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모든 역사가 누군가에 의해, 무슨 이유로든 후대에 재해석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것이라면, 우리가 혁명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사건들은 당연히 그 앞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 러시아혁명도 한편으로 1991년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방대한 문서고(archives)가 열리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 20세기 말 이후 보편적으로 확장된 자유주의 질서에 대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재평가될 수밖에 없는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 이와 관련하여 작고한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지적을 상기할 만하다.
"요컨대 짧은 20세기의 역사는 러시아혁명과 그것의 직접적, 간접적 결과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극단의 시대: 20세기의 역사(상)』 중에서)
1917년에 극적으로 폭발한 러시아혁명과 뒤이은 소련체제의 성립, 그리고 2차대전을 통해 서구문명이 겪었던 파국적 위기와 구원의 과정은 말 그대로 역설의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지상에 나타났으나 그것이 실현한 사회는 19세기 유럽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비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가하면 10월혁명을 목도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볼셰비키정권을 용납할 수 없는 야만의 체제라고 전복하려고 했던 유럽의 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는 1941-45년 동안 바로 그 소련인민의 엄청난 희생을 대가로 파시즘의 군홧발로부터 벗어나고, 결국 20세기 후반기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혁명과 그 거대한 세계사적 영향을 모르고서는 지난 세기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홉스봄의 지적은 21세기 들어 기존의 서구-미국 중심 자유주의세계의 균열과 국제적 세력균형의 변전(變轉)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충분히 음미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1914년 시작된 유럽대전이 채 끝나기도 전에 폭발했던 1917년의 러시아혁명은 2월에서 10월로 진전됨에 따라 정치권력과 엘리트의 교체를 통해 사회계급 관계에 극적인 역전을 초래하고, '사회주의'를 깃발로 내세운 새로운 이념국가의 수립을 가져왔다. 나아가 그 체제는 내부적으로 토지혁명에서 공업화, 그리고 가족관계에 이르기까지 근본적인 사회경제적·문화적 변동을 수반했다는 점에서 정치혁명을 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라고 할 수 있었고, 나라 밖 국제질서의 구성과 대안적 정치경제체제의 제시라는 점에서 20세기의 역사에 매우 깊고 오랜 충격을 던졌다.
먼저 러시아혁명은 군주제-농노제, 또는 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와 같이 당시까지 서구인들에게 익히 알려진 정치·경제체제와는 다른 '국가중심 사회주의'라는 인간사회 조직의 대안적 발전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세계무대에 나타난 새로운 종류의 현상이었다. 전적으로 국가가 주도하는 생산과 분배의 사회적 조직화, 그리고 역시 국가 주도의 인민 생활제도의 편성은 1914년까지 유럽에서 대세를 이루었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는 구조적으로 다른 사회조직 방식이었다. 독립적 개체로서 자신의 이익과 부를 추구하는 인간형은 공동체와 집단 속에서 사회적 평등과 사회주의 조국의 수호를 당위로 여기는 새로운 인간형으로 대체되었다. 그것은 당대 자신의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대중의 불신을 자초하면서 지독한 불임 현상에 시달리고 있던 20세기 초반 의회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이념적·체계적 대안으로 등장했다는 점에서 유럽의 지배 엘리트와 부르주아들에게는 근본적 도전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혁명의 폭발적 계기와 현실이 강요한 사회주의 이념의 왜곡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러시아혁명은 처음부터 전쟁이라는 특수한 조건에서 발생한 '전시(戰時) 혁명'이요, '전시 사회주의체제'였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생산력이 충분히 발달된 상태에서 선진적인 프롤레타리아의 조직적·의식적 역량을 통하여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단계가 도래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예측했던, 그런 혁명이 아니었다. 그것은 레닌이 분석했던바 '세계 제국주의의 약한 고리'에서 터졌던 제국주의시대 혁명이요, 안토니오 그람시가 칭했던바 ''자본(론)'에 반反하는 혁명', 즉 압도적인 농민의 나라에서 폭발한 '피압박 민중·민족혁명'의 성격을 갖는 것이었다. 