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세기의 북·미 담판’ 이렇게 엇나갔다

일취월장7 2019. 3. 11. 12:18

‘세기의 북·미 담판’ 이렇게 엇나갔다

비건 특별대표팀은 사전 실무협상에서 북한 측에 완전히 밀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받을 수 없는 안을 들고 왔다. 판이 깨지면서 북한이 ‘베트남 모델을 통한 부국의 길’을 거부한 셈이 되었다.

남문희 기자 bulgot@sisain.co.kr 2019년 03월 11일 월요일 제599호

2월27~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전부터 아슬아슬한 장면이 없지 않았다. 지난 2월6일 북한이 스티븐 비건 미국 대북정책특별대표(특별대표)를 평양으로 불러들인 게 대표적인 장면이었다. 당시 비건 특별대표는 실무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예상하고 서울을 찾았다. 북한이 평양으로 전격 변경해 통보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북한과의 회담 경험이 많은 국내 대북 전문가 일부는 북한의 이 같은 행태를 통해, 북·미 회담의 전도를 불길하게 보기 시작했다. 협상 상대와의 약속을 깨고 자신들의 ‘안방’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북한의 협상 수법 중 하나다. 상대의 접촉 요구를 의도적으로 피해 몸을 달게 한 뒤 제안을 하는 식이다. 비건 특별대표처럼 북과의 협상 경험이 없는 이들은 당하기 십상이다.
ⓒReuters
김정은 국무위원장(오른쪽 두 번째)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 세 번째)이 2월28일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이 같은 행태가 단순한 기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점은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확인되기도 했다. 미국의 인터넷 매체 복스(VOX)가 2월26일(현지 시각) 보도한 사전 실무합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복스는 ‘북·미 협상 상황을 잘 아는 2명의 소식통’으로부터 관련 내용을 입수했다고 밝혔다. ‘2월27~28일 실제 담판에서 합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고 전제했지만, 이 내용은 비건 특별대표가 주도한 북·미 간 실무 협의에서 진짜 합의한 내용이고, 북한이 그 합의를 고집한다면 정상 간의 담판은 보나마나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은 이랬다. ‘북한은 영변 핵시설에서 핵물질 생산을 중단하고 미국은 남북 경협을 위한 일부 제재 완화, 연락사무소의 교환 진출, 한국전쟁 종결을 상징적으로 알리는 평화선언 체결에 합의한다.’ 복스는 “이렇게 되면 김 위원장에게는 대단한 승리이지만 미국에게는 꼭 그렇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얻는 것보다 내주는 것이 너무 많다”라고 지적했다. 


ⓒ시사IN 이명익
정상회담을 하루 앞둔 2월26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중국과 접경지역인 베트남 랑선성 동당역에 도착해 특별열차에서 내리고 있다.
지난해 10월7일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4차 방북부터 시작된 2차 북·미 정상회담의 출발점은 영변의 핵시설 폐기와 종전선언의 맞교환이었다. 이것을 북·미 협상의 기본 출발점으로 전제한다면, 폼페이오 4차 방북 이후 약 5개월간 양국은 ‘플러스알파(+α)’를 두고 밀당을 거듭했다. 북한은 항상 주장해온 대로 제재 완화를 요구했고, 미국은 영변 이외 지역 핵시설(예를 들면 태천의 200㎿ 원자로 같은 플루토늄 생산시설이나 강선 등에 숨겨진 것으로 알려진 우라늄 농축 시설)이나 본토의 직접적 위협으로 여기는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과 관련한 요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복스가 전한 ‘남북경협을 위한 일부 제재 완화’나 ‘연락사무소의 개설’은 북한이 영변 이외 지역의 핵시설이나 ICBM 관련 양보 조치를 플러스알파로 내놓을 경우 미국이 내려 했던 카드이다. 실제로 미국은 연락사무소의 평양 진출을 계기로 테러지원국이나 적성국교역법의 일부 내용을 동시에 해제해 미국 기업 진출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유엔 제재 내용 중 인도적 지원의 범위에 해당하는 조항을 융통성 있게 적용하겠다는 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남북경협과 관련해서도 금강산 관광 제재를 풀어 북한의 현금에 대한 갈증을 일부 해소해주겠다는 안도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분명한 것은 종전선언 이외 이 같은 안들은, 영변 핵시설 폐기 외의 플러스알파에 대한 미국의 대응조치라는 점이다. 단지 영변 핵시설 폐기에 대한 맞교환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복스는 이런 조치가 플러스알파 없이 영변 핵시설 폐기만을 위해 미국이 제공할 조치들이라고 전한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무엇을 얻었을까

