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국민들이 말하는 ‘통일된 독일은…’
독일 국민들이 말하는 ‘통일된 독일은…’
“동독 발전 위해 세금 많이 내야, 젊은 세대는 다르게 생각할 것”
독일 베를린·라이프치히·드레스덴·트리어 = 송창섭·구민주 기자 ㅣ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7(화) 08:00:00 | 1500호
독일의 통일현장을 취재하기 위해 출국한 날은 7월2일. 2018 러시아월드컵 조별예선에서 한국이 독일을 2대0으로 격파한 직후였다. 그러다 보니 주변사람들로부터 “베를린 가서 한국말로 떠들지 마라. 자칫 독일 훌리건(축구장에서 난동 부리는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다”는 장난기 섞인 우려를 여러 번 들었다. 하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현장에서 만난 이들은 되레 “한국은 너무 잘 싸웠다. 독일이 자만한 나머지 제대로 못 뛴 게 문제지, 절대 한국 탓이 아니다”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이 같은 독일 국민의 자신감은 통일이 가져다준 선물인 듯하다. 통일된 지 30년 가까이 됐지만 여전히 베를린은 도시 곳곳이 공사 중이다. 옛 동독 지역의 대표적 도시인 드레스덴, 라이프치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슈뢰더만 해도 첫 연방의회 총리 임기를 끝낸 2002년 이후 제2차 연대협약을 통해 향후 15년간 옛 동독 지역 재건을 위해 1565억 유로(약 205조8000억원)를 투입했다. 동독 재건 사업은 그로부터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본격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 시사저널 구민주·연합뉴스
카로(17)
7월3일 베를린 월 메모리얼은 각지에서 견학 온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왁자지껄했다. 독일 서부에 위치한 아헨(Aachen) 지역 카를루스 김나지움에 다니는 17세 카로도 이들 중 한 명이었다. 학교에서 통일을 상징하는 곳으로 자주 견학을 온다는 카로는 통일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자유’라는 단어가 떠오른다고 말했다. 통일을 기억하는 세대는 아니지만 통일이 되면서 과거 꽉 막혔던 길들이 다 뚫려 자유 왕래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행스러움을 느낀다는 것이다. 유일한 분단국가 한국에 대해 독일 10대 소녀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카로는 “분단국가라는 것밖엔 큰 지식이나 관심이 없다”며 “다만 북한은 과거 우리 동독처럼 억압되고 자유가 없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뮐러(가명·50대 후반)
옛 서독 지역에서 동독 출신을 만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통일 이전을 기억하는 세대들은 대부분 통일 이후에도 기존에 거주하던 지역 인근에 터를 잡고 생활하기 때문이다. 통일 전 30년 가까이 동독에 살았던 뮐러는 지금 독일의 가장 서쪽 도시 트리어에 머물며 호텔 지배인으로 근무하고 있다. 뮐러의 기억 속 옛 동독은 “꽤나 살 만했고 이웃 간 정이 유독 두터운 곳”이었다. 그는 “동독이 가난하고 못살았는데 마치 구조되듯 통일이 됐다는 인식이 많다”며 “당시 동독 정치권에 어떤 문제와 비리가 있었는지 주민들 대부분 까맣게 모른 채 살다가, 통일 후 하나둘 드러나면서 ‘이게 내가 살았던 나라가 맞나’ 싶을 정도의 실망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토마스 슈미트(45)
“장벽이 무너질 때, 모두가 TV 앞에 앉아 기쁨의 눈물을 흘렸던 장면이 여전히 생생하다.” 서독 지역에서만 줄곧 살아온 토마스 슈미트 트리어 시청 문화부장은 장벽이 무너질 당시 15세로, 한창 학교 졸업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정치과목 내용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동서 갈등, 바르샤바 조약 등 시험 단골 주제들이 한순간에 쓸데없는 구문(舊聞)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그에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얼마 전이던 1989년 여름, 베를린으로 견학을 가 견고한 장벽을 손으로 쓸어보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 곧 통일이 될 것이란 누군가의 말에 함께 비웃었던 일도 있었다. 동·서독 간 여전한 경제적 간극에 대해 그는 “옛 동독을 항상 옛 서독과 비교하지만 사실 폴란드·체코 등 동구권 국가의 발전이 어떻게 이뤄졌나를 비교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쉬운 점도 언급했다. 그는 “당시 동독 산업의 민간화를 그리 서둘러 하지 않는 게 더 나았을 수도 있다. 모범으로 삼을 통일의 ‘전례’가 전혀 없었기에 나온 실수다”며 “한반도 통일은 ‘전례’ 독일을 통해 비슷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카트린 헐(56)
