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北美,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적대 관계의 청산
일취월장7
2018. 6. 12. 16:00
北美, 세계에서 가장 오랜 적대 관계의 청산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의미하는 것
2018.06.10 20:08:54
북한과 미국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다. 이번 회담이 성공적으로 마무리 될 경우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비핵화와 함께 북미 관계의 정상화가 이뤄질 것이다. 세계사의 '대전환'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되는 것이다.
'대전환'의 요체는 북한과 미국의 관계 정상화다. 70년에 걸친 북미 대결의 역사가 끝장나고, 북한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북한과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지금까지 가장 오랜 적대관계를 이어왔다.
냉전 시대의 숙적 소련은 1991년 제풀에 쓰러졌고 쿠바 혁명(1959년) 이후 50여 년간 지속됐던 미-쿠바 적대 관계도 2015년 오바마에 의해 해소됐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에서 미국과 열전을 치렀던 중국과 베트남도 각각 1979년과 1995년 대미 수교와 함께 국제사회에 진입하면서 경제 개발에 매진하고 있다.
유독 북한만이 그 길에 들어서지 못했다. 냉전 종식 이후 30년이 돼가도록 국제사회의 외톨이로 남아 동아시아 불안정의 근원이 되고 있다. 패권 국가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지 못한 탓이다. 오직 미국만이 타국의 안전보장과 국제사회 참여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 수교가 이뤄진다면 북한은 건국 이후 처음으로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안으로는 경제개발에 집중하며 밖으로는 동아시아 평화에 기여할 수 있게 된다. 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료와 남·북·미·중 평화협정이 성사될 경우 북한은 더 이상 동아시아 불안정의 근원이라는 오명을 벗어날 수 있다.
이로써 2차 대전 종전 이후 지속돼 온 동아시아 냉전은 종식될 것이다. 나아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전국(戰國)시대가 끝장나고 동아시아 평화시대의 서막이 열릴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동아시아를 전쟁으로 물들여왔고 패전 이후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 동아시아 냉전의 일익을 담당했던 일본 역시 북한과의 관계 정상화에 나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본은 2002년 9월 고이즈미의 평양 방문으로 북일 관계 정상화를 천명한 바 있다. 이러한 일본의 시도는 한 달 뒤 미국 네오콘에 의한 제네바합의 파기로 무산됐다. 하지만 북미 수교가 현실화된다면 일본은 미국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대반전의 계기: 북한의 핵무력 완성
지난해 말까지 한반도 상공에 짙게 드리웠던 전쟁의 그림자가 올 초 평창올림픽 이후 남·북·미 지도자 간의 평화협상으로 급반전한 계기는 무엇인가?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의 핵무력 완성, 북한과의 평화공존 및 한반도 평화를 추구하는 남한 촛불정부의 탄생, 군사주의에 의한 세계 패권 유지라는 2차 대전 후 미국의 전통적 대외정책 노선을 거부하는 트럼프정부의 등장이 그것이다.
냉전 종식 이후 북미 관계 정상화를 가로막은 최대 걸림돌은 북한의 핵개발이었다. 북한은 핵개발 포기를 대가로 북미 수교를 요구했고 미국은 북한의 선비핵화를 요구하며 팽팽히 맞서왔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북한의 핵능력 완성이 이번 북미 협상의 돌파구를 열었다는 점이다. 북한의 핵무장은 핵 보유 자체가 아니라 미국과의 협상을 위한 회심의 카드였던 셈이다.
