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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익태는 애국자여야 했을까

일취월장7 2019. 3. 21. 09:51

안익태는 애국자여야 했을까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3월 14일 목요일 제5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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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온 책 가운데 이해영의 <안익태 케이스>(삼인, 2019)만큼 언론에 많이 소개된 책은 없다. 이 책은 <조선일보>를 뺀 중앙의 모든 일간지가 큰 비중으로 기사를 쓰거나 지은이와의 대담을 실었다. 그런 끝에 이 책과 저자는 공중파 텔레비전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에까지 진출했다.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라는 부제를 단 이 책이 주목받게 된 이유는 3·1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기 좋은 폭발력 있는 화제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 줄로 요약하면 ‘애국가를 만든 사람에게 애국심이 없었다!’ 바로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이야기다.

<안익태 케이스>를 소개하는 허다한 기사와 인터뷰를 대하면서 마음 한구석이 찜찜했다. 이 책의 지은이는 단지 두 문단으로 된 간략한 책머리의 첫 번째 문단에 분명히 이렇게 썼다. ‘안익태의 행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10여 년인지라 앞선 좋은 연구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빈 곳이 많았다.’ 그렇다면 제대로 훈련받은 기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질문도 이런 것이어야 한다. “앞선 연구들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고, 이번에 나온 책이 앞선 책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죠?” 이런 질문은 없어서도 안 되고, 기사에서 누락되어서도 안 된다.
ⓒ이지영

마치 짜기나 한 것처럼 어느 기자도 이 질문을 하지 않는 바람에 세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 독자들이 다른 책을 비교할 기회를 잃게 됨으로써 기사에서 정보를 얻어야 할 독자의 권리가 사라졌다. 둘째, 앞선 저자들의 책이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응분의 영예가 박탈되었다. 셋째, 앞선 저자의 업적과 자신의 책을 비교하면서 저자(이해영)가 자신을 자랑할 기회, 혹은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에 대해 저자가 변명할 기회를 빼앗았다. 지은이는 ‘앞선 연구들’이라고 했지만, 사실 안익태의 일제강점기 행적과 그의 교향시 ‘코리아 판타지’에 대한 연구로 손꼽을 책은 이경분의 <잃어버린 시간 1938~1944> (휴머니스트, 2007)뿐이다.

이경분은 안익태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독일 체류 시절을 연구하게 되었는데, 전혀 뜻하지 않게도 ‘안익태가 일제에 협력한 사실을 밝히는 작업’이 되고 말았다. <잃어버린 시간 1938~1944>은 독일 현지의 각종 문서보관소와 음악 관련 기록을 하나씩 발굴하면서 떳떳지 못해서 숨기고자 했던 안익태의 일독협회(日獨協會·일본과 독일의 문화 친선 단체) 시절을 자세히 추적한 책이다.

1907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난 안익태는 숭실학교 2학년이던 1919년 3·1운동에 가담해 퇴교를 당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국립음악학교에서 첼로를 전공하고 잠시 독주 연주자 생활을 하다가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애국가’를 작곡했던 그는 1938년 돌연 미국을 떠나 전운이 감도는 유럽으로 거처를 옮긴다. 1938~1941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학생이자 직업 음악가라는 어정쩡한 신분을 유지하던 그는 1941년과 1942년 사이에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 안착하게 된다. 일반적인 시각으로는 납득할 수 없는 안익태의 동선을 이경분은 이렇게 설명한다. ‘안익태는 독일에서 음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데에는 전쟁이라는 상황이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것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말하는 서양 고전음악은, 좀 과장하면 ‘독일 민족 음악’이다. 독일 민족음악이 서양 고전음악의 본령일 때,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의 고전음악이란 한낱 독일 민족음악의 ‘변두리 음악’일 뿐이다. 그러므로 클래식 음악계에서 성공하려면 독일에서 성공해야 한다. 마침 나치 독일은 고전음악계에서 유대인 지휘자들을 추방했고, 안익태는 그 빈틈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그가 1943년 8월18일, 나치의 인종차별주의 아래서는 지휘대를 유색인에게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된 영광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안익태는 스파이가 맞다, 하지만···


안익태의 독일 체류와 눈부신 음악 활동은 일독협회 베를린 본부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베를린 주재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일독협회는 안익태가 독일 제국음악협회의 회원증을 교부받도록 보증을 섰으며 독일의 동맹국과 점령국에서 연주회를 펼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또 에하라 고이치는 만주국 건립 10주년을 기념하는 ‘만주국 축전곡’을 안익태에게 의뢰하고 베를린에서 초연케 했다. 안익태는 일본과 독일의 원활한 문화 교류가 자신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의 야망을 위해 두 전범국의 선전일꾼(propagandist)이 되었다.