카트린은 지금도 베를린에 거주하며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다. 카트린에게 통일은 ‘기쁨’ 그 자체였다. 그는 “하나의 ‘사건’이었던 통일이 점점 당연한 일상이 돼 온 지난 30년의 모든 순간들이 대단한 역사”라고 강조했다. 카트린은 “생활 속에서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다”면서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점에 있어, 나 같은 기성세대들은 기꺼이 감당해야 할 일로 여기지만, 젊은 세대는 좀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에 “동서독보다 훨씬 큰 남북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분단 당시 서독은 동독 사상과 문화에 대해 적대적인 교육을 하진 않았다”며 “한국도 북한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만드는 분위기를 조성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카롤리나 베르홀츠(52)
드레스덴에서 관광해설사로 활동하는 카롤리나 베르홀츠는 통일 전인 30년 전 시 외곽에서 살다 시내로 이사 왔다. 그는 독일 통일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통일되지 않았다면 지금 이 성모교회(Dresden Frauenkirche)가 이처럼 완벽하게 복원될 수 있었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공산당 고위직 몇 명을 빼곤 거의 없을 것”이라면서 “독일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아프리카에서 가장 부자인 사람보다 생활형편이 낫다는 것은 괜한 말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양극화 문제가 심해지고 있지만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누가 동독 주민들의 삶을 지금처럼 바꿀 수 있었겠느냐”며 통일의 중요한 가치로 풍요를 꼽았다.
다니엘 바겐크레흐트(73)
다니엘 바겐크레흐트는 라이프치히 외곽인 피테펠트에서 태어났지만 동독 공산당의 억압에 못 이겨 13살 때 가족과 함께 서독으로 이주했다. 서독에 와서는 뉘른베르크에서 정착해 살다 나중에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회사에 들어가 회계업무를 맡아 일했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2007년 무렵. 그는 통일 이후 변신하는 동독 지역의 사회상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자신을 ‘영원한 독신주의자’로 불러달라는 그는 동독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높게 평가했다. 대표적인 것이 유치원과 같은 보육 시스템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통일된 지 30년 가까이 되면서 본격적인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표시했다.
[슈뢰더 인터뷰①] “‘역사적 시간의 창’ 닫으려는 사람, 역사가 벌할 것”
슈뢰더 前 독일 총리 4시간 현지 인터뷰…“독일, 통일에 많이 투자해 훨씬 더 강해졌다”
독일 베를린 = 송창섭·구민주 기자 ㅣ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7(화) 08:00:00 | 1500호
독일에서 사회민주당(SPD·사민당)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879년 만들어진 바이마르 사회민주당에 1945년 사회주의 노동당 등 좌파 군소정당들이 합쳐지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우파인 기독민주당(기민당)이 주도하던 독일 정국에 사민당 열풍이 불어닥친 것은 1969년이다. 당시 치러진 출구조사에서 과반수는 기민·기사당 연합이 차지할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오후 9시30분부터 결과가 뒤집히더니 사민·자민당 연합은 오후 10시가 넘어 기민·기사당 연합을 밀어내고 과반보다 6석을 더 확보했다. 이때 등장한 이가 ‘비전의 정치인’ 빌리 브란트(Willy Brandt)다. 빌리 브란트가 이끈 사민·자민당 연합정부는 모스크바·바르샤바조약, 동·서독 정상회담 등을 통해 1972년 11월 동·서독 기본조약을 체결하는 성과를 만들었다. 이후 정권은 같은 사민당인 헬무트 슈미트 정부로 넘어갔지만 몇 년 후 헬무트 콜의 기민·기사당 연합과 바통 터치했다. 그리고 정작 1990년 독일 통일은 기민당 정부 아래서 맞이했다. 콜 정부 다음에 사민당이 다시 정권을 되찾았을 때 등장한 이가 바로 게르하르트 슈뢰더다. 그는 1998년 10월부터 2005년 11월까지 만 7년 동안 총리로 재직했다. 슈뢰더는 통일 이후 불어 닥친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재임 기간 동안 독일 통일의 긍정적인 효과를 맛보진 않았지만 훗날 독일 번영의 기초를 닦았다는 점에서 유럽 정치사에 분명한 획을 그었다.
