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한국전쟁이었던 바로 이 전쟁! [베트남 전쟁]
제2의 한국전쟁이었던 바로 이 전쟁!
2018년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65주년 기념일이다. 한국전쟁을 완전히 끝내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멈추고 있는 상태가 두 세대 이상이나 흘렀다는 말이다. 다행히 4월 27일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올해 안에 전쟁 종식을 선언하고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기로 합의했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은 1950-53년 한반도에서만 싸운 게 아니다. 1964-73년 베트남에서도 싸웠다. 베트남전쟁은 '제2의 한국전쟁'이었던 셈이다.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이 정전협정 65주년 기념일인 7월 27일 판문점에서 종전을 선언하길 기대하며, '제2의 한국전쟁'인 베트남전쟁에 관해서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베트남전쟁은 가장 명분 없는 미국의 침략전쟁 가운데 하나다. 남한은 1960년대 초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시작하기 전부터 적극적으로 먼저 파병을 제안했고 미국은 소극적으로 응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반 남한이 전투 병력을 파견하고 전쟁이 확대되자, 미국은 무리하게 남한의 추가 파병을 지속적으로 요청했다.
북한은 1960년대 후반부터 미국의 베트남 침략에 맞서 북베트남에 주로 전투기 조종사들을 파병했다. 아울러 남한의 추가 베트남 파병을 막기 위해 한반도 비무장지대 안팎에서 남한과 미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공격행위를 벌였다.
난 2000년 10월 일본 <평화의 배>에 올라 강연하며 일본인들과 베트남 다낭에 있는 호치민 박물관을 견학할 기회를 가졌다. 다낭은 1965년 미군들이 처음으로 상륙해 베트남에서 가장 큰 육해공군 기지를 설치했던 곳이다. 박물관의 거의 모든 전시실은 미군들과의 투쟁이나 미군들에 의한 양민 학살에 관한 자료로 메워진 것 같았다.
그 가운데 한 전시실엔 커다란 태극기를 앞세우고 다낭에 상륙하는 남한군들의 사진이 벽에 걸려 있었다. 그 옆의 전시실에는 북한 지도자들이 미국 제국주의 침략자들에 맞서 싸우는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베트콩)을 격려하는 편지가 크게 확대되어 걸려 있었다. 베트남에서까지 남북한이 서로 싸운 것에 서글프면서도 묘한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연재는 주로 다음과 같은 자료를 바탕으로 남한이 왜 그리고 어떻게 베트남에 파병했는지 살펴보되 미국의 역할에 초점을 맞출 것이다.
첫째, 미국 국무부가 2000년 출판한 존슨 (Lyndon Johnson) 정부 시기 한미관계를 다룬 비밀 외교문서집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Part 1, Korea.
둘째, 미국 국무부가 2009년 출판한 닉슨 (Richard Nixon) 정부 전반기 한미관계를 보여주는 외교문서집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XIX, Part 1, Korea, 1969~1972.
셋째, 미국 국무부가 2011년 출판한 닉슨 (Richard Nixon) 정부 후반기 한미관계를 보여주는 외교문서집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9-1976, Volume E-12, Documents on East and Southeast Asia, 1973~1976.
넷째, 미국 우드로 윌슨 센터 (Woodraw Wilson International Center for Scholars)가 2011년 공개한 베트남 군부의 문서 "North Korean Pilots in the Skies over Vietnam."
한편, 한국 외교통상부와 국방부도 2005년 베트남전쟁 종식 30주년을 맞아 베트남전쟁 관련 비밀문서를 공개했다. 이를 계기로 남한의 파병에 관한 배경이나 과정 또는 결과 등을 다룬 책과 논문이 많이 발표되었다. 몇 가지만 소개한다.
박태균 교수는 2006년 발표한 논문 <베트남 파병을 둘러싼 한미 협상 과정>과 2007년 발표한 논문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에서 미국의 외교문서를 통해 파병을 둘러싼 한국과 미국 간의 협상 과정을 보여주며 그에 대한 문제점 등을 밝혔다.
우승지 교수는 2004년 발표한 <베트남전쟁과 남북한 관계>라는 논문에서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도 베트남을 지원한 사실을 소개하며 베트남전쟁이 남북 관계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베트남전선은 한반도의 전선에 다음가는 제2전선이었던 것이다"며 베트남전쟁에 따른 남북한 사이의 충돌을 잘 보여주었다.
