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빼든 문재인 대통령, 사정 기관을 사정하다
칼 빼든 문재인 대통령, 사정 기관을 사정하다
검찰 개혁, 신호탄에 불과…“경찰·국정원·국세청도 손본다” 문재인 대통령 책과 인터뷰 통해 들여다본 ‘사정기관 개혁 청사진’
김지영 기자 ㅣ young@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5(월) 17:00:00 | 1439호
“청와대에 혁명군이 들어왔다!” 박근혜 청와대에서 근무한 정부부처 파견 공무원이 5월12일 기자에게 한 말이다. 이 공무원은 이날까지 청와대에 근무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 민정수석으로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를 임명한 5월11일 다음 날의 청와대 내부 분위기를 이렇게 표현했다. “혁명군 100명이 청와대에 들어온 것 같다. 들어와서 새롭게 (청와대 직원을) 세팅하고 있다. 혁명군은 세월호 노란 리본을 표찰로 달고 있다.”
정권이 교체되면서 청와대와 정부부처 모두 술렁술렁하다. ‘정권교체’로 인한 ‘인적 교체’ 작업으로 어수선한 분위기가 역력하다. 역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또 재현되는 모습이 있다. 바로 고강도 사정(司正) 한파다. 이전 정권과 재벌 등의 비리 의혹을 사정기관들이 새로운 정권에 충성 경쟁하듯 파헤쳤다. 총사령부는 청와대, 야전사령부는 검찰을 비롯한 사정기관들이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 들어서면서 ‘첫’ 사정 대상이 바뀌었다. 이전 정권과 재벌이 아니다. 바로 사정기관들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에 대한 고강도 개혁 의지를 이미 오래전부터 피력해 왔다. 실제 청와대에 입성하자마자 신호탄을 쏘아올렸다. 개혁 성향으로 비(非)검찰 출신인 조국 민정수석에게 검찰 개혁 지휘봉을 맡겼다.

© 뉴시스
‘검사와의 대화’에 감정 앙금 남아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2003년, 2005년), 시민사회수석(2004년), 비서실장(2007년) 등을 거치면서 사법 개혁과 검찰 개혁에 깊이 관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검찰과 국세청 등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보고 있다. 2014년 정윤회 문건 사건 당시 검찰이 제대로 수사했다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까지 번지지 않았을 것이라고도 보고 있다. 한마디로 사정기관들이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해 왔다는 것이다.
사정기관에 대한 사정은 검찰에 그치지 않을 전망이다. 경찰과 국정원, 국세청 등 유력 사정기관이 그 타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정기관 사정 정국’이 도래한 것이다. 내년 6월 지방선거 이전까지 일단락 짓겠다는 마지노선도 제시했다.
문 대통령이 심중에 품었던 ‘사정기관 개혁 청사진’은 무엇일까. 이는 문 대통령이 그동안 했던 말과 썼던 글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가 했던 시사저널과의 인터뷰, 자서전 등 저서들을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개혁 밑그림’을 들여다보기 위해 시계를 참여정부 시절로 되돌려본다.
참여정부 초기인 2003년 3월6일 법무부는 고검장 인사를 단행했다. 하지만 검찰은 인사에 불만을 갖고 조직적으로 반발했다. 비(非)검찰 출신이었던 강금실 법무부 장관에 대한 거부감도 작용했다. 검사들의 반발이 계속되자 노무현 대통령은 그해 3월9일 평검사들과 대화의 자리를 마련했다. 전국에 TV로 생중계됐다. 문재인 대통령에겐 아직도 당시 ‘검사와의 대화’에 대한 ‘감정적 앙금’이 짙게 남아 있다. 2011년 6월 출간된 자서전 《문재인의 운명》에 나오는 대목이다.
“(검사와의 대화) 행사가 시작됐는데 이건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젊은 검사들은 끊임없이 인사 문제만 되풀이해 따지고 물었다. 인사 불만 외에, 검찰 개혁을 준비해 와 말한 검사는 없었다. 오죽했으면 ‘검사스럽다’는 말까지 나왔을까. 입맛이 씁쓸했다. 선배 법조인(문 대통령)으로서 젊은 검사들이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때 대통령과 우리는 검찰 개혁의 출발선을, 검찰의 정치적 중립으로 봤다. 즉 ‘정치검찰’로부터 벗어나는 게 개혁의 핵심이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서자마자 그들은 순식간에 과거로 되돌아가 버렸다. 검찰을 장악하려 하지 않고 정치적 중립과 독립을 보장해 주려 애썼던 노 대통령이 바로 그 검찰에 의해 정치적 목적의 수사를 당했으니 세상에 이런 허망한 일이 또 있을까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2003년 3월9일 정부종합청사에서 열린 전국평검사들과의 대화에서 서울지검 허상구 검사의 질문을 메모하고 있다. © 연합뉴스
文 “검찰, 거만하고 기득권적인 사고”
문 대통령의 분노와 원망은 자서전이 나온 지 5년이 지나서도 가시지 않았다. 지난 1월 발간된 그의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검사와의 대화는 노무현 대통령의 진정성에서 비롯됐다. 노 대통령은 사회의 공정성을 바로잡기 위해선 무엇보다 검사들의 책임과 청렴함이 소중하다고 판단했고 그들을 존중하는 기본적인 사고에서 검사와의 대화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걸 받아들이는 세력들이 고졸 출신 변호사였던 대통령에게 ‘학번이 어떻게 되느냐?’고 묻는 식으로 거만했다. 기득권적 사고를 버리지 않았던 거다.” 문 대통령은 ‘거만’과 ‘기득권적 사고’란 표현을 썼다. 문 대통령의 검찰에 대한 시선이 어떤지 함축한 표현이다.
