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문화, 예술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성평등이 민주주의 완성입니다

일취월장7 2017. 6. 30. 17:53

성평등이 민주주의 완성입니다
[기고] 페미니스트 정치포럼이 열립니다
2017.06.15 15:11:09

지난 2016년 겨울, 광장은 촛불을 들고 민주주의의 회복을 뜨겁게 외친 시민들의 목소리와 열기로 가득 찼다. 새로운 사회를 염원하는 시민들의 열망은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 정권 교체라는 성과를 이룩했다.

이제는 '누구를 위한 어떤 민주주의인가?', '일상의 삶에서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현할 수 있을까?' '일상의 삶과 정치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 등 구체적인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함께 찾아가야 하는 때이다. 그 동안 정치 영역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모든 이들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각자의 삶의 주체로서 일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할 수 있는 사회, 모든 이들의 삶에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상상해야 한다.  

한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외치는 시민들 가운데에서도, 우리 사회 깊숙이 내재한 젠더 위계질서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과 혐오는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부패한 권력 구조와 비민주적인 정치 구조의 문제를 '여성'의 문제로 축소·왜곡하는 발언들이 온·오프라인을 뒤덮었다. 촛불 혁명의 결과 새 정부가 탄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과거 저서에서 여성혐오 정서를 공공연히 인증한 인물이 청와대 행정관에 내정되어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표방한 대통령의 내각 구성 인사 기준에 성평등 관점이 과연 자리하고 있을까?

민주주의, 성평등 관점에서 재정의 되어야  

민주주의와 정의를 위해 함께 헌신하며 '시민'의 책무를 다한 여성들이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보편 시민'의 위치에서 배제되어 값진 투쟁의 성과와 공로를 동등하게 누리지 못하는 현실은 역사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한국 여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늘 험난한 가시밭길의 일상을 산다. 세계경제포럼의 '2016년 성 격차 보고서(Gender Gap Index)'에 따른 한국의 성평등 순위는 144개국 중 116위이다. OECD의 통계 발표 이래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부동의 1위이다. 지난 해 5월 강남역 부근에서 발생한 여성 살해 사건이 보여주듯이, 여성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멸시와 혐오, 폭력, 살인의 대상이 된다. 모르는 여성을 때리거나 죽이는 남성들은 '술이 취했다'거나 '기분이 나빴다', '홧김에' 등으로 자신의 범죄 이유를 들곤 한다. 한국여성의전화의 2016년 통계에 따르면, 최소 1.9일에 1명의 여성이 남편이나 애인 등 친밀한 파트너에 의해 살해되거나 살해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가 염원하는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을 위한 것 

이제는 성별, 성적 지향, 세대, 지역, 계층 등 현재 조건과 관계 없이 누구나 동등하게 시민의 기본권을 누리는 사회, 모든 이들의 일상의 삶에서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사회를 그려야 한다. 이를 위한 첫 걸음으로, 여성들이 민주주의를 새롭게 해석하고 이야기하고자 한다.

한국여성단체연합은 페미니즘 시각으로 일상과 사회를 분석하고, 정치 영역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슈와 목소리를 발굴하며, 여성의 삶과 정치, 페미니즘의 연결고리를 이어가고자 하는 목적으로, 6월 16일(금) 오후 3시, 스페이스노아 커넥트홀에서 '페미니스트 정치 포럼'을 개최한다. 포럼 참가자들은 촛불 시민혁명과 대선까지의 과정, 그 결과를 페미니즘 관점에서 돌아보고 앞으로의 사회에서 실질적 민주주의 방안을 함께 구상해본다. 여성의 다양한 일상에서 정치적 의미를 찾아내고 이 의제들을 젠더 관점의 민주주의와 연결시키고자 한다. <1부>에서는 '촛불 혁명, 대선, 그리고 페미니스트 민주주의'라는 제목으로 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의 강의가 진행된다. <2부>에서는 여성 시민들이 '일상-정치-페미니즘'을 주제로 5개의 이야기 마당을 펼치며, 새 정부의 젠더 의제를 직접 만들어본다.


'믿는 페미', 나 여기 있어요!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교회에서 페미니즘 하기
2017.06.16 08:51:39

"우리, 평화의 씨를 뿌리자."
"씨를 뿌린다고? 그거 성교육이에요, 형?"
"와하하하!!"


일동 웃음. 대화는 순조롭게 이어지고 나만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 채 넋나간 사람처럼 앉아있다. 이게 뭐지. 아무도 나무라는 사람 없이 다음 주제로 이야기 꽃이 핀다. 괜찮은 걸까? 아니, 내가 괜찮지 않다. 얼굴이 달아오르고 심장이 빨리 뛴다. 분노를 주체할 수 없을 때 나오는 반응이다. 두리번거리다 맞은 편에 앉은 여자 동료와 눈이 마주친다. 못마땅한 눈빛, 우리는 같은 걸 느꼈다.  


"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까 나온 씨 뿌리기가 성교육이냐는 발언, 불쾌합니다. 우리 모임에서 이런 성적인 농담은 나오지 않으면 좋겠어요."  


화기애애하던 분위기가 얼어붙는다. 진행자도, 나도, 문제의 발언자도 모두 어쩔 줄 모르는 상태가 된다. 열 명 남짓의 신학교 출신 동료들은 그렇게 문제의 발언자가 아니라 까탈스런 여자인 나를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길을 잃는다. 우리는 갈등을 잘 겪어내본 경험이 없다. 갈등이 드러난다는 건 우리가 한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고, 그건 곧 은혜롭지 못하다는 뜻이니까. 은혜로워야 하는 우리 기독인들에게 페미니즘이란 갈등을 일으키는 시끄러운 여자들이 장착한 사특한 생각일 뿐일까? 


식상하게도 그 날의 문제제기는 '뭐 그런 뜻이 아니었다'로 얼버무려지며 끝났다. 모임이 파한 후 문제의 발언자와 둘만 남은 자리에서 나는 '내가 한 성적인 농담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만약 로즈마리 류터 교수님과 같이 큰 분이었다면 당신처럼 문제제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훨씬 기품 있고 우아하게 말했을 것이고 나는 수긍했을 것이다. 당신은 공부를 더 하고 와라.'는 말을 들었다.  


이 경험을 듣고 분노와 함께 익숙한 씁쓸함을 나눌 동료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여자'에게 이런 반응은 오히려 익숙하거나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로즈마리 레드포드 류터(Rosemary Radford Ruether)는 로마가톨릭계 저명한 생태 여성 신학자다. 그러니까 문제의 발언자는 내게 저명한 학자 정도의 권위가 있어야 네 말을 들을 것이며(그는 너와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 은폐하는 진의가 바로 '권위'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은 나에게 들리지 않는다, 너는 내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부드럽고 친절하게 설명해야 했다고 말한 것이다(기품있고 우아하게). "공부를 더 하고 오라"는 말은 '힘도 권위도 없는 (여자인) 네가 심지어 사납게까지 나온다면 어떤 말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는 뜻이니까. 


