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성장 중독에서 녹색 전환으로

일취월장7 2018. 9. 22. 12:57

성장 중독에서 녹색 전환으로

[대전환의 밑그림 – 녹색전환연구소 5주년 기념 기획연재] ①
2018.09.18 02:48:33

다른 삶을 사는 이들

내 주변에는 일주일에 이틀이나 사흘 파트타임으로 일하면서 적은 돈을 벌고 나머지 시간은 이웃이나 친구들과 음악이나 목공을 하거나 시민단체나 마을 일을 하며 충만하고 행복한 삶을 누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또 마음 맞는 청년들이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 생계를 함께 하며 따로 또 같이 살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다. 녹색 정치에 참여하여 모든 생명이 평등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는 청년들도 많다. 수조에 갇힌 돌고래가 너무 불쌍해서 돌고래 보호운동에 뛰어든 청년들도 있다. 이들은 '반백수'로 보이지만 자신과 이웃을 위해 살아가며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은 이미 성장 중독에서 벗어나 성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물론 이들의 삶이 평탄하고 쉬운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스스로 만드는 삶은 다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소득주도 성장에서 녹색 전환으로 

성장 중독은 좌우를 가릴 것 없이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이 앓고 있다. 경제성장은 현대 국가의 당연한 책무가 되어 버렸다. 지구의 자원과 오염정화 능력의 한계가 분명한데도 성장주의자들은 기술과 자본으로 성장이 영원히 가능하고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설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믿음은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미래세대와 자연을 위험으로 몰아넣는 사이비 종교에 가깝다. 성장주의자들이 '오직 성장!'을 외치는 동안 가난하고 몸이 약한 이들, 어린이와 노약자들은 미세먼지와 폭염으로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지구 이곳저곳에서 배타적 인종주의와 민족주의, 권위주의가 자라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 혁신 성장, 포용 국가 같은 국가 목표를 내걸고 성장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문재인 정부의 미덕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줄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자원을 집중한다는 점이다. 이뿐만 아니라 탈원전, 탈석탄으로의 에너지 전환을 추진하고 있다. 한반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토대를 마련한 것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문재인 정부가 기후변화와 원전의 위험을 관리하는 것을 넘어서서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나라로 전환할 비전과 정책을 우선으로 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는 점이다. 모든 이들이 안전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성장이 아니라 성숙, 개발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발전과 생태민주주의로의 전환, 즉 녹색 전환이 시급하다.

녹색 전환과 지속가능한 사회 

녹색 전환이란 성장중독에서 벗어나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한 사회로 전환하기 위해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자원과 오염정화 능력의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정치사회적 과정이 녹색 전환이다. 사회경제적 약자는 물론 미래세대와 자연의 권리를 고려하고 이들의 대리인이나 후견인들이 정치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생태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녹색 전환을 지금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눈앞의 이익을 위해 개발과 성장에 매몰되면 기후변화와 같은 피하기 힘든 폭풍이 모두의 생존을 위협하며 다시 회복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국가는 국정의 목표를 경제성장이 아니라 생태민주주의를 통한 지속가능한 발전으로 바꾸어야 한다. 먼저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경제성장을 평가하는 주된 지표인 국내총생산(GDP)은 환경파괴로 국민들의 삶의 질이 떨어지거나, 계층간 불평등이 심화되어도 증가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마티아 센이나 조지프 스티글리츠 같은 경제학자들은 GDP 성장을 정책의 목표로 삼지 말고 삶의 질을 측정할 수 있는 다른 지표들을 사용하라고 권고한다. 성장이 GDP에 초점을 맞춘 양적 성장이라면 지속가능한 발전은 미래세대와 자연을 함께 고려하는 질적 성숙이라고 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발전에서 중요한 것은 지구 생태계가 유지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석탄과 석유, 원자력에 의존한 공업 체계를 재생가능한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한다.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만 굴러가는 생산의 쳇바퀴에서 내려와 더 적게 생산하고 더 적게 소비하면서 더 많은 시간을 이웃과 나눌 수 있는 삶을 함께 만들어가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협동조합을 비롯한 사회적 경제는 녹색 전환을 이루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정부는 경제성장이 영원히 지속가능하다는 잘 못 된 전제 아래 소득도 늘리고 일자리도 늘릴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태적 지속가능성을 기본 전제로 삼고 '우애와 환대의 공동체'를 함께 만드는 현명한 리더십을 발휘해야 할 것이다.

