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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일취월장7 2017. 11. 21. 11:18

러시아혁명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올해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되는 해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현지 분위기는 뜨겁지 않지만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부정할 수 없다. 우리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정희상 기자 minju518@sisain.co.kr 2017년 11월 14일 화요일 제530호

11월7일은 20세기 인류 역사를 뒤흔든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11월7일은 현재 대부분의 나라에서 사용하는 그레고리우스력 기준의 날짜이고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25일이어서 10월혁명이라 불린다). 1917년 11월7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당의 노동자 군대가 러시아 임시정부 거점이던 겨울 궁전을 점령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한 공산주의 정부가 탄생했다. 러시아혁명은 러시아를 넘어 20세기 내내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러시아혁명으로 탄생한 소련 체제는 74년 만인 1991년 해체됐다. 사실상 좌초한 혁명으로 귀결된 셈이지만 인류 역사에는 여전히 큰 명암을 드리우고 있다. 지금도 중국·쿠바·베트남·라오스 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헌법 강령으로 못 박고 있다.

러시아 출신 귀화인 박노자 교수(본명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는 러시아혁명 100주년을 맞아 최근 <러시아혁명사 강의>를 펴냈다. 혁명 주역 레닌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혁명 이후 시대를 살아온 박 교수의 생생한 목격담과 경험담이 녹아 있다.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동아시아와 한국학을 강의하는 박 교수는 10월14일 중앙대학교에서 열린 ‘러시아혁명 100주년 학술대회’ 참석차 귀국했다.


ⓒ시사IN 윤무영
박노자 오슬로 대학 교수는 “조선 독립운동사에서 러시아혁명을 기점으로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파’가 쇠퇴하고 러시아혁명처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오면서 민중들이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혁명사 강의>를 펴낸 계기는?

한국에서 러시아혁명 100주년이 별 관심을 끌지 못한 채 지나가버릴 거 같아 우려했다. 한국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러시아혁명사를 강의했는데, 출판사에서 책으로 묶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러시아혁명은 인류 역사에서 교사이자 반면교사니까.

연구자로서 러시아혁명의 당초 목표는 무엇이었고 그 목표가 달성되었다고 보나?


레닌이 말한 볼셰비키 혁명의 목표는 인류의 새로운 역사, 즉 모든 인간이 계급 차별 없이 평등한 주체로 사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그런 역사가 새롭게 시작되지 못했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지 못한 이유는?


혁명의 주체가 보수화되었기 때문이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혁명 성공 직후 상황 논리를 내세워 중앙집중식 통제 국가를 만들어버렸다. 스탈린 체제로 넘어가면서 통제는 더 강화되었다. 당초 혁명이 내세운 민주성은 퇴보했다. 그럼에도 러시아혁명으로 인류가 새로운 ‘발견’을 한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새로운 발견? 구체적인 예를 든다면?


러시아혁명은 시장 자본주의나 대(對)서방 종속이 아닌 방법으로도 얼마든지 자주적 근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인류 역사의 새로운 경험이라 할 수 있다. 혁명 당시 러시아도 크게 보면 제3세계 일부분으로 주변부 자본주의에 머물러 있었다. 러시아는 혁명 이후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었다. 1930년대 소련의 급속한 자주적 근대화 노선을 1950~ 1960년대 중국·북한·인도 같은 나라들이 벤치마킹했다.

ⓒTASS
1919년 5월25일 붉은광장에서 적군 병사들을 향해 연설하고 있는 레닌.
러시아혁명이 남긴 교훈이 또 있다면?

민중운동 과정에서 민주주의가 확보되지 않으면 거창한 명분을 내걸어도 결국은 또 하나의 권위주의 체제가 된다는 점이다.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확보되지 못했고, 그나마 있던 민주적 요소들도 축소됐다. 사실 러시아혁명으로 새로운 권위주의 체제가 완성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권위주의 체제는 자기 파탄의 씨앗을 갖고 있었던 거다. 이것이 바로 러시아혁명 실패가 남긴 인류사의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들어가보자. 러시아혁명이 한국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혁명을 기점으로 연해주, 시베리아 등에 조선인 항일 유격대가 결성되었다. 이 유격대 활동을 계기로 만주 유격대가 결성되었고, 그 유격대 출신인 김일성이 해방 이후 북한을 세웠다. 거시적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을 정하는 데 러시아혁명이 영향을 미쳤다. 항일 독립운동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근본적 변화란 어떤 의미인가?


1910년대 조선 독립운동은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왕조를 다시 세우자는 ‘복벽파’가 많았다. 중국 신해혁명을 모델로 한 ‘민국파’도 있었지만 민국파라도 일제에서 해방된 뒤 독립 공화국 정도만 생각했다. 구체적인 사회상이 없었다. 공화제만으로는 민중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기 힘들었다. 독립 이후 공화제가 됐든 왕조 시대가 됐든 토지를 갖지 못한 민중은 어차피 힘들게 살며 착취당한다는 인식을 떨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다. 민족주의 성향 독립운동 세력도 독립이 되면 러시아혁명처럼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에 민중들이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파 독립운동도 러시아혁명에서 영향을 받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나라를 되찾게 되면 주요 공업시설을 국유화하고 무상교육을 실시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러시아혁명이 좌우를 막론하고 한국 독립운동에 자극을 주고 급진화시킨 결과다. 20세기 내내 러시아에서 일어나는 일과 조선에서 일어나는 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러시아혁명사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와 직결된다.

당시 구체적으로 러시아혁명에 영향을 받은 사례를 든다면?


친일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윤치호와 여운형의 행보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윤치호는 조선사절단으로 러시아혁명 직전 니콜라스 2세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 경험 때문에 러시아혁명이 윤치호의 보수화에 상당히 영향을 준 거 같다. 윤치호는 원래부터 보수적이었지만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자기와 같은 귀족과 대주주들은 땅을 빼앗기고, 재산을 몰수당하는 걸 보고 친일 활동으로 좀 더 적극 돌아선 것이다.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해 트로츠키 연설을 듣고 <모스크바의 인상>이라는 여행기를 썼다. 러시아혁명은 여운형의 독립운동 방향에 영향을 미쳐 그는 1930년대 사회민주주의자가 됐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혁명에 조선인도 기여했나?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하자 일본은 극동 러시아에 군대 10만명 정도를 출병시켰다. 일제 식민 지배를 피해 당시 수많은 반일·항일 고려인(옛 소련 이주 조선인)이 만주와 연해주에 살고 있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혁명 유격대 중에서 고려인이 5000명 정도 됐다. 이들은 러시아혁명을 도우면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고 항일 전선에 뛰어든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됐나?


일본군은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을 몰살시킬 기회만 노리고 있었는데 1920년 ‘니항 사건’이 터졌다. 니항은 니콜라예프스크 시를 말하는데 소련인과 중국인, 그리고 일부 고려인 아나키스트들이 항복한 일본군과 거류 일본인 수백명을 학살했다. 일본은 이 사건의 책임을 고려인들에게 뒤집어씌우고 그 보복으로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서 고려인을 무차별 학살했다.

혁명 이후 스탈린 체제에서도 고려인 강제이주 등 피의 학살과 인권유린이 극심했는데?