2011년 11월 출간된 문재인·김인회 공저인 《검찰을 생각한다》에선 검사와의 대화에 대해 “완전히 대한민국 검사들의 수준만 국민들에게 보여준 꼴이 됐다. 검찰의 문제점, 검사들의 수준, 검찰 개혁의 핵심 등 검찰의 본질이 정확히 드러났다. 검찰의 막무가내식 저항이 검사와의 대화가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평했다. 또한 “참여정부가 미흡했던 점은 검찰 개혁에서 정치적 중립을 넘어서서 더 많은 개혁 과제를 완수하지 못한 것이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검·경 수사권 조정, 법무부의 문민화, 과거사 정리 등을 달성하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의 검찰 개혁 방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의 검찰을 포함한 법조계에 대한 불신은 강한 편이다.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선 “영혼 없는 관료라고 얘기하는데, 나는 관료나 공직자뿐 아니라 검찰이나 법조계 등 모든 분야가 그렇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검사의 경우 처음 검사가 됐을 때는 정의를 구현하고 우리 사회 불의를 타파하는 데 큰 역할을 해야겠다, 그런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면 검사가 직업화된다. 일단 자신이 수사한 사건은 어쨌든 죄로 만들어야 한다. 판사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처음의 마음을 버린 사람들 때문에 국민들이 검찰과 법조계에 대해 불신이 큰 거다”라고 밝혔다.
그런데 유전무죄 병폐를 낳는 전관예우에 관해선 소극적인 입장을 표명했다. 전관예우를 막기 힘들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일본은 고위직 판사와 검사는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는 게 관행이자 문화”라면서 “우리나라도 그렇게 가야 한다는 반성이 있어서, 요새는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출신 가운데 변호사 개업을 하지 않고 대학에서 강의하거나 봉사활동을 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이 정착되면 적어도 부장급 이상 판·검사 출신이라면 변호사 개업을 자제하는 어떤 룰이 생겨나지 않을까 싶다. 나는 법적, 제도적으로 칸막이를 쳐버리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는 입장이다.
법조계 일각에선 미국처럼 각 지방검찰청 단위의 검사장 직선제 실시를 주장한다. 이른바 검찰 분권화다. 이에 대해 과거 문 대통령은 “지방 분권이 확실히 되고 나서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지방 분권화가 제대로 되면 검찰뿐 아니라 경찰 역시 분권화해야 한다는 게 문 대통령 생각이다. 그는 “언젠가는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훨씬 더 지방 분권화가 돼야 하고 동시에 경찰도 분권화돼야 한다”고 말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10일 서울 국회 로텐더홀에서 취임사를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文 후보 시절 “공수처, 한시기구”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검찰 개혁은 뭘까. 바로 수사권과 기소권 분리다. 문 대통령은 후보 시절 “집중된 권한 때문에 ‘무소불위의 검찰’이 됐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정치검찰이 등장했다. 현재 검찰이 갖고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을 분리해서 수사권은 경찰에게, 기소권은 검찰에게 분리 조정하는 것이 가장 빠르게 개혁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못 박았다.
수사권 조정 문제는 뜨거운 감자였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에선 해결하지 못했다. 검·경 간 자율적인 조정으로 맡겨놨기 때문이었다는 분석이다. 문 대통령도 이를 반성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따라서 문 대통령은 집권 초기부터 강하게 수사권 조정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수사권이 경찰에게 간 다음에도 경찰이 검찰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으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거라고 본다. 그게 완전히 제대로 되기 전까지는 고위공직자들이 수사를 받는 기구가 한시적으로 필요하다”고 적시했다. 그 기구가 고위공직자뿐 아니라 대통령과 대통령 측근까지 조사할 수 있는 독립적인 공수처다. 다만 문 대통령은 공수처를 ‘한시적 기구’라고 했다. 언젠가는 사라질 임시 조직이라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두 번의 민정수석을 지냈다. 그 시절 아쉬움으로 남은 게 몇 가지 있었다는 소회를 밝힌 바 있다. 공수처 설치 불발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지 못한 일이 여기에 포함된다. 문 대통령은 《문재인의 운명》에서 “(공수처 설치는) 국민들의 지지 여론이 높고 (2002년 대선 때) 양대 후보(노무현·이회창)가 함께 제시했던 공약인데도 법안을 만드는 과정에서 장애가 생겼다. 공수처의 수사 대상 때문이었다. 대통령 주변 측근과 친인척, 청와대 주변 권력형 비리 위험인물이 기본 대상이다. 그 외 고위공직자들도 모두 망라된다. 국회의원도 당연히 포함됐다. 국회에서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면서 “형평성 문제가 있지만 국회의원을 빼고서라도 추진했어야 할 법안이다. 법안 통과를 목표로 했다면 국회의원을 수사 대상에서 빼는 것을 고려했어야 했다”고 못내 아쉬워했다.
그렇다면 현 정부에선 공수처를 만들 수 있을까. 국회의원을 수사 대상에 포함시킬 경우 국회를 통과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정계 원로인 박찬종 변호사는 5월3일 본지와 만나 “공수처는 신설되기 힘들다. 당장 국회에서 법률이 통과되지 못할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돼도 국회 과반 의석을 확보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여기에 공수처 수사 대상에 국회의원이 포함돼 있을 것이다. 그 법률이 국회에서 통과되겠나”라고 비관적으로 내다봤다. 실제로 대선 과정에서 공수처 설치에 대해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여기에 바른정당 의원들 가운데 반대하는 이가 적지 않다. 따라서 공수처가 설치된다 해도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전망이다.
