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북한-미국 '역사적 도박', 어떻게 볼 것인가? - '팍스 코레아나'

일취월장7 2018. 3. 14. 10:08

북한-미국 '역사적 도박', 어떻게 볼 것인가?

[기고] 남북정상회담과 한반도 평화운동


남북정상회담 4월 발표 이후 한 유력 일간지 머리기사를 보면 입에 쓴 물이 고인다. '북한 정부가 약속을 지키겠냐', '기만술일 뿐이다', '속아서는 안 된다' 등이 요지다. 미국이 북한에 지키지 않았던 그 무수한 약속에 관해서는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다. 그러나 고(故) 리영희 선생이 강조했듯 "미국이 조약을 지킨 일을 단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

일부 언론과 몇몇 정당의 '기만술'은 그렇다 치자.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그런데 "험악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 납작 엎드린" 조선 특사 운운하면서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유하는 것은 또 뭔가. "미투 운동에 무사한 거 보니 다행"이라는 어느 당 대표의 환한 웃음을 대했을 때의 역겨움이 또다시 몰려 왔다. '이제 한반도에 훈풍이 부는 건가' 하며 평화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마음에 작정하고 초를 칠 모양새다.

미국의 격월간 외교전문지 <포린폴리시>의 에드워드 레드왁 같은 강경파는 '대북 정밀폭격'을 은근히 추천해 온 보수 언론의 '북한악마 불신지옥' 재생 구간 반복은 또 어떤가. 이제는 제발 '묵음' 처리됐으면 좋겠다. 중동을 쑥대밭으로 만든 미국에는 박수치면서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거품을 무는 이들에게 나는 '그만 좀 도발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들이 지켜야 할 것은 고공 행진하는 강남 집값이고, 유지해야 할 것은 낮은 최저임금이며, 이들의 금과옥조는 한미일 군사동맹뿐이다.

솔직히 남북정상회담이 한반도 평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기대하기엔 이르고 암초도 여럿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 최고 당국자의 방문이 가져올 심리적 변화는 매우 클 것이다. 특히 북한도 보통국가 중 하나라는 인식이 가져올 변화는 적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신발 끈을 동여매고 투쟁을 준비할 때마다 북한을 핑계 댔던 '한국판 매카시즘'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한다.  

▲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한국을 국빈 방문했다. ⓒ청와대


대북 제재는 야만이다  

이제 미국이 답할 차례다. 대북특사가 평양을 가는 날, 북한에 별도의 제재안을 발표한 트럼프 행정부에게 공이 넘어갔다. 그런데 '라켓을 쳐야 할' 트럼프는 무역전쟁으로 정신이 없다. 캐나다, 독일, 영국에 휘두르는 관세 전쟁이 그것이다. EU 집행위원장 장클로드 융커는 '우리도 트럼프와 똑같은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위스키와 의류 등에서 보복관세로 응수했다. 트럼프 행정부 내 균열 수준이 예사롭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야말로 시간을 벌기 위해 전향적 모드를 취할 수 있다. 물론 간간이 '군사적 옵션' 운운하고, 중국을 압박하는 각종 군사훈련 및 조치(미 항공모함, 43년 만에 베트남 다낭에 입항)을 취하면서 말이다.  

더욱이 러시아 푸틴 대통령이 신형 핵미사일이 미국 플로리다에 떨어지는 동영상을 공개하고 중국이 전년 대비 8%니 군사비를 증액하려는 지금(미국은 13% 증액) 지금, 북한 핵은 강대국의 지정학적 위기관리 능력을 시험하는 '필수 과목'이 됐다.

중국 및 러시아와 미국 사이의 긴장이 갈수록 점증하는 상황에서 '북핵 문제'는 간단하게 처리되기 어렵다. 1994년 북·미 제네바 합의 당사자인 로버트 갈루치 전 미국 북핵 대사는 '남한 당국자 말만 듣고는 알 수 없다'며 극도의 신중론을 편 까닭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높지만, 동아시아 주변의 긴장이 점증하는 현 상황의 모순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때다. 

무엇보다 '평화운동'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각종 위선들(정예 시설만 폭격하는 '외과수술식 공격론', '경제 제재는 독재를 제어한다', '북한 인권을 위한 압박'이라는 주장)을 속 시원하게 폭로해야 할 것이다. 특히 경제제재가 마치 '평화의 보검'인 것 마냥 '기승전-제재'를 되뇌는 것에 침묵해서는 안 된다. 북한 주민 피해 없는 스마트한 제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난해 말 이후로 러시아와 중국도 대북 경제제재에 실질적으로 합세해서 대북제재 수준은 북한 주민들의 삶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EU의 이중용도(Dual Use) 물품 규제 조항 때문에 중요 화학 약품의 북한 반입이 불허돼 기초적인 의료기기와 의약품조차 제재 대상 목록에 추가되고 있다.  

