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길동교사당'을 아시나요? - 대선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홍길동교사당'을 아시나요?
5월 9일 치러지는 촛불대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선거당일에는 어떤 사람도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후보 본인조차 그랬다. 그러나 올해부터 선거당일에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2월 7일 공직선거법이 개정되어 선거당일에도 문자메시지나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이 가능해졌다. 예전에는 특정후보를 연상시키는 어떤 투표 인증샷도 선거법에 걸려 처벌받는 행위였다. 오로지 투표 인증샷은 투표독려를 위한 것으로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올해부터는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 관련 인증샷이나 이메일 발송 등이 가능해졌다. 이미 이틀 간 치러진 사전투표에서 지지후보의 번호를 상징하는 투표 인증샷이나 지지후보 벽보 앞에서 찍은 투표 인증샷들이 넘쳐나고 있다.
투표당일 선거운동 제약을 푼 공직선거법 개정은 환영할 일이다. 유권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표현할 자유가 확보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동안 투표 전날 밤 12시까지 허용되었던 선거운동을 당일에는 금지했던 명분은 너무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23일간의 각종 선거운동 과정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결정을 내렸던 유권자들이 선거당일 하루의 특정 행위나 사안으로 그것을 뒤집을 확률은 지극히 낮다. 이런 상황을 전제로 투표일 선거운동을 금지시켰던 기존 선거법에는 유권자들의 정치적 판단력을 저평가하는 관점이 깔려있는 것이다. 설사 투표당일 선거운동이 영향을 끼친다 할지라도 유권자는 기표행위 직전까지 충분히 판단할 정보를 제공받고 기회를 가질 권리를 보장받는 것이 맞다.
그런데 선거법 개정으로 확대된 이런 정치적 자유에서 교사와 공무원은 여전히 제외된다. 올해 5.9 대선에서 다른 모든 이들이 누리게 된 선거당일 SNS와 인터넷, 문자 등에서의 정치적 자유는 교사와 공무원의 것이 아니다. 교사와 공무원은 여전히 지지후보를 표시하는 투표 인증샷도, 문자메시지도 날릴 수 없다. SNS에 '좋아요'를 누르기만 해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대상이 된다. 선거당일은 말할 것도 없고 선거운동 기간 내내 마찬가지다. 교사는 우리사회에서 정치적 금치산자다. 입이 있어도 말을 못하고 손이 있어도 쓰지 못한다.
최근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던 홍길동처럼, 그러나 그런 세상을 바꾸고자 나섰던 홍길동처럼 민주시민교육을 해야 할 당사자인데도 시민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교사들의 정치적 자유를 회복하고 학교민주주의를 살리겠다는 취지로 모인 교사들이 있다. 이들이 만든 교사모임이 홍길동교사당이다. 홍길동교사당에서 교사의 정치적 자유에 관한 교사들의 인식조사를 위해 전국을 범위로 교사 설문을 실시했다. 1140명의 초중등 교사가 응답했다. 설문결과는 아래와 같다.

*각 문항별 유의미한 높은 응답률이 나온 응답만 표시.
민주주의 선진국에서는 교사가 학교교육활동 과정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을 금하는 대신에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모든 정치적 활동을 보장받고 있다. 오히려 민주시민교육을 위해 적극적인 정치활동이 권장되고 있기까지 하다.(☞관련 기사 : "교사는 왜 '국민경선'에 참여할 수 없나?")
교사의 정치적 자유 박탈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권의 박탈일 뿐 아니라, 학생들을 올바른 시민으로 성장시켜야 할 교사의 책무이행을 어렵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공직선거법, 국가공무원법, 정치자금법, 정당법 등 온갖 법적 수단들로 교사의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에서 교사들은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게 된다. 수업시간에는 물론 일상생활에서까지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는 것이 습관이 된다. 한 달에 정당후원금 1만 원씩 18만 원 냈다고 재판정에 서고, 처벌받고 해직이나 징계를 당하는 현실에서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런 식으로 교사들의 정치적 입과 손을 꽁꽁 묶어버리는 것은 교육적으로도 올바르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요즘 학생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이는 스마트폰이 필수품이 되고 인터넷이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이 시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어마어마한 정보들 속에서 학생들은 무엇이 올바른 정보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더욱이 일베는 말할 것도 없고 가짜뉴스까지 판을 치고 있는 때니 말해 무엇 하랴.
청소년들이 올바른 관점에서 정보를 찾아내고 판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사고력과 판단력, 세상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곳이 학교여야 하고 교육이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무방비로 정보에 노출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세우고 비판적으로 정보를 읽어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SW교육보다 더 중요한 미래교육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정치기본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자기 검열하는 조건에서는 이런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기 어렵다.