북한은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많이 미국의 핵위협을 받아온 국가다. 반면 미국은 지난해 11월 북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미 본토 도달 능력이 입증된 이후 비로소 처음으로 북한의 핵능력을 실존적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6자 회담이 시작된 2003년 이후 북한의 지속적인 '핵 보유' 주장을 무시해 왔던 미국도 이제는 북한과의 진지한 협상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실 그동안 미국의 핵정책은 이중기준적 행태를 보여 왔다. 이스라엘, 남아공, 인도, 파키스탄 등 동맹국 또는 우방국의 핵개발은 묵인해 온 반면 북한, 이라크, 리비아 등 적대국의 핵개발에 대해서만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온 것이다. 특히 세계는 핵무기가 없거나 핵개발을 포기한 후세인, 가다피의 최후를 목격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직면했던 북한이 핵개발에 일로매진한 것은 어쩌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북한은 2006년 10월 첫 핵실험 이후 지난해까지 무려 12년에 걸쳐 6번의 핵실험을 하면서 핵개발 포기와 북미 수교의 맞교환을 요구해 왔다. 반면 인도와 파키스탄은 단 하루, 또는 이틀 만에 5~6회의 핵실험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국제사회가 저지할 틈도 주지 않고 핵 보유를 기정사실화 하려 한 것이다. 이스라엘과 남아공은 핵실험조차 하지 않은 채 은밀하게 핵무기를 개발했다. 반면 장기간에 걸친 공개적인 북한의 핵개발은 대미 협상용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그동안 미국의 세계적 핵비확산 정책은 이중적이며 기만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촛불 정부와 트럼프 정권
2006년 10월 북한의 첫 핵실험 직후 호전적인 부시행정부조차 종전선언 등 북한과의 핵협상에 나섰다.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된 배경에는 이러한 미국의 태도 변화가 있었다. 그러나 2008년 이후 등장한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북한의 선비핵화를 요구하며 진지한 대북 협상을 거부했다. 북한붕괴론의 망령에 씌운 탓이다. '핵 없는 세계'를 주창하며 북한에 대한 건설적 관여를 추구했던 오바마의 대북정책이 '전략적 인내'라는 실패한 정책으로 귀결된 데는 한국 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문재인 정부의 등장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새로운 동력을 제공했다. 특히 이번 프로세스가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전과는 달리 남과 북의 주도성이 훨씬 크기 때문이다. 북핵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보인 것은 1994년 10월의 제네바 합의와 2005년 6자회담 9.19 공동성명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제네바합의의 경우 당시 김영삼 정부의 변덕 탓에 한국은 협상과정에서 원천 배제됐다. 9.19공동성명은 노무현 정부의 적극적인 중재가 있었지만 여전히 협상의 주역은 북한과 미국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남과 북의 정상이 먼저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을 부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미국을 협상에 끌어들였다. 협상의 주도권을 남과 북이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남북의 확고한 평화 의지가 협상의 버팀목이 되면서, 협상 타결의 가능성은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문재인정부를 탄생시킨 2016-17년의 촛불혁명은 한반도 평화의 시발점이라고 할 만하다.
미국의 참여는 트럼프 정부 유일의 좋은 정책 결정이라고 할 수 있다. TPP 탈퇴, 파리기후협약 탈퇴, 이란 핵협정 탈퇴 등 일방주의로만 질주하던 트럼프 정부가 한반도 평화협상에 참여한 것은 어쩌면 '이성의 간계(奸計)'라고나 해야 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목표를 위한 선택이 결과적으로 동아시아 평화의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8일 그가 미국 주류의 경악 속에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한 배경에는 트럼프 특유의 미국우선주의가 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 외교의 초당적 합의는 '세계적 군사 개입에 의한 미국 국익의 관철'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트럼프는 이러한 초당적 합의를 거부한다. 기존 엘리트들이 강조해온 세계에 대한 미국의 의무(와 권리) 따위는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 핵이 미국에 실질적 위협이 됐으므로 마땅히 이를 제거해야 하며, 협상의 달인인 자신만이 이를 해낼 수 있다는 것이 트럼프의 입장이다.
한반도, 전쟁의 진원지이자 평화의 발신지
근대 이래 한반도는 열강의 전쟁터였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한국전쟁 등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은 한반도를 자신의 세력권으로 삼기 위해 바로 이 땅 위에서 전쟁을 벌여왔다. 중국과 러시아에게 한반도는 일본, 미국 등 해양세력의 대륙 침략 통로였고 미국, 일본에게 한반도는 대륙 세력이 자신을 겨누는 비수였다.
