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박근혜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 - ‘나라 망한다’는 태극기 노인의 울분…

일취월장7 2017. 3. 25. 09:15

[소종섭의 정치풍향계] “박근혜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

‘박근혜 사저 정치’ 어려운 4가지 이유

소종섭 편집위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1(화) 13:43:43 | 1431호


‘사저(私邸) 정치’ 얘기가 나온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서울 강남 삼성동 사저에 은거하며 정치세력화, 나아가 정치 재기를 도모할 가능성이다. 탄핵에 반대 서명을 한 자유한국당 61명의 의원,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박사모)’ 등 적극 지지자들이 그 자양분으로 지목된다. 지역적으론 오랜 지지 기반이었던 대구·경북 지역이 거론된다. 박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정세 변화가 어떻게 펼쳐지는지는 향후 보수 세력의 향배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과연 ‘사저 정치’는 현실화할 수 있을까.

  

판의 흐름이 대선 국면으로 전환

 

‘박근혜 이슈’의 흐름은 헌법재판소 판결로 변곡점을 넘었다. 상황이 바뀌었다. ‘박근혜’는 현직이 아니라 전직이 됐다. 큰 변화다. 모든 것이 바뀐다. 박 전 대통령은 종속 변수가 됐다. 그는 권력을 지탱하는 지위, 즉 신뢰를 상실했다. 현실적인 대통령직도 잃었다. ‘사저 정치’를 할 만한 동력을 상실했다. 결론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정치적 영향력은 향후 급속히 쇠락할 수밖에 없다. 

 

3월14일 서울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3월14일 서울 삼성동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 앞에서 지지자들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박 전 대통령이 청와대를 나와 삼성동으로 돌아온 3월12일 직후까지만 해도 친박계 내부에선 역할 분담론이 나왔다. 삼성동 현장에 서청원·최경환·윤상현·조원진·김진태·박대출·이우현·민경욱 의원 등 친박 인사들이 다수 모습을 보였다. 그 직후 ‘총괄 서청원, 정무 윤상현, 공보 민경욱…’ 등 마치 친박계가 조직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보도가 잇따랐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없던 일이 됐다. 박 전 대통령이 민경욱 의원을 통해 낸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라는 메시지가 헌법재판소 판결에 불복하는 것으로 해석되면서 민심의 거센 역풍이 휘몰아쳤기 때문이다.

 

경찰이 정광용 박사모 회장 등을 소환조사할 것으로 알려진 것도 달라진 상황 변화다. 경찰 관계자는 “조만간 소환해 정식으로 조사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경찰은 헌재 판결일인 3월10일 벌어진 집회에서 그가 폭력 사태를 선동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날 70대 노인 등 3명이 사망했다. ‘탄핵 반대 세력’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흐름이다. 삼성동 사저 주변 시위대를 상대로도 인근 초등학교 학부모들의 거센 항의가 쏟아지고 있다.

 

검찰의 칼날은 빠르게 박 전 대통령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차은택 전 창조경제추진단장 등의 재판에서는 연일 박 전 대통령에게 불리한 진술이 쏟아지고 있다. 앞으로도 법적으로 봤을 때 유리하기보단 불리한 진술이 더 나올 가능성이 커 보인다.

 

판의 흐름이 대선 국면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것도 ‘박근혜’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고 있는 환경이다. 정당들은 후보 토론, 선출 일정을 빠르게 진행하고 있다. 이슈 초점이 대선으로 모아지고 있다. ‘박근혜’는 과거가 됐고 ‘미래권력’이 누구냐가 관심사가 됐다.

 

자연인 상태에서 ‘피의자’ 신분이 된 박 전 대통령도 이런 흐름을 모를 리 없다. 청와대에서 내려와 삼성동으로 돌아온 순간 그는 ‘구름 위에서 땅으로’ 내려왔다. 막말 논란을 일으켰던 서석구·김평우 변호사를 포함시키지 않고 정장현·위재민·서성건·채명성·손범규·황성욱 변호사로 일단 변호인단을 꾸렸다. 손범규 변호사는 “검찰수사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이처럼 박 전 대통령이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정치 투쟁’이 아닌 ‘법률 투쟁’에 방점을 찍는다면 대선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애초 예상대로 박 전 대통령이 강하게 반발한다면 이에 맞서 ‘적폐 청산’을 강조해 온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대세론이 더 흐름을 탔을 것이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이 ‘법률 투쟁’으로 전환하는 흐름을 보이면서 대선 정국에서 별 변수 자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만약 검찰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하게 되면 상황이 바뀔 가능성도 있다.