위 설문결과를 보면 96.5%의 교사들이 교사들의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여기며, 93.8%의 교사들이 교사의 정당 후원이나 정당가입을 허용해야 한다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또한 84.9%의 교사들이 최소한 교육감 선거운동 이상의 교사의 선거운동 참여를 요구하고 있으며, 73.5%의 교사들이 선출직에 출마하기 위해서 교직을 그만두지 않아도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응답교사들의 의견은 이미 선진국들에서는 거의 대부분 실현되고 있는 일들이다. 설문결과는 우리의 법·제도가 교사들의 의식을 따라가고 있지 못함을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경우 '근무시간 외'의 단서조항이 필요하다는 것을 응답교사 스스로 동의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일반적으로 우려하는 것처럼 교육활동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도 있는 편향적인 정치교화에 대해 교사들의 경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동안 우리 선거법에는 민의를 왜곡하지 않는 공정한 선거라는 명분으로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는 독소조항들이 많았다. 국민의 정치적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할 때 민의왜곡은 최소화된다. 국민의 정치적 자유는 가장 엄격한 기준에서 최소한으로 제한되는 것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정치공학에 찌든 정치꾼들의 정치가 아니라 본래의 의미에서의 정치야말로 다른 동물과 인간을 구별 짓는 가장 고도의 특질이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선거법은 유권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제한하는 방식으로 공정성을 담보하려는 경향이 강했다. 유권자를 잠재적 선거사범으로 보는 지극히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 관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선거의 공정성은 '유권자의 권리 제한'이 아니라 선거를 관리하는 공적기관인 '정부의 의무 강화'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 맞다.
비근한 예를 몇 개 들어보자. 사후 약방문으로 선관위의 해명이 있었다지만 유권자들이 기표를 하면서 무효표가 될까 걱정할 정도로 불친절한 투표용지 양식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민의 왜곡 가능성을 높이는 것이 아닌가. 권력기관이 선거에 개입하지 못하게 하는 보다 엄격한 제도와 장치를 만들어 국정원 댓글 사건 같은 것이 재발하지 않게 하는 것이 민의왜곡을 방지하고 공정한 선거를 구현하는 일이다. 이번 사전투표의 경우에도 관외투표용지 관리의 허술함이 여러 곳에서 지적되고 있다. 이러니 실은 거꾸로 유권자들이 선거관리 주체인 정부의 민의왜곡을 걱정해야 하는 게 우리 현실이 되어 버렸다.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어디 있으랴.
정부의 선거관리 의무를 강화하고 국민의 정치적 권리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라. 당연히 교사의 정치기본권도 되돌려주어야 한다. 우리 국민들과 교사들의 정치의식 수준이나 민주주의 지수는 현행 선거법과 현실 정치인들 수준을 훨씬 앞지르고 있다. 선거일 선거운동 보장에 교사와 공무원의 자리는 없다. 현실을 따라가기도 하지만 현실을 이끄는 것이 법이기도 하다. 법이 우리 사회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지는 못할망정 이토록 뒤쳐져 있으면 안 된다. 국회와 정치권은 교사들 스스로 실시한 설문결과를 통해 현실이 어디쯤에 와 있는지 점검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마땅히 현실에 맞는 법·제도 개선에 나서야 할 것이다.
대선 이후, 무엇을 할 것인가?
첫째, 이른바 '통합'에 대하여
선거 과정에서 거의 모든 후보가 '통합'을 주장했다. 다들 통합을 위해 가장 좋은 후보라고 자임했으나, 우리는 그 실체를 잘 모른다. 무엇을 통합한다는 것인지, 왜 그래야 하는지,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일반 시민은 이해하기 어렵다.
누가 당선되더라도 여소야대인 의회권력을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모르지 않는다. 법 하나를 고치려 해도 큰 당 하나가 반대하면 잘 안 될 것이라고 한다. 이미 우리 사회가 집단으로 경험한, 그 악명 높은 언론권력의 지형은 또 어떤가?
지금 여러 후보가 말하는 통합이 그런 상황을 이기는 방도인가? 어떻게 하려고? 통합이 서로 다른 현실 정치세력이 권력과 자리, 자원(돈)을 나누는 것이면, 그것은 시민의 삶과 아무 상관이 없는 '그들'만의 게임에 지나지 않는다.
국무총리를 누가 하고 장관 자리를 어떻게 나누는 것이 국민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우리 당의 지지가 약한 지역에 무엇을 지어주고 무엇을 옮기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난 시기 나쁜 짓을 했지만 통합 차원에서 그냥 덮는다? 겨우 이런 뜻이면, 또는 '나눠 먹기'나 '야합' '이합집산'을 뜻한다면, 우리는 그런 통합을 반대한다.
통합은 '국론 통일'이거나 두루뭉술한 중도, 또는 누구도 반대하기 어려운 회색의 모호함이 될 수 없다. 아예 반대나 경쟁이 없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그런 종류의 '같음'이 존재할 수 있는가 묻고 싶다.