사정 당국의 큰 축을 담당해 온 국가정보원을 향한 개혁 의지도 강하다. 국정원 개혁안의 밑그림은 국내 정보 기능을 없애는 것이다. 그 대신 대(對)북한, 해외 정보와 국가 안보, 테러, 산업비밀 외국 유출 감시 등의 기능을 강화하겠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지난 4월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국정원 개혁에 대해 “국정원은 ‘해외안보정보원’으로 개편하겠다. 정치 사찰에 악용됐던 국내 정보수집 업무를 전면 폐지하고 대북한 및 해외, 안보와 테러, 국제범죄를 전담하는 최고의 전문기관, 이른바 한국형 CIA(미 중앙정보국)로 거듭나게 하겠다”고 말했다. 또한 “인권유린의 빌미가 됐던 국정원의 수사 기능을 폐지하고 국가경찰 산하에 안보수사국을 신설해 대공수사를 담당하게 하겠다”는 로드맵을 제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5월11일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함께 청와대 본관을 나와 차담회를 하기 위해 이동하며 조국 민정수석(왼쪽)과 얘기하고 있다. © 연합뉴스
한국형 CIA·FBI 나오나
참여정부가 가장 역점을 뒀던 국정원 개혁은 탈(脫)정치와 탈권력화였다. 문 대통령은 “참여정부 시절 국정원 정보활동 탈정치를 위해 국정원 직원의 관공서와 언론기관 상시출입도 아예 금지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때부터 다시 국정원 직원의 관공서와 언론기관 관리가 부활했다. 기관을 직접 출입하진 않았으나 외부에서 내부 직원들과 접촉하며 동향을 파악했다. 국회도 수시로 드나들며 국회의원 보좌진과 당직자 등을 접촉하며 정치 동향과 소문 등을 수집했다.
경찰 개혁도 예외는 아니다. 지방경찰청 분권화도 핵심 과제다. 《대한민국이 묻는다》에 따르면, 경찰 분권화는 2단계를 거친다. 1단계로 범죄수사와 민생을 구분해서 국가경찰과 자치경찰로 나누는 방법이다. 2단계는 수사권까지 다 갖는 지방경찰로 완전히 분권화한다. 다만 미국 FBI(연방수사국)처럼 연방경찰제를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문 대통령은 밝힌 바 있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지방 분권화가 제대로 돼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따라서 이는 장기적인 과제다.
이런 이유로 문 대통령은 지방 분권 강화를 강조한다. 그는 “우리 사회가 해야 하는 권력구조 개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방 분권을 강화하는 것이다”고 역설한다. 중앙정부에 집중된 많은 권한과 재정을 지방으로 분산시키자는 주장이다. 그 분권이 이뤄지고 나면 그 토대 위에서 검찰과 경찰 분권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지방 분권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숙원이기도 했다. 세종시 신설과 대연정을 통한 지역구도 타파를 시도했던 게 그 예다. 그 바통을 문 대통령이 이어받는 셈이다.
개혁의 범주에서 국세청도 예외는 아니다. 문 대통령은 국세청에도 메스를 들이댈 공산이 크다. 참여정부 시절 국세청을 ‘보복성 세무조사’ ‘표적성 세무조사’나 하는 정권 운용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고 문 대통령은 회고했다. 국세청을 조세정의를 세우는 본연의 위치로 돌렸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가 다시 과거 행태로 국세청을 ‘정권유지 수단’으로 돌린 것이 유감스럽다”고 술회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영향을 끼친 국세청의 태광실업(회장 박연차) 세무조사를 대표적인 ‘표적 조사’로 강하게 의심했다.
정권이 교체되자마자 모든 분야에 개혁 드라이브가 강하게 걸렸다. 그런데 총대를 메고 나서야 할 사정 당국은 되레 잔뜩 긴장하며 웅크리고 있다. 개혁의 칼날을 가장 먼저 맞닥뜨려야 하는 형국이 됐다. 사정기관 개혁 과정에서 내부 반발도 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권 교체 때마다 반복된 ‘새 정권과 사정 당국의 일합(一合)’. ‘와신상담’한 문재인 대통령은 개혁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참여정부를 반면교사 삼아 임기 내에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전적으로 문 대통령 의지와 추진력에 달렸다.
검찰 개혁 ‘폭풍 전야’
공수처 신설, 검·경 수사권 조정, 검찰 인사권 독립 조국 “내년 6월 지방선거 전까지 검찰 개혁 마무리”
조해수 기자 ㅣ chs900@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6(화) 08:08:27 | 1439호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 그 어떤 기관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견제 장치를 만들겠다.”
검찰 개혁에 본격적인 시동이 걸렸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5월10일 취임사에서 검찰을 비롯한 권력기관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고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다는 뜻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비(非)검찰 출신의 조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청와대 민정수석 발탁은 검찰 개혁의 신호탄이 됐다. 조 수석은 “선거가 시작되면 개혁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질 것이기 때문에 내년 6월 지방선거 전에 다 해야 한다”며 검찰 개혁의 시한까지 제시했다. 조 수석이 임명된 당일, 김수남 검찰총장은 사의를 표명했다. 법무부 장관 시절 통합진보당 해산을 주도했던 검찰 출신 황교안 국무총리의 사표도 수리됐다. 법무부 장관은 지난해 11월부터 이미 공석인 상태다. 검찰은 ‘개혁 태풍’을 맨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됐다.

조국 신임 민정수석 © 연합뉴스
정치검찰 막기 위한 공수처 신설
“한국 검찰은 아시다시피 기소권과 수사권을 독점하고 그 외에도 영장청구권을 독점하고 있다. 검찰이 막강한 권력을 제대로 엄정하게 사용했는지 국민적 의문이 있다.”
조 수석은 검찰 개혁의 기본 방향이 권력의 분산과 견제에 맞춰질 것임을 시사했다. 조 수석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서도 검찰이 막강한 권력을 사용했더라면 게이트 초반에 미연에 예방됐을 것”이라며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정치검찰’의 행태를 강력히 비판했다.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 신설은 이러한 생각에서 비롯됐다.