  

“보수는 지금 길을 잃었다”

 

박 전 대통령이 탄핵된 것이 향후 보수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측이 나온다. 보수는 지금 길을 잃었다. 일단 기본적인 기조는 ‘박근혜를 버려야 보수가 산다’다.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의 발언이 상징적이다. 유 의원은 3월16일 연세대에서 열린 서울권 대학언론 합동 기자회견에서 “박근혜식 보수는 소멸돼야 한다. 감히 거기에 보수라고 말을 붙이기도 싫을 정도”라고 말했다. 홍준표 경남지사도 3월14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탄핵은 끝났고 이제 박근혜 전 대통령은 머릿속에서 지워야 할 때입니다. 우파 대결집을 위해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더 이상 박근혜 전 대통령에 매달리면 이번 대선은 없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라고 썼다.

 

대선 이후 내년 지방선거 때까지, 길게는 2020년 국회의원 선거 때까진 ‘보수의 재편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은 먹느냐, 먹히느냐 쟁투(爭鬪)를 벌이고 있다. 누가 대중에게 호소력 있는 보수의 새로운 가치를 얼마나 잘 정립하고 그에 맞는 인물들을 발굴해 낼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변화를 거부하는 기득권 수구로서의 태도를 버리고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보수로 거듭나는 과정을 거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을 통해 홍준표·유승민·남경필·원희룡·오세훈 등 보수의 대중적인 정치인들 가운데 새로운 리더가 탄생할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反체제 왕정복고 혁명’ 원하는가?”

[쓴소리 곧은소리] 최소한의 애국심도 없는 막장 드라마…“자신이 살려고 보수 전체 죽이고 있다”

손호철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2(수) 14:45:50 | 1431호


“헌법재판소 판결에 겸허히 승복해야 한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헌법을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이것은 헌법에 대한 도전이자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이 말들은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에 불복하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야당’들의 규탄 성명처럼 들린다. 그러나 결코 그것이 아니다. 이는 2004년 국회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탄핵한 뒤, 그리고 헌법재판소가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수도 이전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렸을 때 박근혜가 현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 대표로서 했던 말들이다. 그렇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박근혜의 말을 그대로 빌려, 대한민국 헌법에 대한 도전이고 대한민국이라는 체제에 대한 부정이다.

 

 “법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라는 착각에 빠져”

 

박근혜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대해 승복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불복 선언을 하고 삼성동 사저를 중심으로 국민과 대한민국을 상대로 저항에 나서고 있다. 결국 입만 열면 “사랑한다”고 이야기했던 대한민국이라는 체제를 부정하는 ‘반(反)체제의 길’을 스스로 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상의 불복 선언, 그리고 서청원 등 친박 의원 8명이라는 ‘팔상시’와 열렬 지지자들을 데리고 삼성동 사저에서 시작한 ‘사저 정치’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선출직 대통령이 아니라 법 위에 군림하는 여왕이라는 착각에 빠져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을 전복하고 ‘박정희·박근혜 왕조’로 복고를 노리는 ‘반체제 왕정복고 혁명 세력’을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지울 수 없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3월12일 서울 삼성동 사저에 도착해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박근혜 전 대통령이 3월12일 서울 삼성동 사저에 도착해 지지자들과 인사하고 있다. © 시사저널 임준선


검찰, 특검 그리고 헌법재판소는 일국의 대통령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박근혜의 수많은 죄들을 우리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앞으로 있을 검찰수사는 이보다 많은 죄들을 밝혀줄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쪽 이야기에 불과하다. 한 언론의 칼럼이 잘 지적했듯이, 박근혜의 가장 큰 죄는 특검의 조사보고서나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포함돼 있지 않다. 그것은 이념과 전혀 무관한, 부패와 같은 범법행위의 문제를 자신이 살기 위해 “보수 대통령을 끌어내려 빨갱이 세상을 만들기 위한 빨갱이들의 음모”로 몰고 가 나라를 이념전쟁으로 몰고 가고 갈가리 찢어놓은 것이다. 아니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실상 탄핵 결정에 불복하고 탄핵 반대 세력들을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혹 헌법재판소를 진보적 재판관들이 장악하고 있다면 모를 일이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박근혜 자신이 임명한 두 명의 헌법재판관을 포함해 다수가 보수적 성향의 재판관들로 구성돼 있다. 이들까지도 만장일치로 합의한 탄핵인용 결정이 빨갱이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빨갱이 판사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박근혜의 죄명에 국가보안법 위반을 추가해야 한다! 그런 것이 있을 것 같지 않지만, 설사 만에 하나 개인적으로 억울한 것이 있더라도, 나라를 위해, 자신으로 인한 나라의 분열을 막기 위해 “헌재의 판결을 겸허하게 수용하며 그동안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한때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다스렸던 정치인이 갖춰야 하는 최소한의 도리가 아닌가. 정말 최소한의 애국심도 찾아볼 수 없는 막장 드라마다.