생태민주주의와 생태자치연방 

생태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지구 환경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작고 동네의 쓰레기 문제를 풀기에는 너무 크다. 지구적 위험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우리는 산업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사람들의 이해를 조정하는 틀을 넘어서서 거대한 전환을 시작할 새로운 리더십, 참신한 상상력이 필요하다. 기후변화와 핵의 위험으로 인류와 지구의 생존이 위협 받을 때 우리는 좁은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서서 세계시민의 관점에서 지구와 자연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을 할 필요가 있다. 이제 미래세대와 자연도 중요한 참여자로 초청하는 생태 민주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말을 못하는 약한 존재이지만 이들이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총칼을 들고 무장한 군대가 기후변화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는 없다. 지구적 위험의 시대에는 무기를 내려놓고 모두를 위한 세계시민정치를 담대하게 시작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이제 한반도 평화의 큰 걸음을 걸어가고 있다. 하지만 남쪽의 민주적 개발국가가 북쪽의 권위주의적 개발국가와 손잡고 개발주의의 가속 페달을 밟는다면 한반도 전체가 미세먼지로 가득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을, 지역, 지자체로 연결되는 자율과 자치의 정치 공동체를 키우고 이러한 자치체들의 연합으로서 한반도 생태자치연방을 만드는 비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과 북은 무기를 녹여 풍력발전기를 만들 것이다. 평화를 키워갈수록 억압하는 국가, 통제하는 국가의 강제력은 약화되고 공동체의 공동 자원을 관리하는 능력은 커질 것이다. 순진해 보이는 상상 속에서 미래를 만드는 새로운 힘이 나온다. 틀을 바꾸는 꿈을 틀 안과 밖을 오가며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개발국가에서 생태민주 국가로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권위주의적 개발 국가를 민주화하는데 많은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민주주의는 진퇴를 거듭했지만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민주정부'는 개발주의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수많은 사람들의 열망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는 또 하나의 민주적 개발 국가로 평가될까? 아니면 민주주의를 생태적으로 전환시켜 생태민주 국가의 기초를 다진 첫 번째 정부로 평가될까? 미래는 열려있다. 탈원전, 탈석탄을 천명한 문재인 정부는 아시아의 모범 국가로, 세계의 생태적 지도력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이제 화석연료와 원자력에 의존한 지탱불가능한 공업 모델을 벗어나 생태적으로 지속가능하면서 모든 사람과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새로운 정치를 기획해야 할 때다. 지속가능성 전환, 녹색 전환을 국가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그 목표에 따라 경제와 사회를 재구성해야 할 때다. 지금 시작하면 기후변화로부터 좀 더 안전한 나라, 인간과 자연이 함께 사는 나라, 모든 이들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나라를 더 빨리 만들 수 있을 것이다.     


70년대 '오일 쇼크', 그리고 후쿠시마 '핵 쇼크'

[대전환의 밑그림 – 녹색전환연구소 5주년 기념 기획연재] ②
2018.09.19 08:43:36

과연 '에너지전환'은 무엇을 의미하나? 청와대와 산업부는 애초에 "탈원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다가, 핵산업계 등의 강한 저항이 잇따르자 "에너지전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때문인지 에너지전환을 핵발전소를 대신하여 재생에너지를 확대한다는 의미로 좁게 이해하는 경향이 자리잡았다. 산업부 장관의 언론 기고가 잘 보여준다. "에너지전환 1년"을 평가하면서, 핵발전의 축소와 재생에너지 확대라는 구도를 통해서 '에너지전환'이 성공적으로 추진 중에 있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신산업'의 성장과 일자리 창출 가능성을 강조한 것이 그나마 에너지전환의 다른 측면을 잠시 보여주었을 뿐이다(백운규, 2018). 에너지전환을 이렇게만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할까.  

