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1일, 책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를 쓴 사회학자 오찬호 작가가 인문학 강연을 위해 일산대진고를 찾았다. 강연의 주제는 ‘남자답게, 여자답게가 아닌 사람답게’다. 청소년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이슈인 ‘남녀평등 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이었기에 기대 반 긴장 반, 그리고 추가로 걱정 반까지 도합 150%의 심정으로 강연장에 찾아갔다.
[사진제공=오찬호]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강연자에게 궁금한 점을 포스트잇에 써서 붙이는 게시판이었다. 포스트잇 속 내용은 지금 청소년의 성평등 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물론 수준 높고 가치 있는 질문도 많았다. 그런 질문들은 실제로 질의응답 시간에 질문으로 이어졌다. 반면, 더 눈에 띄는 쪽지들은 공격적이고 혐오성 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결국 쪽지 내용을 검토한 선생님들이 부절절한 것들을 떼어내고 강연을 시작했다.
강연에 들어가기에 앞서 오 작가는 자신을 ‘세상을 긍정하는 염세주의자’라고 소개했다. 염세주의란 세계나 인생을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을 말한다. 반면 ‘세상을 긍정하는 염세주의자’란 비판을 잘 용납하지 않는 사회 풍조에서 세상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긍정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또한 작가님은 “세상에 객관적인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측면’만을 보려는 것이 오히려 세상을 부정하는 시각”이라고 설명했다.
오 작가는 ‘유리천장’을 그 예로 들었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에 대한 무의식적인 차별이 존재한다. 동시에 그것을 뚫고 성공해내는 경우도 존재하긴 한다. 하지만, 사회는 유리천장에 가로막힌 여성 전체를 보기 보다 유리천장을 뚫은 한 경우만을 바라보며 이를 긍정적으로 다룬다. 작가님은 “이런 점은 결국 세상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며 “‘예외가 아니라 평균이 어디까지 와있는지가 사회를 규정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사회가 병에 듦으로서 개인도 병이 든다”고 꼬집었다. 현대 사회에는 워킹 푸어, 일명 일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가난의 원인이 이들의 게으름에 있다고 곡해해 경쟁의 불공정성에 대한 논의를 종식시켜버린다. 심지어 이 와중에 취업이나 연봉 등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더 많은 불이익을 받는다. 이 경우 여성은 사회에서 제시하는 강화된 여성성의 기준에 자신을 더욱더 맞추게 된다. 사회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공포로 인해 어느새 비판할 의지는 사라진다는 것이다.
“남자다움을 강조하는 것도 문제”라고 설명했다. “남자다움을 강조하다보면 남녀간에 거리를 두게 되며, 동성애에 대한 혐오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근본적인 사회적인 문제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강연은 ‘중립의 오류에 빠지지 말 것’을 강조하며 막을 내렸다. 주제와 내용 모두 흥미로웠고 알찼지만, 시간이 짧아 다양한 이야기를 다 꺼내지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도 남았다. 강연 이후 질의응답이 이어졌는데, 그 중 눈에 띄는 질문도 있었다.
“남성 페미니스트는 당사자성이 결여되어 있는데, 성평등 문제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오 작가는 이렇게 대답했다.
“같은 상황에서도 남성과 여성이 겪는 공포의 차이가 다르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상황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공격적인 상황에 대한 공포가 축적돼 있지만, 남성에게는 그렇지 않다. 그 공포의 차이가 바로 사회에 존재하는 차별이다. 남성 자신은 그 공포의 크기를 알 수 없다.”
또 오 작가는 “나는 남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할 뿐”이라고 덧붙이면서 “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지칭하는 것이 조금 부끄럽다. 스스로 목숨 걸고 싸워온 여성 페미니스트와 동급으로 올리는 것 같아서”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작가님과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일산대진고 교내 신문부원 두 명, 그리고 선생님 두 분을 동행해 강연 후 짧은 인터뷰를 진행했다.
-저서를 보면 ‘메갈리안의 미러링’을 언급하며 ‘여성들이 논리적인 설명을 듣지 않는 남성들을 상대로 꺼낸 최후의 카드’라고 묘사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들의 행위를 ‘미러링’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될 수 없다고 보는 경우가 많아요. 또 스스로 여성 혐오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남성의 경우, 자신이 미러링에 의해 공격대상이 된다는 것을 불쾌해하는 경우도 있고요. 이런 점들로 볼 때, 메갈리안의 행동이 미러링이라는 범주 안에서 이해될 수 있을지, 또한 그 미러링은 과연 도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인지 궁금합니다. “미러링은, 지금 시점에서 옳나 그르냐를 따지는 건 별 다른 의미가 없어요. 미러링이 어떤 맥락에서 등장을 했느냐를 두고 판단해야죠. 이후는 사실상 진흙탕이죠. 이미 미러링이라는 기법 자체는 진흙탕이에요. 이런 와중에 미러링이 옳나 그르나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죠. 그런데 질문하신 것처럼, 미러링을 통하면 불특정 다수가 한꺼번에 이상한 남자가 되어 버려요. 바로 미러링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기도 해요.
