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에블로호와 치욕적 북미협상]
대동강의 푸에블로, 북미관계 70년의 키워드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두 나라가 거의 70년 동안 지속해온 적대 관계를 끝내거나 수교를 이루면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돌려주리라 예상한다. 북한의 핵무기 폐기보다 푸에블로호 반환이 미국인들에겐 훨씬 더 크고 값진 선물이다. 반세기 전에 무려 11개월 동안 진행되었던 북미협상을 공부해보면 앞으로 전개될 북미회담을 이해하고 예상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기대한다.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23일 오후 2시경 강원도 원산 앞바다에서 미국 해군정보함 푸에블로호 (USS Pueblo)가 북한 경비정에 붙잡혀 원산항으로 끌려갔다. 중령 계급의 함장을 포함한 장교 6명, 병사 75명, 민간인 2명 등 83명이 배에 타 있었다.
미국은 북한 해안에서 16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서 항해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북한은 미제 간첩선이 영해에 불법적으로 침투했다고 맞섰다. 공해에서든 영해에서든 세계 최강을 자랑해온 미국 군함이 외국 군대에 나포된 일은 그때까지 100년이 넘는 해군 역사상 처음이었다. 50년이 더 흐른 지금까지도 마찬가지다.
이틀 전인 1월 21일엔 30여 명의 북한 무장침투대원들이 '박정희의 목을 따기 위해' 청와대 근처까지 접근해 남한 군경과 교전을 벌인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김신조 사건' 또는 '1.21사태'다.
미국 정부는 즉각 국가안보위원회를 소집해 공군에 비상 출격 대기령을 내렸다. 전쟁 중이던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 (USS Enterprise)와 두 척의 구축함을 원산 앞바다 근처로 보냈다. 핵폭탄을 실을 수 있는 B-52 전략폭격기와 F-105 전투폭격기 수십 대를 미국과 주일미군 기지에서 오산과 군산 등의 주한미군 기지로 옮겼다.
1월 24일 판문점에서 북한과 미국의 회담 대표가 마주 앉았다. 먼저 미국 대표가 북한의 남침 이래 '가장 가증스러운 범죄'를 자행하려다 실패한 박정희 대통령 살해 기도에 대해 항의했다. 나아가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서도 항의하며 북한에 다음과 같이 세 가지를 요구했다.
첫째, 푸에블로 선박과 승무원을 모두 즉각 석방하고 돌려보내라. 둘째, 불법적 나포 행위에 대해 미국에 사과하라. 셋째, 미국 정부가 국제법에 따라 손해배상을 청구하면 받아들여라.
북한 대표는 조금도 기죽기는커녕 몹시 거칠게 응했다. 대화가 아니라 독설 섞인 호통이었다.
"우리 속담에 미친개가 달을 보고 막 짖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 같은 격언은 지금 제멋대로 떠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것 같소. 당신이 나이나 명예를 저버리고 그저 먹고살기 위해 이 회의석상에서 전쟁광신자 존슨 (Johnson) 대통령 미친놈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깡패 같은 노릇을 해야 하는 당신이 참으로 불쌍할 따름이오.
월남에 끌려가서 개죽음을 당하는 미국 청년들이 '존슨 죽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지 않소? 오늘날 전 세계에서 반미 데모를 하면서 '존슨, 교수대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라고 외치면서 성조기를 불태우고 있소. 스미스 (Smith) 당신도 그 같은 거사를 남조선에서 직접 보고 있으니까 이 회의에서 겁에 질려서 떠들고 있는 것이오. (중략) 보복과 징벌이 무섭거든 모든 살인 무기를 걷어 가지고 당장 이 땅을 떠나시오."
북한은 또한 미국이 먼저 사과하고, 앞으로 더 이상 영해 침범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야만 승무원들을 돌려보낼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추후 협상 과정에서는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미국 정부 방침에 따라 '북한 (North Korea)'이라고 쓰는 미국 대표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정식 국호를 쓰도록 '심각한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지 꼭 11개월이 흐른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결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에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는 북한 영해에 침입하지 않겠다고 '확고히 담보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판문점에서 승무원 82명과 시신 1구를 돌려받았다.