실제 북한의 요구는 여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갔다. 양 정상 간 회담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기 조건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의 핵심적인 내용을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바로 이 점이 영변 핵시설 이외 고농축 우라늄 시설이나 ICBM 문제를 제기하는 미국 측 요구와 맞물려 핵심 쟁점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상회담이 끝난 뒤 트럼프 대통령과 폼페이오 장관이 밝힌 미국 측 입장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밝힌 북한 측 입장을 종합해보면, 일부 표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 차이는 없었다. 즉 북한이 내놓은 것은 영변 핵시설 내 플루토늄과 우라늄 농축시설의 폐기에 국한됐다. 플러스알파는 없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영변 밖의 숨겨진 우라늄 농축시설을 거론하며 김정은 위원장을 압박했지만 북한의 양보는 더 이상 없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정치용 카드로 삼았던 ICBM과 관련해서도 북한의 추가 양보 조치가 없었다. 리용호 외무상은 한밤 긴급 기자회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변지구의 플루토늄과 우라늄을 포함한 모든 핵물질 생산시설을 미국 전문가들 입회하에 양국 공동작업으로 영구히 완전 폐기한다는 현실적 제안을 했으나 미국이 한 가지는 더 해야 한다고 끝까지 주장하면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즉, 영변 지역 이외의 고농축 우라늄 시설이나 ICBM 중 한 가지라도 더 추가하자고 트럼프 대통령이 계속 요구했지만, 김 위원장은 요지부동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영변 핵시설 폐기만 해도 결코 작은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영변 핵시설 폐기를 이미 확보한 상태에서 플러스알파를 두고 협상을 벌이는 트럼프 대통령 처지에서는 북한의 추가 양보 없이 공동성명에 서명할 수 없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이 1월8일 중국 인민대회당에서 시진핑 중국 주석과 인사하고 있다.

북한은 유엔 안보리 제재의 해제까지 요구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부분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했는데 ‘전면적인 제재 해제’를 요구한 것처럼 트럼프 대통령이 과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3월1일 자정께 이뤄진 리용호 외무상의 긴급 기자회견도 바로 이 점을 부각했다. 북한은 “모두 11건의 유엔 제재 중 2016~2017년에 채택된 5건, 그중에 민수경제와 인민 생활에 지장을 주는 항목들만 먼저 해제하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양측 주장은 내용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모두 11건의 유엔 안보리 제재 중 북한에 직접적인 압박으로 작용한 것은 리용호 외무상이 언급한 2016~2017년의 5건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북한의 석탄, 철광석 등 주요 광물과 수산물 및 신규 노동력의 해외 송출을 금지한 유엔 대북제재 2371호(2017년 8월5일)와 원유 공급과 정유제품 수입에 통제를 가한 대북제재 2375호(2017년 9월11일), 대북제재 2397호(2017년 12월22일) 결의가 핵심이다. 리 외무상이 언급한, 북한의 ‘민수경제와 인민 생활’을 직접적으로 겨냥한 결의안들이다. 이 세 개 대북제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실질적인 압박 효과가 별로 없다. 트럼프 대통령 처지에서는 대북제재의 전면 해제 요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런 사전 합의안이 양 정상의 담판 테이블 위에까지 올라갔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스티븐 비건 특별대표팀이 사전 실무협상에서 북한 측에 완전히 밀렸다고 볼 수 있다. 비건 특별대표팀의 협상 방식에 대해 이미 미국의 관료집단 내부에서 우려가 제기된 바 있다. 2월26일자 <폭스뉴스>는 “백악관 국무·국방·재무·에너지부에서 비건 특별대표가 협상을 어디로 끌고 가는지 우려하고 있다”라고 보도한 바 있다. “협상 불가 항목이었던 비핵화가 이제는 협상 항목이 되었다”라는 얘기다. <뉴욕타임스>도 유사한 내용을 보도한 바 있는데, 이런 우려 때문에 대표적 강경파인 존 볼턴 안보보좌관이 막판 확대 정상회담에 투입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전에 이미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받을 수가 없는 협상안이었던 셈이다.

