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정치의 청춘이여! - 촛불 시민은 무엇을 위해 투표할 것인가?

일취월장7 2017. 5. 6. 10:15


정치의 청춘이여!
[김민웅 칼럼] 민주정부 제3기를 만들면서


제르미날의 약속

에밀 졸라의 <제르미날>은 광산노동자들의 분투기를 담은 역작이다. 프랑스 민중소설가로서의 역량을 탁월하게 뿜어낸 혁명문학의 힘 자체다. 파업은 끝내 실패하고 말지만, 그 체험은 새로운 미래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역사의 근육'이 된다. "제르미날(Germinal)"은 프랑스 혁명 이후 바뀐 달력이 4월과 5월을 새롭게 부른 이름으로, "땅에 씨앗을 뿌려 새 생명이 태어나는 계절, 봄"이라는 의미다. 우리도 그처럼 실패했었고, 무너져 내렸으며 희망의 뿌리가 이미 삭아버리고 말았다는 탄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한 사이에 씨앗은 힘겹게 싹을 틔우고 어느새 벌목이 불가능한 울창한 숲으로 자라나고 있었다. 제르미날이 약속한 풍경이다. 봄이 오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세력은 기어이 퇴각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때로 이 자명한 현실을 내다보지 못하거나 확신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배반과 이탈은 이렇게 태어나고, 뒤늦은 변신과 변명은 기회주의자들의 몫만으로 그치지 않는 까닭은 땅 속 깊이 이글거리는 역사의 불덩어리를 알고 있다 해도 그걸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해버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에밀 졸라는 그의 <위대한 작품 L'Oevre>에서 뛰어난 화가 클로드 랑티에라는 인물을 통해 평생의 친구 폴 세잔의 천재성을 격찬한다. 그럼에도 소설의 결말은 세잔과의 오랜 우정에 비수를 꼽고 말았다. "실패한 천재"라는 말로 세잔의 미래를 우울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었다. 오해였다는 졸라의 해명이 있긴 했어도 이미 벗 세잔의 마음은 분노와 슬픔의 덫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세잔은 실패한 천재가 아니라 시대가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거장이었던 것이다. 에밀 졸라마저 이러했던 것은 혹시 그가 작가로서의 명성에 취해, 인생의 후반기에는 가난하고 남루한 민중의 바다를 떠나 안락한 부르주아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만족해버렸던 탓은 아니었을까?  

생 빅뚜아루 산으로 가는 길 

빅토르 위고를 존경했고 드레피스 사건을 변호함으로써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대변했던 에밀 졸라도 내다보지 못했던 한 천재의 내면에는, 그가 온통 힘을 기울여 그린 엑상 프로방스의 "생 빅뚜아르 산"이 꿈쩍도 않고 버티고 있었다. 자연에 담긴 감수성과 정신을 태양 아래 드러내려 했던 세잔의 고투(苦鬪)는 제르미날의 노동운동 현장이 겪어야했던 고뇌와 사실 다를 바 없었다. 성취의 여정에 수없이 마주하는 비난과 조롱, 실패와 좌절은 인간의 인내를 시험하는 것만이 아니라 목표와 희망에 대한 의지를 끊임없이 꺾어버린다. 세잔은 굴복하지 않았다. 

졸라나 세잔 모두 그런 참담한 고통을 거쳤고, 자신이 가고자 한 목적지에 다다른 시간의 순서만이 조금 달랐을 뿐이었다. 인간은 자신이 과녁으로 삼은 지점에 도달했다고 여긴 순간, 숨겨진 함정을 알아보지 못하고 우쭐거리며 조심성 없이 발을 내딛기도 한다. 궁핍한 시대의 기억을 잊은 이들의 고꾸라짐이다.  두 차례의 민주정부 1기 김대중 정부와 2기 노무현 정부를 통과하면서 우리는 그런 계곡에서 해맨 아픔을 지니고 있다. 생 빅뚜아르 산의 정상으로 가는 길은 미답(未踏)의 능선이었고, 서투른 행군은 그 다음 본부 캠프를 차리는데 패배의 빌미가 되었다.  

가면들의 병기창 

역사에서 망각은 죄악이 된다. 진실이 유배되고 허위가 권력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기억의 정치학"은 다만 발터 벤야민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과 대치하기 위해 그의 기억은 유년기로 돌아가 "가면들의 병기창"을 떠올렸고, 그 가면은 격동하는 정치사에서 자칫 지워지기 쉬운 예술의 정신적 전투성을 의미했다. 병기창은 이 힘을 회복하는 작업현장이다. 우리에게는 어떤 "병기창"이 있을까? 당연히 촛불광장의 시민혁명이다. 우리의 제르미날이자 생 빅뚜아르 산은 광장의 함성과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았던 촛불이다. 그 힘이 만들어낸 대선에서 이 기억은 마치 전술적 후퇴를 요구받은 처지처럼 되었다. 권력으로 가는 경로에 이 기억이 불편해진 것이리라.  