'에너지전환' 담론은 1970년대 초반에 세계를 강타한 '오일 쇼크'로부터 촉발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세계 각국은 기존과 다른 방식의 에너지정책을 모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전환에 관한 혁신적인 개념들이 만들어졌다. 에너지전환론의 선구자인 애머리 로빈스(Amory B. Lovins)는 1976년에 "에너지전략: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도전적 논문을 썼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화석연료(와 핵에너지)에 기반을 둔 중앙집중적인 대규모 에너지 시스템을 통해서 공급하고 있는 현행 에너지 시스템을 "경성 에너지 경로(hard energy path)"라고 부르며, 이는 지속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민주주의도 위축시킬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대신 에너지효율화를 통해서 에너지 수요를 줄여가면서 지역분산적인 재생에너지를 이용하는 "연성 에너지 경로(soft energy path)"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로빈스 주장과 한국 정부의 에너지전환론을 비교했을 때, 당장 발견할 수 있는 차이는 에너지 수요 감축에 대한 관심이다.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에너지 수요를 재생에너지로 공급하는 비중을 높이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한국도 1970년대 오일쇼크를 거치면서 석유를 중심으로 한 에너지 정책을 재검토하는 기회가 있었다. 한 방향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핵발전소의 도입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태양광(열)을 중심으로 재생에너지 개발과 에너지효율화 정책이었다. 전자는 1978년 고리1호기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면서 지배적인 흐름으로 자리를 잡았고, 후자는 A/S가 제공되지 않아 흉물로 남은 태양열 집열판만 남긴 채 곧 잊혀졌다. 또한 1980년대의 저유가 국면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약적인 경제성장의 시기를 거치면서 에너지효율화 정책도 사실상 사라졌다. 1980년대에 대거 건설된 핵발전소의 전력을 소비하기 위해서 여러 차례에 전기요금을 낮추기까지 했다. 그렇게 오일쇼크로 잠시 열렸던 기회의 창은 금세 닫혔고, 에너지전환 담론도 자리잡지 못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야 점차 체계적인 '에너지전환'의 담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70-80년대에 건설된 핵발전소는 점차 지역주민들의 우려와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결국 1990년대 안면도에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계획은 격렬한 주민 저항을 야기했으며, 전국적인 반핵운동도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한 초창기 에너지전환 담론은 반핵운동에 공명하면서 핵발전소의 위험성과 기술권위주의를 폭로하고 비판하는데 집중했지만, 1990년대 말부터 재생에너지 이용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부각시키면서 본격적인 '에너지전환'의 담론을 주조해나갔다. 1999년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에서 출간한 <새천년을 향한 환경․보건․복지 정책> 보고서에 실린 김종달(현재 경북대 교수)의 글이 대표적이다.

그는 기존 정책 아래서는 에너지 소비량과 온실가스 배출량만 급증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 이유로 △급격한 수요증가 및 해외의존도 심화, △설비투자수요의 급증과 투자재원의 심각한 부족, △국내 및 국제 환경규제(특히, 기후변화협약에 따른 탈탄소 규제 포함) 강화, △(에너지 시설의) 입지문제의 심화를 들어, 에너지전환의 시급성을 주장했다. 여기서 에너지전환은 두 개의 축을 세워 얻어질 수 있는 목표로 설명되었다. 즉, 재생에너지 이용 확대뿐만 아니라, 에너지 절약과 효율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에너지 소비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이유는 정부가 "단순한 긴축 위주의 선언적, 규제 위주의 정책 또는 수급불안기에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대책 위주의 절약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지나친 공급 위주의 에너지정책으로 절약이 인적․물적 재원 배분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체에너지' 보급 목표 달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유사하다.
그는 에너지전환을 위한 '지속가능한 에너지정책'의 방향을 제시하였다(<표 1> 참조). 재생에너지 이용 확대와 에너지 절약/효율화 정책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중앙집중화'되고 '대규모'의 에너지 공급체제를 '분산'되고 '적정 규모'의 체제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잊지 않고 있다. 그는 "기존의 중앙집중식 에너지 사회시스템에서 점진적으로 벗어나, 지역 특성에 맞는 지역 단위의 균형 있는 에너지 공급체계가 이루어져야 하며, 지역 단위의 에너지자립도와 에너지 수급의 효율성이 제고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지방자치를 언급하면서 "다른 부문에서 부분적인 지방화가 시도되고 있는 반해, 경제성장과 환경보존 딜레마의 중심에 있는 에너지는 완전히 중앙에서 계획․집행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비판하면서, "지방주민과 지방자치단체의 참여를 제도화할 수 있는 에너지체제의 지방화 디자인"이 필요하다고도 주장했다. 

한편 에너지전환의 방향뿐만 아니라 과정 및 전략에 대해서도 토론하고 있다. 당시의 에너지정책은 기존의 에너지공급 중심 방향과 에너지산업 체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연구개발 투자, 보조금 지급 등의 수단으로 재생에너지 이용을 확대하려는 '제도적 적응 전략'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구조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방식으로는 "에너지 절약과 재생가능에너지가 기존 에너지에 대한 완전한 대안으로서 선택되는 전환이 일어날 가능성은 희박"하고, "오히려 기존 에너지시스템을 보완"해주면서 "기존 에너지 시스템을 오히려 공고히 해주는 역할을 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였다. 사실 이런 '제도적 적응 전략'은 문재인 정부 내에서도 관찰되며, 에너지전환의 속도와 방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에너지전환을 단순히 '에너지원의 변화'만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에너지전환은 다양한 차원을 가진 변화로 이해해야 한다. 에너지원의 변화 차원은 이미 충분히 이해되고 있다. 오히려 그것만으로 이해하고 있어서 문제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차원은 충분히 주목받고 있지 못하다.

