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못해 살고 있다” 위기의 노인들
“죽지 못해 살고 있다” 위기의 노인들
이민우 기자 ㅣ mwlee@sisajournal.com | 승인 2017.06.01(목) 08:30:00 | 1441호
5월25일 오전 11시, 어렵게 김 할머니를 만났다. 김 할머니는 당초 약속된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핸드폰도 없는 탓에 골목길을 수차례 오갔다. 수레를 끌며 폐지를 줍는 어르신 몇 분을 만난 끝에 김 할머니를 찾을 수 있었다. 김 할머니는 “바람 때문에 일이 더뎌서 거기(약속 장소)까지 못 갔다”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바람’이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이내 알아차렸다. 바람이 불자 리어카에 있던 빈 종이상자들이 자꾸 이곳저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할머니는 흩어진 종이상자를 다시 수레에 싣고 돌덩이를 올려놓은 뒤 자리를 옮겼다. 다른 골목길에 들어서자 바람이 다시 심해졌다. 수레에 있던 박스들이 또 한 번 땅바닥에 떨어졌다. 몇 미터씩 이동하면서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오늘은 리어카 끈을 안 갖고 나왔어. 이렇게 바람이 심할 줄 몰랐지.”
김 할머니는 이날 새벽 5시에 집을 나섰다. 해가 길어져 좀 더 일찍 시작해야 했다. 늦게 나오는 날에는 다른 어르신들이 박스를 전부 주워간다고 했다. 날이 밝기 시작하면 서둘러야 했다. 경쟁적으로 일찍 시작하다 보니 어떤 할아버지는 새벽 2시에 박스를 긁어간다며 성을 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무렵, 김 할머니는 수레를 한 상가 옆에 맡겨두곤 근처 공원을 찾았다. 인근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무료급식소였다. 고급스럽지는 않아도 집에서 밥에 김치만 먹는 것에 비하면 진수성찬이라고 했다. 잠시 식사를 마치곤 수레를 찾은 뒤 다시 동네 골목길로 나섰다.
김 할머니가 폐지를 줍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부터다. 자녀는 없었지만 은퇴한 남편과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암 판정을 받았다. 수입도 마땅치 않은 탓에 평생 모아 장만했던 집을 팔아야 했다. 2년여 동안의 투병기간 동안 전셋집을 얻었다가 다시 월세방으로 옮겼다.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엔 조그만 식당에 나가서 잡일을 하거나 청소를 도와주는 일을 했지만,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더 이상 일을 찾지 못했다. 결국 월세조차 낼 수 없어 두 평짜리 쪽방을 찾게 됐다.
ⓒ 사진=연합뉴스
폐지 줍는 노인 175만 명…“수레는 생계수단”
그때부터였다. 옆방 할머니를 따라서 폐지를 모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10년 전만 하더라도 지하철에서 나눠주는 무가지(無價紙)를 모을 수 있었다. 처음엔 그리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경쟁이 치열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구할 수 없게 됐고, 그때부터 수레를 끌고 골목길을 헤매기 시작했다. 김 할머니에게 수레는 한 발 한 발 더디지만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됐다.
물론 김 할머니에게도 고정적인 수입은 있었다. 정부에서 어려운 사람들에게 ‘기초 생활’을 보장해 주겠다며 지원금을 줬다. 김 할머니의 통장에는 매월 40만원 남짓 돈이 입금됐다. 이 중 20만원은 쪽방 월세로 나가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했다. 그나마도 고혈압과 당뇨 때문에 약값으로 썼다. 주민센터에서 드문드문 쌀과 비품 등을 지원해 주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김 할머니는 10년의 시간이 흘러도 수레를 놓을 수 없었다.
“그래도 난 몸이라도 멀쩡하니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사는 거지. 아프기라도 해봐. 그땐 꼼짝없이 혼자 죽는 거야. 같이 박스 모으러 다니던 옆방 할아버지도 앓아눕더니 몇 달 만에 저세상 가더라고. 남 얘기가 아니야.”