영국의 세계적 비평가 테리 이글턴이 "망각의 정치학(politics of amnesia)"을 경고한 까닭은 지배 권력이 행사한 여러 가지 폭력에 희생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함이며, 우리의 의식이 현실정치의 이해관계에 의해 조종당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미래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파묻어버리는 행위는 모두 망각의 정치학이 부리는 요술(妖術)이다. 과거는 대안의 발상을 위한 미래를 미리 설정할 수 있도록 해주는 좌표이다. 지나간 것을 말하는 것은 자꾸 옛일을 들추어 가던 길을 가로막고 발목을 붙잡자는 것 아니라, 앞으로 올 시간에 대한 지혜의 우물을 파내려가는 동작이다. 미래의 대안적 경로는 그 과정에서 학습의 효력을 발휘하여 정밀하게 짜진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것이 완벽해질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패전을 예비하는 오류에 무지한 자들이 내리는 엉터리 전투명령을 포착하기 위한 절차다. 오늘의 현실을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체험을 의식의 변방으로 밀어낸다면, 남는 것은 권력의 술책과 역사를 배반할 태세를 갖춘 세력의 기만뿐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편한 "과거"는 제거해버린다면 역사를 사체(死體)로 만드는 행위가 아니고 무엇일까? 당장의 전투에서 이기느라 정작은 전쟁의 흐름을 바꾸지 못한다면, 애궂은 희생만 외로운 묘비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정치의 청춘이여! 

당연히 투표함을 열어야 확인할 수 있겠으나, 지금의 정세는 민주정부 제3기의 출범을 예상하게 준다. 벅차고 설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들뜸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도 있다. 미래에 머리를 숙인다면서, 정작은 회개하지 않는 자의 연출된 결단은 언제나 악의 반복을 허용하고 뻔뻔함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 뿐이다. 따라서 새로운 민주정부가 적폐를 청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며, 미래담론의 토대를 만드는 기본체력의 육성과정이다. 

어설픈 통합의 깃발을 들고 촛불시민혁명의 함성을 점차 침묵시키려 든다면 그건 또 다른 반동의 시작이 될 것이다. 포장만 바꾼 정치공학이 주인 노릇하는 나라다. 시민들이 주체가 되는 직접 민주주의의 꿈과 갈망이 현실정치를 움직이는 사상과 철학의 국가, 문학과 예술의 정치가 풍성한 사회, 정신의 깊이를 만들어내는 작업에 큰 힘을 기울이는 정부, 그래서  의식과 교육의 격이 달라지는 미래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적대적 분단을 극복하고 자본의 폭력을 제압하며 세계적 책임을 지는 정치윤리의 길을 뚫어낼 수 있다. 

5월의 볕이 축복처럼 내리는 들판에서 우리는 씨앗을 뿌리며, 저 멀리 높은 산을 향해 힘차게 걷고 있다. 그 산은 엑상 프로방스에만 있지 않다. 각자의 병기창에서 자기가 가장 잘 다룰 수 있는 연장을 꺼내 녹슬지 않게 할 일이다. 역사를 후퇴시킨 자들의 변신은 무쌍하니, 우리의 정신은 은화처럼 맑고 바위처럼 우람할 일이다.  

아, 이 화려한 봄날 "정치의 청춘"이 오고 있다. 


싸우지 않고 투표 잘하는 방법
[이관후 칼럼] 딱 두 가지만 기억하자
2017.05.05 14:57:17

어떻게 해야 투표를 잘 하는 것일까요? 

'어대문(어차피 대통령은 문재인)', '투대문(투표해야 대통령 문재인)', '심찍안(심상정 찍으면 안철수 당선)', '홍찍문(홍준표 찍으면 문재인 당선)', '심알찍(심상정을 알면 심상정 찍는다)' 등. 참 신조어가 많은 선거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찍었는데 결국 내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될까봐 사람들은 혼란에 빠지기도 하고, 그렇게 생각 없이 투표를 하면 되겠냐고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투표를 잘 하는 것일까요? 어떤 기준으로 투표를 하면 좋을지 저에게 묻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 때마다 저는 '두 가지를 생각하십시오'하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 두 번째는 '나의 대표자는 누구인가' 입니다.

▲ 5월 9일 치러지는 20대 대통령 선거에는 총 15명의 후보가 출마했다. ⓒ연합뉴스



전략적 투표는 유권자의 권리 

어떤 사람들은 소신대로 찍으면 되지 뭐가 복잡하냐고 합니다. 그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누가 뭐래도 누가 대통령이 될 것인가는 중요합니다. 

우리 헌정체제에서 한 명뿐인 최고권력자를 뽑으면서, 내 표를 유의미하게 활용할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은 유권자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전략적 투표를 나무랄 이유는 없습니다.

