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대쪽’ 이회창이 전하는 역대 대통령의 ‘명과 암’

일취월장7 2017. 8. 30. 12:16


‘대쪽’ 이회창이 전하는 역대 대통령의 ‘명과 암’(上)

이석 기자 ㅣ ls@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8(월) 17:30:00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는 대선에 세 번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런 만큼 역대 대통령과의 애증 또한 적지 않았다. 그는 이승만 정권 때 처음 법관에 취임했다. 4․19 혁명이 터지기 한 달여 전이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때 혁명재판소에서 파견 근무를 했고, 전두환․노태우 정권 때는 두 차례나 대법관을 역임했다. 김영삼 정권 때 국무총리에 발탁되면서 정치인의 길에 접어들었다. 어찌 보면 김 전 대통령이 이 전 총재의 정치 스승인 셈이다. 이후 김대중 전 대통령 및 노무현 전 대통령과는 명운을 건 대선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의 정치 인생이 곧 한국 정치의 역사인 것이다. 그가 최근 출간한 회고록에 눈길이 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1000쪽에 달하는 회고록에는 역대 대통령의 장점과 단점, 이들과 만나 있었던 에피소드들이 자세히 언급돼 있었다. 

 

이 전 총재도 8월22일 회고록 출판 기자회견에서 “대통령에 당선된 분들의 역사는 정사, 야사가 되지만 내가 있던 야당의 역사는 완전히 잊힌 역사가 됐다”며 “야당의 역사도 남길 필요가 있어 패자(敗者)의 기록을 남기게 됐다”고 말했다. 시사저널은 2회에 걸쳐 회고록에 묘사된 역대 대통령의 모습을 재조명해 본다. 

 

8월22일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이회창 전총리의 회고록 출판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8월22일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이회창 전총리의 회고록 출판 간담회가 열리고 있다. © 시사저널 박정훈

 

■ ‘인간 존엄성’ 훼손한 이승만․박정희 

 

이 전 총재가 기억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 시대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대는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었다. 그는 1960년 공군법무관을 마치고 서울지방법원 인천지원 판사로 부임했다. 당시 친구와 함께 덕수궁 앞을 지나는 데, 광화문 쪽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나타났다. 그러자 경찰이 길 가던 행인을 모두 붙잡고 박수를 치게 했다. 당시 이 전 총재는 박수를 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덕수궁 파출소로 연행됐다. 

 

그는 “파출소에 끌려가 ‘빨갱이 아니냐’며 갖은 모욕을 당했다. 나중에 신분을 밝히고 풀려나긴 했지만, 개인의 존엄성 같은 것은 아예 무시되는 시기였다”며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할 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한 국가의 형태는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권력의 행사가 정의를 잃어버릴 때는 동요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박정희 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이승만 전 대통령·박정희 전 대통령 © 사진=연합뉴스


결국 이승만 정권은 4․19 혁명에 의해 막을 내렸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5․16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군부는 ‘혁명과업수행’을 명분으로 사법부에도 군인 감독관을 파견했다. 이 전 총재 역시 계엄군법회의와 혁명재판소에 파견돼 근무를 했고, 소속 재판부에 이른바 민족일보 사건이 배당됐다. 조용수 사장이 재일 간첩으로부터 자금을 받았다는 혐의였다. 당시 이 전 총재는 자금 제공자가 간첩이라는 증거가 불분명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혁명검찰부부장이던 박창암 대령과 언쟁을 벌였다. 

 

그는 “‘너 같은 판사들 때문에 혁명을 한 것’이라는 폭언까지 들었다. 며칠 후 박 부장이 사과의 뜻을 전해오고, 증거도 보완 제출되면서 이 문제는 조용히 마무리됐다”며 “그럼에도 조 사장이 사형을 선고 받은 것은 막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물론 암울한 기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원조 보수’라는 별칭답게 그는 두 전직 대통령의 긍정적인 업적 또한 제대로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해방 후 한국은 좌우 진영의 극심한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격렬한 반대에도 1948년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했다. “당시 단독정부가 아니라 남북합작을 주장하는 반대 세력의 주장에 휩쓸려 정부 수립을 늦췄다면 대한민국은 영영 탄생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고 그는 회고록에 언급했다. 이에 대한 논란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박정희 전 대통령 역시 마찬가지다. 근대화와 산업화, 그리고 경제성장의 토대를 닦은 업적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실정(失政)과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 전 총재는 “박 전 대통령은 군을 동원한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지만 단순히 권력을 향유하는 데 그친 정치군인이 아니라 나라를 바꾼 경세가였다”고 말했다. 