예를 들어 운전을 잘 못하는 누군가가 있다고 해보죠. 그게 남성일 때는 남성이라는 변수를 말하지 않아요. 그냥 ‘우이씨 나쁜 놈’이 되죠. 근데 그 사람이 여성이면 ‘김여사’가 등장해요. 뉴스에서도 교통사고 소식을 다루면서 가해자가 여성일 때는 가해자 성별까지 전해요. 남성일 때는 “가해 운전자는 당시 만취상태였습니다” 같은 식으로, 그러니까 사고를 낸 원인을 언급하죠. 그만큼 세상은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같은 실수를 하더라도 그게 여성이란 존재의 한계인 것처럼 묘사해 왔어요. 이게 미러링을 만들어낸 가장 큰 요인이죠. 결론은 충분히 그런 반란을 저지를만한 배경이 전제에 있었다는 거예요.”
-혹시 작가님 집안에서는 성평등 교육을 어떻게 하시나요. “성평등 교육이라… 잘 모르겠네요. 제가 말하는 성평등이란 남녀만의 문제가 아니라 성소수자까지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라서요. 이런 일은 있었어요. 어느 날 제 아이가 학교를 갔다 오더니 겪은 혼란을 이야기하더군요. ‘아무도 아빠처럼 생각하지 않는다’고요. 이럴 때는 괜히 죄 짓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늘 딜레마에 빠져 살죠. 그럼에도 굳이 신경 쓰는 게 있다면 일상에서 모든 이야기를 할 때 외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외모에 대한 칭찬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외모를 가지고 칭찬하면 그 반대편에서는 역으로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서예요. 교육도 마찬가지지잖아요. 반에서 100점 맞은 사람 일으켜 세운 다음 박수치는 것도 비교육적이거든요. 이런 소리 하면 “그게 대체 뭐가 문제냐”라며 종북좌파란 소리를 듣기도 해요.
그런데 그냥 ‘아름다운 게 좋은 거지’ 하면서 넘어가다보니까 방송에서도 “여자는 예쁘면 고시 3관왕” 같은 소리나 하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보면 어떤 한쪽이 마치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아이가 타인의 외모를 평가하지 않고 외모적 기준의 굴레에 스스로 빠져있지 않게 커 나갈 때 칭찬을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런 정도에서 평등 교육을 하고 있어요. 둘째 아들의 경우에는 보수적인 집안에서 바라보는 아들에 대한 기대치가 있어요. 그런 것에 딸과 아들이 물들지 않도록 노력해요. 저 스스로는 “남자가 그러면 되나”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사실 무척 많아서, 다 신경 쓰려면 머리가 터질 지경이죠. 실수했을 때 자각하고 빈도수를 줄여나가면 성공적인 교육이라고 기대하는데, 사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도 힘드니까. 아쉬워요.”
[사진=중앙포토]
-교육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작가님의 저서를 보면, 성 인식에 있어 가정교육보다 사회화기관이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점을 딸의 경우를 통해 느꼈다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장 우리가 다니는 학교도 그에 포함되는 개념이잖아요? 그렇다면 성평등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학교라는 사회화기관에서는 어떤 노력이 어떻게 이뤄져야 할까요. “노력이 필요하다면, 바로 시민 교육이겠죠. 그런데 학교를 다니는 이유가 사실상 시민이 되기 위한 일이에요. 하지만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콧방귀도 안 뀌죠. 지금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입시의 문화’를 기준으로 모든 학교가 평가를 받으니까요. 서울대에 몇 명이 가냐를 놓고서 좋은 학굔지, 나쁜 학굔지를 자랑하죠. 그러니까 그런 지점들이 확연히 사라지게 될 때, ‘이 학교는 정말 젠더 감수성이 뛰어난 학교야’ 이런 점이 어필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지만, 그런 노력과 교육이 가능하게 되는 거죠. 하지만 이런 전제가 없는 상태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게 뭐가 중요해. 수능에 나오지도 않는데’ 이렇게 되는 거죠. 일상에서 해야 하는 여러 가지 노력도 분명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우리가 대입의 결과를 가지고 학교를 평가하는, 그러한 지점이 낮아지고 다른 시민 교육이 가능해지는 일이 먼저라고 생각해요.”
-종교계에서의 성차별에 대해서도 언급을 하셨는데요. 보편적으로 종교는 존중되야 한다고 여겨지지만, 그런 종교가 인권 침해를 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은 것 같아요. 과연 종교의 자유가 인권 존중이라는 가치와 맞물렸을 때도 존중되어야 할까요. “어떤 종교이든 간에, 종교는 사회 안에 존재하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공동체적 가치를 벗어나는 종교의 자유, 종교의 권한이라는 건 없다고 봐요. 물론 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그래서 어떤 종교는 막 세금도 내지 않겠다고 하죠. 그런데 우리가 절대로 협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어요. 종교이든 무엇이든, 사회 공동체 안의 가치를 훼손할 수는 없다는 것이에요. 인권 침해가 종교 안에서 행해지는 것을 두고 ‘종교니까 괜찮다’라고 바라보는 것은 사실상 모두의 사회적 직무유기죠.