전략적 투표의 가능성은 단순다수대표제를 택하고 있는 우리나라 대통령 선거의 몇 안 되는 장점입니다. 이 선거제도는 영어로 First-past-the-post, 약자로는 앞 글자들을 따서 FPTP라고 불리는데, 말 그대로 결승선을 먼저 통과한 사람이 1등이라는 뜻입니다.

과반여부 같은 것 따지지 않고, 단번에 승부를 결정합니다. 열 명이 나와서 골고루 득표를 하다가 15%로 당선자가 나온대도 별 상관없습니다. 그 사람이 승자입니다.

이 제도의 첫 번째 장점은 선거제도를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장점은 선거의 흐름을 보아가며 내 표를 누구에게 던져서 소위 사표를 방지할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세상에 자기 표가 사표가 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인생에서는 최선도 좋지만 차선을 선택해야 할 경우도 많습니다. 선거라고 예외가 될 리 없습니다. 내 맘에 꼭 드는 후보를 찾기란 쉽지 않으니까요. 

반대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당선될 가능성이 높다면, 최선이나 차선을 버리더라도 그 사람의 당선을 저지하는 것이 목표가 될 수도 있습니다.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를 할 권리, 내가 지지하는 후보가 1등이 될 가능성이 적다면 차선을 골라서 그 사람을 1등으로 만들 권리가, 유권자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심상정 지지자에게 어차피 당선될 가능성이 적으니 문재인을 찍어달라고 말하는 사람과, 유승민 지지자에게 문재인이 싫으면 안철수나 홍준표를 찍으라고 말하는 사람은 투표에 대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도 이들에게 대해 뭐라 할 수 없고, 서로가 서로를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최선을 다해 전략적 투표를 하고, 남에게도 권하는 것이 좋습니다. 

투표는 정치적으로 나를 재현하는 것 

두 번째는, 선거를 단순히 당선자를 뽑는 과정이 아니라 유권자의 의사를 표시하는 과정으로 보는 관점입니다. 

선거는 정치적 대표자(representative)를 뽑는 과정입니다만, 동시에 나를 정치적으로 재현(represent)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나의 정치적 의사를 '직접 표현(present)'하는 것이 민주주의이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기 어렵거나 그것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투표를 통해 '간접 표현(re-present)'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를 뽑아서 하는 민주주의의 의미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정치적으로 가장 잘 대표하는 사람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실은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을 통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선거의 결과가 중요하니 그걸 감안해가며, 나를 조금이라도 대표하는 사람에게 투표하고 싶다는 것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정치에서 당장의 선거 결과가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별로 그렇지 않습니다. 

선거를 통한 민주주의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그것이 일정한 주기로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선거해서 영원히 통치하는 대표를 뽑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왕정입니다. 왕을 선거로 뽑을 뿐이지요. 

그래서 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정치적 대표를 성장시키기도 하고 기각시키기도 합니다. 당장 이번 대선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선거에서 가장 유력했던 두 후보가 이번 선거에서도 가장 앞서 나갔지 않습니까? 

이번에 꼭 당선되지 않더라도 나를 잘 대표할 수 있는 정치인이나 정치세력에게 투표하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이면서,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더 전략적인 투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처럼 당선자가 과반 득표를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되는 상황이라면, 누가 2등이나 3등이 되느냐, 혹은 의미 있는 득표를 하는가는, 당선자가 정책의 방향을 어느 쪽으로 잡아가느냐에도 당장 영향을 주게 마련입니다. 

심상정이나 유승민이 더해서 15%나 20%의 득표를 하게 된다면, 그 표는 다른 2위나 3위의 득표율에 육박하게 될 것입니다. 당선자는 2위나 3위보다 이 두 사람, 그리고 그들의 정치세력을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삼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결과가 나온다면, 이들에게 투표한 사람들은 소수로서 자신을 정치에 효과적으로 재현(re-present)하는데 성공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투표에 정답은 없습니다 

어? 앞에서 한 이야기랑 뒤에서 한 이야기가 다르다고요? 이것도 맞다고 하고, 저것도 맞다고 한 것 아니냐고요? 

맞습니다. 잘 보셨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그것이 선거가 가진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선거는 정답이 하나밖에 없는 시험문제가 아닙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누구에게나 정답이 따로 있는 그런 문제입니다. 

이상과 현실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 그것이 정치의 속성입니다. 단칼에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것, 정치에서 그런 것은 없습니다. 확실한 것도 있습니다. 정치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겠다고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면, 바로 그 사람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당선시키거나 낙선시키려는 목적으로 투표하시는 분, 잘하시는 겁니다. 누군가를 통해 나를 정치적으로 표현하기를 원하시는 분, 잘 하시는 겁니다.