미국은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군 함정이 외국 군대에 나포되는 치욕을 겪은 데 이어, 역시 '역사상 최초로' 사과문에 서명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비밀전자 장치를 갖춘 함정을 끝내 되돌려 받지 못해 군사암호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하는 심각하고 막대한 손실도 입었다. 모두 '3등국도 못되는 북한'에게 당한 일이다.
북한은 약 30년이 흐른 1999년 푸에블로호를 원산 앞바다에서 평양 대동강변으로 옮겼다. 1866년의 '미제 침략선 미국의 셔먼호 격침 기념비' 옆이다. '대미 항전 승리'의 전리품으로 전시하기 위해서다. 2013년엔 대동강 지류인 보통강변의 전승기념관 '노획무기 전시장'으로 다시 옮겼다.
201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50주년을 맞아 <로동신문>은 "항복서를 밟으며 지나온 노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미제가 우리 군대와 인민 앞에 바친 항복서에서 피 절은 교훈을 깨닫지 못하고 끝끝내 침략전쟁의 길을 택한다면 원수들의 모든 본거지가 멸망의 최후 무덤으로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다음날엔 "미국은 세계 면전에서 위대한 주체 조선에 항복의 사죄문을 섬겨 바쳤다"며 "조미 대결전에서 승리는 언제나 우리의 것, 패배는 항상 미국의 것"이라고 주장했다. 6월 12일부터 미국과 벌일 '세기의 담판'에서도 북한이 승리할 수 있을까?
푸에블로호 나포와 북미 간의 협상에 관한 미국 정부 자료는 국무부가 2000년 출판한 외교문서집 'Foreign Relations of the United States, 1964-1968, Volume XXIX, Korea'에서 찾을 수 있다. 존슨 (Lyndon Johnson) 행정부의 외교문서집 한국편에 "푸에블로 위기 (Pueblo Crisis)"라는 제목으로 권말부록처럼 실려 있지만 거의 3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2001년 서울에서 출판된 이문항의 ‘jsa-판문점 (1953-1994)’도 판문점에서 진행된 모든 협상에 관한 미국 정부 자료와 다름없다. 미국 국방부 국가안전보장국 북한담당분석관, 주한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전사 편찬관 겸 분석관, 주한유엔군사령관 특별고문 등을 지내며 북한과의 판문점 협상에 직접 참여했던 한국계 미국인의 기록이다.
40년 전, 핵 없던 북한이 미국에게 했던 일은
1968년 1월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될 무렵 미국에겐 온갖 악재가 겹쳐 터지고 위기가 잇따르고 있었다. 이틀 전인 1월 21일엔 앞에 소개한 북한 무장침투조의 '청와대 습격' 뿐만 아니라, 북베트남 군대의 '케산 (Khe Sanh) 공습'이 시작됐다. 덴마크령 그린란드 (Greenland)의 미국 공군기지에서는 4개의 수소폭탄을 실은 B-52 폭격기가 추락하는 사고도 터졌다.
이와 관련해 미국은 1965년 3월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본격적인 침공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전쟁의 수렁으로 빠져들자 수소폭탄까지 터뜨리려했는지 의심이 생긴다.
미국 정부는 몹시 긴박해졌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위원회를 하루에도 두세 번씩 소집했다. 외교적으로는 유엔과 우방국들을 통해 북한에 압력을 가하는 한편, 군사적으로는 북한을 폭격하거나 봉쇄하든지 또는 공해상에서 북한 선박을 나포하거나 격침시킬 수 있는 가능성 등을 논의했다. 북한이 미국 함정을 나포했으니 남한으로 하여금 소련 함정을 나포하도록 하는 게 '가장 균형 잡힌' 방안이라는 발상이 나오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중앙정보국이 푸에블로호 나포의 배경과 의도를 분석한 대목은 주목할 만하다. 1월 23일 나포 사건 이후 처음 소집된 국가안보회의에서부터 헬름스 (Richard Helms) 중앙정보국장은 나포 사건이 청와대 기습과 함께 비무장지대에서 연이어 점증하는 북한의 도발 가운데 하나라면서 베트남전쟁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1966년 가을부터 북한이 남한과 미국에 더 강경하고 더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해왔다. 북한은 비무장지대에서 의도적으로 긴장을 고조시켜왔다. 남한에 침투대원들을 보냈다. 남한 어선과 경비정 등에 대해 더욱 공격적으로 사격해왔다. 이 정책은 미국과 남한의 베트남전쟁에 대한 북한 지도부의 반대 시위인 것 같다.(중략)
북한의 푸에블로호 나포엔 두 가지 동기가 있는 것 같다. 첫째,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방해하는 것이다. 둘째, 미국의 베트남전쟁 수행에 골탕 먹이는 것이다."
