 그 누구보다 이기적이었던 이 남자는 여정의 끝에서 자신을 희생하고 세상을 살린다. 개인의 행복 대신 대의를 선택한다. “나는 아이언맨!(I am Iron Man!)” 토니 스타크로 태어나, 영웅으로 죽는다. 

혹자는 슈트가 없는 토니 스타크는 평범한 억만장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위기의 순간 핑거 스냅을 선택한 건 슈트가 아니다. 토니 스타크의 마음이 한 일이다. 슈트를 입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하는 건 어렵다. 슈트가 없어도 토니 스타크는 영웅이었다.    

아이언맨을 연기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지금의 마블 공화국을 이끈 개국공신이다. 2008년 《아이언맨》 이후 총 11개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에 짧고 굵게 출연했다. 11년 동안 아이언맨은 곧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곧 아이언맨이기도 했다. 토니 스타크가 방탕한 삶을 살다가 변화하는 과정은 마약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뜨렸다가 재기한 다우니의 인생과 겹친다. 캐릭터와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가 분신처럼 붙어 서로에게 영향을 준 경우.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남기고 간 슈트는 또 다른 배우가 입을 테지만, 그 누구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같을 순 없을 것이다.

지난 4월 《엔드게임》을 들고 내한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아시아 정킷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2008년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저는 젊었고 여러분 대다수는 어렸습니다. 멋지게 성장한 여러분을 보니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 MCU는 현실에는 없는 판타지다. 하지만 이 세계 안에 쌓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팬들의 추억은 리얼이다. 그의 마지막을 자꾸 돌아보게 되는 이유다. 《엔드게임》은 슈퍼히어로가 퇴장하는 방법에 대한 좋은 사례로 기억될 것이다.

2017년 《로건》(왼쪽), 2009년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휴 잭맨
2017년 《로건》(왼쪽), 2009년 《엑스맨 탄생: 울버린》의 휴 잭맨

영웅으로 살았던 울버린, 아버지 로건으로 죽다

아이언맨을 떠나보내며 울버린이라 불렸던 로건(휴 잭맨)을 떠올렸다. 마블의 개국공신이 아이언맨이라면, 《엑스맨》 시리즈의 출발은 휴 잭맨이다. 그는 2000년 《엑스맨》을 시작으로 카메오 출연을 포함해 이 시리즈에 총 9번 출연했다. 그리고 지난 2017년 《로건》을 통해 팬들과 안녕을 고했다. 

울버린/로건은 늘 외로웠다. 자가 치유 능력인 ‘힐링 팩터’는 타인에겐 부러움일 줄 모르나 그에겐 재앙이었다. 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진 상실감, 누군가를 지켜내지 못한 미안함이 그의 인생을 지배했다.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사랑하는 여인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장 두려워한 건 사랑이었다. 사랑하는 이를 잃지 않는 방법은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벌했다. 이 아련한 사내의 삶을 무엇으로 구원할 수 있을까. 아니, 애당초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 

울버린/로건은 《로건》에 이르러 강한 힘을 지닌 ‘히어로 울버린’이 아닌, 늙고 지친 모습으로 등장해 충격을 안겼다. 그런 로건 앞에 정체불명의 집단에 쫓기는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나타난다. 울버린의 DNA에서 배양돼 태어난 돌연변이, 즉 딸이다. 로건은 두려웠다. 또다시 지켜야 하는 것이 생긴다는 것이. 하지만 외면하지 못했다. 특유의 기질 때문이기도 했지만, 로라에게서 자신을 봤기 때문이리라. 로라를 구하기 위해 떠난 여정은 어떻게 보면 지독히도 고독했던 울버린을 구원하는 여정이었다. 노쇠한 로건은 로라를 지키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초능력이 감퇴한 로건을 지탱한 건 마음이었다. 의지였고, 안간힘이었다. 지켜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로건은 로라를 지켜냄으로써 자신과도 화해한다. “So, this is what it feels like(이런 느낌이었군).” 로건은 세상과 작별하며 죽음의 감각을, 그리고 가족이란 이름의 정의를 온몸에 새겼다. 영웅으로 살았던 울버린은 아버지 로건으로 죽는다. 

이 영화에서 휴 잭맨의 주름과 휘청거리는 육체는 그 자체가 서사로 기능했다. 31세에 《엑스맨》에 입사한 휴 잭맨은 울버린과 함께 늙었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자의 뒷모습은 슬프지만 아름답다. 《로건》은 17년간 장기 근속한 휴 잭맨에 대한 더없이 아름다운 헌사였다. 