김 할머니처럼 폐지 줍는 노인은 얼마나 될까. 한 시민단체의 추산에 따르면, 약 175만 명이다. 이들이 줍는 폐지는 1kg에 50~80원에 팔린다. 쌀 한 가마니 무게의 폐지를 하루 종일 끌고 다녀도 고작 6000원 정도를 번다. 식당에서 한 끼 밥값도 되지 않는 돈을 위해 새벽부터 일어나 거리를 헤매고 있는 셈이다.
쪽방촌은 서울 영등포구 영등포동 외에 용산구 동자동, 종로구 돈의동, 노원구 중계동 등에 형성돼 있다. ⓒ 사진=연합뉴스
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만큼 독거노인 수도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2015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654만 명. 이들은 빠르게 빈곤층으로 편입되고 있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의 상대적 빈곤율은 49.6%로, 34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 2위인 이스라엘(24.1%)보다도 2배 이상이나 된다. 소득이 중위소득의 50%에도 못 미치는 노인이 전체의 절반인 것이다. 이 수치는 그나마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 정부 지원금과 연금을 포함한 수치다. 이를 빼고 시장 소득만을 기준으로 하면, 노인 빈곤율은 63.3%로 치솟는다.
김 할머니는 어디에 살고 있을까. 고물상에서 정산을 하고 김 할머니가 향한 곳은 서울 영등포역 근처 쪽방촌이었다. 롯데백화점과 타임스퀘어가 보이는 대로변에서 몇 걸음 들어서자 새로운 모습이 펼쳐졌다.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길, 낡은 전선들이 거미줄처럼 감싸고 있는 허름한 건물들이 나타났다. 그나마 몇 해 전 서울시에서 리모델링을 해서 외관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어림잡아 250~300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수레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가자 해가 들지 않는 구부정한 골목에 터를 잡은 김 할머니의 쪽방에 도착했다. 한 사람 몸을 누이기에도 비좁은 방 안에는 이부자리와 밥솥, 옷가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김 할머니의 때 묻은 작은 냉장고에는 빈 그릇과 고추장, 김치통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 위에 놓인 차갑게 식은 밥과 고추장, 김치가 김 할머니의 유일한 한 끼 식사다. 무료급식소의 밥을 왜 ‘진수성찬’이라고 표현했는지 실감이 났다. 방에 들어간 할머니는 한쪽 구석에서 라면을 한 개 꺼내더니 같이 먹자고 했다. 누군가에겐 한 끼 가벼운 식사가 김 할머니에겐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을 때 내놓는 선물이었다.
그나마 봄·가을엔 살 만하다고 했다. 숨이 막힐 듯한 더위나 뼛속까지 전해지는 추위가 없기 때문이다. 여름에는 선풍기를 틀어도 뜨거운 바람이 나온다. 도저히 버틸 수 없어서 공원에 나가면 모기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겨울에는 이불 세 겹을 덮고 혹한기를 버텼다. 고물상에서 멀쩡한 전기난로를 얻어왔지만 집주인은 전기세 때문에 한 달에 5만원을 더 내라고 했다. 주인집 성화에 못 이겨 켤 수가 없었다. 그나마 서울시에서 집을 수리해 주고 난 뒤에 웃풍은 조금 줄었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그래도 겨울엔 각종 단체에서 지원도 많이 해 줘 연탄이나 끼니 걱정 없이 산다”면서도 한숨을 내쉬었다.
영등포 쪽방촌은 거주자 대부분 혼자 살고 있다. 40~50대 거주자들은 주로 일용근로자나 무직자다. 65세 이상 노년층은 장애가 있거나 근로능력이 없어 장애연금이나 기초생활수급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들은 수입 가운데 절반 이상을 월세로 내고 있다. 비단 이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최근 발표한 국토연구원의 ‘2016년 주거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에 홀로 사는 노인의 임대료 비중은 소득의 절반 정도(50.3%)를 차지했다.