이정우 교수와 정재흥 박사 역시 2014년 발표한 논문 <한국군 베트남 파병의 과정과 평가>에서 주로 미국의 외교문서를 이용해 파병의 배경과 과정 그리고 한미 간의 협상 과정을 평가했다.
최용호 박사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베트남전쟁 관련 자료집을 바탕으로 한국군 파병 및 철군의 배경 및 경과, 파월 한국군의 작전 및 활동, 그리고 파병의 영향 등 종합적 연구를 수행했다. 2004년 출판된 <베트남전쟁과 한국군>에서 "한국군 파병의 보다 정확한 배경은 한국 정부의 집요한 파병 요청을 미국 정부가 수용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홍구 교수는 2003년 발표한 논문 <박정희 정권의 베트남 파병과 병영국가화>에서 파병의 배경과 과정을 드러내며 그 영향 및 결과도 제시했다. 그는 "한국군의 베트남 참전을 미국의 강요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는 일부 견해는 잘못된 것이다"고 주장했다.
홍규덕 교수는 2004년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 과정과 한미동맹의 성격 변화>라는 논문을 통해 한국군 파병의 원인과 과정을 파헤치며 이에 따라 한미동맹이 어떻게 변했는지 살펴보았다.
나는 최용호 박사나 한홍구 교수의 주장과 조금 달리 처음엔 박정희 정권이 먼저 적극적으로 제안했어도 나중엔 존슨 정부가 무리하게 강요하다시피 요구했던 사실을 밝힐 것이다. 그리고 우승지 교수의 주장을 뒷받침하며 베트남전쟁이 '제2의 한국전쟁'이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남한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북한은 북베트남을 지원하기 위해 각각 베트남에 파병했을 뿐만 아니라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비무장지대에서도 전투를 벌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재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에 관한 새로운 내용이라기보다 미국과 베트남의 공식 문서를 바탕으로 기존 연구들을 조금 보완하고 수정하는 내용일 뿐이다.
2. 1950~60년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베트남 침략
미국은 1950년 소련과 중국이 동맹조약을 체결하자 동아시아 정책을 크게 바꾸었다. 1949년 중국에 사회주의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소련에 대한 봉쇄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을 승인하려 했지만, 중소동맹이 맺어지자 패전국 일본과의 동맹을 추진하며 소련에 이어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한 것이다.
1950년 1월 중국과 소련이 프랑스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이는 북베트남 호치민 정부와 외교 관계를 수립하자, 미국은 이에 맞서 '프랑스의 괴뢰정부'인 남베트남 다이 (Bao Dai) 정부를 승인했다. 수송기와 탱크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남베트남의 프랑스 군부에 지원하기 시작하며, 1952년 프랑스가 북베트남 또는 베트남 독립동맹 (Viet-Minh)과 종전 협상을 벌이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트루먼 (Harry Truman) 정부는 동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중국에 이어 베트남에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는 것은 반드시 막고 싶었던 것이다. 1954년까지 프랑스에 약 14억 달러를 지원하며 거의 80%에 이르는 전쟁 비용을 부담했지만, '명분 없는 전쟁'을 벌인 프랑스는 북베트남을 이기지 못했다.
이에 앞서 베트민 지도자 호치민은 1945~46년 트루먼 대통령과 국무부에 적어도 8번이나 편지를 보내 베트남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에 의해 인도차이나에서 쫓겨났던 프랑스가 일본이 패배하자 다시 인도차이나를 점령해 평화를 위협한다며 미국, 소련, 영국, 중국의 4대 강국이 유엔을 통해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던 것이다. 트루먼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1954년 5월, 1946년부터 시작된 제1차 베트남전쟁 또는 '항불 (抗佛)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 또는 프랑스의 항복으로 끝났다. 아이젠하워 (Dwight Eisenhower) 정부는 미국이 직접 베트남과 전쟁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했다. 핵무기 사용까지 검토하면서 원자폭탄을 실은 폭격기를 북베트남 통킹만 (Gulf of Tonkin)으로 보내기로 했다. 베트남에 머물고 있는 프랑스 병력까지 해를 입을 수 있다며 프랑스가 반대하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결국 1954년 7월 제1차 베트남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네바협정이 이루어졌다. 베트남을 남북으로 분할하되 2년 안에 선거를 통해 통일국가가 되도록 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사국들과 4대 강국 가운데 미국은 반대했다. 나아가 남베트남에 경제 및 군사 지원을 시작했다. 선거가 실시되면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맞서 독립을 추구해온 호치민의 북베트남이 압도적으로 이길 게 뻔했기 때문이다.