공수처는 고위 공직자에 대한 비리를 감시하기 위해 독립적인 수사와 기소 권한을 가지는 조직을 말한다. 검찰의 권력에 대한 해바라기 행태를 막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박범계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공수처 설치 법안에 따르면, 공수처는 수사권·기소권·공소유지권을 모두 가지며, 설립 취지에 맞게 독립기관으로 운영된다. 공수처장은 대통령이 임명하지만 인사추천위원회의 추천을 거쳐야 하고 국회 인사청문회도 통과해야 한다. 조 수석은 공수처장을 여야 합의로 국회에서 임명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수사 대상은 고위공직자와 그 가족이다. 국회의원은 물론 검사·판사 등이 모두 포함된다. 국민의당은 공수처 태스크포스(TF)팀을 통해 대통령비서실·대통령경호실·국가안보실 3급 이상 공무원과 배우자 및 4촌 이내 친족까지 수사할 것을 주장했다.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권성동 위원장이 2월17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 등 검찰 개혁 방안에 대한 공청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연합뉴스
“개헌 과정에서 영장청구권 경찰에 부여”
문 대통령에게 공수처 신설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부터 이어져온 숙원(宿願) 사업이다. 공수처는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6년 처음 논의됐고,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지만 검찰의 반발로 무산됐다. 바통을 이어받은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4년 말 정부 입법으로 공수처법을 발의했지만, 당시 한나라당(현 자유한국당)이 위헌 소지가 있다며 검찰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서면서 결국 백지화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을 맡았던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민정수석을 두 번 하면서 끝내 못한 일, 그래서 아쉬움으로 남는 게 몇 가지 있다”며 “그중 하나가 공수처 설치 불발이다”고 밝힌 바 있다.
공수처는 국회 소관 상임위인 법제사법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서 180명 이상의 의원이 동의해야 통과된다. 국회의 반발로 번번이 무산됐지만 이번에는 실현 가능성이 크다는 관측이 나온다. 지난 대선 과정에서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제외한 4당 후보들이 모두 공수처에 대해서 찬성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수처가 검찰 개혁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의 한 여당 의원은 “검찰 개혁의 핵심은 검찰의 권한을 축소하는 것이다. 공수처 신설로 검찰에 집중돼 있는 기소권과 수사권이 분산될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다”며 “공수처가 ‘옥상옥(屋上屋)이 될 수 있다’는 검찰의 주장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공수처가 검찰 출신 위주로 구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렇게 됐을 때 자기 친정인 검찰에 대해서 단호하게 수사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한 후 “결국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기소권, 영장청구권, 수사지휘권 등에 대한 명확한 재조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검·경 수사권 조정 문제는 검찰 개혁의 핵심으로 지목돼 온 사안이다. 권력의 견제와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검찰의 권한을 줄이고 경찰의 권한을 좀 더 넓게 보장해 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문 대통령은 “일반적 수사권은 경찰에 넘기고 검찰은 기소권과 기소·공소 유지를 위한 보충적 수사권만 보유하도록 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경찰이 수사권을 가지게 될 경우 가장 핵심이 되는 사안은 영장청구권이다. 수사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서는 구속영장, 압수수색영장 등을 청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현행 헌법에는 영장청구권의 주체로 ‘검사’만 명시돼 있다. 즉, 의미 있는 수사권 조정을 위해서는 개헌이 필요한 것이다. 여당 핵심 관계자는 “검·경 수사권 조정은 결국 영장청구권을 경찰이 가질 수 있느냐는 문제로 귀결된다. 경찰이 영장청구권을 가지게 되면 검찰의 기소 독점권이나 수사지휘권 등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내각 조각이 끝나면 개헌 정국으로 빠르게 이동할 것이다”고 내다봤다. 이어 그는 “개헌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수사권 조정이 이뤄지는 것이 좋다”며 “조 수석이 내년 6월 지방선거 전까지 검찰 개혁을 마무리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인사권 독립을 검찰 개혁의 핵심과제로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외부인이 참여하는 검찰총장후보추천위원회와 검찰인사위원회를 구성해 정치권력의 입김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와 관련해 조 수석은 “민정수석은 검찰의 수사를 지휘해서는 안 된다”며 “인사권은 대통령과 법무부 장관에게 있고 민정수석은 검증만 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2003년 2월 청와대 민정수석 시절 첫 수석회의에 앞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있다. © 연합뉴스
“정치권력, 검찰 활용하려는 욕망 절제해야”
검찰 개혁은 역대 정권 출범 초기마다 거론돼 온 ‘단골손님’이다. 그러나 새 정부가 들어선 후에는 누구도 검찰 개혁의 칼을 과감하게 꺼내지 못했다. 권력을 잡게 되면 누구나 ‘잘 드는 칼’에 대한 욕망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와 관련해 문 대통령은 자서전 《운명》에서 “검찰 개혁은 제도의 문제라기보다 정치권력이 검찰을 정권의 목적에 활용하려는 욕망을 스스로 절제하고, 검찰 스스로 정권의 눈치 보기에서 벗어나려는 ‘문화의 문제’로 봤다”고 설명했다.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에 칼을 대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욕망을 절제하는 집권자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검찰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컸던 노무현 전 대통령도 결국 검찰 개혁에는 실패했다. 문 대통령이 여전히 난제로 남은 검찰 개혁을 완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문재인 시대
문재인의 시대는 광화문에서 비롯되어(탄핵 촛불집회) 광화문에서 꽃필 예정이다(광화문 집무실). 개혁과 통합이라는 두 가지 숙제를 그가 어떻게 풀어낼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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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공동취재단 5월10일 오전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선서식을 마친 뒤 국회를 나서며 승용차 위로 몸을 내밀어 손을 흔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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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대선을 하루 앞둔 5월8일 서울 광화문에서 마지막 유세에 나선 문재인 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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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신선영 2014년 8월 문재인 대통령(당시 의원)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함께 단식 농성을 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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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5월8일 문재인 후보의 마지막 선거 유세장에 모인 자들은 스마트폰 플래시를 켜고 “문재인”을 연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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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지난 3월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제19차 촛불집회에 문재인 대통령(앞가운데)이 참석해 촛불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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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캠프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참여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다. 사진은 2007년 11월13일 두 사람의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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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임기 이틀째인 5월11일참모들과 함께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는 문재인 대통령. |
5월9일 밤 11시57분. 뒤늦게 도착한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다가가 포옹했다. 포옹을 나눈 뒤 두 손을 맞잡았다. 그때였다. 안 지사가 문 대통령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더니 볼에 ‘뽀뽀’를 했다. 문 대통령이 환하게 웃었다. 그날 밤 당선이 확실시된 시점이었다. 문 대통령이 서울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서 열린 당선 축하행사 무대를 찾았을 때 벌어진 일이다. <월스트리트저널> 1면과 로이터 통신 등 해외 언론이 이 장면을 전했다. 더불어민주당 경선 당시 경쟁 상대였던 안 지사는 이 자리에서 “5년 동안 꾸준히 지지해달라. 문재인 정부는 우리 모두의 정부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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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문재인 후보가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 무대에 등장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축하의 의미로 볼에 뽀뽀를 했다. |
촛불이 만든 조기 대선이었고, 촛불 민심이 탄생시킨 대통령이었다.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자 촛불이 타올랐다. 정치권이 머뭇거릴 때 촛불이 대통령 탄핵을 견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5·9 대선이 끝났다. <한겨레>가 ‘K스포츠재단 이사장이 최순실 단골 마사지센터장’이라는 보도를 1면에 낸 2016년 9월20일부터 5·9 대선까지 232일은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해 9월9일로 돌아가보자. 박근혜 정부가 실정을 거듭했지만 새누리당에 대한 지지는 여전했다. 당시 한국갤럽의 정기조사를 보면 각 당의 지지율은 새누리당 34%, 더불어민주당 24%, 국민의당 11%였다. 이날 발표된 대선 주자 지지율은 반기문 27%, 문재인 18%, 안철수 8%였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선 주자 1위였다. 이때만 해도 야권이 대선에서 이기려면 후보 단일화밖에 방법이 없어 보였다.
