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
시작된 대화 재개 프로세스
4월 11일을 전후한 한반도 정세는 긴박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했고,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를 개최했다. 평소라면 통상적으로 여겨질 일들이지만,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북핵 문제 당사국 정상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있었기에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은 일단 북·미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가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은 워싱턴에서 가진 정상회담에서 공고한 한미동맹을 재확인했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불거진 한미동맹 균열설을 잠재우는 것이 급선무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빅딜이 필요하다는 기존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빅딜이 성사된다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스몰딜도 가능하다는 약간의 유연성을 보였다. 3차 정상회담을 원하지만 조급하게 추진하지는 않는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의 입장을 알고 싶다는 의중도 밝혔다.
아울러 트럼프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의 군사 장비를 구입하기로 한 점에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어쨌든 한국은 대화의 모멘텀을 이어간다는 목표를 미국 측으로부터는 일단 확인했다.
같은 날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최고인민회의에서 한 첫 시정연설에서 장문의 입장을 밝혔다. 경제문제에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했으며, 미국과의 대화 및 남북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국내부문에서 외부에 의존하려는 사고를 버리고 자력갱생에 매진해야 한다는 점과 내부의 부정부패 일소와 절약정신을 강조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내각 총리를 교체하는 등 조직도 새롭게 정비했다.
미국에 대해서는 3차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확인했지만 미국이 북한의 요구를 수용한다는 전제를 달면서 올해 12월까지 시한을 정했다. 한국에게는 중재자나 촉진자가 아니라 당사자의 입장임을 분명히 하라고 주문하는 한편 민족공조를 강조했다. 북한 역시 기존 입장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대화 모멘텀을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긴박했던 시간이 지나고 북한과 미국은 대화를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확인했다. 이제 양국 입장의 간극을 줄여서 다시 톱다운 방식의 북·미 대화를 이어가도록 만드는 일이 남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방문 직후 시기와 장소, 의제와 상관없이 빠른 시일 내에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북측에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직까지 답이 없다. 오히려 인도적 지원을 포함한 남북 간 접촉을 중단하고 있다는 소식만 들릴 뿐이다.
북한은 미국에 대해 먼저 포문을 열었다. 북한 외무성은 4월 18일 미국담당국장이 <조선중앙통신>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관계는 좋은데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대화의 걸림돌이라고 지적하며 대화상대의 교체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대화 재개를 위한 프로세스가 시작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 지난 10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를 주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로동신문
시간은 북한편이 아닌 이유
김정은 위원장은 시간은 북한 편이라는 전략적 선택을 했다. 북·미 협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북한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자력갱생으로 버틸 것을 북한 주민들에게 요구하고 있다. 그 시한을 12월로 삼았다.
북한에서 김정은 위원장의 결정에 누구도 토를 달 수 없을 것이다. 신년사를 열심히 학습했던 북한주민들은 이제 시정연설 공부에 몰두하고 있다. 김 위원장 이외에 누구도 연설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는 경직된 상태다. 협상 대상을 바꾸라고 요구한 북한 외무성의 반응은 그 경직성을 대변한다.
그런데 시간은 북한 편이 아니다. 우선 경제문제를 보자. 김정은 위원장은 취임 이후 첫 육성연설에서 "다시는 북한 주민들이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를 위해서는 북한에 외부 자원을 들여와야 한다는 사실이 지난 5년 동안 충분히 증명됐다.
석탄 수출을 통해 일부 경공업 공장들은 다시 가동되기 시작했다. 경제제재로 석탄 수출이 중단됐지만 이를 내부에 공급해 전기생산과 석탄화학공업 가동에 이용하고 있다. 분조관리제를 통해 농업부문에 생산방식의 변화를 추구했고 이로 인해 식량생산도 어느 정도 정상화됐다. 사회주의기업책임관리제를 통해 공장·기업소에 소속된 노동자들의 삶도 일부 개선된 것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사적 유통망, 즉 시장을 이용한 유통구조의 정착이 한몫을 담당했다. 이제 북한은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경제로 전환되었다. 이 정도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10% 미만에 불과했던 대외의존도를 30% 가까이 높였기 때문이다.
북한의 자력갱생은 대외의존도를 10% 미만으로 낮출 것을 요구한다. 지금 북한경제는 1970년대 수준을 일부 회복했을 뿐이다. 북한 주민들은 상대적으로 삶이 풍요로웠던 1970년대 이전을 그리워한다. 지난 5년여의 시간은 대외 의존도를 높이고 시장을 활성화함에 따라 일정 부분 과거의 향수를 충족시켰다.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은 단순히 자연재해 때문에 나타난 것이 아니다. 북한경제는 풍부한 물자 공급 능력을 기반으로 시작된 분배 중심의 사회주의 경제가 부족한 물자공급 능력을 배급으로 눈가림하려는 모순에서 기인했다.