우리 모두 민주주의는 본래 시끄럽고 복잡하며 비효율적인 제도라는 것을 안다. '숙의'에 기초하는 한, 다양성과 개별성이 민주주의의 토대다. 속임수와 비합리성, 폭력, 차별과 배제에 의존하는 것을 빼고는, 극단조차 다양성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시끄러움'을 누가 왜 두려워하는가? 박정희 체제, 또는 총동원 체제의 유산은 아닌지 반문할 일다. 통합은 다양성과 시끄러움 속에서 만들어지는 '공공성'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불평등 심화를 더 두고 볼 수 없다는 공동의 이해 같은 것.
또 한 가지, 우리가 전혀 다르게 이해하는 통합도 있다. 통합이라 하려면, 그것은 지금까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늘 주변부에 머물러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비정규직, 성소수자, 여성, 이주민과 난민, 장애인…. 그 누구도 배제하거나 배제되지 않는 것이 통합이다. 새 정부는 이런 의미에서 통합적 정부가 되어야 한다.
둘째, 공약은 이제 시작이다
예상한 대로 선거 과정을 통해 상당수 공약은 비슷해졌다. 공약에 담긴 가치 지향이 명확하지 않고 정당과 대통령 후보의 그것도 비슷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다. 공약의 '수렴'은 앞으로도 당분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공약의 '동질화'에는 장단점이 다 있다. 여러 후보가 같은 약속을 하면 (유권자의 요구가 강하다는 의미에서) 누가 집권하더라도 공약을 추진할 명분을 얻는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번 대선에서 다들 동의한 아동수당이나 장기요양 확대가 그런 공약에 속한다.
단점도 있다. 공약이 비슷하면 후보 선택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당사자, 행정부, 유권자도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한다. "온갖 약속을 다 하는 선거에서 무슨 말인들 못 하랴"로 받아들이면 공약은 '공약(空約)'으로 전락한다.
장점과 단점이 드러나는 것은 이제부터다. 공약이 어떤 운명이 될 것인가를 한 가지 이유만으로 설명하지는 못할 터, 그래도 가장 중요한 요인 한 가지는 정부와 공약을 둘러싼 새로운 '권력관계'이다.
대통령과 정치인, 정당은 선거 때와 달리 반드시 실용적이다. 새로운 정책을 추진하거나 기존 정책을 바꾸는 데에는 큰 비용이 들지 않는가. 돈이 들고, 정치적, 사회적 비용을 물어야하면, 누구나 현실주의자가 된다. 정치적 이익을 면밀하게 계산하고 이에 따라 공약을 어떻게 할 것인지 결정할 것이다.
언론 역시 실용성을 강조할 터. 선거라는 특수한 시기에 한 약속을 다시 검토해야 한다는 훈계가 등장할 것이 뻔하다. "고착화된 저성장,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외교안보 상황, 탄핵과 선거 국면에서 분열된 민심…." 장담하건대, 이런 기사가 꼬리를 물 것이다. 이어서 공약을 '조정'하라는 주문.
실제로는 공약을 버리라는 뜻이다. 자원을 새로 배분해야 할수록 공약에 대한 저항은 심할 것이니, 재원 계획이 부실하다는 평가를 받은 모든 약속이 여기에 속한다. 아동수당이든 기초연금이든 증세 논쟁으로 비화하는 것은 순식간, 기업의 국제 경쟁력, 가계소득, 한국경제의 성장 잠재력이라는 익숙한 (그리고 이념을 암묵적으로 내포한) 논쟁으로 발전할 것이다.
공약은 반드시 그리고 곧 '권력 투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경제나 성장은 빼고). 복지를 확대하거나 불평등을 줄이자는 공약들이 더 그럴 것이다. 저항은 강하고 옹호는 흩어져 있는 것이 현재의 권력관계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새 정권에서도 정치와 정책이 이 권력관계를 반영하는 한, 공약은 좌초하거나 형식만 남기 쉽다. 의미 있는 공약이 조금이라도 전진하기 위해서는 '사회권력'을 강화해야 한다. 감시와 비판, 요구, 지지, 어떤 형태든, 정치와 정당, 행정부를 압박하고 여론을 형성하는 것이 과제다.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셋째, 다음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자
벌써 그런 말을 하나 싶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음을 준비하는 것은 단지 이번에 아쉬웠던 점을 잊지 말자는 뜻을 넘는다. 오래 걸리고 기초를 다져야 하는 일이면 지금부터 준비해도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번 선거도 개인과 '개인기'를 극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이 선거는 처음부터, 다양한 사회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하는 '가치' 경쟁이 아니었다. 노동, 농민, 청년, 여성, 소수자를 대표하는 정치는 없거나 터무니없이 약했다. 지속가능성과 성장, 불평등과 차별, 평화 등의 지향을 논쟁할 기회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 시스템 또한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대의 민주주의를 전제하면, 정치적 대표성은 현재로는 정당을 통하는 방법이 유일하다. 정당 정치가 작동한다면, 어떤 개인인가가 아니라 어떤 정당 후보인가를 보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 정당에 대해서는 그런 말을 할 형편이 아니다. 지향은 둘째 치고, 조직과 구성원, 활동이 차마 정당이라고 부르기 어려울 정도다. 오죽하면 대통령 후보를 당원이 아닌 '국민경선제'로 뽑아야 할까. 공약을 형성하고 유권자에게 내놓는 것은 아직도 정당이 아니라 후보의 캠프다.