미·일·중·러의 각축 속에 한반도의 민초들은 어육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가히 '지리의 저주'라 할 만하다. 그러나 '지리의 저주'를 불러온 것은 '인화의 실패'였다. 동학농민전쟁이 청일전쟁의 단초가 됐고 남북 대결이 미국과 중국의 전쟁을 초래했다. 내부의 분열이 외부 세력의 전쟁을 불러온 것이다. 한마디로 지난 120여 년간 한반도는 동아시아 전쟁의 진원지였다.
그러나 이제 한반도가 평화의 발신지가 되는 절호의 기회가 열리고 있다. 지난 3월 이후 중국, 일본, 러시아 등이 한반도에 보여준 뜨거운 관심은 남북의 화해가 한반도는 물론 동아시아 평화의 초석이 될 것임을 보여준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오랜 역사에서 입증된 명제다.
단재 신채호는 1921년에 쓴 '조선독립과 동양평화'라는 글에서 대륙에서 바다로 진출하려는 힘과 바다로부터 대륙으로 쳐들어가려는 힘을 중간에서 막는 것이 "유사 이래 조선인의 천직"이라면서 동양평화의 상책은 "조선의 독립"만한 것이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조선 병탄을 지원, 묵인한 미국 등 서방 세력에 대한 비판이자 호소였다. 이후 일본은 단재의 예언대로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파멸적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
또한 민세 안재홍은 "조선이 한번 자주독립을 잃어버리면 동아시아의 평화는 문득 깨어지고" 만다면서 한민족의 반침략투쟁이 중국과 일본에 방파제 역할을 했다고 말했다. 몽골에 대한 고려의 항쟁이 일본을 구원했고 임진왜란에서는 일본을 격퇴함으로써 중국의 병화를 막았다는 것이다. 남북의 화해와 한반도의 자주성이 동아시아 평화의 핵심이자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북미 정상회담은 한반도와 동아시아가 평화의 길로 나아가는 거대한 첫 걸음이 될 수 있다. 특히 남·북·미 세 나라 지도자의 결단에 의한 평화 공모(共謀)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 속에 숨어 있고', '끝이 좋아야 모든 게 좋은' 법이다. 한반도 및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기대하며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을 간절히 기원한다.
한반도 지정학에서 동아시아 지경학으로
[현안진단] '종축 아시아 평화지대' 만들자
2018.06.11 08:28:26
민주주의와 평화의 달, 6월에 열리는 북·미 정상회담
이제 곧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한반도 운명을 크게 바꿔 놓을 이 회담이 6월에 열리게 된 것은 6월의 기운이 만든 역사적 필연인 것처럼 생각된다.
6월에는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6.10 만세운동 및 민주항쟁, 6.15 남북공동선언, 6.23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 6.29 선언 등 우리 역사에 민주주의와 평화의 이정표를 새긴 날들이 유난히 많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전쟁에서 평화로의 이행과 불가분의 과정이라는 것을 6월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 6.12라는 날짜가 한반도에서 68년 동안 이어진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기록된다면, 촛불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부활과 한반도 평화시대의 도래가 하나로 이어진 과정이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하게 될 것이다.
6월은 민주주의와 평화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를 비틀고 그늘지게 만든 6.25가 있다. 그렇기에 전쟁 종식의 역사는 6.25전쟁에 이르는 역사과정을 거꾸로 더듬어가는 역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전쟁 당사국 사이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시작될 것이지만,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다.
6.25전쟁은 연합국의 대일전쟁 승리가 한반도의 분할점령과 분단정권 수립으로 귀착된 데 원인이 있다.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되면서 치열해진 연합국 진영 내 줄다리기가 이어진데다, 거기에 대륙을 석권한 혁명 중국과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헤게모니 싸움이 얽혔다.