권위와 친절. 교회에서 권위는 애초에 남성의 것이고 여자에게는 순종과 친절한 헌신이 요구되었다. '돕는 배필'이라는 담론이 있다. 여자는 하나님이 남자의 갈비뼈로 만든 존재로서, 어디까지나 남자를 기쁘게 하고 힘써 도울 목적으로 지어졌다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 여성은 남편을 내조하고(섹슈얼한 의미도 포함된다) 아이를 잘 길러내는 역할을 맡는다. 얼마나 편리한가? 논리적인 논증을 거칠 필요도 없이 이 모든 질서를 신이 보증하고 있다. 최상의 권위, 말 그대로 신적 권위를 띠고. 기독교사회윤리학자 백소영 교수는 이 돕는 배필 담론을 "남편과 아내가 공과 사로 구분되는 이분법적 성역할 분담이 삶의 전반적 조건이던 근현대 초기와 중기에 형성된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이는 남성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여성의 말은 듣지 않은 채 여성에 '대해' 말한 것들이며 가부장제 5000년간 여성에게는 말할 기회도, 그들의 의미가 텍스트에 담길 힘도 가진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이는 여성의 노래가 아니다. "나는 당신의 갈비뼈이니- 평생 그대를 섬기며 그대와 우리 아이만을 위해 살겠네."하는 노래는 여성들이 지은 게 아니라 남성들이 신적 권위로 주입한 비가인 것이다. 하기사, 아내는 남편이 성관계를 청할 때 응해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밖에서 성매매를 하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라는 발언이 기독교 대학 수업에서 울려퍼지는 시대에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참 자매'라는 담론도 있다. 어디에도 실체가 없는 이 '참 자매 '담론은 교회 안의 젊은 여성들로 하여금 자신을 가두게 하는 코르셋이다. 참 자매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소위 '여성스러운' 품성과 몸가짐을 갖추며 공동체 안에서 지혜롭고 부드러운 교회 여성 역할을 한다. 남자 성도('형제'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옷차림은 단정하게, 그러나 예쁠수록 좋다.신앙심 좋고 이해심 많은 교회 언니, 조신한 교회 누나, 예쁜 교회 여동생의 코르셋이 여성들을 자기 검열하게 하는 것이다. 참 자매가 아닌 여성은 신앙심이 부족하거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죄책감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추측하자면 그 문제의 발언자 입장에서는, 그간 아무 문제 될 것 없던 방식으로 '고추 권위'를 휘두르며 시시한 농담을 했을 뿐인데. 한낱 갈비뼈인 내가, 혹은 저명한 학자 쯤은 되어줘야 감히 말이라는 걸 할 수 있는 내가, 참 자매스럽지 않게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 본인을 망신 주며 말을 또박또박 했던 것이다. 얼마나 불쾌하고 모욕적이었을까. 자꾸만 꿈틀꿈틀 말하고자 하는 여성들을 만나는 교회의 기분이 이런 것일까. '언제까지 우리에게 밥 맡겨놓을거야, 언제까지 여자는 일만 하고 남자들이 목사, 장로 다 해먹을거야, 언제까지 여자들 옷 단속 할거야, 음욕을 품는 네 눈을 빼버려!' 하고 또박또박 말하는 여성들을 대하는 기분이. 이제와서 말이지만 우리는 애초부터 주님 안에 '하나'가 아니었다, 그동안 불편해도 참고 있었을 뿐이지.  


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직 연결되지 못하고 각자 고립되어 있다. SNS상에 '믿는페미'를 소개하며 "크리스찬 페미니즘 운동입니다"고 알리자 교회 안팎에서 고통 받던 페미들의 반응이 가히 폭박적이었다. "이런 운동이 가능하다니!"에서 시작해 "그동안 혼자 말도 못하고 교회 떠나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말 눈물난다 엉엉ㅠㅠ" 등 자기의 이야기를 성토하는 글이 한동안 멈추지 않고 올라왔다.  


글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어!"였다. 교회에 다니며 숨어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교회 안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자, 분열을 조장하는 자는 마녀 사냥을 당하기 쉽다. 내 고통에 대해 얘기해도, 공동체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수양 문제로 환원한다. 교회에 잠입한 사이비로 몰릴 수 있으니 주의하라는 조언까지 들었지만, 나는 이 말을 웃어넘길 수가 없었다. 우리는 모두 흩어져 있다. 우리가 이루는 점들이 연결되어야 한다. 이어지기. 믿는페미가 하고자 하는 운동의 1차 목표다. 


먼저 배지를 만들었다. 투박하지만 우리 로고를 담고 일부는 배포하고 일부는 판매했다. 가방에 달고 다니며, 또 친한 친구에게 선물하면서 '내가 여기에 있으니 힘내자!'는 메세지를 알리기로 했다. 책모임도 열었다. 열명 남짓한 인원이 모여 읽고 공부하고 토론하며 여성으로서 교회 생활하기 힘들었던 경험과 생각을 나눈다.  


여성주의 예배로 드린 강남역 여성혐오범죄 희생자 1주기 추모예배 <살아남아 다시 붙인다>는 첫 대중참여 사업이었다. 약 150명 가량의 믿는페미들이 참석했다. 6월 18일 일요일 저녁에는 영화 상영회를 한다. 여성에게 사제 서품이 금지된 데 저항하는 수녀님들의 분투기 <주님은 페미니스트- Radical Grace>를 본다. 트위터에서 공동체 상영을 다수 요청받은 영화다. 30명 한정인데, 소식을 올리고 얼마 안 되어 신청이 마감되었다. 믿는페미가 지금 가장 공을 들이고 있는 사업은 팟캐스트다. 방송을 통해서, 전국 곳곳에 숨어있는 믿는페미들과 만나고 싶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또 그 이야기가 우리와 또다른 우리를 이어주는 재료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한 교회에 적어도 세 명의 믿는페미가 서로 만나고 이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믿는페미의 꿈은 그 때부터 또 시작일테니까 말이다.

덧. 그 때 서로 눈빛으로 교감했던 맞은 편에 앉은 여자 동료는, 지금 믿는페미 기획단 동지다. 



"문재인 정부의 이중 긴장, 예견된 일이었다"

[페미니즘 정치포럼]  '젠더 정치'로 바라본 19대 대선과 문재인 정부
2017.06.19 10:02:25


"문재인 대통령이 갖고 있는 정치적 이미지는 합리적이며 온정적인 가부장이다. 이는 한국사회에서 한번도 존재한 적 없고, 허상으로만 존재했었다. 한국에서 가부장은 (엄한 아버지와 같이) 위계적인 질서를 만들어내는 상징으로 존재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숙 여사가 보여준 청와대 첫 출근 모습은 이전까지 한국 정치인들에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합리적이고 온정적인 아버지 역시 전통적인 가족 질서 내에 존재한다. 이런 점에서 임기 초반 문재인 정부가 보여준 젠더 정치 내 이중 긴장은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문제다."(이진옥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 대표) 


▲ 청와대로 첫 출근하는 문재인 대통령을 배웅하는 김정숙 영부인. ⓒ연합뉴스


'촛불혁명'으로 이뤄낸 19대 대선과 정권교체, 또 이런 민심을 받아 안고 '적폐청산'을 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에서도 여성과 소수자의 문제는 왜 중요하지 않은, 나중의 일로 치부되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득표율만 따져도 남성보다 여성이 더 많이 찍었는데 말이다.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다양성으로 존중받는 정치를 원하는 정치적 주체들은 문재인 정권과 정치권을 상대로 무엇을 요구하고, 어떻게 움직여야 하나? 이런 고민을 나누는 '페미니스트 정치포럼'이 지난 16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렸다.

페미니스트 대통령 vs. '여성 비하' 참모들 

문재인 정부의 임기 첫 한 달을 얼룩지게 만든 이슈 중 하나가 성평등 이슈다. 대선 과정 중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다"고 선언(2017년 2월 21일)한 문 대통령은 피우진 보훈처장, 강경화 외교부 장관 등 '유리천장'을 깨는 파격적인 인사를 했다.(강경화 외교장관은 토론회가 끝난 뒤인 지난 18일 임명이 확정됐다.)  


동시에 문 대통령이 발탁한 인사 중엔 왜곡된 성의식으로 점철된 책을 쓰고 여성의 의사에 반해 허위 혼인신고를 한 전력을 가진 이들도 포함됐다.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과 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 얘기다.(안 후보자도 토론회가 끝난 뒤인 지난 16일 오후 늦게 자진 사퇴했다.)  


이런 일이 우연히 발생한 것일까? 이날 포럼의 발제를 맡은 이진옥 대표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문재인 정부는 탄생 전부터 페미니즘 선언과 남성주의 복원이라는 이중적 모순을 갖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페미니스트 대통령, 이후 성평등 대통령이 되겠다고 공언했으며 남녀 동수 내각의 점진적인 실현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다. 하지만 동시에 차별금지법 제정 약속을 뒤집었으며, 동성애 반대 발언을 했다. 동성애에 대한 명시적 반대 발언은 1997년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도 안 했다. 문 대통령이 동성애 발언에 대해 사과하면서 한 말이 '전통적인 가족의 질서를 존중한다'는 것이었다. 이성애적 가족 질서에 기댄 전통적인 가족을 내세운 성의 보수화를 일종의 선거 전략으로 깔고 있었다고 보여진다." 