이해영 지음, 삼인 펴냄
1938년 2월20일, 아일랜드에서 자작곡 ‘코리아 판타지’를 초연하고 나서 아일랜드 신문과 했던 인터뷰에서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던 안익태는 부다페스트 음악원의 학적부에도 출생지를 ‘평양, 조선’으로 적었다. 하지만 베를린으로 활동지를 옮기면서 이름과 출생지를 에키타이 안(Ekytai Ahn·Ekitai Ahn)과 ‘동경, 일본’으로 바꾼다. 이와 함께 ‘코리아 판타지’도 제목과 내용도 여러 차례 변조했다. 이경분은 아일랜드 초연 때의 악보가 남아 있지 않은 ‘코리아 판타지’를 안익태가 ‘교쿠토’나 ‘만주 축전곡’으로 개작하거나 활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으며, 반대로 이해영은 ‘만주국 축전곡’의 일부가 1954년판 ‘코리아 판타지’에 재사용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안익태 케이스>의 차별점은 일독협회를 나치의 위장된 국가 조직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를 특수 공작원이었다고 새삼 주장하는 것이다. 하지만 전체주의 국가에서 국가 밖의 조직이나, 특수 공작 임무를 병행하지 않는 외교관은 오히려 상상하기 힘들다.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지만, 그들이 ‘직업 스파이’가 된다는 것은 별개다. 그런 뜻에서 안익태는 스파이가 맞고, 직업 스파이는 아니다. 국가(國歌)는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을 따지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수긍되지만, 공모를 통해 국가를 새로 정하자는 제언과는 마찰을 일으킨다. 가사와 곡을 출품하는 시민은 먼저 ‘애국적인가, 아닌가’부터 심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그가 훗날 이민을 가도 큰일이다). 애국이라는 시민종교가 국가(國歌)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새 국가는 춤출 수 있으면 좋겠다.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서 좋을까”

- 장정일의 독서일기 ‘안익태는 애국자여야 했을까’에 부쳐

이해영 교수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3월 20일 수요일 제600호


평소 눈에 띄면 즐겨 읽던 ‘장정일의 독서일기’에 필자가 내 책 <안익태 케이스>를 다뤘다기에 살펴 읽었다(<시사IN> 제599호). 하지만 어째 좀 평자의 불편한 심사가 드러나는 데다, 내가 책 쓴 의도를 데면데면 파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무엇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이해나 파악도 맞지 않는 것들이 있어 여기서 짚어본다.

먼저 사실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말이 있다. 장정일에 따르면 “그(안익태)가 1943년 8월 18일, 나치의 인종차별주의 아래서는 지휘대를 유색인에게 절대로 허용하지 않을 베를린 필하모니를 지휘하게 된 영광은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장정일은 나치독일이 고전음악계에서 유대인 지휘자를 추방해 생긴 ‘빈 틈’을 안익태가 “파고들었다”고 했다. 자문해본다. 장정일이 보기에 이것이 왜 “영광”스러울까? 아시아의 열등 인종 곧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합리화하기 위해 나치 독일은 일본인을 ‘명예 아리안족(Ehrenarier)’이라 불렀다. 그래서 일본인들이 베를린 필하모니 지휘대에 오른 일은 드물지 않다. 일본의 명문화족이자 전시 수상 고노에 후미마로의 동생 고노에 히데마로, 그는 베를린 필하모니를 총 7회 지휘했다. 두 번째는 일본의 지방부호 집안 기시 고이치다. 세 번째는 만주국 국가를 작곡한 야마다 고사쿠다. 네 번째는 ‘천재 음악가’로 일컬어지던 오타카 히사타다다. 다섯 번째가 나치 시절 제국음악원 회원증에 쓰여 있길 ‘일본 동경 태생’인 에키타이 안, 곧 안익태다. 안익태는 1943년 8월18일 베를린 방송타워 앞에서 열린 비정규시즌 특별연주회를 지휘했다. 딱 한 번이었다. 유색인에게 허용한 영광이 이 정도다. 단언과 단정 이전 사실의 확인은 이다지 고통스러운 법이다. 장정일의 말처럼 이는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성과”가 아니었다. 나치 독일의 외곽 선전기구인 ‘독·일(獨日)협회’의 후견이 있었다. 어떤가, 영광스러운가.