에너지 이용의 의미 변화 차원부터 살펴보자. 우선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에너지'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여 얻고자 하는 '에너지 서비스'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애머리 로빈스이 독일의 에너지 효율화 전문가인 패터 해니케 뷔페탈연구소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소비자에겐 킬로와트시 자체가 아니라 따뜻한 주거 공간이나 차가운 맥주와 같은 에너지 이용이 의미가 있다. 이러한 에너지 서비스는 앞으로 훨씬 더 적은 양의 에너지와 비용의 투입으로 공급할 수 있다" 

동일한 에너지 서비스를 얻는데 더 적은 에너지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며, 그것은 비용도 아끼게 해줄 것이란 주장이다. 이는 결국 에너지 효율화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에너지 생산과 소비의 지역/공간적 배치의 변화는 중앙집중적인 에너지 시스템을 분산적인 시스템으로 바꿔야 한다는, 애머리 로빈스 이래 지속되고 있는 에너지전환론의 주요 주장을 반영한 것이다. 한국의 맥락에서는 삼척, 영덕, 고리, 당진 그리고 밀양 등에서 발생하였던 대규모 발전 및 송전 시설을 둘러싼 주민 저항과 막대한 사회적 비용, 그에 대한 정부의 정책 학습에 따른 분산전원 확대 필요성 인식 등도 이 차원의 변화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뿐만 아니라 재생에너지 이용 증가에 인한 전력망의 안전성을 확보를 위해서 전력저장장치(ESS) 등과 같은 유연성 자원을 확보․운영해야 할 필요성과 그에 따른 배전망운용자(Distribution System Operator: DSO) 출현 가능성에 의해서 보다 현실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지방정부에게 에너지정책 결정 권한과 책임을 나누고 궁극적으로 시민들의 자치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에너지 분권과 자치의 주장과도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에너지 생산과 공급 시설을 소유․운영의 변화는 에너지전환을 촉진하고 새로운 에너지 시스템을 운영하는데 적합한 사회적 구조를 탐색하는 관심과 연관된다. 에너지 기술의 개발과 발전은 이것과 함께 공진화하는 사회적 요소들과 연결되면서 하나의 시스템을 만들어 간다. 에너지전환 연구자들은 "에너지 시스템을 녹색화하기 위한 중요한 도전은 우리 에너지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회조직의 변화"(Verbong and Geels, 2012: 204)라고 진단하고 있다. 이는 에너지(전력) 산업구조의 개혁 논의와 관련될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의 에너지산업의 구조 개혁에 관한 논의는 1990년대 말의 신자유주의 개혁이라는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정부의 전력산업 구조개편 계획을 '에너지 민영화'로 규정짓는 노조 및 진보 진영은 '에너지공공성'을 주장하면서 이를 저지하려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이런 갈등 속에서 에너지전환은 중요한 쟁점이 되지 못했으며, 그에 걸맞은 에너지산업의 구조 개혁에 대한 논의는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이 문제를 검토하지 않고 에너지전환을 추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에너지 이용자의 행동과 규범의 변화는 에너지 시민성에 관한 논의와 연계되어 있다. 지금까지의 에너지 시스템 내에서는 에너지 사용자는 한전이 공급하는 에너지를 사용하고 요금을 지불하는 수동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저렴한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공급만 받아서 이용할 수 있다면, 에너지가 어떻게 생산되어 공급되는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에너지 소비의 결과가 대기오염 그리고 기후변화를 야기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고 소비자에게까지 공급되는 과정에서 다른 지역과 사람들의 희생이 따른다는 에너지 부정의를 목격하게 되면서, 에너지 이용자는 능동적인 '에너지 시민'으로 변화할 수 있다. 위험하고 부정의한 에너지정책 결정에 항의하고 에너지 자치를 추구하는 사회운동에 관여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에너지 소비를 되돌아보면서 에너지 사용 행동을 변화시키거나 효율적 설비를 위해서 투자하기도 한다. 나아가 재생에너지 설비에 투자하여 스스로 전력을 생산하거나 협동조합 등을 통해서 재생에너지 사업에 참여하면서, '에너지 프로슈머'로 변화하기도 한다.  

에너지전환, 에너지원의 변화만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자. 가야할 길이 멀수록, 기초적인 논의부터 명확히 하고 나서야 한다.     