문재인은 홍준표 '돼지발정제' 논란에 대해 침묵했다 

문 대통령이 대선 당시 성의 보수화, 남성주의 강화를 정치적 전략을 삼고 있었다는 분석은 여러 사건들을 통해 입증된다.  

지난 4월 26일 문재인 당시 대선후보가 국방안보 관련 행사를 하는 자리에 성소수자임을 자처한 여성이 문 후보에게 항의하는 일이 있었다. 이날 행사장에서 시위를 벌인 성소수자 13명은 집회.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연행됐다. (문재인 후보 측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경찰에 전달했다.) 이진옥 대표는 "지난 대선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지지 선언 행사에 뛰어들어 '동성애 반대' 발언에 항의하는 성소수자들. ⓒ연합뉴스


이 대표는 또 문재인 당시 후보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의 돼지발정제 논란에 대해 공개적인 비판을 하지 않은 점도 '성 보수화 전략' 중 하나로 지적했다. 문 후보는 4월 23일 TV토론에서 자신을 제외한 모든 후보가 강하게 비판한 이 이슈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당시 심상정·안철수 후보는 홍 후보의 자진 사퇴를, 유승민 후보는 사과를 요구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을 포함해 4명의 여성 후보가 나왔던 18대 대선과 달리, 19대 대선은 정의당 심상정 후보만 15명 중 유일한 여성 후보였다. 문재인 후보만이 아니라 홍준표·안철수·유승민 모두 성적 보수화 흐름을 공유하고 있었고, 심상정 후보는 여기에 균열을 냈다. 부인의 정계 진출 이후 전업 가사노동자로 살아온 남편 이승배, TV토론에서 동성애 지지 발언을 한 것 등이 차별점을 만들어냈다.  

이런 '균열'은 실제로 유권자들을 움직였다. 심상정 후보의 열렬한 지지세력 중 하나가 20~30대 여성이었다. 실제 투표 결과에서도 심상정 지지가 20대에서 가장 높게 나왔다.

또, 선거 초반 상승세를 타던 안철수 후보가 '단설 유치원 증설 반대' 발언으로 상승세가 꺾인 것 역시 젠더 정치의 한 흐름을 보여준다. 이 대표는 "젊은 엄마들을 중심으로 육아, 교육에 대한 정책 투표 흐름이 나타났다"고 했다.  

한국의 진보는 남성의 얼굴인가 

이번 선거에서 페미니즘 정치는 흐름으로는 분명히 존재하나 결과를 뒤집는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으로 '남성들 간의 유대'가 확인되고 있다. 탁현민 행정관 문제가 불거지자 배우 문성근 씨가 탁 행정관을 옹호하고 나섰고, 안경환 법무장관 후보자 문제에는 한인섭 서울대 교수 등이 비호하고 나섰다.

"홍준표 후보의 돼지발정제 논란은 책에 실린 내용 때문에 불거진 것이었다. 탁현민, 한인섭 교수를 둘러싼 성 인식에 대한 논란 역시 마찬가지로 책에 실린 내용을 둘러싼 것이다. 그런데 탁현민, 안경환 두 사람을 둘러싼 논란은 텍스트에 대해 말하지 않고, (당사자들이 경험한) 두 사람의 인성과 품성에 대해 말한다.  

한국에서 민주화의 얼굴은 남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 간의 남성 유대에 기반해 있고, 문재인 정부에서도 이런 모습이 확인되는 셈이다." 

A 대위 처벌과 대만의 동성결혼 합법화 

문재인 정부가 탄생한 직후인 5월 24일 육군 A대위가 동성 군인 간 성행위로 군 기강을 저해했다며 유죄가 확정됐다. 이 사건은 대선 당시 문 대통령의 '동성애 반대' 발언이 나오게 된 배경이었다.  

올해 초부터 육군 내에서 군인 수십 명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로 A 대위가 영외에서 다른 군인과 합의된 성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났다. 인권단체들은 A 대위 처벌의 근거가 된 군형법 92조 6(군인, 준군인에 대해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가 위헌이라고 반발하고 있고, 국회의원 12명도 A 대위의 무죄와 군형법 92조 6의 폐지를 주장하는 성명서를 냈다.  

"A 대위에 대한 처벌이 내려진 5월 24일 대만에서는 아시아 국가 중 최초로 동성결혼을 인정하는 대법원 결정이 내려졌다. 그 누구도 타인의 행복추구권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근거였다. 국민당 장기독재 아래 40년 동안 계엄통치를 받았던 대만이 이런 정치적 변화를 가져온 것은 여성운동의 영향이 크다는 평가다. 대만 진보의 얼굴로 당선된 사람은 여성(민진당 차이잉원)이다. 대만의 여성 국회의원 비율은 38%다."  

탈원전, 대체복무제 등 다른 진보적인 정치 이슈에 대해서도 대만은 한발 앞서 나갔다.(문재인 정부도 원전 폐쇄 정책을 추진해 지지를 받고 있다.) 차이잉원 총통은 35살의 천재 프로그래머 오드리 탕을 디지털담당 장관에 임명하기도 했다. 최연소 장관인 그는 최초의 트랜스젠더 장관이기도 하다. 

한국과 대만에서 동성애에 대해 상반된 결정이 내려진 배경에는 '정치적 대표성'의 문제가 깔렸다는 지적이다. 여성을 포함한 소수자들이 정치에 더 많이 진출할수록 '더 많은 민주주의'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이 대표는 주장했다.  

"이제까지 한국의 진보는 보수와 진보, 민주와 반민주라는 대립적, 대결적 구도를 재생산하면서 소수자와 다양한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억압하는데 동조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다양성 확산시키고 더 많은 민주주의로 나갈 것이냐, 아니면 민주/반민주 대립구도 속에서 소수자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배제하는 과거의 모습을 답습할 것인가는 페미니즘 정치에 달려 있다." 



'그 날'에서 월경까지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월경에 대한 금기를 깨자

    

한 중학교 도서관에서 월경을 주제로 학부모 연수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 날은 사서 선생님께서 소개와 인사말을 담당해주셨는데 원래는 늘 교장선생님이 하시던 역할이라 들었다. 그렇지만 주제가 월경이다보니 교장선생님께서 자리를 피하셨다는 이야기다. 함께 강의를 듣는 것도 아니고 그저 '월경에 대한 연수를 준비했으니 좋은 시간되시길 빈다'는 상투적인 인사조차 못할 이유가 뭘까 싶었다. 월경에 대한 회피 혹은 금기가 어디 이뿐일까.

일회용 비닐봉지가 전부 유료화 되던 시절, 편의점은 물론 동네 작은 가게들까지도 물건을 담아가려면 비닐 봉투를 돈을 주고 사야만 했었다. 그렇지만 유일하게 생리대만큼은 예외조항이었는데, 아무 광고도 실려 있지 않은 새카만 비닐봉지로 둘둘 감아 내어주곤 했었다. 마치 누구도 보아선 안 되고 누구도 아는 척 해선 안 되는 것처럼.

해리포터 시리즈에 등장하는 볼드모트는 제 이름보다 'you-know-who(그 사람)'로 불린다. 마법사들은 볼드모트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지 못하면서 맞설 용기를 잃고 두려움에 떨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월경을 월경이라 부르지 못하고 공산당, 빨갱이, 매직이라고 돌려 말하면서 무엇을 잃고 있을까. 

말에는 힘이 있고 말하지 않으면 그 힘을 잃어버린다. 인류의 반이 겪는 일, 한 사람 한 사람이 40년 동안 겪는 일이지만 사회가 쉬쉬한 사이 월경이 가진 말의 힘을 잃어버렸고 그 사이 거짓 정보들이 너무 많이 자리를 잡아버렸다. 월경 전후로 산부인과에 방문해서 질 내벽을 초음파로 씻어내라는 광고가 버젓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질 세척 전후의 사진을 보여주며 깨끗함을 강조하고 있는 사진을 보고 있자면 어디서부터 문제제기를 해야 하나 막막해진다. 여성 청결제 광고도 마찬가지다. 해당 제품을 사용해 씻으면 탄력이 되살아난다는 과학적으로 무지몽매한 제품 설명은 건너뛰더라도 청결제를 사용해 깨끗하고 향기롭게 관리하라고(심지어 어떤 청결제는 살정제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 외쳐대는 광고를 보고 있자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청결히 하라는 것인지 마음이 답답해온다. 이들이 말하는 청결은 과연 우리의 건강을 위한 것이기나 할까. 