아이젠하워 정부는 만약 선거가 실시되면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80% 안팎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지도자가 되리라 예상했다. 1955년 10월 남베트남에 디엠 (Ngo Dinh Diem)을 앞세워 반공정권이 들어서도록 지원하고 1957년엔 특수부대까지 보냈다. 제네바협정에 따른 베트남 총선거가 끝내 실시되지 못했던 배경이다. 베트남이 공산화하면 주변 국가들도 공산화하리라는 '도미노 이론'을 바탕으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반대한 것이다.
1961년 남베트남에서 흔히 '베트콩 (Viet-Cong)'으로 불리는 공산주의자들의 군사조직인 인민해방군이 결성되고, 사회 혼란 속에 디엠 정권의 부패와 폭정이 지속되자 케네디 (John Kennedy) 정부는 1963년 11월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디엠이 항복했지만 그와 동생이 살해당한 뒤 공교롭게 미국에서는 케네디가 암살당했다.
쿠데타를 통해 들어선 민 (Duong Van Minh) 정권이 베트콩 세력의 확산을 막지 못하고 오히려 대화를 추구하자 존슨 정부는 1964년 1월 또 다른 군사쿠데타를 지원했다. 칸 (Nguyen Khanh)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사회 혼란과 베트콩 세력의 확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존슨은 케네디의 베트남 정책을 유지하면서 군사 개입을 확대해나갔다.
미국은 1964년 7월부터 북베트남 통킹만에 함정을 보내 정찰 활동을 펼쳤다. 1964년 8월 북베트남이 미국 함정을 공격하는 '통킹만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빌미로 1965년 3월부터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였다. 제2차 베트남전쟁 또는 '항미(抗美)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통킹만 사건'은 7년이 지난 1971년 6월 미국의 유력 일간지가 국방부 비밀문서를 폭로함으로써 조작이라고 밝혀졌다.
3. 남한의 적극적 파병 제안과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바로 다음 달부터 미국에 베트남 파병을 제안하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미국이 1965년 3월 베트남을 침략해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으니 당시엔 꽤 엉뚱한 제안이었다.
첫째, 1961년 6월 정일권 주미대사가 케네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청하고 "한국은 미국과 한국이 같은 운명체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양국의 공통된 목표를 위해 한국인의 목숨을 희생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둘째, 1961년 7월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우리는 특히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하는 전 세계에 걸친 방위에 대한 당신의 언급을 환영합니다. 우리 역시 평화를 원하지만 만약 우리에게 전쟁이 강요된다면 한국은 싸움에 참여할 미국의 첫 번째 동맹국들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셋째, 1961년 11월 박정희가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와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은 굳건한 반공국가로서 극동의 안보에 기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북베트남은 잘 훈련된 게릴라부대를 갖고 있습니다. 한국은 이러한 유형의 전쟁에 잘 훈련된 백만 병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규부대에서 훈련받았는데 지금은 분산되어 있습니다. 미국이 승인하고 지원하면 한국은 베트남에 자체 병력을 보낼 수도 있고, 정규부대를 보내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면 지원병을 모집해 보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자유세계 국가들 사이에 행동 통일이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나는 출국 직전 이 문제에 관해 고위 장교들과 협의했는데 모두 열광적이었습니다. 대통령께서 군사자문관들에게 이 제안을 검토해보도록 하고 그 결과를 알려주기 바랍니다."
박정희의 제안에 케네디는 "활력을 얻었다 (was refreshed)"고 간단히 말했다. 회담 다음날 케네디가 박정희 환송을 위해 잠깐 다시 만난 자리에서 박정희는 베트남이나 다른 지역의 게릴라전투에 남한 병력을 보낼 수 있다고 다시 제안했다. 케네디는 그런 약속을 할 만한 때가 아니라며, 그 문제에 관해서는 주한미국대사를 통해 서로 연락하자고 했다.
넷째, 1962년 3월 송요찬 국무총리가 해리만 (Averell Harriman) 국무부 극동문제담당 차관보와 대담하면서 파병을 거듭 제안했다.
다섯째, 1964년 3월 김현철 전 총리가 버거 (Samuel Berger) 주한미국대사에게 한국은 미국과 남베트남이 북베트남과 전쟁을 수행하는 데 3000~4000명의 병력을 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을 전했다.