ⓒAP Photo
정상회담이 결렬된 2월28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 하노이 노이바이 국제공항에서 출국 전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

실무 협상 능력으로만 보자면, 북한 외교의 승리다. 이것이 진정한 승리일까? 결과적으로는 판이 깨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에게 불리한 협상을 깨버림으로써 미국 내 정치에서 반전을 꾀했다. 미국 언론이나 민주당에게 공격당할 만한 합의 자체를 거부했다. 또 핵심 측근이었던 마이클 코언의 폭로 뉴스를 일거에 덮어버렸다.

그렇다면 김정은 위원장은 무엇을 얻었을까? 이 점에서 리용호 외무상의 긴급 기자회견에 배석했던 최선희 외무성 부상의 발언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최 부상은 “국무위원장 동지께서 미국식 계산법에 대해서 이해가 잘 가지 않아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라며 “앞으로의 이런 조·미 거래에 대해 좀 의욕을 잃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뒷말을 보면 미국에 대한 경고로 보인다. ‘미국식 계산법’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국무위원장 동지’를 헛걸음하게 하고 담판을 망친 누군가의 책임을 묻는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즉 외무성의 노련한 전문가들을 제치고 전 스페인 주재 북한 대사였던 김혁철을 내세워 외교 담판의 기본인 이익의 균형을 무시함으로써 판을 그르친 김영철 북한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을 겨냥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번 정상회담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 드러난 북·미의 견해 차이는 결코 작지 않다. 양 정상의 ‘세계관 충돌’에 가깝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틈만 나면 강조했던 ‘베트남 모델을 통한 경제 부국의 길’을 김정은 위원장이 사실상 거부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베트남 모델은 크게 두 기둥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북·미 관계를 미국과 베트남 관계와 같은 단계별 프로세스로 발전시키겠다는 구상이다. 즉 인적 교류-외교 접촉-연락사무소 진출-수교-무역협상을 통한 최혜국 대우의 5단계 프로세스를 밟겠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정상회담은 2단계 외교 접촉에서 3단계인 연락사무소 단계로의 진입 여부를 가늠하는 협상이었다. 연락사무소가 진출하면 많은 변화가 수반한다는 점에서 결코 작은 게 아니다.