사회는 월경에 대해 너무 모른다. 한쪽에선 월경 중인 여자들이 하얀 스키니진을 입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광고를 내보내고 다른 쪽에선 월경을 시작하면 무조건 고통에 못 이겨 주변사람에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것으로 묘사한다. 월경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동영상이랍시고 주인공 남성이 월경 체험중이라며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욕설을 내뱉거나 친구들에게 이유 없이 시비를 건다. 마지막에는 여자친구(혹은 그 역할을 맡은 배우)를 껴안으며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한다는 식의 황당한 결말을 내보낸다. 화가 난 여성에게 ‘생리하냐?’고 다짜고짜 묻는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얼마 전 이미지 뱅크를 이용했는데 월경과 관련한 사진은 죄다 배를 잡고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찌푸린 여성의 사진밖에 없었다. 두통-치통-생리통이라고 광고하는 딱 그 포즈였다. 나는 월경 기간이 되면 평소보다 많이 졸리고 가끔 허리가 아프지만 배가 아프지는 않다. 월경에 대한 경험을 나누다보면 월경통의 여부와 강도도 다 다르지만 누구는 머리가 아프고 누구는 몸살이 나고 누구는 허리가 아프다고 한다. 생리하는 여성의 모습을 한 가지로밖에 상상할 수 없는 이유는 사회가 개개인의 경험을 너무나도 몰라주기 때문이다. 

생각할수록 답답하고 한심한 이 상황을 개선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당사자들의 목소리다. 수년의 경험동안 쌓인 불편함, 요구,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것이다. 국민안전처가 재난구호물품에서 슬그머니 생리대를 빼려고 했을 때 사람들이 '생리대는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며 다 같이 화를 냈던 일은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냈던 경험이다. 생리컵을 써보니 좋더라는 경험담을 서로 공유하고 식약처에 안전한 제품을 손쉽게 구입할 방법을 마련하라는 민원을 넣으면서 여름부터는 국내에서도 월경컵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환경연대는 일회용 생리대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규제할지에 대해 의견을 모으고 있다. 제대로 된 제품을 기업에 요구하고, 품질에 대한 규제와 차별 없는 접근성 보장 정책을 정부에 요구하고, 나의 경험과 권리를 더 이상 숨기지 않는 것이 건강한 월경을 지켜내는 첫 번째 걸음이다. 

월경의 '경'자는 성경, 불경할 때 쓰는 말씀 '경'이자 경험을 나타내는 지날 '경'자이다. 그러니 월경은 여성의 몸이 지닌 지혜의 말씀을 고대로 설명한 이름인 셈이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월경이란 이름을 다시 불러줄 때 월경이 가진 지혜와 내 몸이 친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월경을 월경이라 부를 수 있는 사회는 안전하고 자유롭게 월경을 맞이할 수 있는 세상이며 선택 없이 월경을 받아들어야 했던 여성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이다. 월경이 당당한 나라를 꿈꾸며 월경에 cheers!


소비되는 여성과 동물의 이미지에 대하여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혐오의 연결고리, 여성과 동물
2017.06.27 17:59:56

얼마 전 일본 앞바다에서 불법 포획되어 10여년간 돌고래쇼에 동원된 '태지'의 향후 거처를 두고 이야기가 오갔다. 함께 지내던 돌고래들이 자연으로 방사되면서 종이 다른 태지만이 동물원에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지는 우울증 증세로 수면 위로 올라오는 자살 시도를 반복했다. 동물원을 찾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물들이 불법으로 잡혀 온 사실을 몰랐을 것이며 누구도 그들의 고통을 구경하고자 부러 쇼를 관람하고자 하는 이는 더더욱 없을 것이다. 돌고래를 좋아해서 직접 보기 위해 쇼에 갔을 뿐인데 이걸 '혐오'라 할 수 있을까? 필자는 여성으로서 그리고 동물보호단체에서 일했던 경험을 두고 혐오란 무엇인지 사회에서 여성과 동물을 두고 소비하는 이미지들을 통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둘의 연결고리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국내에서의 '동물 보호 운동'에 대해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가장 대중적인 캠페인은 아무래도 유기동물 입양 캠페인이다. 많은 셀러브리티들이 '사지말고 입양하세요'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반려동물 사랑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호감을 사기 마련. 그러나 오랫동안 국내에서 '동물 보호'를 한다고 하면 '개나 고양이를 유난스레 좋아하는 사람들' 즉 동물 애호가 정도로 치부되기도 했다.

몇 년 전에 비해 지금은 해양 동물 보호 단체나 해외 단체들의 국내 지부 또한 생겨나면서 동물 보호 운동의 범주가 전보다 다양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큰 성과다.('시 셰퍼드(Sea Sheperd)'라는 해양환경동물보호단체는 얼마 전 내년 출범을 목표로 한국 지부 설명회를 가졌으며 휴메인 소사이어티 인터내셔널(Humane Society International)은 몇 년 전 부터 한국에 지부를 두고 식용으로 길러지는 개들을 농장에서 구출해 해외로 입양 보내는 활동을 활발하게 이어나가고 있다.) 


소젖 섭취가 인간이 비인간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착취, 억압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비건 페미니스트 네트워크'라는 모임도 생겨나 먹거리를 '선택할 수 있는 권리'로서의 채식에 대한 이야기도 좀 더 풍부하게 다루어 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도 있다. 


반려동물, 실험 동물, 야생 동물 이외의 범주에는 우리가 동물원이나 관광지에서 마주하게 되는 쇼 동물 그리고 빠르고 많은 먹거리 공급을 위해 공장식 축산 시스템으로 길러지는 농장 동물 등이 있다. 범주의 기준을 살펴보면 대개 인간의 '필요'에 의한 것들이다. 우리가 사회에서 동물을 두고 강요하거나 소비하는 이미지는 대체로 귀엽거나 혹은 맛있거나이다.

동시에 여성에게는 어떤 이미지들이 요구되는가. 미디어 속 엔터테이너 여성들은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는 동시에 애교를 겸비해야만 한다. 외모를 두고 강아지나 고양이에 비유하며 귀여움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개별적인 주체로서 존중 받기보다 대중, 대부분 남성의 입장에서 강요하는 이미지일 뿐이다.  


결혼 적령기를 벗어나면 '임신'을 하기에 너무 늦은 '노처녀'라는 낙인이 붙기 마련. 동물들 또한 인간 소비자의 수요에 맞춰 한 평생 '출산'만을 하기도 한다. '작고 털이 빠지지 않는 종류의 개를 원해요'라고 하면 펫샵으로 오기까지 농장에서 그리고 이후 길거리에서 수 백마리의 생명이 낙오된다. (돈 주고 산 강아지, 어디서 왔을지 생각해보셨나요?인간 여성은 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남자아이'를 낳을 때까지 임신과 출산을 요구 받는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남아선호사상을 두고 여태 이야기하느냐고 한다면 유감스럽게도 여전히 그런 시대이다. 국가에서는 출산율을 높이겠답시고 가임기 여성 지도까지 만들지 않았었나. 결혼을 하기에 그리고 생명을 잉태하기에 적정한 연령은 없다. 본인이 스스로 선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 한정된 프레임에서 동물과 여성에 대한 혐오는 다양하게 드러난다. '여성스럽다', '여자 같다', '동물적이다', '짐승 같다' 이 나열된 단어들의 뉘앙스를 짚어보면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한 것이 없다. 여성스러움 안에는 상대의 비유를 거스르지 않는 내에서의 순종적인 이미지가 숨어있기 마련이며 누구도 수치스러움을 내세우기 위해 '남성성'을 가져와 이야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남성답지 못함은 곧 여성스러운 것으로 치환된다.