스탈린 체제에서 혁명이 보수화되고, 강력한 민족국가를 세우고자 하는 과정에서 볼셰비키 활동가들과 소수민족 활동가들이 대거 숙청되었다. 70만명 가까운 사람이 극형을 당했다. 1937년에는 학살이 극에 달했는데 고려인을 포함해 소수민족에 속하는 이들 약 45만명이 희생당했다. 강력한 민족국가를 세우는 과정에서 소수민족과 활동가들이 국가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할 여지가 있다는 이유였다.

러시아 현지에서 혁명 100주년을 맞는 분위기는?

일부 언론과 학계에서 재조명하는 정도일 뿐 국가적으로 크게 기리는 분위기는 아니다. 그 이유가 재밌는데 푸틴 정권이 혁명을 민감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최근 러시아 여론조사 결과 볼셰비키 혁명이 좋은 의미였다고 보는 사람과 절대적으로 나쁜 일이었다고 보는 사람이 각각 절반으로 나뉘었다. ‘만약에 당신이 타임머신을 타고 1917년으로 간다면 어느 정당에 가입하겠느냐’는 질문에 46%는 볼셰비키라고 답한 반면 나머지 50%는 복벽당, 즉 왕정 복귀를 바라는 정당이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민심이 러시아혁명 지지 세력과 반대 세력으로 양분돼 있다. 푸틴 정권은 어느 쪽이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할 수 있어서 부담을 느끼고 있다.

러시아인은 스탈린에 대해서도 거부감이 심하겠다?


아니다. 오히려 스탈린에 대한 지지율이 60%를 넘는다. 레닌에 대한 지지율은 30~40%에 머문다. 러시아의 부국강병을 이룬 지도자로 스탈린을 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초강대국으로, 미국이 가장 경계할 만큼 위대한 나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스탈린 체제에서는 업적주의와 실력주의로 인재를 등용해 재능이 있으면 신분 상승이 가능했고, 인민의 복지제도가 비교적 잘 갖춰졌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본다.

한국에서 박정희 독재 향수와 비슷한 현상인가?

러시아인들의 스탈린 향수는 한국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 노스탤지어와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북한의 김일성 노스탤지어와도 겹치는 측면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 김일성 시절에는 나라를 위해서 일할 일꾼이라면 누구나 등용되고, 좋은 시절이었고, 다들 비슷하게 잘살았다고 평가하는 것과 비슷하다. 객관적 사실 여부를 떠나 재미있는 현상이다.

러시아 출신 한국학 학자로서 남북한 사이의 역사 인식의 차이가 있다면?


북한은 민중사적 관점이 강하다. 예를 들어 한국은 수공업 역사 같은 것을 취급하지 않는데 북쪽에서는 조선 수공업 역사, 농업기술사, 건축사 이런 것을 아주 깊이 있게 다룬다. 또 한국에서 민란사라 부르는 민중 반란사에 대한 연구도 잘 축적되어 있다. 북한 교과서는 민란 관련 부분을 아주 크게 다룬다. 물론 객관적인 조명이라고 보긴 어렵다. 정권과 관련한 부분은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연구자들도 정해진 도식에 따라 다뤄야 한다. 박근혜 정부 국정교과서도 비슷한데, 그나마 한국 학계는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다.


우리는 여전히 러시아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다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11월 03일 금요일 제528호

1917년 러시아에서 일어난 10월혁명이 올해로 100주년이 되었다. 지난해의 촛불집회와 탄핵 정국에 이어진 조기 대선에 관심을 쏟느라 여력이 없는 건지, 10월혁명으로 눈에 띄는 특집을 마련한 잡지가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주의자들의 거점인 격월간 <녹색평론> 7·8월호에 실린 특집은 특별했다. 이 잡지는 ‘되돌아보는 러시아혁명’이라는 제목으로 박노자, 앨런 우즈, 와타나베 교지의 글을 실었다.

ⓒ이지영 그림

앨런 우즈에게 러시아 10월혁명은 인류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이다. “러시아혁명은 수백만의 남자와 여자들이 인류사상 최초로 착취계급을 전복시키고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의 손에 거머쥐고,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과업을 시작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현대세계로 이끌고, 공장과 도로와 학교를 건설하고, 남자와 여자들에게 교육 기회를 베풀고, 우수한 과학자들을 양성하고, 히틀러를 패퇴시키고, 우주 공간에 최초로 인간을 쏘아 올린 것은 1917년 10월에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내던져진 퇴영적인 러시아의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국유화된 계획경제 시스템이었다. 소련은 후진적이고 반봉건적인 경제로부터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산업국가로 급속히 변신하였다.”

러시아혁명의 성패를 결산할 때, 항상 언급되는 논쟁이 레닌과 스탈린 사이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이다. 10월 혁명의 이상을 옹호하는 이들은 전시와 혁명이라는 어렵고 혼란한 상황에서 레닌이 노동자의 자율성과 당의 민주적 원칙을 지키려고 분투했던 반면, 후계자였던 스탈린은 그렇지 못했다고 선고한다. 이들은 두 사람 사이에 아무런 연속성이 없으며, 스탈린에 의해 혁명이 배반당했다고 항변한다. 딱히 영웅사관에 입각하지 않더라도, 혁명 지도자의 역량과 품성이 혁명의 과정과 향방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인정된다. 하지만 박노자는 레닌과 스탈린이라는 개별 인물에 함몰하는 설명을 피한다.

박노자는 러시아혁명이 프랑스혁명과 같은 궤도를 차근차근 밟아왔다면서 “1920년대 말에 러시아형 급진적 자코뱅 독재는 스탈린 독재로 교체되었다. 궤도 자체는 그렇게까지 다르지 않았지만, 그 기간이 대단히 길었다는 것은 프랑스와의 차이점이었다”라고 말한다. 프랑스혁명 시기의 자코뱅 독재가 보여주듯이 혁명은 혁명의 성취를 온전히 보존하고 완수시키는 데 필요한 급진적 전위의 독재가 필요하다. “‘비상 상황’만이 혁명이 변혁시킨 질서를 착근·고정”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프랑스혁명 당시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역할을 러시아에서는 스탈린이 떠맡았으며,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등장한 나폴레옹에 해당하는 인물이 고르바초프(개혁기)와 옐친(표면적 민주주의기)의 뒤를 이은 푸틴이다.

“긍정적·부정적 교훈 철저히 학습해야”

10월혁명이 일어날 당시 러시아는 현재의 파키스탄보다 뒤처진 사회였다. 스탈린 시기에 러시아는 사실상 부르주아혁명의 과제인 공업화와 도시화, 종교와 국가의 분리, 군사 증강, 보편적 국민·인민 교육의 실시 등을 수행했다. 나폴레옹이 황제에 등극한 이후 프랑스혁명의 몇몇 이상이 나폴레옹 법전에 반영되었듯이, 보수적 독재의 길을 걷는 푸틴 역시 10월혁명의 성취를 다 내버리지 못했다.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무상 의료와 교육은 여전히 유효하며, 제정러시아 시대의 국교 등은 부활하지 않았다. 참고로 러시아에서 2012년 실시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에 대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자(중복 응답). 스탈린(49%), 레닌(37%), 표트르 대제(37%), 푸슈킨(29%), 마르크스(4%) 순서였다. 월터 라쿼의 <푸티니즘> (바다출판사, 2017)에서 이 조사 결과를 좀 더 음미할 수 있다.