  

■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성격 ‘극과 극’  

 

이 전 총재는 전두환 정권과 노태우 정권 때 두 차례나 대법관(당시 대법원 판사)을 역임했다. 전두환 대통령 때인 1981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대법원 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겸했다가 대법원 판사에 임명됐다. 법원장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법관으로 임명된 것은 이례적이었다. 

 

5년 임기를 마치고 퇴임해 변호사로 개업한지 2년3개월 정도 흐를 때였다. 노태우 정부 초대 대법원장으로 취임한 이일규씨가 찾아와 대법관 자리를 제의했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이 대법원장이 재삼 간정해 받아들였다. 당시 일부 언론에서는 그가 노태우 대통령 당선자 시절 민주화합위원회에 참여해 대법관에 다시 발탁된 것처럼 보도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그는 설명했다.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1987년 6월 전두환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 사진=연합뉴스


그가 기억하는 두 전직 대통령의 성정은 극과 극이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고 그는 감사원장에 발탁됐다. 그는 ‘율곡사업’ 감사와 ‘평와의 댐’ 감사를 지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 재임 당시 벌였던 주요 사업이었다. 당시 국방부는 자체 조사로 가닥을 잡은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감사원 감사가 다시 시작될 경우 전 정권에 대한 압박으로 비쳐질 수 있었기 때문에 반발이 적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까지도 나서 “조사를 안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했을 정도다. 

 

이 전 총재는 국무총리가 된 후 전직 대통령을 예방한 일이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감사원장으로 있을 때 직책상 고통을 드린 있다”고 말했다. 그러자 전 전 대통령은 “아, 괜찮아요. 감사원장으로 하실 일을 하신 건데 신경 쓰지 마세요”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예방하고 떠날 때도 똑같은 인사를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사실 그때는 많이 힘들었다”고 대답했다. 각각의 대답에 두 인사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었던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호방한 성격을 보인 반면, 노 전 대통령은 당시의 유쾌하지 못한 기억을 솔직하게 나타낸 것으로 그는 평가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 “이상주의자면서 동물적 후각 가져”

 

이 전 총재는 김영삼 정부 시절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때문에 회고록에도 비교적 많은 부분을 김 전 대통령과의 인연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그 스스로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것은 문민정부 초대 감사원장에 오른 데서부터 비롯됐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 전 총재가 김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 2월이었다. 14대 대통령 당선인 신분으로 이 전 총재와 오찬을 함께 하며 감사원장직을 제안한 것이 계기가 됐다. “소탈하고 친화력이 있어 보인다”는 게 김 전 대통령의 첫인상이었다. 특히 “자신이 이끌 새 정부의 부패척결과 기강확립에 관한 열정과 진정성이 가슴에 와 닿았다”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1993년 12월17일 김영삼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당시 신임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993년 12월17일 김영삼 대통령(왼쪽)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당시 신임국무총리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당시 대법관직을 두 번 역임했고, 두 번째 임기 역시 1년여를 남겨둔 상황이었다. 감사원장으로 가게 될 경우 권력에 가까이 가게 되거나, 명리를 추구하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감사원장직을 수락했다. 그는 “기성 정치인이 ‘개혁’이나 ‘부정부패 척결’을 언급했다면 정치적 수사(修辭)나 허풍으로 여길 수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기성 정치인에게 보기 드문 이상주의자의 풍모를 느꼈다”며 “뒤에 알게 됐지만 김 전 대통령은 동물 같은 정치적 후각을 가졌으면서 약간의 이상주의자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감사원장 시절 그는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앞서 언급한 전 대통령들의 조사라든가 안기부 조사 등 일부는 대통령과 견해가 달랐지만, 차분히 설명하면 더 이상 고집을 세우지 않았다. 무엇보다 청와대 등 외부로부터의 낙하산 인사를 근절할 수 있도록 해준 김 전 대통령에게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1993년 8월 그는 대법원장직의 제의를 받게 된다.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8월 말쯤 대법원장의 사표를 받고 9월 초에 후임 발표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9월 초 주례회동에서 돌연 말을 바꿨다. 대법원장이 임기 중에 사임하는 것은 헌법상 모양이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이해가 안됐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참았다.