그랬다. 1960년대 후반부터 급증된 북한의 도발은 베트남전쟁을 겨냥한 것이었다. 1966년 10월의 조선로동당 대회에서 김일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은 추종국이나 괴뢰 군대까지 투입해서 베트남을 침략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의 침략을 반대하는 사회주의 국가들은 그저 정치적 지지나 보낼 뿐 군대를 보내서 미국과 맞서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조선로동당과 조선 인민들은 베트남 인민들의 투쟁을 자기 자신들의 투쟁으로 간주하며,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노력을 다하겠으며, 베트남 정부가 요청하면 우리는 지원군을 보내서 참전할 것이다. 미국은 그 어느 추종국보다 먼저 남한 군대를 수만 명이나 월남에 파병해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1966년 10월부터 비무장지대 주위에서 북한의 무장 침투 및 공격이 급증했다. 앞에서 소개한 이문항 당시 주한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전사 편찬관 겸 분석관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조선로동당) 대회가 끝난 1주일 후인 1966년 10월 15일부터 시작된 북한의 DMZ 안에서의 무장침투와 무장공격은 급격히 증가해서(중략) 1967년에는 북한의 침투사건 수가 114건으로 급증했는데 그 중 69건은 무장공격이었다.(중략)
중요한 사건들을 추려보면 1967년 5월 2일 DMZ 바로 밖에 있는 미 2사단 막사를 폭파시킨 사건, 1967년 8월 28일 군정위 유엔사 전방기지 구역 안에서 작업하던 미 76공병단 막사 공격 등이다. 한편 해상에서는 1967년 1월 19일 동해에서 한국 해군 PCE-56함이 북한측 해안포의 사격을 받고 침몰했다.(중략) 1968년 한 해는 한국 휴전기간 중 가장 격렬한 해였으며, DMZ 안팎에서 181건의 심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그가 집계한 '북한 무장침투와 공격사건' 숫자를 보면, 1950년대엔 1년 평균 2건이었다. 1960-66년엔 1년 평균 22건으로 늘었다. 그러다 1967년엔 195건으로 급증하고, 1968년엔 573건으로 엄청나게 폭증했다.
김일성이 공언한대로, 그리고 미국 중앙정보국장이 분석한 것처럼, 북한은 미국과 남한의 베트남전쟁을 방해하기 위해 온갖 '도발'을 일삼으며 청와대를 습격하려 하고 푸에블로호를 나포했던 것이다. 주한미군을 한반도에 묶어놓고 남한의 추가 파병을 막기 위해서였다. 미국이 1965년 베트남을 본격적으로 침공하면서 남한도 그해부터 청룡부대와 맹호부대 등 전투병력을 보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트남 인민들을 돕기 위한 북한의 의도와 전략은 성공했다. 첫째,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USS Enterprise)호와 두 척의 구축함이 원산 앞바다로 방향을 바꾸었다. 둘째, 남한은 1967년 7월까지 5차에 걸쳐 약 5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보낸 데 이어, 1968년 3월까지 1개 사단병력을 추가로 보내기로 미국과 합의했지만, 북한의 청와대 습격과 푸에블로호 나포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었다.
이렇듯 북한은 우방 베트남을 돕기 위해 전쟁을 각오하면서까지 미국에 맞섰다. 물론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져들어 북한과 새로운 전쟁을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푸에블로호와 80여 명의 미국 해군 장병을 인질로 붙잡고 있던 터라 미국이 폭격하거나 침공하지 못하리라 예상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무렵 북한엔 핵무기가 하나도 없었지만, 남한 땅엔 수백 개의 미국 핵무기가 배치되어 있었고, 한반도 주변 해역엔 미국의 핵 항공모함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50년이 흐른 뒤 북한이 수소폭탄과 대륙간탄도미사일 (ICBM)까지 개발한 상황에서 미국과 어떻게 협상하게 될지 짐작해보기 바란다.