북한경제는 지금 성장이 필요하다. 1970년대 수준의 경제는 인구 1500만 명에 걸맞은 규모다. 북한의 인구는 이제 2500만 명이다. 40% 가까이 경제규모를 키워야 한다. 지난 5~6년의 성과로 1970년대 수준을 일부 회복했다고는 하지만 다시 자력갱생으로 버티기에 들어갈 경우 경제규모 축소는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이다. 최소한의 수준으로 버티기는 가능하겠지만 부족 현상은 빠르게 심화될 수밖에 없다.
반면 경제제재를 취하는 국제사회는 급할 것이 없다. 북한과의 경제의존도가 제로에 가깝기 때문에 경제교류가 중단된다고 국제사회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핵 문제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하며 급할 것이 없음을 강조했다. 중국이나 러시아에 기대할 수 있겠지만 양국 모두 국제사회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북한 지원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할 여력이 없다.
한국은 당사자이기 때문에 중재자와 촉진자 역할을 자처하고 동분서주 북·미간의 대화를 통한 해결점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중국이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유엔안보리 제재결의를 무시하고 북한과 교류에 나설 수는 없다.
북한은 '오지랖 넓게' 중재하려 하지 말고 '당사자' 역할을 하라며 우리정부를 압박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면 중재자의 역할을 자처할 이유도 없다. 이러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는 언사는 한국의 국제적 입지만 줄어들게 할 뿐이다.
12월은 미국이 아닌 북한에 주어진 시간
이번 김정은 위원장의 전략적 선택은 북한 주민들의 허리띠 졸라매기만을 지속적으로 강요할 수밖에 없다. 12월까지로 언급한 시한은 미국이나 국제사회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북한에 주어진 시간일 뿐이다.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의 국내정치적 일정을 고려해서 12월의 시한을 두었을 것이다. 이것이 오히려 북한의 다음 수순을 어렵게 만드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하계휴가 기간이 끝나고 늦어도 9월이면 차기 대선 캠페인에 들어간다. 한국은 내년 상반기 총선을 앞두고 있다. 그래서 그 이전에 북핵문제를 해결하려는 조급함이 있을 것이라고 북한은 볼 것이다.
그렇지만 계산 착오다. 이 시기가 되면 지금과 같이 북핵문제에 전념할 여력이 없다. 북핵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시간이 늘어지면 북한경제의 고통은 가속화된다. 이미 북한 주민들은 시장경제의 맛을 보았다. 돈이 없으면 생활할 수 없는 구조로 바뀌었다.
북한 주민들의 자발적 복종과 과학기술 중시만으로 버티기를 지속할 수 없다. 북한의 10% 대외의존도는 북한에 없는 것을 외부에서 들여오는 것이다. 10%가 없으면 북한경제는 돌아가지 않는다.
이미 일부에서는 1990년대의 부족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환율과 쌀값을 비롯해 아직은 시장물가에 큰 변동이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시장가격은 돈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국가 배급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30% 가까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버티기가 지속될 경우 국가 배급에 의존하는 비중이 증가하게 되며, 상대적으로 시장은 빠르게 축소된다.
일정 기간 절약정신으로 버틸 수는 있겠지만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를 경험했고, 시장을 통해 고통의 긴 터널을 벗어났던 북한 주민들은 다시 1990년대의 '고난의 행군'을 생각조차 하기 싫을 것이다. 고통의 터널이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시간이 지속될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주민들에게 다시는 허리띠를 졸라매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말 것이다.
한미 정상은 3차 북·미 정상회담의 의지를 밝혔다. '빅딜' 이후 '굿 이너프 딜'이라는 중재안도 마련했다. 김정은 위원장 역시 3차 회담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속히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해서 탑다운 방식의 대화 모멘텀을 이어가려고 한다. 이는 북한에게 주어진 기회다. 김정은 위원장이 말한 12월의 시한보다 더 빨리 시한을 앞당기는 것이 북한에게 유리한 국면을 가져올 수 있다.
북한 비핵화의 최종적인 상태는 빅딜을 통해 먼저 규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행동 대 행동의 단계적 이행을 통해 서로의 신뢰를 축적해 나간다면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에게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12월을 어떻게 맞을 것인지는 북한의 선택으로 넘어갔다.