이 혁명에 대한 오해는 무척 많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1991년 소비에트연방(구 러시아)이 해체되면서, 러시아혁명의 이상도 영향력도 함께 종언했다는 선동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10월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살고 있다는 증거는 풍부하다. 먼저 매우 기묘하게도 러시아혁명은 초기의 볼셰비키가 낙관적으로 고대했던 것처럼 유럽 핵심부로 혁명이 확산되지 못했다. 서구의 주변부였던 러시아가 그랬듯이, 10월혁명은 서구의 지형을 바꾸어놓기보다 서구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거나 봉건제를 벗어나지 못한 아시아· 중동·인도·라틴아메리카·아프리카의 지도를 바꾸었다.

중국은 10월혁명이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중국공산당은 소비에트를 따라서 비시장적인 경제개발을 통한 근대화를 선택했다. 중국은 자본주의와 세계시장 체제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독자적인 생존이 가능하다는 것을 오랫동안 보여주었다. 소련은 경제와 정치를 아우르는 전면적인 개방을 시도한 나머지 연방이 해체되고 말았지만, 일당독재를 유지하면서 관료 주도 개발주의의 운전대를 놓치지 않는 중국의 경제개방 정책은 미국의 국내총생산(GDP)과 맞먹는 성과를 이뤘다. 또 지금은 김씨 왕조로 변질한 북한을 누구도 10월혁명의 이상 아래 성립한 사회주의 국가라고 말하지 않지만, 번질나게 핵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하면서 동북아 정세를 뒤흔들어놓는 북한도 러시아혁명의 남아 있는 흔적임에 분명하다.

<러시아혁명사 강의>
박노자 지음
나무연필 펴냄
10월혁명은 유럽 핵심부에서 한 차례의 혁명도 성사시키지 못했지만, 한 나라에 혁명 정권을 세우는 것 이상으로 서구 세계 전체를 바꾸어놓았다. 이 분야의 고전인 E. H. 카의 <러시아혁명-1917~1929>(이데아, 2017)에서 인용한다. “소련의 명성은 1929년 가을 자본주의 세계를 엄습한 경제위기 때문에 더욱 높아졌다. 소련이 위기의 최악의 징후 몇 가지를 면하자 이제 어느 국민경제도 시장의 철칙에 맡겨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더욱 커졌다.”

소비에트가 붕괴되자 자본주의 옹호자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최종 승리를 선언했다. 그러나 2008년 세계 금융위기는 자본주의가 주기적인 내적 붕괴의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통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대중에게 실업·빈곤·사회복지 축소·긴축재정· 전쟁과 갈등을 강요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라는 명제가 가장 시의적절한 때는 지금이다. <러시아혁명사 강의>(나무연필, 2017)에서 박노자는 이렇게 청년들에게 권한다. “후기 자본주의 구조에서는 상위 15~20%를 제외하면 다음 세대의 경제 상황은 그전 세대보다 더더욱 악화될 겁니다. 어쩌면 1917년 이전 제정 러시아의 고숙련 노동자들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회라면 새로운 혁명의 파도가 몰아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그러하기에 우리는 러시아혁명이 남긴 긍정적·부정적
교훈을 철저히 학습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과거 속에 미래의 씨앗이 있으니 말입니다.”


"20세기 역사는 러시아혁명 없이 이해될 수 없다"
[러시아혁명 100주년 특별 기획] ① 러시아혁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2017.11.04 11:46:28 
    

인간의 모든 역사가 누군가에 의해, 무슨 이유로든 후대에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사건들은 당연히 그 앞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러시아혁명도 한편으로 1991년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방대한 문서고(archives)가 열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말 이후 보편적으로 확장된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재평가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고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지적을 상기할 만하다.

"요컨대 짧은 20세기의 역사는 러시아혁명과 그것의 직접적, 간접적 결과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상)』 중에서)  

1917년에 극적으로 폭발한 러시아혁명과 뒤이은 소련체제의 성립, 그리고 2차대전을 통해 서구문명이 겪었던 파국적 위기와 구원의 과정은 말 그대로 역설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지상에 나타났으나 그것이 실현한 사회는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가하면 10월혁명을 목도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볼셰비키정권을 용납할 수 없는 야만의 체제라고 전복하려고 했던 유럽의 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는 1941-45년 동안 바로 그 소련인민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파시즘의 군홧발로부터 벗어나고, 결국 20세기 후반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과 그 거대한 세계사적 영향을 모르고서는 지난 세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홉스봄의 지적은 21세기 들어 기존의 서구-미국 중심 자유주의세계의 균열과 국제적 세력균형의 변전(變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914년 시작된 유럽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발했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2월에서 10월로 진전됨에 따라 정치권력과 엘리트의 교체를 통해 사회계급 관계에 극적인 역전을 초래하고, '사회주의'를 깃발로 내세운 새로운 이념국가의 수립을 가져왔다. 나아가 그 체제는 내부적으로 토지혁명에서 공업화, 그리고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사회경제적·문화적 변동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정치혁명을 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고, 나라 밖 국제질서의 구성과 대안적 정치경제체제의 제시라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에 매우 깊고 오랜 충격을 던졌다. 