북한에 사과하지 않으려 했던 미국, 결국엔
196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가 나포되자 미국 국무부는 그날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 전보를 보냈다. 그로미코 (Andrei Gromyko) 소련 외상을 만나 미국 배와 승무원들이 빨리 풀려날 수 있도록 북한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하라는 내용이었다. 당시 모스크바를 방문 중이던 윌슨 (Harold Wilson) 영국 수상에게도 연락했다. 코시긴 (Alexi Kosygin) 소련 수상에게 선처를 부탁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로미코는 소련이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대꾸했다.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들 때문에 한반도에서 긴장이 생기고 있으니 미국이 북한과 직접 대화하라고 충고했다. 미국은 푸에블로호가 공해상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소련은 미국 배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다는 북한 주장을 편들었다.
러스크(Dean Rusk) 국무부 장관이 그로미코 외상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존슨 (Lyndon Johnson) 대통령이 코시긴 수상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특히 존슨은 "일본해 공해상에서 빚어진 북한 당국의 푸에블로호 나포라는 비이성적 행위"에 소련의 책임이 없다는 주장에 실망스럽다고 했다. 소련도 한반도 주변 공해상에서 푸에블로호와 비슷한 정보함을 운항하고 있지 않느냐며 북한이 배와 승무원을 즉각 풀어주도록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
코시긴의 답장은 싸늘했다. "푸에블로호가 북한 영해를 침범했기에 억류된 것 아닌가. 그런 터에 미국이 핵 항공모함과 구축함 등을 북한 쪽으로 보내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북한의 주권과 독립성을 인정해라. 북한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문제를 복잡하게 할 뿐이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은 사토 (佐藤榮作) 일본 수상에게도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무렵 일본이 북한과 상당한 교역을 하고 있던 터였지만 허사였다. 유엔 사무총장에게도 중재를 부탁했지만, 북한은 유엔이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나중엔 푸에블로호 사건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회부하기도 했지만, 소련의 반대로 결의안조차 채택하지 못했다. 국제 적십자사를 통해보는 것도 허사였다.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려다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는 꼴이라 포기하고 말았다.

▲ 평양에 전시돼있는 푸에블로호 ⓒ위키피디아
4. 북한의 호통
미국은 북한을 겨냥해 핵 항공모함과 구축함들을 동해에 배치한 데 이어 전투기를 거의 200대까지 한반도에 더 보냈다. 그와 동시에 남한 군부에겐 1.21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북한에 대해 어떠한 적대 행위도 하지 말라고 했다.
박정희 정부는 분통을 터뜨렸다. 국가 원수가 죽을 뻔한 청와대 기습 사건에 대해서는 미국이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다가 미국 정보함을 나포한 사건에 대해서는 다양한 대응을 즉각 준비하는 게 불만스러웠다.
대통령을 살해하려고 한 데 대해 북한과의 전쟁도 불사하며 보복하고 싶던 터에 미국도 당했으니 미국이 화끈하게 폭격해주기를 기대했는데, 협상을 통해 사건을 처리하려는 것도 못마땅했다.
게다가 미국은 판문점에서 남한을 빼고 북한과 1대1 비밀 협상을 벌이고자 했으니, 특히 박정희는 분노를 억누르기 힘들었다. 이에 미국은 한미방위조약에 따라 남한의 안보를 강화하고 군사 원조를 늘리겠다는 약속으로 남한 정부를 달랬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과 북한이 1968년 2월부터 판문점에서 본격적으로 비공개 협상을 갖기 시작했다. 미국은 그 배가 북녘 해안에서 약 16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 있었고, 대낮이었기 때문에 실수를 저지를 가능성은 1%도 되지 않는다며, 즉시 승무원들과 군함을 되돌려달라고 항의도 하고 위협도 했다.
북한은 그 첩보선이 원산항 앞의 여도로부터 약 8마일 떨어진 '영해'에 불법으로 침입하여 북한군의 동태를 염탐했다며, 미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주장했다.
이에 앞서 북한은 푸에블로호 나포 이틀 만에 함장이 북한 영해를 침범해 정탐을 했다는 사실을 자백했다며, 그가 자백서에 서명하는 사진과 함께 이 사실을 발표했다. 미국은 그게 고문이나 약물에 의한 자백일 것이라며 승무원들이 돌아온 뒤 객관적인 조사를 실시해 미국의 잘못이 인정되면 '유감의 뜻'을 표명하겠다고 제안했다. 북한은 미국이 먼저 '사과'하면서 앞으로 영해 침범을 하지 않겠다고 '담보'해야만 승무원들을 돌려보낼 수 있다고 못 박았다.