전쟁은 농민과 노동자들의 혁명적 열기에 편승한 볼셰비키에게 권력장악이라는 호기가 되고 외세의 간섭으로부터 러시아 국가성(stateness)의 수호자라는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해 주었지만, 동시에 '혁명 정권'의 생존과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에 심대한 위협과 제한을 가한 외부적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런 점에서 또 다른 전쟁인 '내전(1918-21년)' 기간에 실험된 '전시 공산주의'는 1920년대 말-30년대 초 강제적 농업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드러내게 된 '스탈린주의'라는 리바이어던의 원초적 체험이요, 다수의 볼셰비키 활동가와 스탈린에게 충성을 바쳤던 청년 세대에게 극히 매력적인 '의지적 사회주의건설' 방식이었다. 그것은 나아가 '제2의 내전'이라고 부를 수 있는, 농업집산화에 대한 농민들의 강렬한 저항과 봉기의 진압을 통한 사회적 안정성의 획득과 근대화 과정에서 농촌의 내부 식민지화 및 농민층의 2등시민화를 정당화해 준 '사회주의 건설' 방식이었다. 최종적으로 '전시 사회주의'로서 소련체제는 2차대전을 통해 대외적으로는 독일파시스트집단의 침략을 영웅적으로 물리침으로써 의심할 수 없는 역사·정치적 정당성을, 내부적으로는 소련인민들의 국민주의적 결속을 결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20세기 사회주의'라고 불릴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러시아혁명은 그동안 전통적 관점이었던 '부르주아혁명에서 사회주의혁명으로 발전'의 관점에서 해석한다든가, 또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지식인들이 서구의 반공주의 관점을 받아들여 "러시아의 정상적인 근대화 과정을 중단시킨 불행한 사건"으로 보는 것은 둘 다 부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차라리 그것은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변방의 소수민족 등 피압박민중·민족의 자발적인 "아래로부터 혁명"이 토지혁명과 사회관계의 변혁을 통해 상당 부분 성취되고, 이후에 볼셰비키정권, 특히 스탈린 지도부에 의해 "위로부터 혁명"을 통해 봉인되면서-특히 당대 러시아의 압도적 다수를 구성했던 농민의 사회적 요구와 노동자들의 기업체 자주관리라는 관점에서-, 국가 정책적으로 수용된-혁명 이전부터 추진되었던 서구식 공업화와 강력한 국가 건설이라는 관점에서-, 양자의 단절적 연속성이라는, 상대적으로 긴 시간의 스펙트럼 을 고려하는 복합적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여겨진다.
다음으로 러시아혁명은 유럽 국가들이 주도한 제국주의 시대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 등 비서구권의 식민지·종속국에 민족해방의 열망을 분출시킨 깃발을 들어 올렸다는 점에서 세계질서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 사건이었다. 1917년 러시아에서 폭발한 농민과 노동자들의 사회변혁과 민족자결을 향한 열망은 1919년까지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헝가리-체코, 터키, 중국, 인도, 한국, 쿠바, 멕시코 등등에서 첫 번째 혁명의 물결을 일으켰고, 2차 대전 이후 두 번째로 식민지해방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해가는 역사적 행진을 일으켰다. 혁명 직후 소련은 자신의 체제가 생존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던 상황(1919년, 즉 내전 시기)에서도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국제공산주의조직인 '코민테른'을 결성하고, 바쿠에서 '동방 피압박민족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유럽과 미국, 일본 같은 제국주의 세력에게 적대감과 두려움을 증폭시켰다.
20세기를 '러시아혁명과 소련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은 2차 대전에서 다른 어떤 국가보다 바로 소련이 독일 파시즘의 침략을 주도적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벼랑에 몰렸던 서구문명이 구원되고, 1945년 이후 소련이 초강대국이 하나로 군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체제의 극복을 목표로 했던 볼셰비키 공산주의 체제가 스스로는 2500만 명에 이르는 인민의 죽음과 국가산업의 황폐화 등 가공할 희생을 당하고 결과적으로 '연합국' 파트너였던 서구유럽의 자유주의 세계를 파시스트의 군홧발 아래서 해방시켰다는 사실이야말로 역설의 세계사 그 자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1930년대 독일의 파시즘에 대한 영국의 유화정책, 일본과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에 대한 국제연맹의 무력한 대처, 민주주의 세력이 프랑코에게 압살당한 스페인 내전에 대한 서구의 방관, 그리고 계속된 소련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살피다가 뒤늦게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국제관계에서 저지른 일련의 실수, 무능, 기회주의의 대가를 오히려 소련 공산주의체제가 훨씬 더 크게 치른 결과로서 정치경제적 파국에서 벗어나고 전후 30년에 걸친 평화와 번영을 구가할 수 있는 조건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1945년 이후의 세계에서도 소련은 국제질서에서 세계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의 확고한 맹주로 부상한 미국의 독주를 견제하는 한편으로, 서구식 복지국가라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체제에 수립에 외부 압력으로 작용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보다 자본의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경제적으로는 노동대중의 구매력을 약화하고 사회적으로는 심각한 빈부격차를 통해 사회분열을 초래할 수도 있는 체제인 자본주의 국가들에게는 소련 모델이 자국 대중들의 매력을 끌지 못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위로부터 '수동혁명'을 촉진하는 계기로도 작용했던 것이다.