삶 전환의 열쇳말, 기본소득

[대전환의 밑그림 – 녹색전환연구소 5주년 기념 기획연재] ③
2018.09.20 10:02:02

계속되는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의 심화와 고용 지표의 악화 추세는 우리 사회의 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여기서 위기란 소득불평등 심화와 고용 지표 악화 자체가 위기라는 뜻에만 국한되지는 않으며, 이러한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방향 역시 위기임을 의미한다. 플랫폼 자본과 플랫폼 노동의 등장과 발전, 생산성과 고용 간, 생산성과 (노동)소득 간 탈동조화 현상, 이윤의 지대화 경향(비단 부동산뿐만 아니라 인터넷·디지털·데이터 공유지, 택시, 주문배달 등에 이르기까지) 등은 우리 삶 전반에 걸친 지대 및 지대추구 행위의 증가, 1인가구와 노인인구의 증가 등은 빈곤과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노동을 더욱 불안정하게 하며 이와 동시에 완전고용이라는 정책목표 달성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런데도 복지시스템을 비롯한 우리 사회의 전체 시스템은 여전히 유급노동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고, 이를 한층 더 강화시키고자 하고 있다. 


예상컨대, 위에서 언급한 경향이 앞으로 지속되는 한편으로, 노동과 복지를 긴밀히 연결시키는 '고용중심적 복지정책'을 포함하여 유급노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현재 시스템을 계속 유지·강화할 경우,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 노동빈곤층의 증가,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 증대, 생태적 부담의 가중 등은 향후에도 계속될 것이다. 또한 유급일자리 하나를 인위적으로 창출하기 위해 소요되는 사회적 비용은 점점 증가할 것이며(특히나 임금, 사회보험 보장, 노동조건 등의 면에서 안정적이고 괜찮은 유급일자리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이며), 고용률과 실업률이라는 총량 지표의 관리는 어느 정도 성공적일지 모르나 예전부터 꾸준히 제기되고 있는 복지시스템의 문제, 즉 사각지대, 수급대상자에 대한 잘못된 판정, 상당한 행정부담과 행정비용, 억압적·징벌적·통제적 관료행정, 각종 덫(빈곤의 덫, 실업의 덫, 고용의 덫, 불안정의 덫 또는 불확실성의 덫, 관료제의 덫, 별거의 덫 등)의 양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질 것이다.


현 상황에 대한 잘못된 진단, 그리고 그로 인해 초래된 잘못된 해결방향이 커다란 문제를 낳고 있다. 유급노동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고 이를 신성시하는, 유급노동을 현재 수행하고 있거나 과거에 수행했던 경력을 기초로 생계를 유지하는, 유급노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그러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주식, 부동산 등에서 기인한 자본소득, 투기소득에 비해서 노동소득에 더 큰 세금을 부과하는 현재의 시스템이 근본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책은 엉뚱하게도 유급노동 중심성을 더욱 강화시키면서도 자본소득, 투기소득에 대해서는 거의 건드리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유급노동을 중심으로 구조화된 현재의 시스템을 전환시키기 위한, 노동소득에 더 큰 패널티를 부여하는 현재의 시스템을 전환시키기 위한, 빈곤과 불평등,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 복지시스템으로 인하여 초래되는 각종 문제와 부작용 등의 문제를 상당부분 해결하기 위한, 노동·젠더·생태 차원에서의 해방을 진전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기본소득이다. 

공유복지 정책이자 새로운 복지국가, 새로운 보편주의의 핵심정책


기본소득은 사회 구성원 개개인에게, 소득이나 자산 수준, 노동 의사나 노동 참가 여부에 상관없이, 정기적으로 지급하는 현금급여이다. 기본소득은 기존의 복지제도와 마찬가지로 복지(Welfare)정책에 속하지만, 다른 복지제도와는 달리 공유복지(Commonfare)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소득은 과거와 현재로부터의 자연적·사회적 공유부(wealth of commons)에 기인하는 것이다. 기본소득이 공유재(공유지; commons), 공통유산(common heritage), 사회적 공통자산 등의 개념과 밀접한 관련 하에 논의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유념해야 할 사항은 기본소득은 노동빈곤과 실업의 공존, 광범한 비정규·불안정 노동, 상대적 빈곤과 소득 및 자산 불평등의 심화와 같은 오늘날의 새로운 사회적 위험,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하는 기본적·사회적 필요에 대응하기 위해 추가적으로 요구되는 사회경제적 정책으로서, 복지국가의 기존 프로그램을 전면적으로 대체 또는 해체시키는 기획이 아니라, 현재의 복지 프로그램 중 일부는 대체하고 일부는 보완하면서 전체적인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정과 함께 도입되어야 하는 하나의 제도라는 점이다. 