2월 중순 협상 중에 미국 대표가 북한이 청와대 기습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나포 같은 "침략적 도발 행위"를 중단하라고 큰소리로 요구하자, 북한 대표는 책상을 치며 다음과 같이 호통쳤다.
"당신은 지금 조선 사람인 우리가 조선에서 침략 행위를 한다고 떠벌리고 있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지금 어디에 와서 누구와 마주앉아 있는 지나 알고 함부로 입을 놀려대고 있는 것입니까?
이곳은 미국이 아니고 조선의 판문점입니다. 당신들은 우리가 초청해 온 손님도 아니며 우리나라에 찾아온 관광객도 아닙니다. 당신들은 우리나라에 불법적으로 기어든 침략자입니다. 당신들은 20년이나 우리나라 절반 땅을 강점하고 조선의 통일을 가로막으면서 민족 분열을 강요하고 있는 조선 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수입니다.
(중략) 이제는 미국의 전문적인 무장 간첩선 푸에블로호까지 끌어들여 우리나라 영해를 침범하고 노골적으로 우리 공화국을 도발하고 나섰습니다. (중략)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제 침략자들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을 계기로 광란적 전쟁 소동을 벌이면서 남조선과 공화국 북반부 동해안 일대에 수많은 침략 무력을 집결시켜놓고 공화국을 침공하겠다고 떠들고 있소.
오늘날 영웅적 조선인민군과 무장한 전체 조선 인민은 당신 등 미제국주의자들의 어떠한 도발이나 침공에도 대처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바라지 않지만 결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신들 침략자들의 도발은 징벌로, 보복은 보복으로, 전면 전쟁은 전면 전쟁으로 대답할 것입니다."
며칠 후엔 박성철 부수상이 평양에서 다음과 같이 거친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만약 미 제국주의자들과 박정희 도당 (clique)이 감히 어떤 보복 행위를 시도한다면 그건 즉각 전쟁 시작을 의미한다.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 (stooges)이 현실을 직시하고 분별 있게 행동해야 한다.
조선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지 여부는 전적으로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앞잡이들의 태도에 달려있다. 미 제국주의자들이 위협과 공갈 그리고 전쟁을 더 외칠수록 현 상황은 더 복잡해질 것이다. 이로부터 얻는 게 있다면 그건 오로지 시체와 죽음뿐일 것이다."
5. 미국의 꼼수와 굴욕
미국은 북한과 판문점에서 거의 1년이나 지루하게 실랑이를 벌이다 속임수 한 가지를 생각해냈다. 북한이 만들어준 사과문에 대각선으로 승무원들을 돌려받는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바로 그 밑에 서명하겠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주장하는 영해 침범과 불법 정탐 행위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승무원을 인수한다는 자체만 인정하겠다는 술수였다.
처음에는 미국의 의도를 몰라 그냥 넘어갈 듯하다 미국의 속셈을 뒤늦게 알아차린 북한 대표는 노발대발하며 사과문에 진정으로 서명할 용의가 있을 때 회의장에 나오라고 소리쳤다.
미국은 다시 꾀를 짜냈다. 사과문 끝에 승무원들을 인수한다는 문장을 집어넣고 서명하되, 서명하기 직전에 그 사과문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4년 전에 써먹었던 수법과 비슷하다. 1964년 미군 헬기가 비무장지대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영공에 들어갔다가 격추되었는데, 미국은 북한에 대해 정탐하고 북한 영공에 불법으로 침입한 범죄를 인정하며 앞으로는 그런 범죄 행위를 저지르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는 문서에 서명한 뒤 다음날 이를 공개적으로 부인했던 적이 있다.
북한은 미국이 사과문에 공식적으로 서명한다면 말로 부인한다는 게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느냐싶어 이 옹색한 제안을 받아들인 것 같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푸에블로호가 나포된 지 정확하게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다음과 같은 사과문에 서명하고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돌려받을 수 있었다.