레닌은 어떻게 승리했나?
1917년 10월 25일(구력) 레닌을 지도자로 한 볼셰비키가 '2월 혁명'으로 태어난 '임시정부'를 타도하고 '10월 혁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바로 이튿날 혁명 지도부는 1차 대전 교전국들에게 강화협상을 제안하고, 지주와 교회와 황실이 소유했던 땅을 농민들에게 넘겨준다는 '토지령'을 공표했으며, '소브나르꼼'으로 불린 소비에트러시아 정부를 구성했다. 그 세 가지는 1917년 2월에서 10월로 전진한 러시아혁명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구호들, 즉 평화와 토지, 그리고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1400만 명의 군인을 동원하면서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간 전쟁은 즉각 중단되어야 했고, 땅은 무위도식하는 지배층이 아니라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들에게 주어야 했다.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종식시킬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은 러시아 혁명가들이 수십 년 동안 시베리아 유형을 마다 않고 줄기차게 추구해 온 목적지였다.
전쟁 중단이 국제적 과제요, 사회주의체제 건설이 궁극적 과업으로 일정에 올랐다면, 굶주리는 인민에게 빵의 공급을 좌우할 토지 문제는 대다수 러시아인의 기본적 요구였다. 그것은 체제와 이념을 관통하는 기본적인 사회 문제였다.
농촌에서 전통적인 농민공동체를 해체하고 부농의 육성을 통해 농업 문제를 해결한다는 과거 차르 체제의 정책은 결국 농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한 채 버려졌다. 따라서 토지와 빵의 공급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따라 혁명으로 들어선 새로운 체제의 정당성과 국가-사회관계의 성격이 규정될 것이었다. 그것은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체제'의 운명을 가른 문제이기도 했다.
실제로 러시아혁명은 전 기간에 걸쳐 식량의 배분과 생산의 조직화 문제를 둘러싸고 서로 다른 인식에 기초한 세력 간의 치열한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토지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 농업생산의 전체 체계를 어떻게 조직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혁명의 성공과 새로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문제였다. 바로 여기에 러시아혁명과 그 결과로 탄생한 소련체제의 성격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초반 러시아 농민운동을 깊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주장의 근거가 놓여있다.
러시아혁명은 1905년에 폭발하여 거의 2년 동안 제정러시아를 뒤흔들었으나 결국 전제군주제의 경찰봉에 잔인하게 진압 당했다. 그리고 1917년에 다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로 되돌아와 세상을 삼켜버렸다. 그 혁명은 사회적으로 보면 여러 가지 얼굴을 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러시아혁명 연구자들은 주로 도시의 노동자 및 군인들의 봉기와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당의 역할에 주목해왔다. 하지만 러시아혁명은 거시적 관점에서 보면 유럽에서 태평양까지, 북극에서 흑해까지를 아우르는 방대한 유라시아제국의 파열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민족혁명의 성격을 띤 것이기도 했다. 제국의 수도였던 뻬뜨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만 민중봉기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다. 변방의 민족들은 자결과 독립을 추구했다.
다음으로 주목할 것이 바로 볼가강 연안에서 우크라이나, 그리고 시베리아 지역에 걸친 거대한 제국의 영토에서 불타올랐던 농민봉기의 치열함과 그 사회적 성격이다. 작고한 러시아의 역사학자 V. 다닐로프가 1980년대 말부터 열리기 시작한 방대한 소련 시기 문서고 자료를 접하면서 새롭게 개념화한 작업이 바로 농민혁명론, 즉 1917년 러시아혁명의 본질은 농민혁명이라는 주장이다. 다닐로프 교수와 협업했던 영국의 사회학자 T. 샤닌 또한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 작업을 계속해왔다. 최근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는 깐드라쉰, 바바쉬낀 등 여러 후학들에 의해 농민혁명론을 뒷받침하는 비중 있는 저술들이 연이어 집필되고 각 지역에서 관련 자료들 또한 속속 발굴되고 있다.
