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1)여성의 자리 - 임원 옆에 '여직원 배치도'..동료의 자리는 없었다
남지원·김지혜 기자 입력 2018.04.17.
[경향신문] ㆍ여성, 차별적 지위를 거부하다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는 표어가 여전히 유행하던 1988년. 김지은씨(30·가명)가 태어난 해다. 김지은씨에게는 오빠가 있었다. 아들딸 구별 없이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했지만, 김지은씨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빠의 밥을 차리고 학원에 갔다. 명절에 큰집에 가면 오빠가 사촌오빠들과 어울려 노는 사이 팔을 걷어붙이고 부엌에 들어가 큰엄마와 엄마를 도왔다. 아들딸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집이 싫어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했다.
여자라 차별받는다는 것을 다시 자각한 것은 취업전선에 뛰어들면서다. 취준생들은 ‘여자 티오’ ‘남자 티오’가 따로 있다는 것을 다 안다. 김지은씨는 제조업·건설업 분야 대기업에서 일하고 싶었다. 그쪽 회사들이 남자 10명을 뽑을 때 여자는 한두명만 뽑는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한 건설회사 인사담당자와 취업상담을 하면서 “이 직군에 여자도 뽑느냐”고 물어봤다. 담당자가 웃으며 말했다. “여자는 사실 거의 안 뽑아요.” 돌아오며 생각했다. ‘남자라는 것이 큰 무기구나.’
대형병원 행정직 면접을 보러 갔을 때였다. 전원이 남자였던 면접관 여러명 앞에서 혼자 면접을 봤다. 한 면접관이 물었다. “직장에서 상사가 성추행이나 성희롱 같은 행동을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김지은씨는 대답했다. “그 상사에게 어떤 의도였는지 물어보겠습니다. 성추행이나 성희롱을 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하면 대화로 잘 해결하겠습니다.”
매끄럽게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왜 저런 질문을 하지? 이 회사에서 그런 일들이 있었던 걸까? 성차별이나 성폭력도 참을 수 있어야 일하게 해주겠다는 뜻일까? 면접관이 다시 물었다. “대화가 안되면 외부에 말할 겁니까?” 더 이상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얼마 뒤 불합격 통보가 날아왔다.
김지은씨는 그 뒤 제조업 분야 대기업에 입사했다. 입사 동기 60명 중 6명이 여자였다. 열명 중 한명. 선배들은 “그래도 너희 기수는 여자가 많은 편”이라고 했다.
일도 잘하고 고과도 괜찮던 여자 동료가 있었다. 팀 임원은 그 동료를 마주칠 때마다 “여자가 왜 이 팀에 있느냐” “여자가 여기서 뭘 하느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김지은씨는 그런 얘기를 전해 들을 들을 때마다 ‘이들은 나를 같이 일하는 동료로 생각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 88년생 김지은의 남초직장 생존기
그 동료의 팀엔 반년 늦게 들어온 남자 후배가 있었다. 둘은 나란히 승진대상에 올랐다. 하필 여자 동료가 임신을 한 사실이 알려졌고, 인사고과는 ‘평범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승진에서 누락됐다. 평소 고과가 좋지 않았던 남자 후배는 마지막 고과에서 최상급 점수를 받고 승진했다. 출산을 한 동료는 지난 2월 복귀하려 했지만, 팀에서 복직을 미루라는 지시를 받아 7월까지 육아휴직을 할 예정이다. 7월에 돌아가면 ‘근무기간 부족’으로 올해 승진대상에서도 누락될 게 분명하다. 공장에서 밤 11~12시까지 일했던 여자 동기도 승진을 하지 못했다. 여직원은 늘 남직원들 아래였다. 다과를 담당하는 비정규직 여사원이 없으면 남자 후배들이 몇이 있든 여성 직원이 커피를 타야 했다.
회사 안에서 어디로 눈을 돌려도 관리자급 여자 선배는 드물었다. 부장급 단 한 명, 차장급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였다. 모두의 눈에 띄게 성과가 나는 업무가 있고, 아무리 해도 티가 안 나는 업무가 있다. 여성들에게는 성과가 나는 업무를 맡기지 않았다. 이목이 쏠리는 일은 남자들의 몫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기하는 것이 늘어갔다. 김지은씨는 영업 업무를 해보고 싶어서 영업 파트의 남자 동기에게 상담을 한 적이 있다. 동기는 “우리 회사는 절대 여자에게 업체를 상대하는 일을 시키지 않는다”고 만류했다.
영업 파트는 업체를 상대해 물건을 팔아야 성과가 나온다. 여성은 업체 목록을 관리하거나 행정처리만 맡아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마음을 접었다. 이런 회사를 왜 다니는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나는 날이 늘었지만 털어놓을 여자 선배도 없었다.
■ “노력하면 바뀔 줄 알았는데”
여직원을 가장 필요로 하는 자리는 임원들이 참석한 회식이었다. 임원이 회식을 하자고 하면 관리자는 ‘참석할 여직원’을 소집하고, 임원 옆자리에 여성을 앉힌 자리배치도를 짠다. 회식 장소에 들어가면 팀장이 여자 후배를 끌어다 임원 옆자리에 앉힌다. 술은 여자가 따라야 맛있다는 이야기, 여자가 나오는 술집에 갔던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다. 여직원들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척했다.
평소처럼 임원 옆자리에 앉았던 어느 회식날, 임원이 회식 중간에 갑자기 손을 잡았다. 뿌리칠 수 없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그 장면을 봤지만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문제 제기를 하면 나만 ‘유별난 미친년’이 되리라는 것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지은씨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차로 노래방에 가면 남자 상사들이 춤을 추자며 여직원들 손을 잡아끈다. 상사를 피해 춤을 추는 척하며 뛰어다닌 날도 있었다.
이런 일이 싫어서 회식에 가지 않으려 하면 “여자들은 역시 사회생활을 못한다”는 말이 돌아온다. 어떤 상사는 여자들끼리 뭉쳐다니지 말라고 언짢은 듯 말했다. 추행을 피해다닌 것뿐이었는데.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지는 않았다. 지난해 한 워크숍에서였다. 한 팀장이 여성 직원들에게 ‘차마 표현하기도 싫은 짓’을 시켰다. 여성들이 따로 다른 방에 모였고, 팀장이 화를 내며 불렀지만 가지 않았다. 몇몇 직원들이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를 했다. 팀장은 보직에서 물러났지만 징계는 받지 않았고 지금도 회사에 잘 다니고 있다. 그게 성추행이냐며, 여자들은 너무 민감하다며 남직원들이 뒤에서 수군거렸다. 그냥 모른 척하고, 그런 상황을 최대한 피해가며 사는 것이 그곳에서 김지은씨가 터득한 방법이었다.