우리가 앞으로 추구해야 할 방향은 노동연계복지(Workfare)의 강화를 통한 '낡은 복지국가'의 길이 아니라, 기본소득이라는 공유복지 도입을 통한 '새로운 복지국가', '새로운 보편주의'의 길이다. 기본소득과 함께하는 새로운 복지국가, 새로운 보편주의가 우리 삶에 가져올 전환의 몇 가지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한다면, 그것은 바로 지금보다 빈곤 및 불평등을 더 효율적·효과적으로 개선하고, 기존 복지시스템이 양산하는 각종 덫으로부터 해방시키며, 젠더평등과 생태적 전환에 기여하고,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노동자의 협상력을 높이며 사회적으로 유용한 활동을 장려함으로써 경제민주주의를 촉진할 것이라는 점이다.

빈곤 및 불평등 개선 정책 


기본소득은 우리 사회의 빈곤과 불평등을 상당히 개선시킬 수 있다. 먼저 한 사람의 생계 영위에 충분한 수준으로 지급되는 '생계수준 기본소득' 또는 '완전기본소득'은 정의상 적어도 절대적 빈곤은 완전히 없앨 것이다. 지급수준이 이보다 낮은 '부분기본소득'이라 할지라도 그 지급수준에 따라 빈곤을 유의미하게 경감시킬 것이다. 다음으로 불평등 개선효과를 보자면, 필자와 애니 밀러(Annie Miller) 교수가 증명한 바와 같이, 면세구간이 전혀 없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되는 t% 평률소득세-기본소득(Universal Basic Income-Flat Income Tax; UBI-FIT) 정책은 직접효과만 고려할 경우 지니계수를 정확히 t% 개선시킨다. 5분위배율과 10분위배율 역시 (비록 선형적이지는 않지만) t값에 커짐에 따라 상당히 감소한다. 현재의 소득분포 하에서 t% 평률소득세-기본소득 정책이 실시될 경우 이로 인한 순수혜비율은 약 65~70% 수준으로 분석된다. 만약 과세를 비례세가 아니라 누진세로 설정한다면, 그리고 국토보유세-토지배당, 생태세-생태배당도 더해질 경우에는 순수혜비율과 소득불평등 개선효과는 더 커질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존하는 개별 사회복지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국가 전체의 조세-급여 체계(tax and benefit system 또는 tax and transfer system)의 빈곤 및 소득불평등 개선효과와 비교해보더라도 상대적으로 우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기본소득이 빈곤과 불평등에 미치는 효과는 단지 소득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소득 이외의 다양한 차원에서의 다차원적 빈곤·박탈 또는 사회적 배제 문제에 효율적·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에도 기본소득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이미 1970년대 캐나다 마니토바주에서의 민컴(Mincome) 실험, 체로키 인디언 카지노 배당, 인도와 나미비아의 기본소득 실험, 2009년 노숙자 13명을 대상으로 런던에서 실시된 현금지급 실험, 그리고 기본소득과 가장 닮은 현존 정책인 알래스카 영구기금 배당 등의 사례를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입증되어왔다.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무조건적이고 보편적인 현금지급은 주거, 의료, 교육 등 기본재로부터의 박탈을 줄이고, (특히 빈곤층의) 금융비용을 낮추고 금융접근성을 높이며, 경제활동을 증가시키고, 사회적·정치적 참여를 활성화하는 데 확실한 도움을 줄 수 있다.

젠더평등과 생태적 전환의 기반이 되는 해방적 정책 


현존하는 다양한 조건부 복지 급여와 서비스는 수급자들에게 경제적인 혜택을 주기도 하지만, 그들을 각종 덫에 빠지게도 한다. 일을 하게 되어 (노동)소득이 증가하게 되면 그만큼 복지급여 수급액이 감소함으로써 빈곤의 덫과 실업의 덫이 발생한다. 자산조사 기반 복지급여의 복잡성, 수급자격 획득 여부의 불확실성, 사정 및 급여전달 과정으로 인한 급여지급 지연 등으로 인해 임시직, 단기직 등의 일자리를 구하지 않게 되는 불안정의 덫 또는 불확실성의 덫도 나타난다. 수급자격 기준의 모호성과 담당공무원의 능력과 재량 문제 등으로 야기되는 수급자격의 오분류 문제, 이로 인해 초래되는 사각지대와 부정수급 문제 등에 기인한 관료제의 덫도 생긴다. 또한 혼자 살 때 보다 같이 살 때 수급가능성 및 수급액수가 낮아짐에 따라 별거의 덫도 발생한다. 