정일권 외부부장관 역시 한국의 베트남 참전을 원한다면서 한국의 해외파병을 막는 장애요인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까지 제시했다. 버거 대사는 그러한 조치의 결과를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하는데, 한국이 베트남전쟁에 개입하면 일본과의 협상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것 같다고 우려했다.
남한은 남베트남과의 접촉도 늘려갔다. 1964년 3월엔 김종필 민주공화당 총재가 사이공을 방문했고, 4월엔 남베트남 군사사절단이 남한을 방문해 군사훈련 및 군사정권의 민정 이양을 시찰했다.
이렇듯 남한은 미국이 1965년 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고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하기 훨씬 이전인 1961년 5.16쿠데타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다. 그 배경이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당시 남한과 미국의 정치적 상황이나 정책을 살펴보아야 한다.
남한에서는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로 잡은 정권의 안정을 위해 미국의 신임이나 지지를 받는 게 가장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 남한이 1980년대 말부터 어느 정도 민주화를 이룰 때까지는 위정자들이 선거를 통해 국민의 지지를 받는 것보다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게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1940년대 말 공산주의자로 활동했던 박정희가 1961년 5.16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가장 먼저 반공을 내세운 것은 미국에 보내는 신호였다. 냉전 시대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큰 목표는 반공에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밖으로 미국의 신임을 받기 위해 반공을 내세웠다면, 안으로는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성장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그는 1961년 11월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를 만나기에 앞서 러스크 (Dean Rusk) 국무부장관을 만나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공산주의 위협에 비추어보아 한국은 60만 병력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경제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중략) 60만 병력의 가장 확고한 반공국가로 남아있기 위해서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끝날 때까지 될수록 많은 경제 원조를 얻는 게 필요하다."
박정희는 자신의 공산주의 이력에서 벗어나면서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반공을 앞세우는 한편, 경제성장을 위한 미국의 원조를 받기 위해 베트남 파병을 제안했던 것이다.
케네디는 베트남에 군사침략을 감행할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1961년 4월엔 쿠바의 카스트로 (Fidel Castro)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쿠바 남부의 피그스만 (Bay of Pigs)을 침공했다가 1000명 이상이 죽거나 생포 당한 참담한 패배를 겪은 터였다.
그 무렵 미국이 남한에 가장 원했던 것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였다. 미국은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1950년대 중반부터 재정적자가 심각해졌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국방비와 대외원조를 감축해야 했다. 국방비를 줄이려면 해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규모 및 대외 군사원조를 축소해야 했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완강하게 반대하자 그를 달래기 위해 1958년부터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원조를 가장 많이 받던 나라 가운데 하나인 남한에 대한 경제지원을 줄이려면 남한과 일본이 국교정상화를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이 미국 대신 남한에 경제 원조를 할 수 있고 나아가 동북아시아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반공 집단안보체제를 구축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 이승만은 군비감축 뿐만 아니라 한일수교도 반대했기 때문에 4월 혁명 과정에서 미국의 압력을 받고 물러났지만, 박정희는 일본과의 협상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환심을 사야 했던 박정희 정권은 반공을 앞세우면서 베트남 파병을 적극 제안했고, 베트남에 대한 군사침략을 준비하지 않고 있던 케네디 정부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이 한일수교 협상에 지장을 초래할까봐 부정적으로 검토했다.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당하고 들어선 존슨 정부가 베트남 정책을 서서히 바꾸기 시작한 가운데, 12월엔 박정희가 선거를 통해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1963년 12월 북베트남이 남베트남을 직접 공격하겠다고 의결했다. 미국은 1964년 3월부터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하고, 4월부터 베트남에 '될수록 많은 국기를 꼽는 운동 (More Flag Campaign)'을 전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존슨 정부는 1964년 5월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국들에게 북베트남의 공산정권을 패배시키기 위해 병력이나 물자 또는 다른 형태의 지원을 제공해달라고 호소했다. 한국 정부엔 야전병원 1개 부대를 요청함으로써 1964년 6월 한국이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을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다.
박정희 정부는 미국이 왜 베트남에 아직 군사침략을 하지 않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며 전투부대를 보내고 싶어 했다. 존슨 정부는 남베트남이 전투부대를 아직 요청하지 않은 데다 게릴라전쟁의 특성상 특히 제3국으로부터의 지상군 운용이 부적절하다며 거부했다.