대놓고 저항하지 않고, 남자들보다 더 일을 잘하고 더 노력하면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김지은씨는 자신이 노력한다고 해서 뿌리 깊이 박힌 구태와 악습이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회사에서 살아남기를 포기했다.
그는 결국 모두가 선망하던 대기업을 떠나 중견 기업으로 이직했다. 연봉이 많이 깎였다. 그래도 새 회사에는 여성 직원이 절반이다. 상사가 마실 커피는 상사가 탄다. 회식이 없으니 자리를 정할 일도 없다. 미투 운동을 보면서 그는 결국 떼밀리듯 떠나온 그 회사에 다니던 시절을 떠올린다. 우리 사회에는 생각보다 성차별이 심한 곳이 많고, 사람들은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잘 모른다.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야 ‘성차별과 성폭력은 잘못이며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최소한의 인식이라도 생기지 않을까.
■ ‘배운 여자들’, 일터로 가다
성폭력이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은 아니다. 피해의 빈도나 강도가 점점 세졌다고 보기도 어렵다. “예전엔 더 심했지만 너희들 여자 선배들은 참았다”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왜 갑자기 유행처럼 고발하느냐”고 하는 이들도 있다. 그들의 말처럼, ‘왜 지금’ 터져나온 것일까.
왜 지금인지 알려면 한국에서 여성이 지금 어느 위치에 와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여성의 지위는 지난 30여년간 크게 달라졌다. 선거에서, 출판시장에서, 여성의 정치적·문화적 영향력은 남성과 비슷해졌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일자리에서는? ‘개발독재’ 시절에 만들어진 노동시장의 구조와 기업조직의 기본 틀은 여전히 그대로다. 이제 여성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틀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하는 여성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성 고용률은 2015년 처음으로 50%를 넘었다. 30년 전인 1985년 40.9%에서 10%포인트 올랐다. 숫자만 늘어난 게 아니라, 여성들이 하는 일의 양상도 달라졌다. 1980년에 일을 하는 여성의 81.7%는 중졸 이하였다. 전문대 이상을 나온 노동자는 2.6%에 불과했다. 반면 2017년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 중 중졸 이하는 19.3%이고 전문대졸 이상이 42.6%다. 여성들도 교육에 에너지와 돈을 많이 투자했고, 일을 하고 먹고사는 걸 당연하게 여길 뿐 아니라 ‘당연히 일을 해야 하는’ 사회가 됐다.
여성이 종사하는 직종도 달라졌다.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서던 1955년에는 일하는 여성 10명 중 9명이 농수산업에 종사했다. 경공업 중심으로 공업화가 진행된 1975년에는 ‘여공’이라 불렸던 생산직 노동자가 전체 여성 노동자의 16.2%로 늘어났다. 2017년 여성이 가장 많이 종사하는 직업은 보건이나 사회복지, 교육, 금융 등을 통틀어 분류한 ‘전문가 및 관련종사자’다. 사무종사자, 서비스종사자가 뒤를 잇는다. ‘남자만 있는 직장’이나 ‘여자만 있는 직장’은 과거보다 줄었다. 일터에서 남녀가 섞여 일하는 게 당연한 시대가 됐다.
김지은씨 같은 여성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에 가고 좋은 일자리를 잡는 것이 당연한, 바로 그런 시대에 태어나 자랐다. 아직도 남아 있는 차별에 마음이 상했을지언정 ‘대학에 진학하고 직장을 갖는’ 미래를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다. 세상은 달라졌고 여성들이 일하는 걸 뭐라 하는 분위기는 없어졌다. 멀쩡하게 대학을 나와서도 일할 생각을 않는 딸들이 오히려 부모들의 타박을 받는 시대다. 하지만 남성 중심으로 짜여진 사회구조와 문화는 바뀌지 않았다.
■ 취직했지만 승진은 못한다
‘절반이 되면 바뀐다’고들 했다. 여성이 한 집단의 절반이 되면 자연스레 남녀 모두의 감수성이 조직에 녹아들고, 가치관이 서서히 바뀌어 나갈 것이라고 많은 이들이 믿었다. 그러나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속도에 비해, 집단의 구성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이 늘어나는 속도에 비해, 조직 구조와 문화가 변화하는 속도는 너무나 느리다. 그 갭 속에서 미투 운동이 터져나왔다.
업무시간과 승진제도, 보상체계, 직장문화 등 일터에서 만나는 모든 제도와 문화들은 여성이 활발하게 노동시장에 진출하기 전에 짜였다. 여성이 일하는 것이 예외적인 일이 아닌데도 아이는 엄마가 챙겨야 한다. 남녀의 법적 권리가 ‘완전한 평등’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고 있지만 회사에선 다르다. 여성은 아이 때문에 일을 쉴 수 있지만 남자는 그래선 안되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삶과 일의 균형’이 직장인들의 꿈이 됐지만 현실은 다르게 작동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이것은 차별이자 모순이다. 대개는 여성들에게 불가해한 모순으로 다가온다.
‘대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고 있다고 생각한 남성 동료들의 삶이 하나도 바뀌지 않는 동안, 자신만 업무에서 밀려나는 것을 발견한 여성들은 당혹스러워진다. 변호사인 신모씨(31)는 2년 전 아이를 낳은 뒤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했다. “내 삶은 완전히 뒤바뀌었는데, 같은 변호사인 남편의 삶은 왜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 신씨가 아이를 낳고 1년간 직장을 잡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사에 다녔다.
이런 차이가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기혼여성들의 경력단절이다. 여성 고용률은 전반적으로 올라갔지만 20대 고용률과 30대 고용률의 차이는 줄어들지 않았다. 즉 ‘경력이 끊기는 여성의 비율’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2000년 20~24세 여성 중에는 일하는 사람이 56.3%였는데 30~34세로 가면 그 비율이 47.3%로 뚝 떨어졌다.
10여년 뒤 그래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첫 취업을 하고 결혼을 하는 나이대가 전체적으로 올라가면서 고용률의 나이 분포만 바뀌었을 뿐, 양상은 그대로다. 2016년에는 여성 고용률이 가장 높은 세대가 25~29세(69.0%)로 바뀌었다. 35~39세 연령대의 고용률은 최하점인 56.5%, 2000년보다 오히려 더 차이가 커졌다.
한창 일해야 할 직장 10년차에 경력이 끊긴 여성들에게 ‘돌아갈 옛 직장’은 없다. 이들은 저임금·비정규직 일자리로 내몰린다. 남성이 1000원을 벌 때 여성은 641원을 번다. 남성 노동자 중에 비정규직은 26.3%뿐이지만 여성 노동자는 41.2%가 비정규직이다.