농민혁명론의 근거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먼저 혁명 전후 러시아 사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주민이 바로 농민이었고, 바로 그 농민들이 혁명 과정에 적극적으로, 그것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농민들의 행태와 새로운 농업체계가 소비에트 체제의 성격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다.
먼저 1897년의 센서스에서 농민층은 러시아제국 인구 전체의 84%인 약 1억 명을 헤아렸다. 혁명의 직접적 계기가 된 1차 대전 전야 1914년 제국 인구의 18%만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 도시민의 다수도 이제 갓 농촌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었다. 1917년 시점에서 러시아의 공장과 광산, 건설공사장 노동자들은 다 합쳐도 약 350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마저 3년 동안의 격렬한 내전을 치르고 난 뒤 1921년 노동자들의 숫자는 150만 명에 불과할 정도로 줄어들었다. 그것은 사회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상실' 현상이었다. 혁명 전후 러시아는 명백히 '농민의 나라'였다.
따라서 농업 문제의 해결, 그에 대한 농민들의 요구와 행태는 1917년의 세계를 뒤흔든 사건에서, 그리고 1930년대 스탈린에 의한 강제적 농업집산화와 급속한 공업화를 추진한 '위로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 중심적인 이슈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이 문제를 제쳐놓는다면 러시아혁명은 그 주된 사회적 성격을 상실하고 극소수가 기존 권력을 뒤엎은 쿠데타라는 사건으로 축소되어 해석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 과정에서 러시아 농민들이 요구한 것은 무엇이었고, 그것을 어떻게 실현하려고 했는가? 자신들이 보유하고 경작할 수 있는 토지와 가축(축력)의 태부족으로 생존의 위기를 겪고 있던 농민들에게 혁명은 무엇보다 지주 편에 섰던 구체제의 종말로 받아들여졌다. 따라서 혁명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권력은 즉시, 주요하고 긴급한 사회문제, 즉 토지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었다. 1917년 봄에 농민들의 요구를 집약한 최대, 최고의 전국적 조직 형태는 '농민대회'였다. 주도 세력은 각 지역의 협동조합이었던 바, 그 조직은 전쟁 기간에 오히려 역량이 강화된, 다수의 농민들을 조합원으로 거느리고 있던, 나라 안에서 상당한 권위를 가진 조직이었다. 농민의 이해관계를 수호하겠다고 자임한 정당인 '사회주의혁명가당'이 그것을 지지하고 있었다. 10월에 권력을 잡게 되는 볼셰비키는 농촌에서 눈을 씻고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러시아 각 지역 농민대회의 공통 구호는 즉각-즉 임시정부가 계획하고 있던 제헌의회의 소집 전에-토지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토지에 대한 사적 소유를 폐지할 것, 지주·개인농·교회의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이양할 것, 모든 종류의 토지거래(매매)를 금지할 것, 기존 소유자로부터 수용한 토지를 농민들 사이에서 평등하게 분배할 것 등이었다. 또한 농민들은 각 지역에 농민의 권력기관을 설치할 것과 그 새로운 기관에 토지개혁 관할권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2월 혁명의 산물인 임시정부는 농민들의 그런 과격한 요구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력을 동원해 농민운동을 저지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새로 들어선 '민주정부'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즉 임시정부가 혁명정부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농민 자신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직접 행동에 나선 것이었다.