1964년 7월부터는 미국이 북베트남 통킹만 연안에서 정찰 활동을 펼치면서 8월엔 이른바 '통킹만 사건'을 조작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4년 9월 130명의 야전병원 부대와 10명의 태권도교관들을 베트남으로 보냈다.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것이다. 한국군 최초의 해외 파병이었다.
한편, 1964년 3월 미국이 베트남 문제에 동맹국들을 끌어들이는 정책을 구상할 때부터 1964년 9월 한국 역사상 최초의 해외 파병이 이루어질 때까지 한국의 정치 상황은 몹시 혼란스럽고 위태로웠다. 1964년 3월부터 서울에서 한일협상에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일어나는 가운데 군부 내의 쿠데타 움직임도 있었다.
주한미군은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키되 친미 군부가 박정희 정부를 전복시킨다면 지원한다는 방침을 정했다. 민주공화당 내분도 한일협정에 앞장서고 있던 김종필 의장의 권세 때문에 꽤 심각했다.
이에 미국은 박정희의 조카사위인 김종필을 박정희의 '밀사 (eminance grise)' 또는 러시아 황제의 신임을 얻어 권세를 휘두르다 암살당한 '라스푸틴 (Rasputin)'으로 간주하며, 박정희에게 김종필을 제거하고 공화당을 재건하라는 압력을 행사했다. 미국은 한국에 수십 억 달러를 퍼부어도 박정희 정부가 '혼란스러운 독재 (messy fief)'에 머물러있다며 한국을 '커다란 실패작 가운데 하나 (one of our great failures)'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64년 6월 한일협정 반대시위가 격렬해지자 서울대학교 총장은 박정희에게 65명의 대학생들과 많은 교수들이 공산주의자들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박정희는 이를 빌미로 6월 3일 서울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른바 '6.3사태'다.
하워즈 (Hamilton Howze) 주한미군사령관과 버거 대사는 박정희에게 '미국의 승인이나 동의 (approval or agreement)'를 받았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라는 조건을 붙여, 한국군 2개 사단을 작전통제권에서 풀어주었다. 미국이 박정희와 공화당에 지나치게 간섭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며칠 사이에 민간인 1344명과 학생 523명이 체포되고, 학생 191명이 수배되었다.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대로 김종필을 미국으로 내보낼 수 있었다.
1964년 9월 한국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에도 미국은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공산주의자들이나 반미주의자들에 의한 쿠데타나 봉기가 일어나면 박정희 정부를 지지하지만, 내부의 권력투쟁엔 중립을 지킨다는 방침을 거듭 확인했다. 박정희는 이렇게 혼란스럽고 위태로운 상황에서 계엄령으로 반대세력을 제압하며, 베트남 파병을 통해 미국의 신임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미국의 충실한 '용병'이었던 박정희
1964년 9월 남한의 제1차 베트남 파병이 이루어지고, 1964년 10월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제는 미국이 먼저 공식적으로 한국의 파병을 요청했다.
1964년 12월 브라운 (Winthrop Brown) 주한미국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존슨 대통령의 뜻이라며 공병이나 건설부대 또는 수송이나 의료부대 등을 베트남에 보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박정희는 필요하다면 2개 전투사단을 보낼 수 있다고 했지만, 미국은 아직 전투부대를 원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1000명을 요청했어도 한국은 2000명 규모의 건설지원단을 편성해 1965년 2~3월 베트남에 보냈다. '비둘기부대'였다.
이 과정에서 한국은 파월 장병들의 수당을 한국 정부를 통해 지급해달라고 요구했고, 미국은 수당을 미국 정부가 지급한다는 사실을 공표하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용병(傭兵)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남한의 제2차 파병이 이루어지던 1965년 3월부터 미국은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아울러 남한의 전투부대 파병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파병을 원하지만, 남한 정부가 한일협정 비준에 전력을 쏟아야 하는데 전투부대 파병에 대한 국회에서의 논란이 정부에 부담이 될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만 조금 파병했을 뿐 다른 나라들은 파병 요청에 응하지 않은 터에 남한에게만 추가 파병을 요청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특히 남한만 전투 병력을 보내면, 남한은 미국의 '괴뢰나 하인 (puppet or vassal)'으로, 그리고 남한군은 미국의 '용병 (mercenaries)'으로 사용된다는 인상을 줄 것이라고 예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나중에 1만 8000명 규모의 사단 병력까지 요청할 계획을 세워놓고, 1965년 4월 남한에 우선 4000명의 연대 규모 전투부대를 2개월 안에 파병해달라는 뜻을 전했다.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해 존슨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존슨이 한국의 파병을 직접 그리고 거듭 요청했다. 박정희는 굴욕적 한일협상에서 빚어진 어려운 국내정치 상황을 극복하는 데 미국의 신임을 이용하기 위해 1964년 9월부터 미국 방문을 추진해왔다. 미국은 한일협정 체결 이전엔 워싱턴 방문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거부하다가, 한국이 서둘러 1965년 6월 도쿄에서 일본과의 협정을 체결하기로 합의하자, 박정희의 방문을 수락한 터였다.