먼저 러시아혁명은 군주제-농노제, 또는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와 같이 당시까지 서구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정치·경제체제와는 다른 '국가중심 사회주의'라는 인간사회 조직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세계무대에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었다. 전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생산과 분배의 사회적 조직화, 그리고 역시 국가 주도의 인민 생활제도의 편성은 1914년까지 유럽에서 대세를 이루었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는 구조적으로 다른 사회조직 방식이었다. 독립적 개체로서 자신의 이익과 부를 추구하는 인간형은 공동체와 집단 속에서 사회적 평등과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를 당위로 여기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당대 자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대중의 불신을 자초하면서 지독한 불임 현상에 시달리고 있던 20세기 초반 의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이념적·체계적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지배 엘리트와 부르주아들에게는 근본적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혁명의 폭발적 계기와 현실이 강요한 사회주의 이념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전쟁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한 '전시(戰時) 혁명'이요, '전시 사회주의체제'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에서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적·의식적 역량을 통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단계가 도래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했던, 그런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닌이 분석했던바 '세계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터졌던 제국주의시대 혁명이요, 안토니오 그람시가 칭했던바 ''자본(론)'에 반反하는 혁명', 즉 압도적인 농민의 나라에서 폭발한 '피압박 민중·민족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전쟁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기에 편승한 볼셰비키에게 권력장악이라는 호기가 되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러시아 국가성(stateness)의 수호자라는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동시에 '혁명 정권'의 생존과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심대한 위협과 제한을 가한 외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전쟁인 '내전(1918-21년)' 기간에 실험된 '전시 공산주의'는 1920년대 말-30년대 초 강제적 농업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 '스탈린주의'라는 리바이어던의 원초적 체험이요, 다수의 볼셰비키 활동가와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쳤던 청년 세대에게 극히 매력적인 '의지적 사회주의건설' 방식이었다. 그것은 나아가 '제2의 내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업집산화에 대한 농민들의 강렬한 저항과 봉기의 진압을 통한 사회적 안정성의 획득과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의 내부 식민지화 및 농민층의 2등시민화를 정당화해 준 '사회주의 건설' 방식이었다. 최종적으로 '전시 사회주의'로서 소련체제는 2차대전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독일파시스트집단의 침략을 영웅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정치적 정당성을, 내부적으로는 소련인민들의 국민주의적 결속을 결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20세기 사회주의'라고 불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혁명은 그동안 전통적 관점이었던 '부르주아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발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든가, 또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서구의 반공주의 관점을 받아들여 "러시아의 정상적인 근대화 과정을 중단시킨 불행한 사건"으로 보는 것은 둘 다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차라리 그것은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변방의 소수민족 등 피압박민중·민족의 자발적인 "아래로부터 혁명"이 토지혁명과 사회관계의 변혁을 통해 상당 부분 성취되고, 이후에 볼셰비키정권, 특히 스탈린 지도부에 의해 "위로부터 혁명"을 통해 봉인되면서-특히 당대 러시아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했던 농민의 사회적 요구와 노동자들의 기업체 자주관리라는 관점에서-, 국가 정책적으로 수용된-혁명 이전부터 추진되었던 서구식 공업화와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양자의 단절적 연속성이라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의 스펙트럼 을 고려하는 복합적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다음으로 러시아혁명은 유럽 국가들이 주도한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비서구권의 식민지·종속국에 민족해방의 열망을 분출시킨 깃발을 들어 올렸다는 점에서 세계질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폭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사회변혁과 민족자결을 향한 열망은 1919년까지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터키, 중국, 인도, 한국, 쿠바, 멕시코 등등에서 첫 번째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고, 2차 대전 이후 두 번째로 식민지해방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해가는 역사적 행진을 일으켰다. 혁명 직후 소련은 자신의 체제가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1919년, 즉 내전 시기)에서도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국제공산주의조직인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바쿠에서 '동방 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유럽과 미국, 일본 같은 제국주의 세력에게 적대감과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20세기를 '러시아혁명과 소련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2차 대전에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바로 소련이 독일 파시즘의 침략을 주도적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벼랑에 몰렸던 서구문명이 구원되고, 1945년 이후 소련이 초강대국이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했던 볼셰비키 공산주의 체제가 스스로는 2500만 명에 이르는 인민의 죽음과 국가산업의 황폐화 등 가공할 희생을 당하고 결과적으로 '연합국' 파트너였던 서구유럽의 자유주의 세계를 파시스트의 군홧발 아래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설의 세계사 그 자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1930년대 독일의 파시즘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 일본과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에 대한 국제연맹의 무력한 대처, 민주주의 세력이 프랑코에게 압살당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서구의 방관, 그리고 계속된 소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살피다가 뒤늦게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국제관계에서 저지른 일련의 실수, 무능, 기회주의의 대가를 오히려 소련 공산주의체제가 훨씬 더 크게 치른 결과로서 정치경제적 파국에서 벗어나고 전후 30년에 걸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도 소련은 국제질서에서 세계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의 확고한 맹주로 부상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서구식 복지국가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에 수립에 외부 압력으로 작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보다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노동대중의 구매력을 약화하고 사회적으로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통해 사회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는 체제인 자본주의 국가들에게는 소련 모델이 자국 대중들의 매력을 끌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위로부터 '수동혁명'을 촉진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레닌은 어떻게 승리했나?

[러시아혁명 100주년 특별 기획] ② 러시아 혁명은 농민혁명이다?!


1917년 10월 25일(구력) 레닌을 지도자로 한 볼셰비키가 '2월 혁명'으로 태어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10월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바로 이튿날 혁명 지도부는 1차 대전 교전국들에게 강화협상을 제안하고, 지주와 교회와 황실이 소유했던 땅을 농민들에게 넘겨준다는 '토지령'을 공표했으며, '소브나르꼼'으로 불린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를 구성했다. 그 세 가지는 1917년 2월에서 10월로 전진한 러시아혁명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들, 즉 평화와 토지,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400만 명의 군인을 동원하면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했고, 땅은 무위도식하는 지배층이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주어야 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킬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은 러시아 혁명가들이 수십 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을 마다 않고 줄기차게 추구해 온 목적지였다.  


전쟁 중단이 국제적 과제요, 사회주의체제 건설이 궁극적 과업으로 일정에 올랐다면, 굶주리는 인민에게 빵의 공급을 좌우할 토지 문제는 대다수 러시아인의 기본적 요구였다. 그것은 체제와 이념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사회 문제였다.  

농촌에서 전통적인 농민공동체를 해체하고 부농의 육성을 통해 농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과거 차르 체제의 정책은 결국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 따라서 토지와 빵의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혁명으로 들어선 새로운 체제의 정당성과 국가-사회관계의 성격이 규정될 것이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체제'의 운명을 가른 문제이기도 했다.  


실제로 러시아혁명은 전 기간에 걸쳐 식량의 배분과 생산의 조직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인식에 기초한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토지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농업생산의 전체 체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혁명의 성공과 새로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혁명과 그 결과로 탄생한 소련체제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농민운동을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놓여있다.  

러시아혁명은 1905년에 폭발하여 거의 2년 동안 제정러시아를 뒤흔들었으나 결국 전제군주제의 경찰봉에 잔인하게 진압 당했다. 그리고 1917년에 다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로 되돌아와 세상을 삼켜버렸다. 그 혁명은 사회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혁명 연구자들은 주로 도시의 노동자 및 군인들의 봉기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당의 역할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유럽에서 태평양까지, 북극에서 흑해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유라시아제국의 파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민족혁명의 성격을 띤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 수도였던 뻬뜨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만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변방의 민족들은 자결과 독립을 추구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바로 볼가강 연안에서 우크라이나,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걸친 거대한 제국의 영토에서 불타올랐던 농민봉기의 치열함과 그 사회적 성격이다. 작고한 러시아의 역사학자 V. 다닐로프가 1980년대 말부터 열리기 시작한 방대한 소련 시기 문서고 자료를 접하면서 새롭게 개념화한 작업이 바로 농민혁명론, 즉 1917년 러시아혁명의 본질은 농민혁명이라는 주장이다. 다닐로프 교수와 협업했던 영국의 사회학자 T. 샤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 작업을 계속해왔다. 최근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깐드라쉰, 바바쉬낀 등 여러 후학들에 의해 농민혁명론을 뒷받침하는 비중 있는 저술들이 연이어 집필되고 각 지역에서 관련 자료들 또한 속속 발굴되고 있다.  

농민혁명론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혁명 전후 러시아 사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주민이 바로 농민이었고, 바로 그 농민들이 혁명 과정에 적극적으로, 그것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농민들의 행태와 새로운 농업체계가 소비에트 체제의 성격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먼저 1897년의 센서스에서 농민층은 러시아제국 인구 전체의 84%인 약 1억 명을 헤아렸다. 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된 1차 대전 전야 1914년 제국 인구의 18%만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도시민의 다수도 이제 갓 농촌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1917년 시점에서 러시아의 공장과 광산, 건설공사장 노동자들은 다 합쳐도 약 3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 3년 동안의 격렬한 내전을 치르고 난 뒤 1921년 노동자들의 숫자는 150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상실' 현상이었다. 혁명 전후 러시아는 명백히 '농민의 나라'였다.  