또한 우리는 인간으로서 저지른 잘못을 '짐승'들에게 돌려버린다. 언행에 두고 반격 할 요량이 없기 때문에 손쉬운 방법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영화나 소설에서 인물이 부당한 폭력을 당했다고 하면 대부분은 이런 대사를 친다. '너는 나를 짐승만도 못하게 대했어', '그는 나를 복날 개 패듯 두들겨 팼어'와 같은 레퍼토리들 말이다. 일상에서는 만연하게 '개 같다'라는 표현도 쓰지 않나. 개가 대체 뭘 잘못했길래. 그리고 짐승만도 못하게 대했다면 짐승은 그렇게 대해도 된다는 것인지? 

동물보호단체 PETA에서는 'I'd rather be naked than wear fur'라는 캠페인으로 많은 여성단체들로부터 질타를 받은 바 있다. 모피를 입느니 차라리 벗고 말겠다라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셀레브리티들이 누드로 나서기 시작한 것. 그러나 이 메시지 이전에 우리에게 1차로 노출되는 것은 벗은 여성의 몸이다. 메시지를 전파하는 데 있어 이 이미지가 매체에서 '상품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걸 그들도 알고 있던 것이다. 모피 시장에 대한 우려를 이야기하기 이전에 이번엔 '누가 벗었다'를 두고 먼저 이야기한다. 여성과 동물은 이렇게 전시되고 소비된다.

더욱이 많은 뉴스에서 보았듯 동물에 대한 혐오는 인간에 대한 폭력으로까지 이어진다. 잔혹한 사례들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멀지 않은 일상에서 매일 같이 벌어지는 일들이다. 그들은 어떤 대상이기 이전에 모두 각 개별적인 존재들이다. 동물권이 아닌 '생명권'. 우리는 이렇게 감수성의 범위를 더 넓혀가야만 한다. 혐오는 어떤 것을 맹렬히 밀쳐내는 것만에 해당되지 않는다. 알고 싶지 않다는 데에서 혹은 단순히 싫다는 데에서 출발하는 폭력이야말로 곧 '혐오'이다.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란 것, 여성과 동물은 이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을 필요가 있다. 단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것만이 다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삶'이란게 있기 때문이다.


(필자 최미연 씨는 동물보호시민단체 카라 활동가로 일했었습니다.)



"지금 당장", 모두를 위한 울림이 되다.
[페미니스트 정치포럼] ⑦ '촛불', 그 다음은?

광장의 원칙, 민주주의

박근혜 퇴진 촛불이 켜졌던 겨울을 지나며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에만 분노한게 아니라 그 뒤에 깊고 넓게 패여있는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박근혜 이후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광장에 울려 퍼질 때마다 귀를 기울였지요. 열린 광장에 다양한 사람들이 나섰습니다.


존중하고 배려하는 집회문화 함께 만듭시다 

1. 여성을 비하하지 맙시다. '여자라서' 나라가 망한 것이 아닙니다.(예) 박○○ 미친년, 최○○ 강남아줌마, 미스박) 

2. 질병ㆍ장애를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맙시다.(예) "박○○는 발달장애/병신/정신병자다.")
3.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하거나 원하지 않는 조언을 하지 맙시다.(성적/학력, 탈학교, 진로) 청소년에게 "기특하다", "대견하다", "미안하다"고 표현하는 것도 사양합니다.
4. 불쾌감과 성적수치심을 느끼게 만드는 신체접촉, 윙크 같은 성희롱을 하지 맙시다. 외모에 대해 칭찬하거나 비난해도 기분 나쁠 수 있습니다. (예쁘다, 잘/못 생겼다)
5. 국가, 인종, 성정체성, 성적지향, 채식, 옷차림 등 정체성/가치관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조언하지 맙시다. 

박근혜정권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에서 매 집회 때마다 집회 참여 시민들과 나누었던 공지사항입니다. 집회가 거듭될수록 자유발언을 하는 시민들이건, 퇴진행동을 대표해 나왔던 활동가들이건 할 것 없이 이 공지사항을 잘 지키게 되었고, 집회 초반에 곳곳에서 나타났던 조롱과 비하 없이도 촛불시민들은 자신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전달했습니다. 이것은 퇴진행동이 전적으로 만들었다기 보다는 적극적인 의견 개진을 통해 "이 곳에 참여하는 누구도 배제되거나 차별받지 않는 광장"을 만들자는 시민들의 뜻이 상호작용한 결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호응했던 '우리들'의 이야기는 비정규직 노동자, 여성, 장애인, 성소수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국가폭력 피해자, 양심수의 가족들, 해고노동자, 청소년, 노인, 이주민, 빈민, 원전지역 주민, 성주 소성리의 주민들 그리고 세월호 가족들...이 사회에 함께 살아가는 다양한 우리들의 이야기로 넓어져갔습니다. 위와 같은 공지사항은 다양한 사람들이 광장의 주인이라는 원칙을 실질화하기 위한 당연하고 기본적인 수칙들이었습니다.

물론 완전히 "차별과 혐오에 반대하는 광장"이라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보다는 상반되는 입장들이 끊임없이 경합하고 충돌하는 장이었지요. 최근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여전히 "기다려라"와 "지금 당장"의 경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촛불대선을 통해 당선된 새 정부가 알아서 잘 해나갈 것이라는 기대감만으로는 무심합니다. 여전히 나중으로 밀려나있는 사람들이 아직 갖추지 못한 삶의 권리를 아주 오래전부터 계속 외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빼앗긴 자들의 시대 정신 "지금 당장" 

제 얘기를 잠시 해보겠습니다. 퇴진을 함께 외치면서 제가 여성 성소수자로서 지금껏 당해온 차별을 넘어서는 새로운 민주주의와 평등을 꿈꾸었습니다. 그리고 창원에서 열린 촛불에서 한 청년 전기공이 했던 발언을 듣고 저는 더욱 열심히 촛불을 들게 되었지요.

"박근혜가 퇴진한다고 내 삶이 달라질까요? 박근혜가 퇴진하더라도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 슬픔 같은 건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 한 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는 이대로 20년, 30년 더 살라고 하면 못 살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사실 제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내 삶이 달라져야 정말 달라진다." 그래서 저는 지난 2월 16일 성평등 포럼이 열린 자리에서 저는 문재인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를 찾아가 항의했습니다.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그가 2월 13일 한국기독교총연합회에 찾아가 성적지향이 포함된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기 때문이지요.

"저는 여성이고 동성애자인데 제 인권을 반으로 가를 수 있습니까? 제 평등권을 반반으로 자를 수 있냐는 말입니다. 유력 대선후보면 대답을 해주시란 말입니다. 왜 이 성평등 정책 안에 성소수자에 대한 성평등을 포함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제가 던졌던 질문입니다. 이에 청중들은 "나중에"를 연호했습니다. 결국 "나중에" 답변하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인권위원회법으로도 충분하다, 사회적 합의가 충분치 않으므로 나중에 고려해보겠다, 나를 설득하려하지 말라'고 했을 뿐입니다. 


대선이 한창이던 4월, 군형법 92조의 6에 의해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처벌받은 A대위와 여러 군인들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고 많은 성소수자들은 두려움과 분노를 느꼈습니다. 촛불을 들 때에는 모두가 하나라고 했는데, 정작 대통령 후보가 TV에 나와 "동성애는 반대"라고 하며 밀어내는 현실을 실감했습니다. 우리는 힘껏 목소리를 내어 성소수자는 '시민'임을 알려야만 했고, 다시 한 번 무지개 깃발을 들고 대통령 후보를 찾아갔습니다.

그 이후 퇴진행동에는 한동안 동성애자는 무대에 세우면 안 된다거나, 퇴진행동이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것이냐는 메일과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퇴진행동의 실무자로서 창구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여성 성소수자인 저는 마치 반으로 갈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고맙게도 저는 모두가 주인인 열린 광장을 함께 지키는 일원으로 많은 시민들의 성원 속에 일했지만. 여전히 반으로 갈려있는 세상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일하는 민주노총에도 최저임금 1만 원과 비정규직 철폐를 걸고 6.30 사회적총파업을 준비하면서 항의전화가 걸려오기도 합니다.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또는 귀족노조라는 비난입니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최고임금인 대다수 저임금노동자들에게는,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노동자들에게는, 소모품으로 취급되는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는, 기다릴 시간이 없습니다.  