존슨은 1960년대 전반기 미국 정부의 '최고 관심사 가운데 하나' 또는 '가장 급선무'였던 한일협정이 성사된 터라 박정희에게 부담 없이 파병을 요청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예 1개 사단 규모의 전투 병력을 보내줄 수 있느냐고 거듭 요청했다. 이 제안은 1965년 8월 국회 동의를 얻어, 10월 1만 8000여 명의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제3차 파병이었다.
미국은 1965년 7월부터 북베트남에 대공세를 펼치면서 1965년 말까지 18만여 명의 병력을 남베트남에 보냈다. 그래도 승리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이 다급해진 터에 1965년 12월 박정희가 먼저 이후락 비서실장이나 김정렬 주미한국대사 등을 통해 미국에 한국의 추가 파병이 필요한지 물었다. 병력을 더 보낼 수 있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다.
이에 브라운 대사가 박정희를 만나 1개 사단과 1개 여단을 더 파병해달라고 요청했다. 존슨 대통령은 브라운 대사에게 한국의 추가 파병을 확보하는 게 '극도로 중요한 사항'이라며 "적절한 대가를 주고 추가 파병을 확보할 수 있도록 최대한의 압력을 행사할 것"을 지시했다. 1966년 1~2월 한미 간의 협상 과정에서 미국이 한국에 얼마나 무리하게 요청했으면 브라운 대사가 국무부에 다음과 같이 항의하다시피 했겠는가.
"나는 지금 갑자기 한국 정부에 훨씬 더 많은 병력을 요구한다는 생각에 섬뜩해진다. 우리는 한국에 소수의 의료지원단을 요구해서 수백 명을 지원받았다. 훨씬 큰 비전투부대를 요청해서 2000명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전투사단을 요구해서 2만 명을 지원받았다. 당혹스러울 만큼 짧은 기간에 우리는 더 많은 전투 여단과 사단을 요청했는데, 약 3만 명을 지원받을 것 같다.
이제 한국인들이 이에 대한 결정을 굳힐 시간조차 갖기 전에, 우리는 그들에게 1만 명을 더 보내달라고 요구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요구는 언제 끝날 것인가? (중략) 이렇게 되면 거의 6만 명의 한국군들이 남베트남에 머무르게 되는데, 한국을 빼고는 실질적으로 유일한 참전국인 미국보다 인구 비율로 따지면 2-3배 더 많은 것이다. (중략) 나는 이에 반대해주길 강력하게 권한다"
박정희 정부는 1966년 2월 1개 연대와 1개 사단을 베트남에 파병할 것을 공표하고 3월 국회 동의를 얻었다. 사단 병력인 '백마부대'는 1966년 8월까지, 5000명의 연대는 10월까지 보내기로 했다. 제4차 파병으로 약 4만 5000명의 한국군이 남베트남에 진주하게 되었다.
1966년 10월 제4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1월 존슨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을 만났다. 북베트남을 봉쇄하려면 60~70만 병력이 필요하다는 웨스트모어랜드 (William Westmoreland) 주 베트남 미군사령관의 말을 전하며, 한국의 추가 파병을 넌지시 요청했다. 박정희는 최근에 제대한 병력으로 1개 전투사단을 만드는 것은 즉시 쉽게 할 수 있다고 답했다.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브라운 주한미국대사에 전문을 보내 늦어도 1967년 4월까지 한국군 1개 사단 추가 파병을 확보하는 게 '극도로 중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1967년 중반까지 미국 전체 인구의 0.25%가 베트남전쟁에 참여하게 되는데, 한국이 그 정도로 기여하려면 약 7만 2500명을 파병해야 한다는 논리를 덧붙였다. 이에 브라운은 대략 다음과 같이 대꾸했다.