누가 누구에게 더 잘했다 못했다 나무랄 필요 없습니다. 이것이 꼭 맞다고 우길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게 비난하고 우기는 사람이야 말로 자기 표를 하나씩 잃고 있다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아무 말 하지 말고 찍기나 하라는 것, 결코 아닙니다. 누가 몇 등을 하는 것이 우리 정치에 좋은지, 누가 나를 정치적으로 잘 대표하는 사람인지, 나는 이런 생각으로 누구에게 투표할 테니 당신도 잘 생각해보라든지 하는 말, 우리 선거에 꼭 필요합니다.

대신, 선거에서는 1등이 무조건 중요하다든지, 선거에서는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을 찍는 것이라고 단언하는 말은 사실도 아니고, 도움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린이 날입니다. 투표하러 가기 전에 우리 아이들 얼굴을 한 번 떠 올려 보십시오. 아마 거기에 정답이 있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통치의 시간', 준비돼 있습니까?

[김성희의 정치발전소] 대선이 위험하다
2017.05.05 10:12:24
정치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선거 시기가 되면 연락이 뜸하던 친구들로부터 종종 안부 확인을 겸한 선거의 전망을 묻는 전화를 받곤 한다. 며칠 전에도 친구로부터 ‘선거가 어떻게 될 것 같냐’는 전화를 받았다. 긴 수다 끝에 친구가 물었다. "근데 왜 이번 대선은 12월이 아니라 5월에 하지?", 농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뜬금없는 질문을 받고 순간 당황했다. 중년의 건망증이라고 서로 웃어넘기긴 했지만, 통화가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 친구의 질문이 영 생뚱맞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고, 또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잊은 채, 선거판의 정글에 빠져들어 길을 잃고 있는 것이 단순한 건망증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겨울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대선의 열기 속에 어느새 까마득한 일이 된 듯하다. 간간히 언론을 통해 양념처럼 등장했다 사라지는 전임 대통령을 비롯한 사건 연루자들의 사법처리과정과 수감생활에 대한 소소한 이야기들만이 우리가 왜 12월이 아니라 5월에 대선을 치르고 있는지를 문득 상기시킬 뿐이다.  

이번 대선은 87년 민주화 이래 최대 사건, 헌정 중단에 준하는 정치적 대위기가 초래한 선거이다. 또한 대다수 시민들은 대통령을 파면한 것을 폭군을 내쫓은 일종의 명예혁명으로 이해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다음 정부는 명예 혁명 이후의 새로운 질서를 주조해야 하는 비상한 책무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그러한 비상함은 찾기 어렵다. 선거과정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느냐를 잊게 할 만큼, 이전의 여느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문제를 두고 냉전적 시각으로 상대를 적대하는 것도, 심판론의 연장인 적폐청산론으로 피아를 구별해 적대하는 것도 그렇다. 이놈 저놈 하는 격한 정치적 언사도 모두 기시감이 느껴진다. 그 틈을 타 탄핵당한 헌법밖의 정치세력이 슬슬 다시 몸을 풀고, 또 그만큼 적대와 증오는 깊어지고 있다.

새로운 정권이 등장하면 모든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될 거라는 자족적 기대도 상당히 커보인다. 그러나 이런 시각은 탄핵정국 통해 표출된 사회적 에너지의 규모에 비춰, 그 과정에서 제기된 문제들의 다양함에 비춰, 그리고 우리 사회가 직면한 위기의 복합적인 성격에 비춰 지극히 불충분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이번 대선이 12월이 아니라 5월에 치러지게 된 것은 통치의 위기가 불러온 결과다 

보수-진보, 여-야를 떠나 절대 다수 시민들이 유사 사회적 합의를 통해 최고 통치자의 파면을 결정했다. 이 과정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을 넘어, 극심한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불균형, 시장을 지배하는 권력과 재벌간의 오래된 담합구조. 대통령과 청와대로 초집중화된 권력체계, 자율성과 자생력을 상실한 대학을 비롯한 사회 각 부분, 예스맨들의 집합체가 된 집권당과 책임성 없는 내각, 외교안보적 무능력과 리스크 증대 등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정치, 경제, 사회 각 영역의 누적된 위기에 대한 시민의 불만이 일거에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 조기 대선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촛불시위 과정에서 보여진 "이게 나라냐"라는 광장의 함성은 더 나은 통치에 대한 시민들의 집약적 요구라고 할 수 있고, 이번 선거는 그것을 묻고 있다.  

선거는 정치가 가진 여러 얼굴 가운데, 가장 경쟁적이며 대립적인 측면이다. 그러나 선거가 정치의 모든 것을 대신할 수 없다. 선거가 끝나면, 누가 집권하든 통치의 시간이 온다. 통치(government)는 원래 배의 키를 잡는 행위에서 유래한 말이다. 키를 잡고 거대한 함선을 이끌 듯이 최선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나라의 전반을 조정하고, 조율하고, 운행하는 정치적 실천이 통치다. 따라서 선거하듯 통치할 수 없다. 민주적 통치는 경쟁보다는 건설적 협력을, 대립보다는 상호 존중과 이해에 기초해야 한다.  