다음이 조금이라도 더 나으려면, '밑으로부터' 민주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판단이다. 멀고도 험한, 달성하기 어려운 탁상공론일지 모르지만 다른 길을 찾을 수 없다. 지역, 직장, 학교를 가릴 것 없이, 지금부터 더 많고 깊은 민주주의를 학습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 토대 위에 정당과 시민사회(사회권력)가 튼튼해져야 대통령 선거가 그리고 대통령이 나아진다.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강화하는 데에 새 정부가 기여할 수 있다는 것, 아니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고 싶다.
"안철수가 가다만 길에 심상정이 서 있다"
무엇보다 원내 기반을 지닌 다섯 후보가 다양한 정치색을 대표하며 경쟁한다는 점이 그렇다. 아마도 제6공화국 들어서고 처음으로 '주요 주자'가 4명이 넘은 대선 아닌가 한다. 워낙 1위를 달리는 후보와 나머지의 격차가 크기는 하지만, 아무튼 마치 결선투표제 있는 나라의 대선 1차전을 보는 듯하다.
이 과정에서 한때 양강 구도의 한 축으로 점쳐지던 후보의 지지층이 쉽게 구심력을 잃는 것도 목격했고, 4, 5위 후보가 TV 토론회를 거치며 상당히 의미 있게 지지 기반을 늘리는 것도 봤다. 사뭇 역동적이다. 이는 1위 후보 지지율이 미동도 하지 않는 모습과 대비돼 더욱 극적으로 보인다.
이 양상은 대선이 끝난 뒤에도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어쩌면 이 현상은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지 만큼이나 대선 이후 한국 정치에 중요한 변화의 축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대중이 바뀌고 있다. 단순한 일시적 요동이 아니라 한 세대만의 격동이 진행되고 있다.
한국 사회의 양대 대중블록
나는 4월 11일에 <프레시안>에 실린 칼럼 "심상정, 유승민, 홍준표는 대선 완주하라 - '양당 정치' 대 '다당 정치'"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바로 가기)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은 '블록(bloc)'으로 존재한다. 계급도 있고 세대도 있고 정체성 집단도 있지만, 이를 가로지르거나 아우르는 블록이야말로 권력에 영향을 끼치는 실체다. 정치를 배제한 일체의 환원론(계급 환원론이든 세대 혹은 지역 환원론이든)이 설명력이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이런 까닭에 대중정당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기도 하다. 블록이 구성되고 해체되고 다시 구성되는 데 촉매 역할을 하는 것은 항상 대중정당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약간의 부연 설명을 덧붙여야겠다. bloc은 우리가 흔히 쓰는 영어 단어 block과 발음도 같고 어원도 같다. 하지만 고체 덩어리를 뜻하는 block과 달리 bloc은 안과 밖의 경계가 뚜렷한 정형화된 집단은 아니다. 일상에서 늘 구심력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 영향 아래 있는 이들한테 당원이나 회원, 조합원에 준하는 소속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블록은 차라리 자기장에 가깝다. 자력을 발휘하는 구심이 있을 뿐 경계는 뚜렷하지 않다. 항상 눈에 띄게 자력이 작동하는 것도 아니어서 평소에는 블록의 존재 자체가 의문시될 수도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정치적 순간이 닥치면 곧바로 강력한 자기장이 구축된다. 서로 방향을 달리 하던 여러 흐름들이 자기장의 중핵을 동심원처럼 에워싸며 재배열된다.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세력'은 이런 대중블록의 형태로 존재하며 운동한다.
블록을 응집시키는 역할은 안토니오 그람시가 '유기적 지식인'이라 칭한 사람들의 몫이다. 유기적 지식인은 각 블록의 구심인 대중정당 말고도 언론, 학교, 시민사회 단체들에 포진하며 특정한 세계관을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오늘날은 정보화로 유기적 지식인층의 폭이 더 두터워지는 중이다. 굳이 대중매체나 대학에 속하지 않아도 블로그나 팟캐스트, 심지어는 가짜 뉴스 유포를 통해 특정 대중블록을 응집시키는 요소가 될 수 있다. 가히 유기적 지식인의 '민주화(?!)' 시대다.
내가 보기에 그간 한국 사회에는 단 두 개의 대중블록만이 존재했다. 이 두 블록은 정치사회와 시민사회의 오랜 역사적 상호작용을 통해 구축됐다. 하나는 범민주당 블록이다. 모든 쟁점을 '민주주의'와 '한반도 평화'의 두 축을 중심으로 재구성하니 '민주-평화' 블록이라 부를 수도 있다. 다만 여기에서 '민주'와 '평화'란 보편적인 민주주의나 평화 자체는 아니다. 상대편 블록이 내세우는 가치들과 끊임없이 대조되면서 구체적인 의미를 획득하는 '민주'와 '평화'다.