트럼프, 북한에 대한 '완승' 전략으로는 역사 못만든다
다른 하나는 새로운 외교이념과 시대적 과제를 제시한 인물들이다. 집단안보체제라는 새로운 개념을 바탕으로 국제연맹을 창설한 우드로 윌슨, 유엔의 역할을 단순한 '평화 관리'가 아니라 '평화 창출'로 설정하고 세계를 누빈 제2대 유엔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 가운데 윌슨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들고 나온 '14개 조항'으로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특히 '14개 조항'에 포함된 민족자결주의는 우리의 3.1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윌슨은 1차 대전 참전여부를 고민하던 1917년 1월 의회에서 연설을 했다. 제목은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 연합국이 전쟁에 이기더라도 패전국을 완전히 굴복시켜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완승은 장기적 평화를 어렵게 한다는 것이 논거였다. 참전하면 승리해야 하고, 나아가 항구적인 세계평화를 만들어내야 하는 데, 그 방안이 무엇일까를 고민하다가 찾아낸 답의 일단이었다.
비슷한 사고는 윌슨과는 결이 다른 외교 거장 비스마르크에서도 발견된다. 독일통일을 위해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에서 이긴 다음,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했다. 뛰어난 군사전략가 헬무트 폰 몰트케 덕분에 한 달 만에 승세를 굳혔다.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 진격해 쑥대밭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군부 지도자들은 그러자고 했다. 왕 빌헬름 1세도 동조했다.
하지만 재상 비스마르크의 생각은 달랐다. 오스트리아를 완전 굴복시키면 원한을 남기게 되고, 다음 전쟁 상대인 프랑스를 칠 때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군의 후미를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군부와 왕을 설득해 빈 공격을 막았다. 덕분에 5년 후 프랑스와의 전쟁(보불전쟁)에서도 승리해 독일 제2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트럼프 행정부는 목하 빅딜을 고집하고 있다.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위시한 빅딜론자들의 주장을 들을 때면 위의 두 사례가 겹쳐 떠오른다. 북한이 핵무기, 핵물질, 핵시설, 다른 대량살상무기(WMD)까지 모두 폐기하면 경제제재를 해제하겠다는 게 빅딜의 개요이다.

▲ 지난 2월 28일(현지 시각) 베트남 하노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된 이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EPA=연합뉴스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이 중간단계에서 일부 제재 해제의 가능성을 언뜻언뜻 비추기도 하지만 명료한 것은 없다. 윌슨·비스마르크의 '승리 없는 평화'와는 대척점, 즉 '승리 있는 평화' 또는 완승전략이다. 완승은 불신과 적대감을 배태하는 길이고, 장기적 평화와는 반대의 길임을 잊고 있는 것이다.
최근 북한의 반응은 트럼프 행정부의 완승전략이 장기적 평화는커녕 당장의 협상타결도 얻기 힘들 것임을 예고하는 것 같아 우려스럽다. 북한은 최근 농업과 수산업의 발전을 강조하면서 자력갱생과 자립적 민족경제의 구호를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외치고 있다. 러시아와의 정상회담도 열어 북-중-러의 북방 삼각관계를 강화하려는 모양새다. 미국과의 장기 교착에 대비하고 있는 것일 게다.
미국은 대선이 가까워질수록 온건보다는 강경파가 힘을 더 얻을 공산이 크다. 대외정책에 관한 한 유화적인 주장보다는 강한 정책이 대중영합적이고 표를 모으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상황을 고려해보면 지금의 미국 입장은 '빅딜 아니면 안 된다. 빅딜에 응하든지 아니면 내년 대선 이후에 보자'라고 정리될 수 있을 것 같다.
트럼프가 3차 정상회담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은 본인이 원래 주장했던 '기존 정치세력과 다른 접근을 통한 핵문제 해결', 즉 김정은과의 담판을 통한 비핵화의 가능성은 남겨두어, 미국인들로 하여금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는 계속 갖고 있도록 하고자 하는 전략일 것이다. 그만큼 3차 북미 정상회담의 가능성은 낮아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트럼프의 거장 욕구다. 세계외교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완승보다는 항구평화의 길을 찾아 노벨평화상도 받고 세계외교사의 한 페이지도 장식하고자 하는 욕심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미국이 두 단계건 세 단계건 단계를 나누어 비핵화하는 협상에 적극성을 보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미국이 협상의 기본을 상기하는 것이다. 협상의 기본은 상호신뢰다. 신뢰는 반복적인 주고받기 속에서 생긴다. '얼마를 주니까 얼마가 돌아오더라'라는 경험이 신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북미는 지난 70년 간 불신을 쌓아왔다. 그래서 깊은 신뢰가 필요한 빅딜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고, 불신을 신뢰로 바꾸어 가는 작업은 필수불가결이다. 그러자면 작은 규모라도 주고받기가 반복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 급선무이다. 그런 연후에야 '빅 딜'(Big Deal)이건, '패키지 딜'(Package Deal)이건, '그랜드 바겐'(Grand Bargain)이건 비로소 가능하지 않겠는가.
차지철도 '개정하자' 했던 한미조약, 지금 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