미국의 희망과 반대로 움직인 북한
ⓒAP Photo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월1일 베트남 하노이 주석궁에서 의장대를 사열하고 있다.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과거 베트남의 경우 중국과의 단절 위에서 미국과 교섭이 이루어졌다. 북한에 대해선 베트남처럼 ‘과격하게’ 중국과 관계를 단절하라고 못하지만 무게중심을 북·중 관계에서 남·북·미 관계로 전환하라는 것이다. 지난해 4·27 남북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정부가 북한에 보내고 있는 일관된 메시지이다. 이번에도 북·중 교역을 의미하는 유엔 안보리 제재를 해제하는 대신 금강산 관광 등 남북경협을 예외조치로 풀어주겠다고 한 데에는 이런 미국의 숨은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김 위원장의 모습을 보면 숨은 의미를 읽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김 위원장은 미국의 희망과는 반대로 움직였다. 미국이 극도로 싫어하는 중국의 이익 대변자 노릇을 한 것이다. 북한이 이번 정상 간 교섭에서 전면에 내세운 ‘2016~2017년의 5가지 대북제재 해제’ 요구는 지난 1월7일 김정은 위원장 방중 당시 시진핑 주석이 주문한 내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정통한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시진핑 주석은 김정은 위원장에게 “2017년 북한의 대외교역과 수출을 금지한 유엔 안보리 제재부터 풀어라”고 메시지를 줬다고 한다(<시사IN> 제596호 ‘두 번째 만남 관전 포인트’ 기사 참조). 이 2017년 유엔 안보리 제재의 대부분이 북·중 교역과 관련한 내용이다.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북한을 돕고 싶어도 이 제재 때문에 안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유엔 제재로 인해 중국 기업과 은행이 미국의 세컨더리 보이콧이라는 ‘올무’에 걸려들 수 있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시 주석 자신이 직접 거론하기 어려우니, 김 위원장을 내세운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주한 미군 철수 카드로 북·미 협상의 발목을 잡았다면, 올해는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 카드로 또다시 결정타를 날리는 데 성공한 셈이다. 2차 정상회담 종료 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위원장 대신 시진핑 주석을 압박하는 익숙한 장면이 또다시 반복되리라 예상된다. 최근 유화 국면이 조성돼가는 듯했던 미·중 통상 교섭 분위기나 미국 사법 당국의 조처를 앞둔 중국 글로벌 통신장비 업체인 화웨이에 불똥이 튈 수도 있다(지난 1월28일 미국 법무부는 화웨이 및 이 회사 최고재무책임자(CFO) 멍완저우 부회장을 23가지 혐의로 기소했다. 런정페이 화웨이 회장의 딸인 멍완저우 부회장은 지난해 12월1일 이 같은 혐의로 캐나다에서 체포되어 사실상 가택 연금되어 있다. 미국 법무부는 캐나다에 멍 부회장에 대한 ‘범죄인 인도’를 요청한 상태다). 북·미 간에도 미국이 비핵화 데드라인으로 내심 설정하고 있는 올해 4월 안에 접점을 찾지 못할 경우 어떤 사태가 전개될지 알 수 없다.

트럼프가 북에 공들이는 세 가지 이유

트럼프 대통령이 ‘악의 축’ 북한과 이란을 다루는 방식은 사뭇 다르다. 그의 전략을 이해하는 세 가지 키워드는 파격과 불가측성, 오바마 지우기, 재선이다. 트럼프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을 경우 한반도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webmaster@sisain.co.kr 2019년 03월 11일 월요일 제599호

2001년 9월11일 미증유의 테러가 미국을 때렸다.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이란·이라크·북한을 ‘악의 축’(Axis of evil)으로 꼽았다. 2년 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선제공격 전쟁이 시작되었다. 2003년 3월 이라크 전쟁이다. 전쟁은 금방 승리했지만 미국은 전후 안정화에 실패했다. 이라크 전쟁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2008년 정권은 민주당으로 바뀌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라크 철군을 공약했고 2011년 대규모 전투 병력을 철수했다.

이른바 ‘악의 축’ 중 북한과 이란 두 나라가 남았다. 이 둘의 핵문제는 계속 다루어야 했다. 이라크 지상전에 지친 미국은 군사 옵션 대신 제재와 압박을 구사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상황은 퍽 다르게 전개되었다. 제재를 강화한 결과 이란에서는 2013년 대선 때 미국과의 대화를 약속한 하산 로하니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여전히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 안에 있고 무기를 완성하지 않았던 이란과 국제사회는 핵 합의에 도달하는 데 성공했다.


ⓒAP Photo
트럼프 대통령(왼쪽)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2차 정상회담 첫날인 2월27일
베트남 하노이 메트로폴 호텔에 도착해 악수를 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서도 제재를 강화했지만 파격적 협상이나 군사적 압박을 시도하지는 않았다. 이른바 ‘전략적 인내’다. 당시 워싱턴 조야에서는 제재를 강화하면 북한 정권이 붕괴할 것이라는 다소 비현실적인 기대가 있었다. 북한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친위 세력을 강화해가면서 권력을 다졌다. 북한은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으로 한반도와 세계를 위협했다. 이즈음 이란은 유럽과 경제협력을 가시화하고 있었다. 이란은 꽃길을, 북한은 험로를 걷는 듯 보였다. 반전이 일어난다.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부터다. 2018년 미국은 이란과의 합의를 파기했고, 북한과는 정상회담을 열었다. 개방을 준비하던 이란은 지금 반미 분위기로 가득하고, 북한은 미국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구하고 있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북한에 대한 언급은 이례적이다. 김정은 위원장을 자주 상찬한다. 훌륭하고 스마트하다는 칭찬을 넘어서서 급기야 ‘사랑에 빠졌다’는 표현까지 나왔다. 연이은 북·미 정상회담을 보면 보통 공들이는 게 아니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눈에 북한은 잔학하고 못 믿을 정권 아니었던가? 자국 본토를 대륙간 탄도미사일로 공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악의 축 아니었던가? 반면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가 협상을 통해 국제무대로 불러들인 이란을 다시 코너로 몰아붙인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 등 중동의 동맹 국가들과 함께 이란 압박에 몰두한다. 최근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열린 중동평화안보회의와 독일 뮌헨에서 열린 안보대화에서 미국은 이란 비판 수위를 한껏 높이며 파상공세를 퍼부었다.