또 다른 블록이란 범새누리당 블록이다. 위의 '민주', '평화'에 맞서 여기에서는 '경제 성장'과 '반공-반북'이 두 기둥 노릇을 하므로 '성장-반공' 블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는 범민주당 블록이 아니라 이들이 먼저 구성됐다. 범민주당 블록이 오히려 이들에 맞서 형성됐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이들 역시 범민주당 블록과 경쟁하며 새롭게 재구성됐다. 3당 합당이나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기의 야당 경험 등이 그러한 재편의 계기였다.
촛불혁명은 이 두 블록 중 한 쪽을 처참하게 와해시켰다. 촛불'혁명'이란 호칭에 불만과 비판의 목소리가 많지만, 양대 블록 중 하나, 그것도 70여 년 묵은 지배블록에서 비롯된 쪽을 쪼개고 쭈그러뜨린 사건은 충분히 '혁명'적이다. 자유한국당이 선동가 기질의 홍준표 후보를 내세워 기사회생하고 있다지만,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최대치는 20%를 넘지 못한다. "나라를 팔아먹어도" 35% 지지율은 지킨다던 범새누리당 블록의 위용은 분명 과거의 일이 됐다.
그렇기에 지금은 범민주당 블록의 독주 시대다. 허물어진 범새누리당 블록 외에는 이들이 상대할 '블록'이라 할 만한 대중적 구심이나 세력이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여론조사에서 문재인 후보의 압도적 지지율과 당선가능성으로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안철수가 가다만 길, 진보정당에 열린 길
한 사회 안에 반드시 두 개보다는 세 개 혹은 그 이상의 대중블록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너무 많은 블록의 존재는 지나친 파편화와 부족화를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대 블록이 팽팽히 맞선 지난 십 수 년 간 한국 사회의 심각한 모순들이 어느 하나 해결되기는커녕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는 사실을 돌이켜봐야 한다. 범새누리당 블록과 범민주당 블록이 익숙한 논쟁만 주고받는 가운데, 비정규직은 늘어나기만 했고 여성의 고통은 항상 뒷전으로 밀렸으며 교육과 주거 불평등은 심각해졌다.
위에 인용한 한 달 전 칼럼에서 나는 이제 양당 정치가 아니라 다당 정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달리 정식화하면, 범새누리당 블록과 범민주당 블록 말고 새로운 대중블록(들)이 등장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두 블록이 대표하던 세계관에서 벗어난 또 다른 세계관(들)이 시민사회 안에서 큰 흐름을 이뤄야 한다. 그래서 중요한 순간마다 기존의 두 구심 말고 또 다른 구심(들)이 자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는 한국 사회에서 정치적 주체의 범위가 시민들 내부의 다양성에 걸맞게 보다 넓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 과제를 중심에 두고 바라보면, 안철수 후보가 이룬 바와 잃은 바가 확연히 드러난다. 선거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안철수 후보의 선거운동이 승승장구보다는 우왕좌왕에 가까웠다는 데는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실 안철수 후보야말로 새로운 대중블록 구축 시도라는 점에서 가장 멀리까지 나아간 사례다. 1987년 이후 선거 때마다 제3당의 도전이 이어졌고 그 중에는 꽤 바람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지만, 모두 단명하고 말았다. 독자적인 대중블록을 구축하는 데까지는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주영의 야심찬 통일국민당조차 그랬다.
안철수는 좀 달랐다. 그는 2008년 촛불의 주인공이었던 젊은 세대에게 호소력을 발휘하며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다. 청년층이야말로 양대 블록의 강력한 자기장 바깥에서 새로운 대중블록의 중핵으로 나설 역량과 가능성을 지닌 첫 번째 집단이다. 안철수는 이런 청년층에 바탕을 두고 기성 양대 정당에 도전하는 새로운 정치 기획을 대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안철수 흐름은 이러한 전망으로부터 비껴나기 시작했다. 범민주당 블록의 일부를 떼어내 좀 더 안정적인 기반으로 삼으려 한 것이 잘못이었을까? 2016~2017년 촛불 이후에 와해돼가는 범새누리당 블록의 일부를 흡수하려고 우경화 전략을 취한 게 잘못이었을까?