본지와의 인터뷰는 독일 현지 시간 7월4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4시간 동안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연방하원(Bundestag) 내 슈뢰더 집무실과 브란덴부르크 문(門) 인근 아들론 켐핀스키호텔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 등에서 진행됐다.

© 시사저널 구민주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어떻게 봤나.
“한반도 변화의 서막은 평창에서 열린 동계올림픽에서 시작됐다. 올림픽이라는 무대는 지금 한반도 상황을 만드는 좋은 출발점이 됐다. 당시 나도 아내(김소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경제개발공사 한국대표부 대표)도 토마스 바흐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과 함께 현장에 있었다.
이제부턴 정치인들이 할 일이다. 남북한 아이스하키 단일팀은 첫걸음이지만 매우 의미 있고 중요한 시도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상황을 잘 파악했고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 남북 상황을 개선하고자 하는 강력한 의지가 이번 북·미 정상회담을 가능케 했다. 이번 회담은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구체적인 대책들이 나올 거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한반도 비핵화다. 이를 위해선 첫째 시간이, 둘째 많은 대화와 협상 과정이 필요하다.”
북·미 정상회담 성과를 놓고 이견이 많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나.
“나는 이미 독일에서 이런 경험을 했다. 빌리 브란트의 긴장완화 정책이 초석이 됐고 여러 작은 발걸음이 통일을 가능케 했다. ‘베를린 통행증 협정’이라는 게 대표적인 예다. 당시 이 통행증 협정을 통해 동독 사람들이 서독에 사는 친지들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북·미 정상회담만으로 돌파구가 만들어졌다고 할 순 없다. 하지만 대화와 협상으로 가는 물꼬를 텄다는 것은 충분히 환영할 일이다.”
서독은 동독과의 신뢰를 어떻게 쌓았는지 궁금하다.
“아주 중요한 질문이다. 독일의 과정을 한국에 고스란히 적용하긴 어렵다. 신뢰는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게 아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구축된 것이다. 더군다나 한 국가가 분단 과정에서 전쟁을 겪었다면 이 때문에라도 신뢰를 쌓기가 어렵다. 독일은 전쟁이 없었고 한국은 있었다. 때문에 신뢰를 갖기에 한국이 훨씬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다. 앞서 말했듯 독일은 작지만 많은 발걸음들이 모여 큰 신뢰를 만들어냈다. 비핵화라는 세계적 이슈와 동시에 협력과 상생을 추구하다 보면 남북이 차츰 신뢰를 쌓아갈 것이다.”