■ “와이프는 뭐하고?”
일터에서 밀려나 돌아간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학생들’에게 밀리지 않고 자라온 여성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여자의 역할’에 당혹감을 느낀다. 결혼 5년차인 김하영씨(30)는 결혼하고 2~3주 뒤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남녀는 평등하고 함께 돈을 벌고 책임을 나눠 갖는데 왜 가사노동과 집안 대소사를 꾸리는 일은 전적으로 내 책임일까.” 남편에게 아무리 얘기를 해도 자기 책임으로는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다. 아이가 먹을 우유와 기저귀가 떨어져도 남편은 모른다. 때가 되면 우유와 기저귀를 채워넣는 것도, 명절에 부모님 용돈을 챙기는 것도, 모두 여자의 일이다. 한국 남성의 가사노동 분담률은 16.5%,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가장 낮다.
연구원 유모씨(31)는 사내 부부다. 남편은 석사, 그는 박사이지만 회사가 인정하고 키워주는 것은 남편이었다. 유씨에게는 남편 대신 가정을 돌보라는 무언의 압박이 돌아왔다. 아기가 아파 남편이 조퇴하려 하자 “와이프는 뭐하고 자네가 쉬나”라고 묻는 상사도 있었다. 여자 선배들은 출산 직후 복귀해 연구에만 미친 듯이 매달려야 겨우 승진할 수 있었다. 유씨가 이를 악물고 박사과정까지 마친 것도, 아이를 낳고 왔다는 이유로 승진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직장인 10명 중 4명은 여성이지만 직장을 움직일 힘을 가진 관리자와 임원으로 올라갈수록 여성 비율은 급격히 떨어진다. 2016년 공공기관과 500인 이상 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중 여성은 37.8%, 관리자 비율은 20.1%였다. 여성가족부가 그해 매출액 기준 500대 기업 사업보고서를 분석해 보니 전체 임원 중 여성은 2.7%에 불과했다. 미투 운동에 대한 대처법이라며 최근 거론된 일명 ‘펜스룰’은 여성이 직장에서 어떤 힘도 갖고 있지 못한 현실을 드러낸다. 박봉정숙 한국여성단체연합 성평등연구소장은 “펜스룰이 가능한 것은, 직장에서 남성들이 여성들을 배제한들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라고 했다.
여성 관리자들 혹은 정책결정자들이 많았다면, 어쩌면 미투 운동은 다른 양상으로 ‘조직 내에서’ 풀려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그런 해결사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같은 급의 ‘동료들’은 있고, 그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규모가 됐다. 바로 그 지점에서 미투 운동이 일어난 셈이다.
여성이 직장에 다니는 게 당연해졌지만 일터가 제도적·문화적으로 여성을 밀어내는 현상은 여성들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만들었다. 반대로 남성들도 과거에는 무시해도 됐던 여성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이로 인한 새로운 갈등이 곳곳에서 생겨났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소수자였던 집단이 일정 비율 이상을 넘어서려고 하면 다수 집단은 위협을 느끼며 자신의 이익을 방어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소수집단이 특정 수준의 ‘위협적 지위’에 이르면 다수집단은 그 집단이 더 커지지 않도록 억제하기 위해 차별을 가한다”고 말했다. 금융권 여성 비율이 높아지자 합격자 비율을 정해놓고 점수를 조작한 금융권 채용 성차별이 바로 그런 예다.
■ 투표소로 가는 여성들
지난해 19대 대선에서 투표한 집단을 성별·연령별로 분류해 보면, 투표율이 80%를 넘었던 집단은 4개였다. 70대 남성의 투표율이 86.1%로 가장 높았고 60대 남성이 85.2%, 80대 남성이 83.1%로 그 뒤를 이었다. 네 번째는 80.9%를 기록한 ‘19세 여성’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했거나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여겨져온 40~60대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투표장에 나왔다. 이 대선에서 50대 이하 연령층에서는 여성들의 투표율이 예외 없이 남성보다 높았다.
남녀의 투표율은 2012년 처음으로 역전됐다. 그해 18대 대선에서 여성 투표율은 남성보다 조금 높았다. 2014년 지방선거에서는 남성과 여성 투표율이 57.2%로 같았지만 40대 이하에서는 대체로 여성이 투표를 더 많이 했다. 2016년 총선에서는 남성 전체의 투표율이 1.4%포인트 높았지만 20대 후반~40대에서는 여성 투표율이 더 높았다. 20~40대 여성 유권자는 캐스팅보트를 넘어 당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집단이 됐다.
미국 등에서 먼저 나타났던 남녀 표심 격차(젠더 갭)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 여성 투표자의 42%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표를 던졌지만 남성은 39%만 문 대통령에게 투표했다. 2000년대 후반 이후 한국 정치사의 주요 사건들도 여성이 이끌었다. 1987년 6월항쟁을 주도한 것이 남성 위주의 ‘넥타이 부대’였다면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시위를 대표하는 것은 ‘여고생’과 ‘유모차 부대’였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때는 집회 현장의 남성중심적이고 여성혐오적인 분위기에 여성들이 처음으로 집단적인 문제 제기를 했다. ‘여자가 대통령을 해서 문제’, ‘미스박, 닭년’처럼 여성을 낮추는 말들은 연단에서 퇴출당했다.
하지만 실제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정하는 자리에는 여성이 없다. 20대 총선에서 여성 국회의원이 51명 당선돼 역대 최다를 기록했지만 여전히 전체 300명 중 17%에 불과하다. 공직선거법에 따라 50%를 여성으로 의무배정해야 하는 비례대표를 제외하면 지역구 의원 중에서는 10.3%만 여성이다.
지난 정부까지만 해도 여가부 장관 1명만 구색 맞추듯 여성을 임명했던 관행이 깨지고 이번 정부에서는 국가보훈처장을 포함해 장관 6명을 여성으로 지명했다. 임기 내 남녀 동수 내각도 약속했다. 하지만 지난해 기준으로 정부부처에서 국장급 이상 고위공무원 중 여성은 전체의 6.1%뿐이며 중간관리자인 과장급 이상으로 늘려 잡아도 14%에 불과하다. 여성 고위공무원이 너무 적다 보니 정부 출범 초기 관가에서는 차관으로 발탁할 여성 고위공무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여성의 목소리를 정책에 담는 것은 양적인 성평등을 넘어서는 일이다. 정책을 정하고 추진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생활에 밀착한 정책이 만들어질 수 있다.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이 지난해 20대 국회의원들의 ‘정치대표성 인식’을 조사해 보니 남성 의원들은 경제나 외교안보 분야에 관심을 많이 보인 반면 여성 의원들은 여성, 복지, 노동 이슈에 대한 관심이 컸다. 돌봄 문제와 빈곤 해결, 고용차별 줄이기, 여성에 대한 폭력 없애기, 소수자 권익 늘리기 등 인권과 직결된 이슈에 대해서도 여성 의원들의 관심도가 남성 의원보다 높았다.