한 유엔 전문가 패널은 지난해 2월에 공개된 유엔 보고서에 "북한 주민 중 1800만 명이 영양 문제 등을 안고 있다"고 주장했다.(<유엔안보리의 대북제재레짐>(정은숙 지음, 세종연구소 펴냄) 95쪽) 국제적십자사는 올해 2월 발표한 '북한 A형 인플루엔자 발병 비상조치계획'에서 "유감스럽게도 제재 조처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계절성 인플루엔자 예방접종을 받을 수 없었다"고 했다.  

북한 동포의 지난해 겨울은 참으로 혹독했을 것이다. 여러 번 지적됐듯, 이라크에서는 경제 제재 때문에 죽은 사망자가 미국과 이라크 전쟁 전사자보다 더 많다. '북한 정권과 주민을 분리할 수 있는 스마트한 제재'는 위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정밀타격, '코피'만 터뜨리기, 스마트 타격이 희대의 세계적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이미 이라크와 수단, 세르비아 폭격 등에서 입증됐다. 이란, 이라크, 수단 등에서 제재 조치가 정치·군사적 긴장을 고조시켰다는 역사적 경험은 이미 수두룩하다.  

평화운동의 과제  

한반도 평화운동의 어깨가 무겁다. 4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 주변 정세의 최강 한파 시기가 드디어 지나갔다는 관측도 무성하지만, 주한미군사령관이나 백악관 안보보좌관으로 거론되는 인물 모두 대북 정책의 매파 중 매파다.  

강대국의 거짓 논리를 조목조목 살피며 남북한 당국 모두로부터 독립적인 평화운동을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특히 문재인 정부가 미국의 군사주의에 편승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4월 남북 정상회담과 5월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미국의 군사주의와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열리는 박인규 <프레시안> 이사장의 강연이 기대된다. 강연은 3월 14일 수요일 오후 7시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2층에서 열린다.

강연은 사드 철회를 외치는 소성리 주민들을 위해 '반전평화연대(준) 페이스북'에서 생중계될 예정이다.(바로 가기 : https://www.facebook.com/AntiWarPeaceSolidarityInKorea/)



'팍스 코레아나'

[다른백년 칼럼] 남북·북미 정상회담, 그리고 우리가 갈 길
2018.03.13 17:56:03
"이렇게 잘 나가도 되는 거예요?" 요즘 전화나 sns를 통해 받는 질문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곧 한다더니(3월 6일 평양 발 뉴스), 이제 북미 정상회담도 목전에 왔다(3월 9일 워싱턴 발 뉴스). 질문에 붙는 말이 있다. "갑자기 너무 잘 풀리니까 어쩐지 불안하네요…" 뒤에 붙은 무언, 침묵이 꽤 심각하게 들렸다.  

믿기지가 않아서였겠다. 작년 하반기 내내 북미 간에 오간 그 험악하고 아슬아슬했던 막말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뿐인가. 평화의 물꼬가 트이는가 싶었던 평창 올림픽 기간에도 펜스 부통령 등 미국 정부 관계자들은 북 대표단에 대해 '투명인간' 취급과 '코피(bloody nose) 전략' 으름장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이렇게 바뀔 수 있나. 그렇다 보니 왠지, 뭔가, 불안하다는 것이다.  

난 웃으며 "좋은 게 좋은 거 아닙니까. 자신을 가집시다."라고 답한다. 분명히 기분 좋게 웃을 일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이따 밝히기로 하고, 우선 놀랄 일 하나를 더 들어보자. 지난 토요일(3월10일) 조선일보는 "트럼프는 북한과 수교하고 김정은은 핵 폐기하라"는 제목의 사설을 올렸다. 특히 마지막 문단은 인용할만 하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북한과 미국·일본의 수교로 북이 국제사회의 정상적 일원으로 나서고 북한 체제 안전은 유엔과 한·미·북·중·러 등 동북아 관련국이 모두 참여하는 안전보장 체제로 푸는 것이다. 북이 핵만 버리면 이 세계에 북을 공격할 나라는 하나도 없다. 이 경우 대북 제재 해제와 국제사회의 경제 지원으로 북한의 경제적 어려움은 단기간에 크게 개선될 수 있다. 김정은이 핵을 버리고 미·북 수교와 제재 해제를 얻는 것이 살길이라는 전략적 판단을 내리길 바랄 뿐이다.  

그 동안 모든 문제에 대해 북에 가장 적대적이었던 조선일보고, 그 사설이다. 그 조선일보가 "북한과 미국·일본의 수교"를 주장하고 "동북아 관련국이 모두 참여하는 북한 체제 안전보장"을 말하다니! 상전벽해로다! 가히 '역사적인 사설'이라 치하해주고 싶다.  

물론 북이 궁극적으로 핵폐기를 결단할 정도의 확실한 체제보장이 이뤄져야 한다. 이를 위해 두 가지가 분명해야 한다. 하나는 북미, 미중 관계의 장기적 안정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를 가능하게 할까? 남북 양국 간 두터운 신뢰에 기초한 평화공존체제, 즉 한반도 양국체제의 정착이다. 그것이 핵심이다. 그 길로 가는 첫 고리가 대한민국이 주도하여 성사시키는 북미·북일 수교다.   