그 사이에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치열한 대 연합국 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한반도 분할점령, 분단 정권 수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국의 이기주의가 곳곳에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이 과정을 역순으로 전개하여 전쟁종식, 평화공존, 통일로 이르게 하려면, 남북의 화해·협력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관건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치열해진 주변국들의 외교전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에서 시작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우리들의 기대가 모아지는 동안, 주변국들의 치열한 외교전이 시작되고 있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국의 개입이 두드러졌다.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두 번째 만남을 가진 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전부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직전 라브로프 러시아 외상은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엔 시진핑 주석과의 협력관계에 언급하면서 러시아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 러시아를 번갈아 압박하는 구도 속에서 미·북 정상회담을 나흘 앞두고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과시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뒤처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열흘 전에 워싱턴을 방문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더니, 북·미 정상회담을 닷새 앞두고 다시 워싱턴을 방문해서 트럼프의 의중을 파악하는 한편 북한과 직접 대화의 운을 띄웠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하여 러시아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과 관계가 껄끄러운 러시아도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샤코프 러시아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은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는 영토 문제에서 일본의 양보를 요구하면서도 러·일 평화조약 체결 가능성을 언급하며 일본에 추파를 던졌다.
아베 총리는 영토 문제에서 기대만큼의 진전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지속적인 경제협력 실시를 약속했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올해 9월에 개최될 동방경제포럼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할 뜻을 밝히기도 했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한다면 여기에서 푸틴-김정은 정상회담과 동시에 아베-김정은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상기시키는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현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서 전쟁 종식의 프로세스가 가시화하면서 다양한 조합의 양자 간 정상회담이 줄을 이어 열리고 있고, 또 열릴 예정이다.
양자 간 접촉이 이토록 활발한 이유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식이, 우리에겐 평화와 통일로 가는 희망의 출발점이지만 주변국들에게는 세력균형의 현상을 변경하여 기존 질서를 동요시키는 불안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외교의 진정한 도전은 북·미 정상회담 이후부터 시작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따라서는 남·북·미 3자 간의 종전선언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 환희의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선 중국의 개입이 본격화할 것이다. 일본도 북·미 정상회담에 온 신경을 쓰며, 회담이 끝나자마자 북한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북한과 신뢰관계를 다져 온 러시아는 자신감을 갖고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한반도 주변 세 나라를 거론하고 보니, 그 형상이 꼭 19세기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반도가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 책봉질서가 붕괴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러일전쟁의 전후처리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결과였다.
근대화와 식민지 유제 청산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대립이 6.25전쟁으로 귀결했다는 의미에서 6.25전쟁의 한 뿌리는 청일전쟁에, 다른 한 뿌리는 러일전쟁에 닿아 있다. 그래서 6.25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세 차례의 동북아시아 전쟁을 총괄해서 극복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경위와 구조를 이해할 때,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우리 외교가 도전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한반도 지정학에서 동아시아 지경학으로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에서 19세기 말의 지정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러 간, 러·일 간은 물론 중·일 간에도 협력을 통한 평화 증진 가능성이 큰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에서 발원한 평화 프로세스가 동아시아에 지정학의 시대를 대신해 지경학의 시대를 열고 있다는 점이 19세기 말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제는 번영에의 기대가 평화를 견인할 수 있는 시대다. 세계전쟁의 세기였던 20세기의 학문 국제정치학은 지난 세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러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다자주의 협력과 공동체 구축을 고안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분단선 위에서 평화를 연결하고, 번영을 연결하고, 사람을 연결하여 평화의 공동체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정부의 외교 구상은 세계적, 세기적 의의를 지닌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러한 구상을 실천하기 위한 기반정비에 해당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간의 노력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소기의 성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성과를 미·중 대립의 블랙홀에 갖다 바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노력에 더해 한반도의 밖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러시아와 일본을 잇고, 나아가 아세안까지 도달하여 '종축 아시아 평화지대'를 창출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과거 러시아와 일본은 남북화해를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이니셔티브에 부응하여 한반도 냉전 해체에 호응한 적이 있다.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7월에 러시아 원수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하여, 북한의 '개건(페레스트로이카의 북한식 용어)'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때도 지금도 푸틴에게 북한의 개혁개방은 러시아 극동개발의 마중물로 존재한다.
그로부터 2년 뒤 2002년 9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도 방북을 결단하여 북·일 평양선언을 통해 국교정상화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비록 두 지도자의 행동이 깊은 역사의식이나 소명감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냉정한 국익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러시아와 일본의 국익 계산이 한반도 냉전 해체의 방향에서 조화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미·중 사이의 대립이 깊어진 현실은 그 가능성을 더 키워주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의 위와 아래에서 러시아와 일본을 견인해 내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관여하게 하는 것은 위험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계산에 입각해 있다.