오바마의 주요 업적 하나씩 뒤집기

이상하지 않은가?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 이란을 다루는 방식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여전히 핵무기를 갖고 있고,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해왔으며, NPT 체제 밖에 있는 북한은 칭찬하고 대화를 한다.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들과 합의하고 핵 프로그램을 중단한 이란에게는 가혹한 반(反)이란 노선으로 압박한다. 이란 역시 권위주의 국가이지만 북한과 달리 선거제도가 작동하며, 북한에 비해 국제사회와 훨씬 교류협력이 많은 나라인데 말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트럼프 대통령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의 대북·대이란 전략 이해를 위해 세 가지 키워드를 잡아보았다. ‘파격과 불가측성’ ‘오바마 지우기’ 그리고 ‘재선’이다. 각각의 키워드에 행태·쟁점·목표가 담겨 있다.

트럼프 외교를 읽는 첫 번째 키워드는 ‘파격과 불가측성’이다. 미국은 스스로 자유주의 국제 질서의 선도자를 자처해왔다. 이에 맞춘 주도적 대외 전략을 천명해왔다. 행정부별로 국가안보 전략 보고서에 주요 전략 방향을 담아왔다. 4년마다 국방 전략 보고서를 낸다. 오바마 정부부터는 외교, 개발 전략 보고서도 발간하기 시작했다. 연설을 통해 대통령의 독트린을 내놓는다. 위험한 세력을 적시하고 향후 대응정책을 알리기도 했다. 이런 나라는 미국 외에는 거의 없다. 국가 전략을 적나라하게 밝히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비교적 선명하고 자세하게 속내를 밝혀왔다. 이것은 ‘예측 가능성’이라는 공공재를 국제사회에 제공한다는 의미였다. 동맹국은 미국과 공조하고, 적대국은 미국의 의지를 읽으라는 메시지였다. 예측 가능성을 제공할 테니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를 따르라는, 초강대국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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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이란 핵협상을 타결한 뒤 오스트리아 빈에서 각국 장관과 이란 협상 대표가 사진 촬영을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달랐다. 외교의 핵심 자산인 동맹을 별로 중시하지 않았다. 심지어 동맹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징후도 눈에 띈다. 설마 했던 일들을 실행한다. 고립주의를 표방하며 변화를 예고했지만 흔드는 폭이 예상보다 더 크다. 미국의 독자 행보로 인해 국제사회가 체감하는 혼란도 그만큼 높아졌다. 그는 체질적으로 게임을 즐기는 협상가다. 유리한 거래를 위해 현란하게 판을 흔들곤 한다. 트럼프 외교에서는 ‘파격’이 상식이고, ‘불가측성’만 예측 가능하다는 우스개가 나온다.

파격과 불가측성은 트럼프 대통령의 사업가적 속성이 반영된 협상의 행태다. 판을 세게 흔들고, 다들 혼란에 빠졌을 때 재빨리 이익을 챙기는 모습이다. 주(駐)이스라엘 대사관 이전 실행, 관계가 틀어진 사우디아라비아와 카타르에 동시 무기 판매, 유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란 핵합의 전격 파기 등 일련의 행보에서 드러난다. 북·미 정상회담도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북·미 회담과 이란 핵합의 파기는 이와 같은 협상 행태가 반영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게임을 통해 얻어지는 구체적 이익을 가장 중시하는 그에게 일관성이나 논리적 정합성 또는 투명성보다 중요한 것은 결과다. 역대 미국 외교와 달리, 파격과 불가측성이 그에겐 협상의 자산이다.