더 좋은 통치의 비전으로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핍박과 조롱을 통해 이기는 것만을 추구하는 것은 통치의 위기가 불러온 이번 대선의 의미를 정확히 뒤집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과정에서 과도하게 동원된 적대와 상대에 대한 모욕은 비단, 후보에게만 한정되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든 그 후보를 지지하는 시민들 역시 그러한 적대와 모욕으로 고통 받는다. 우리가 협력할 수 있고, 또 서로 존중받고 있다는 시민적 공감대가 없다면, 선거의 뒤끝은 격렬한 분열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이번 선거의 결과는 누가 집권해도 여소야대의 분권정부, 즉 소수파 정부일 수밖에 없다. 지금 유력한 대선후보가 상대하는 후보와 정당은 선거가 끝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 촛불을 거치면서 높아진 차기 정부에 대한 기대수준 속에서 나라를 이끌기 위해서는 집권한 정당, 후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첩첩산중이다. 아무리 승부가 중요하다 해도 서로가 협력할 수 있는 가능성, 서로가 존중받고 있다는 신뢰의 근거는 남겨놓아야 한다. 그것이 통치의 시간을 준비하는 '통치자의 태도'이다. 

선거는 이제 종반전이다. 비상한 상황에서 치러지는 평범한 선거를 보며, 미래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의 우려는 아닐 것이다. 단 며칠이라도 적대와 증오, 서로에 대한 모욕이 커지는 선거가 아니라, 우리가 더 나은 공동체를 함께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서로가 존중받고 있다는 이해를 발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 그 맨 가장자리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희망’을 발견했듯 말이다. 


또 다른 ‘박근혜’를 앉히지 않으려면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5월 06일 토요일 제503호

내 기억에 대통령 선거는 언제나 겨울이었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후보 모두 추운 겨울날 당선되어 막바지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 말에 임기를 시작했다. ‘장미 대선’이든 ‘촛불 대선’이든 이번에는 따뜻한 5월에 대통령을 뽑고, 대통령은 곧바로 임기를 시작한다. 광장의 촛불은 박근혜의 대통령 임기를 1년 이상 단축시켰고(12월9일 직무정지로 사실상 임기 종료) 우리는 예정보다 9개월 먼저 새 대통령을 맞이한다. 현직 대통령의 임기 중 파면과 구속이라는 불행하고 부끄러운 일이, 역사에는 이 땅의 모든 권력이 국민에게 있음을 증명한 행복하고 자랑스러운 ‘촛불’로 기록될 것이니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로도 그 미묘한 감정을 다 표현할 수가 없다.

혹독하게 추웠던 2012년 12월19일 밤 나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 제주 해군기지 반대 강정마을 주민들, 용산 참사 희생자 유가족들, 그리고 핵발전소와 송전탑에 맞서 싸우는 밀양 주민들과 함께 대한문 앞 ‘함께살자 농성촌’에서 제18대 대통령 당선 확정 소식을 들었다. 그날 밤 소주 몇 병을 마셨는지 모른다. 어떤 말로도 참담한 심정이 위로되지 않는 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날만을 기다리며 어떻게든 버텨보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의 개막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절망을 안겨주었다.

ⓒ시사IN 신선영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이 3만, 20만, 100만, 200만명으로 점점 늘어났다. 각자 일상에서 마주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해고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파업투쟁 중이던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났다는 비보가 농성장에 계속 날아들었다. 우리는 대한문 농성장에서 사흘에 한 번씩 추모제를 열며 눈물을 삼켜야 했다. 박근혜 정권의 시작은 재벌의 시대, 가진 자들만의 시대가 열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이명박 정권 5년 동안 억압받고 차별받던 이들에게는 박근혜의 5년을 더 견딜 만한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그해 겨울 그 ‘죽음’과 ‘죽임’을 잊을 수 없다.