[슈뢰더 인터뷰②] “통일은 목표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슈뢰더 前 독일 총리 4시간 현지 인터뷰…“독일, 통일에 많이 투자해 훨씬 더 강해졌다”
독일(베를린)=송창섭·구민주 기자 ㅣ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7(화) 08:00:00 | 1500호
“통일은 목표지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우리에게 슈뢰더는 공공부문 개혁을 이끌어낸 ‘하르츠(Hartz·2002년 2월 구성된 노동시장 개혁위원회인 하르츠위원회가 제시한 4단계 노동시장 개혁 방안) 전도사’로 많이 알려져 있다. 중도좌파 성향의 정치인이지만 총리에 오른 뒤엔 ‘우(右)클릭’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는 슈뢰더의 반쪽 모습에 불과하다. 슈뢰더는 독일 정치사에서 ‘빌리 브란트의 손자’로 불린다. 특히 통일 정책에 있어 스승인 브란트와 생각이 같다. 지난해 9월 국내에 소개된 자서전 《문명국가로의 귀환》에서 슈뢰더는 “우리 세대 사람들은 동독과 서독이 총알 한 발 오가지 않고 이처럼 평화롭게 통일되리라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사민당의 재집권은 동독 지역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래서일까. 슈뢰더는 통일 직후 연방총리청을 옛 동독 국가평의회 건물에 임시로 뒀다. 오늘날 베를린이 뉴욕·파리·런던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국제도시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슈뢰더의 적극적인 재건 정책이 큰 밑거름이 됐다. 시사저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슈뢰더는 문재인 정부의 화해 정책을 가리켜 ‘작은 걸음’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빌리 브란트가 일관되게 말한 ‘작은 걸음 정책(Politik der Kleinen Schritte)’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7월4일 독일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에서 시사저널과 인터뷰를 갖고 “한국은 통일이라는 목표에 너무 조급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 시사저널 구민주
진보 정부에선 빌리 브란트의 평화와 포용정책을 강조한 반면, 보수 정부에선 체제 우월성을 갖고 동독을 흡수 통일했다는 점을 중요하게 여긴다.
“진보 정부의 정책이 결국 옳았다는 건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빌리 브란트에서 시작된 작은 걸음의 정책들이 결국 신뢰를 구축했다. 기민당은 오랜 기간 빌리 브란트가 맺었던 조약·협정들을 배척하고 반대했다. 하지만 헬무트 콜은 총리가 된 후 오히려 빌리 브란트 정책들을 이어 나갔다. 그것이 통일을 만든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 통일이 서독의 흡수 통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소련이 붕괴되며 일어난 변화들이 동·서독 통일로 발전한 것은 맞다. 동독의 경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당시 소련이 붕괴되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당시 고르바초프는 개혁·개방 정책을 펴며 ‘늦게 오는 자, 역사가 처벌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게 동독 지도부엔 큰 부담이 됐을 테고 결국 긴장완화로 나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또 동독 주민 스스로가 통일에 대한 의지를 천명했다. 미국·소련 등 주변 국가들은 처음에 독일 통일에 회의적이었는데 결국 주변국의 합의를 이뤄내고 나중엔 지지까지 받았다. 결국 빌리 브란트의 긴장완화 정책으로 신뢰가 구축되지 않았다면 통일은 힘들었다. 지금 문 대통령의 정책은 주변 지원을 이끌어내는 것이 한 축이라면, 또 한 축은 남북 간 신뢰를 쌓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구체적인 협정이나 합의는 꼭 필요하다. 따라서 북한에 계속 신호를 보내야 한다. 한반도 통일은 긴 프로세스의 마지막에 있는 것이다. 현 상황에서 한국은 그 프로세스에 집중해야지, 끝에 있는 목표, 즉 ‘통일’에 대해 자꾸 이야기를 하면 대화 상대인 북한의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은 통일이라는 목표를 늘 염두에 둬야 하지만, 통일 그 자체를 너무 많이 말하지 말아야 한다. 지금 한국은 통일로 가는 길 위에 있다. 그 길이 곧 우리가 도달하려는 목표인 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통일은 길이자 목표다.”
그 말을 어느 한 체제로의 흡수 통일이 쉽지 않다고 이해하면 되겠는가.