■ 미투, 공통의 ‘언어’를 찾다
2000년까지만 해도 여성의 대학진학률은 남성보다 5%포인트가량 낮았다. 2009년을 기점으로 이 수치가 역전됐고, 점점 격차가 벌어져 2016년 대학진학률은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7.2%포인트 높다.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도 여학생의 성적이 남학생을 뛰어넘은 지 오래다.
영화와 공연에 돈을 가장 많이 쓰는 계층은 30~40대 여성이다. 도서시장의 ‘헤비리더’도 여성이다. 지난해 인터넷서점 예스24에서 판매된 책들 중 55%를 여성이 구매했다. 4권 중 1권(24.5%)을 40대 여성이 샀다. 페미니즘 열풍까지 맞물리면서 지난해에는 페미니즘 서적만 78종이 출간됐다. 페미니즘 도서 열풍은 <82년생 김지영>처럼 구조적 여성차별을 환기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고, ‘된장녀’나 ‘김치녀’ 같은 낙인을 향해 “이것은 혐오표현이다”라고 지적할 수 있는 논리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경제적·정치적 기반을 갖췄음에도 그에 걸맞은 지위를 얻지 못한 채 여전히 차별을 겪는 여성들은 이런 지적·문화적 토양을 등에 업고 폭력의 경험을 털어놓는 ‘미투 혁명’을 폭발시켰다. 성폭력이 가장 먼저, 가장 크게 가시화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이 ‘폭력’일 뿐 아니라 명백한 피해사실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신경아 교수는 “보통의 차별은 정황만 있을 뿐이지만 성폭력은 스스로가 경험한 것이기에 누구든 말로 옮길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16년 온라인 공간에서 일어난 ‘문단 내 성폭력’ 폭로 운동, 지난해 미국 문화계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은 피해자들이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고발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모델이 됐고 피해자들에게 언어를 만들어줬다.
아직도 2차 피해 문제가 심각하긴 하지만, 성폭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한층 진전된 것도 미투 운동의 확산을 뒷받침했다. 1992년 역사상 처음으로 법정에 선 성희롱 사건인 ‘서울대 신모 교수 성희롱 사건(일명 우조교 사건)’ 이후로 흔하게 벌어지던 성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언행을 ‘직장 내 성희롱’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됐다.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직장 내 성희롱을 제재할 수 있는 조항이 신설됐다.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던 제도도 고쳐지고 있다. 1995년 형법이 바뀌면서 ‘정조에 관한 죄’는 ‘강간과 추행에 관한 죄’로 바뀌었다. 대법원은 “강간죄가 보호해야 할 법익이 배우자인 남성을 전제로 한 ‘여성의 정조’ 또는 ‘성적 순결’이 아니라 자유롭고 독립된 개인으로서 여성이 가지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남성들이 ‘농담 따먹기’라고 부르는 행동들이 피해자들에겐 ‘성희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모두가 안다. ‘성폭력 피해자를 비난해서는 안된다’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안다.
아직 갈 길은 멀다. 2016년 여가부 실태조사에서 성폭력 피해자 10명 중 1명이 “성폭력당한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말을 들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1999년부터 의무화된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이나 학교에서의 성교육과 꾸준한 인식 개선은 피해자에게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내줬다.
이런 노력들이 켜켜이 쌓인 끝에서야 서지현 검사는 지난 1월 뉴스 스튜디오에 앉아 자신이 겪은 성폭력 피해를 증언할 최소한의 언어와 기틀을 갖게 됐다.
<남지원·김지혜 기자 somnia@kyunghyang.com>
[미투의 혁명, 혁명의 미투]
(2)남성의 탄생 - 10대 땐 여학생을 '성적 대상화'..성인 돼선 '룸살롱 문화'
이재덕 기자 입력 2018.04.18.
[경향신문] ㆍ‘복종’ 군대문화, 직장·가정 이어져 여성에 ‘군림하는 마초’
1982년생 이현욱씨(36·이하 모두 가명)는 7년 전 서울의 한 중견기업에 입사했다. 대학 졸업 후 ‘백수’로 3년을 보냈다. 동기 12명 중 남자는 8명, 여자는 4명이다. 입사 시험장에서 주변에 앉아 있던 경쟁자들은 모두 여자였는데 합격자 수는 남자가 2배였다. 그나마 그 회사는 여성 채용비율이 높은 편이다. 이씨와 함께 대학을 졸업한 남자 동기 하나는 대기업에 들어갔는데 입사자가 남성 5명 대 여성 1명이었다. 카드사에 들어간 동기네 사정은 더 심했다. 남성 8명에 여성 1명꼴로 뽑았다.
KEB하나은행이 2013년 남녀 채용비율을 4 대 1로 만들기 위해 서류전형에서 여성 커트라인을 남성 커트라인보다 48점이나 높였다는 기사를 봤다. 이씨는 그다지 놀라지도 않았다. “쉬쉬했을 뿐이지 다들 알고 있는 얘기 아닌가요?” 이씨가 되물었다.
그의 고등학교 동창인 김정열씨(36)의 회사에서는 여성이 대부분일까 ‘우려’해서 남성 지원자들에게 유리하도록 면접 점수를 바꿨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느 공기업 사장은 2015~2016년 신입직원을 뽑을 때 “여성은 출산휴가, 육아휴직 때문에 업무 연속성이 끊길 수 있으니 탈락시켜야 한다”며 남성 지원자 순위를 올려 합격시켰다. 이씨와 김씨는 이 치열한 취직 경쟁의 승자였고, 남성을 선호하는 직장문화가 자신들을 구했다고 믿는다.
■ ‘강호동’의 문자메시지
직장에 들어간 뒤 매주 한두 번씩 회식을 했다. 여자 선배들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아이가 아프다”며 회식에 빠지거나 1차만 참석하고 떠났다. 그럴 때면 남자 선배들의 말은 “여자들은 항상 그렇다니까”로 시작해서 “차라리 여자들이 없는 게 편해”라는 것으로 귀결됐다. 술자리가 3차까지 이어진 어느날 밤. 부장은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양주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가 돌았다. 그는 “막내가 고생이 많다”며 “여자를 불러줄 테니 위층에서 자고 가라”라고 했다. 남자들만 있는 자리에서 “이건 우리만의 비밀”이라며 웃었다. 이씨는 속이 울렁거린다며 화장실에 들어가 억지로 속을 게워냈고, 술에 취해 더 있지 못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빠져나왔다.