 

이 같은 막장 드라마를 보고 있자니 문득 떠오른 것이 부하린과 박헌영이다. 부하린은 러시아혁명의 주역 중 한 명으로 스탈린에 의해 숙청돼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고, 일제하 항일투쟁과 좌익운동을 해 온 공산당 최고지도자 박헌영은 해방 정국에서 미군정의 탄압을 피해 월북하지만 김일성에 의해 미국의 스파이라는 말도 되지 않는 죄명으로 숙청당한 비운의 혁명가다. 이들은 스탈린과 김일성이라는 두 독재자의 정적 제거를 위한 조작된 죄명에 의해 억울한 사법적 응징을 받아야 했지만 자신들로 인해 당과 나라가 분열되고 혼란을 겪는 것을 막기 위해 순순히 죄를 시인하고 죽음의 길을 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에 비하면 박근혜의 처신은 너무도 대조적이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박근혜의 처신은 분노할 일만은 아닌 것 같다. 불필요한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부작용이 있기는 하지만, 이는 전화위복일 수 있다. 박근혜가 “헌재의 판결을 겸허하게 수용하며 그동안 국민들에게 걱정을 끼쳐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면 적지 않은 국민들 사이에 “이제 그만 용서하고 사면하자”는 동정론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박근혜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검찰수사와 사법 처벌이라는 정공법 이외의 다른 선택을 봉쇄해 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스스로 무덤을 파고 있고 매를 벌고 있는 것이다. 이제,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는 박근혜의 소원대로 검찰이 강도 높은 조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주면 된다.

  

“검찰, 고강도 조사로 진실 밝혀주면 된다”

 

그뿐이 아니다. 박근혜는 판결 불복과 사저 정치를 통해 자유한국당 등 보수 세력이 혁신을 통해 부활할 수 있는 기회를 봉쇄해 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자신이 살려고 보수 전체를 죽이고 있다. 이 점에서 박근혜의 불복과 사저 정치가 사실은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하는 대한민국에 마지막으로 봉사하려는 애국심의 발로가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든다. 즉 살신성인의 자세로 일부러 민심에 반하는 행동을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동정론을 차단해 법의 준엄함을 보여줄 기회를 만들어주고 내시정당으로 자신과 함께 나라를 망친 자유한국당 등 보수 세력의 집권 기회를 막음으로써 대한민국에 마지막으로 봉사하려는 것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속을 피해 보려는 전술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어쨌든 박근혜가 검찰의 소환에 순순히 응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박근혜가 최소한의 애국심이 있다면 “헌재 판결에 승복하며 나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의 분란은 멈춰 달라”고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호소해야 한다. 



최장집, “박정희 패러다임 붕괴 이후가 중요하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과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의 의미를 짚었다. 최 교수는 탄핵 이후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점진적 변화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24일 금요일 제496호


최근 출간된 책 <양손잡이 민주주의>에서 원로 정치학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2016년 촛불집회와 국회 탄핵 가결의 의미를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로 정의했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무엇이고, 그것이 붕괴되었다는 것은 또 무엇을 말하는가. 최 교수와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의 140쪽 분량 대담을, 박상훈 학교장이 인터뷰 형식으로 정리했다.


박상훈(박):박정희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최장집(최):박정희식 국가 운영 모델을 가리킨다. 과거 권위주의 시기뿐만 아니라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 모든 수준에서 헤게모니를 지녔던 국가의 운영 원리이자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였다.

박:형식적으로 민주화되었지만, 내용적으로 권위주의 시대 국가 운영 원리가 지속되었다?