따라서 농업 문제의 해결, 그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와 행태는 1917년의 세계를 뒤흔든 사건에서,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한 강제적 농업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한 '위로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심적인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를 제쳐놓는다면 러시아혁명은 그 주된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극소수가 기존 권력을 뒤엎은 쿠데타라는 사건으로 축소되어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 농민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려고 했는가? 자신들이 보유하고 경작할 수 있는 토지와 가축(축력)의 태부족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던 농민들에게 혁명은 무엇보다 지주 편에 섰던 구체제의 종말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혁명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권력은 즉시, 주요하고 긴급한 사회문제, 즉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1917년 봄에 농민들의 요구를 집약한 최대, 최고의 전국적 조직 형태는 '농민대회'였다. 주도 세력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이었던 바, 그 조직은 전쟁 기간에 오히려 역량이 강화된, 다수의 농민들을 조합원으로 거느리고 있던, 나라 안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조직이었다. 농민의 이해관계를 수호하겠다고 자임한 정당인 '사회주의혁명가당'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10월에 권력을 잡게 되는 볼셰비키는 농촌에서 눈을 씻고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러시아 각 지역 농민대회의 공통 구호는 즉각-즉 임시정부가 계획하고 있던 제헌의회의 소집 전에-토지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폐지할 것, 지주·개인농·교회의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이양할 것, 모든 종류의 토지거래(매매)를 금지할 것, 기존 소유자로부터 수용한 토지를 농민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배할 것 등이었다. 또한 농민들은 각 지역에 농민의 권력기관을 설치할 것과 그 새로운 기관에 토지개혁 관할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2월 혁명의 산물인 임시정부는 농민들의 그런 과격한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력을 동원해 농민운동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민주정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즉 임시정부가 혁명정부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농민들의 봉기는 1917년 여름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농민들은 이제 1905년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행동했으며, 이제 막 전선에서 돌아온 무장한 군인-농민들이 그 선봉에 섰다. 그해 봄까지는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농민운동은 이제 토지 소유자들과 그 장원에 대한 폭력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저택과 농장에서 지주들을 쫒아냈다. 급진화한 농민봉기가 러시아 전역에서 토지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 농민 봉기의 와중에 기존 신분제 권력 체계가 제거되고,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권력위원회, 연맹, 소비에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농민 권력'이 수립되었다.(V. Kondrashin, 2017)  

요컨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가 하루 밤 만에 권력을 잡기 전에 이미 전국적으로 진행된 '농민혁명'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최대 사회문제인 토지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새 정부의 '토지령'은 그러한 사태를 사후적으로 추인한 조치에 불과했다.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준 것은 레닌도, 그 어떤 혁명 정당도 아니었다. 농민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낸 것이었다. 3세기에 걸쳐 농노의 신분으로, 하지만 농민공동체를 통해 자치의 전통을 이어 온 '순박한' 러시아 농민들의 급진성과 자발성의 분출, 그리고 그 놀라운 조직적·정치적 능력의 성과물이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성공은 직접적으로는 뻬뜨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은 볼셰비키 무장봉기의 승리로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가 농민혁명의 성과를 '이미 확보된 현실'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기존 '사회주의' 이론으로 보면 그러한 조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줌으로써 그들을 소소유자(즉 소부르주아계급)로 만들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철한 현실주의 정치가 레닌의 판단은 주어진 기회를 직관적으로 이용하는 담대한 실천을 통해 이론의 회색지대와 제한된 인식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농민혁명론의 프리즘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본다는 것의 또 다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20세기 초 유럽 전체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부였다고 볼 수 있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실패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그 하나이다. 그 정부에는 최고 수준의 러시아 지식인들이 모여서 향후 새 정부가 추진하게 될 '진보적 농업정책'을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주아정부'는 폭발적인 농민운동과 적대적 입장에 서서 농민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전문가들은 농촌 현장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즉각 토지혁명의 실시를 원하는 농민들의 요구를 소홀히 한 채 '사무실에서' 합리적 방안을 강구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혁명은 '합리성'을 뛰어넘는 범주의 사회적 격변이었지만, '이성적' 지식인들에게 그 현장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당장' 사회 문제를 해결하라는 대중의 요구는 무책임한 행태로 보였다. 결국 그들은 기회를 놓치고 10월의 마지막 날들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아직은 '혁명'을 버릴 때가 아니다!

[러시아혁명 100주년 특별 기획]③ 러시아혁명의 기억과 정치적 교훈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전개된 자유주의의 승리 시대에 '혁명'을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다. 세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평정되었다고들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로운 세상' 따위 환상에 들뜨지 않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과 10년 만에 뉴욕은 9·11 사태를 맞았다.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미국이 건국 이래 최악의 본토 공격을 당하고 전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이른바 '색깔혁명'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방 기억에 떠오르는 것들만 해도 장미혁명(조지아, 2003), 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 2004), 튤립혁명(키르키스스탄, 2005) 등이다. 정치적 격동의 물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에만 해도 재스민혁명(튀니지아, 2010), 우산혁명(홍콩, 2014)을 거쳐 드디어 한국의 촛불혁명(2016-17)에 이르기까지, 혁명이라는 유령이 세계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카탈루냐 사태 또한 유럽연합을 뒤흔들고 있는 강렬한 민족주의 운동이다. 그것은 혁명적 사태에 버금가는 사회적 현상이다.  


우리는 아직 '혁명'이라는 단어를 버릴 때가 아니다. 혁명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 그 사회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지만 불가피하게 구성원들 사이에서 긴장과 역동성을 수반하게 된다는 것을 불현듯, 하지만 주기적으로 증언해주는 사태이다. 우리가 더 이상 혁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라면, 그것은 묵시록의 세계일 것이다.  

물론 모든 혁명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이념과 주도세력, 사태가 전개되는 양상, 그리고 사회적 지향점이 다르다. 같은 사태를 두고 누구는 혁명이라 부르고 누구는 반(反)혁명이라 부른다. 혁명이라는 단어의 정의(定義)에 미치지 못하는 사건이나 현상을 매스컴에서 선정적으로 혁명이라 이름붙이기도 한다. 어제는 혁명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그것을 비난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혁명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얼른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한때 혁명적 사태로 알았던 것이 때가 지나면 반동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하다.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수반하지 않았지만 결국 엄청난 변혁을 초래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일들도 있다. 혁명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혁명은 대체로 단 며칠, 단 몇 달 사이에 화산처럼 폭발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한 사건이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불가피하게 가공(加功)된 집단적 기억이기도 하다. 혁명은 일회적 '사건'을 넘는 사회적 효과를 깊고도 길게 드리우는, 복합적 현상이다.