김지훈씨(33)는 몇 해 전 서울 강남의 한 룸살롱에서 거래처 관계자의 접대를 받았다. 20대 초반의 여성 10여명이 일렬로 늘어섰다. 거래처 관계자는 능숙하게 한 명을 골랐다. 김씨도 가장 어리고 예뻐 보이는 여성을 선택했다. 팁을 건네는 일은 거래처 직원 몫이었다. 그날 그 방에선 ‘유사 성행위’가 이뤄졌다.
그 뒤로 김씨에게는 일주일에 한번씩 ‘강호동’이라는 발신자 이름으로 문자메시지가 왔다. 하루는 “형님,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라고 인사를 하기도 하고, 다른 날은 “그대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살고 싶어했던 내일이다”라는 문구를 보내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작가 소포클레스가 했다는 이 말은 미국의 자연주의자 랠프 월도 에머슨을 거쳐 한국에서 작가 조창인의 베스트셀러 <가시고기>를 통해 널리 퍼졌다. 부성애를 애절하게 그린 소설 <가시고기>의 구절이, 그 기나긴 역사를 거쳐 ‘강호동’의 문자로 전달되는 한국의 풍경. 김씨는 “거래처 직원이 내 연락처를 건넨 것 같은데, 그날이 내가 가장 헛되게 보낸 날이었다”고 했다.
김씨는 이후 경찰이 강남의 퇴폐영업소들을 집중 단속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벌렁거렸다고 했다. “강호동이 잡혀갔을까봐, 혹시나 그 놈이 휴대폰에 저장해둔 내 연락처가 나올까봐 조마조마했다. 재수없게 내가 잡혀들어갈까봐 걱정됐다.”
공기업 직원 정은식씨(37)는 지방에서 근무했다. 남성 직원들은 ‘물 좋은’ 영업소 정보를 공유한다. 정씨는 “친해지고 싶어서 여자 얘기를 하곤 한다. 싱글이면 여기 놀 데 좀 있냐, 서비스 좋은 데 없냐고 서로 묻는다”고 말했다. ‘과장님이 술집에서 만난 여성과 바람이 났다가 걸렸다’는 식의 소문이 돌기도 한다. 남직원들은 다들 웃고 넘길 뿐 크게 개의치 않는다.
“노래방, 업소별로 도우미 풀이 다르거든. 단골에게 이쁘고 어린 여성 맞춰 주는 곳이 있고, 호구 취급하면서 아줌마 보내주는 데도 있다. ‘○○○노래방에는 주변 대학 여대생들이 많이 온다’ ‘○○팀의 은지, 민지가 괜찮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굉장히 중요한 정보라도 되는 듯이 서로 공유하고, 같이 가기도 한다. 그런 방식으로 남자들끼리 더 친해진다.”
여성가족부의 ‘2016년 성매매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성인 남성 105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2명 중 1명이 “평생 한 번 이상 성매수를 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성매수 남성의 1인당 연평균 성매수 횟수는 8.46회였다. 최초 성매수 동기는 ‘호기심’이 가장 많았고 ‘군입대’, ‘술자리 후’가 뒤를 이었다.
■ ‘빨간 마후라’ 돌려본 아이들
남자들이 모여서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이씨는 “학창 시절에도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잠재적 소유물로 취급했다”고 했다. 그와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여성들은 ‘따먹히는’ 대상이지, 나와 같은 인격체가 아니었다. 몇년 전 남학생들이 자기들끼리의 카톡방에서 같은 대학교 여학생을 거론하며 ‘야동(야한 동영상) 배우 닮았다’ ‘못 참는다’ ‘방으로 데려가라’ 따위의 성희롱 대화를 해 논란이 됐다. 그런 일들은 이씨 또래에게는 흔한 일이었다.
“그때는 카카오톡이 없어 증거가 남지 않았을 뿐이지, 남자들끼리 모인 장소에서 특정 여성을 상대로 ‘성관계를 하고 싶다’는 식으로 하는 말들은 수도 없이 했었다.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 것이 사회문제가 된다거나, 혹은 내 인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잘못된 행위였다는 것을 알고 반성하게 된 것은 그런 문제를 폭로하고 지적한 여성들 덕분이었다.”
정씨는 “대학 때 모르는 여성들과 3 대 3 채팅으로 만났다. 남자들끼리 여자를 찜해두고 2차에서 누구에게 술을 더 먹일지, 술에 취하면 어디로 데려갈지 얘기한 적이 있다”고 했다.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친구들과 그런 일들을 공모하고 진행하는 것을 그저 젊은 시절 추억거리라고만 생각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도 있다. 2011년 고려대학교 의과대 학생들 수련회에서 남학생들이 술에 취해 잠든 여학생을 집단 성추행한 사건이 그런 예다. 남성들의 ‘흔한 작당’이 그대로 범죄로 이어졌다. 당시 가해 학생들 부모들은 여학생을 비난하고 “남의 집 귀한 아들 앞길 막는다”고 했다. 몇 년 뒤, 그 가해학생들 중 한 명이 다시 다른 대학 의대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알려져 소셜미디어에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사내들 장난’에는 대체로 면죄부가 주어진다.
돌아보면 남성들이 성에 대해 배우는 통로 자체가 왜곡돼 있다. 이현욱씨가 중학교 3학년이던 1997년에 강남의 중·고등학생들이 해외 포르노 영상들을 보고 직접 동영상을 찍어 유포한 일이 있었다. 영상 속 여학생이 빨간 머플러를 목에 둘러 속칭 ‘빨간 마후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영상에 나온 여학생은 그 후 신원까지 공개됐다. 게임 속 여성과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미션(임무)으로 설정한 ‘하급생’ ‘동급생’ 같은 일본 성인게임과 포르노 영상이 CD로 만들어져 10대 학생들에게 2만~3만원에 팔렸다. 한창 유행했던 일본 시뮬레이션 게임에는 딸을 키워서 ‘창녀’로 만드는 설정까지 들어 있었다.
이씨가 고등학생이 된 1998년에는 유명 연예인의 성관계 비디오가 유포됐다. 학생들은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근처 PC방으로 몰려가 영상을 단체로 구경했다. “누군가 PC방 컴퓨터에 그 동영상을 깔았다는 소문이 학교 전체에 퍼졌다. 수십명이 컴퓨터 한 대를 붙들고 그 비디오를 봤다. 어둡고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다들 ‘얼굴 보니 그 여자가 맞네’ 하고 낄낄댔다.”
피해 여성은 대국민 사과를 하고 연예계를 떠나 있어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온 나라가 사춘기 남학생들처럼 어리석고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피해자는 문란한 여성으로 낙인찍히고 쫓겨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정작 퇴출돼야 할 이들은 영상을 유포하고 구경하면서 웃었던 나 같은 남성들 아닌가.”