기본소득은 현재의 조건부 복지프로그램이 초래하는 이러한 각종 덫들로부터 상당히 또는 완벽히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 수급자격 오분류로 인한 사각지대와 부정수급 문제에서도 자유롭고, 관료제의 덫을 제거할 뿐만 아니라, 복지시스템의 억압적·징벌적·통제적 성격도 해방적인 것으로 변화시킨다. 그리고 혼자 살 때보다 같이 살 때 소비에서의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 in consumption) 면에서 유리하게끔 하여 오늘날의 1인 가구 (및 이들을 대상으로 한 주택공급 소요) 증가 문제, 저출산 문제 등에 어느 정도 대처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상당한 규모의 노동시간 감축, 아동, 노인 돌봄 영역 등을 비롯한 사회서비스 정책의 확대, 젠더평등 지향적인 일·가정양립지원정책 마련 및 조직문화 개선 등과 동반될 경우, 기본소득은 유급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에서의 젠더평등에도 기여할 수 있다. 생애주기상의 특정 시점에서 각 개인의 유급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의 노동시간 배분이 사회적으로 강제되는 측면을 줄이고, 각자의 형편과 선호에 따라 노동시간 배분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확장시킨다. 또한 빈곤 문제를 경제성장과 개발로 대처하고자 하는 성장주의와 개발주의의 압력을 유의미하게 낮춤으로써 생태적 전환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생태세와 생태배당을 결합한 구체적인 정책은 저소득층의 경제적 상황을 이전보다 개선시키면서도 이들의 에너지 사용상의 효율성을 높이면서 에너지 소비량을 줄일 수 있는 계기를 조성한다.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높이는 경제민주주의 정책 

일자리와 관련하여 선택지가 줄어들수록, 남은 선택지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거나 매우 열악하고 힘든 것으로 보일수록, 사람들은 현재의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며 힘든 상황을 감내하도록 강제 당한다. 매우 안타깝게도 그러다가 다른 선택지로 넘어가보지도 못한 채 자살(실제로는, 사회적 타살) 등의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발생하기도 한다. 


정규직의 안정적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장시간, 고강도, 고스트레스의 노동과 위계적·수직적·비합리적 조직문화를 참아낸다. 비정규의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당장의 생계를 영위해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성과 자신의 일을 대신할 잠재적 경쟁자들이 많다는 인식으로 인해 열악하고 힘든 현재의 임금과 노동조건 등을 견딘다. 정규직의 안정적인 일자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인식 하에, 그리고 첫 직장이 어떠한지에 따라 향후 자신의 노동경력과 미래보수가 상당부분 규정된다는 인식 하에, 아직 사회에 진출하지 않은 많은 청년들은 시간이 좀 오래 걸릴지라도 공무원이 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하여 가장 빛나는 시기의 재능과 노력, 열정과 시간을 쏟아 붓는다. 현상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노동과 삶의 극심한 불안정성은 청년을 비롯한 개개인의 재능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혁신과 도전,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기본소득은 노동과 삶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각자에게 가장 적합한 방식으로 유급노동과 무급노동(가사노동, 돌봄노동을 포함하여), 여가, (재)교육과 (재)훈련 등을 재조직할 수 있게 하며, 개별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협상력을 강화하여 임금과 노동조건 등을 개선시키는 경제민주주의 정책이다. 기본소득은 특정한 생애주기에 놓인 한 개인의 삶의 선택지에 '(잠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중요한 선택지 하나를 추가한다. 이로써 임금, 노동조건 등의 면에서 불합리한 사측의 제안 및 조치에 대해 실질적으로 거부할 수 있는 힘을 노동자 개개인에게 부여한다. 또한 노동조합에게도 기본소득은 일종의 '파업기금'으로서 기능하면서 기업 측의 부당한 제안 및 조치에 대해서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는 힘을 부여하며, 생계유지와 차별대우 적용 등을 무기로 한 사측의 노조분열책동에 의해 흔들리는 정도를 (상당부분) 완화시킬 수 있다. 더 중요하게는, 생애주기상의 한 시점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지를 갖게 된 특정 개인은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일에서 언제든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갖게 된다. 이처럼 기본소득은 '노동의 해방'과 '노동으로부터의 해방' 모두에 기여할 수 있는 경제민주주의 정책이다.


아울러 기본소득이 유급노동 영역 밖에서의, 공동체에 반드시 필요한 다양한 활동인 자원봉사활동, 노인 및 아동 돌봄노동, 생태·환경 보전 운동 등을 촉진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필요할 경우, 참여소득을 기본소득과 나란히 도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기본소득은 생계 압박을 완화시킴으로써 사회적으로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일을 하는 사회적 경제 조직에서 일하거나, 소유, 관리, 운영, 조직 등의 면에서 평등한 노동자 소유 기업(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을 포함하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
기본소득은 이렇듯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삶 전환의 핵심 열쇳말이다.



선거 개혁이 '한반도 평화'를 촉진할 수 있다

[대전환의 밑그림 – 녹색전환연구소 5주년 기념 기획연재] ④
2018.09.22 12:35:40

거대한 전환이 시작됐다. 아니 전환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다.