올해로 100년을 맞는 러시아혁명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1917년 2월의 사태를 가리켜 혁명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10월의 사건이야말로 세계를 뒤흔든 진정한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끄레믈(러시아 대통령궁)은 붉은 광장에서 더 이상 러시아혁명을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행사를 치르지 않는다. 하지만, 차가운 모스크바의 거리에서는 여전히 플래카드를 들고 당당하게 혁명가를 부르면서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다. 러시아 안에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거나 기념하는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워낙 오랫동안 반공주의에 물든 한국 기성세대의 상당수가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로 착각하고 있는 러시아는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러시아연방은 과거의 '소련'이 아니다. 1992년 이 새로운 체제가 출현할 때 정통성의 기반을 둔 것은 소련 체제와 그것을 낳은 10월혁명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국제무대에서 '강력한 국가'를 추구하는 현재 러시아의 최고 지도부는 냉전 시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소련이라는 나라는 칭송하지만, 그 체제의 기원이 된 러시아혁명은 외면하고 싶어 한다. 혁명 전 제정러시아와 혁명 후 소련을 강대국이었다고 함께 칭송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모순이라고 해도 러시아의 현실정치에서는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떤 권력도, 설령 그 정권이나 체제가 혁명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해도, 일단 기성제도(establishment)가 된 이상 혁명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혁명 기념일을 달력 속 특정한 날짜 아래 박아놓고 생생한 현실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막기, 즉 혁명의 박제화! 바로 이것이 국가의 이념과 언론과 교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된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누구도 진짜 '연속혁명'이나 '영구혁명'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단일한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역사가들은 1917년의 사건을 '러시아 대혁명'이라고-프랑스 대혁명을 본 따-부르기로 했다(Petrov, 2017; Babashkin, 2017). '대혁명'이라는 명칭! 아마 이것이 현재 러시아연방이라는 국가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한다. 러시아의 대다수 주민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주요 권력 기관과 대기업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리버럴(반공·친미·자유주의자들)은 필경 그 명칭마저도 못마땅해 할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소련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명실공히 국가재산의 주인이 된 것, 즉 현대 러시아의 부르주아로 당당하게 등극한 1991년 사태를 '혁명'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이 후대에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사상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살아 온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혁명은 대체로 예기치 못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불가피한 사태라는 것이다. 만약 혁명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기득권 세력의 위로부터 개혁-'수동혁명'이라고도 한다-이 잘 실행된다면 모르지만, 익히 알려진 정치 격언대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한편으로 개혁은 주민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합법적 경로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그런 개혁 청사진은 사회구성원들의 기대수준을 잔뜩 높여놓지만 성과는 그렇게 빨리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종 개혁 자체가 혁명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러시아혁명 또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61년 농노해방과 그에 뒤이은 각종 정치사회적 개혁 조치의 미진함, 그리고 이후의 반동정치가 낳은 산물이었던 것이다.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도약, 또는 '진실의 순간'에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저런 충돌로 인명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 혁명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집단과 일전을 불사하게 되는 내전은 혁명의 논리 그 자체로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하지만 스딸린 통치 하의 소련에서 일어났듯이 수백만 명의 인민이 처형되고 추방되고 기아에 허덕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처럼 대규모 희생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정치적 선택의 문제이다. 세계대전도 아닌 시기에 한 국가 안에서 벌어지는 그런 참혹한 희생은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인간의 문명에서 그 어떤 사후적 성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스딸린과 그 추종자들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걸쳐 강제적 농업집산화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소련 전역의 농민들을 향해 적군을 동원하면서까지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주어진 조건에서 보다 합리적인 정책 선택으로 큰 재앙을 막고 더 높은 생산성을 올릴 수도 있었던 것을 해내지 못한,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무능력과 비정상적으로 작동한 정책 집행기관들의 난폭한 자의성의 증거였다.  

우리는 혁명이 다가오는 날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사태의 와중에 발생하게 될 인명과 문명의 희생을 최소한도로 막기도 힘들다. 하지만 지축을 뒤흔드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을 치르면서 혁명이 진행되려면 평소의 '진지전'이 아주 중요하다.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은 러시아혁명 전에 최악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배세력마저 기존 체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1920년대 초반, 그의 말년에 혁명 전 체제, 즉 서구의 부르주아체제가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을 위해 남긴 긍정적 유산이 많다는 점을 몇 번이나 지적했다. 기업과 은행의 대규모 경영과 그에 따른 회계·관리 업무의 단순 합리화, 대안적 사회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발전, 그리고 전반적으로 높은 시민의 문화수준에 관한 반복된 언급 등. 그것은 혁명 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바로 그런 조건과 능력들이 러시아에 얼마나 절박하게 부족했던가를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혁명에 대한 열성과 헌신에 비해 실제적인 국가 운영 능력이 형편없이 저급하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기존 체제의 전복이라는 혁명적 사태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과 그 후 혁명이 애초 목표로 했던 '인민을 위한 국가경영'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과업이었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요, 후자는 전쟁의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혁명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그런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만들어놓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전략대로 펼쳐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집단은 거대한 혁명의 물결에 좌초하거나 또는 만약 승리자가 된다면 현실과 거리가 먼 목적을 위해 사회구성원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혁명적 대중은 위로부터, 또는 밖으로부터 완벽하게 통제될 수 없다. 그들이 통제된다는 것은 밑으로부터 역동적인 혁명의 물결이 잦아들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인민은 이제 국가 주도의 과업 달성을 위한 동원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1930년대 스딸린은 과감하게 그 길로 나아갔다. (끝)

(이 글은 필자가 지난 10월 27일 한국정치학회 주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과 부분적으로 중복됨을 알려드립니다. 20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러시아혁명의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이 기획연재는 3회에 걸쳐 게재됩니다. 편집자) 

























스탈린 고향의 짧은 실험, 아시나요?

[장석준 칼럼] 또 다른 혁명 100주년, 조지아 혁명
2017.11.21 11:15:37

러시아 혁명 100주년을 맞이해 10월 혁명이나 볼셰비키, 소련 체제의 역사를 다룬 신간이 여럿 나왔다. 덕분에 한 동안 절판 도서가 대부분이던 국내의 러시아 혁명 관련 문헌 목록이 조금은 풍성해졌다. 영어권에서도 양상이 비슷한 것 같다. 올해 들어 새로 나온 연구서나 대중서가 꽤 된다.

아직 우리말로 번역되지 않은 이런 신간 중에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책은 미국 태생의 노동운동가이자 독립 저널리스트 에릭 리(Eric Lee)의 <실험: 조지아의 잊힌 혁명(The Experiment: Georgia's Forgotten Revolution)>(Zed Books, 2017. 국내 미번역)이다. 분명 러시아 혁명 100년을 맞아 기획됐겠지만 '러시아' 혁명을 다룬 책은 아니다. '조지아' 혁명 이야기다.

조지아, 우리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러시아 혁명사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러시아식 발음 '그루지야'로 더 잘 알려진 나라다. 흑해 동쪽, 카프카스 산맥에 자리한 인구 400여만 명의 작은 나라. 그들 자신의 역사보다는 오히려 러시아 역사에 깊은 상흔을 남긴 조지아인, 이오세브 주가슈빌리(별칭 '스탈린')로 더 유명한 나라.  

이 나라의 사회주의 혁명을 다룬 책이라고 하면, 아마 대부분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반문할 것이다. 혹은 러시아 혁명사 마니아라면 볼셰비키 정권에 맞선 조지아 멘셰비키 정권이 있었음을 떠올리며 오히려 '반혁명' 이야기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볼셰비키 정권이 혁명 정부이니 흑백의 세계관에 따르면 당연히 이와 대립한 한 '지방(?)' 정부는 반혁명 세력이 된다.  