■ 스마트폰과 ‘성범죄의 일상화’
성관계 영상을 찍어 올리는 일, 단톡방 성희롱 같은 사이버성폭력은 스마트폰과 함께 크게 늘었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사이버성폭력 범죄는 2005년 341건에서 2014년 6735건으로 10년 새 20배 증가했다. 전체 성폭력 범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같은 기간 3%에서 24%로 높아졌다. 인권단체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가 지난해 5월부터 12월까지 상담한 피해사례 206건을 분석해보니 피해자의 93.7%가 여성이었다.
20대 여성들과 협동조합 일을 오랫동안 했던 한 여성은 “요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선 ‘리벤지포르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연애 공포증이 생겨날 정도인 걸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헤어진 연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성관계 영상이나 신체를 찍은 영상을 공개적으로 유포해버리는 걸 가리켜 리벤지포르노라고 부른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조사는 이런 두려움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리벤지포르노에 속하는 ‘비동의 성적촬영물 유포’가 상담 사례의 48.5%로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보복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연인의 영상을 포르노사이트에 올리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온라인에서 성적으로 괴롭히는 ‘성적 사이버 불링’(10.2%)과 ‘불법 도촬’(10.2%)이 그 뒤를 이었다. ‘유포 협박’이나 ‘불안 피해’도 각각 9.7%를 차지했다. 범죄는 주로 소셜미디어(40.9%)와 불법 포르노사이트(39.4%), 국내 웹하드(15.1%) 등에서 이뤄졌다.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서승희 대표는 “성범죄에 해당되는 촬영물들을 ‘야한 동영상’이라 부르고, 그 안의 여성을 대상으로 ‘중국산’ ‘일본산’ 따위로 부르는 것은 피해 여성을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라 대상화된 물체, 사고파는 상품처럼 여기는 한국 사회의 ‘강간문화’에서 나온 일”이라고 말했다.
남성들은 또래집단을 만드는 과정에서 집단에 어울리지 못하는 이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저지르기도 한다고 말했다. 정구현씨(24)는 “중학교 때 왜소하고 여성스러운 아이들은 괴롭힘을 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내성적이고 활동적인 행동을 덜하는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심부름을 시키는 이들이 있다. ‘네가 여자였으면 좋겠다’며 성희롱과 성추행을 하는 동기도 있었다”고 했다. 그는 “주변에서도 적극적으로 괴롭힘이나 따돌림에 참여하지 않지만 모르는 척 행동하는 남자 아이들이 제일 많았다. 직접 가담하지는 않아도 보면서 즐거워한다. 그 아이들에게는 그게 더 상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나보다 남자답지 않은 아이들이 있어야 그 괴롭힘의 대상이 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 ‘미투’도 하기 힘든 남성들
전상훈씨(26)는 “일부러 거친 말을 쓴다”고 했다. “남자들 사이에서, 숙이고 들어가거나 섬세하거나 다정하거나 하면 매력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거칠고, 지지 않고. 공격적이고, 욕을 해도 서로 차지게 주고받아야 남자답다고 인정받는다. 아니면 ‘계집애’가 된다.”
미투 운동이 벌어지자 ‘왜 여성들만 피해자인 양 나서나’ 하는 반론이 일부 남성들에게서 나왔다. 맞는 지적이다. 남성이 피해자인 성범죄도 적지 않다. 다만 이 경우에도 가해자는 대개 남성이다. 이런 범죄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남성들을 숨은 피해자로 남겨두는 것은, 전씨가 말한 것 같은 남성들의 인식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계집애 같아서’ 피해를 입었고, ‘계집애처럼’ 드러내는 것은 창피한 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피해 사실을 알리고 문제를 제기하기가 더 힘들어진다.
이현욱씨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앞집 사는 고등학생 남학생에게 집 앞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물컹한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너무 놀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때의 불쾌함은 지금도 생생하다”고 했다. 남학생은 “말하면 혼날 줄 알라”고 했고, 이씨도 아무에게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도 무섭고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된 뒤에도 아르바이트하던 곳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사장이 성기를 만졌지만 이씨는 이 일 또한 주변 사람에게 털어놓지 않았다. “기분이 나빴지만 말을 하려니 호들갑 떠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지난해 성폭력피해자통합지원센터의 도움을 받은 2만7225명 중 성폭력 피해자는 1만9423명이다. 그중 0~12세 남자아이가 3.2%인 617명이었고 13~18세 남자 청소년은 223명이었다. 가해자는 대부분 남성이었다. 경찰청 통계로 보면 2011년 전체 성폭행 피해자 가운데 남성 비율이 3.8%였던 것이 2015년에는 6.2%로 올라갔다. 남성 피해자들의 상담·신고율이 극히 낮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피해자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하는 것을 성범죄로 규정했던 형법 조항이 2013년 ‘사람을 강간’하는 것으로 고쳐지면서 성폭력 피해자의 범주에 남성도 들어가게 됐지만 여전히 남성들은 말하지 못한다.
2016년 여성가족부의 전국 성폭력 실태조사에서 남성 피해자들의 86.0%는 아무에게도 피해사실을 말한 적 없다고 했다. ‘피해가 심각하지 않아서’ ‘남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렵고 부끄러워서’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여성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것처럼, 남성들도 이런 기억들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어쩌다 알려지기라도 하면 “남자가 무슨 성추행을 당하냐” “너도 좋았을 거 아냐” 같은 대답이 돌아온다.
■ 박지원씨의 ‘조직문화 적응기’
박지원씨(33)는 중학교 때 키가 143㎝, 몸무게는 37㎏이었다. “내가 만만한 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밥’이 된다. 애들이 정말 많이 괴롭혔다”고 말했다. 중학교 1학년 때 40번 정도 싸웠다. “쉬는 시간, 점심시간마다 나를 가지고 놀았다. 헤드록을 걸거나, 괜히 레슬링 경기 흉내를 낸다든가. 너는 ‘갑바’ 있냐. 좀 대봐. 이러고 주먹으로 때린다든가.” 중학교 때 별명은 ‘싸움닭’이었다. 박씨는 “싸움은 못하는데 시비만 걸면 싸운다고 그렇게 불렸다. 중3 때쯤 가니까 애들이 ‘저 새끼는 싸움은 못해도 깡이 좋다’며 어울리게 해줬다. 그제야 아무도 날 건드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학교 ‘짱’끼리는 다들 안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경기 북부 ‘3대 꼴통 학교’로 유명했다. 중학교 때 친했던 애들이 우리 학교 짱에게 ‘지원이는 우리 친구니까 너무 괴롭히지 말라’고 얘기해 줬다. 그때 배운 건 단순했다. 내가 힘이 세지 않으면 센 놈들과 같이 지내면 되는구나. 그게 내 첫 조직문화 적응 경험이었다.”