'다른백년'이 출범 이후 줄곧 주장해 온 바다. 이제 조선일보조차 '다른백년'의 합리적 주장에 공감하게 된 것이라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싶다. 부디 일회성 주장으로 그치지 말고, 조선일보의 사시(社是)로 확정해주기 바란다.  
 
조선일보의 이 입장이 평지돌출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그 동안 '한반도 양국체제'는 이미 1991년 남북한 유엔동시 가입에서부터 싹이 트기 시작했음을 밝혀왔다. 그때 한국이 러시아, 중국과 수교한 것처럼 북도 미국, 일본과 수교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남북기본합의서도 그런 취지에서 채택되었고, 그 정신에서 92년에는 '한반도비핵화(남북)공동선언'도 나왔다. 합리적 보수라면 당연히 이 취지를 이어 받아야 한다.   

이제 조선일보까지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환영하는 대열에 나섰으니 "지금 세계에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아베와 홍준표 딱 두 사람뿐"이라는 모 정치인의 재치있는 코멘트는 정곡을 찌른 말이다. 여러 나라가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자기나라를 제공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단지 북미 간, 남북한 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평화의 문제임을 온 세계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러한 세계적 경사에 진심으로 일익을 맡고 싶은 것이다. 이제 마지막 남은 아베씨와 홍씨도 속 보이는 쪼잔한 짓을 그만하고 세계적 경사를 환영하는 세계인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간곡히 바란다.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된 큰 흐름을 읽어야 한다. 너무 잘 풀리는 것 같아 불안한 이유는 사태의 흐름을 짧은 시각, 짧은 기억 속에서만 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자. 

작년 북에서 수폭 규모의 6차 핵실험을 하고, 그 전후로 연이어 ICBM 실험을 감행했을 때, 그리고 미국에서는 정말 금방이라도 전쟁이 벌어질 것처럼 위협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부가 북·미를 향해 대화와 평화를 내세우고 요지부동 밀고나갈 수 있었던 힘, 그 지속성, 일관성은 어디에서 왔을까?  

거꾸로, 지금 정부가 아니라 박근혜 정부가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작년과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면 대대적인 반북·종북 소동이 정말이지 요란하게 벌어졌을 것이고, 그 결과 박근혜가 그토록 꿈꾸었던 제2의 유신이 진짜 현실이 될 수 있었다. 지금과 같은 남북·북미 정상회담은커녕 평창 올림픽의 북한 참가도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니 평창 올림픽의 정상적 개최조차 불투명했을 것이다. 이미 그 때 한반도는 부분적이든, 전체적이든 전화(戰禍)에 말려들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난 1년여 대한민국 외교는 바른 방향으로 잘 왔다. 길이 멀고 험하더라도 갈 방향을 정확히 알고 있으면 된다. 좀 돌아가더라도 찾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정부가 왜 어떻게 그렇듯 '물가에 선 나무처럼' 흔들림 없을 수 있었던가? 믿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듯 옳다고 믿는 방향으로 밀어주는 거대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2016~2017년 촛불혁명의 위대한 힘이다.  

큰 문제일수록 큰 변화를 못 읽을 수 있다. 촛불혁명의 실체적 존재감은 시종 지지부진하다 실패로 끝난 6자회담 5년과 지금 상황을 비교해보면 알 수 있다. 국제관계상 당시와 지금은 여러 기본 변수들에서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결정적인 차이는 단 하나, 대한민국 촛불혁명의 동력이라는 새 변수다. 북의 핵과 발사체 수준이 높아졌다는 점 그리고 미국의 새 정부가 기존의 미국 대외정책 패턴을 어떤 식으로든 바꿔보려고 한다는 점도 물론 달라진 점이다. 그러나 그 변화들은 그 동안 트럼프-김정은 충돌에서 보아 왔듯 긍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오직 대한민국 민의의 가히 혁명적 변화, 그리고 그러한 민의를 충실히 받드는 새 정부의 출범만이 이러한 변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킬 힘으로 작용했다.  

정상회담은 준비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가 더욱 중요할 것이다. 정상회담은 상징적 큰 합의 정도가 나오면 된다. 북이 한미동맹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 등을 요구할 것이라는, '미리 재 뿌리기' 식의 추측 보도들이 나오고 있는데,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미 94년 북핵 위기 시 김일성과 카터가 만났을 때, 김일성 자신이 그런 주장을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북에서 김일성-김정일의 유훈(遺訓)이란 신성한 것이다. 북미든 남북이든 상호 불신과 의혹을 남길 요구를 들고 나올 이유가 없다. 그보다는 남북·북미 관계가 정상화됨으로써 생기는 장기적 이점에 당사자 모두가 집중할 것이다.  