울버린을 내려놓으면서 휴 잭맨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제가 사랑했던 캐릭터와 이별을 고해야 할 시간이 됐어요. 영화는 끝이 났지만 역할은 내면에 남아요. 단순히 캐릭터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울버린은 떠났지만, 그는 떠나지 않았다. 적어도 우리 마음속에서. 그들은 고통 없는 그곳에서 편히 쉬고 있을까. 

캐릭터와 아름답게 이별하는 법

팬들과 아름답게 작별한 캐릭터는 아이언맨과 울버린 외에도 있다. 전 세계에 마법 돌풍을 일으킨 《해리포터》 시리즈는 16년 동안 총 8편의 작품이 팬들을 만났다. 시리즈 1편이 시작할 때 귀여운 꼬마였던 세 주인공 해리(대니얼 래드클리프), 헤르미온느(엠마 왓슨), 론(루퍼트 그린트)은 마지막 편에 모두 어엿한 청년이 됐다. 누군가의 성장을 곁에서 지켜본다는 건, 그리고 세간의 관심 속에서 성장한다는 건, 배우에게도 팬들에게도 특별한 경험이었다. (비록 컴백을 예고하긴 했지만) 15년간 이어진 《토이스토리》 3부작의 엔딩은 전 세계에 눈물 주의보를 발령하게 만들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어느덧 대학에 들어갈 나이가 된 앤디(존 모르스)와 장난감들의 마지막은 성숙한 이별의 정의를 새기며 커다란 감흥을 안겼다. 본문에서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엔드게임》은 캡틴 아메리카/스티브 로저스(크리스 에반스)의 은퇴식으로 바라봐도 당연히, 충분히, 굉장히, 유의미한 작품이다. 그의 퇴장은 아이언맨과는 또 다른 색깔의 감흥을 안긴다. 1편 《퍼스트 어벤져》에서 사랑하는 여인 페기 카터(헤일리 앳웰)와의 데이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스티브 로저스는 긴 시간을 돌고 돌아 그 약속을 지킨다. 이토록 로맨틱한 은퇴식을 본 기억이 없다.   



[마블 열풍] 어벤져스가 ‘그저 그랬던’ 몇 가지 이유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9.05.13 08:00
“우린 매일 홀로 싸운다”
훨씬 강력한 ‘현실의 세계관’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저 그렇던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배들에게 둘러싸였다. 입사 이래 이런 분위기가 연출된 적은 없었다. 아군은 없었다. 겨우 용기를 내 외쳤다. “재미없다고 느낀 이유를 설명해 줄게!” 그렇다. 이 기사는 ‘다름’ 때문에 시작됐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그저 그렇게’ 본 죄. 그 이유를 낱낱이 고하고, 너그러운 이해를 구하고자 한다. 

영화는 전작을 보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친절한 방식으로 내러티브가 구성됐다. 곳곳에 마블의 역사를 훤히 꿰는 관객만 이해할 수 있는 유머와 디테일(가령 디즈니를 상징하는 생쥐가 나오는 장면처럼)이 있었겠지만, 서사의 큰 흐름은 전편들을 보지 않아도 따라가는 데 무리가 없도록 짜였다. 

문제는 ‘너무 친절했다’는 점이다. 시간 여행을 하기까지 히어로들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이해할 수 있도록 ‘너무 자세히’ 설명을 했다. 러닝타임의 절반가량을 할애해서! 말 그대로 히어로들이 모인 ‘어벤져스’이기에 불가피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히어로 모두의 서사를 설명하려는(telling) 욕심을 조금 내려놓았다면 어땠을까. 그러다 보니 영화가 전반전·후반전으로 나눠졌다는 느낌도 들었다.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 월트디즈니컴퍼니 코리아

‘인간 같은’ 히어로들이 그리는 서사의 한계

‘마블 유니버스’라는 세계관은 거대했고 새롭기까지 했지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지는 못했다. 어떤 화두를 던져주지도 못했다. 물론 히어로들이 인간처럼 상실과 부재의 쓰라린 아픔에 고뇌하고,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도망치고, 갈등하고 다투지만 끝내 힘을 모아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인간다웠다.  