‘야동’과 ‘여자 얘기’로 남성성을 확인하며 자라난 남자들의 다음 코스는 군대다. 헌병으로 복무했던 권인성씨(28)는 “군대 가야 사람 된다는 얘기는 수없이 들었지만 군대에서 뭔가 배웠다는 느낌은 없다”고 인정했다. “다만 회사에서 선배들과 얘기할 때 군대에 가지 않았거나 공익으로 갔다온 사람이 논외가 되는 느낌은 있다”고 했다.
“선임은 오로지 계급으로 찍어 누르고 후임은 복종만 하는 태도가 굳어진다”는 권씨의 얘기에는 남성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별로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미국 군대처럼 어느 정도 자유도 있고 스스로 판단할 여지가 있으면 그 안에서 리더십을 배우고 능동적으로 일할 수 있겠지만 한국 군대는 그렇지 않다”면서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휴가 기간 동안 수없이 많은 일탈이 벌어진다. 사고를 치고 오거나, 성병에 걸려 오는 경우를 여럿 봤다”고 말했다.
김지훈씨의 군대 경험도 비슷했다. “선임들은 외박을 하고 돌아오면 안마방에 몇 번을 갔네 하며 자랑스럽게 떠벌렸다. 경험 없는 후임들을 데려가기도 했다. TV를 보면서 여자 연예인을 ‘따먹고 싶다’며 저급한 농담을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까라면 까는’ 복종의 의무, 개인의 탁월한 능력이나 다양성을 오히려 적대시하고 ‘조직’을 우선시하는 이런 문화는 직장에서도 이어진다. 신입사원에게 ‘행군’을 시키는 문화, ‘군대에도 갔다오지 않은 여성들’을 배제하고 남성 중심으로 끌고 가는 문화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남성들 역시 적지 않지만 그런 감정을 남성 스스로 입 밖에 내기는 쉽지 않다.
■ ‘가장’이라는 이름
강기영씨(35)는 6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와 재작년에 결혼했다. 진작에 결혼을 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강씨가 직장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강씨는 “여자는 몰라도 남자는 직장이 있어야 한다, 남자가 기우는 결혼은 하면 안된다는 말들이 당연시되지 않느냐. 적어도 여자보다 좋은 직장에 다니고 돈도 더 벌어야 하는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강씨는 한 대학교 교직원으로 자리를 잡은 뒤에야 결혼할 수 있었다.
결혼을 할 때 남자는 집, 여자는 살림을 혼수로 장만해가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강고하다. 이른바 ‘여초 커뮤니티’들에 들어가도 게시판에는 온통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여성들은 성차별을 비판하지만 결혼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대등한 인간이 아닌 ‘시어머니’ ‘장모’ ‘신부’의 입장으로 돌아서 편견을 그대로 재생산하는 것 같다. 강씨는 “집을 살 돈을 온전히 내놓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집값에서 더 많은 비중을 내야 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됐다. 서울 변두리에 17평짜리 아파트를 하나 장만하고 싶었지만 2억원이 훌쩍 넘었다. 취직도 늦게 한 내가 그 돈을 무슨 수로 마련할 수 있겠느냐”고 했다.
양가 눈치를 보며 결혼을 준비했다. 가진 돈은 3500만원이 전부였다. 먼저 취직해 돈을 좀 모아둔 아내가 집값의 대부분을 부담하는 대신 혼수를 해오지 않기로 했다. 그나마 직장이 서울이 아닌 지방에 있어서 집값의 일부라도 기여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맞벌이를 했던 이현욱씨 부부의 경우 아내가 임신을 하면서 삶이 바뀌었다. 헛구역질을 하는 아내에게 동료 직원들은 ‘일을 왜 이렇게 엉망으로 하냐’ ‘야근도 못할 거면서 일을 다 끝내놓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며 질책했다. 아내는 결국 일을 그만뒀다. 아이가 태어나면서 17평 전세 아파트에서 25평으로 이사를 했다. 이씨의 월급은 세금을 제외하고 매달 270만원 정도다. 전세자금 대출 이자만 다달이 30만원 넘게 빠져나간다. 신용카드를 만들려고 했는데 은행에서 소득에 비해 대출이 많다며 거절당했다.
혼자 벌어 먹고 살려니 너무 빠듯하다. 아내는 다시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씨는 “맞벌이가 시작되면 그때부턴 육아와 가사를 어떻게 분담할지 또 걱정이다. 아무래도 경력이 중간에 끊긴 아내가 좋은 직장을 가질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상대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더 많이 맡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경력단절 여성이 비정규직이나 저임금 일자리로 가고, 집안일 부담도 더 많이 떠안는 일은 ‘보편적’이다.
이씨의 두 살배기 아들은 어린이집에 다닌다. 어린이집에서는 매일 아이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알림장’과 함께 스마트폰으로 보내온다.
“아이가 깨기 전에 출근하고, 잠든 뒤에 퇴근한다. 회식이 있는 날은 집에 오면 자정이 넘는다. 어린이집에서 보내온 사진을 보고서야 ‘녀석이 머리카락을 잘랐구나’ ‘얼굴에 상처가 났구나’ 알게 될 때도 많다. 아이 얼굴이 쑥쑥 변하는데 그 과정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은 불행이다. 과장, 부장들을 보니 다 그렇게 살고 있다. 아내가 아이를 보느라 녹초가 되는 걸 너무 잘 알지만 가끔은 아이와 함께 지내는 아내가 부러울 때도 있다.”
■ ‘상자’에 갇힌 남자들
남성은 생계를 책임지고 여성은 집안일을 하는 전통적인 분업체계는 깨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적잖은 남성들은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강기영씨는 “남편이고 가장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처자식을 책임져야 한다”고 말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남성이 생계를 전담하는 모델은 더 이상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데, 이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 세대에서 물려받은 남성의 역할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가장’이라는 역할”이라고 진단했다. 윤김 교수는 “가장이라는 것은 설령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부양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내와 자식을 대표하거나 보호하거나 통제·군림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남성들은 평생을 ‘맨박스(Man Box)’ 안에서 살아간다. 맨박스는 사회가 요구하는 남성성을 뜻한다. 이런 틀은 남자들도 숨막히게 한다. 유창근씨(36)는 “10대 때 집에서 크게 울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사회생활 어떻게 하냐. 결혼하면 가장이 될 녀석이 눈물이 많으면 되겠냐’고 했다. 그 뒤로 그는 남들 앞에서 울지 않으려 애썼다. “그런데 새로 온 팀장과 성격이 맞지 않았어. 불려가서 싫은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자리에 앉았는데 도저히 일을 못하겠는 거야.” 밖으로 나가 친한 동료에게 하소연을 하는데 울음이 터져나왔다. 아버지가 그어놓은 ‘선’을 넘어버린 것이다. 후련했다. “남자는 울면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참고 살았다”고 했다.