이 같은 쪽방촌은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외에도 용산구 동자동, 종로구 돈의동, 노원구 중계동 등에 폭넓게 형성돼 있다. 이곳에 사는 노인들은 사는 동네는 달랐지만 형편은 비슷했다. 이들은 결혼을 못한 상태에서 가족 없이 홀로 살거나 자식 내외와 떨어져 사는 아픔을 간직한 채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고 있었다. 쪽방촌 거주 노인 중 다수는 추운 겨울 전기세를 한 푼이라도 아끼고자 전기장판을 이용하지 않는 등 지출을 최대한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또 겨울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는 곳도 상당수였다.
“웰빙만큼 웰다잉도 준비해야”
한때 웰빙(Well-Being)이란 단어가 유행했다면, 최근엔 웰다잉(Well-Dying)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답게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의미다. 웰다잉은 삶의 의미를 찾아 현명한 노후를 보내고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한국 경제성장기의 주역이었던 지금의 노인들에게는 먼 미래를 준비할 여유가 없었다. 웰다잉이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래 왔던 것처럼 자식 세대의 존경을 받으며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고, 강산도 변했다. 그들은 예전보다 더 오래 살 수 있게 됐지만 마냥 기쁘지는 않다. 가족 수는 점점 줄었고, 부모를 봉양하는 가구도 함께 줄었다. 급기야 외롭게 살다가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고독사(孤獨死) 사례가 급증하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들은 으레 이곳 쪽방촌을 찾아온다고 한다. 그리곤 노인 정책을 내놨다. 이번 대선에서도 비슷했다. “치매 노인을 국가에서 책임지겠다” “기초연금을 늘리고 노인 일자리를 확대하겠다” 등 공약들이 나왔다. 실제로 대선을 거칠 때마다 노인 복지정책들은 점차 확대되는 경향을 보였다. 정부는 지난 2008년 기초노령연금과 노인장기요양보험을 도입하고 2014년 기초노령연금을 확대해 기초연금으로 개편하는 등 노인 복지정책을 잇따라 펼쳤지만 급격한 노령화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일자리 문제도 마찬가지다. 노인 일자리를 늘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노인들이 계속 근로해야만 살 수 있는 상황이 옳은가의 논란도 있다. 실제로 덴마크의 75세 이상 노년층 고용률은 0%로, 일하는 노인이 거의 없다고 한다. 그렇지만 노인 빈곤율은 상대적으로 낮다. 반면 한국의 일하는 75세 이상 노년층은 17.9%(2015년 기준)로, OECD 국가 중 매년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연령대를 조금 낮춘 65세 이상 노년층 고용률은 30.6%다. 한국의 65세 이상 노인 세 명 중 한 명은 노동을 하고 있다. 은퇴 후에도 활발한 노동을 이어가고 있지만 노년층의 경제상황은 여전히 비극적인 상황인 셈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 치매 노인 국가책임제, 기초연금 인상 등을 약속했다. © 연합뉴스
황남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국은 공적연금이 미성숙한 상태에서 노인들이 노후를 준비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며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복지와 소득 분배 등이 이슈로 부각되면서 불과 20년 사이에 불거진 문제”라고 지적했다. 황 부연구위원은 “현재 상황에선 기초연금과 주택·농지연금을 활성화하는 게 노인들 소득 보장을 뒷받침하는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제안했다.
이상구 복지국가소사이어티 공동위원장은 “(기초연금처럼) 소득 지원금을 30만원으로 늘린다고 해도 노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어렵다”며 “노인 소득보장체계, 노인 건강보장체계, 노인 일자리 등 세 가지로 구성된 노인 복지정책이 상호보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20년 먼저 고령화 진행된 일본은…
일본의 고령화는 일찌감치 진행됐다. 65세 이상 인구 비중이 26.7%에 달하는 초고령사회다. 당연히 한국에서 문제가 되는 노인 문제들이 일본에선 10~20년 전 불거졌고, 그 수준 또한 더욱 심각하다. 초고령사회 일본은 노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대책들을 추진하고 있을까.