장정일은 말한다. 나의 책 “<안익태 케이스>의 차별점은 일·독협회를 나치의 위장된 국가 조직이라고 애써 강조하면서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를 특수공작원이었다고 새삼 주장하는 것이다.” 내가 “일·독협회를 나치의 위장된 국가 조직”이라고 “애써” 강조한 것은 맞다. 하지만 하나가 빠졌다. ‘처음’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베를린 주재 만주국 공사관 에하라 고이치를 특수공작원이었다고 새삼 주장”한 것은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이 주장이 최초로 나온 것은 2015년 프랑크 호프만의 책에서다. 내가 이 견해를 아마 처음 본격적으로 다룬 것 같다. 안익태의 스폰서인 에하라 고이치가 일제의 특수공작원이라면, 이 집에서 1941년 말부터 1944년 4월까지 기식한 에키타이 안의 신분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왜 이것이 그렇게 ‘새삼’스러운가. 나로선 장정일이 ‘애써’니 ‘새삼’이니 하는 부사를 동원해 정작 중요한 사실에 대한 주목보다, 나의 학자적인 성실성에 흠집을 내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장정일에 따르자면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지만, 그들이 ‘직업 스파이’가 된다는 것은 별개다. 그런 뜻에서 안익태는 스파이가 맞고, 직업 스파이는 아니다.” 과문한 나로서는 장정일의 주장,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는 다는 말이 무얼 의미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전혀 새로운 ‘학설’이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국가의 국민은 스파이가 되도록 교육”받는 다는 말은 괴이하고, 스파이는 되고 직업 스파이는 안 된다는 말은 해괴하다. 여전히 더 조사해야 할 문제인 안익태의 ‘스파이’설을 이렇게 경계를 흐릿하게 함으로써 이도저도 아닌 걸로 대충 넘어가자는 것인지 나는 그 효과를 우려한다. 밀정은 되고 ‘직업적’ 밀정은 안 된다, 그런 말인가.


내 책의 결론 가운데 하나를 일러 장정일은 쓰고 있다. “국가는 ‘가사의 우월성이나 높은 미학적 수준’을 따지기보다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라는 지은이의 주장은 수긍되지만, 공모를 통해 국가를 새로 정하는 제언과는 마찰을 일으킨다. 가사와 곡을 출품하는 시민은 먼저 ‘애국적인가, 아닌가’부터 심사받아야 하기 때문이다(그가 훗날 이민을 가도 큰일이다)”. 글쎄, 이 글로벌 시대에 ‘애국’의 기준이 이민 여부가 아닐진대 굳이 이를 ‘큰 일’로 삼을 일은 아니다. 더불어 공모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새 애국가가 문제될 때마다 가장 선호되는 방식이었다. 나는 책에서 이 논의 과정을 아주 길게 추적해놓았다. 그리고 공모가 제기될 때 그 누구도 해당 시민의 애국성을 ‘먼저’ 심사하자고 한 것을 보질 못했다. 심사 사나운 공연한 어깃장 아닌가 싶다.


장정일이 나의 책머리를 언급했을 때 나는 마음 한편에 기대하는 바가 없지 않았다. 나의 책머리에 있는 구절은 이런 것이다. “안익태의 행적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이제 겨우 10여 년인지라 앞선 좋은 연구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빈 곳이 많았다.” 그런데 장정일이 보니 문제가 생겼단다. “그렇다면 제대로 훈련받은 기자가 해야 할 첫 번째 질문도 이런 것이어야 한다. ‘앞선 연구들의 부족한 점은 무엇이고, 이번에 나온 책이 앞선 책들과 다른 점은 무엇이죠?’ 이런 질문은 없어서도 안 되고, 기사에서 누락되어서도 안 된다. 마치 짜기나 한 것처럼 어느 기자도 이 질문을 하지 않는 바람에 세 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 독자들이 다른 책을 비교할 기회를 잃게 됨으로써 기사에서 정보를 얻어야 할 독자의 권리가 사라졌다. 둘째, 앞선 저자들의 책이 거론되지 않음으로써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던 이들에게 돌아가야 할 응분의 명예가 박탈되었다. 셋째, 앞선 저자의 업적과 자신의 책을 비교하면서 저자(이해영)가 자신을 자랑할 기회, 혹은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에 대해 저자가 변명할 기회를 빼앗았다.”

그리고 장정일은 내가 말한 복수의 “앞선 연구들”에 대해, 그것은 이경분의 책 <잃어버린 시간>“뿐”이라고 애써 그리고 새삼 강조한다.


먼저 말해두자. 왜 장정일은 내가 말한 복수의 선행 연구들을 단수라고 강변하고 있을까. 책의 내용, 수많은 주석 그리고 뒤에 달린 참고 문헌들을 일별만 했어도 알 법한 것인데 말이다. 나는 이경분뿐만 아니라 고(故) 노동은, 전정임, 허영한, 송병욱의 선행 연구들을 참고하고 도움받았다. 살피건대 장정일은 뒤 4인의 연구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감독이 선수가 아니듯, 평자가 저자는 아니다. 최소한 저자가 말하는 내용을 우선 경청한 뒤에 평하는 것이 순서이자 예의다. 후려치기 식으로 마치 전지(全知)적인 지위에 있는 양, 당신이 말한 건 이거니까 이렇게 알아 식은 아무래도 아니다.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고 넌 대답만 하면 돼)’도 서평기법일까?