"박정희는 존슨에게 1967년 5월로 예정된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반대세력을 의식해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가 지금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 분명히 선거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지난번에도 얘기했듯, 제1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제2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제3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잉크도 마르기 전에' 제4차 파병을 요청해서 얻었다. 이제 제5차 파병을 요청하려 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요청이 언제 어디서 끝날지 그리고 다른 나라들은 왜 이런 압력을 받지 않는지 의아해할 것이다. 따라서 주한미군사령관도 동의했는데, 선거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겠다. 박정희도 아마 선거 후에 그런 요청을 받게 되길 기대할 것이다."
1966년 12월 한국은 미국에 제대병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포함해 민간 의료지원단 및 건설지원단 등을 베트남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한미 간에 연례 장관급 회담을 시작하거나 특히 국무부 장관이 대통령선거 전에 서울을 방문해 박정희의 지도력을 공개적으로 치켜세워 주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이를 거부했다. 나아가 한국에 대한 재정지원을 추가 파병과 연계하며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미국의 이런 집요한 요청과 압력에 박정희는 1967년 2월 3개 해병대대를 추가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국회에서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병력 교대'로 가장하면서, 언론에는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놓고 100만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어서 베트남에 추가로 파병할 수 없다고 했다.
1967년 3월엔 존슨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한 정일권 국무총리에게 베트남에서 한국군처럼 잘 싸우는 군대는 없다고 추켜세우며 추가 파병을 거듭 요청했다. 또한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1967년 5월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가 이기자, 그의 취임식에 참석하기 위해 6~7월 서울을 방문한 험프리 부통령은 박정희에게 추가 파병을 결정하면 과학기술 및 경제 지원을 후하게 하겠노라고 회유했다. 결국 1967년 7월 3000명의 해병대대가 베트남으로 떠남으로써 제5차 파병이 이루어졌다.
제5차 파병이 이루어진 직후인 1967년 8월 존슨은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아시아인들이 미국인들보다 베트남의 위험에 더 가까이 있는데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동맹국들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이었다.
이에 박정희는 1967년 9월 포터 (William Porter) 주한미국대사를 만나 존슨의 추가 파병 요청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비무장지대에서의 남북 충돌이나 북한의 침투활동 등 국내문제 때문에 추가 파병이 어렵지만 베트남에 1개 사단 정도 더 보낼 수 있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그러나 포터는 11월까지 한국의 국내정치 문제 때문에 박정희와 협상하면서 그에게 '어떠한 실질적 압력 (any real pressure)'을 행사하기 곤란하다고 국무부에 보고했다. 또한 한국이 5만 명의 파월장병을 그들의 꿈을 이루는 '요술 방망이 (Alladin's Lamp)'로 간주하고 있다고 밝혔다. 한국 정부가 파병 대가로 지나친 경제 및 군사 원조를 바란다는 뜻이었다.
이에 번디 (William Bundy) 국무부차관보는 '요술 방망이의 함정'을 피하라면서 미국이 여전히 '최대한의 추가 파병 (maximum additional ROK troop contribution)'을 원한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러스크 국무부장관은 존슨 대통령이 바란다면서 한국의 추가 파병을 '최대한 긴급하게 (with maximum urgency)' 추진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미국의 압력에 한국정부는 1967년 12월 '1개 소규모 사단 (one light division)'을 베트남에 보내겠다고 합의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파병 대가로 미국이 군사 및 경제지원을 하기로 한 1966년 3월의 합의를 지키라고 요구했다. 1966년 3월 제4차 파병 협상 과정에서 브라운 대사가 약속한 내용을 서면으로 정리한 이른바 '브라운 각서 (Brown Memorandum)'를 미국이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1967년 12월 호주에서 두 대통령이 만나, 미국은 한국이 원하는 구축함을 비롯한 군 장비를 늦어도 1968년 1월까지 한국에 보내기로 하고, 한국은 미국이 원하는 베트남 추가 파병을 한 달 앞당겨 1968년 3월까지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1968년 1월 북한 특수부대원 30여 명이 '박정희의 목을 따러' 청와대를 습격하려던 '1.21 사태'와 원산항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장병 80여 명이 탄 정보함정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북한 초계정에 나포되는 사건이 연이어 터졌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베트남에서 이른바 '구정 (Tet) 공세'가 전개되었다. 베트남의 최대 명절인 음력설을 맞아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 인민해방군이 100곳 이상의 남베트남 도시를 기습하고 심지어 주베트남 미군사령부와 미국대사관까지 공격한 것이다.