“통일은 민주주의적인 시스템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한국이 민주적인 체제 아닌가. 필연적으로 그 길로 갈 것이다. 그런데 굳이 지금 북한의 체제 변화를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체제 변화는 역사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의 프로세스에 있어 역사가 자연스럽게 방향을 잡아나갈 것이다. 프로세스가 이제 막 물꼬를 텄는데, ‘사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절대 독재인 너희 체제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하면 협상이 잘 되겠는가.”
여전히 한국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의 체제변화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먼저 독일과 한국의 상황적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독일이 통일될 때 소련의 공산체제는 붕괴됐고 옛 동구권은 소련에서 독립한 상황이었다. 당시 동독은 기존 체제가 붕괴되고 민주화로 가던 폴란드, 체코 사이에 놓여 있었다. 그 변화의 물결에서 동독 주민들은 결코 소외되고 싶지 않았다. 북한 정권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해 주고 싶다. ‘지금 한국엔 ‘역사적 시간의 창(Historical Time Window)’이 막 열렸다. 지금 그 창을 닫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역사가 벌할 것이고 국민이 벌할 것이다’라고 말이다.”
김정은 위원장의 최근 행동에서 과거와 다른 모습이 발견되는가.
“김 위원장을 직접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정말 진정성이 있는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싱가포르에서 그가 보인 모습들은 아주 현명했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후 협상과 대화 과정에서 진정성은 자연스럽게 판단될 것이다. 김 위원장이 스위스에서 교육받은, 즉 서구 체제나 문화에 상당히 익숙하고 그것을 배운 적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있어 잘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한국 정부에 감히 조언을 하자면 지금은 신뢰를 쌓는 데 더 투자할 시기다. 물론 그 과정에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북한이 합의를 잘 이행해 가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문 대통령이 한국 국민들로부터 충분한 지지를 얻는 것도 필수다.”
빌리 브란트는 통일에 반대하는 유럽 내 세력을 적극적 지지로 바꿔놓았다. 한국도 비슷한 상황이다. 한국 당국자들에게 주변 열강들과 어떻게 통일 분위기 조성에 나서야 하는지 독일의 노하우를 알려 달라.
“현재 문 대통령이 추진하는 정책들은 주변 열강들과 좋은 분위기를 만드는 데 방향을 잘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미국과 대화도 필요하지만 러시아, 중국과의 대화도 필요하고, 주변 강대국들이 통일 한국에 대해 두려움을 갖지 않게끔 하는 외교정책이 필요할 거다. 이들은 통일 한국에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한반도가 비핵화되고 그래서 세계 평화에 큰 역할을 하게 되면 이는 주변 강대국에도 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 한반도 평화 통일은 그들의 최대 관심사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 못지않게 중국, 러시아와의 균형 잡힌 대화가 필요하며 이들에게 통일된 한반도에 대해 전혀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충분히 강조해야 한다. 그 좋은 예로는 1989년 전환기 당시 헬무트 콜이 통일 이전 주변국들에 독일 통일에 대해 아무런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설명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슈뢰더 인터뷰③] “北, 인권 개선하려면 개혁·개방 유도해야”
슈뢰더 前 독일 총리 4시간 현지 인터뷰…“독일, 통일에 많이 투자해 훨씬 더 강해졌다”
독일(베를린)=송창섭·구민주 기자 ㅣ realsong@sisajournal.com | 승인 2018.07.17(화) 08:00:00 | 1500호
北, 인권 개선하려면 개혁·개방 유도해야
퇴임 이후에도 슈뢰더는 독일 연방하원 내에 집무실을 두고 있다. 당초 슈뢰더와 인터뷰가 예정된 시각은 7월4일 오전 10시였다. 취재진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앞서 독일 국회의사당 바로 옆에 있는 연방하원 건물에 도착했다. 하지만 약속 시간이 다 돼서야 그 근처에 의회 건물이 여러 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브란덴부르크 문을 중심으로 옛 동베를린 방향 중심가인 운터 덴 린덴(Under Den Linden) 거리를 따라 5분가량 가니 50번지에 또 다른 연방하원 건물(Deutscher Bundestag Platz der Republik 1)이 나왔다. 이곳에 슈뢰더의 집무실이 있다.