박근혜 게이트가 불거지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한겨레>가 최순실씨의 존재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언론의 특종 보도가 잇따랐다. 10월24일 JTBC의 ‘태블릿 PC’ 보도는 결정타였다. 태블릿 PC 속 자료는 아무 권한이 없는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고 국정에 개입한 ‘증거’였다.
10월24일은 운명의 날이었다. 이날 오전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임기 내 개헌 추진’ 카드를 꺼내들었다. 취임 이후 ‘개헌 블랙홀’론을 내세우면서 개헌에 부정적이었는데 태도를 확 바꾼 것이다. 표현 그대로 ‘개헌 블랙홀’로 우병우·최순실 의혹을 덮고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였다. 정략적 제안이었지만 정치권이 술렁였다. 하지만 이날 저녁 ‘태블릿 PC’ 보도로 위기 모면용 ‘깜짝 개헌 카드’는 물거품이 되었다.
다음 날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 담화에서 ‘연설, 홍보물 등에서 최씨의 도움을 받은 적은 있지만 좀 더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는 식으로 잡아뗐다. 11월2일에는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총리로 지명하며 또 한번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 직전에 촛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10월29일 1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이때만 해도 주최 측 추산 3만명에 머물렀다. 그런데 2주 뒤인 11월12일 전국 촛불집회에 100만명이 모였다. 박근혜·새누리당 지지도는 급락했다. 11월4일 한국갤럽 발표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 국정 지지도는 5%였다. 탄핵되는 날까지 국정 지지도는 4~5%를 헤어나지 못했다. 새누리당도 마찬가지였다. 더불어민주당 지지도가 31%, 새누리당 18%, 국민의당 13%로 급변했다. 11월4일 박 대통령은 2차 대국민 담화에서 “이러려고 대통령을 했나 자괴감이 들 정도로 괴롭다”라며 검찰 조사, 특검 수사 수용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말뿐이었고 이후에도 수사에 응하지 않았다. 이런 태도에 국민의 분노가 폭발했다. 4개월 동안 연인원 1700만명이 촛불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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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이명익 최성 고양시장, 이재명 성남시장, 김부겸 의원, 문재인 대통령, 안희정 충남도지사, 박원순 서울시장, 추미애 대표가 양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왼쪽부터). |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12월9일까지 정치 지형이 요동쳤다. 11월22일 남경필·김용태 탈당을 신호탄으로 보수 정당이 사실상 첫 분당을 겪게 되었다. 광장의 분노와 달리 정치권은 더딘 모습을 보였다. 촛불이 국회를 압박했다. 12월9일 ‘찬성 234, 반대 56, 기권 2, 무효 7, 불참 1’로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다.
2017년 1월 초까지만 해도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는 20%대로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권 예비 주자’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하락세를 보여 20% 지지도를 보였다. 두 사람의 지지도가 엇비슷한 즈음에 촛불집회 현장에서 ‘사이다’ 발언으로 이재명 성남시장 지지도가 급등하며 추격해왔다. 12월9일 기준으로 문재인 20%, 반기문 20%, 이재명 18% 선이었다. 촛불 시위 초기에는 이재명 성남시장이 최대 수혜자로 꼽혔다. 그러다가 1월 중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1월13일 조사에서 문재인 31%, 반기문 20%, 이재명 12%였다. 문재인 후보의 지지도가 상승하고 이재명 시장의 지지도가 하락했다. 민주당 지지층 선호도가 바뀌며 ‘문재인 대세론’이 본격화되었다. 이후 대선까지 문재인 1위는 변하지 않았다.
촛불 이후 문재인 후보에게 도전장을 내민 유력 경쟁자는 몇 차례 바뀌었다. 문 후보의 지지율은 안정적이었고 다른 후보들은 정치 상황에 따라 부침을 겪었다. 박근혜 게이트 이전에 가장 유력한 ‘여권 주자’였던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의 ‘반풍’은 해프닝에 그쳤다. 반 전 총장은 1월12일 귀국해 ‘1일 1구설’로 자충수를 두었다. ‘반반 행보’ ‘오락가락 행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했고, 지지율은 좀체 상승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결국 21일 만인 2월1일 그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당정치에 대한 이해가 없고 대선 준비가 부족했던 한 명망가 후보는 그렇게 무대에서 내려갔다. 반 전 총장을 중심축에 두고서 정치권에 나돌던 ‘제3지대 반문 연대론’도 이때부터 시들해졌다. 반기문 전 총장이 떠난 자리에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잠시 반짝했으나 이는 애초 실현 가능성이 희미한 선택지였다. ‘출마하니 안 하니’ 점치는 언론 보도가 잠시 황 대행의 지지도를 자극했을 따름이다.