예상대로 박근혜 정부는 1%의 편에 서서 99%의 목을 조여오기 시작했다. 특유의 오만과 불통은 세월호 참사 같은 엄청난 비극 앞에서도 요지부동이었고, 현직 국회의원을 여섯 명이나 보유한 정당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대선 과정에서 국정원의 정치 개입 의혹은 풀리지 않은 채, 박근혜 정권은 전교조 법외노조화,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개성공단 폐쇄, 굴욕적인 한·일 ‘위안부’ 합의, 경찰 살수차에 의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 기습적인 사드 배치 선언 등으로 쉴 사이 없이 국민들을 궁지로 몰아붙였다. 박근혜 정부의 4년은 이명박 정부의 5년을 가볍게 능가하는 참담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국민들의 절규에는 귀를 닫고, 몸부림 앞에서는 눈을 감던, 저 참담한 권력자가 청와대에서 끌려나와 감옥에 들어가는 날, “정말 이렇게 우리가 이길 수도 있구나”라는 희망이 싹텄다. 광장에서 촛불을 든 시민들이 3만, 20만, 100만, 200만으로 점점 늘어가는 감동의 시공간을 가장 가까이서 절절히 느끼며 걸어온 사람으로서 박근혜 다음 시대가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가를 계속 질문했다. 역시 우리는 광장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온몸으로 학습했고 부당함에 맞서 당당하게 저항하는 법을 체득했다. 공권력의 강제력 때문이 아니라 시민들 스스로 선택한 비폭력 집회는 그 어떤 때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힘을 발휘했다. 성별과 세대, 지역과 계층을 뛰어넘어 차별과 혐오가 발붙일 곳 없는 평등하고 자유로운 광장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놀라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사회를 성장시킬 소중한 기회를 맞았다. 각자 일상에서 마주할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래서 나는 또 투표를 한다. 온전히 마음을 사로잡은 후보가 없을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박근혜’를 청와대에 앉히지 않으려면 제대로 투표하는 수밖에 없다. 기권도 중요한 정치적 의사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투표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원치 않는 대통령이 탄생할 수 있다는 점만은 기억하자. 마음속에 장미 한 송이 아니 촛불 하나씩 담고 투표장으로 가자. 그리고 다음 대통령이 다시 권력에 취해 갈피를 못 잡거든 그 촛불을 꺼내 들고 광장에서 만나자.


"분노한 다음 날이 더 중요하다"

[시민정치시평] 촛불 시민은 무엇을 위해 투표할 것인가?



벚꽃도 이제는 다 지고 다녀간 흔적만 거리에 남아있다. 너무 추웠지만 그래서 더욱 뜨거웠던 지난 겨울의 광장도 간헐적인 집회가 있긴 하지만 쉬어가는 분위기다.

2017년 그 겨울 우리 국민은 무려 대통령을 탄핵시켰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았던 박근혜 정부 4년의 지난한 과정을 뒤로하고 대통령의 탄핵 및 구속수감이라는 대한민국 헌정사를 통틀어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정농단의 동조 세력이자 국내 최대 재벌 기업인 삼성의 이재용 씨도 수감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이번 선거는 이런 상황적 배경에서 치러지는 선거이다. 언론에서는 이를 '장미 대선' 이라 하지만 광장 민주주의의 진화 과정에서 1700만 이상의 촛불 시민의 위대한 힘으로 만들어낸 대선의 이름치고는 너무 편안하고 한가로운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오히려 '탄핵 대선' 혹은 '촛불 대선' 이라는 이름이 그 역동적 탄생배경에 걸맞은 이름이 아닐까?

박근혜 정부 4년의 무기력 

박근혜 정부 내내 온 나라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의 대형 사건들은 백화점 세일 시즌 돌아오듯 꼬리를 물고 품목을 바꾸어 찾아왔다. 출범 초기의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은 그 자체로 민주주의의 기둥 뿌리를 뒤흔드는 심각한 사건이지만 헌법상의 법치주의를 간단하게 비웃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기회만 되면 이민 가고 싶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렸지만 이어지는 대형 사고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치도 않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의 적극적 의무는 그저 헌법안에나 존재하는 공허한 문구였다. 취임 2년째에 발생한 세월호 참사와 바로 그 다음해에 온 나라를 공포에 떨게 한 메르스 사태를 대하는 박근혜 정부에게 국민은 없었다. 모두가 안전하게 구조되길 바라며 각자가 믿는 신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던 국민에게 세월호와 함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소중한 생명들을 지켜보는 일은 고통 그 자체였다. 이후 메르스 사태에 속수무책인 정부는 또 다시 세월호 앞에서의 그 모습을 반복하였다. 확산의 원인을 감추고 정부의 무능을 은폐하는 모습이 불과 1년 전의 그 모습과 너무도 닮아있다. 국민의 바람과 달리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한국 사회는 전혀 다르지 않았다. 