:바로 그 점이 지난 30년 동안 민주화의 효과가 왜 제한적이었는가를 설명해준다. 민주화를 통해 정치체제가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권위주의 시대로부터 사회경제적·이념적 자원을 독점한 보수 정당이 압도적 영향력을 가졌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개혁 성향의 야당들은 그런 패권적 정당에 대한 항의와 비판에 의지해 선거에서 경쟁자 구실을 했을 뿐이다.


ⓒ시사IN 윤무영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대통령 탄핵이 단지 정권교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박:박정희 패러다임은 어떤 구조를 갖는 것이었나?


:지배적인 엘리트 집단들이 일괴암(一塊巖)처럼 결합되어 움직이는 구조이며, 그중에서도 중핵은 국가의 관료 엘리트와 재벌 대기업 집단 간의 동맹이다. 이 힘에 대응할 수 있는 사회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벌 위주의 관치 경제, 노동 배제, 반공 내지 반북주의라는 이념적 힘 혹은 사회적 가치들은 이 동맹 관계를 기반으로 재생산돼왔다. 그 결과 현대 세계에서 보편적 이념이라 할 자유주의를 한국 사회에 뿌리내리지 못하게 하고, 다원주의적 사회구조를 발전시킬 수 없도록 만들었다.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 이념적 폭이 넓은 정당체계의 발전도 저해했다.

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이 단지 정권교체에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담는 표현이 ‘박정희 패러다임의 붕괴’로 이해된다.

:박근혜 정부의 붕괴는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민주화에 이어 두 번째 맞이하는 정치적 대전환점이라고 본다. 예기치 않게 다가온 구질서의 치명적 약화 내지 해체로 넓게 열린 공간이 생겼다. 이 공간이 밖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응하고 안으로는 민주주의 가치와 원리에 부응하는 정치 질서를 창출할 기회가 될 것인지, 아니면 구질서를 다른 형태로 복원하게 될 것인지는 향후 정치인들이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박:야당으로 정권이 넘어간다면 달라지지 않을까?

:야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 다음은 무엇인가? 그들이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고 어떤 어젠다를 설정하고, 행정관료 체제를 지휘해 어떻게 자신들의 개혁 프로그램을 실행할 수 있는가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과거 야당은 두 번이나 집권했지만, 개혁은 그만두고라도 무엇을 뚜렷하게 남긴 것이 없다. 이 점이야말로 다음번 정부가 되고자 하는 야당으로서는 넘어서야 할 가장 중요한 도전이다.


ⓒ시사IN 윤무영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우리 사회가 내용적으로 권위주의 체제였다”라고 말했다.

박:박정희 패러다임이 복원될 수도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비극일 것이다. 과거와 같이 ‘박정희식 발전국가’가 주도하는 제조업 발전, 수출 중심 경제성장과 경제운영 방식은 이제 유효하지 않다. 냉전 시기의 반공주의 같은 폐쇄적 사고와 이념은 자유주의적 가치와 개방적 사고, 시장 개방과 자유무역이라는 세계적 환경에 기능적으로 잘 부응할 수도 없다. 그런 이념적 경직성과 폐쇄성, 관료주의에 따른 위계주의와 획일성은 새로운 시대의 기업 환경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국가·재벌 동맹’은 두 파트너 모두에게 부정적인 결과만 낳고 있다. 국가·재벌 동맹은, 세계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기업을 성장시키는 어려운 방법이 아니라 국가의 비호와 지원으로 손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쉬운 방법을 보장해주지만, 그 대가로 공식·비공식으로 재정적 자원을 약탈당한다는 점에서 엄청난 손실을 감당해야 한다. 이런 환경에서 한국 재벌 대기업의 기업 구조와 운영 방식은 여전히 전근대적이고 퇴행적이며, 결국 한국 경제를 깊은 수렁으로 이끈다.

박:국가·재벌 동맹의 다른 짝은 노동배제적 발전 모델이 아닐까?

:그 둘은 같은 현상의 다른 얼굴이다. 박정희 모델에서 국가·재벌 동맹과 짝을 이루는 것은, 조직 노동자들이 기업 수준에서, 그리고 국가 수준에서 집단적 행위자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거나, 여러 형태의 정치적·법적 수단을 통해 억압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에 대한 이런 제약은 국가·재벌 동맹의 분리·해체와 병행해 제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박:노동자들에게 더 폭넓은 시민권을 허용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그래야 노동 현장에서 노동자들이 고용주나 경영 측과 대등한 노사 관계를 만들고 민주적으로 운영할 조건이 마련되기 때문이다. 그럴 때 모든 고용주와 피고용자 간의 불평등하고 권위주의적이며 위계적인 갑을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출발점이 마련된다. 나아가 타자에 대한 존중, 인간적 존엄성의 구현을 위한 출발점이기도 하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으로서 노동을 배제한 채 ‘일에 대한 헌신’이 발휘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박:‘박정희 패러다임 붕괴 이후’는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 향후 대안적 발전 모델을 구축하는 것을 둘러싸고 한국 정당정치가 어떻게 재편되어야 한다고 보는가?