한의사인 김현씨(35)는 여전히 울지 않는다. 하지만 그 역시 ‘남자다움’을 강요당하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한다. 그는 “남자가 눈물을 보이는 것은 ‘프로답지 못하다’는 인식이 있다”고 했다. “같은 한의사인 아내는 속이 상하거나 일이 안 풀릴 때, 힘들 때마다 펑펑 운다. 남성의 눈물만 금지되는 건 조금 이상하다.”
조주은 국회 입법조사관은 “남성이 생계를 부양해야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한국에는 군대문화와 합쳐져 더욱 과잉화되고 왜곡된 남성성이 있다”며 “맨박스에 갇힌 남성들이 틀을 깨려면 사회적 약자와 감정을 나누고 대화하고 공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미투 운동은 남성들에게도 충격을 줬다. 이 현상을 보면서 남성들은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고, 공감하기도 하고, 반발심을 갖기도 한다. 때로는 자기 안에서 여러 감정이 뒤섞이는 걸 느끼기도 한다. 이현욱씨는 “남성들 문화는 여성을 존중하지 않았다. 남성들은 여성을 인격체로 대우하고 대화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모두가 방관자이거나 가해자였다”고 했다.
대기업 임원인 오금원씨(51)는 미투를 ‘전향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그는 입사한 이래로 임원이 된 지금까지 여성 직원들에게 존댓말을 쓴다. “여성들은 자신이 존중받는 느낌이 든다고 한다. 하지만 남성 간부들 중에는 여전히 여성 직원을 ‘하대’하고 쉽게 대하려는 이들이 많다.” 오씨는 주변 남성들이 미투 운동을 보면서 “상당히 불편함을 느끼고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행처럼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에만 주로 초점이 맞춰지다보니 문제의 본질인 권력관계가 잘 드러나지 않는 측면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김태훈씨(43)는 “남성 위주로 굴러가는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권력을 못 가진 여성은 피해를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했는데 그게 이제야 터져나온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고발’된 행위들을 “모두 성추행이나 성희롱이라고 볼 수 있는지, 과거에 용인됐던 것들을 이제 와서 폭로하고 가해자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아닌지, 그런 방식밖에 없었는지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집에서, 학교에서, 군대에서, 직장에서, 남성들은 ‘만들어진다’. 미투는 이들에게, 사회 전체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미투가 페미니즘과 만날 때
미투 운동이 페미니즘과 만날 때 피해자는 수동적 의식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자 의식을 가지고,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평등성의 인식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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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주의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지위에 따른 남성 중심적 위계주의가 강력한 사회규범으로 작동한다. 또한 ‘남성다움’이란 남성의 ‘여성 지배’와 연결되곤 한다. 성폭력은 종종 피해자에 대한 호감과 사랑의 감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다. 여성혐오 사회에서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를 우선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성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피해자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포르노그래피를 보면서 여성에게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금전을 지불하며 섹스를 하면서 그 성 노동자 여성에게 가지게 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다양한 광고에서 성적 상품이 되는 여성에 대하여 느끼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 권력의 불균형이 작동될 때, 그 권력을 여전히 행사하는 남성이 위계적 구조에서 아래에 있는 여성에게 표시하는 감정은 사랑이 아니다. 자기 여자친구나 부인을 사랑한다면서 폭력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진정한 사랑은 두 사람 간의 권력이 균등하게 행사되고, 서로를 평등한 존재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그 지점에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호감의 이름으로 여타의 성폭력이 정당화될 순 없다.
페미니즘에는 다양한 정의가 있다. 널리 회자되는 정의 중 하나는 “페미니즘은 여성도 인간이라는 급진적 주장”이다.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층적 폭력과 차별은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지 못하는 왜곡된 이해에서 출발한다. 남성-여성의 위계적 종속성이 자연스러운 것이 되는 현실에서, 여성도 인간이라는 주장은 낭만적 모토가 아니라 치열하게 실천되어야 하는 사회 정치적 과제이다. 경제·정치·문화·예술·교육·종교 등과 같은 공적 영역은 물론이고, 가정이나 친밀성의 관계 같은 사적 영역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인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페미니즘이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다양한 갈망·성품·능력·욕구 등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이해는 여성을 ‘어쨌든 여자’라는 생물학적 프레임 속에 가두는 것 자체가 억압이며 차별이라는 것을 보게 한다. 억압은 한 사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미투 운동이 페미니즘과 만날 때, 그 미투 운동은 첫째, 가해자에 대한 고발이나 처벌만이 목표가 아님을 비로소 인식하게 한다. 둘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이 모든 공적·사적 분야에서 일어나게 되는 근원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게 한다. 셋째, 여성을 성적 대상이나 수동적 존재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인식론적 변혁의 필요성을 보게 한다. 넷째, 피해자가 수동적 피해자 의식에만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운 변화의 주체자 의식을 가지게 한다. 다섯째, 가해자 남성을 포함하여 사회 구성원들에게 모든 여성이 성적 대상화된 존재가 아니라 온전한 인격과 존엄성을 지닌 한 인간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한다. 여섯째, 젠더·계층·장애·나이·국적 등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인간이라는 급진적 평등성의 인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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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그동안 민주주의는 가정과 회사와 학교 문 앞에서 멈춰 있었다. 우리의 일상이 민주주의 최전선이다. |
계층·장애·인종·성적 지향 등 그 무엇도 차별의 근거가 안 되어야
페미니즘의 궁극적 목표는 ‘여성 중심’이나 ‘남성 혐오’가 아니다. 초기 페미니즘은 ‘여성 대 남성’이라는 이분법적 젠더 의식으로 출발했지만, 현대의 페미니즘은 트랜스젠더나 간성(intersex)의 문제는 물론 계층·장애·시민권·성적 지향·인종 등 인간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교차성 문제를 진지하게 끌어안고 씨름한다. 페미니즘은 젠더를 그 출발점으로 삼고 전개되지만, 궁극적 도착점은 젠더 평등만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계층·장애·인종·성적 지향 등 인간을 구성하는 여타의 근거도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식이자, 모든 이들에게 평등 사회를 이루기 위한 총체적 변혁운동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미투 운동이 페미니즘과 연계될 때 다양한 형태의 불평등·차별·배제의 구조에 대항하는 저항운동이 되며, 모든 인간의 평등성을 제도화하고 실현하기 위한 성숙한 민주주의 운동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