‘반풍’이 사라지자 이번에는 중보·보수의 표심이 안희정 충남도지사로 향했다. 2월17일 안희정 지사의 지지도는 22%로 최고치에 이르렀다(문재인 후보는 33%). 중도 확장성을 무기로 상승세를 보였지만 뒷심이 달렸다. ‘대연정’ ‘선의’ 논란을 겪으며 ‘문재인 대세론’을 넘어서지 못했다. 3월10일 헌법재판소의 ‘대통령 탄핵 인용’ 결정 이후 본격화한 민주당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가 안희정·이재명 후보를 압도적으로 제쳤다(4월3일 누적 득표율:문재인 57%, 안희정 21.5%, 이재명 21.2%, 최성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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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개 정당의 후보가 결정된 4월 초 이후 선거판은 다시 격변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3월 하순까지 7~10%대에 머물렀던 안철수 후보의 지지율이 치솟으면서부터다. 반기문 불출마 선언 이후에 머물 곳을 찾아 떠돌던 보수 표심이 4월3일 안희정 지사가 민주당 경선에서 탈락하자 이번에는 안 후보에게로 향한 것이다. 4월7일 문재인 38%, 안철수 35%였고, 4월14일 조사에서는 문재인 40%, 안철수 37%를 찍었다. 5자 구도에서의 ‘양강’이었다. 갑작스러운 안철수 후보의 부상에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적폐 청산’ 기조에 변화를 두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논쟁이 일었다. 복기해보면 이때가 문 후보에게 대선 앞 마지막 고비였다.
하지만 이런 양강 구도는 두 주 만에 끝났다. 4월17일 공식 선거운동에 돌입한 이후 안철수 후보의 중도·보수층 지지율이 눈에 띄게 하락했다. 안 후보의 실수가 겹쳤다. 예를 들어 안철수 후보의 ‘단설 유치원 발언’이 크게 논란이 되었다. 대선 후보 텔레비전 토론은 안철수 후보의 지지도를 까먹는 데 결정적 작용을 했다. ‘내가 갑철수냐’ ‘내가 MB 아바타냐’ 하는 안 후보의 토론 발언은 역풍을 일으켰다. 이는 수치로도 드러난다. 4월28일 한국갤럽이 텔레비전 토론에 대한 유권자 반응을 발표했는데, ‘토론을 잘했다’ ‘토론 전보다 좋아졌다’는 질문에서 안 후보가 가장 낮은 점수를 얻었다. ‘토론 전보다 나빠졌다’는 질문에서 안 후보를 꼽는 이가 가장 많았다.
안철수 후보는 30% 후반까지 지지율을 끌어올렸지만 그게 끝이었다. 호남 유권자와 영남·보수 성향 유권자를 동시에 잡아야 하는 딜레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막판에 안 후보에 대한 보수층의 지지가 빠져나갔다. 이탈한 보수층의 표심이 이번에는 홍준표 후보에게 옮아붙었지만 ‘찻잔 속의 태풍’이었다. 1월 촛불 때부터 꾸준히 세를 불려 대선 전에 38~41% 지지도를 유지했던 문재인 후보가 5월9일 대선에서 41.1%로 무난하게 당선했다(홍준표 24.0%, 안철수 21.4%, 유승민 6.8%, 심상정 6.2%). 그는 ‘촛불 대통령’이었다.
‘당선 확실시’ 때 세월호 유가족부터 만나
5월9일 밤 11시45분. 문재인 대통령은 경찰 오토바이의 경호를 받으며 은회색 차를 타고 서울 광화문광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그는 15분 먼저 도착해 노란 옷을 입고 두 줄로 서서 자신을 기다리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을 만났다. 전명선 4·16 세월호참사 가족협의회 운영위원장을 비롯한 유가족 한 사람 한 사람과 악수했다.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당선이 확실시된 이후 첫 공식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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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TV 화면 갈무리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광화문광장에 온 문재인 대통령이 세월호 유가족과 만났다. |
무대에 올라 두 손을 높이 들어올린 문 대통령의 가슴에는 노란 리본이 두 개 달려 있었다. 왼쪽에는 늘 달고 다니던 노란 리본 배지가, 오른쪽에는 이날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 털실로 직접 만들어 달아준 큰 노란 리본이 달렸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직접 만든 노란 나비 모양의 고리와 ‘문재인 대통령님! 당선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쓴 종이도 함께 건넸다. 문 대통령은 건네받은 노란 나비를 손에 꼭 쥐었다. 2014년 8월 광화문광장에서 ‘유민 아빠’ 김영오씨와 함께 열흘간 동조 단식을 했던 한 정치인은 2017년 5월9일 밤에 대통령에 당선돼 다시 그곳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났다. 전임 대통령한테 끝까지 외면당했던 유가족들은 새 대통령이 떠난 뒤에도 광화문광장에 남아 개표방송을 지켜봤다. ‘당선 확정’을 확인한 뒤인 새벽 2시45분께 세월호 유가족들은 안산으로 출발했다.
묻지마 핵무기 개발사
알려져 있다시피 미국은 1945년 7월 뉴멕시코 사막에서 영국과 공동으로 맨해튼 프로젝트를 진행해 세계 최초로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핵 개발은 철저히 국익만을 위한 벌거벗은 레이스였다. 옛 소련은 맨해튼 계획에 첩자를 심어 정보를 수집한 뒤 미국보다 4년 늦은 1949년 실험에 성공했다. 적어도 10~20년은 핵 기술을 독점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미국은 충격을 받고 수소폭탄 개발에 박차를 가해 7년 만인 1952년 실험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술 격차는 더욱 좁혀져 소련은 그로부터 1년 뒤인 1953년 수폭 실험 성공 사실을 세계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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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원 그림 |
중국은 소련으로부터 핵 기술을 넘겨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으나 국익은 이념보다 진하다는 걸 실감해야 했다. 중국이 초강대국으로 커나갈까 두려워한 소련이 1959년 핵 협정을 파기했다. 중국은 ‘바지는 못 입더라도 핵폭탄은 만들라’는 마오쩌둥 국가주석의 명령에 따라 미국과 소련에 첩자를 보내 닥치는 대로 핵 기술을 빼내기 시작한다. 미국과 소련은 손을 맞잡고 중국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중국은 1964년 원폭 실험에 성공한 뒤 앞서가던 프랑스를 추월해 1967년 수폭 실험까지 마쳤다. 앵글로색슨, 백인, 기독교 국가의 핵 독점 공식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 정치인 가운데는 공포에 떨기는커녕 황색인종도 핵을 가지게 됐다며 환호작약하는 이들이 많았다. 북한이 핵실험에 성공할 때마다 중동의 여러 도시에서 환영 모임이 벌어지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핵은 요상한 물건이다.