두 번째 키워드는 ‘오바마 지우기’다. 파격과 불가측성이 행태를 나타낸다면, 오바마 지우기는 그 동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의 주요 업적을 하나씩 뒤집었다. 파리 기후변화협정, 쿠바와의 관계 개선, 난민·이민 문제 등에서 전임 정부의 행적과 거꾸로 가고 있다. 특히 이란 핵합의는 오바마 정부의 최대 치적이자 성과였다. 2015년 7월 빈에서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과 독일이 이란과 마주앉아 18일간의 마라톤협상 끝에 맺은 이 합의는 중동의 안정적 세력균형을 위한 장기 포석이었다.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들이 오랜만에 합의를 이루어냈다는 자부심도 컸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바마 정부의 자산인 이 합의를 파기했다. 유럽 동맹과의 신뢰를 해친다는 이유로 당시 국방장관 제임스 매티스 등 전략가들이 반대했음에도 그는 가차 없이 합의 파기와 함께 제재를 복원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공을 들이는 북·미 대화도 오바마 지우기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바마 정부가 이란과 쓸데없이 잘못된 협상에 덜컥 합의한 것을 자신이 바로잡았다고 믿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반면 그는 북한에 대해선 오바마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하는 듯하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을 수수방관했던 오바마 전 대통령과 자신은 다르다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홀로 모든 책임을 지는 개발 사업가 출신이다. 그는 권위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어 보인다. 자유민주주주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을 상대적으로 덜 느끼는 건 아닐까? 오히려 ‘스트롱맨’들에 대한 감정이입이 더 커 보일 때도 있다. 동맹에 대한 애정은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대서양 유럽 동맹 국가들이 한사코 이란 핵합의 파기 결정을 반대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한 일본 등의 우려도 그다지 괘념치 않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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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이란 테헤란에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고 있다.
시위대는 2015년 핵 합의에도 경제적으로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오바마 지우기로만 트럼프 대통령의 이란, 북한 정책을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리 개인적 동기가 작동한다고 해도 나름의 계산과 목표는 있기 마련이다. 이란과 북한을 다루는 트럼프 대통령의 셈법은 무엇일까? 바로 2020년 재선 승리라는 목표와 연결된다. 이것이 세 번째 키워드다. 트럼프 대통령은 가장 난제라 할 수 있는 이란, 북한 문제의 성과를 들고 대선에 임하고픈 의지가 강해 보인다. 러시아 스캔들이나 정부 셧다운 등의 쟁점으로 의회·언론과 싸우며 국내 정치에서 어려움을 겪는 그에게 대외 정책의 극적 성과는 꽤 매력적일 것이다.

현 시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 정권의 교체나 민주화를 추진한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란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니다. 트럼프 대통령도 잘 안다. 그는 일단 이란이 미국에 대폭 양보하는 모습을 국제사회에 보여주고 싶을 것이다. 즉 오바마 정부가 조급하게 맺은 합의를 자신이 당당히 파기하고 이란을 굴복시켜 훨씬 나은 트럼프판 새 합의를 세상에 내놓고 싶어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란 핵합의 파기를 선언하면서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재협상 조건 12개를 내걸었다. 일부는 주권 문제에 걸리는 사안이므로 이란은 거세게 반발했다. 이란은 역으로 6개의 재협상 조건을 던졌다. 액면만 보면 강대강 국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미국이 판을 깨고 나가면서도 재협상 여지를 남겨놓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는 서두를 이유가 없다

이란의 현 상황은 녹록지 않다. 아야톨라 하메네이 최고지도자와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2015년 핵합의 이전의 저항경제로 돌아가 항전하자며 독려하지만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다. 체제를 지지했던 빈곤층마저 경제난으로 시위에 나서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빈자들의 민심 이반은 체제 위기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란은 현 상황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면밀히 검토할 것이다. 중국과 러시아 등 우회로를 모색하고 있지만 한계는 분명하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임계점에 가까워지면 미국과의 재협상을 추진할 여지가 있는 셈이다.