또 이런 측면이 과거에 비해서 점점 종교의 힘이 약해지는 이유라고 전 생각해요.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거든요. 예전에는 그게 차별인지 몰랐지만, 지금은 차별적 요소를 감지하죠. 이런 점 때문에 종교에 등 돌리는 사람도 있고요. 전 아주 바람직한 시민의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페미니즘은 여성인권을 말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도 여러 가지 생각으로 나뉘잖아요. 일례로 유명 여배우이자 페미니스트인 엠마 왓슨의 경우 ‘남성과 함께 하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다 다른 페미니스트들에게 공격을 받은 적이 있고요. 페미니즘 안의 여러 가지 사상 중에서 본인이 보기에 ‘좀 아닌 것 같다’ 혹은 ‘본인과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싶었던 것이 있으신가요. “없어요. 그런데 없다는 게 다 좋아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예를 들면 심리학에도 사실 갈래가 많거든요, 그중 더 마음이 가는 이론이 있는 거죠. 페미니즘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데 그것을 재단해내는 것 자체가 사실상 학문에 대한 왜곡된 접근이죠. 다른 학문에는 그런 일이 없거든요. 사회학 안에 수십 개의 이론이 있고, 심리학 안에도 수십 개의 이론이 있고, 서로 치고받고 싸우지만, 네가 옳니 그르니 이렇게 따지지 않아요. 그런데 여성학에서만 ‘그래도 저런 여성학은 문제가 있다’ 이런 식으로 나와요. 문제가 아니라 주장인데 말이죠.
게다가 한국의 남성들은 논리로서 이 개념을 이해하는 게 아니라, 문화로서 이해해요. 첫째로 남자는 그저 ‘남자다운’ 존재고, 두 번째로 여자를 상대적으로 비하하는 두 가지 문화를 동시에 가지죠. 때문에 아무리 논리가 옳아도 그 벽을 뚫을 수가 없어요. 벽을 뚫으려고 할수록 남자들은 오히려 더더욱 외골수가 되죠. 그래서 저는 나름 전략적인 방식을 쓰고 있어요. ‘남자답게가 아니라 사람답게’, ‘우리가 이런 식으로 여성 비하하면 안 되잖아?’ 이런 식으로요. 하지만 이런 접근을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싫어해요. ‘이렇게 온화하게 해서 뭐가 되겠냐’는 것이 이유예요. 사실 우리의 페미니즘은 남자가 남성만의 문화를 가지게 된 배경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든요. 실제로 이런 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남자가 변명을 하기 시작해요. 아닌 경우를 찾아오려고 하죠. 구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이 돼 있지 않아서죠. 그래서 제가 보기에는 전략적으로 돌아가는 게 좀 필요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최근엔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공감을 표하는 등 인식의 차이를 보이는 경우는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작가님은 인식의 변화만으로는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하셨는데요. 이유가 궁금합니다. “인식의 변화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걸 가지고 평등해졌다고 말하면 안 된다는 뜻이에요. 현실은 과거에 비해서 폭력성이 줄어든 것뿐이니까요. OECD 국가들과 비교했을 때 세계적인 평균치는 또 달라요. 여전히 가사노동의 차이 같은 것들이 한국이 유독 기울어져 있는 등 눈에 띄게 확연히 보여요. 이런 차이가 객관적으로 줄어들지 않는 한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라고 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 이 지점이 굉장히 어려워요. 실제로 누군가 이런 얘기를 하면, 상대는 보통 “우리 가족 대단히 행복하다” 이렇게 말해요. 제가 보기에는, 글쎄요, 왜냐면 이런 집안일수록 남자는 더 남자답게 키우고 여자는 여자답게 키우고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행복하겠지만, 사회적으로 과연 권장할 만한가를 묻는다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까 ‘인식의 변화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그것 자체가 우리 사회가 평등한 사회라는 지표로 정해져서는 안 된다. 과거보다 다만 조금 좋아졌을 뿐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네요.”