슈뢰더는 독일의 전직 국가원수 중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정치인이다. 그러다 보니 독일 내 관심도 많다. 이날 슈뢰더와 인터뷰를 끝마치고 인근에 있는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향했다. 프로이센 제국 시절 지어진 브란덴부르크 문은 분단 시절 동·서독의 경계다. 별도의 수행원 없이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가는 동안 슈뢰더는 자연스럽게 시민들과 인사를 나눴다. 경호 인력이 밀착해 따라붙지 않다 보니 군중 속에서 슈뢰더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아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전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시민이 그에게 손을 내밀며 “고마워요. 슈뢰더”라고 말하자, 그 역시 “고맙습니다(Danke)”라고 화답했다. 슈뢰더에게 이런 식으로 시민들과 자주 만나느냐고 묻자 “정치인이라면 모름지기 시민들과 자주 만나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대답했다. 슈뢰더가 되레 “한국 정치인들은 이러지 않는가”라고 물었다. 통일을 주제로 한 슈뢰더와의 대화는 브란덴부르크 문 인근 아들론 켐핀스키호텔 내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이어졌다. 오찬을 겸한 인터뷰에서 슈뢰더는 한국인 아내 김소연씨와의 결혼 계획 등도 비교적 솔직히 털어놓았다.

2015년 9월 슈뢰더 자서전 출간 행사에 참석한 슈뢰더 전 총리와 앙겔라 메르켈 현 독일 총리(오른쪽) ⓒ© AP 연합
북한 인권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북한 인권은 너무나 비참하고 아주 악화된 상황이다.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비판하고 불평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북한이 좀 더 개방된 협상에 참여할 수 있게끔 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대화나 개방 참여를 통해 수용소나 인권의 상황이 개선되게끔 자연스럽게 유도해 나가는 게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문제 제기하는 것도 당연히 이어져야겠지만, 단순히 불평에 그치지 않고 북한의 개방과 상황 개선으로 실질적으로 유도되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이렇게 설명하면 명확할 듯하다. 예를 들어 한국 보수 정부에선 북한 인권 문제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높았지만 실제로 북한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이나 조치를 적극적으로 했는지 의문이다.”
통일 후 사회 갈등을 봉합하는 데 있어 통일 정부가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동·서독 간 경제 분야 차이가 아주 극심했다. 그게 첫 번째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독일 정부만이 노력한 건 아니다. 독일 경제계, 사회 전체가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는 서독에서 동독으로 엄청난 금액의 이전 지출이 있었다. 동독에 새로운 인프라를 구축하고 새로운 공장을 짓고 결론적으로 새 일자리를 만들어서 동독 사람들 삶이 나아지도록 재정적 지원을 했다. 그리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사회복지 이전 지출을 신속하게 진행해 동독 주민들에게 안정적 사회보장을 제공하고자 했다. 교통 인프라는 완전히 새로 바꿨다. 일단 통일을 위한 첫발을 뗐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염두에 뒀던 건 동·서독 사람들의 생활수준 격차를 신속히 해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투자가 있었다. 지구상에 이런 엄청난 경제적 도전을 받고 그 부담을 떠안을 수 있는 나라가 몇이나 되겠나. 독일은 그걸 했고 해냈다. 그리고 현재 통일 후 더 강해져 있다. 한국도 지구상에서 그걸 떠안을 수 있는 곳 중 하나다. 독일과 마찬가지로 잘해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한국의 젊은 세대들은 ‘우리가 북한에 뭔가를 너무 많이 줘야 하는 것 아닌가’라며 불안해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젊은이들에게 ‘독일을 한번 보라, 통일을 위해 많은 투자를 했지만 지금 그 전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다’고 말하고 싶다.”
총리에게 이곳 베를린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나.