한반도에서나 지구적으로나 대전환은 불가피하다. 생존과 공존, 평화를 위한 전환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문재인 대통령의 이번 방북으로 인해, 전쟁의 위협이 없는 한반도로 가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같다. 걸림돌이 되는 것은 미국, 일본, 중국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국내정치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이번 방북에서도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포함한 3당 대표들이 석연치않은 이유로 북측 인사들과의 일정을 취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해명을 들어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제1야당의 행태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도 방북 성과를 높게 평가하는데, 평소에 미국을 추종하던 제1야당은 성과를 깍아 내리려 하고 있다. 자유한국당 나경원 의원은 그 중요한 순간에 엉뚱하게도 ‘일본 자민당의 정권복귀’에 관한 간담회를 하고 있었다.

이런 식의 정치로는 이제 열리기 시작한 평화의 길이 견고하게 되기 어렵다. 평화를 위해서는 정치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흔히 동.서독을 우리가 참고할 사례로 얘기하지만, 서독의 정치는 우리의 정치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서독의 정치는 동-서독간의 관계에 대해 장기적이고 일관된 안목으로 접근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비례대표제 선거제도가 있었다.

각 정당의 득표율에 따라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제도에서는 합리적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정당은 살아남을 수가 없다. 또한 특정정당이 단독으로 과반수를 차지하기 어려우므로 여러 정당들간의 협치가 불가피하다. 서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1970-80년대에 서독의 거대양당인 사회민주당과 기독교민주당이 번갈아가면서 집권했지만, 단독집권이 아닌 연립정부의 형태였다. 그리고 연립정부의 파트너였던 소수정당은 자유민주당이었다. 어떤 때는 사회민주당과, 어떤 때는 기독교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구성한 자유민주당의 한스 디트리히 겐셔는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서독의 외무부장관을 맡았다. 그래서 일관되게 동-서독관계를 풀어갈 수 있었다.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이 바뀔 때마다 남북관계가 출렁거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정치였다.  

또한 서독은 연방제 국가였고 지방분권이 잘 되어 있었다. 이것은 통일후에도 지역간 갈등을 완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자기 지역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할 권한이 각 주에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서독은 양원제를 택하고 있어서, 상원에서는 각 주의 이익이 대표되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한반도가 대전환을 맞는 시점에, 대한민국의 정치도 근본적인 전환을 고민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시스템 개혁이 필수적이다. 선거제도를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바꾸는 것은 물론, 지방분권도 담대하고 신속하게 추진해야 한다.  

한편 올 여름의 폭염이 보여주는 것처럼, 기후변화의 심각성은 이제 강조할 필요가 없을 정도이다. 지속가능한 삶을 위해서는 온실가스를 혁명적으로 감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도 경제성장 논리에 밀려서 온실가스 감축은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미국, 중국같은 온실가스 대량배출 국가만을 탓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빨리 증가하는 국가군에 속하기 때문이다.  

기후변화는 폭염과 강추위만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는 농업에 치명적인 영향을 줄 수 있고, 식량위기, 물위기를 낳을 것이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농업정책은 정부정책의 우선순위에서 한참 뒷순위로 밀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 때문에 지금도 청와대 앞에서는 농민단체들의 농성이 진행되고 있다.  

멀리보며 문제를 풀어가는 정치가 아니라, 당장의 정치적 이익에만 급급한 정치의 탓이 크다. 기후변화와 같은 문제는 임기 5년의 대통령, 임기4년의 국회의원들이 자기 임기 동안에 풀 수 없는 문제이다. 장기적이고 일관되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정당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당들이 책임있게 정책을 제시하고, 정책으로 경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선거제도가 역시 중요하다.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고 있는 유럽의 국가들 역시 비례대표제 선거제도를 택한 국가들이 많다. 비례대표제 선거제도에서는 정당들이 기후변화 문제에 대해서도 정책을 분명하게 제시할 수밖에 없고, 녹색당과 같은 새로운 정당들도 국회에 진출하기 쉽기 때문이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내일은 어제와 같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어떤 모습의 미래가 될 지는 많은 부분 정치에 달려 있다. 전환의 시대에 걸맞는 정치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을 위해서는 선거제도의 개혁도 필요하고, 새로운 정당들의 성장도 필요하다. 당장 올해 하반기에 선거제도 개혁이 이뤄지느냐가 국회에서 결정될 예정이다. 그리고 2020년 총선에서 구태정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가 시작될 수 있느냐도 중요하다.

물론 쉽게 희망을 말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선거제도 개혁도 무척 어려운 일이고, 정치가 크게 변화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희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평화롭고 지속가능한 삶을 바라는 시민들이 다수이기 때문이다. 그 마음들이 모아진다면 지금 필요한 변화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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