그러나 러시아 중심부에서 혁명의 불길이 타오르던 그 시기에 변방 조지아에서 벌어진 일 역시 또 다른 '혁명'이었다. 볼셰비키 정권 초기이던 1918~1921년, 약 4년 동안 조지아에는 볼셰비키와는 다른 사회주의 프로그램을 추진한 혁명 정부가 있었다. 에릭 리의 책을 통해 나는 참으로 뒤늦게 그들의 놀라운 이야기를 알게 됐다.  

조지아의 멘셰비키 혁명 정부  

▲<실험: 조지아의 잊힌 혁명(The Experiment: Georgia's Forgotten Revolution)>.ⓒZed Books

러시아가 선사 시대의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오랜 세월 동안 조지아에서는 숱한 문명과 왕국이 명멸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황금 양털의 땅으로 동경한 콜키스가 바로 조지아의 옛 이름이었다. 하지만 근대에 들어서 러시아와 오스만, 두 제국이 이 땅을 놓고 각축을 벌였고, 결국은 러시아 제국에 복속됐다.

러시아 제국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조지아인 다수는 농민이었다. 또한 농민의 다수는 소작농이었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도 러시아 사회의 최대 숙제가 토지 개혁이었듯이 조지아 민중의 가장 절실한 바람도 농지 분배였다.

그러나 같은 농업 사회라도 러시아 본토와 조지아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러시아에 비해 조지아 농촌은 교육열이 높았다. 덕분에 조지아어를 말할 뿐만 아니라 고유 문자를 읽고 쓸 줄 아는 농민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렇게 이민족 지배와 민족어 읽고 쓰기 능력의 확산이 겹치면 예외 없이 성장하는 게 근대 민족주의다. 19세기 말 조지아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한데 조지아 민족주의의 담지자는 단순한 민족주의자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민 문제를 전면에 내걸고 이 무렵 러시아를 휩쓸던 나로드니키가 영향을 끼치지도 않았다. 놀랍게도 조지아 민중에게 민족 문제, 토지 문제를 해결할 대안 세력으로 인정받은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다. 마르크스주의라면 민족주의보다는 국제주의, 농민보다는 노동계급을 더 강조하는 사상인데도 그랬다.  

이는 상대적으로 후진적인 제국의 지배를 받는 피억압 민족의 전략적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피억압 민족은 침략국보다 더 선진적인 나라들의 이념, 문화를 받아들여 저항의 무기로 삼으려 한다. 왜냐하면 식민 지배자들은 보통 '근대화'를 명분 삼아 침략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피억압 민족은 침략자보다 더 근대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이런 정당화 논리를 뒤집으려 한다. 일제 치하에서 조선인들이 미국식 기독교나 소련식 사회주의를 열렬히 받아들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조지아인들도 러시아식 농민 사회주의가 아니라 독일식 마르크스주의를 전폭 수용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당을 건설한 시기는 1890년대 말로, 러시아나 조지아나 엇비슷했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는 10월 혁명 무렵까지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를 다 합쳐도 나로드니키 정당(사회주의혁명당)을 압도하지 못한 데 반해 조지아에서는 처음부터 조지아 사회민주당이 차르 전제에 맞서는 대중운동을 주도했다. 10월 혁명을 다룬 문헌에 볼셰비키의 정적으로 가끔 등장하는 니콜라이 츠헤이제, 뒤에 조지아 민주공화국 총리를 역임하는 노에 조르다니아 등이 창당 때부터 조지아 사회민주당을 이끈 주요 인물들이었다.

조지아 사회민주당원들은 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일부로도 활동했다. 그리고 사회민주노동당이 볼셰비키와 멘셰비키로 분열하자 조지아 사회민주당은 멘셰비키 쪽을 선택했다. 즉, 조지아 사회민주당은 1903년 이후 조지아 멘셰비키였다. 볼셰비키 당원이 된 스탈린은 조지아인들 가운데에서는 특이한 사례였다.  

러시아 혁명사에서 '멘셰비키'는 흔히 '온건파'와 동일시된다. 단계론에 따라 러시아의 당면 혁명은 철저히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어야 한다고 생각한 탓에 노동자, 농민 투쟁보다는 자유주의자들과의 연합을 더 중요시한 세력, 이것이 멘셰비키의 교과서적 이미지다. 그러나 이는 페트로그라드나 모스크바는 몰라도 티플리스(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의 옛 이름)에서는 통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1905년 러시아 제1차 혁명이 일어나기 이미 1년 전에 조지아에서는 대중 봉기가 시작됐고, 조지아 멘셰비키가 이 투쟁의 정치적 대변자였다.

1904년에 조지아의 구리아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경작권을 놓고 지주와 대립하던 소작농들이 들고 일어나 러시아 경찰들을 쫓아내고 자치를 시작했다. 농민들은 구리아 공화국을 선포했고, 조지아 사회민주당에 대거 입당했다. 노동계급 정당이라 자임하던 조지아 사회민주당은 농민을 '농업 노동자'라 부르며 농민 혁명의 대변자로 나섰다. 레닌이 마르크스주의를 농업 사회의 현실에 맞게 개조하려고 애쓰던 그때에 조지아 멘셰비키도 같은 작업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구리아 혁명은 1년 뒤에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운동이 일어났다가 진압당하면서 함께 미완으로 끝났다. 그러나 제국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때의 불꽃은 꺼지지 않고 이어지다 10여 년 뒤에 다시 작렬했다. 게다가 제1차 혁명이 러시아 본토보다 조지아에서 먼저 폭발했다는 사실에서 드러나듯 조지아 혁명은 단지 러시아 혁명의 일부만은 아니었다.

1917년 2월 혁명이 일어난 뒤에 조지아인들은 러시아 전체의 제헌의회가 소집되기만을 기다렸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지아 사회민주당 방침은 러시아 연방공화국 안에서 조지아인들의 자치를 최대한 보장받는다는 것이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조지아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들이 제헌의회 소집을 주관하는 임시정부의 유지에 집착한 것도 이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우여곡절을 거치며 제헌의회는 흐지부지돼버렸다.

그러자 조지아인들은 과감한 선택을 했다. 1918년 5월에 멘셰비키가 이끄는 티플리스 소비에트와 노동조합, 인민방위군(러시아 군에서 떨어져 나온 조지아 병사들이 조직한 군대) 등의 대표들이 모여 조지아 민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로써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또 다른 사회주의 국가 실험이 시작됐다.  

러시아 10월 혁명과는 달랐던 조지아 혁명  

조지아 혁명정부의 가장 급박한 과제는 물론 토지 개혁이었다. 1917년 여름에 러시아 곳곳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지아에서도 이미 소작농들이 대지주 소유 농지를 점거하고 있었다. 새 정부는 이런 아래로부터의 농민 혁명을 사후 승인하기만 하면 됐다. 농지 소유는 각 농가가 직접 경작할 수 있는 만큼으로 제한됐다. 신경제정책(NEP)을 추진하던 1920년대 초의 소비에트연방과 마찬가지로 조지아는 삽시간에 자작농의 나라가 됐다.