하지만 ‘인간처럼’의 한계는 분명했다. 오히려 히어로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적은 분명했다. 그리고 ‘하나 되어’ 싸웠다. 이 점이 감동을 반감시켰다. 사실 적이 분명하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타노스처럼 적이 강해도 하나 되어 싸울 수 있다면 그 싸움은 할 만하다. 그 과정에서 내가, 동지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해도 그 죽음은 기억된다.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히어로도 아닌 우리는 매일 홀로 싸우고, 겨우 버틴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못하지만 그렇게 매일 살아낸다. 마블 유니버스가 그럴듯한 판타지일 수는 있지만 공감할 만한 무언가를 남기지 않았던 이유다.

이번 영화의 폭발적인 흥행 비결 중 하나였던 영화사의 영리한 ‘스포일러 마케팅’은 영화의 감정선을 충분히 느끼게 하지 못하는 ‘독’으로 작동했다. 영화는 시작과 동시에 아이언맨이 비극을 맞이한다는 암시를 너무 또렷이 알려줬다. 예고된 비극은 히어로가 비극적으로 사라질 때의 슬픔과 울림을 반감시켰다. 

오히려 그 순간 현실에서 존재했던, 우리의 히어로들이 떠올랐다. 국가재난사태가 선포됐던 강원도 산불을 끄기 위해 전국에서 밤새 달려간 영웅들 말이다. 목숨을 걸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냈고, 그리고 자신들도 ‘살아남은’ 우리의 히어로들. 맞다. 그들은 살아남았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감동했다. 우리는 더 이상 누군가의 희생과 헌신으로 지켜지는 그런 ‘유니버스’를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영화의 비극적 결말로 가슴이 흔들리기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2019년 대한민국의 현실이 훨씬 더 극적이고 서사적이었다. 



자본시장의 어벤저스 'ESG', 한국서도 가능할까

[삶은경제] 자본시장 트렌드는 착한 투자...한국은?
2019.05.16 09:07:45

자본시장, 그 중에서도 주식시장은 투자자들에게 약육강식의 정글에 진배없다. 누구나 장밋빛 수익을 꿈꾸며 자본시장을 두드리지만, 현실에서 마주하는 풍경은 살벌하다. 

수많은 개인투자자들이 손절을 반복하며 깡통, 혹은 빚더미 계좌로 밀려나는 사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외국인과 기관투자자들은 개인투자자들이 넘보기 힘든 정보력과 공매도, 인공지능 등의 무공을 뽐내며 정글의 맹주로 군림한다. 기업이라고 다르지 않다. 상장회사가 된다는 것은 자금 조달에 숨통을 틔울 절호의 기회다. 하지만, 작은 회사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시장의 악성 루머에 돈줄이 막히거나 인수합병의 파도에 휩쓸리는 것 또한 순식간이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약한 자본력을 가진 시장의 플레이어들은 늘 바람 앞의 촛불이요, 고양이 앞 쥐와 다를 바 없는 심정으로 생존을 위해 오늘을 살아야 한다. 힘이 없으면 강자의 먹잇감이 돼야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에서 환경이니, 인권이니, 공정이니 하는 가치는 먼 세상 얘기처럼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 이런 맹목적 시장에서 공익을 위한 가치가 존중받으려면 마블 스튜디오가 어벤저스라도 보내줘야 하지 않을까? 

맹목적 자본시장, 강호의 도리는 가능할까? 

말이 나온 김에, 아이언맨처럼 정의롭고 힘 센 자본이 주식시장에 등장하는 상상을 해본다. 일단 그런 자본은 인류 최대의 위기라는 지구온난화 주범 기업들, 그리고 반 환경 기업들과 맞서지 싶다.  

지구온난화로 인류 멸종을 걱정 할 판이지만 주식시장에서 그런 기업들이 퇴출됐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돌아가신 분이 이미 1403명인데도 관련 기업들은 여전히 자본시장에서 성업 중이다. 개인과 기관 투자자들이 그런 기업들의 주식을 열심히 사고 팔며 기업은 그런 자본시장을 바탕으로 자금을 조달한다. 이런 생태계 한복판에 산림을 보호하고 탈 석탄 사회를 선도하는 기업에 돈줄을 대고, 환경 재앙을 일으킨 악당의 돈줄은 끊어 숨통을 조이는 강력한 자본이 등장한다면? 상상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다. 

악당 자본이 활개치는 대한민국 자본시장 

환경만큼 히어로가 절실한 가치가 있다면 바로 인권과 노동이다. 노조 탄압은 기본이고, 직장갑질 일삼으며, 여성노동자 차별하고, 흑자 구조조정을 아무렇지 않게 해대는 대기업들이 주식시장에서 승승장구하며 투자자들을 몰고 다니는 작태는 이제 너무 자주 봐서 신물이 날 지경이다.  