존슨은 1968년 2월 박정희에게 편지를 보내 미국과 한국이 "베트남에 강하게 남아 꿋꿋하게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며 한국의 추가 파병을 넌지시 원했다. 박정희는 답장을 통해 북한의 공격행위에 대해 단호한 행동을 촉구했다.
미국 관리들은 박정희가 "나중에 삼수갑산에 갈지라도 (apres moi le deluge)" 북한을 보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거의 비이성적으로 사로잡혀 있다"고 판단하며, 남한의 공격에 의한 전쟁은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만약 한국이 베트남의 병력을 줄이거나 철수하면 미국은 똑같이 주한미군을 감축하거나 철수하겠다고 위협하며 한국의 1개 사단 추가 파병을 거듭 촉구했다.
그 무렵 서울을 방문한 밴스 (Cyrus Vance) 국방부차관은 박정희를 만나 한국이 베트남에서 철수를 '고려하기만' 해도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이라고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 존슨에게 박정희가 과음을 하고 부인과 측근들에게 재떨이를 던지는 등 나라 전체를 통제하며 일방적 행동을 취함으로써 '매우 강력한 위험'이 있다고 보고했다. 1968년 3월 정일권 국무총리는 미국이 한국에 재정 및 군사 지원을 해주면 2개 사단을 베트남에 보낼 수 있다고 제안했다.
1968년 4월 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암살되면서 미국 주요도시에서 베트남전쟁 반대시위가 거세게 전개되었다. 1965년부터 대학가를 중심으로 산발적으로 일어나던 반전운동이 1968년 1월의 '구정 공세'와 4월의 킹 암살로 격렬해진 것이다.
이 무렵 존슨은 북베트남 폭격을 멈추고 휴전을 추진하는 한편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1968년 4월 중순 박정희를 만나 추가 파병을 요청했다. 박정희는 존슨의 휴전 움직임에 강력하게 반대하면서도, 그의 대선 불출마 발표에 영향 받아 소극적으로 응했다. 추가 파병을 당장 하기는 어렵고 나중에 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미국 중앙정보국 (CIA)은 박정희가 존슨을 만나기 전까지는 1개 사단을 기꺼이 추가 파병하려고 했지만, 존슨이 대선 불출마를 선언함으로써 권력과 영향력을 잃었다고 생각한 데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지원 확대를 꺼려하자, 추가 파병을 추진하지 않는다고 파악했다.
1968년 6월엔 한국이 5,000명의 제대 병력을 보내겠다고 제안했지만 미국은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미국은 이미 5월부터 북베트남과 휴전을 위한 비밀협상을 시작한 터였다.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에서 닉슨 (Richard Nixon)이 이기고 1969년 1월 취임하여 7월 이른바 '닉슨 독트린 (Nixon Doctrine)'을 발표했다. 앞으로 베트남전쟁과 같은 군사적 개입을 피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미군들을 철수하기 시작하면서도 베트남의 한국군은 그대로 유지되길 원했다. 박정희 역시 미국이 원하면 한국군을 베트남에 계속 주둔시키겠다고 했다. 미국 정부는 베트남의 한국군들 수당이 한국에서의 봉급보다 10배 이상 많으니 한국이 철수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다.
한국 정부는 1971년부터 국내 여론과 국제사회의 비난에 따라 한국군 철수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미국은 1971년 주한미군 6만 3000명 가운데 2만 명을 철수한 데 이어 추가로 감축하겠다며 위협하기도 하고 한국군 현대화 사업을 지원하겠다고 달래기도 하며 한국군 철수를 반대했다.
이에 한국은 1973년 1월 미국과 북베트남 사이에 평화협정이 맺어진 뒤에야 병력을 불러들일 수 있었다. 미군 전투 병력이 거의 떠난 1972년 여름부터 1973년 3월까지 5만 명 안팎의 한국군 2개 전투사단이 베트남전장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한국은 미국이 베트남전쟁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병력을 보내고 미국이 전쟁을 끝낸 뒤에 군대를 철수시켰으니 미국의 침략전쟁에 가장 충성스러운 앞잡이였고 성실한 실행자였다. 용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