"지난 겨울 내내 모두는 인간의 존엄이 지켜지고 불평등과 차별이 해소되는 사회를 염원하며 촛불을 들었다. 불평등을 확산시키고 차별을 조장했던 정치 세력은 물러났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이 그동안 부정당해왔던 권리를 외치고 있다. 노동자들은 '노조 할 권리'를, 성소수자들은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 외침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외침 모두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불평등과 차별을 해소하기 위함이다. 생존과 행복 추구는 공히 기본권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권리는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자들은 우리 모두의 권리를 탄압하는 국가에 맞서 성소수자들과 어깨를 겯고 행진할 것이다."

- 성소수자 군인 처벌에 반대하고 군형법 제92조의6 폐지를 희망하는 노동조합, 노동사회단체 및 개인 일동(55개 단체 및 227명 연서명) 

얼마 전 성소수자 군인 처벌에 반대하고 군형법 92조의 6 폐지를 희망하는 노동자들이 공동으로 발표한 성명입니다. 이 성명은 삶을 유예당하지 않고자 행동하는 노동자와 성소수자의 공통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이 평등한 세상이 아니라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면, 이런 외침들이 항상 유예되고 뒤로 밀렸던 자신의 인권을 지금 당장 보장해달라는 절실한 요구임을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가 무슨 뜻이었건, 그 말이 많은 차별받는 사람들의 삶 속에 각인된 오래된 고통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는 것을 말이죠. 그것이 촛불로부터 배워야할 새로운 사회의 품격이자 기본 원리입니다.

반으로 잘린 세상을 넘어 

박근혜 정권 4년간 간첩신고가 5만 건 들어왔다고 합니다. 강의실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했다고 신고한 경우도 여럿이라고 합니다. 박근혜 집권 기간 동안 일관되게 증오를 부추겼고 그 결과 차별과 혐오는 심화되고 인권은 후퇴했지요. 사상과 표현의 자유 또한 제약 당했습니다. 촛불을 든 지난 겨울 동안 광장의 시민들은 정권을 무력화함으로써 끝날 줄 모르고 치닫던 증오의 질주를 얼마간 늦추고, 애먼 사람들에 대한 증오보다는 구조적 적폐에 대한 분노, 변화를 위한 실천에 집중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출범한 새 정부가 방식이야 좀 다를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금 성주 소성리에서는 서북청년단, 엄마부대 등 박근혜 비호세력 보수단체들이 내려가 주민들을 모욕하고 증오의 폭력을 휘두르는 '백색테러'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들고 싶어하는 세상은 빨갱이 낙인과 증오 선동을 통해 분열된 세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들어야할 세상은 모두가 다르지만 한명 한명이 주인공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세상입니다.

촛불 그 다음은 어때야 할까요? 다시 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민들이 광장에서 "차별금지의 원칙"을 만들어 공유하고 존중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사회도 "차별금지의 원칙"을 만들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는 "동등한 참여"입니다. 동등하게 참여하려면 "평등"이 그 토양이 되어야 합니다. 차별금지법을 제정한다는 것은, 지금껏 용인되어온 갖가지 차별과 혐오를 거두어내고 다양성과 민주주의가 확장되는 사회적 여건을 만드는 과정이며, 힘없고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참여를 사회적으로 보장하겠다는 공식적 약속입니다.

우리는 단일하지 않습니다. 제가 일하는 민주노총 안에만 해도 수많은 차이가 존재합니다. 촛불을 현장에서 이어가는 것은 바로 차별에 맞서고 현실을 바꾸어내는 노력을 늦추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가 사회 곳곳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습니다. 차별금지법 제정과 같이 국가가 나서서 이러한 권리를 보장한다면 더 빨리 확산될 수 있는 변화입니다. 


퇴진 촛불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노동자들의 노조가입상담이 크게 늘었습니다. 광장의 촛불은 내가 지닌 힘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나의 힘"이란 민주주의의 키워드이기도 합니다. 성소수자 또한 최근 가시화와 주체화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커졌습니다. 민주주의의 내용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 광장의 주인공은 누가 되어야하는가, 계속 질문하고 이야기해야할 때입니다. 우리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을 맞은 자랑스러운 촛불시민이기 때문입니다.



방조된 적폐, 한국인들의 원정 '성매매 산업'
[민교협의 정치시평] 적폐의 종합적 청산과 진정한 사회변혁을 위한 제언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아직 장관 인선조차 제대로 안 된 상황이지만, 벌써 적폐 세력들의 반발들이 곳곳에서 매우 격렬하게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반발들은 표면적으로는 야당과 같은 정치 정당들의 인사 검증이라는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한 정치 과정을 철저하게 이용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특권과두동맹 혹은 기득권지배세력들의 연합 전선이 점차로 가시화되고 있다. 특히 지금도 그렇듯이 북한과 미국이라는 강력한 외적 변수도 결정적인 순간들에 개혁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그런데 그 보다 더 큰 제약은 바로 철저하지 못한 개혁 의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개혁 의지의 약화는 개혁 주도 세력들의 의지 약화 자체에도 있겠지만, 중도 자유주의 정권 자체의 구조적인 한계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큰 원인은 바로 한국을 지배하는 실제 권력, 즉 정당 정치 뒤에서 자신들의 독점적 이익을 유지, 확대하고자 하는 특권과두동맹 혹은 기득권지배카르텔 등의 방해 공작에 있다. 이들이 철두철미하고 일사분란하게 단일적인 대오로 저항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무시무시한 힘은 정치사회에서 뿐 아니라 일상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우리는 박근혜-최순실 일당의 국정농단 사태와 촛불 시위, 그리고 탄핵과 정권 교체의 과정을 겪으며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 개개인이나 정당 중심의 보수/진보 구도에서 파악하기 힘들었던 사회 전체적인 적폐 세력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학습효과로 인해 현 정권의 일련의 적폐 청산을 위한 개혁 시도에 압도적 국민 다수가 지지를 보내고 있으며, 동시에 적폐 세력을 대변하는 정당들에 대한 지지율이 텃밭 지역에서조차 몇 퍼센트 되지 않는 사상 초유의 현상이 이어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소위 독자성을 강조하기보다 개혁 기조를 지지하는 일이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진보정당들의 행위에 대해서 중도 자유주의 정당의 2중대 운운하는 정당 중심의 정치 논리에 휩싸인 관성적 저항 논리가 횡행하지 않는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이는 곧 정당 중심 논의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의 기득권카르텔에 의해 구축된 적폐 청산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현 국면을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듯 각론에 있어서는 다소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무엇이 적폐이고, 어떤 세력이 적폐 세력이며, 그들을 어떻게 청산해야 할지, 그리고 저들은 어떠한 방식으로 저항할지에 대해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적폐 세력들은 단지 수면 위로 보이는 정치와 관료, 기업집단들 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 또아리를 틀고 강고한 카르텔,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상황은 만만치가 않다. 따라서 적폐 세력과의 싸움은 결단코 단기적인 싸움이 아니며, 따라서 이번 정권 하에서는 잘 해야 그러한 작업을 시작하는 정도에서 그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일당 국가가 아닌 상황에서 언제든 정권 교체가 이루어질 수 있고, 설사 유사한 개혁 정당이 집권을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지지율 정도에 따라 적폐 청산 개혁의 강도와 방향이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크게 흔들리지 않을 근본적인 구조적 개혁, 근본적 구조 변혁이 필요하다. 적폐 청산을 위한 치열한 투쟁이 승리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순간에 서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저들의 공통적 방어 진지에 대한 근본적 파괴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일까?  