평화의 시대는 역사의 필연이다
다시 6월 이야기다. 이번엔 20세기 초의 6월이다. 1903년 6월, 일본은 어전회의를 열고 만한(滿韓)교환론을 대러 교섭방침으로 확정했다.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위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지펴진 러·일 갈등의 불씨는 결국 러일전쟁으로 발화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의 20세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대분할의 시대였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 한반도의 안과 밖에서 극한 대립을 지속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6월의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동아시아의 남과 북을 이어 '종축 아시아 평화지대'를 창출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전쟁의 기억과 평화의 이정표가 뒤섞인 6월에 전쟁의 시대를 매듭짓고 평화의 시대를 여는 역사의 필연을 본다.
이제 곧 역사적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 한반도 운명을 크게 바꿔 놓을 이 회담이 6월에 열리게 된 것은 6월의 기운이 만든 역사적 필연인 것처럼 생각된다.
6월에는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6.10 만세운동 및 민주항쟁, 6.15 남북공동선언, 6.23 평화통일외교정책 선언, 6.29 선언 등 우리 역사에 민주주의와 평화의 이정표를 새긴 날들이 유난히 많다. 독재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전쟁에서 평화로의 이행과 불가분의 과정이라는 것을 6월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여기에 6.12라는 날짜가 한반도에서 68년 동안 이어진 전쟁상태를 종식시키는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날로 기록된다면, 촛불에서 시작된 민주주의 부활과 한반도 평화시대의 도래가 하나로 이어진 과정이었음을 다시 한 번 증명하게 될 것이다.
6월은 민주주의와 평화로만 기억되지 않는다. 우리 현대사를 비틀고 그늘지게 만든 6.25가 있다. 그렇기에 전쟁 종식의 역사는 6.25전쟁에 이르는 역사과정을 거꾸로 더듬어가는 역사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전쟁 당사국 사이의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으로 시작될 것이지만,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하다.
6.25전쟁은 연합국의 대일전쟁 승리가 한반도의 분할점령과 분단정권 수립으로 귀착된 데 원인이 있다. 일본의 패배가 확실시되면서 치열해진 연합국 진영 내 줄다리기가 이어진데다, 거기에 대륙을 석권한 혁명 중국과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헤게모니 싸움이 얽혔다.
그 사이에 일본은 패전의 후유증을 최소화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치열한 대 연합국 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한반도 분할점령, 분단 정권 수립,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한반도 주변국의 이기주의가 곳곳에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이 과정을 역순으로 전개하여 전쟁종식, 평화공존, 통일로 이르게 하려면, 남북의 화해·협력뿐만 아니라 주변국의 이기주의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관건이다.
남북정상회담 이후 치열해진 주변국들의 외교전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에서 시작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우리들의 기대가 모아지는 동안, 주변국들의 치열한 외교전이 시작되고 있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 이후 중국의 개입이 두드러졌다. 김정은 위원장이 중국에서 시진핑(習近平) 주석과 두 번째 만남을 가진 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에 대한 불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통전부장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직전 라브로프 러시아 외상은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만나고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엔 시진핑 주석과의 협력관계에 언급하면서 러시아의 움직임을 견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 러시아를 번갈아 압박하는 구도 속에서 미·북 정상회담을 나흘 앞두고 푸틴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하여 시진핑 주석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과시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뒤처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일본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1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기 열흘 전에 워싱턴을 방문해서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하더니, 북·미 정상회담을 닷새 앞두고 다시 워싱턴을 방문해서 트럼프의 의중을 파악하는 한편 북한과 직접 대화의 운을 띄웠다.
그뿐만이 아니라 일본은 트럼프 리스크에 대비하여 러시아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과 관계가 껄끄러운 러시아도 일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우샤코프 러시아 대통령 외교담당 보좌관은 일본이 반환을 요구하는 영토 문제에서 일본의 양보를 요구하면서도 러·일 평화조약 체결 가능성을 언급하며 일본에 추파를 던졌다.