:우선 보수의 영역부터 말한다면, 기존 냉전적이고 반공적인 보수가 아닌 좀 더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보수가 주도권을 잡는 것이 필요하다. 개혁적인 야당은 과거와 같은 ‘민주 대 반민주’의 양극화된 담론을 버리고 자유주의의 정치 공간을 개척해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들의 왼쪽에 사회민주주의적 진보 정당 역할이 열렸으면 한다.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자유주의라는 말로 강조하고자 한 것은, 한국의 재벌들이 국가 관료와 동맹 관계를 단절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자립적인 부르주아지로 거듭나야 한다는 점이다. 정부로서는 기업이 행위하는 틀 내지 구조로서 ‘온건하게 규제된’, 자율적이고 공정한 시장경제를 형성해가는 것이 중요하다. 끝으로 노조와 노동운동을 인정해 민주적 노사 관계의 틀 안으로 통합해야 함을 강조하고자 한다. 다음 정부에서 정치적 경합의 구조는 바로 이런 실질적 문제를 두고 다투는 합리적이고 다원주의적인 정당들로 채워졌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보다는 의회와 정당이 중심이 되는 방향으로 점진적 변화가 지속되기를 희망한다. 박정희 패러다임은 붕괴되었지만, 어떤 대안적 발전 모델과 사회운용 원리가 자리 잡게 될지는 정당들의 구실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이제 막 그 길고 힘든 여정이 시작되었다.



‘안보 이슈 불감증’에 보수는 길을 잃었다

지난 9년 동안 보수 정권은 대중이 호응할 만한 정치·경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오직 안보에만 매달렸고 이는 ‘안보 이슈 불감증’을 초래했다. 보수의 가치는 실종됐고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이오성 기자 dodash@sisain.co.kr 2017년 03월 23일 목요일 제496호


대통령 파면 꼭 10년 전인 2007년 3월은 보수 천하였다.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이명박·박근혜 두 보수 후보의 합이 60%를 넘었다. 진보 대선 주자의 지지율은 밑바닥이었다. 그해 12월 대선에서 이명박의 압승(530만여 표 차이)은 기정사실이었다.

10년 만에 세상이 바뀌었다. 보수는 처참할 정도로 몰락했다. 지금 대선 여론조사 결과는 진보 천하다. 야권 후보의 합이 60%를 훌쩍 넘는다. 황교안, 홍준표, 유승민 등 보수 후보의 합은 20% 정도에 그친다. 대선이 벌어지는 해, 보수 후보의 지지율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적은 1987년 민주화 이래 없었다.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박 전 대통령이 보수 세력을 완전히 궤멸시켰다”라고 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터라, 웬만하면 일희일비하지 않는 야권 관계자들 역시 보수의 몰락을 직감한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핵심 당직자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최근 여론조사를 보면 여당에서 야당 지지로 돌아선 이들이 꽤 된다. 과거 여권이 잘못했을 때 그들은 ‘모름·무응답층’으로 돌아서지, 야권으로 오지는 않았다. 이런 현상은 극히 이례적이다. 보수층 일부가 여권을 버렸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시사IN 자료
2006년 11월9일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왼쪽)가 뉴라이트전국연합 총회에 참석했다.


물론 이런 진단은 아직 섣부르다. 2012년 대선 결과에서 드러난 팽팽한 진보-보수 구도가 일순간에 허물어지리라고 보지 않는 이들이 많다. 그럼에도 뚜렷한 공감대는 있다. 박 전 대통령 탄핵이 현 보수 정치 세력에 대한 파산선고라는 점이다. 이는 곧 21세기에 등장한 신보수(뉴라이트) 세력의 몰락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 신보수 세력이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이다. 1997년 헌정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가 이뤄지고, 2002년 노무현 정권이 탄생하면서 보수의 위기감이 커졌다. 이들은 2004~2005년 ‘뉴라이트’라는 이름으로 결집해 ‘역사 전쟁’을 시도한다.