한국정부가 집중해야 할 점은 남북 평화관계를 장기적 체제(system)로 굳히는 데 있다. 남북 간의 깊고 두터운 신뢰의 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남북 간 신뢰에 균열이 가면 북미·북일 수교는 물 건너간다. 그렇다면 '남북 간의 깊고 두터운 신뢰'의 핵심은 무엇일까? 남북 상호의 주권과 존재를 확실히 인정해주는 데 있다. 바로 양국체제다. 양국체제만이 남과 북 주권의 존립을 장기적·안정적으로 보장해준다. 실은 미국의 북 체제보장보다 더 실질적인 요점이다. 양국체제가 확실히 굳혀지고 있다는 믿음이 생길 때 북도 북미·북일 대화에 보다 큰 자신감과 믿음을 가지고 나설 것이다.   

한 동안 존재하지 않았던, 아니 90년대 초반 노태우 정부 북방정책 시 잠깐 반짝했을 때를 빼곤 도대체 제대로 존재했던 적이 없었던, 한국 외교가 갑자기 세계적 각광을 받고 있다. 이어질 남북·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진다면, 세 나라 정상이 올 노벨 평화상의 공동수상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지난 1년간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줄곧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견지했던 쪽은 오직 대한민국 정부였다.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즐거운 변화 속에서 필자는 '팍스 코레아나(Pax Coreana)'를 생각해본다. 필경 이 말에 물음표를 다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 같다. 팍스(Pax)라니? 그건 힘에 의한 평화, 초강대국, 제국들이나 하는 폭력적 평화 아닌가? 우리 코리아가 그런 식의 팍스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맞다.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부터가 그러했다. 그 계열의 팍스 브리타니카, 팍스 로마나(Pax Romana)가 다 그러했다. 모두 힘과 정복을 전제한 평화였다. 제국에겐 평화였으되 약소국엔 지극히 괴로운 세월을 감내해야 했던 팍스였기도 하였다. 

동양에도 팍스가 있었다. 세계사상 가장 영토가 넓었던 팍스는 바로 몽골 대제국 시대, 즉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였다. 동양에 몽골제국만 있었던 게 아니다. 진시황의 통일 이후의 중화제국, 팍스 시니카(Pax Sinica) 역시 그렇다. 한때 일본도 제국을 꿈꾸었으니 팍스 야포니카(Japoinca)였다 부를 수도 있다. 그런 동쪽의 팍스 역시 힘과 정복을 전제한 평화였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럼에도 팍스의 주체가 되었던 나라들, 그리고 그 후예들은 하나 같이 자신들이 인류문명에 큰 기여를 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주변에서 복속해야 했던 나라들에서는 사정이 결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팍스 코레아나'가 더욱 특별하다. 우선 기존의 모든 팍스가 그랬던 것처럼 '팍스 코레아나'도 분명 세계평화를 만들어낸다. 지금 남북·북미 정상회담부터 세계평화에 기여하는 바가 명백하지 않은가. 그러나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한반도 양국이 평화공존체제를 이루어, 미중, 중일 간의 긴장과 갈등을 풀어간다면, 이것이 바로 팍스 코레아나의 진면목일 것이다. 한반도 발 동아시아 데탕트, 한반도가 주도하여 이룩해가는 세계평화다. 더구나 폭력의 절대적 반대명제인 촛불혁명, 즉 순수한 평화의 힘, 위력으로 말이다. 

또 하나 '팍스 코레아나'가 특별한 것은, 그 '팍스'는 코리아 내부의 깊은 폭력적 분열과 적대의 상처를 성숙하게 이겨낸 팍스일 것이기 때문이다. '팍스 코레아나'의 시작은 한반도 양국체제다. 한반도 양국체제란 서로를 부정하고 적대하면서 처절한 전쟁을 벌였던 남과 북이 서로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것이다. 한반도 내부에서 고난 속에서 싹튼 성숙한 평화와 공존의 힘이 세계평화의 밀알이 된다.  

한국전쟁(Korean War)은 힘 대 힘의 극한 상황, 극도의 시련의 시간이었다. 그 시간은 2차대전 이후 3차 세계대전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순간이기도 하였다. 다시금 우리는 기로에 서 있다. 과연 힘 대 힘을 신봉하다 또 다시 세계 3차대전의 불쏘시게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오직 평화의 위력으로 세계평화의 선도자가 될 것인가.  

기존의 제국 중심의 팍스(Pax)의 세계사에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진정으로 평화로운 팍스의 시대가 가능한가. 다른 어느 곳이 아닌 바로 이곳, 코리아에서 열어갈 길이 바로 그것 아닌가. 이 길을 필자는 '팍스 코레아나'라 부르고 싶다.  