농민들의 봉기는 1917년 여름을 지나면서 오히려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농민들은 이제 1905년보다 훨씬 더 급진적으로 행동했으며, 이제 막 전선에서 돌아온 무장한 군인-농민들이 그 선봉에 섰다. 그해 봄까지는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농민운동은 이제 토지 소유자들과 그 장원에 대한 폭력 행사를 통해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저택과 농장에서 지주들을 쫒아냈다. 급진화한 농민봉기가 러시아 전역에서 토지문제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 농민 봉기의 와중에 기존 신분제 권력 체계가 제거되고, 러시아 각지에서 인민권력위원회, 연맹, 소비에트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 '농민 권력'이 수립되었다.(V. Kondrashin, 2017)
요컨대, 1917년 10월 25일 볼셰비키가 하루 밤 만에 권력을 잡기 전에 이미 전국적으로 진행된 '농민혁명'을 통해 당대 러시아의 최대 사회문제인 토지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새 정부의 '토지령'은 그러한 사태를 사후적으로 추인한 조치에 불과했다. 땅을 농민들에게 돌려준 것은 레닌도, 그 어떤 혁명 정당도 아니었다. 농민 자신들의 힘으로 그것을 얻어낸 것이었다. 3세기에 걸쳐 농노의 신분으로, 하지만 농민공동체를 통해 자치의 전통을 이어 온 '순박한' 러시아 농민들의 급진성과 자발성의 분출, 그리고 그 놀라운 조직적·정치적 능력의 성과물이었다는 것이다.
'10월 혁명'의 성공은 직접적으로는 뻬뜨로그라드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의 지지를 받은 볼셰비키 무장봉기의 승리로 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볼셰비키가 농민혁명의 성과를 '이미 확보된 현실'로서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기존 '사회주의' 이론으로 보면 그러한 조치는 농민들에게 토지를 줌으로써 그들을 소소유자(즉 소부르주아계급)로 만들기 때문에 허용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냉철한 현실주의 정치가 레닌의 판단은 주어진 기회를 직관적으로 이용하는 담대한 실천을 통해 이론의 회색지대와 제한된 인식 지평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농민혁명론의 프리즘을 통해 러시아혁명을 다시 본다는 것의 또 다른 의의는 어디에 있을까? 20세기 초 유럽 전체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부였다고 볼 수 있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실패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그 하나이다. 그 정부에는 최고 수준의 러시아 지식인들이 모여서 향후 새 정부가 추진하게 될 '진보적 농업정책'을 작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부르주아정부'는 폭발적인 농민운동과 적대적 입장에 서서 농민대중의 지지를 상실했다. 전문가들은 농촌 현장에서 그렇게 절박하게, 즉각 토지혁명의 실시를 원하는 농민들의 요구를 소홀히 한 채 '사무실에서' 합리적 방안을 강구하는데 몰두하고 있었다. 혁명은 '합리성'을 뛰어넘는 범주의 사회적 격변이었지만, '이성적' 지식인들에게 그 현장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당장' 사회 문제를 해결하라는 대중의 요구는 무책임한 행태로 보였다. 결국 그들은 기회를 놓치고 10월의 마지막 날들에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아직은 '혁명'을 버릴 때가 아니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전개된 자유주의의 승리 시대에 '혁명'을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보였다. 세계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로 평정되었다고들 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새로운 세상' 따위 환상에 들뜨지 않고 기존 체제에 순응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불과 10년 만에 뉴욕은 9·11 사태를 맞았다. 세계 최강대국으로 군림하던 미국이 건국 이래 최악의 본토 공격을 당하고 전율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저기서 이른바 '색깔혁명'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방 기억에 떠오르는 것들만 해도 장미혁명(조지아, 2003), 오렌지혁명(우크라이나, 2004), 튤립혁명(키르키스스탄, 2005) 등이다. 정치적 격동의 물결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최근에만 해도 재스민혁명(튀니지아, 2010), 우산혁명(홍콩, 2014)을 거쳐 드디어 한국의 촛불혁명(2016-17)에 이르기까지, 혁명이라는 유령이 세계 곳곳에서 출몰하고 있다. 스페인으로부터 분리·독립을 추구하는 카탈루냐 사태 또한 유럽연합을 뒤흔들고 있는 강렬한 민족주의 운동이다. 그것은 혁명적 사태에 버금가는 사회적 현상이다.
우리는 아직 '혁명'이라는 단어를 버릴 때가 아니다. 혁명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살아간다는 것, 그 사회는 균형과 조화를 추구하지만 불가피하게 구성원들 사이에서 긴장과 역동성을 수반하게 된다는 것을 불현듯, 하지만 주기적으로 증언해주는 사태이다. 우리가 더 이상 혁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럴 필요가 없는 시대라면, 그것은 묵시록의 세계일 것이다.