놀랍게도 지금까지 그 어느 진보 좌파적 정치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에서조차도 제대로 된 문제제기를 하지 않은 영역이 존재한다. 한국 사회의 모든 적폐가 종합적으로 작동하는 영역, 여성착취와 인권침해, 부정부패와 각종 범죄의 온상, 그리고 정경유착과 비공식 경제의 절정, 그리고 기업범죄와 특권과두동맹의 카르텔이 이루어지는 공간인 성산업이 바로 그것이다. 젠더와 여성인권을 논하는 사람들조차 메갈로 상징되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동성애 문제에는 관심이 있어도 여성의 상당부분이 극단적 고통을 강요받고 있는 이 영역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일부 관념적 페미니스트들은 성산업 종사 여성들의 착취를 노동으로 일컬으며 성산업가와 성구매자들을 옹호한다. 심지어 지난 대선 공약에 정의당에서조차 성평등 공약을 비롯한 사회개혁 공약들에서 엄연히 한국사회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역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영역에 대한 공개적 논의와 축소, 철폐 노력 없이 논하는 성평등, 평화, 페미니즘, 복지국가, 경제민주화, 사회적 경제, 기본소득, 4차 산업혁명 등등 대안과 미래 사회에 대한 논의는 허구이다. 수면 위로 보이는 공식적 영역만 다뤄왔던 오랜 관성을 이제는 타파하고, 사회를 종합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한국 사회의 진보적 변혁에 관한 논의는 비공식 영역들을 억지로 무시해 왔다. 촛불 시민 등과 같은 아름다운 단어는 물론 신자유주의화, 비정규직, 청년 실업, 고독사, 사회양극화 등등 심지어 이 시대의 사회의 아픔을 표현하는 수많은 단어들조차 수면 아래에서 살아가는 이 사회의 상당수 구성원들에게는 전혀 다른 세상의 단어들이다. 촛불 시위로 나라가 들썩이고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던 바로 그 순간에조차 조폭들과 정치인들, 관료들, 기업인들, 그리고 특권 상층계급 집단이 거대한 사슬을 이루고 있는 성산업 주변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해외에서도 한국인들이 사실상 주인인 성산업이 한국기업들과 동맹관계를 맺으며 확대일로에 있다. 대부분 가난한 저개발국가들에서 현지 조직폭력집단들과 함께 부패한 관료, 경찰들에게 뇌물을 주어 가며 현지법을 어기며 현지 주민들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상황에 놓여 있는 빈곤층 여성들을 한국인들의 성적 쾌락을 위한 도구로 만들어 놓는 국제적 범법 행위에 대해 지금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방조해 온 것이 사실이다. 김영란 법이 생기기 전까지는 심지어 정부를 대표하는 해외 공관의 직원들조차 아무런 거리낌 없이 불법 성매매 업소에서의 접대와 유흥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소문들도 나온다. 특히 한국에서 고위 관료들, 정치인들, 기업인들이 방문할 경우 성매매 업소는 필수적인 코스였다는 믿기 힘든 말도 있다. 일부 관광객의 문제인 양 진실을 오도하는 짓은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어쩔 수 없는 접대 문화라며 아예 그러한 성매매 구조를 만들어 장려하고 있는 기업들의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물론 이 외에도 현지 노동자 임금 착취 및 장시간 노동 강요, 노동조합 조직 탄압과 같은 전통적인 노동 문제에 있어서도 한국 기업은 선두에 서고 있다. 성매매 여성화 문제 외에도 현지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성희롱이나 현지 여성들에 대한 성폭력은 물론 비정상적 결혼이나 현지처, 코피노와 같은 버려진 아동 문제 등 이미 오래 전부터 심각한 수준이 되어 버린 여성 일반에 대한 문제도 있다. 그 외에도 부패한 독재정권과의 결탁 속에서 이루어지는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서 벌어지는 주민 강제 이주, 환경 파괴 등의 문제, 그리고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인종주의에 바탕을 둔 차별 및 현지 문화 비하, 무시 등 종합적인 문제가 있다. 

이렇듯 이제 한국인들은 아시아 지역에서 대부분의 개발도상국, 저개발국들과 경제적 위계질서에 있어서 그들과 유사한 수준에서 동등한 연대가 필요한 주변부의 하층민들로서가 아니라 우월한 지위에서 다양한 수준에서 지배자, 착취자, 가해자로서 행위하고 있다. 따라서 국제개발협력이나 아시아민중들과 연대하는 다양한 국제적 연대 프로그램들에서 이제 더이상 한국은 과거와 같이 같은 수준에서 유사한 아픔을 겪는 국가가 아니라 우월적 지위의 착취자로서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 국가가 되었음을 전제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매우 흥미롭게도 외교부 장관과 여성가족부 장관으로 노동과 인권, 여성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국내외에서 매우 활발하게 실천적 활동을 꾸준히 전개해 온 여성들이 임명 혹은, 지명되었다. 두 장관 모두 위안부 문제를 다시 공론화시켜 재협상 및 진정한 해결을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당연히 과거의 역사를 바로 잡고 가해 국가에 책임을 묻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 문제 등 우리가 가해자로서 저질렀던 일들을 반성하고 책임을 지는 일 역시 매우 중요하다. 

더 나아가 과거가 아닌 현재 우리가 아시아를 비롯한 개발도상국 혹은 저개발국들에서 자행하고 있는 각종 반인륜적, 반인권적, 반노동적, 반여성적 행위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해결 의지를 보여야 한다. 그 중의 핵심은 바로 현지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의 구조화에 있다. 외교부는 그 동안의 방조행위를 중단하고 해외에서의 한인 성산업 운영 행위를 현지 당국에 고발하는 등 획기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물론 이러한 국제적 범죄행위의 시발은 당연히 한국 사회의 남성성욕중심적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5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 안에 두 장관의 힘만으로 우리 사회의 적폐의 총집합체인 여성 착취의 현장들을 송두리째 도려내는 작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나 곳곳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적폐 기득권 집단들이 서로 강고한 동맹을 맺는 공간인 성산업 영역에 대한 논의는 지금이 적기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을 접대부로 둘 수 있다는 법을 폐지하고, 기업의 성접대 문화 철폐 및 성접대비를 지역사회 발전기금 등으로 전환시키며, 성매매 업소 주인들에 대한 재산 몰수 및 탈성매매 여성 지원비로 전환을 강제하며, 성구매자와 성매매 알선업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그리고 미군 대상 업소에 대한 법집행 등 다양한 조치가 시작되어야 한다. 국가는 그 동안 적폐세력동맹의 영향 하에 이를 방조, 장려해 왔다.

검찰과 교육계 등을 포함한 관료집단들, 재벌을 포함한 다양한 기업들, 그리고 언론, 사교육, 문화계 등등 우리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 내 기득권 적폐 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조폭 등 각종 주변적 범법자들이 주도하는 비공식 경제를 부추겨가며 여성들을 성산업이라는 블랙 홀로 빨려 들어가도록 방조하고 있다. 여성들 뿐 아니라, 상당수의 남성들도 어린 나이 때부터 심각한 사회양극화와 부와 권력의 세습,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 가족의 붕괴와 학원 폭력, 그리고 불공정하고 부정의한 무복지 사회, 학력과 부와 지역에 따라 심각한 차별과 소외와 배제가 만연한 사회에서 스스로 주변화되기를 자처하면서 비공식 경제의 세계로 빠져 들어가고 있으며, 각종 사기와 범죄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중의 상당수는 여성을 매매하는 업종으로 들어 와 조폭과 그 하수인들의 사슬 속에서 여성은 물론 서민들을 착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이 땅의 지배 집단들은 이를 적극적으로 방조하면서 자신들의 지배 카르텔을 공고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촛불 시민으로서의 여성과 성적 착취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까지 논의되어 왔던 세계나 한국사회의 여러 문제들은 설사 그것이 끔찍한 문제라 할지라도 수면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한정된 일부의 사안들이었다. 그리고 그 사안들은 지식인들에 의해 더 그럴싸하게 꾸며졌다. 과거 혁명이 위대했던 것은 다른 그 어떤 것보다도 사회 전체 구석구석까지, 그리고 수면 아래에 감춰져 왔던 영역까지 관심을 갖고 그 영역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반범죄적 주변적 집단들까지도 인간다운 세상으로 끌어 올렸다는 데에 있었다. 이제 다시 진정한 혁명을 고민해야 할 때가 왔다. 추상적 관념 논쟁은 중단하고 국내외에서 벌어지는 여성 착취의 현장들을 과감하게 쳐 내야 할 것이다. 그 시발점이 두 장관 임명이 될 것이라 믿고 싶다.  