1965년부터 국제사회는 핵 확산 금지를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1968년 세계 각국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서명했다. 하지만 기왕에 핵을 가진 5개국 이상으로 핵이 확산되어서는 안 된다는 국제사회의 다짐은 금세 빛이 바랬다. 1974년 인도가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한 것이다.
인도와 세 차례나 전쟁을 벌인 적이 있던 파키스탄은 사활을 걸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이 1979년 전투기 수출을 중단한 데 이어 통상 자체를 금지하겠다는 압력까지 넣었지만 파키스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서방 국가들의 온갖 협박과 방해를 뿌리치고 파키스탄은 1998년 원폭 실험에 성공했다. 핵 기술은 결국 이슬람 세계로까지 넘어갔다. 파키스탄은 작고 휴대하기 간편한 전술핵무기를 대량 보유 중인데, 이 나라에서 극단주의자들의 세력이 날로 커가고 있어 국제사회의 근심은 깊어간다. 기술의 연원을 추적해보면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인도에 핵 기술을 흘렸고, 중국이 이에 발끈해 파키스탄에 핵 기술을 전수해줬을 가능성이 높다. 파키스탄의 기술이 북한으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므로 미국과 중국이 북한의 핵실험에 흥분하는 데는 다분히 희극적인 요소가 있다.
북한 핵기술은 6개월마다 ‘신상’을 내놓는다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이스라엘과 북한, 그리고 아파르트헤이트 시대의 남아프리카공화국, 이란, 리비아 등이 은밀히 핵 개발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스라엘과 북한은 이미 핵무기 보유국 반열에 올랐고, 이란은 미국과 협상에 따라 잠정 중단,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리비아는 핵 개발 계획을 사실상 폐기한 상태이다. 트럼프의 등장으로 이란의 핵에서 다시 연기가 나기 시작해 핵은 국제사회에서 여전히 뜨거운 현안이다.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옛 소련의 몰락이었다. 핵무기를 중앙아시아 위성국가 여러 곳에 흩어놓았던 소련은 해체하면서 많은 무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국제사회에는 핵무기 암시장이 열렸다. 북한은 이 암시장에서 일부 핵탄두와 잠수함 발사 기술(SLBM)을 구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라진 핵탄두 가운데는 일본의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만큼 파괴력이 강한 것들도 있다.
핵탄두뿐만 아니라 원전이나 연구소, 병원 등에서 사용하던 핵물질도 함께 사라졌다. 이런 고위험 방사성 물질과 재래식 폭탄을 결합하면 이른바 ‘더러운 폭탄’을 만들 수 있다. 여행 가방만 한 크기의 이런 폭탄은 대도시의 여러 블록을 순식간에 오염시킬 수 있다. 사상자를 도우려고 뛰어드는 시민이나 의료진까지 위협하므로 말 그대로 더러운 폭탄이다. 이런 공격을 받은 도시는 여러 달 동안 공항·지하철·병원 같은 공공시설까지 폐쇄해야 한다. 테러리스트에게는 매력적인 수단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 더러운 폭탄이 지상에서 터진 일은 없지만 ‘지금까지는 운이 좋았을 뿐 시간문제’라고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유럽에서 체포된 IS 전사들이 핵물질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뛰었다는 증거가 여러 차례 수집되었다. IS는 2015년 5월 ‘핵물질을 구입하기에 충분한 자금을 확보했고 곧 영웅적인 결과를 끌어내겠다’고 예고한 바 있다.
미국 대통령 가운데는 힘의 외교를 내세운 사람도 많지만 핵 확산 방지와 핵 추방을 위해 애쓴 이도 있다. 오늘날 세계를 위태롭게 만든 데에 미국 책임이 크다고 인정한 미국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버락 오바마다. 그는 지난해 5월 지구상에서 핵무기 공격을 받은 두 곳 중 한 곳인 일본 히로시마를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처음 방문했다. 오바마는 재임 중 내내 핵무기 확산 방지를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2010년 러시아와 전술무기통제조약(New START)을 맺었다. 일련의 핵 안보 정상회담을 열어 핵물질이 ‘나쁜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오바마 행정부는 러시아에서 코카서스 산맥(캅카스 산맥)을 넘어 이란에 이르는 밀리터리 루트를 통해 핵물질이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자금과 장비를 제공해왔다.
하지만 그 같은 오바마도 한 군데서만은 참담한 실패를 맛봤다. 오바마의 감시와 경고 아래서도 북한은 핵 능력을 쉼 없이 키워왔다. 북한의 미사일은 한국이나 일본은 물론 미국 본토까지 위협하는 중이다. 북한의 핵 기술이 6개월마다 ‘신상’을 내놓을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어서 미국 군사 전문가들은 트럼프 다음대의 미국 대통령은 정말로 미국 본토 방어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북한 핵문제가 이렇게 커진 것은 오바마 대통령조차 이 문제가 워낙 다루기 까다로워 ‘구석에 처박아놓기(back burner)’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오바마가 북한보다 이란 쪽에 주력했다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란은 오일과 가스를 수출해 먹고산다. 수출 금지와 국제 결제 시스템에서의 제외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이란은 최소한 북한보다는 국민의 눈치를 더 보는 편이다. 국제 제재가 강화돼 경기가 나빠지고 국내에서 불평의 소리가 나오는 걸 바라지 않는다. 핵 개발 동결 협상을 벌여 성과를 올리기에는 북한보다 이란이 훨씬 좋은 상대다. 북한은 이란에게는 먹히는 위협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나라다.