물론 모든 혁명이 다 같은 것은 아니다. 그 이념과 주도세력, 사태가 전개되는 양상, 그리고 사회적 지향점이 다르다. 같은 사태를 두고 누구는 혁명이라 부르고 누구는 반(反)혁명이라 부른다. 혁명이라는 단어의 정의(定義)에 미치지 못하는 사건이나 현상을 매스컴에서 선정적으로 혁명이라 이름붙이기도 한다. 어제는 혁명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오늘은 그것을 비난하기도 한다. 한쪽에서는 혁명을 오래 기억하고 싶어 하고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얼른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한때 혁명적 사태로 알았던 것이 때가 지나면 반동이었다는 것이 드러나기도 하다. 격렬한 정치적 소용돌이를 수반하지 않았지만 결국 엄청난 변혁을 초래한 사건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일들도 있다. 혁명은 단순하지 않은 것이다. 혁명은 대체로 단 며칠, 단 몇 달 사이에 화산처럼 폭발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한 사건이기도 하고, 시간이 흐르는 동안 불가피하게 가공(加功)된 집단적 기억이기도 하다. 혁명은 일회적 '사건'을 넘는 사회적 효과를 깊고도 길게 드리우는, 복합적 현상이다.
올해로 100년을 맞는 러시아혁명도 마찬가지다. 누구는 1917년 2월의 사태를 가리켜 혁명이었다고 말하고, 다른 이는 10월의 사건이야말로 세계를 뒤흔든 진정한 혁명이었다고 말한다. 끄레믈(러시아 대통령궁)은 붉은 광장에서 더 이상 러시아혁명을 공식적으로 기념하는 행사를 치르지 않는다. 하지만, 차가운 모스크바의 거리에서는 여전히 플래카드를 들고 당당하게 혁명가를 부르면서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다. 러시아 안에서 그것을 부정하거나 외면하거나 기념하는 사람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워낙 오랫동안 반공주의에 물든 한국 기성세대의 상당수가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로 착각하고 있는 러시아는 더 이상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재의 '러시아연방은 과거의 '소련'이 아니다. 1992년 이 새로운 체제가 출현할 때 정통성의 기반을 둔 것은 소련 체제와 그것을 낳은 10월혁명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국제무대에서 '강력한 국가'를 추구하는 현재 러시아의 최고 지도부는 냉전 시대 초강대국으로 군림한 소련이라는 나라는 칭송하지만, 그 체제의 기원이 된 러시아혁명은 외면하고 싶어 한다. 혁명 전 제정러시아와 혁명 후 소련을 강대국이었다고 함께 칭송하는 것이 논리적으로는 모순이라고 해도 러시아의 현실정치에서는 훌륭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떤 권력도, 설령 그 정권이나 체제가 혁명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해도, 일단 기성제도(establishment)가 된 이상 혁명은 외면하고 싶은 것이다. 혁명 기념일을 달력 속 특정한 날짜 아래 박아놓고 생생한 현실로 튀어나오지 못하게 막기, 즉 혁명의 박제화! 바로 이것이 국가의 이념과 언론과 교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이 된다.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누구도 진짜 '연속혁명'이나 '영구혁명'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최근 단일한 국정교과서를 만들고, 정부의 입장에 동조하는 역사가들은 1917년의 사건을 '러시아 대혁명'이라고-프랑스 대혁명을 본 따-부르기로 했다(Petrov, 2017; Babashkin, 2017). '대혁명'이라는 명칭! 아마 이것이 현재 러시아연방이라는 국가가 허용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닐까 한다. 러시아의 대다수 주민들로부터는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지만, 주요 권력 기관과 대기업의 요직에 포진하고 있는 리버럴(반공·친미·자유주의자들)은 필경 그 명칭마저도 못마땅해 할 것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소련체제를 무너뜨리고 자신들이 명실공히 국가재산의 주인이 된 것, 즉 현대 러시아의 부르주아로 당당하게 등극한 1991년 사태를 '혁명'으로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혁명이 후대에 남긴 교훈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정치적·사상적 입장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이 살아 온 역사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하든 원치 않든 혁명은 대체로 예기치 못하는 순간에 찾아오는 불가피한 사태라는 것이다. 만약 혁명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기득권 세력의 위로부터 개혁-'수동혁명'이라고도 한다-이 잘 실행된다면 모르지만, 익히 알려진 정치 격언대로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한편으로 개혁은 주민 다수의 지지를 받으면서 합법적 경로를 밟아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 그런 개혁 청사진은 사회구성원들의 기대수준을 잔뜩 높여놓지만 성과는 그렇게 빨리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종 개혁 자체가 혁명 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러시아혁명 또한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61년 농노해방과 그에 뒤이은 각종 정치사회적 개혁 조치의 미진함, 그리고 이후의 반동정치가 낳은 산물이었던 것이다.