"김정은, 트럼프에 미군철수 요구 안했을 것"
[정세현의 정세토크] 광폭행보 보이는 김정은…속내는?
2018.03.14 15:05:28

평창 동계올림픽 이후 시험대에 오른 문재인 정부의 외교가 일단은 합격점을 받는 모양새다.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수석 특사로 하는 대북특사단이 남북 정상회담 소식을 전한 데 이어 북미 정상회담을 이끌어내는데 적잖은 역할을 수행하면서 북핵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미국과 북한이 이른바 '말폭탄'을 주고 받으며 한반도 전쟁을 언급했던 것과 비교해보면 가히 '격세지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게 된 배경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북한의 변화를 주요한 요인으로 꼽았다.

정 전 장관은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이 주도한 압박과 제재가 북한에 큰 고통을 줬고, 이 때문에 북한이 굴복하고 나온 것이라고 해석한다. 물론 압박과 제재가 북한에 경제적으로 고통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게 김정은으로 하여금 지금과 같은 광폭행보를 하게 만든 유일한 원인도 아니다"라며 "이보다는 북한이 자신들의 계획된 일정에 맞추려다 보니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는 "올해 북한은 오는 9월 9일 70주년 정권수립 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북 정상 간 만나는 그림이 필요하다"며 "2017년에는 미국이 대응할 수밖에 없는 정도로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시켜 협상력을 키우고 그 이후인 올해부터는 적극적으로 남북관계도 풀고, 필요하다면 미국과도 직접 협상하겠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관측했다.

정 전 장관은 "김정은 정권은 출범 이후 '핵-경제 병진노선'을 표방하면서 핵 능력 고도화에 주력했다. 북한 입장에서는 그동안 갖은 압박과 제재를 받으면서 핵무력을 완성했으니 이제 정책 방점을 경제에 찍어야 하는 상황"이라며 경제적인 요인도 작용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만약 경제가 좋아지면 김정은의 북한 내 정치적 지위는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고 체제를 굳건히 할 수 있다. 그러려면 북미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일단 남북관계부터 풀고 이를 추동력으로 삼아서 미국과 관계를 확실하게 열어나가자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미북 간 협상을 통해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노린 것 아니냐는 일부의 지적에 대해 정 전 장관은 이미 1992년부터 북한은 주한미군을 철수하지 않아도 된다는 메시지를 미국에 전달했다면서 "비핵화만 선대의 유훈이 아니라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미국과) 수교하자는 북한의 요청 역시 김정은 기준으로 보면 선대의 유훈"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지난 13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프레시안 : 지난 5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단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방문한 이후 수석 특사였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만나 북미 정상회담 소식을 전했습니다.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5월 북미 정상회담까지, 한반도 정세가 예상보다 굉장히 빨리 변하고 있는데요. 2018년이 시작된지 불과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같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동력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정세현 : 북한이 전향적으로 움직였다는 것이 주요한데요. 트럼프 대통령은 본인이 주도한 압박과 제재가 북한에 큰 고통을 줬고, 이 때문에 북한이 굴복하고 나온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물론 압박과 제재가 북한에 경제적으로 고통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게 김정은으로 하여금 지금과 같은 광폭행보를 하게 만든 유일한 원인도 아닙니다. 이보다는 북한이 자신들의 계획된 일정에 맞추려다 보니 적극적인 자세로 임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지난 2월 10일 평창 동계올림픽 계기 남한을 찾은 김여정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에 남북 정상회담 제의가 있었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은 여건을 만들어 나가면서 회담을 성사시키자고 했습니다.

거기서 말하는 '여건'이라는 것은 북핵 문제 해결의 전망이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정서나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때문에 감히 남북 정상회담을 들고 나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이같은 반응에 당시 북한의 고위급 대표단 일행은 북으로 돌아가기 전, 문재인 대통령이나 남측 고위급 인사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말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요청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본인들이 계획했던 일정대로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하거든요.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수석 특사로 하는 특사단이 지난 5일 평양을 방문했고, 이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비핵화 문제에 대해 상당히 전향적인 언급을 했습니다. 이는 남한이 비핵화 문제가 걱정된다면 그 문제에 대해 미국이 북미 관계 개선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확실한 메시지를 주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시간을 4월 말로 제시한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입니다. 북미관계를 빨리 개선시키기 위해서 남북 정상회담이 빨리 당겨진 셈이죠.  

그럼 북한은 왜 이렇게 서두르는 것일까요? 올해 북한은 오는 9월 9일 70주년 정권수립 기념일을 성대하게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미북 정상 간 만나는 그림이 필요합니다.  

지난 1년 동안 북한의 움직임을 다시 살펴보면 국제사회의 압박과 제재가 계속되는데도 불구하고 핵과 미사일 능력을 막무가내로 고도화시켰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험한 말이 나왔지만 북한은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지난 한해를 미국과 소위 '담판'을 짓기 위해서 남북 교류 등 모든 것을 중지하고 핵과 미사일로 역량을 집중시키는 한해로 사용했습니다.  

즉 2017년에는 미국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미국이 대응할 수밖에 없는 정도로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시켜 협상력을 키우고 그 이후인 올해부터는 적극적으로 남북관계도 풀고, 필요하다면 미국과도 직접 협상하겠다는 구상인 셈입니다.