-작가님 고향이 경상도라고 알고 있습니다. 보수의 상징이라고 하는 경상도 남자가 이 정도의 진보적인 인권 감수성을 지니게 된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라는 책은 저 스스로 성찰한 내용이 많이 담겨 있어요. 이렇다 보니, 책에 나오는 사례는 보통 우리 집 이야이게요. 재미있는 점은 우리집이 상당히 보수적인데 또 약간 선비 기질이 있어요. 그래서 ‘취업을 위해서 공부한다’는 생각은 증오해요. 우리집을 연구하는 과정이 흥미롭기도 하고 재밌어요. 또 일상을 제가 쓴 글처럼 살아서 그런 글이 나온다기보다, 글을 쓰다 보니까 제 일상이 이상해서 노력하게 되는 게 많아요. 부끄러우니까. 이런 점들이 맞물리면서 성찰하지 않았나 생각하는 거죠. 결국은 학문적인 주변 장치가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한 달에 한번 책 한 장 읽는다고 사람이 바뀌지 않는 거죠. 자기성찰을 계속 할 수 있을 정도로 객관적인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내면을 살펴보는 건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거든요. 24시간 동안 어떤 정보에 노출돼 있느냐에 따라 그 여부가 달라지죠. 제가 야구를 무척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조기 야구회를 절대 가지 않는 이유는 그 문화가 너무 싫어서예요. 일요일 아침 4시간을 운동하고 술 마시고 음담패설하는 거요. 그 안에 들어가면 그 문화에 익숙해지니까 그게 싫어요. 이것도 되게 중요한 훈련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글을 쓰면 스스로 고립되려고 하는 버릇이 있어요. 좀 장황하게 말했지만, 정리하면 나한테 익숙한 것을 객관적으로 수정해 나가야 하는 시점들이 있다는 거예요. 물론 주변에서 왕따를 당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어차피 필요한 왕따이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16주 동안 사회학 강의를 하면 10주차부터 고립된 외톨이가 되요. 제 수업을 잘 듣는 학생은 12주차부터 친구가 없어요. 14주차에는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죠. 저는 그게 아주 아름다운 갈등이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책을 읽고 나면 학교 교실에서도, 집안에서도 불편하고 거슬리는 장면이 눈에 많이 띄어요. 그 전에도 계속 알고 있었지만, 그러려니 했던 장면들이죠. “제 책이 제공하는 게 바로 그거죠. 예민한 다른 더듬이를 하나 만들어 주는 거예요.”
-작가님이 강연 중에 말씀하신 것처럼, 여성들은 직장에서도 직장의 꽃으로 여겨지는 등 여러 가지 한계에 부딪치게 되는데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여성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요. “수많은 여성이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자보다도 더한 노력을 하죠. 보통 성공한 CEO를 보면 아이는 다 다른 사람이 기르곤 해요. 그리고 사람들은 여성이 스스로 남성 사회를 극복해나간다고 표현해요. 제 생각은 달라요. 그저 예외가 될 뿐이에요. ‘저 사람은 저런 환경에서도 잘 성공했다’는 예외죠. 사회적 레일을 전복시킨다는 것은 한 번에 이뤄지는 일이 아니죠. 스스로 도전하는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죠. 아닌 경우, 나와는 상관없더라도 도전하는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연대와 지지를 보여주는지가 중요해요. ‘나는 어쩔 수 없지만 너는 참 대단하다’라는 식의 연대요. 이게 참 중요하거든요.
반대로 수많은 연대가 꺾이는 이유가 바로 ‘직장의 꽃도 아닌 게 저런다’, ‘꽃이 되려는 노력도 안 해보고 저런다’, ‘자격지심이다’ 같은 반응을 보여서예요. 누군가는 이런 변화를 추구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것을 지지하고 연대를 보여줘야지만 ‘이력서에 사진 안 붙이기’ 이런 일이 실제로 이뤄지는 거죠. 본인이 못한다고 현실 자체를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잘못된 것은 잘못된 거니까요. 언행을 일치시킬 수가 없을 때 사람은 마치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했다는 듯 쉬운 쪽으로 언행일치를 해버려요. 언행이 불일치함으로서 일어나는 불만 속에 우리가 살아가는데도요.
연대의 방식도 다양하죠. 어른들은 보통 ‘객관적으로 연대 활동을 보여준 징표가 뭐가 있냐’라고 물어요. 결국 돈이니까. 지지하는 매체를 정기 구독하냐? 시민 단체 활동에 후원을 하느냐? 법안 마련하는 국회의원을 후원금을 내느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죠. 그런데 연대의 방법은 그것 말고도 많아요. 페이스북에서 ‘좋아요’를 눌러주는 것부터 트위터에서 리트윗을 해주는 것, 그리고 긍정의 한 마디를 전해주는 것까지 모두 포함돼 있죠. 그걸 바로 정치라고 말해요.”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면요. “제가 이런 걸 제일 싫어해요. 막 조언을 하고 이런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아, 그럼 이 질문은 넘어갈까요. “음, ‘남자답게 여자답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더 평등하고 좋은 사회로 가는 게 중요한 것이다. 이정도면 될 거 같네요.”
오찬호 작가는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진격의 대학교』를 쓴 사회학자. 1978년에 태어났고 사회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7년부터 전국의 11개 대학 및 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며 여러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남자다움, 여자다움이 아니라 오직 ‘사람다움’에만 구속된 개인들로 넘쳐나는 사회를 꿈꾸며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를 집필했다.
글=서정환(고양시 일산대진고 1) TONG청소년기자 화정지부
[독자투고] 여학생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2016.07.01 17:00
종종 성평등에 대해 논하는 기사의 댓글을 읽다 보면 남성은 기본적으로 여성이 왜 힘들어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여성 상위시대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성을 향한 무차별적인 폭언도 볼 수 있다.
아마도 사회 구조와 오랜 인식이 빚어낸 몰이해일 것이다. 나와 같은 여학생의 눈으로 본 여러 사례들은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과 다르다.
#1 SNS에서 논란이 된 사진이 있다. 통통한 여성과, 마른 남성이 함께 걸어가는 사진이다. 해당 게시물에는 “연애에 여성의 외모가 다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다. 멋있어 보이려고 썼겠지만 사실은 편견에 가득한 생각이다.