이런 기업들에 투자됐던 돈줄을 막고, 노동3권을 존중하는 기업, 정당하게 축척한 이윤을 사회에 환원하고 승자독식 대신 공정경쟁을 원칙으로 삼은 기업들에 투자의 물꼬를 여는 세력이 있다면, 그런 자본은 아이언맨으로 불려도 충분하다. 혹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자동으로 조절하는 자본시장에 아이언맨 같은 자본을 상상하는 것은 어리석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타노스의 세계관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면, 악과 맞서 싸울 어벤저스가 필요하다. 

당신이 몰랐던 글로벌 자본시장의 어벤저스 

지금까지 해본 상상은 그저 허황된 망상이 아니다. 최근 10년 사이 유럽연합(EU), 미국, 일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수많은 나라들이 자국 자본시장에 맹목적 수익추구 대신 명백한 공익적 기준에 입각해 투자하는 자금 운영 비중을 급격히 키워가고 있다(표1). 

▲표1. 주요국의 SRI 비율. ⓒ백정현


약육강식의 자본시장에서 이렇게 히어로 역할을 자임한 자금은 자본가들이 아니라, 바로 국민이 만든 돈, 연금기금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교훈 이후 각국 정부는 국가를 대표하는 기금들이 환경, 인권과 노동, 공정경쟁 등 핵심 공익을 외면하는 기업을 투자 대상에서 배제하는 이른바 책임투자 원칙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연금기금의 투자를 결정할 때 재무적 분석에서 나가 환경권, 사회권, 거버넌스 등 공익을 위반하지 않는 기업에 한정한다는 비재무적 특성까지 반영한 이 정책은  에코에서 E, 소사이어티에서 S, 거버넌스에서 G를 따서 ESG공시제도, 혹은 SI(Sustainable Investment, 지속가능투자), SRI(Social Responsible Investment, 사회책임투자) 등으로 불리며 이미 국제적 연성규범으로 안착했다. 

일본 GPIF, 2년 새 관련 투자 6천% 이상 확대 

연기금의 사회책임투자에서 가장 돋보이는 국가는 이웃나라 일본.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일본의 공적연기금 GPIF은 2014년과 2016년 사이 ESG를 반영한 기금의 사회책임 투자 규모를 (놀라지 마시라!) 기존보다 무려 6692% 키웠다(표2). 이 투자가 일본 자본시장의 분위기를 얼마나 바꾸었을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막대한 규모다. 

▲ 표2. 일본의 SRI 증가율은 무려 6692%에 달한다. ⓒ백정현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노르웨이 국부펀드(GPFG)는 어떤가. 노르웨이 재무부가 설정한 국부펀드 운영 지침인 '투자 배제와 감시를 위한 가이드라인'은 펀드의 투자 대상 기업이 담배, 특수한 형태의 무기 생산, 석탄화력발전 등의 제품에 관련될 경우 투자 배제를 권고하고, 인권 침해와 환경 피해, 부정부패, 기후변화, 윤리적 규범 침해 등 활동에 연루될 경우도 투자 배제 이슈로 다룬다. 연금투자가 자본시장에서 공익의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시작 한 것이다. 

새롭고, 정의로우며, 시장질서에 충실하기까지 한 경험 

노르웨이 국부펀드와 함께 세계적 규모를 자랑하는 캐나다 온타리오 교원 연금의 경우 사회책임투자를 위한 기업 대상 모니터링에서 한 발 더 깊이 들어간다. 이들은 아예 해당 기업에 함께 투자하는 다른 투자자가 온타리오 교원 연금이 추구하는 환경, 인권 및 노동, 공정경쟁 등의 관점에 동의하는 투자자인지 여부까지 검토한다! 투자를 결정한 기업의 다른 투자자가 잘못된 관점으로 투자 기업을 혼란에 빠트릴 가능성까지 고려한 것이다. 