일본은 고령자 복지시설로는 해결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국고보조를 폐지했다. 대신 고령자 전용임대주택 제도를 마련해 돌봄까지 함께하는 주택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실버하우징, 우량임대주택, 자립형고령자주택 등 다양한 형태의 고령자 시설을 마련해 고령자 인구의 5% 수준이 혜택을 받고 있다.
한국의 임대주택과 비슷한 공영주택은 대도시 지역을 중심으로 수요가 부족했고, 대폭적인 공급 확대도 어려웠다. 이에 따라 일본은 민간임대주택 등의 공가(空家)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쪽방촌과 같은 곳에 머무는 저소득 고령자 등에게 일정한 질이 확보된 주택을 저렴한 임대료에 공급하고 있는 셈이다.
돌봄 서비스도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고 있다. 가와사키(川崎)시에선 병상에 누워 지내거나 직접 식사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매일 자택으로 식사를 배송해주고, 사업자가 전달 과정에서 안전을 확인한다. 훗카이도, 나가사키 등 6개 도·현(광역자치단체)에선 우체국 네트워크를 활용해 고령자 자택을 방문하고 건강 상태를 확인한다. 또 장보기지원서비스 등도 제공하고 있다.
공공연금을 중심으로 노후 생활에 대한 준비 또한 착실히 진행돼 왔다. 그 결과 연금소득에 의한 노후준비 정도를 보면, 한국은 34.1%에 불과한 데 비해 일본은 71.9%에 달한다. 일자리 문제는 실버인재센터, 고령자협동조합 등을 통해 해결하려고 노력 중이다. 1995년 일본 미에(三重)현에 최초 설립된 고령자협동조합은 전국 30여 개 지역에 설치돼 있다. 노인들이 수행할 수 있는 공원녹화 및 자원재생, 병원 급식이나 청소, 보험 등의 사업을 진행해 노인 일자리를 확보한다.
의료비·간병비 이중고로 ‘실버 파산’
“일본은 병상상한제와 개호보험제에서 해답 찾았다”
노진섭 기자 ㅣ no@sisajournal.com | 승인 2017.06.04(일) 11:00:00 | 1441호
약 40년의 직장생활을 마친 이아무개씨(67)는 2016년 폐암 4기(뇌와 척수로 전이된 상태) 판정을 받고 폐암 치료제를 복용했다. 처음에는 암이 줄어드는 듯했으나 올해 1월 뇌 속 암세포가 다시 커졌다. 의료진은 여러 검사를 통해 내성이 생긴 것으로 판단하고 이씨에게 표적치료제 신약 사용을 제안했다.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이 신약의 가격은 월 1000만원에 달했다. 퇴직한 후 생활비도 빠듯한 상황에서 진료비에 약값까지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이씨는 암 치료를 포기했다.
이씨처럼 돈이 없어 진료를 포기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노년층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나이가 들수록 병에 걸릴 가능성은 커지는데 수입은 없어서 의료비를 감당하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2015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약 654만 명이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이들이 사용하는 연간 진료비는 약 22조원으로 전체 의료비의 37%를 차지한다. 노인 인구가 2025년에는 1050만 명을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는 초고령사회로 진입할 전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인구의 20% 이상이 노인인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는 시점에 노인 의료비는 약 40조원에 육박할 전망이다.
노인 한 명당 연간 의료비는 2015년 357만원에서 2020년 459만원, 2030년 760만원으로 뛸 것으로 정부는 내다보고 있다. 이 전망치는 물가, 노인 수, 건강보험수가, 1인 진료량 상승 예상치를 토대로 계산됐다. 65세 이후부터 사망할 때까지 필요한 의료비는 얼마나 될까.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2016년 의료비통계지표’와 통계청의 ‘2015년 생명표’를 토대로 분석해 보니 약 8100만원이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여성이 남성보다 평균적으로 오래 산다는 점을 고려할 때 여성(9094만원)이 남성(7030만원)보다 노후 의료비로 2000만원가량 더 필요하다.