여성을 기본적으로 평가의 대상으로 여기며 그들의 특성을 비교하는 것은 인권침해다. 마른 체형을 비롯한 외모, 어투, 성격 등에 대해 사회가 강조하는 ‘여성성’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일 자체가 잘못이고 악습이다.
#2 최근 고려대학교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논란이 된 후 올라온 일부 남성들의 글이 화제였다. “남학생들끼리 이런 건 별 일이 아닙니다. 너무 충격 드시지 마세요”, “상상과 현실은 구분하실 줄 아셔야죠. 저희들이 행동을 행하지 않는데 일반화하시는 건 좀 아닙니다”라는 반성 없는 글이 올라왔다.
2013년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성청소년 중 42%는 다형태의 성폭행을 경험한 것으로 나타났다. 남성청소년의 경우 가해자 성이 동성인 경우가 많으나, 여성청소년들의 경우엔 압도적인 비율로 ’남성‘이 가해자다. 학생과 학생 사이의 범죄뿐만이 아니다. 주변에서 받은 제보에는 아르바이트 피해 사례도 상당히 많았다. “너는 가슴이 큰데 그에 비해 너무 다리가 굵네”, “나와 연애하자, 내가 잘해줄게” 같은 말들은 너무도 흔하다.
“남자들을 일반화하지 말라”고 하는데, 여성이라고 ’선량한 남자‘와 ’범죄자‘를 구별할 수 있는 특별한 눈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경계를 지적하는 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 “여자는 수학을 못할 거야, 그러니까 이공계 계열에서는 남자들이 좀 더 많지.”
생각보다 널리 수용되는 편견 중 하나다. 이 논리대로면 현재 학생수는 남학생이 많으니 이과가 많아야 하나 현실은 그 반대다.
한 여학생은 과학고 입시 준비 당시 또래 남학생들로부터 “물리학과는 ‘남초’ 학과로 유명한데, 여자애가 물리 고른 애가 있어? 남자 꾀려고?”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들이 이런 여성 비하를 멈춘 계기는 바로 학원 시험 성적이 발표된 이후였다. 자신보다 높은 여학생의 성적을 보고 가만히 있게 된 것이다. 이 실화에는 두 가지 현상이 담겨 있다. 이공계 학문을 수학하는 여성에 대한 비하, 그리고 기본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학업 성적이 열등하다는 뿌리 깊은 편견이다.
이 글을 쓰고자 SNS에서 제보를 받았다. 한 학생은 학교 교사로부터 문제가 있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고 털어놨다. “여자는 무조건 잘 생기고 돈 많고 차 있는 복학생 오빠 만나야지”, “남자는 얼굴 못생겨도 매력 있으면 되지만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뭐라도 되니까. 아, 너넨 다 예뻐!“ 학생들의 가치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사로부터 잘못된 성 가치관을 주입받은 경험이다.
#4 광주 광산구 의회에서 ‘저소득층 지원물품에 생리대 추가 건의안’에 관한 논의 중, 한 남성 의원이 “생리대라는 말은 거북하다, 위생대로 바꾸자”고 제안해 논란이 됐다. 생리는 자궁이 착상을 위해 아기집을 짓다가 그 혈벽이 무너지며 피가 배출되는 것, 즉 생명을 준비하는 여성에게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생리는 결코 거북스럽고 역겨운 과정이 아니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의 생물학적 기원에 대한 기본적인 경외심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이 암담하다”는 정의당 심상정 의원의 말은 상식적이고 당연하다. 동시에 이 사회에 수용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 알려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서로의 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은 숭고한 것이고,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여성청소년의 시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래 질문들에 대해 답해보길 바란다. 밤 10시에 길을 걸을 때 불안해서 주먹 꼭 쥐고 경계하며 집 근처 길을 걸어봤는지, 지하철에서 ‘오늘은 성추행이 없겠지’ 하고 걱정해 봤는지, 성폭행에 대한 낮은 실형 선고율에 대신 좌절해 봤는지, ‘남녀’는 그냥 수용하면서 ‘여남’이라고 하면 ‘메갈이냐’라고 질문 받을 때의 비참함을 아는지, 미래 남편이 ‘대리 효도’를 시키지는 않을까 걱정해 봤는지, 가정 폭력을 미리 걱정해 봤는지, 대학교 가서 안주거리가 될까 걱정해 봤는지, 여대를 향해 드세다고 난리치는 사람들을 보고 한숨 쉬어 봤는지.
성평등 요구는 갈등의 씨앗이 아니다. 성평등 의식의 확산으로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는 사회를 이뤄내는 것이 앞으로 이 세상을 오래 살아갈 여학생들, 아니 전체 여성의 소망이다.