아베 총리는 영토 문제에서 기대만큼의 진전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푸틴 대통령과의 만남에서 지속적인 경제협력 실시를 약속했다. 한편 푸틴 대통령은 올해 9월에 개최될 동방경제포럼에 김정은 위원장을 초청할 뜻을 밝히기도 했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이를 수락한다면 여기에서 푸틴-김정은 정상회담과 동시에 아베-김정은 정상회담이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상기시키는 동아시아 국제정치의 현실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에서 전쟁 종식의 프로세스가 가시화하면서 다양한 조합의 양자 간 정상회담이 줄을 이어 열리고 있고, 또 열릴 예정이다.
양자 간 접촉이 이토록 활발한 이유는, 한반도 정전체제의 종식이, 우리에겐 평화와 통일로 가는 희망의 출발점이지만 주변국들에게는 세력균형의 현상을 변경하여 기존 질서를 동요시키는 불안의 진원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 외교의 진정한 도전은 북·미 정상회담 이후부터 시작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따라서는 남·북·미 3자 간의 종전선언이 이어지면서 한반도에 환희의 시대가 열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수록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우선 중국의 개입이 본격화할 것이다. 일본도 북·미 정상회담에 온 신경을 쓰며, 회담이 끝나자마자 북한으로 달려갈 준비를 하며 자세를 취하고 있다. 북한과 신뢰관계를 다져 온 러시아는 자신감을 갖고 북·미 정상회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이렇게 한반도 주변 세 나라를 거론하고 보니, 그 형상이 꼭 19세기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반도가 비극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으로 동아시아 책봉질서가 붕괴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것은 러일전쟁의 전후처리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결과였다.
근대화와 식민지 유제 청산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대립이 6.25전쟁으로 귀결했다는 의미에서 6.25전쟁의 한 뿌리는 청일전쟁에, 다른 한 뿌리는 러일전쟁에 닿아 있다. 그래서 6.25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것은 세 차례의 동북아시아 전쟁을 총괄해서 극복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경위와 구조를 이해할 때, 북·미 정상회담 이후의 우리 외교가 도전해야 할 역사적 과제를 분명히 인식할 수 있다.
한반도 지정학에서 동아시아 지경학으로
그렇다고 해서 지금 여기에서 19세기 말의 지정학이 부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러 간, 러·일 간은 물론 중·일 간에도 협력을 통한 평화 증진 가능성이 큰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도 한반도에서 발원한 평화 프로세스가 동아시아에 지정학의 시대를 대신해 지경학의 시대를 열고 있다는 점이 19세기 말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이제는 번영에의 기대가 평화를 견인할 수 있는 시대다. 세계전쟁의 세기였던 20세기의 학문 국제정치학은 지난 세기를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러 21세기를 평화의 세기로 만들기 위한 방안으로 다자주의 협력과 공동체 구축을 고안해냈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시아의 분단선 위에서 평화를 연결하고, 번영을 연결하고, 사람을 연결하여 평화의 공동체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문재인 정부의 외교 구상은 세계적, 세기적 의의를 지닌다.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은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이러한 구상을 실천하기 위한 기반정비에 해당한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그간의 노력은 북·미 정상회담에서 소기의 성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성과를 미·중 대립의 블랙홀에 갖다 바치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한반도의 남북을 연결하는 노력에 더해 한반도의 밖에서 남북으로 뻗어 있는 러시아와 일본을 잇고, 나아가 아세안까지 도달하여 '종축 아시아 평화지대'를 창출하는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과거 러시아와 일본은 남북화해를 위한 김대중 대통령의 이니셔티브에 부응하여 한반도 냉전 해체에 호응한 적이 있다. 당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000년 6월의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7월에 러시아 원수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공식 방문하여, 북한의 '개건(페레스트로이카의 북한식 용어)'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때도 지금도 푸틴에게 북한의 개혁개방은 러시아 극동개발의 마중물로 존재한다.
그로부터 2년 뒤 2002년 9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부시 대통령이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고 대북 압박을 강화하는 가운데도 방북을 결단하여 북·일 평양선언을 통해 국교정상화 의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비록 두 지도자의 행동이 깊은 역사의식이나 소명감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냉정한 국익계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은 러시아와 일본의 국익 계산이 한반도 냉전 해체의 방향에서 조화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나 미·중 사이의 대립이 깊어진 현실은 그 가능성을 더 키워주고 있다.