이런 가운데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불행한 일이다. 그는 북한 핵이 문제라면 한국이나 일본도 핵을 개발하면 되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그는 이란과의 핵 협상 역시 폐기할 수 있다는 뜻을 비쳤다. 중앙아시아의 핵물질 거래를 규제하기 위해 편성된 예산마저 삭감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미국의 영향력은 유지하면서도 그에 따른 대가는 지불하지 않으려고 한다. 예사로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를 마구 뒤섞는 잘못을 범한다. 그의 장단에 맞추자면 한국 정부는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과 사드 배치 비용, 그리고 한·미 FTA에 소파(SOFA) 협정까지 모두 한꺼번에 탁상 위에 올려놓고 일괄 협상을 해야 할 지경이다.
워낙 말이 왔다 갔다 해서 개별 사안에 대한 트럼프의 진의는 알 도리가 없다. 분명한 것은 체감하는 핵 위협이 커졌는데도 우리가 한·미 동맹이나 국제법에 기댈 수 있는 여지가 좁아졌다는 점이다. 지금 상황만 보면 한국은 이 눈치 저 눈치 볼 것 없이 핵 개발에 착수해야 정상이다. 프랑스처럼 과연 미국의 핵우산이 안전한지 의심해야 마땅하다. 미국이란 억지력이 약해져 북한 핵 위협에 고스란히 노출된 일본이나 타이완,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와 연대할 필요성도 커졌다. 모르긴 해도 일본의 아베 정권 내부에서는 미소 짓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트럼프가 북한 핵까지 비즈니스의 대상으로 삼는다면 한국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여지가 커지는 이점은 있다. 빈사 상태인 한국 정부의 외교력을 살려낼 기회이다. 한국의 차기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북한 지도자 김정은과의 직접 접촉 창구를 열어야만 한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북한을 적대해 우리는 북한의 김정은 정권에 대해 무지하기 짝이 없다.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주변국이 모두 핵 경쟁에 나서더라도 핵 보유국 지위를 우선 굳건히 하는 게 김정은의 확고한 뜻인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한다면 그다음이어야 한다. 기막히게도 우리는 김정은에 대해 일본의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나 미국의 전직 프로농구 선수 데니스 로드먼이 전해준 이상을 알지 못한다.
참고한 활자:<X이벤트>(반비), <이코노미스트> <타임> <군사연구(軍事硏究)> <워싱턴포스트>
[한강로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성공하려면
박영철 편집국장 ㅣ everwin@sisajournal.com | 승인 2017.05.16(화) 11:00:00 | 1439호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첫날인 5월10일부터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후보 시절에 생각을 많이 하고 집권 준비를 착실하게 해 온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인수위원회도 없이 바로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는 만큼 큰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란 국내외의 우려가 많았는데, 생각보다 첫 단추를 잘 꿰고 있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문 대통령은 행운아라는 생각이 듭니다. 본인의 자질과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에 당선된 것에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후광(後光)이 컸다는 것은 자타공인하는 바입니다. 직전 전임자 덕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워낙 권위적이고 불통(不通)이고 게을렀던 탓에, 문 대통령은 조금만 잘해도 돋보이게 돼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절대로 실패하면 안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가 대통령이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대통령제 국갑니다. 이런 나라에서 대통령의 실패는 개인의 실패로 그치는 게 아니라 국가 내지 국민의 실패로 이어집니다. 박근혜에 이어 문재인마저 실패한다면, 아직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한 한국은 다시 후진국으로 돌아갈지도 모릅니다. 문재인 후보를 반대했던 사람도 지금은 문재인 정부의 성공을 위해 성원해 주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 시사저널 포토
그러면 문 대통령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마다 의견이 제각각일 겁니다. 시사저널은 이번 호에 이 문제를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제목을 달아 특집으로 다뤘습니다. 부디 문 대통령이 이들 과제를 잘 다뤄 성공한 대통령으로 남기를 기원합니다.
이와는 별도로 ‘문재인=성공한 대통령’에 대한 사견(私見)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먼저 문 대통령의 반면교사인 박근혜 전 대통령의 실패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박 전 대통령이 실패한 까닭은 많지만 가장 큰 것을 꼽으라면 과거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박 전 대통령은 20대에 부모를 연달아 여의었는데 그것도 두 분 다 총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
특히 부친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이후 부친의 부하들이 보여준 안면몰수 행태에 당시 박근혜 큰영애가 받은 충격은 몹시 컸던 듯합니다. 배신의 트라우마 때문에 인간에 대한 불신이 강해졌다고 하는군요. 문제는 자연인이면 모르겠는데 일국의 대통령이 된 사람이 인간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면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대다수 인간을 못 믿으니 극소수 측근만 믿고 나라를 운영했고, 그 결과 이른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던 것입니다.
문 대통령도 정신적 지주이던 고 노무현 대통령을 잃었습니다. 노 대통령은 자살이라는 불행한 형태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문 대통령을 비롯한 노 대통령의 추종자들은 노 대통령의 죽음을 보수 세력의 정치적 박해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노빠’들 중에는 복수를 다짐하는 이도 드물지 않았던 듯합니다.
여기서 문 대통령께 고언(苦言)을 하나 드리고자 합니다. 노 대통령을 빨리 잊으십시오. 은인인 노 대통령을 존경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태도지만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좀 다를 수 있습니다. 한국에는 노 대통령을 싫어하고 못마땅해하는 국민도 많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노무현의 실패로부터 배우십시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까지 당하다 보니 다들 잊어버린 것 같지만, 노 대통령도 임기 말의 지지도를 보면 성공한 대통령이라고는 하기 어렵습니다.
문 대통령이 정말로 노 대통령을 위하는 길은 국민통합을 잘해서 노 대통령보다 더 큰 업적을 이루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