2015년 경기도 의정부의 한 병원에서 남편이 혈액투석 중인 아내를 보살피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인당 노후 의료비 8100만원 필요
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하고 자녀의 학비와 결혼자금을 대느라 변변한 노후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그나마 몇 푼 모았더라도 노후에 의료비로 탕진하는 이른바 ‘실버 파산’이 우려된다. 그러나 정부는 실버 파산을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65세 이상 노인 의료비에 대한 건강보험 부담비율이 2014년 기준 80%이고 본인 부담비율은 약 20%에 그친다고 밝혔다. 노인이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필요할 것으로 추산되는 의료비 8100만원 가운데 정부가 6488만원을 지원하므로 노인 환자 본인은 1612만원만 부담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민간의료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마치 노후 파산에 직면할지 모른다는 식의 ‘공포 마케팅’에 휘둘릴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국민은 불안하다. 실제로 40~50대 중년층은 부모의 의료비·간병비를 가장 부담스러워한다.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가 부모를 부양하거나 경제적으로 지원한 적이 있는 40~59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2명 중 1명은 “부모 부양이 부담된다”고 답했다. 부모 부양이 어려운 원인으로 의료비·간병비 부담을 꼽은 응답자가 48.9%로 가장 많았다. 이어 생활비 부담(47.6%), 간병 부담(33.1%) 순이었다. 전체 응답자 85%는 “노후 의료비 준비가 필요하다”면서도 “빠듯한 생활비와 자녀 양육비 때문에 노후 의료비 준비가 쉽지 않다”고 밝혔다.
이처럼 정부가 의료비의 상당 부분을 지원한다고 개인의 경제적 부담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의료비 외에 간병비도 만만치 않은 부담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투병 중이면 아들이나 며느리가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환자를 보살핀다. 그러나 맞벌이나 핵가족 등의 사정으로 간병인을 고용하는 추세다.
이 간병비 부담이 상당하다. 정부가 의료비를 전액 지원하더라도 개인은 간병비만으로도 실버 파산을 피할 길이 없을 정도다. 간병비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2009년 추정한 국내 간병비 규모는 연간 약 4조원에 이른다. 연간 수조원이 서민의 호주머니에서 간병비로 지출되는 셈인데 투병기간이 길어지면 저소득층은 가족 간병을 위해 다니던 직장까지 관둬야 하는 ‘간병 실직’에 내몰린다.
“의료기관이 간호·간병 맡아야”
간병비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까지 발생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아내(55)를 5년간 보살피던 남편 김아무개씨(59)는 최근 자신도 대장암에 걸리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내도 곁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한때 건설 일을 한 김씨는 덤프트럭을 판 돈으로 아내의 요양병원비와 간병비를 감당해 왔다.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던 김씨는 일을 그만두고 자신이 아내를 보살폈다. 집안의 유일한 수입원이 끊기자 가족 전체가 빈곤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결국 생활고에 의료비와 간병비까지 이중삼중의 부담을 느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직장인 현아무개씨는 “병석에 있는 장인 간병비로 하루에 약 7만원씩 한 달에 약 200만원이 든다. 간병비와 교통비 등 의료비 외에 지출하는 비용이 상당하다. 나도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실버 파산이 남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간병의 질도 점점 나빠지고 있다. 병원에서 고용한 간병인의 상당수는 정규직이 아니라 외부용역으로 수급한 비정규직이다. 전문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외국인 간병인이 40~50%를 차지해 언어 소통 문제, 24시간 연속 근무 등으로 간병의 질은 더 형편없어진다. 환자에게 기저귀를 채우거나 침대에 환자를 묶거나 약물로 재우는 등 있어서는 안 될 일까지 발생한다. 한 요양병원 관계자는 “간병인 1명이 10~20명의 환자를 담당하므로 서비스가 좋아질 수 없다. 게다가 젊은 층의 야간 근무 기피 현상으로 노인이 노인을 보살피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선진국 가운데 간병인을 별도로 고용하는 나라는 없다. 