3세 아이를 기르며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공부하고 있다. 일하는 시간에는 친정어머니가 육아와 집안일을 대신 해주신다. 어느 날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열었더니, 가지런히 다듬어진 식재료가 눈에 띄었다. 껍질 벗긴 알이 실한 양파, 어떤 요리에든 편히 넣을 수 있게 어슷썰기 된 대파, 곱게 갈린 마늘 등. 내가 가장 귀찮아하는 일 위주로 모든 일을 말끔하게 해 놓고 가신 엄마. 순간, 남성들이 육아 및 귀찮은 집안일을 여성에게 미룬다며 육아와 가사에 있어 여성에 대한 한국 사회의 구조적 차별을 이야기하던 나야말로 엄마에게 또 그 가장 귀찮은 일을 떠넘기고 있는 당사자라는 생각에 서글퍼졌다.
나는 엄마가 내가 여성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대신해 주는 딱 그만큼의 시간과 범위 안에서 경제적 독립과 자아계발을 한다. 나의 자아는 엄마의 수고에 빚지고 있다. 여성의 사회적 기대 역할과 지위를 빚어내는 세세한 권력관계를 포착해내고 드러내려는 내 페미니즘은 또 다른 여성의 수고로 생긴 여가로 가능한 셈이다.
여성의 일상적 노동이 여성 개인의 책임으로만 인식되는 사회에서는 여성이 여성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에는 이처럼 또 다른 여성의 수고와 희생이 필요하며, 그로 인해 정작 수고와 희생을 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담론으로 드러나지 못한다. 이것이 한국적 페미니즘의 첫 번째 한계다. 한국 사회에서 기성의 페미니즘은 이처럼 누군가 대신한 여성의 책임 위에 쌓아올린 반쪽짜리 감상문과 같다. 고학력 중산층 여성에게나 가능한 사유와 욕구의 여백은 그 계층 밖 여성의 삶을 '억압적인 것' 혹은 '자아를 잃은 삶'으로만 단순화하고 그 내부의 감정과 서사의 맥락에는 닿아있지 않다. 남성 및 다른 계층과 시대의 여성들을 배제한 단순한 페미니즘은 대부분의 여성들이 처한 상황을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둔감하고 추상적이다.
또한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특질을 직시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소위 '민주화 세대'로 일컬어지는 한국의 2세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의식화된 주체성과 독립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주체성의 형성 과정에서 남성은 여성을 억압하는 가해자로 단순 치환되고, 따라서 이러한 페미니즘 내에서는 남성과 여성 간의 실제적 관계와 감정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차단된다. 여성의 실질은 사회적 성역할의 기대치에서 벗어난 인간으로서의 여성 자신의 주체적 능력을 가정하는 데에서도 드러날 수 있지만, 무엇보다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 스스로 어떤 관계 정립을 원하는가를 솔직히 고찰하는 가운데 포착될 수 있다.
"만약 한 남자가 다른 누구보다도 한 여자를 좋아하지만 그녀와 관계를 가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면, 그 여자는 실패했다고 느낍니다. 여성들은 자신들이 해방되었고 강하다고 느끼지만, 그러나 언제나 사랑받고 선택받는 사람이기를 원합니다."(아닉 제이유(Annic Geille) <플레이보이> 프랑스판 전 편집자)
여성의 주체성에 대한 욕구와 남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이 취하고자 하는 본능의 모순을 이처럼 잘 표현한 말도 없을 것이다. 테오도르 젤딘(Theodore Zeldin)은 <인간의 내밀한 역사>(김태우 옮김, 강 펴냄)의 한 목차인 '성 해방과 소비 사회의 풍요에도 불구하고 흔히 삶이 우울한 이유'에서 프랑스의 성공한 언론인 아닉 제이유를 인터뷰하고 그녀의 삶과 생각의 궤적을 통해 소위 '성공한', '독립적인' 여성들의 내밀한 감정을 추적한다.
이 내밀한 감정의 추적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여성은 자신의 삶과 만남을 스스로 결정하는 등 주체성을 발휘하기를 원하는 동시에 남성의 세밀한 배려와 공감에 의존하고 싶어 하며, 상당 부분 자기 자존감을 성적 매력을 어필하는 데에서 충족하려는 본능이 있다는 점이다. "남자에 대한 여자의 애착은 남자가 우아하게 여성의 동의를 구하는 데 주로 달려 있다"는 무라사키 시키부의 소설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젤딘은 사회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여성에게 가해지는 여러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이는 여성일지라도 남성과의 관계에서 배려를 받는다는 느낌을 중시하는 여성의 본능이 충족되지 못할 경우 근원적으로 불만족과 우울을 느낀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이와 같은 욕구를 '보호본능'과 같은 수동적인 언어에 가두고 비판한다. 여성이 남성의 배려를 받고 싶어 하는 욕구가 반드시 주체성을 상실한 수동적인 것만은 아니다. 소비를 통해서든, 남성을 통해서든, 자기 존재를 무엇인가에 전적으로 의존하려는 여성의 위축된 자존의식과 가치관이 그 내적 자유를 억압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위축된 자기의식과 남성의 배려와 사랑을 원하는 존중 의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성(性)은 물론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세밀한 배려와 이해가 결여된 교육시스템 등 여성과 남성 서로 간의 조화로운 대화와 이해를 가로막는 각종 제약들이 문제인 것이지, 배려와 사랑을 원하는 여성의 본능은 비판받을 만한 문제가 아니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와 같은 제한적인 이해로 인해 아직도 한국 페미니즘은 소위 '잘 나가는' 여성들만의 주체성 발휘와 성공 스토리로 축소되어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남성들만의 영역에서 '여성 최초'의 타이틀을 따는 것만이 이들의 페미니즘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페미니즘은 소통과 조화의 연결고리를 잃고 투쟁과 반목의 이미지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기성 한국 페미니즘 담론의 문제는 이처럼 다양한 여성들의 다양한 내적 서사를 담아낼 틀을 갖추지 못한 데 있다.