막대한 자본력을 확보한 연기금들이 이렇게 공익이라는 관점을 우선해 투자 기업을 결정하게 되면 자본시장은 어떻게 반응할까? 우선 기업들은 자신들이 환경파괴, 인권침해, 공정경쟁을 저해하는 활동과 무관함을 공시해야 자본시장 최대 기관투자자의 투자를 받을 수 있으니, 잘못된 사업계획은 폐기하게 된다. 만약 어떤 기업이 이런 위험을 무시하는 경우 기관투자는 물론이고 기관투자자의 동향에 민감한 개인투자자의 외면까지 받게 돼 최악의 경우 자본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다. 이것은 맹목적 수익에 목을 매던 자본시장에 환경과 인권, 공정경쟁의 가치가 수익률과 연결되는 경험을 부여한다. 새롭고 정의로운 질서가, 시장원리에 충실한 방식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과연 문재인 정부는 정의를 바라는가? 

정부가 연기금에 공익 수호의 사명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자본시장에서 공익의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는 놀라운 기적은 우리가 잠든 사이 세계 각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기가 찬 것은 기금규모 667조4000억 원의, 노르웨이 국부펀드에 이어 무려 세계 3대 기금의 몸집을 자랑하는 대한민국 자본시장 갑중의 갑, 국민연금은 여전히 덩칫값을 못한 채 수익률만을 쫒는 기관투자자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지난해 7월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고, 대한항공 조양호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을 부결시키며 국민적 관심을 모았지만, 정작 의결권 행사에 비해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는 ESG관련 규범 수립은 문재인 정부 출범 2년이 넘도록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상황이다. 보건복지부가 뒤늦게 오는 6월까지 ESG관련 평가지표를 공개한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정부가 실효성 있는 규범 마련을 위해 NGO나 노동단체들과 소통한다는 얘기는 없다. 촛불정부를 자임하는 정부가 과연 곧 있을 지표 발표에서 국민연금기금의 사회책임투자를 국제규범 수준에 부합하는 수준까지 올려놓을 것인가? 출범 2년, 금융 분야에서 이전 정부와 아무런 차별성을 보여주지 못한 문재인 정부가 과연 우리 주식시장에 새 역사를 쓸 수 있는 아이언맨을 원할지를 지켜 볼 일이다. 

소통을 이야기 하는 ‘어벤져스:엔드게임’

<어벤져스> 히어로들은 때로 응원하고 때로 욕하는 친근한 이들이다. 촘촘한 이야기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함께 흐른다. 그렇게 <어벤져스:엔드게임>은 소통을 이야기한다.

강혜경 (자유기고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5월 16일 목요일 제608호

끝이 없는 이야기를 바랐다. 각기 다른 능력과 결함을 가진 <어벤져스> 히어로들은 손닿지 않는 먼 존재 혹은 절대적 숭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애틋하게 응원하고픈, 때로는 왜 저러냐며 욕하기도 하는 친근한 이들이다. 무엇보다 이들이 활동하는 무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인 것만 같다. 당초 원작 만화는 ‘평행우주’라는 설정이 있어, 동시에 존재하는 여러 시공간에서 많은 갈래의 이야기들이 펼쳐졌던 터라 어쩔 수 없는 판타지라는 느낌이 강했다. 반면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 스튜디오에서 제작하는 영화 및 드라마들이 속한 세계관)>는 하나의 시간 축만을 설정하고, 현실의 연도와 일치시켜 한줄기의 이야기를 끌고 나간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2012년 뉴욕’, ‘2013년 런던’ 등 지금의 시간과 익숙한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영화와 드라마에서 명시적으로 밝히기도 한다. 게다가 그 이야기가 2015년 서울, 2016년 부산을 경유하자 몰입감은 더욱 커졌다. 촘촘히 진행되는 이야기는 내가 살아온 시간과 함께 흐르는 듯했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이들 역시 함께 살아서 이야기가 이어지는 게 당연할 것만 같았다.

ⓒ연합뉴스
4월15일 <어벤져스:엔드게임> 제작진과 출연진이 서울에서 열린 팬 이벤트에서 인사하고 있다.
그래서 아주 열심히 부정해봤다. 지난해 5월, <어벤져스> 원년 멤버를 연기한 배우 6명 중 5명이 어벤져스 마크와 숫자 6을 의미하는 타투를
팔에 새겼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그저 기념으로 했겠거니 하며 웃어넘겼다. 주요 멤버들이 마블 스튜디오와 계약한 출연 회차가 곧 만료된다거나, 이번이 원년 멤버들의 마지막을 알리는 작품이 될 거라거나 하는 소식이며, 심지어 최종장을 뜻하는 <어벤져스:엔드게임>이라는 제목 앞에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하지만 결국 모를 수 없었다. 이번이 누군가에게는 마지막 인사가 되리라는 걸 말이다. 온 마음으로 보내주고 싶어서 영화 관람 전까지 철저하게 준비했다. 빠르게 영화 예매를 하고, 커뮤니티와 SNS에는 당분간 발을 끊고, 혹시나 스포일러 내용을 전송받는 ‘테러’를 당할까 봐 스마트폰의 무선 공유 기능(에어드롭)도 꺼두었다. 그랬으면서도 이번에는 속편 예고 영상이 없으니 엔딩크레디트가 다 올라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는, 먼저 본 지인의 말에 괜스레 마음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러고는 이 마지막이 어떤 형태의 의식이 될까 그려봤다. 졸업식, 은퇴식 혹은 장례식일까.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에 대한 고별