“베를린은 내게 항상 ‘살고 싶은 도시’였다. 베를린은 독일 역사에 있어 기회의 도시이자 분단의 도시다. 베를린은 역사적으로 아주 영광스러운 곳이기도 했지만, 나치에 의해 아주 참혹스러운 기억도 갖고 있는 곳이다. 때문에 이 도시는 그 자체로 특별하다. 또 가장 국제적인 곳이기도 하다. 국제적이라는 것엔 여러 의미가 있다. 베를린엔 여러 가지가 상존하고 있고 섞여 있고 녹아 있다. 세계가 갖고 있는 현안이나 상황들이 모두 잘 녹아 있는 가장 국제화된 도시다.”
앞으로 개인적, 정치적 삶에 있어 목표와 꿈이 있다면.
“더 이상 정치적 계획을 갖고 있진 않다. 그냥 개인으로 머물러 있을 것이다. 현재 변호사 업무를 계속하고 있는데 이 업무가 정치와 연관되는 부분도 있다. 지금부턴 김소연씨가 통역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이 대목부터 슈뢰더는 영어로 말했다) 나는 아주 멋진 아내를 만났다. 따라서 서울에 일부 살면서 한국 문화에 좀 더 익숙해지고 그 외 더 많은 한국의 도시들을 경험하고 싶다. 아마 언젠간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 갈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알겠나’라고 생각하겠지만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올 10월 한국인 아내와 결혼식
올 1월 한국에서 연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김소연 대표와의 연인관계를 공식화했다. 2015년 국제회의에서 처음 연사와 통역사로 알게 된 이들은 오는 10월5일 독일 베를린에서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 같은 달 말 한국 지인들을 위해 서울에서도 피로연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김소연 대표는 “10월5일 독일 결혼식은 지인들 중 일부에게만 초청장을 보냈는데, 그게 보도되면서 연락을 못 받은 한국, 독일 내 지인들이 굉장히 서운해했다”며 난처해했다. 7월 첫째 주부터 배부된 정식 초청장엔 화가로 활동 중인 김 대표의 사촌오빠가 직접 그린 그림이 담겼다.
7월4일 독일 베를린의 명소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한반도 통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슈뢰더 전 총리 옆에 있는 이는 부인 김소연씨. ⓒ시사저널 구민주
인터뷰 후 취재진과 브란덴부르크 문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이들은 잡은 손을 한시도 놓지 않으며 사랑꾼 면모를 드러냈다. 10월5일 독일에서의 결혼식 후 신혼여행은 한국에서 할 예정이다. 이들은 제주, 경주 그리고 김 대표의 고향인 광주 등지를 둘러보며 한국의 역사적 유적지와 문화유산을 둘러볼 예정이다. 김 대표는 과거 슈뢰더 전 총리와도 만난 적 있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국내 여행지를 추천해 줄 거라고 귀띔했다. 현재 베를린, 하노버에 이어 서울에서도 신혼집을 구하고 있다는 이들은 올 연말쯤 한국 내 거처가 마련되면 본격적으로 독일과 한국을 오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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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선수 못 돼 총리 됐다”
슈뢰더 전 총리는 농담 삼아 “축구선수로 성공하지 못해 할 수 없이 연방 총리가 됐다”고 말할 만큼 축구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다. 실제 어린 시절 유소년 팀에서 축구선수로 뛴 경력이 있으며 센터백으로 활동했다. 슈뢰더는 당시 100m를 11.2초에 끊을 만큼 재빠른 발을 가졌었다. 아내인 김소연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경제개발공사 한국대표부 대표에 따르면, 슈뢰더는 축구를 볼 때 직접 해설을 할 만큼 해박한 지식을 가졌다. 어느 선수가 어떤 팀에서 뛰는지도 다 알 정도로 관심이 깊다.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 하노버96의 오랜 팬이다. 2016년부턴 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6월27일 러시아 카잔에서 열린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한국-독일전에 참석한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부부 ⓒ시사저널 구민주