 

이후 김덕주 대법원장이 신고한 재산이 구설에 오르면서 결국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자 김 전 대통령은 이 전 총재에게 다시 대법원장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대통령의 신뢰성에 깊은 회의가 들었다”고 언급할 정도였다. 얼마 후 오해는 풀렸고, 이 전 총재는 그해 말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됐다. 통일안보정책 조정회의 문제를 놓고 김 전 대통령과 이 전 총재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대통령 면담 과정에서 고성이 오갈 정도였다. 결국 이 전 총재가 사퇴를 하는 것으로 언쟁은 마무리됐다. 이 전 총재는 “총리 경질에 대한 언론의 비난과 비판이 커지자 청와대 및 민자당은 별의별 유치한 인신 공격성 발언을 일제히 쏟아냈다”며 “무엇보다 김 전 대통령 퇴임 후 회고록에서 ‘잘못했으니 한 번 만 더 기회를 달라고 시종일관 변명으로 일관했다’고 언급해 불쾌했다. 사실이 아니다”고 강조했다. 



‘대쪽’ 이회창이 전하는 역대 대통령의 ‘명과 암’(下)

이석 기자 ㅣ ls@sisajournal.com | 승인 2017.08.29(화) 17:30:00

 

■ 김대중 전 대통령 “능력 있지만 실패한 대통령”

 

이 회장 전 총재는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와 맞붙었다가 1.6% 차이로 아쉽게 패했다. 그래서인지 당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서 “DJP 연합으로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결과적으로 이 연대는 대통령이 된 후 족쇄가 됐다”고 평가했다. 그는 “대통령이 되기 위해 DJP 연합을 성사시켰지만 합의 조건이었던 내각제 개헌을 해줄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본다”며 “대통령이 된 후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당연했다. 두 인사의 불협화음은 김대중 정권의 동력을 크게 떨어트렸다”고 설명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당은 원내 2당이었다. 김종필 총재의 자민련과 무소속 일부를 합쳐야 겨우 과반의석을 확보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 대통령은 원래 1당인 한나라당에 대해 의원 빼가기와 사정으로 일관했다. 이후 자민련 등과의 공조로 과반수를 만든 뒤부터 과거 군사정권 못지않은 일방적 강행처리를 수시로 자행했다. 심지어 ‘의원 꿔주기’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당 소속 의원을 탈당시킨 뒤, 자민련에 입당시켰다. 여당 내에서조차 반발이 일었고, 권력 누수를 가속화시키면서 임기 말에는 국정수행 동력이 거의 소진됐다는 것이다. 

 

김 전 총재는 “개인적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은 능력이 있고, 대통령직에 대한 그 나름의 열정도 가지고 있다고 본다. 재임 중에 노벨평화상까지 수상해 더할 수 없는 영예까지 얻었다”면서도 “대통령으로써 업무수행을 냉정하게 평가하면 다르다. DJP 연합으로 국정수행의 족쇄를 스스로 자초했다”고 말했다. 

 

1998년 11월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998년 11월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오른쪽)와 악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대북 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자유 민주주의의 정체성과 원칙이 실종된 대북 정책으로 북한이 오늘날과 같은 핵무기 및 미사일 강국이 되는 것을 도와준 결과를 가져왔다고 지적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북 정책 기조는 ‘햇볕정책’이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개설 등 북한과 지원․교류를 확대했다. 

 

뒤이은 노무현 정권도 이 ‘햇볕정책’을 이어 받았다. 두 대통령 모두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도 가졌다. 이렇게 10년 동안 북한에 조건 없이 지원․협력했지만 북한은 변하지 않았다. 핵개발을 포기하기는커녕 오히려 핵무기를 고도화했다. 장거리 미사일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는 등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더욱 악화됐다는 것. 

 

김정일 위원장의 치밀하게 계산된 사기극이었고,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이 이를 도와준 결과가 됐다고 이 전 총재는 평가했다. 그는 “두 대통령의 대북 인식이 기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햇볕정책은 이런 잘못된 기본 인식에서 나온 결과물이다”고 말했다. 

  

■ 노무현 전 대통령 “뛰어난 언변과 돌출행동으로 존재감 과시”

 

이 전 총재는 상대적으로 뒤늦게 정치에 입문한 만큼 노무현 전 대통령을 잘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제3자의 관점’이란 조건을 달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평가했다. 회고록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정치에 들어온 지 꽤 오래 됐음에도 연륜에 알맞은 기반을 잡지 못했다. 변방으로 돌며 전두환 전 대통령 청문회에서 보듯이 뛰어난 언변과 돌출 행동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는 정치를 해온 것으로 평가했다. 