국민이 분노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정부의 무능도 무능이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감추고 왜곡하는 것에 있음을 모르는 건 정부밖에 없었다. 국민은 이제 우리 사회 도처에 또 다른 세월호와 메르스가 있음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지만,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없음 또한 알게 되었다. 국가적 재앙과 공포의 근원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할 국민이 보호의 주체인 정부에 의해 적극적으로 은폐되고 왜곡되는 상황에 노출되는 경험은 국민으로 하여금 심각한 집단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하기 충분했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심각한 퇴행 현상 또한 박근혜 정부 4년의 주요한 특징이다.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시도, 국가폭력에 의한 백남기 농민 사망사건, 피해자의 입장을 배제한 한일 위안부 합의 등의 일련의 사건과 그때마다 정부가 보여준 모습은 단지 헌법질서 내에 존재하는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제도적 절차에 장애를 주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 사회 전반적인 민주주의 감수성을 크게 후퇴시켰다. 민주주의에 대한 보편적 감수성의 후퇴는 급기야 '일간베스트' 라는 괴물 사이트를 통하여 우리 사회에 혐오라는 패악의 바이러스를 강화시키고 확산시켰다.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무차별적 폭력과 혐오는 우리 사회에 또 다른 갈등을 낳거나 혹은 더 깊어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의회 정치의 실종은 우리 사회 전반의 무기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오로지 대통령의 심기에 근거한 정치만 하는 여당과 수적 열세를 핑계로 무력한 모습만을 반복했던 야당은 더이상 국가와 국민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정당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얻어진 4.13 총선 결과는 예상하기 힘든 놀라운 결과였다. 박근혜 정권에서 벌어진 다종다양한 사고들로부터 치유되지 못한 사회적 트라우마가 성난 여론의 밑바탕에 누적되어 있었고 이것이 국민의 징벌적 투표 행위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국민이 만들어준 여소야대의 상황은 전혀 효능감을 주지 못하고 고구마같이 팍팍한 국민의 일상에도 별다른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비판과 견제 및 감시 기능도 총선 이전과 다르지 않았고 국민과의 소통 또한 변함없이 원활하지 않았다. 


ⓒ사진공동취재단


"이게 나라냐!" 

여소야대 국면마저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특권사회를 제대로 감시, 견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한 언론사를 통해 최순실, 박근혜의 국정 농단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끝을 모르는 이들의 욕망과 이를 위한 비상식적 일탈에 국민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국가 시스템 작동 불능의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이게 나라냐' 라는 광장의 구호는 욕망의 금도를 넘어선 개인에 대한 외침이 아니다. 국가 통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이며 국가 시스템 작동의 주체 모두에 대한 총체적 문제 제기이자, 분노이자, 경고였다. 사실 그 전까지 '정권 퇴진' 이라는 구호는 그야말로 선언적인 구호일 뿐이었지만 지난 겨울 광장의 퇴진 구호는 더 이상 선언에 그치는 구호가 아니었다. 실제로 어려운 순간마다 촛불은 더 많이 모였고 요구 또한 구체적이며 끈질겼다. 촛불이 경고하면 세상이 움직이는 꿈같은 상황이 촛불에 참여하는 국민뿐만 아니라 참여하지 못했던 국민 앞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광장 민주주의가 제도 정치에 반영되는 상황을 바라보며 그간 참여하지 않았던 국민 또한 민주주의 역사의 순간을 함께하기 위하여 광장으로 쏟아져 나오며 광장 인원은 회를 거듭할수록 기록을 경신하였다. 무엇보다도 선은 늘 악에 비해 강하지 못해 결국에는 악을 이기지 못하는 그간의 역사적 통념을 보란 듯이 깨버렸다. 광장에 모인 위대한 촛불들은 거악에 맞서면서도 끝까지 선을 포기하지 않았다. 폭력과 혐오에 대한 자체 정화능력까지 탑재한 광장의 촛불은 평등과 신뢰에 바탕한 평화를 끝까지 유지하였다.

박근혜 탄핵에 대한 헌재 결정을 얼마 앞둔 지난 2월, 장충체육관에 모인 1400여 명의 시민들은 새로운 2017 대한민국의 꽃길을 이야기하고 촛불권리선언문도 발표하였다. 부당한 권력을 탄핵 시키는 것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위한 여정의 시작임을 다짐하고 기억하기 위함이었다. 

분노한 다음 날
 

"분노한 다음 날이 더 중요하다." 특강을 위해 한국을 방문했던 지젝이 남긴 말이다. 특강에서 그는 분노가 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하는가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했다. 지젝은 정치권과 시민 사회가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대중들이 기존 질서에 타협한 탓에 분노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진단했다. 이제 우리 사회는 분노의 다음 단계를 맞이하고 있다. 촛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대한민국의 미래를 우리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 첫 단추가 바로 대선이다. 불과 6개월 전의 무기력했던 우리 사회를 기억해야 한다. 소중한 생명들이 세월호와 함께 깊고 어두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아도, 역사가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왜곡되어도,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맺힌 이야기들이 삭제당해도, 우리 농업의 미래가 물대포를 앞세운 국가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해도 속수무책이었던 우리 사회를 기억해야 한다. 지난 겨울 광장을 통해 민주주의의 역사가 던져준 시그널을 깊이 새겨야 한다. 주요인물 몇 명이 구속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들 방식의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 겨울 광장에서 끝까지 함께하겠다던 정치권의 목소리가 봄이 되니 사라지게 그냥 두어서는 안 된다.