그래서 북한은 지난 11월 29일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하고 난 뒤 올해 1월 1일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가 나오기까지 한 달 정도를 대남 및 대미 차원에서 어떤 전략을 구상할 것인지를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연구한 것 같습니다.  

실제 지난해 12월 22일 노동당 세포위원장 대회에 당연히 배석했어야 할 리수용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과 김영철 당 중앙위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 두 명은 각각 대미, 대남 관련 총책이지요.

김정은 정권은 출범 이후 '핵-경제 병진노선'을 표방하면서 핵 능력 고도화에 주력했습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그동안 갖은 압박과 제재를 받으면서 핵무력을 완성했으니 이제 정책 방점을 경제에 찍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만약 경제가 좋아지면 김정은의 북한 내 정치적 지위는 반석 위에 올라설 수 있고 체제를 굳건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려면 북미 관계를 개선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일단 남북관계부터 풀고 이를 추동력으로 삼아서 미국과 관계를 확실하게 열어나가자는 생각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미국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갖춰 놓고, 이를 가지고 한국을 이용해 미북 대화로 건너갈 수 있는 다리만 생기면 그 힘이 미국과 협상 과정에서 하나의 카드가 되는 것이죠. 북한은 이 카드로 평화협정도 끌어낼 수 있고, 미북 수교와 경제적 지원 등 국가 핵무력 완성을 아주 비싼 값에 팔 수 있다는 계산이 선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이 현재 나름대로 경제 특구를 지정해 놓고 있지만 이게 돌아가려면 밖에서 투자가 들어와야 합니다. 지금은 간판만 걸려있지 제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거든요. 그런데 외부 투자를 받으려면 미국과 수교가 필요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번에 일을 추진한 건데, 김정은이 야심차게 일을 벌리긴 했지만 사실 적잖이 부담도 있을 겁니다.

▲ 지난 5일 대북특사단 수석 특사 정의용(왼쪽)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평양 노동당 국무청사에서 김정은(오른쪽) 국무위원장에게 문재인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며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


프레시안 : 8월 중순에 시작되는 또 다른 한미 연합 군사 훈련인 을지 프리덤 가디언(UFG)을 고려해서 정상회담 일정이 앞으로 당겨진 것은 아닐까요?

정세현 : 이미 김정은 위원장이 지난 5일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특사단을 접견하며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해 이해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군사훈련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항공모함이 2대씩 들어오고 괌에서 전략폭격기가 북한의 영공을 지나가는 등 엄청난 규모의 전략자산이 왔다갔다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정도가 아니라면 괜찮을 겁니다. 특히 키리졸브의 경우 시뮬레이션 훈련이기 때문에 북한이 체감하는 위협의 수준이 좀 다릅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북한에서는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전혀 보도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무반응으로 일관하는 걸까요? 

정세현 : 그건 북한 정권의 특성입니다. 북한은 중대한 정책 전환을 하기 전에 일종의 폭풍전야처럼 조용한 행보를 보입니다. 그 사이에 사전에 정지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죠. 

그리고 북한은 정부가 방침을 정해서 인민들에게 통보하면 되는 곳입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에 배석했던 황원탁 당시 외교안보 수석이 '주한미군에 대해 생각이 바뀌었다는데 공개적으로는 왜 아직도 미군철수를 주장하냐?'라고 물어보니 김정일 위원장이 '우리 인민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민들은 일단 거기까지 알고 있으면 되는 거다'라는 식으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과정을 소상하게 알려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죠.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김정은-트럼프 만남이 이뤄지면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를 잘 봐줘서 만나게 됐다는 식으로 선전할 겁니다. 

프레시안 : 예정대로라면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보다 먼저 열리게 됩니다. 남북 간에 조율할 사항이 필요해서 이런 일정이 잡힌 걸까요?  

정세현 : 문재인 대통령이 언급한대로 한국이 '한반도 운전자'가 되려면 이런 과정이 자연스러웠을 겁니다. 문 대통령은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 관계 개선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한국이 역할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여기에 입각해서 보면 남북대화를 먼저 열어서 남북이 서로 입장을 조율하고 이후에 북미대화 일어날 수 있도록 순서를 밟아 나가는 것이 맞습니다.

물론 북쪽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구상을 몰랐을 리 없었겠죠. 그런데 그렇게 되면 북미대화의 일시가 늦어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북미대화를 빨리 하려면, 미국을 끌어낼 수 있는 선물을 건네야 합니다. 그래서 정의용 수석 특사에게 선물을 건넨 것으로 보입니다.

김정은 위원장의 속도를 보면 아버지인 김정을 국방위원장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김정일은 통 큰 정치, 광폭 정치라고 말을 하긴 했지만 사실 굉장히 신중하게 접근하는 스타일입니다. 그에 비해 김정은은 할아버지인 김일성 스타일을 완전히 닮았다고 할 수도 없고, 아버지인 김정일보다는 훨씬 용기있게 나가는 것 같습니다.  