오늘날 2030세대가 표현하는 페미니즘은 단지 전투적인 평등주의에 갇히지 않는다. 요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여성성을 발취하는 양상은 다양하고 자유롭다. 자신의 계정에 본인의 몸을 노출한 사진을 싣고 경직된 페미니스트들을 비판하며 "성적 어필이 어때서! 나는 나를 성적으로 어필할 자유가 있다!"는 한 여성의 '드러냄'은 오히려 수동적인 것으로만 인식되었던 여성의 몸에 대한 상품화와 소비의식을 본인의 자유와 주체성으로 바꾸어 드러내는 페미니즘으로도 볼 수 있다. 이는 남성 위주 시선의 성 상품화와 다른 종류의 성 상품화이며, 이때 성 상품화는 타자화된 '악'으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여성들은 이와 같은 '비고전적인' 페미니즘과 마주쳤을 때 혼란스럽다. 이 혼란은 원래 알던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적 충돌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성에 대한 솔직한 고찰 때문에 일어난다. 소위 페미니스트 여성들은 본인의 '의식화된' 독립성이 남성으로부터 사랑받고 싶고 남성에게 성적으로 어필을 하고자 하는 본능적 욕구와 맞닥뜨렸을 때 내적 모순을 느낀다. 이러한 여성의 본질은 여성 스스로도 그 본질을 주체화하지 못했기에 또다시 소비 사회의 거센 특성 속에 묻히기 쉽고 이때 여성들은 육아, 가사, 시댁 관련 일 등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은 수행하지도 않으면서 남편의 경제력과 보호 등 여성으로서의 이득만을 취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비판은 임신·출산 등 여성의 생애주기를 고려하지 못한 한계를 보이긴 하지만 일견 그 스스로 맞닥뜨린 내적 모순을 '주체적으로' 정리하고 정립해내지 못한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의 현 주소를 잘 짚어낸 것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책에서 젤딘은 가정부, 경찰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다양한 지역의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과 그의 인류학적 역사 지식을 결합하여 오늘날 우리의 내면에 살아 있는 관념과 감정들의 공통점을 발견하고 이에 '내밀한 역사'라는 지위를 부여한다. 이 내밀한 서사의 주인공들은 여성들이며, 젤딘은 대화, 고독, 사랑, 존경, 권력과 같은 기존의 인간 본성의 역사를 한층 더 내밀하게 파고들어가 대화와 대화 사이, 고독과 고독 사이의 세밀한 관념과 감정 정립의 서사들을 펼쳐 보여준다. 즉, 그는 남성의 이름으로 즐비한 '역사'의 마디는 수많은 이름 없는 여성들과의 다양하고 내밀한 관계 속에서 굵어 도드라진 것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처럼 여성에 관한 서사는 보편적이고 획일적이기보다는 관계에 기초한 특수성과 다양성을 바탕으로 이해될 때 그 내밀한 깊이와 감성적 합리성이 온전히 드러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소통을 원하고, 합리적으로 보이고 싶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적절한 방식과 선을 지키지 못하면 '꼴페미'로 낙인찍히기 쉽기 때문이다. 한국의 페미니즘이 이렇게 된 데에는 한국적 페미니즘이 서구로 따지면 1960년대 수준에 머물러 그 이후의 담론 계발을 하지 못한 데 그 책임이 있다.