어쨌든 주된 오류는 기성 양대 블록의 이러저런 요소들을 조각보처럼 이으면 새로운 대중블록이 구축될 수 있는 것처럼 사고하고 행동한 점이다. 차라리 국민의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강조한 "무능한 상속자의 나라" 비판에 주력했더라면, 결과가 사뭇 달랐을 것이다. 2012년 안철수 현상의 확대 반복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안철수가 가다만 이 길의 어디쯤에 지금 심상정 후보와 정의당이 서 있다. 선거운동 기간이 시작될 때만 해도 3%에 머물렀던 심상정 후보의 지지율은 이후 2배, 3배로 가파르게 상승했다. 지지율 상승 자체보다 더 인상적인 것은 이 상승을 이끄는 집단이다. 20대와 여성(혹은 둘의 교차인 20대 여성)에서 지지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정의당 안에서 먼 미래의 꿈으로 이야기되던 '청년과 여성의 정당'이 돌연 현실이 된 것만 같다.
사실 진보정당은 안철수 현상이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제3의 대중블록을 구축하려고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좌절을 거듭했다. 진보정당은 오히려 범민주당 블록의 왼쪽 구성원 혹은 압박자 정도로 치부되는 형편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시기에 민주당과 빈번히 선거연합을 맺은 탓이 크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때로 거슬러 올라가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여야의 구별이 명확했음에도 두 당 지지율은 동반 상승하거나 동반 추락했다. 민주노동당의 주된 지지층인 조직 노동과 30대 화이트칼라가 범민주당 블록 혹은 민주-평화 블록의 핵심 구성 요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들을 범민주당 블록으로부터 떼어낸다거나 아니면 이들을 바탕으로 민주-평화 블록을 통째로 인수한다는 구상은 도상(圖上)훈련에 그쳤다.
그런데 촛불혁명 뒤에 열린 조기 대선은 진보정당에게 예기치 않은 새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비록 범민주당 블록은 굳건하지만 범새누리당 블록의 구심력이 무너졌기 때문에 양대 블록 전체의 규정력은 현격히 약화됐다. 이러한 변화에 가장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는 것은 이전에도 양대 블록의 주변에 머물렀거나 바깥에 포진하던 집단이다. 이들은 이번 대선에서 전에 없던 과감한 선택을 하고 있다. 정치 기피층이 심상정 후보의 열혈 지지자가 되는가 하면 새누리당에 표를 던졌던 이들이 정의당 지지로 돌아서기도 한다. 지금 그 맨 앞에 선 게 여성과 20대다.
이 흐름이 이번 대선 한 번으로 끝나고 말 것 같지는 않다. 대선은 오히려 시작이다. 기성 양대 블록의 자기장 바깥에서 대안을 찾고 다지려는 움직임은 대선 이후 더욱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대중이 바뀌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초기 안철수 현상에 잠재했던 가능성을 진짜 목숨 걸고 실현할 정치 세력이 필요하다. 일단 첫 번째 눈길이 쏠린 곳은 심상정 후보의 정의당이다. 지난 20여 년간 시시포스의 노동을 거듭해온 진보정당운동에게 이는 뜻밖의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전대미문의 시험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대선 '이후'가 더 고민되는 정의당
심상정 후보는 마지막으로 공표된 여론조사들과 얼추 비슷한 득표율(7~11%)을 거둘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많이 받을 수도, 더 적게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최종 결과가 무엇이든 정의당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번에 처음 열성 지지층으로 떠오른 청년, 여성, 성소수자 등을 굳건한 지지 기반으로 만드는 일이다. 이들을 중심으로 기성 양대 블록과는 다른 새로운 대중블록, 진보적이되 민주-평화 블록과 구별되는 세계관으로 다져진 대중블록을 구축하는 일이다.
대선 이후 정의당은 이 한 가지 목표에 따라 자신의 현재를 재점검하고 미래를 다시 설계해야 한다. 협치든 대결이든 새 정권과의 관계도 오로지 이 목표의 실현에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지를 중심에 놓고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 '심상정 바람'에서 확인된 사실들을 바탕으로 거의 재창당 수준의 혁신을 감행해야 한다.
대중이 변화하는 때는 쉽게 오지 않는다. 사회 변화를 이루려는 정치 세력으로서는 그런 때를 살아보는 것만큼 영광스러운 기회가 또 없다. 지금이 그 때다. 그러니 지금이야말로 진보정당이 창공을 향해 뛰어올라야 할 바로 그 때다.
4대강 같은 '토목 공약'이 없는 첫 선거
여느 때와 다른 19대 대통령 선거의 특징
외국 언론에서는 박근혜 탄핵을 영국의 명예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에 비견되는 촛불 혁명이라고 한다. 그 승리의 구체화된 형태인 이번 선거에서는 이전의 대통령 선거와 다른 몇 가지의 특징이 나타났다. 길지 않은 대통령 선거 기간이었지만, 우리 국민은 이미 그런 성과들이 공약으로 구체화되는 것을 지켜보고 확인할 수 있었다.
첫째, 이제 더 이상 지역주의가 선거의 중심이 아니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후보나 정당의 지지에서 지역주의가 상당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지역으로 편을 가르는 방식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단순히 영남에 기반을 둔 구여권 정당들이 분열되어 있거나, 호남 출신의 야권 후보가 없는 차이가 아니다. 실제로 어느 지역 출신인지의 여부보다는 구체제를 옹호하는가 아니면 새로운 체제로 가야하는가의 여부를 두고 후보들이 갈리고, 정당의 입장이 정해진다. 그래서 이번 선거는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지역 구도가 거의 사라진 채 치러지는 최초의 선거가 된 것 같다.