서명 직전 미국 대표는 "이 문건에 서명하는 유일한 이유는 인도적 견지에서 승무원들을 돌려받기 위해서이지, 북한이 일방적으로 작성한 사과문 내용에 서명하는 것은 아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앞:
(중략) 미국 함선 푸에블로호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여러 차례 불법 침입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중요한 군사적 및 국가적 기밀을 탐지하는 정탐 행위를 이 함정의 승무원들의 자백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제시한 해당한 증거 문건들의 타당성을 인정하면서, 이 미국 함선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여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반대하는 엄중한 정탐 행위를 한 데 대해서 전적인 책임을 지고, 이에 엄숙히 사죄하며 앞으로 다시는 어떠한 미국 함선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령해에 침입하지 않도록 할 것을 확고히 담보하는 바입니다. (중략) 본 문건에 서명하는 동시에 하기인은 푸에블로호의 이전 승무원 82명과 시체 1구를 인수함을 인정합니다.
미합중국 정부를 대표하여 미 육군 소장 길버트 우드워드 1968년 12월 23일."
비록 미국이 진심으로 사과한 게 아니라는 성명을 발표하긴 했지만,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과문에 서명했다는 자체가 미국으로서는 끔찍한 치욕이었다. 게다가 함정과 거기에 설치된 비밀전자 장치는 끝내 되돌려받지 못했으니 그 때문에 암호 체계를 완전히 바꿔야 하는 엄청난 손실도 당했다.
미국은 그 때까지 어느 나라에든지 해안에서부터 3마일까지를 국제법상 영해로 인정하고 있었고, 설사 어느 선박이 다른 나라 영해를 침범하더라도 해당 국가는 그 선박에게 영해를 떠나도록 요구하는 게 국제법상 유일한 권리라고 주장해왔는데, 미국이 받들어온 국제법이 무너지게 되었으니 위신이 말이 아니었다.
또한 1960년대 미국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대외정책을 세웠지만, 북한을 동등한 협상 상대로 대하지 않을 수 없었던 데다, 협상 과정에서 북한 대표로부터 '북한 (North Korea)'이라는 호칭 대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이라는 공식 호칭을 쓰도록 '심각한 경고'를 받고 이를 쓰지 않을 수 없었으니 북한을 제대로 인정한 셈이었다.
북한, 이제 미국에 푸에블로호 넘겨 줘라
6. 푸에블로호 사건 이후에도 이어진 미국의 굴욕
앞에서 얘기했듯, 시체 1구를 포함한 푸에블로호 승무원 83명은 북한에 나포된 지 꼭 11개월 만인 1968년 12월 23일 풀려났다. 그들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해군은 청문회를 열어 2~3개월 동안 조사하고 함장과 정보수집 책임장교 그리고 항해사 등을 군법회의에 넘길 것을 요구했다. 다음과 같은 죄목이었다.
"푸에블로호를 보호하고 방어하는데 실패했다. 북한군의 명령에 따라 원산항으로 운항했다. 승무원들에게 비밀서류를 파기하는 방법을 적절하게 훈련시키지 못했다. 북한군에 붙잡혔을 때 비밀서류를 파기하지 못했다. 비밀서류가 적의 수중에 들어가도록 허용했다."
그러나 해군장관은 그들이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동안 이미 충분한 고통을 겪었다며 처벌하지 않았다.
미국의 불행과 치욕은 1969년에도 이어졌다. 4월 15일 미국해군 정찰기 한 대가 동해 쪽 북한 영공에서 북한 전투기에 격추당해 승무원 31명 모두 바다에 추락해 사망한 것이다.
닉슨 (Richard Nixon) 행정부는 그 정찰기가 북한 연안에서 40마일이나 떨어진 공해상에서 비행하고 있었다며 즉시 국가안보회의를 열어 북한에 대한 징벌 폭격을 검토했다. 핵 항공모함을 두 척이나 북한 근해로 급파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때보다 더 많은 구축함과 폭격기들을 남한에 보냈다. 북한에 핵무기로 보복하겠다거나 정찰기를 격추한 전투기가 소속된 공군기지를 초토화하겠다면서 위협했다.