페미니즘을 1세대, 2세대, 3세대로 나누는 것에서 보듯, (서구의) 페미니즘은 스스로 진화했다. 참정권과 재산권 획득을 부르짖으며 제도의 형식으로라도 남녀 간의 평등을 원했던 1세대 페미니즘은 생물학적 성(sex)과 사회적 성(gender)을 구분하며 젠더로서의 여성성을 극복하려던 2세대 페미니즘을 거쳐 오늘날 여성 간, 여성과 남성 간, 다양한 젠더 정체성 간의 차이도 드러내려는 3세대 페미니즘으로 흘러가고 있다. 즉, 오늘날 진정한 자유주의 페미니즘은 기계적 평등이 아닌 차이를 차별로 만들지 않는 실질적 평등을 추구한다. 이 과정은 여성이 스스로를 드러내며 부딪친 수많은 현실적 과제들과 여성 내부의 모순을 집약해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즘은 이러한 페미니즘의 역사에 내재한 각종 모순의 긴장과 힘을 직시하고, 이에 기초해 진화해야 비로소 여성을 위한 소통의 도구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의 특성 및 여성과의 관계성을 배제하고 심지어 여성 그 자신의 내부에서 여성성까지도 배제한 기계적 평등 의식은 여성 권익 향상에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여성 그 자신의 특질 사이의 차이는 다양성의 인정과 존중으로 인식되어야 하며, 이러한 차이를 인식하는 가운데 인류 공통에게 주어져야 할 기본적인 권리가 여성을 배제하지 않도록 노력을 기울일 때 실질적 평등의 구현이 가능할 것이다. 어디까지 어떤 부분에서 평등을 추구해야 할지, 어떤 영역에서는 차이를 합리적으로 용인할지를 따져볼 수 있는 실질적이고 한국적인 페미니즘 담론이 필요한 때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 한마디
영화 <한공주>에서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말했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그녀의 발언으로 피해자가 말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2014년 4월17일, 세월호가 침몰한 다음 날 영화 <한공주>가 개봉했다.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으로 배우 천우희가 피해자 역을 맡았다. 한 여중생이 남학생들에게 집단 폭행을 당한 이후 일상을 보여주는 사물은 트렁크다. 딱 그만큼이 피해자에게 허락된 삶의 지분 같았다. 가해자는 지붕 있는 집에서 발 뻗고 잠들고 피해자는 짐 가방 끌고 떠다니는 현실. 또다시 거처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한공주는 입을 연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조용한 되물음. 여성주의 논리나 주장이 아닌 그대로의 사실을 직시한 저 발언. 항변이라 하기엔 담담한 발화가 화살처럼 박혔다. 잘못 없는 사람이 되레 질긴 고통과 불편을 감내해야 하는 가부장제의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했다. 피해자가 말하는 주체로 등장하고 그 말의 결과 힘을 살려냈다는 점에서 <한공주>는 내게 좋은 영화로 남아 있다.
영화 <한공주>는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현실은 영화의 상상력을 뛰어넘는다. 나는 2013년부터 성폭력 피해 여성들과 글쓰기 수업을 진행한다. 거의 매일 매스컴에서 접하는 기사들, ‘인면수심’이라는 타이틀로 소비되는 성폭력 사건을 당사자가 피해자의 언어로 재구성하는 작업을 함께한다. 처음엔 한 사람을 성적 도구화하는 가해자의 폭력에 분노했지만 점차 피해자의 목소리에 빠져들었다.
한 피해자는 성폭력상담소에 왔던 날을 복기했다. 상담 선생님이 너는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안 맞고 강간 안 당하고 사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자신은 감히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한 대도 맞지 않고 강간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말해주었다. 그 말이 믿어지지 않았고 단지 나를 위로하는 말이려니 생각했다며 글을 이어나간다.
교사나 가수 같은 직업이 아니라 폭력을 당하지 않는 상태가 꿈일 수 있다는 걸 한 번도 상상해보지 못했던 나는 저 부분을 거듭 읽었다. 꿈의 실현을 믿지 않았던 피해자는 지금은 꿈대로 맞지 않고 살고 있다. 한 존재를 피해 경험에 국한하지 않고 삶 전반을 이해하려는 상담사의 사려 깊은 물음, 에두르지 않는 정직한 대답까지, 피해자가 말하기 시작할 때 더는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언제 경험해도 아프고 벅차다. 말하기와 분노하기로 세상에 참견하기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 레베카 라인하르트 지음 장혜경 옮김, 이마 펴냄
이 말하기의 중요성을 독일의 철학자 레베카 라인하르트는 <철학하는 여자가 강하다>에서 강조한다. “여성의 역할이라는 족쇄(155쪽)”, 남성과 여성의 본질을 규정하려는 왜곡된 성 고정관념이 남성에게 어떤 권력을 주고 여성을 어떻게 무력화시키는지 분석하며, 자기 삶의 권력을 찾기 위해선 말하고 행동하라고 독려한다. “선뜻 용기가 안 난다고? 당신이 말과 기호로 이 세상에 참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똑똑히 보라(100쪽).”
최근 논란이 된 안경환의 <남자란 무엇인가>는 보여주었다.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최종 목적을 달성하고 싶은 것이 사내의 생리다. 거부되면 불안은 분노로 전환된다.” 그러니까 수동적인 것이 여성의 본성이라고 말한 루소부터 폭력 등을 생물학적 남성의 본질로 규정하는 한국의 법학자까지, 남성 엘리트의 말하기는 일관되고 공고했다. 그것은 수많은 한공주를, 강간당하지 않고 살고 싶다는 딸들을, 남자친구에게 살해당하는 사망자를 낳는 데 일조했다. 폭력은 ‘사내들의 생리’가 아니라 사회적 무의식의 허용에 따른 ‘권력 행동’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하기에서 나아가 분노하기까지 행동 권력의 탈취를 권한다. 물론 “분노하는 남성은 불안을 조장하지만 분노하는 여성은 우습다(127쪽)”는 현실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기와 분노하기로 세상에 참견하는 것밖에 방도가 없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안 맞고 강간 안 당하고 사는 게 꿈이에요” 같은 말들이 당장은 우습고 나약할 테지만 거기엔 당연한 것을 뒤집어보게 하는 힘이 있다. 말하기에 실패해도 “우리의 실존은 절대 실패하지 않는다(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