둘째, 이제 더 이상 토목과 건설은 후보들의 주요 공약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특정 후보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했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개발 방식은 국민들에게 호응을 받지 못했다. 지난 선거에서 논란이 된 영남권 신공항 건설 같은 거대 토목 건설 공약은 이번 선거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지역 공약으로 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일부 정책이 여전히 공약집의 한 구석에 자리 잡고는 있지만, 이제 더 이상은 중앙 공약으로는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후보들 간에 이와 관련된 쟁점은 형성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공약 이행을 위한 재원 마련의 방안으로 SOC 부문의 축소 정책이 공론화되었다. 후보들 간에 얼마를 더 줄일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경쟁을 하는 모양새였다.
셋째, 이번 선거가 이전의 선거들과 다른 가장 결정적인 것은 여러 가지 복지국가 공약이 전면에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다. 아동수당 지급, 기초연금 인상,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 인상, 국민기초생활보장 제도 부양의무자 기준의 (단계적) 폐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와 공공의료의 확충, 주거 복지의 확대, 청년 일자리와 소득의 보장, 다양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들과 재벌 개혁을 포함한 경제 민주화 정책, 그리고 이들 공약들의 실행을 보장하는 다양한 재원 마련 방안들은 이전 선거에서는 볼 수 없었던 큰 성과들이며, 우리나라가 복지국가로 가는 데 하나의 중요한 징검다리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지난 2010년 6월 지방선거에서 무상 급식 이슈가 등장하면서 보편적 복지에 대한 정치사회적 논쟁이 시작된 이래 7년 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발전이다. 특히 지난 10년 간 역동적 복지국가를 국가발전 모델로 제시하며 노력해 온 사단법인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입장에서는 이번 선거는 그야말로 대한민국을 복지국가로 만들기 위한 획기적인 변화들이 진행되는 의미 있는 선거라고 하겠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처음 제안했거나 복지국가 정책으로 중요하게 연구하고 공론화해왔던 수많은 정책들이 주요 후보들의 공약에 상당 부분 반영된 것을 보고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후원 회원들이 월 1만 원씩 지난 10년간 후원해주신 정성이 이제 각각의 구체적인 복지국가 정책들을 통해 매년 수조 원 이상의 혜택으로 국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도 알려드리고 싶다.

ⓒ프레시안
공약으로 나타난 19대 대통령 선거
역대 어느 선거보다 TV토론이 많아서인지, 아니면 정책 경쟁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의 반영인지, 최근에 발간된 주요 정당들의 대통령 선거 공약집에는 이전에 각 후보들이 산발적으로 말하던 정책이나 공약보다 상당히 진전된 내용들이 많이 담겨 있다. 북핵 문제와 미사일의 위협 등 외부적인 요인이나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 등 여전한 공안몰이에도 불구하고 공약과 정책들은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일관되게 진행되었다. 또한 후보들 간의 공약이 상당 부분 한 방향으로 수렴되는 경향을 보인다.
아동 수당은 지급 시기나 금액의 차이는 있지만 5명의 후보들이 모두 공약했다. 공공 보육시설의 확충이나 보육시설의 교사 확충 및 처우 개선을 통한 보육 서비스의 질적 개선, 그리고 누리과정의 재정도 이번 선거를 통해 국가가 부담하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가 처음으로 제안해 2012년 선거에서 공약 경쟁을 벌였던 기초연금은 이제 30만 원으로 인상될 것으로 예견되고 있고, 국민연금 가입 기간과 감액 연계된 부분은 철회될 것이다. 이 둘 다는 대상자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후보들의 공통 공약이 되었고,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높이는 정책을 두고도 후보들 간의 토론이 이루어졌다. 교사 확충을 통한 공교육의 질 제고와 1교실 2교사, 그리고 교과과목 선택제 등도 다수의 후보들이 공통 공약으로 채택했다. 더 이상 학생 숫자가 줄어드니 교사 숫자도 줄여야 한다는 구시대적인 주장은 나오지도 않는 상황이 되었다.
적극적인 공공 임대주택의 확충으로 주거 문제를 해결하고, 주택 정책 자체를 주거 복지 정책으로 전환하자는 것이나, 주거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제안한 2년 자동 계약 갱신 제도를 통해 전세 기간이 최소 4년 이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나, 지역 단위로 인상률을 정할 수 있도록 하고 세입자들이 협상권을 가지도록 한 부분도 이후에 주거비 부담을 줄이는 데 획기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무엇보다 그동안 복지국가소사이어티를 비롯해서 진보적인 시민사회단체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왔던 '모든 의료비를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이 문구 그대로 주요 후보들의 공통 공약이 되었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80%와 비급여의 전면적 급여화로 '본인부담금 100만 원 상한제'가 구체화되는 등 이제 더 이상 국민이 매월 수십 만 원의 민간 의료보험을 들지 않아도 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도 큰 진전이다.