 

그는 “이런 사람은 대체로 시대의 흐름이나 변화의 바람이 불 때 편승해 자신의 입지를 키우는데 능하다”며 “김대중이라는 큰 기둥이 뒤로 물러나면서 민주당은 국민경선이란 새로운 방식을 선택했다. 그 동안 변방에서 돌았던 그가 이 변화의 바람에 나타나 차기 대선주자로 부상하는 기회를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2002년 실시된 6․13 지방선거를 앞둘 때였다. 광주 경선에서 시작된 ‘노풍’으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노 후보는 돌출 행동을 보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찾아가 6․13 지방선거에 나갈 부산시장의 후보 선택권을 위임한 것이다. 그는 “부산 민주계의 지지를 얻어 득표해보자는 계산이었지만 잘못된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2002년 3월9일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선출 제주경선대회에서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002년 3월9일 제주 한라체육관에서 열린 민주당 대선후보선출 제주경선대회에서 노무현 당시 대선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실제로 이후 노 후보와 이 전 총재의 지지율 격차는 갈수록 좁혀졌다. 5월에는 지지율이 역전됐고, 다음 달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은 참패했다. 전국 16개 시도지사 중 한나라당은 11곳에서 승리했다. 민주당은 호남과 충정 지역을 겨우 확보하는 데 그쳤다. ‘노풍’ 역시 가라앉으면서 민주당 내에서는 ‘후보 교체론’과 ‘제3후보 영입론’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3후보로 2002년 한일월드컵 조직위원장을 맡으며 지지율이 급상승한 정몽준 의원이 꼽혔다. 

 

11월15일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 합의가 이뤄졌다. 당시 이 전 총재는 2, 3위의 후보끼리 단일화를 해도 판을 뒤집지는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는 오판이었다. 양 측은 TV 토론을 거쳐 여론조사 방식으로 후보 단일화를 하기로 합의했고, 노 후보가 단일화 후보로 추대됐다. 국민들은 또 하나의 역전 드라마에 크게 열광했지만 이 전 총재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노무현 후보는 밀리고 있는 처지였다. 세 후보 중에서도 3위였고, 당내에서는 후보 교체론에 시달리고 있었다”며 “불리한 처지에 있던 노 후보는 건곤일척 모험수로 정 후보와의 TV 토론과 여론조사라는 승부수를 던졌고 이것이 적중했다. 마치 도박판에서 돈을 잃고 있던 도박사가 모든 것을 한 판 승부에 걸어 도박판을 휩쓰는 것과 같다”고 평가했다. 

  

■ 박근혜 전 대통령 “실질에 대해 너무 몰라”

 

이 전 총재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였다. 박 전 대통령이 자신을 찾아와 한나라당에 입당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부 언론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정치 입문 시기를 대구 달성구 보선에 출마한 1998년으로 보도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박 전 대통령을 정치에 입문시킨 사람은 바로 나”라고 말했다.

 

당시 한나라당 다수파라 할 수 있는 YS 계열의 민주계는 反(반) 박정희 정서가 강했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정치 하에서 투옥되거나 처벌 받은 경력이 있는 의원들은 박 전 대통령의 입당에 노골적으로 거부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그가 당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받아들였고, 부총재로 지명했다. 이 전 총재는 “일부 언론에서 DJP 연합에 대항하기 위해 그를 받아들인 것으로 추측성 보도를 냈다. 당시 그가 그런 정도의 지지세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동료 의원들과 어울리거나 섞이지 않았다. 혼자 움직이며 언론이나 여론의 관심을 끄는 주제를 선점해 당내 입지와 존재감을 키우는 독특한 행보를 보였다. 자신의 소신이나 고집을 관철하는 기질 만큼은 대통령으로써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2017년 3월30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2017년 3월30일 탄핵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사진=사진공동취재단


하지만 그가 대통령이 된 후 국정운영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곧 실망했다. 특히 그가 집권당의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에 대해 ‘배신의 정치’ 운운하면서 공개적으로 매도하고, 원내대표직에서도 사퇴하게 만드는 것을 보고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소신을 지키고자 한 사람이 왜 배신자로 낙인찍히는지 이해가 안됐다”며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이 터지고 탄핵 사태로까지 진전되는 상황을 보면서 ‘그가 실질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있었다’고 실감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부모가 모두 총격으로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이후 청와대를 나와 인고의 세월을 보내다 정치에 입문했다. 이 전 총재는 “그가 이 파란 많은 역경을 거치면서 대통령이 되겠다는 강한 집념과 열정을 키워온 것으로 짐작했다”며 “이후 원하는 대로 대통령이 됐지만 ‘대통령의 일’에 대한 정열과 책임감, 판단력은 갖추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점이 내가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