6월27일 열린 한국과 독일의 러시아월드컵 조별리그 3차전을 본 그의 소감은 어떨까. 이날 슈뢰더는 아내와 함께 러시아 카잔 경기장에서 경기를 지켜봤다. 그는 “한국이 더 잘했고 더 역동적으로 뛰어 이긴 거다. 독일 선수들은 4년 전보다 다들 나이를 먹었고 배가 부르다. 더 이상 ‘헝그리 정신’이 없다”고 평가했다. 유임 여부를 두고 논란이 됐던 요하임 뢰브 독일 대표팀 감독에 대해선 “뢰브 감독이 실수한 건 맞고, 특히 굉장히 잘하는 공격수 두 명을 기용하지 않은 건 잘못 판단한 것 같다”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패배가 모두 그의 잘못은 아니니, 감독을 교체하는 것보다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한국-독일전에서 부부는 각자 고국 팀을 응원했다. 우리 대표팀이 첫 골을 터뜨린 순간 둘의 엇갈린 표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루스탐 민니하노프 타타르스탄 대통령이 사진을 찍어 자신의 SNS에 올려 화제가 됐다. 김소연 대표는 “총리님은 한 골 먹어서 굉장히 진지하게 경기를 곱씹고 계셨고 나는 서서 박수를 치며 좋아했는데 그 모습이 포착됐다”며 “그게 화제가 돼 지인들로부터 많은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국 선수 중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슈뢰더는 차범근 전 국가대표 감독과 손흥민 선수를 꼽았다. 특히 그는 차 전 감독과는 과거 방한 당시 비무장지대를 함께 방문한 인연을 털어놓았다.
슈뢰더 前 독일 총리는?…퇴임 후 러시아 국영 석유회사 이사회 의장
슈뢰더 전 독일 총리는 1944년 4월7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ordrhein- Westfalen)주 벡스텐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프리츠 슈뢰더는 게르하르트가 태어나고 6개월 만에 루마니아 전장(戰場)에서 사망했다. 슈뢰더가 태어나자마자 곧장 전장으로 나간 탓에 그는 아버지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슈뢰더는 어릴 적 집안 형편이 어려워 야간 고교를 다니며 공장에서 일했다. 대학에 들어간 뒤엔 주경야독으로 공부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청년사민당 활동으로 정치를 시작한 슈뢰더는 1980년 연방하원 의원에 당선됐다. 1990년부터 1998년까진 니더작센(Niedersachsen)주 총리를 지냈다.
본지 송창섭 기자(오른쪽)가 베를린 파리저 광장에서 슈뢰더 전 총리와 통일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시사저널 구민주
슈뢰더가 등장하기 전까지 사민당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1983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기민당에 패해 정권을 내준 사민당은 이후 중도에서 좌파로 변신하면서 정권 획득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결과적으로 1990년 통일 후 치러진 첫 총선에서 실패한 것도 좌파 성격이 강했기 때문이다. 당시 기민당의 헬무트 콜과 경쟁한 오스카 라퐁텐은 훗날 슈뢰더 집권 때 사민당에서 떨어져 나가 좌파당을 별도로 만들었다. 슈뢰더는 니더작센주에서 녹색당과의 연정(聯政)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서도 적녹연정(사민·녹색당 연합)에 나서 정권탈환에 성공했으나 ‘아젠다 2010’으로 핵심 지지층인 노동자층의 반발을 사 8년 만에 정권을 앙겔라 메르켈이 이끈 기민·기사당 연합에 내줬다.
슈뢰더는 퇴임 이후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 ‘로스네프트(Rosneft)’ 이사회 의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 때문에 사민당 핵심 지지층의 비판을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 회사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인 이고르 세친이 최고경영자(CEO)로 있다. 아울러 러시아 정부가 50% 지분을 가진 최대 국영 석유회사다. 이 밖에도 슈뢰더는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노르트 스트림(Nord Stream)’ 가스관 운영사의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다. 이 회사는 러시아의 거대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이 최대 주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