그러나 말뿐이었다. 어떠한 군사 보복도 하지 못했다. 북한에 대한 정찰 비행을 계속하겠다는 다짐만 내놓을 수 있었다. 닉슨 대통령에겐 너무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그는 1968년 11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푸에블로호 사건이 존슨 행정부의 "전략적 대실수"라고 비난하며, "미국이 3등국도 못되는 북한에게 어찌 그런 창피를 당할 수 있느냐"고 비웃던 터였다.
미군 정보함이 북한에 나포되고 정찰기가 격추되자, 미국 의회는 한 가지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군대의 배든 비행기든 사람을 태우면 외국 군대에 의해 공격을 받거나 붙잡히지 않도록 적절한 보호 조치를 하지 않고는 정보 수집을 위해 위험한 지역에 보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군부는 정보수집 프로그램에 관한 종합 검토를 실시하고 그 배와 같은 유형의 첩보함을 이용한 모든 정보공작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1969년 말까지 그러한 종류의 첩보함들은 활동이 중지되고 첩보함들에 의한 정보수집 프로그램은 완전히 끝났다. 푸에블로호 나포에 따른 타격과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이 입은 가장 심각한 손실은 막대한 첩보가 유출되고 암호 체계가 북한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었다. 중앙정보국과 국방정보국 그리고 육해공군 정보담당 대표들은 합동 정보팀을 만들어 별도로 조사를 벌이고, 약 7000~8000 건에 이르는 비밀문서들이 북한에 넘어감으로써 공산권이 미국의 정보수집 능력이나 방법 그리고 출처 등을 파악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 판단이 맞았다는 것은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85년에야 밝혀졌다. 미국 해군 안에서 암호를 풀어 읽는 방법을 포함한 각종 첩보를 소련에 넘겨주던 간첩단이 발각되었는데, 소련이 1968년부터 미국의 암호를 해독하며 최고 비밀문서들과 통신 내용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미국은 그때서야 확실하게 파악한 것이다.
7. 북한의 선전과 활용
북한은 원산항의 푸에블로호를 1995년부터 일반에 공개하다 1999년 평양 대동강변 쑥섬 근처로 옮겼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터진 곳이다. 이 사건은 북한 역사책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1830년대부터 조선을 식민지로, 아세아 침략의 발판으로 만들려고 꾀하여온 미국 침략자들은 1866년 8월 드디여 무장해적선 「샤만」호를 대동강에 침입시켰다. 해적들은 총포를 마구 쏘아 주민들을 죽이고 강변 마을들에 뛰여들어 강도질을 일삼았다.
놈들은 게다가 1000석의 쌀과 많은 량의 금을 주면 돌아가겠노라고 터무니없는 요구까지 들고 나왔다. 그것이 거절당하게 되자 담판하려고 간 조선 관리를 억류하는 등 온갖 행패를 다 부리였다. 이에 격분한 평양의 군민들은 경애하는 수령 김일성 주석의 증조할아버님이신 김응우 선생님을 선두로 하여 미국 침략선 「샤만」호를 불살라버리였다."
셔먼호를 불태워버린 사건에 대해 '쑥섬 근처 만경대 주민 김응우의 지도'를 강조하는 북한의 기록과 '평안감사 박규수의 지휘'를 강조하는 남한의 기록이 다른 점은 남북 역사학자들의 논쟁거리로 남겨놓겠다.
아무튼 북한은 평양감영 소속 군인들과 만경대 근처 주민들이 셔먼호를 불태우고 격침시켰던 대동강변 쑥섬에 1966년 사건 100주년을 기념해 격침비를 세웠다. 그 옆에다 1968년 동해에서 붙잡은 푸에블로호를 전시했으니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비난하며 반미사상을 고취시키기 위한 장소와 소재가 참 기발하다.
쓱섬은 통일과 관련된 사적지이기도 하다. 옛날 쑥대와 잡초만 무성해 쑥섬이라 불리기 시작했다는 그곳은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김일성, 김책, 홍명희, 최동오 등 남북의 정당 및 사회단체 인사들이 이른바 '남북대표 연석회의'를 끝내고 '지도자 협의회'를 가졌던 장소이기 때문이다. 섬 가운데엔 당시 연석회의를 기념하는 '통일 전선탑'을 세워놓고, 대표들이 장기를 두며 휴식을 취하던 원두막과 그들이 탔던 나룻배 등도 원상대로 복구해 놓았다고 한다.