영화 시작과 함께 빨려 들어갔다. 지난 <어벤져스:인피티니 워>의 마지막에서 전 우주 생명체의 반이 먼지가 되어 사라질 때, 그 자리의 히어로들은 최소한 그게 타노스에 의한 것이라는 연유라도 알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른 채로 아무런 단계도 없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보통 사람들의 슬픔과 무력감은 아주 다른 무게로 그들의 삶을 짓누르고 있었음을, 영화는 사라진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수많은 기념비와 회색빛의 텅 빈 뉴욕 메츠 구장으로 전했다. 이 거대한 트라우마 속에서 히어로들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고뇌하며, 또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누군가는 잊은 척하고, 누군가는 자신만은 기억하고자 하고, 누군가는 그래도 나아가야 한다 말하고, 누군가는 아직 남아 있겠다 한다. 끓어오르는 분노를 폭발시키는 이가 있는가 하면, 조용히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이도 있으며, 부딪치는 자신의 내면을 화해시키고 한 단계 성장한 이도 있다. 모두가 너무나 그럴 만한 개연성을 지니고 있다. 이 차이들은 퍼즐처럼 맞춰져 마침내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낸다. 필연적인 운명 혹은 이미 다 끝나버렸다고 여긴 현실에 도전하는 인간 군상의 의지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나처럼 가슴을 울린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났다. <어벤져스:엔드게임>은 10여 년을 지나오며 히어로 영화의 상징과도 같아진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를 보내주는 의식이다. 그러자면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과정이 필요했고, 그래서 영화는 2012년, 어벤져스가 처음으로 팀을 꾸렸던 뉴욕으로 돌아갔다. 시작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뿐 아니라 이미 풀린 뉴욕 배경 촬영장 사진을 통해서도 이번 영화에서 당시의 모습이 등장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막상 그 시공간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벅찬 그리움이 밀려들었다. 오랜 시간 함께한 팬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장면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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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영화관에서 관객들이 마블 상품을 구매하기 위해 줄 선 모습.
그러나 영화는 추억팔이나 하려는 게 아니었다. 과거로 회귀가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소통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숨겨져 있어서 몰랐던 노고들에 감사하고, 그때보다 성장한 히어로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실은 이 팀이 꾸려진 2012년의 히어로들은 지금과 아주 많이 달랐고 각자의 아픔과 목표가 공유되지 않아 힘들었지만, 지금까지 함께 싸우며 동료이자 가족이 되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팬들 역시 같이 자랐고 어벤져스 멤버들과 서로 힘이 되어주는 존재가 됐다. 이번 영화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아이언맨 역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시리즈와 같이 성장한 팬들에 대한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아쉽게도 이번 영화가 원년 멤버 팬들이 모두 만족할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전체 서사에서는 아이언맨이, 주요 장면에서는 캡틴 아메리카가 돋보였던 탓이다. 이후 시리즈 출연이 예상되는 멤버들의 비중을 줄여가면서라도,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에게 확실하고도 완벽한 마지막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없이도 히어로 세계를 이끌어나갈 수 있다는 마블 스튜디오의 자신감과 각오마저 느껴졌다.

새 시대가 시작된다. 누군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끝은 아니다. 이 역시 진짜 삶의 한 부분임을 마주한다. 영원히 살아가는 사람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를 보내고 또 새로 만나왔다. 원년 멤버들이 물러나며 만들어준 다리를 건너 새로운 세대들을 맞아들일 준비를 한다. 능력과 성격뿐 아니라 성별, 인종, 연령, 성적 지향에서 이전보다 더욱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히어로들에 기대하는 바도 남다르다. 두근두근한 마음과는 별개로 그래도 아직은 추억에 잠겨 있고 싶다. 오늘 저녁엔 치즈버거를 먹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