이제 대통령 탄핵이라는 승리감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겨우 대통령 탄핵과 촛불 대선, 그리고 국가 개혁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첫 단계를 마쳤을 뿐이다. 광장의 개혁 열기가 대선과 이후 정치를 통하여 제도 개혁과 국가 개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광장의 개인이 아닌 유권적 시민의 총체인 국민으로서 국가 개혁을 완성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번에도 위대했던 촛불의 다음을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당선에만 관심을 두는 정치인들, 파렴치한 기업인들에게 강탈당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4.13 총선 결과에 따른 여소야대 국면과 대통령 탄핵 그리고 1700만 촛불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는 한국 사회는 장기적인 딜레마에 빠지게 될 것이고. 우리에게 주는 열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존의 체제가 상당한 정도로 변화될 수 있는 결정적 국면이 바로 지금이다. 지금을 놓치면 되돌리기 어렵다.

벚꽃은 엔딩을 했지만 내년에도 분명히 다시 찬란한 봄을 장식할 것이다. 내년 이맘때 한국 사회 민주주의가 피워내는 꽃이 어떤 모습일지는 바로 지금에 달렸다. 부디 촛불이 보여준 긍정적 역동성이 우리 사회의 불안정성을 극복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의 방향을 결정하는 이번 대선에서도 유효하게 작용하기를 기대해본다.



심상정 "내가 홍준표 잡으면 세상이 바뀐다"

"대선 후 민주당-국민의당 합당 가능성…새 견제세력 필요"
2017.05.05 17:31:27

정의당 심상정 대선 후보는 5일 '야권의 심장'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호남은 문재인 다음을 준비하셔야 한다. 호남 대표 선수를 심상정으로 교체해달라"고 호소했다.

심상정 후보는 이날 광주광역시 금남로에서 '광주 선언문'을 발표하며 "어제의 민주당이 오늘의 국민의당이 되고, 이번 선거에서 결과가 나쁘면 다시 국민의당이 민주당 되는 것 아니냐"라며 "이제 국민의당이 다시 민주당되고, 바른정당이 다시 자유한국당 되면 기댈 곳은 한 군데밖에 없지 않나. 바로 정의당"이라고 말했다. 대선 이후 다시 '거대 양당 체제'로 정계 개편이 될 가능성을 언급한 것이다.  

심상정 후보는 국민의당과 더불어민주당을 싸잡아 비판하며 정의당이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먼저 국민의당을 향해서는 "지난 총선에서 호남은 국민의당을 회초리 삼아 민주당을 심판했다. 그런데 대안으로 선택된 국민의당이 제대로 했나?"라고 반문했다. 민주당을 향해서는 "'압도적 선택'을 마치 민주당에 대한 압도적인 지지인 듯 착각해서 우리 국민의 개혁의 열망을 제대로 받아안지 못하게 될까 두렵다. 과거 열린우리당처럼 스스로 그 무게에 주저앉는 결과가 될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심상정 후보는 더불어민주당으로 정권 교체가 되리라고 내다보면서 "문재인 후보의 최종 득표율이 얼마가 되는지, 홍준표와 안철수 중 누가 2등이 되는지는 우리 민주주의에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대선에서 민주주의의 향방을 가를 유일한 변수는 심상정뿐"이라고 강조했다.

심 후보는 "대한민국의 '골든크로스'를 만드는 일은 심상정이 홍준표를 잡느냐 못 잡느냐 하는 데서 갈라질 것"이라며 "심상정에게 주는 표는 홍준표 잡는 '적폐 청산', 문재인 견인하는 '개혁 견인', 새 정치 안철수를 대체하는 '정치 혁명', '일타삼피'"라고 말했다.

심 후보는 "심상정이 홍준표를 잡으면, 우선 박근혜를 옹호하는 적폐 세력이 청산되는 것이다. 둘째, 심상정을 찍으면 문재인의 개혁을 견인할 수 있다. 문재인의 왼쪽, 문재인 대 심상정의 구도가 형성돼야 새로운 대한민국을 향한 개혁이 시작될 것이다. 셋째, 심상정을 찍으면 안철수를 대체하는 새 정치의 진정한 정치 혁명이 가능하다"고 부연했다.

심 후보는 특히 "안철수 후보는 새 정치에 대한 열망을 대권의 불쏘시개로 써버렸다. 오직 '반문재인 연대'에 기대서 보수 표만 받으면 집권할 수 있다는 망상을 가지니까 좌충우돌하다가 개혁의 길을 잃었다. 올드 보이들 불러 모은다고 정권 잡을 수 없다"고 일침을 놨다. 그러면서 심 후보는 "호남이 심상정을 선택하면 대한민국 정치 혁명이 새롭게 시작될 수 있다"고 호소했다.  

심상정 후보는 이날 오전 전북 전주시를 방문한 뒤, 광주광역시를 거쳐 전남 목포시를 들르는 등 호남 유세를 벌이고 있다. 목포 유세를 마친 뒤에는 목포신항에서 세월호 유가족들과 만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