이전의 각종 선거와 가장 결정적으로 차이가 나는 부분은 노동체제의 개혁과 경제민주화 분야에서 나타났다.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이나 근로시간 단축뿐만 아니라 근로감독 강화와 비정규직 사용 사유 제한과 같은 적극적인 노동 정책들이 후보들 간의 논쟁을 통해 공통 공약으로 자리를 잡았다.
또한 징벌적 손해 배상제도와 집단소송제의 도입, 공정위 전속 고발권의 폐지, 지주회사 요건의 강화, 국민연금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 등 재벌들에 대한 특혜를 줄이는 것을 넘어 경제민주화를 통해 중소기업들과 상생할 수 있도록 하는 정책들이 공론화되고 구체화되어 각 정당들의 공식 공약으로 채택되었다.
그동안 선거 과정에서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던 재원 마련 방안들이 이제 제법 세세하게 기록되어 더 구체화된 것도 이번 선거의 큰 성과이다. 이제 새로 출범할 차기 정부는 세출의 구조조정이나 사업별 우선 순위 조절, 유사 중복사업의 조정 및 복지전달체계 개편 등 낭비 요소의 제거, 탈루 소득의 발굴 및 지하경제의 양성화 등으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애매한 말은 하지 못하게 되었다. 금액의 다소에 상관없이 후보들 모두 증세를 포함해서 어느 정도 구체적인 재원 마련 방안을 제시한 것도 이번 선거를 통해 국민들이 쟁취한 구체적인 전리품이다.
압도적 투표율은 촛불 혁명의 계승
TV토론이나 공약을 분석한 기사를 통해 국민의 의견이 모아지고, 이 내용들이 다시 주요 후보의 캠프에 정책으로 피드백되어 공약으로 반영되는 선거의 '바람직한 기능'이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지난 10년간 어려웠던 국민의 삶이 촛불 혁명으로 폭발했고 민심에 민감한 정치인들이 선거 과정을 통해 국민의 여망을 "복지국가를 요구하는 시대정신"으로 받아 안는 정치의 선순환 과정이 일어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새로 출범할 정부가 맞닥뜨려야 할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을 보면 낙관만 하고 있을 수 없다는 불안감이 밀려온다. 대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는 구시대를 향유해온 낡은 세력들이 여전히 큰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기 정부의 성공이 쉽지 않기에 한편으로는 마음이 착잡해진다. 여전히 이명박과 박근혜를 잇는 정당이 다시 상당한 지지를 모으고 있고, 또 선거를 앞두고 자신들이 선출한 후보의 사퇴를 요구하며 집단으로 탈당하는 등의 구시대적인 이합집산이 벌어지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구시대적인 잔재라고 생각하면, 적극적인 투표를 통해 낡은 세력을 심판해야 한다. 그들에게 역사의 수레바퀴가 도도하게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첫 번째 촛불 혁명의 완성이 박근혜 탄핵과 헌재의 파면 결정이라면, 두 번째 완성은 개혁적 후보의 당선으로 정권 교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압도적 지지로 국민의 개혁 의지를 표명해 차기 정부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명박과 박근혜를 계승하는 세력과 후보의 지지율이 높게 나오면, 그것도 사사건건 새 정부의 개혁을 방해하고 발목을 잡는 명분이 될 것이다. 투표 전날까지도 20% 넘는 국민이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무당층이나 지지할 후보를 정하지 못한 부동층으로 존재하고 있다. 차기 정부가 힘을 가지고 개혁을 추진하려면 압도적으로 높은 투표율과 높은 득표율로 2위와 상당한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어느 언론인이 방송에서 한 말이 가슴에 와 닫는다. 지금은 지지하는 후보가 같은 분들끼리 모여 동지애를 확인하며 즐거워할 시간이 아니다. 지지하는 후보가 다른 분들과 말싸움을 하거나 안 되는 설득을 하려고 시간을 낭비할 때도 아니다. 남은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아직도 지지할 후보를 정하지 못한 분들을 만나 지지를 부탁하고, 투표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분들을 설득하여 투표를 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한 시기다.
그렇게 해야 우리가 노력해서 만든 촛불 혁명이 정권 교체로 이어지고, 궁극적인 승리인 복지국가 건설로 귀결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후보 당사자뿐만 아니라 차기 정권을 담당할 주요 인사와 정치인들도 국민의 간절한 열망을 가슴에 부담으로 느끼면서 마음을 모아 의미 있는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역동적 복지국가 건설을 방해하는 구세력의 반대를 물리치고 국민이 행복한 복지국가라는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 수 있다.
(☞이상이의 칼럼 읽어주는 남자 바로 가기 : 개선이 시급한 임대주택 정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