티플리스와 모스크바의 경제 정책이 갈라진 지점은 민간 기업 처리였다. 볼셰비키 정부가 내전기에 대다수 기업을 국유화한 데 반해 조지아 멘셰비키는 국유화에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주된 외화 수입원이던 망간 광산 정도만 국유화했다. 이념이나 전략이 다른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경제 상황이 달랐다. 아직 조지아에는 러시아 대도시에서 볼 수 있는 거대 자본주의 기업이 존재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는 기존 민간 기업을 국유화한다고 해서 경제 전체에 그리 큰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대신 조지아 정부는 신규 공공 투자로 국영 기업을 신설했다. 협동조합도 적극 육성했다. V. I. 레닌은 죽음을 앞두고서야 협동조합의 가치를 재발견했지만, 조지아 멘셰비키는 처음부터 협동조합을 새로운 사회주의 경제의 핵심 구성 요소로 바라봤다. 1920년 조사에 따르면, 조지아 노동 인구 중 52%가 국영 기업 소속이고 18%가 협동조합 소속이었다. 민간 기업에 고용된 인원은 19%에 불과했다. 대규모 국유화 없이도 사회화가 이뤄진 셈이었다.

노동조합은 사회화된 부문, 민간 기업 가릴 것 없이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받았다. 소비에트연방에서는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전통적 기구인 노동조합이 어떤 지위를 지니며 기능은 무엇인지가 뜨거운 쟁점이 됐다. 오랜 논란과 투쟁 끝에 소련 노동조합은 공산당의 부속 기관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조지아에서는 노동조합의 자주성이 너무도 당연한 전제였다. 이런 자유롭고 안정된 지위 덕분에 노동조합운동은 1917년에 41개 조합, 조합원 2만9000명이던 것이 1920년에는 113개 조합, 조합원 6만4000명으로 급성장했다. 

노동권도 급신장했다. 당시 세계 노동운동의 숙원이던 8시간 노동제가 확립됐다. 청소년의 경우는 노동시간이 6시간으로 제한됐다. 연장 노동은 특별한 경우에만 허용됐고, 통상 임금의 2배를 수당으로 지급해야 했다. 아동 노동은 금지됐다. 여성과 청소년의 야간 노동 또한 금지됐다. 또한 우리의 4대 보험에 해당하는 사회보험이 신설됐다. 서유럽에서 복지국가가 수립되기 한참 전에 조지아는 그 뼈대를 구축하고 있었다.

조지아 민주공화국은 여러 모로 동시대 소비에트연방과 대비되지만, 그 중에서도 확연히 다른 것은 정치 체제였다. 볼셰비키와 사회주의혁명당 좌파의 연립정부가 깨진 뒤에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가 들어선 소련과 달리 조지아에서는 정당 활동의 자유가 보장됐고 자유선거가 실시됐다. 1919년 제헌의회 선거에서는 약 60%의 유권자가 참여한 가운데, 총 130석 중 109석을 멘셰비키가 차지했고 사회주의혁명당을 포함한 다른 사회주의 세력들이 13석을 얻었다. 부르주아 정당인 민족민주당도 8석을 획득했다. (공산당은 1920년 소련-조지아 평화조약 체결 후 합법화됐다.) 

제헌의회는 2년여의 논의 끝에 조지아 민주공화국 헌법을 기초했다. 헌법학자들은 흔히 사회권을 인권의 중요한 내용으로 명시한 최초의 사례가 독일 바이마르 헌법이라고 하지만, 조지아 민주공화국 헌법도 바이마르 헌법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아니, 조지아 헌법이 훨씬 더 철저했다.  

1921년 헌법은 모든 아동의 무상 초등교육을 못 박았을 뿐만 아니라 교복과 급식, 학용품도 무상 지급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국가가 모든 시민의 고용과 사회보험을 보장해야 한다고도 했다. 노동시간은 주당 48시간으로 제한됐다. 여성과 청년은 작업장에서 특별한 보호를 받게 했다. 반면 재산권은 엄격히 제약됐고, 유상 매수를 전제로 한 강제 수용을 인정했다.

그러나 이 헌법은 실현되지 못했다. 제대로 실현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조지아 민주공화국의 독창적 사회주의 실험은 1921년 2월 외세의 침입으로 돌연 중단되고 말았다. 외세? 신생 터키공화국? 아니면 러시아 내전에 개입하던 연합군? 아니다. 내전에 승리하고 나서 한 숨 돌린 소련 붉은 군대가 1년 전 체결한 평화조약을 짓밟으며 쳐들어왔다. 인민방위군은 격렬히 항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사회민주당이 이끌던 합법 정부는 망명길에 나서야 했다.

레닌은 이 작전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고 한다. 두 조지아 출신 볼셰비키 스탈린과 그레고리 오르조니키제의 작품이었다. 비록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지만, 이는 한 '사회주의' 국가가 다른 '사회주의' 국가를 침공한 첫 번째 사례였다.  

볼셰비키가 가지 않은 길, 조지아의 민주적 사회주의  

그렇다고 러시아 혁명은 다 악이었고 조지아 혁명은 다 선이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조지아 혁명도 혁명인 바에는 어두운 그늘이 없지 않았다. 숱한 민족이 섞여 사는 카프카스 지역이기에 조지아 민주공화국에도 소수민족 문제가 있었다. 조지아 정부가 소수민족들을 다룬 방식은 대러시아주의자들의 처신보다 우월했다고 하기 힘들다.

또한 조지아는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려고 외국군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차 대전 종전 직전에는 독일군 주둔을 받아들였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영국군에 기댔다. 그러나 영국은 볼셰비키 정부가 내전에서 좀처럼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조지아에 더 이상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런 강대국 군대 주둔은 소련군 침입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말하자면 조지아 혁명도 교과서는 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짧은 실험은 러시아 혁명이 가야 했고 어쩌면 갈 수 있었으나 가지 않은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훌륭한 거울임에 분명하다. 다당제와 자유선거, 자유권과 사회권을 철저히 보장하는 헌법, 자주적인 노동조합, 공기업-협동조합-민간 기업이 어우러진 경제 등등, 조지아 민주공화국이 보여준 '민주적 사회주의'의 맹아에서 우리는 20세기에 막혔던 길이 무엇인지 식별할 수 있다. 이 길을 확인하는 일이야말로 100년 전 민중이 감히 내딛었던 걸음을 '더 낫게' 다시 밀어붙일 출발이 될 것이다.

게다가 나는 조지아의 슬픈 역사에서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좌파조차 역사를 논하면서 주로 꺼내는 이야깃거리가 러시아 혁명 아니면 중국 혁명이다. 모두 대국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국이 아니다. 물론 절대 규모로는 한국과 조지아가 비교가 안 되지만, 너무도 커다란 나라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다는 점에서는 동병상련 신세다.

그런 까닭에라도 우리는 이제 러시아만이 아니라 조지아 혁명을 알아야겠다. 프랑스 혁명과 독일 사회민주당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나 북유럽 여러 나라의 여러 시도에서 배울 바를 찾아야겠다. 작아만 보였던 한 나라가 어떤 주변 강대국보다 더 존엄한 존재로 우뚝 섰던 순간들을 잊지 말고 또한 우리의 역사로 만들어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