근대 이후 글쓰기의 최우선 기본은 내 것(생각)과 남의 것(생각)을 구분 짓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저 복잡한 인용격식이 정해져 있는 거다. 장정일은 두 개의 ‘기회’, 곧 “저자가 자랑할 기회”와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에 대해 저자가 변명할 기회” 가운데 후자를 말하고 싶은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인용한 다수의 선행 연구들을 서평자인 본인이 나서 아니라 하고, 나의 지인인 이경분‘만’을 끌어들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장정일을 선의로 읽는다면 그는 나에게 “자랑할 기회”를 주고 싶었을 거다. 이미 수많은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이지만 그래 이런 것이다.


첫째, 내가 발굴한 에하라 고이치의 1950년대 발표 에세이 두 편에 대한 분석은 선행 연구에 없는 것이다. 둘째, 1938년 2월 안익태가 아일랜드 일간지 인터뷰에서 말한 ‘프린스 리’에 대한 의문 역시 처음 제기하는 것이다. 셋째, 임시정부가 안익태 애국가를 국가로 승인했다는 속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넷째, 독·일협회가 나치의 위장된 외곽조직이라는 판단은 내가 처음이다. 다섯째, 에라하의 수필에 근거해 안익태가 1941년 연말에 베를린으로 이동했고, 이미 이 과정에서부터 에하라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하는 것 역시 그렇다. 여섯째, 안익태가 동석한 에하라 고이치 사저에서 열린 슈트라우스의 생일파티 참석자 가운데 나치 선전성 음악국장이 있었음을 밝혔다. 일곱째, 에키타이 안의 제국음악원 회원증의 내용을 소상히 밝혀 신원보증 주체가 게슈타포라고 했다. 여덟째, 에하라의 증언에 근거해 안익태작 <만주국> 4악장의 주제 중 하나가 ‘중국’ 곧 만주국의 멜로디에서 가져왔음을 밝혔다. 아홉째, 내가 새로이 발굴한 바르셀로나 라디오방송국 편성표를 통해 2차 세계대전 중 안익태의 <만주국>이 적어도 세 차례 심야에 방송되었으며, 1946년 바르셀로나에서 <코리아 환상곡>이 다시 ‘초연’되었음을 밝혔다. 열 번째, 위에서 말한 <만주국>의 멜로디가 1944년판 <코리아 환상곡>에서 ‘습작노트’로 삭제되었다가, 1950년대에 다시 포함되어 지금도 부르고 있음을 밝혔다. 열한 번째, 당대 일본 음악잡지를 통해 1942년 9월18일 만주국 연주회는 보다 큰 만주국 10주년 행사의 일환임을 밝혔다. 열두 번째, 베를린 연방문서보관서 ‘에키타이 안 파일’ 분석을 통해 에키타이 안을 비엔나에 데뷔시킬 때 독·일협회가 깊이 개입했고, 그와 슈트라우스의 조우 역시 이 일환으로 파악했다. 열세 번째, 이승만 문서를 통해 안익태와 이승만 사이 각종 청탁 과정을 처음으로 밝혔다. 열네 번째, 원래 나의 책은 안익태 케이스를 통해 현재를 읽자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의를 안익태의 베를린 시절을 넘어 지금, 여기까지 끌어오자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안익태가 개입한 서울국제음악제 논란을 분석, 소개한 것도 처음이다. 열다섯 번째, 안익태를 가상의 반민특위 법정에 회부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10여 년이나 뒤에 나왔으면서도 선행 연구를 뛰어넘지 못하고 똑같은 책을 쓰고 만 것”이라고 한다면 나는 더 이상 장정일을 도울 길이 없다. 찬찬히 다시 제대로 읽어주면 고맙겠다. 내가 말한 ‘선행 연구들’을 읽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가 ‘세 가지 문제’ 운운한다면 이어진 그의 말이 누구를 설득하겠는가. 하지만 그의 서평을 계기로 내 ‘자랑’할 기회가 열린 데는 감사한다. 마지막으로 단 한 사람, 그가 만일 ‘애국가’를 만든 사람이라면, 그 사람만이라도 애국적이기를 바란다면 그것이 과도한 것인지 묻고 싶다. “안익태는 애국자여야만 했을까”라고 물을 일이 아니다. 안익태가 친일·친나치라서 좋은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