김정은을 그렇게 만든 것은 압박과 제재 속에서도 북한 경제는 굴러갔다는 점, 어찌됐든 세 끼는 먹고 살 수 있게 해줬다는 점, 탕수육은 못 먹었지만 짜장면은 먹은 정도라는 부분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런 와중에 핵무력을 완성했기 때문에, 즉 아버지 때 없던 것이 생기기도 하면서 김정은이 용감해진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말로만 '빅 딜'이라고 했지만 이제 진짜 '빅딜'할 수 있는 카드가 있으니 세게 나가보자는 거죠.  

프레시안 : 그렇지만 일부에서는 북한이 남한이나 미국과 대화에 적극적으로 응한 것은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면서 계속 북한에 대한 압박과 제재를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정세현 : 압박과 제재로만 일관하면 한반도의 긴장은 고조됩니다. 그러나 무기 시장 관리 측면에서는 유리한 환경이 조성됩니다. 현상유지를, 아니면 좀 더 긴장이 높아져야 장사가 잘됩니다. 이런 계산을 머릿속에 넣어놓고 갖가지 이론으로 이 속내를 감추는 것이죠.

남한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은, 미국의 무기 시장의 유지 관리‧확대라는 거대한 전략도 없이 그냥 습관적으로 또는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거둘 수 있는 일종의 국내 정치적 이익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런 주장을 덩달아서 읊어대고 있는 것으로 보이구요.

▲ 지난 8일(현지 시각) 미국을 방문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면담한 정의용(가운데)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백악관에서 미북 간 정상회담 소식을 발표하고 있다. ⓒ청와대


프레시안 : 일단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정상회담보다 먼저 열리는데, 남북 간에 합의할 수 있는 내용은 무엇이 있을까요?  

정세현 : 정상회담이 열리면 북한이 개성공단이나 금강산 관광 재개 등은 당연히 요구할 겁니다. 그런데 그걸 뛰어넘어 좀 더 통 크게 협력하자는 이야기를 할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대북제재 문제를 언급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북 정상회담에서 6자회담 재개가 논의되고 실제 회담이 열리면 북핵 문제로 생긴 제재는 유보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조건이 충족돼야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준비해서 북한을 설득해야 합니다. 북한에서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라도 빨리 비핵화 프로세스 시작하자고 해야 합니다.  

아마 남북 정상회담에서 나올 수 있는 합의는 핵문제 해결과 군사적 긴장 완화 등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빠른 시일 내에 핵문제를 국제적인 대화의 방식으로 풀어가기로 했다는 정도가 될 겁니다. 좀 더 붙이자면 북한은 검증 등의 문제에 대해 성실하게 협조하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나올 수 있겠죠. 그런데 핵 문제와 관련해 이것 이상의 문구는 나오기 힘들 겁니다.

북한, 주한미군 철수 요구하지 않았을 것 

프레시안 : 미국과 남한 일부에서는 북미 간에 벌어지는 빠른 움직임을 두고 주한미군 철수와 한미동맹 해체를 우려하기도 합니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이 이걸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도 나오는데요.  

정세현 : 김정은이 트럼프한테 미군 철수 요구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미군 주둔을 용인하겠다는 내용일 겁니다. 김정은이 우리 특사단에게 한미 연합 군사 훈련에 대해서도 이해한다고 말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북한은 대신 미국에 수교를 요청했을 겁니다. 비핵화만 선대의 유훈이 아니라 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교를 해달라는 북한의 요청 역시 김정은 기준으로 보면 선대의 유훈입니다.  

물론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한때는 북한의 대미, 대남 전략의 '주제가'였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북한은 미군 철수하고 남북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안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받아들이지 않았죠. 당시에는 미군을 철수시키면 당장 남한도 공산화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북한은 미군 철수를 전제로 한 남북 평화협정 체결이 거절당하고 난 뒤에 이 이야기를 다시 꺼내지 않았습니다. 이후 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철폐, 남북 연방제 수용 등의 선전전을 계속했죠. 그러다가 1973년 3월 25일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미국 의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편지에는 미국과 북한이 직접 협상을 통해 평화협정을 체결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건 베트남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었죠.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이 제안 또한 거절했습니다. 미국에게 베트남과 한국이 가지고 있었던 전략적 가치가 달랐기 때문이죠. 베트남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략적 가치가 높은 한국에 '평화협정 이후 주둔 미군 철수'라는 베트남의 방식을 적용할 수 없었던 겁니다.