일본도 과거에는 가족이나 간병인에 의한 간병이 일반적이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간호·간병 서비스는 원칙적으로 의료기관이 담당하도록 제도를 바꿨다. 한국도 2013년부터 병원이 간호와 간병을 모두 책임지는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도입해 시범사업을 벌였다. 환자의 부담은 줄고 만족도는 높아졌다. 하지만 확산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간호 인력 수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구 1000명당 간호사 수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평균이 9.1명이지만, 한국은 5.2명에 불과하다. 스위스, 덴마크 등 서구 유럽 국가들과 비교하면 3분의 1 수준이다. 그나마 간호 인력이 수도권 대형병원으로 쏠리면서 지방 중소병원의 간호 인력난은 더 심각해졌다. 충분한 간호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지방 중소병원은 폐업 위기로까지 내몰리고, 환자의 수도권 쏠림 현상은 가속화하고 있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하면서 노후 의료비는 국가와 개인 모두에게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뻔하다. 과도한 의료비와 간병비 지출로 인해 최소한 국민이 삶을 포기하는 일은 없도록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 국민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복지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20년 이상 앞서 고령화를 경험한 일본은 병상상한제와 개호(介護)보험제도에서 해답을 찾았다. 병원마다 병상 수에 제한을 둬 의료비 증가를 막으면서 개호보험제도를 통해 노인 간병 서비스를 확대한 것이다. 김수홍 일본복지대 대학원 복지경영학 박사는 “일본은 의료비 부담을 억제하기 위해 지역별 병상상한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병상 공급을 억제해 의료비 지출을 줄이는 방법인데, 이로 인해 일본의 병상 수는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한국도 이 제도 도입을 검토해 볼 일이다. 특별한 치료가 필요 없는 사람이 병원에 장기 입원하면서 의료비를 갉아먹는 현상을 없애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5년 여의도 국회 앞에서 의료연대본부 등 관련 단체들이 노인장기요양보험 개정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사진=연합뉴스
한국 요양보험 규모 일본의 4% 수준
개인이 부담하는 간병비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호주, 독일, 스웨덴 등 선진국도 간병비 문제는 개인이 아니라 국가가 담당하고 있다. 이홍수 이대목동병원 노인의학센터장은 “간병비는 국가가 부담하는 게 맞다. 한 병실에 공동 간병인을 두는 시범사업이 진행 중인데, 이를 확대해 개인 부담을 덜어줄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2000년 의료보험과 별도로 노인을 위한 전문 보험인 개호보험(한국의 요양보험)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보건의료 서비스와 복지 서비스를 연계해 정부가 노인에게 종합적인 요양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예컨대 간병을 담당하는 전문가(개호복지사)를 늘렸고, 반드시 입원하지 않더라도 간병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2016년 9월 일본 후생노동성이 발표한 바에 따르면, 2014년 의료비는 총 40조8071억 엔이다. 그중 58.6%인 23조9056억 엔을 65세 이상이 사용했다. 이와는 별도로 개호보험비는 10조 엔 규모다. 2014년 기준 한국의 요양보험은 3조4981억원 규모로 일본의 4% 수준이다. 김수홍 박사는 “일본은 전략적으로 의료비를 개호보험비로 이전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개호보험을 활용해 병원에 입원하려는 환자를 요양시설로 유도한다. 또 요양시설에 입소하지 않고도 집에서 간병이나 재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만약 개호보험제도가 적극적으로 도입되지 않았더라면 일본의 의료비는 이미 난리가 났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이를 먹을수록 여러 만성질환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치료를 받기 위해 여러 병원을 전전하는 과정에서도 의료비가 축난다. 이홍수 센터장은 “동네 주치의, 즉 단골 의사제도를 마련해 노인이 한 의사와 자신의 건강을 상담하고 진료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 의료비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자도 불필요한 진료를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