여성의 삶을 대신 말하는 오만한 남자들

이민경 (작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23일 금요일 제509호

며칠 전 SNS에서 흥미로운 이야기를 봤다. 직원이 대부분 여성이며 임원도 거의 여성이고, 직원들은 3일씩 주어지는 생리휴가를 남발하는 반도체 회사가 있다고 한다. 그곳에서 A라는 한 페미니스트 직원이 유독 남자 직원들을 괴롭게 했다. 남자 화장실에 피에 전 생리대를 붙여두거나, 포스트잇을 붙이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그렇게 문제를 일삼던 A는 어느 날 남자 직원들에게 또다시 공격적인 행동을 했다. 이번엔 가방에 든 물건들을 던졌는데, 얻어맞고 보니 소지품의 정체는 차례대로 페미니스트 배지, ‘입트페(입이 트이는 페미니즘)’라 불리는 책, 생리대였단다. 그 덕분에 SNS에서는 생리휴가라는 단어가 종일 화제였다.

생리대가 끼어 있는 꼴이 영 어색하다고 생각하려니 비슷한 이야기 하나가 또 떠올랐다. 차를 타고 가던 폐경기의 언니가 갑자기 생리를 터뜨린다. 언니는 “뜨거워. 몸속에서 밀려나와”라고 말하고, 동생은 언니의 생리 냄새를 물고기 냄새로 묘사한다. 그리고 언니의 엉덩이를 들어서, 생리대로 허벅지를 닦고, 손톱깎이에 달린 작은 칼로 언니의 팬티를 잘라 벗긴다. 김훈 작가의 단편소설 <언니의 폐경> 속 장면이다. ‘한국 문단의 벼락같은 축복’이라는 말로 곧잘 수식되는 작가는 이 작품으로 2005년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했다. 갈수록 정확성을 더해간다는 평을 받았다. 물론 심사위원은 전부 남자였다.

ⓒ정켈 그림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다. 저 소설 속 생리에 대한 묘사는 다 틀렸다. 생리대는 휴지가 아니며, 생리는 한 번 닦아내고 피 묻은 속옷을 버린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생리할 때의 느낌은 고사하고 흉내를 내보려면 무엇을 해야 했고 무엇을 하지 않았어야 하는지 감도 못 잡는다. 여성들이 어떤 부분에서 폭소를 터뜨린 건지 알지 못한다. 경험하지 않은 세계는 오랜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경청하지 않고선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것이 아닌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이 말하고 자신 있게 쓴다. 소름 끼칠 정도로 관심이 많으면서 동시에 관심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왜 그들의 이야기가 어불성설인지 그들은 앞으로도 영영 모를 것이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일단 세상에서 여성의 삶이 특수한 일부의 것으로 치부되어 쉽게 모방하기 어렵게 숨어버린 것, 다음은 그럼에도 평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자료 조사를 중요시한다고 말하던 남자 소설가가 자신이 그린 여성의 삶이 공감을 부르리라고 굳게 믿는 것. 이 둘은 서로를 끊임없이 강화한다. 여성의 삶은 생소해서 남성에 의해 제대로 모방되지 못하고, 그러면서 생소한 삶이 한 번 더 생소해진다.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말할 수는 있지만…

물론 우리는 알지 못하는 세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만큼이나 오만이 빚어낸 황당함을 조롱할 수도 있다. 나는 그들의 납작한 반쪽짜리 세계에서 구태여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의미를 찾아 가치를 매겨주는 일은 이제 그만두고 싶다. 그보다는, 내 것이 아닌 세계에 그렇게나 관심이 많으면서도 절대로 관찰하고 경청하려 하지 않는 그들이
만들어낸 것들이 전부 가짜이며, 가짜인 채 의미가 없다고 말하겠다.

여태껏 남성들이 서로에게 속아 넘어가며 단단하게 만들어온 여성의 세계는 우스꽝스러웠다. 앞서의 조롱은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를 밀어내는 집요한 행위이므로 이제 그 우스꽝스러움은 점점 더 탄로 날 일만 남았다. 한계를 느끼고 쓰지 않거나, 나아지기 위해 배우거나, 야유 속에 폐기되거나. 여성들의 삶을 대신 말하던 남성들은 이제 셋 중 하나, 어디로 갈지 고르면 되겠다.



속 ‘남자 마음 설명서’ 가부장제 편

최태섭 (문화평론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6월 29일 목요일 제510호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의 저서 <남자 마음 설명서>에 드러난 다채로운 여성혐오 관점에 대하여 문제가 제기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그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이 문제를 지나가는 바람 정도로 여기는 것 같지만, 페미니스트들은 괜한 사람이나 괴롭히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여성은 이미 ‘촛불’ 이전부터 이 국가가 여성을 온전한 구성원으로 여기고 있는지 의문을 가져왔다. 이 물음은 정권이 바뀐 지금까지도 여전히 계속된다. 청와대 의전비서관실에서 근무하는 행정관은 명실공히 공인이다. 대선 기간 가장 뜨거웠던 스캔들 중 하나가 다름 아닌 홍준표 후보의 ‘약물 강간미수 사건’ 회고였음을 떠올려본다면, 이것은 충분히 공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는 일이다. 이 사건에서 더 큰 웃음이나 음악으로 보답할 길 같은 것은 없다. 납득할 만한 해명과 조치가 있거나, 그가 더 이상 공인이 아니게 되는 길이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나도 모르게 설명당해버린 마음의 억울함도 달랠 겸, 나 역시 다른 버전의 설명을 시도해보려 한다. <남자 마음 설명서>의 표지에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여자는 따로 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럼 선각자를 따라서 이렇게 이야기해보자. “남자들이 두려워하는 여자는 따로 있다!” 누구인가? 주체적으로 판단하고 욕망하고 일하고 말하고 쓰면서, 나에게는 관심 없는 여자. 다름 아닌 온전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여자이다.

ⓒ정켈 그림

오늘날 가부장제의 기능은 바로 여성 주체를 끊임없이 방해하는 일이다. 사회제도·법·관습·지식·문화 등 사회 전반에 암약하면서, 여성들을 종속적이고 부차적인 위치에 잡아두려 한다. 그것은 때로 물리적인 폭력이기도 하고, 세련되고 문명화된 투명한 장벽이기도 하다. 여성의 삶을 끊임없이 생물학적 성별로 환원하고, 그 성별을 궁극적인 제한이자 천형으로 여기도록 하려는 장치들의 총합이다.  


많은 경우 가부장제는 남자에게 문제로 인식되지 않는다. 남성 개개인은 가부장제의 창조자나 담지자가 아니다. 다만 가부장제가 남성 일반에게 선사하는 유리한 조건들을 당연하게 여길 뿐이다. 여기에 더해 가부장제하의 남성은 여성을 보상이나 전리품으로 인식하도록 교육받는다. 삶에서 특정한 수준의 성취를 해낸다면, 그 성취에 맞는 여성이 자연스럽게 주어질 것이라는 식이다. 이런 인식은 여러 가지 효과를 낳는다.

여성이라는 생물학적·사회적 존재에 대한 무지를 이어나가는 것을 용인한다. 여성을 외모라는 ‘기준’과 성교와 돌봄이라는 두 가지 ‘기능’으로 단순화하여 그에 대한 집단적 환상을 갖게 한다. 상대의 환심을 사고 마음을 얻는 과정이 증발하고 모종의 빚쟁이 같은 마음이 관계의 기본이 된다.

여자들이 잘못된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남자를 혐오한다?


하지만 환상은 사회에 발을 딛자마자 깨진다.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한 경쟁자로 나타난다. 더 많은 제약과 악조건에도 남성들에게 절대 뒤지지 않는다. 남자들은 당황한다. 가부장제의 온실 속에서 곱게 자라난 남성성이 감당하기에 오늘날의 세태는 너무 거세다. 뭐가 문제인지 고민하던 이들이 얻은 답변은 가히 최악의 것이다. 여자들이 문제다. 세계는 여성혐오 같은 거 하나도 없고, 평화롭고, 정상적인데, 여자들이 잘못된 페미니즘에 경도되어 남자를 혐오하는 게 문제라는 얘기다. 어느 누리꾼은 이 자가당착을 한 문장으로 요약했다. “세상에 여혐이 어딨어? 여혐이라고 하면 죽여버린다!?”

이 작고 깨지기 쉬운 남자의 마음을 단련시켜야 한다. 정 어렵다면 하루에 세 번씩 외쳐보자. “여자도 사람이다.” 이 문장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모든 일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