이런 선례가 있던 상황에서 1980년대부터 동구권이 흔들리기 시작하니까 북한은 자기들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에 합의하고 유엔에도 가입했습니다. 이렇게 해도 불안했던 김일성 정권은 김용순 당시 노동당 국제부장을 미국에 보내 주한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지 않을테니 자기들과 수교하자고 제안했지만 미국으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미국과 수교를 거절당한 북한은 이후 핵을 개발하면서 협상력을 서시히 키워야겠다는 전략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에서 빌 클린턴 대통령이 당선됐습니다. 그래서 1994년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죠. 합의가 이행되던 와중에 난데없이 한국 정부는 국내정치적 필요 때문에 1996년 4월 제주도에서 김영삼-빌 클린턴 대통령이 남북이 평화협정을 맺고 미국, 중국이 이를 보증하는 4자회담을 제안했습니다.  

이건 당시 좋지 않았던 한미 관계가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한미 간에 북핵과 KEDO 경수로 건설사업 협상 과정에서 굉장히 불편한 상황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한 뒤 한국은 들르지 않고 중국으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그 시기에 한국에서는 총선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들르지 않고 일본과 중국만 방문한다면 집권 여당에 불리한 상황이었죠. 그래서 어떻게든 클린턴 대통령이 한국을 찍고 가도록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4자회담 제안입니다.

어쨌든 이 제안이 나온 뒤에 북한은 4자회담에서 누가 주역이고 누가 조연인거냐 라며 미국에 이를 설명해달라고 했습니다. 북한이 이런 설명을 요구한 이유는 4자 속에서도 미북 간 직접 회담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이듬해인 1997년 4자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은 여전히 미북 직접 협상과 미북 평화협정 체결을 원했죠. 그러다 보니 회담은 접점을 찾지 못했고 김대중 정부로 넘어오면서 사실상 4자회담은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2000년 남북 정상회담 때 북한은 1992년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하는 조건으로 미북 간 수교를 이끌어내는 협상을 추진하자고 전략을 세우고 이를 남한에 부탁하기도 했습니다.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냉전이 끝난 이후 남한에 있는 미군 주둔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이 바뀌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주한미군이 동북아에서 안정자 역할을 하고 있으니 이를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미북 정상회담을 주선해 주기도 했구요.  

실제 김정일은 2000년 10월 25일 평양을 방문한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국무장관에게 사실 자신들이 1990년대 이미 미국에 미군 철수와 수교 이야기를 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북한은 당시에도 남한을 이용해 미북 관계를 개선시키겠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북한이 핵 문제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상당히 받고 있지만, 당시보다는 훨씬 커진 협상력을 무기로 가지고 나온 것이죠. 아마 북한은 이번에도 대북 특사단에게 2000년 김정일이 올브라이트한테 했던 이야기와 똑같은 스토리를 트럼프에 이야기할 준비가 돼 있다는 메시지를 줬을 겁니다.  

결국 미국 제도권에서는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우려가 많지만, 북한이 주한미군 철수를 언급할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물론 미국 입장에서는 예전에 북한이 평화협정과 주한미군 철수를 동의어로 생각했었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우려가 나오는 것이겠지만, 냉전 이후에는 북한의 입장이 달라졌습니다.  

프레시안 : 일부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해도 실제 결과보다는 사실상 양측의 탐색전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데요.  

정세현 : 그럴 수도 있지만, 지금 김정은이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릅니다. 또 트럼프 역시 국내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라 가시적인 결과물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국내 정치 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사건을 저지르려는 동기가 있다는 겁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정의용 특사 일행이 전달한 김정은의 메시지를 받으면서 북한의 비핵화 프로세스만 확실하게 만들어 놓으면 본인 재선도 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 10일(현지 시각) 펜실베이니아에서 열린 공화당 후보 지원 유세에서 연설에 나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AP=연합뉴스


물론 장애물은 많습니다. 사전에 실무 협상도 해야 하고 회담 장소, 일정 등등 협의해야 할 것이 한두 개가 아닙니다. 이런 과정에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아서 회담이 어려워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트럼프의 속도전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실무진들이 어떻게 나올지도 문제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처럼 양측이 정상회담 개최 협의 과정에서 틀어질 수 있는 요소는 충분히 많은 상황입니다.  

프레시안 : 북한과 미국 사이에 움직임이 빨라지면서 6자회담 의장국인 중국과 6자 중 한 곳인 일본의 역할이 보이지 않게 됐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정세현 : 북한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살길은 미국과 관계 개선입니다. 미북 수교가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북한은 미국과 일대일로 담판하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한국은 다리를 놓아줄 수 있기 때문에 북한 입장에서 이용가치가 있지만, 중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은 남북관계 개선이 자국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리를 놓아줄 수 있지만, 중국은 남는 장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북한 입장에서 중국을 왜 뺐느냐고 지적할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일본은 한반도 유사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북한을 더 압박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던 곳입니다. 북한이 그런 국가에 미북 관계를 좋게 풀어나가려고 하니 협조해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과 일본, 러시아 등에 현 상황을 잘 설명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예정대로 남북, 미북 정상회담이 이뤄진다면 이후의 비핵화 프로세스는 6자회담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 6자회담이 열렸을 때 중국과 어떻게 긴밀하게 협조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있기 때문에 중국을 상대로 한 상황 설명 또한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