동해 원산항에 있던 푸에블로호를 서해 대동강변으로 옮긴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대형 트레일러 몇 대를 연결해 그 배를 통째로 싣고 육상으로 옮기거나 배를 분해해 옮겨놓고 조립했으리라는 추측이 제기되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동쪽 원산 앞바다에서 한반도 영해 밖으로 나가 남쪽 제주도와 일본 사이 공해를 거쳐 서쪽 대동강변으로 옮겼다. 공해 상에서 미국에 발각되지 않도록 배의 마스터 안테나 등을 눕히고 주위에 철판을 둘러 위장했다. 미국은 수송 작업이 끝나고 3일 후에야 알아차렸다고 한다.
2013년엔 대동강 지류 보통강변에 자리 잡은 전승기념관 '노획무기 전시장'으로 다시 옮기고 커다란 전광판까지 설치했다고 알려졌다. 1968년 푸에블로호를 노획했던 군인들 가운데 생존자들이 안내와 해설을 맡는다. 참관자들은 "세기를 이어오며 조선에 대한 끊임없는 침략과 전쟁책동을 감행하여온 미제에 대한 끓어오르는 적개심을 금치 못한다"고 한다. <로동신문>은 2018년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50주년을 맞아 "미제의 죄악을 만천하에 고발하는 증거물로 되는 무장간첩선 푸에블로호를 지난 기간 219만여명의 주민이 참관했다"고 보도했다.
8. 미국의 반환 요구
미국은 푸에블로호를 돌려달라고 2000년대 초부터 북한에 요구해왔다. 북한 국내외 관광객의 구경거리나 조롱의 대상이 되는 게 얼마나 굴욕적이고 통탄스럽겠는가.
푸에블로호 반환 운동에 가장 앞장서온 사람은 1980-90년대 주한미국대사를 지낸 도널드 그레그 (Donald Gregg)다. 1970년대엔 중앙정보국 (CIA) 한국지부장을 맡고 1980년대엔 레이건 대통령 안보담당보좌관을 역임한 보수적 인물이면서도, 2010년 천안함 침몰이 북한 소행이 아니라 좌초나 아군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확신하듯 주장해온 게 특이하다.
그가 2002년 4월 북한을 방문해 푸에블로호 반환을 제안했다. "푸에블로호는 냉전시대 북미 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상징물"인데, 이 배를 북한이 돌려주면 양국의 적대관계 종식을 위한 계기가 될 것이라며 북측의 결단을 촉구했다.
그해 콜로라도주의 한 상원의원은 이 배의 반환을 요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고 한다. '푸에블로'는 흔히 '인디언'이라 불리는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 이름이면서 그들이 살았던 콜로라도주의 도시 이름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005년엔 미국 의회가 푸에블로호 반환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9. 연재를 마치며
나는 2003년 평양을 방문해 대동강변에 묶여있는 푸에블로호를 밖에서나마 지켜봤다. 1998년엔 황해북도 신천박물관을 자세히 둘러봤다. 북한에서 반미사상을 주입시키는 가장 대표적 장소들이다.
피카소의 그림 <조선에서의 학살 (Massacre in Korea>이 묘사하듯 신천박물관이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한 양민 학살을 보여주며 '미제 승냥이들'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부추기는 곳이라면, 푸에블로호는 '백년숙적'을 물리친 승리와 자신감을 고취시키며 미국에 치욕을 안겨주는 곳이다.
북한은 이 세상 어느 나라보다 강렬한 반미의식을 지속적으로 표출해왔다. 아울러 미국으로부터 가장 오랫동안 강력한 제재와 봉쇄를 당해오기도 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미국과 '새로운 관계'를 맺기로 합의했다. 좋든 싫든 미국과 70년간의 적대관계를 끝내지 않고는 경제성장을 이루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이 이젠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돌려주는 게 바람직하다. 그러리라 기대하고 예상한다. 그 배를 통해 반세기 동안 미국을 조롱하며 골탕 먹였으면 충분하지 않은가.
북한에서는 김정은 위원장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결정하면 당과 정부 그리고 인민이 그대로 따르기 쉬울 것이다. 미국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과의 수교를 추진하려고 해도 의회가 거부할 수 있고 여론이 반대할 수도 있다. 트럼프가 의회의 동의와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반도 평화협정과 북미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11월 6일 중간선거 이전에 푸에블로호를 돌려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