그래서 한반도의 위와 아래에서 러시아와 일본을 견인해 내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관여하게 하는 것은 위험한 상상이 아니라 현실의 계산에 입각해 있다.
평화의 시대는 역사의 필연이다
다시 6월 이야기다. 이번엔 20세기 초의 6월이다. 1903년 6월, 일본은 어전회의를 열고 만한(滿韓)교환론을 대러 교섭방침으로 확정했다. 일본이 만주에서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는 대신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위를 확인한다는 것이었다. 이때 지펴진 러·일 갈등의 불씨는 결국 러일전쟁으로 발화했다. 이로부터 시작된 동아시아의 20세기는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 대분할의 시대였다. 동서 냉전의 시대에 한반도의 안과 밖에서 극한 대립을 지속해 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반도에서 일어난 6월의 비극을 극복하는 길은 동아시아의 남과 북을 이어 '종축 아시아 평화지대'를 창출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전쟁의 기억과 평화의 이정표가 뒤섞인 6월에 전쟁의 시대를 매듭짓고 평화의 시대를 여는 역사의 필연을 본다.
'발목 잡는 과거'를 알면, 이 악수가 얼마나 놀라운지 알게 된다
김정은 "발목 잡는 과거" 언급...시리도록 아픈 '북미'의 기억
2018.06.12 12:08:48
12일 오전 9시(현지 시간), 싱가포르 센토사 섬 카펠라 호텔 회담장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세기의 악수'를 나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이 자리에서 "우리 발목을 잡는 과거가 있고, 그릇된 관행들이 때로는 우리 눈과 발을 묶었"지만 "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여기 왔다"고 강조했다.
이에 트럼프 대통령은 "옳은 말씀"이라며 고개를 끄덕이고 "의심 없이 (북미가) 좋은 관계를 맺을 것"이라고 화답했다. (☞관련기사 : "우린 모든 것을 이겨내고 이 자리까지 왔다")
북미 간 '발목을 잡는 과거'는 간단치 않다. 북미 관계가 여기까지 오기는 김 위원장의 말 그대로 쉽지 않았다. '북미관계'는 일반에게, 특히 미국인에게는 잊힌 과거였다. '발목을 잡는 과거'는 70년 전, 김정은 위원장의 조부인 김일성 주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 세기의 악수 ⓒ AP=연합
미국에게 김일성은 '스탈린의 부대'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적이었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인식은 거기에서 출발했다. 조선인민군 창군식에서 스탈린의 초상화가 비로소 내려가기 전, 김일성은 만주에서 활동하다 일제의 토벌을 피해 소련 땅으로 넘어갔다. 그때 태어난 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다. 스탈린은 김일성을 믿지 못했지만 미국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은 북미 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한국전쟁은 이후 한반도 핵 위기로까지 이어지며 70년 가까이 이어진 두 나라 갈등의 핵심 원인이 되었다. (☞관련기사 : "한국전쟁, 1949년 38선 충돌 통해 형성됐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신무기 '네이팜탄'을 북한에 쏟아부어 전 지역을 불태웠고, 김일성을 위시한 북한 지도부는 지하 벙커에서 공포에 떨어야 했다. 미국은 핵무기 사용 직전까지 갔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목격한 바 있던 김일성과 북한군은 이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북한이 1만 5000개 이상의 '지하 시설'을 갖춘 병영 국가가 된 이유다. 이 트라우마는 북한이 미국에 갖고 있는 가장 강렬한 것이다.
미국은 북한을 '인간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미개인'으로 여겼다. 이같은 인식은 전쟁 후에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1968년, 미 해군 소속 정찰함 푸에블로 호가 북한 원산 앞 해상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나포된 푸에블로호 사건은 미국에게 트라우마다. 82명의 미 해군 인원이 11개월이나 붙잡혀 있다가 풀려났는데, 이 사건으로 미국은 체면을 심각하게 구겼다. 미군 함정이 적국에 나포된 사건은 극히 드문 일이고, 당시 이 사건의 키는 북한이 쥐고 있었다. 결국 미국은 굴욕적인 사과를 해야 했지만, 여전히 푸에블로호는 대동강에 '전시'돼 있는 북한의 '승전물'이다. 이후 1976년 판문점 도끼 사건 등 북미 관계는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존재해 왔다.