혁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도약, 또는 '진실의 순간'에는 유감스럽게도 이런 저런 충돌로 인명 희생이 뒤따르게 된다. 혁명에 극렬하게 반대하는 집단과 일전을 불사하게 되는 내전은 혁명의 논리 그 자체로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하지만 스딸린 통치 하의 소련에서 일어났듯이 수백만 명의 인민이 처형되고 추방되고 기아에 허덕이다 비참하게 삶을 마감하는 것처럼 대규모 희생이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결국 정치적 선택의 문제이다. 세계대전도 아닌 시기에 한 국가 안에서 벌어지는 그런 참혹한 희생은 '혁명'의 이름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인간의 문명에서 그 어떤 사후적 성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범죄 행위이다. 스딸린과 그 추종자들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걸쳐 강제적 농업집산화 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소련 전역의 농민들을 향해 적군을 동원하면서까지 '내전'을 벌였다. 그리고 '승리'했다. 하지만 그 승리는 주어진 조건에서 보다 합리적인 정책 선택으로 큰 재앙을 막고 더 높은 생산성을 올릴 수도 있었던 것을 해내지 못한, 당시 최고 권력자들의 무능력과 비정상적으로 작동한 정책 집행기관들의 난폭한 자의성의 증거였다.
우리는 혁명이 다가오는 날짜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다. 그런 사태의 와중에 발생하게 될 인명과 문명의 희생을 최소한도로 막기도 힘들다. 하지만 지축을 뒤흔드는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상대적으로 적은 희생을 치르면서 혁명이 진행되려면 평소의 '진지전'이 아주 중요하다. 아나키스트였던 크로포트킨은 러시아혁명 전에 최악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는 지배세력마저 기존 체제가 잘못된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혁명의 지도자였던 레닌은 1920년대 초반, 그의 말년에 혁명 전 체제, 즉 서구의 부르주아체제가 새로운 사회주의 체제의 건설을 위해 남긴 긍정적 유산이 많다는 점을 몇 번이나 지적했다. 기업과 은행의 대규모 경영과 그에 따른 회계·관리 업무의 단순 합리화, 대안적 사회경제조직으로서 협동조합의 발전, 그리고 전반적으로 높은 시민의 문화수준에 관한 반복된 언급 등. 그것은 혁명 후 국가건설 과정에서 바로 그런 조건과 능력들이 러시아에 얼마나 절박하게 부족했던가를 여실히 말해주는 것이다. 또한 레닌은 러시아 혁명가들과 공산주의자들이 그들의 혁명에 대한 열성과 헌신에 비해 실제적인 국가 운영 능력이 형편없이 저급하다는 점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기존 체제의 전복이라는 혁명적 사태의 승리자가 된다는 것과 그 후 혁명이 애초 목표로 했던 '인민을 위한 국가경영'은 전혀 다른 차원의 과업이었던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자는 전투에서 이기는 것이요, 후자는 전쟁의 승자가 되는 것이었다.
다음으로 혁명의 구체적인 전개 양상은 그런 사태가 발생하기 전에 만들어놓은 어떤 프로그램이나 전략대로 펼쳐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들만의 프로그램을 고수하는 집단은 거대한 혁명의 물결에 좌초하거나 또는 만약 승리자가 된다면 현실과 거리가 먼 목적을 위해 사회구성원들에게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혁명적 대중은 위로부터, 또는 밖으로부터 완벽하게 통제될 수 없다. 그들이 통제된다는 것은 밑으로부터 역동적인 혁명의 물결이 잦아들었다는 뜻이 될 것이다. 인민은 이제 국가 주도의 과업 달성을 위한 동원의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1930년대 스딸린은 과감하게 그 길로 나아갔다. (끝)
(이 글은 필자가 지난 10월 27일 한국정치학회 주최 학술회의에서 발표한 내용과 부분적으로 중복됨을 알려드립니다. 2017년 러시아혁명 100주년에 러시아혁명의 의미를 되돌아보고자 하는 이 기획연재는 3회에 걸쳐 게재됩니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