북한 역시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도전적이지만 꽤 매력적인 사안이다.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을 지속하며 국제 정세의 불안을 고조시키던 국면을 자신이 반전시켰다고 믿기 때문이다. 만일 비핵화 성과를 얻고 국제사회에서 가장 다루기 힘든 음험한 공화국을 정상국가로 변화시킨다고 상상해보라. 평양에 트럼프타워라도 세워지며 개혁과 개방이 시작된다면? 어떤 대통령도 이룩하지 못했던 외교적 업적이다.

물론 현시점에서 북한의 속내를 정확히 가늠하기는 어렵다. 어렵게 획득한 핵 자산을 쉽게 포기할 리는 없다. 북한의 경제 상황이나 권력층의 인적 변동 등 여러 변수가 이전과는 다른 양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이 지점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승부욕이 작동하는 것 같다. 기존 행태를 생각하면 북한을 절대 믿을 수 없다는 숱한 전문가들의 의심과 반대를 무릅쓰고 그가 북·미 협상에 나선 이유는 가장 어려운 딜을 성사시키고 싶은 협상가로서의 DNA 때문일 것이다.

이는 당연히 재선의 자산이 된다는 계산과도 연결된다. 핵 문제로 세상의 이목을 끄는 이란과 북한 두 나라에서의 성과를 내세우고 싶은 것이다. 만일 이란이 미국의 재협상 조건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새 협상을 수용한다면, 그리고 북한 비핵화의 가시적 성과를 얻는다면 대단한 일임에 틀림없다. 하나는 강고한 압박으로, 하나는 끈질긴 협상으로 이전 정부와는 완연히 다른 트럼프 대통령 자신만의 업적을 쌓는 것이다. 악의 축 세 나라 중 이란과 북한을 자기 계산대로 이끌어낼 수 있다면 21세기 최대 치적이라고 홍보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대선 캠페인 열기가 고조되는 앞으로의 1년 반이 중요하다. 짧지 않은 시간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두를 이유가 없다. 자기 호흡으로 이란 압박, 북·미 대화의 구도를 다뤄나갈 가능성이 높다. 차기 대통령 선거 캠페인 절정기에 승부를 보려 할 것이다. 조금씩 상황을 고조시키다가 1년여가 지날 무렵, 내년 중반 즈음 극적 타결의 현장을 미국 유권자들에게 보여주려 하지 않을까?

물론 트럼프 대통령의 기대대로 진행되지 않을 가능성도 분명히 있다. 이 경우에도 그에게 이란과 북한은 다르다. 이란 문제는 그로서는 크게 잃을 것이 없다. 이란이 한층 양보한 새 협상에 나선다면 그것으로 좋다. 이란이 끝까지 항거에 나서면? 그때는 그 위험한 나라를 응징하는 자신의 이미지를 더욱 강조할 것이다. 이란 경제 상황 붕괴로 정치 변동 가능성이 높아지면 이란 체제 교체 압박을 자신의 치적으로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북한 비핵화 협상이 지지부진하거나 중단되는 경우에는 타격이 있다. 애초부터 믿지 못할 정권과 대화를 했다는 비판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자신은 미국의 안전을 위해 협상가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는 이미지를 내세우겠지만, 그 후폭풍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한반도 위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역설적으로, 그렇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보다 북한에 더 공을 들이려 할 것이다. 우리 정부가 최선을 다해 북·미를 중재하고 평화 국면을 유지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선과 악의 구도 혹은 동맹과 적대 관계를 뛰어넘어, 이익 추구에 진력하는 미국 대통령의 모습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가 구사하는 파격과 불가측성의 외교 행태가 과연 오랜 분쟁의 땅 한반도와 중동에서 평화의 길을 열어낼 수 있을까? 자칫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위기와 갈등의 시간이 다시 도래하지는 않을까? 두려움 속에서도 기대를 부여잡게 되는 201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