이후 미국과 북한은 상호 적대정책을 핵심 국시로 삼았다. 북한은 반미를 국가 이념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첫손에 꼽을 북한 전문가인 박한식 전 조지아대 교수는 최근 저서 <선을 넘어 생각한다>(부키 펴냄)에서 북한을 반미, 반일을 국시로 삼는 민족주의 체제로 정리했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였다. 냉전 체제가 끝난 이후에도 북한을 비롯한 대외의 적을 새로이 규정, 이를 군산복합체제의 원동력으로 만들어 국가를 운영했다. (☞관련기사 : 영구 전쟁국가의 탄생)
1980년대 냉전이 해체되면서, 북한은 서서히 잊혀 갔다. 1990년대 북한 핵 위기가 터지기 전까지 북한의 핵개발 시도든, 대미 적대 행위든 일련의 위기들은 다른 세계사적 사건에 묻혀갔다.
1차 북핵 위기로 꼽히는 1993년, 북미는 이른 정상 회담을 통해 위기를 해소하고 두 나라 관계를 복원할 계기를 마련했다.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북한이 핵을 사용하려 한다면, 이는 북한의 최후가 될 것"이라며 강력한 경고를 할 정도로 위기 상황이 커졌다. 그러나 두 나라는 위기를 해소하기 위해 물밑 협상을 추진했다. 당초 남북정상회담까지 고려되었으나, 남한 김영삼 정부의 반발과 김일성 주석의 사망, 미국 내 반 클린턴 진영의 반발이 겹쳐 이른 해결을 맞지 못했다. 위기는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로 겨우 해소됐다. 2000년 클린턴 행정부는 북미정상회담을 추진하기도 했다.
제네바 합의는 그러나 비극적 결말을 맞게 된다. 2001년 '아들 부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네오콘이 득세했다. 2001년 9.11테러를 겪은 부시 행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언했다. 2001년 10월 부시는 김정일을 '피그미'로 부르고, "나는 김정일을 증오한다"고 했다. 2002년 1월 19일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정한다. 한국 전쟁 당시 '오리엔탈리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이성적 사고보다 도덕적이고 추상적인 판단을 우선시한 '신념 집단'인 네오콘 그룹은 북한을 악마화했다. 당시 제네바 합의 파기를 주도한 게 지금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만나고 있는 존 볼턴이다.
2005년 2월, 기어이 북한은 핵보유를 공식 선언했다. 이에 반발하며 미국은 같은 해 9월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의 북한 정부 예금 2500만 달러를 동결 조치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꾸준히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2016년 4차 핵실험까지 벼랑 끝 전술을 이어가며 핵 보유에 성공했다. 갈등은 10년 내내 이어졌다. 그나마 한반도 위기 해소를 위해 노력하던 한국에서도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다. 이후 남북관계도, 6자회담도 모두 흐지부지됐다.
미국과 북한은 서로 적대했고, 그들이 진행한 협상들은 모두 사실상 무용지물이 돼 왔다.
한국에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다시금 기회가 왔다. 미국에서도 전통적 대외 정책 기조와는 거리가 먼 자세를 가진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섰다. 한국 정부는 북미 간 중재자를 자임하며 두 나라 간 고리를 다시 연결키로 했다. 북한이 이에 화답했으나, 일각에서는 북한 내 군부의 반발도 있었으리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 역시 '발목을 잡는 과거'와 '그릇된 관행'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미국 내 강경파의 반발도 마찬가지다. 불신이 서로의 눈을 가렸기에, 불신의 관성이 작용했다는 지적으로 풀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발목을 잡는 과거'는 결국 해묵은 대립의 역사다. 이를 이번 정상회담에서 극복할 수 있을까? 세계의 눈이 두 정상으로 향한 이유다.

▲ 12일 북미 두 정상이 역사적인 악수를 나눴다. ⓒAP=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