방향은 뚜렷했다. 친일·독재 등 자신들의 얼룩진 과거를 ‘수정’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건국절 주장,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발간, 박정희 시대 평가 등이 그것이다. 국정 역사 교과서 추진, 극우 인사 문창극씨 국무총리 지명 등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역사 전쟁은 계속됐다.

역사 전쟁의 든든한 버팀목은 안보였다. 북한과의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자극하며 과거 진보 정권의 햇볕정책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천안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 굵직한 안보 이슈가 터질 때마다 보수 정권은 강경 일변도였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10년 지방선거를 8일 앞두고 용산 전쟁기념관에서 천안함 사건을 거론하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보수 세력은 정상회담 회의록 논란까지 터뜨렸다.

역사 전쟁과 안보 이슈를 기반으로 신보수 세력은 ‘먹고사니즘’을 공략했다. 747 공약, 규제 완화 같은 국가 주도 경제성장 전략과 친기업 정책을 펼쳤다. 그 결과 2006년 지방선거, 2007년 대선, 2008년 총선에서 연승을 이어갔다. 당시 한국도 일본처럼 보수 장기 집권 시대가 오는 것 아니냐는 분석이 쏟아졌다. 보수는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박근혜 정권의 탄생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잡았다. 그리고 4년 만에 자멸하고 말았다.

역사전쟁으로 4050 학부모 세대 등 돌려

보수 정치 세력이 몰락한 ‘뇌관’은 물론 박근혜 게이트였다. 보수 세력의 고갱이라 불러도 좋을 박 전 대통령의 도덕적·정치적 리더십이 무너지면서 보수 정치 세력도 파산했다. 그러나 보수 정부 9년을 거치면서 폭약은 꾸준히 축적되어왔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는 신보수의 무기가 녹슬어가는 현실과 맞닿아 있었다.

ⓒ시사IN 조남진
2016년 11월4일 새누리당 의원들이 의원총회에 앞서 ‘최순실 비리 의혹 관련 새누리당 국회의원 대국민 사죄’를 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먼저 역사 전쟁은 아무런 정치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문창극씨 국무총리 지명 정국에서 나타났듯 친일·독재 역사의 복권을 시도하자 오히려 정권 지지율이 추락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란은 4050 학부모 세대가 등을 돌리게 했다. 역사 전쟁은, 전쟁 당사자들만이 흥분하는 이슈였다.

안보 이슈는 더했다. 유권자들이 웬만한 이슈에는 눈도 깜빡하지 않는 흐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 기점이 놀랍게도 천안함 사건이었다. 2010년 6월 지방선거 직후 동아시아연구원·SBS·<중앙일보>·한국리서치가 공동으로 실시한 패널 조사에 따르면, 후보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이슈는 4대강 사업, 무상급식, 세종시 사업 순서였다. 천안함 이슈는 고작 5위에 그쳤다.

특히 천안함 사건으로 ‘여당에서 야당으로 지지를 바꿨다’는 응답(12.7%)이 ‘야당에서 여당으로 바꿨다’(2.4%)는 응답보다 훨씬 높았음을 주목해야 한다. 천안함 사건을 선거용으로 인식한 유권자들이 반발했다는 이야기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도 이런 흐름은 이어졌다.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개성공단 폐쇄 조치를 단행한 뒤 박 전 대통령은 “개성공단 달러가 북한 노동당 지도부로 흘러간다”라는 국회 연설로 정치권을 발칵 뒤집었다. 그럼에도 선거 결과는 야권의 압승이었다. 지난달 김정남 피살 사건 역시 탄핵 여론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동안 각종 경제지표는 추락 일변도였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보수 정권은 대중이 호응할 만한 정치·경제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 결과 안보에 매달렸고, 그것이 ‘안보 이슈 불감증’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측면이 있다”라고 말했다.

보수는 길을 잃었다. 가치는 실종됐고,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경제 지배를 넘어서 시민사회에서 정치적·도덕적·지적 리더십을 확보해야 한다’는 보수의 지침을 스스로 차버렸다.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을 기획한 박지향 교수(서울대 서양사학과)의 지적처럼 “통치 능력이 없는 (다음) 진보 정권이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보수 정당이 재생의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상황을 기다릴 뿐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보수의 몰락은, 그 대항 세력이 같은 시험대에 선다는 걸 뜻한다.



박근혜, 투철한 공적 의식의 사사로운 통치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비선의 결정 사항을 비서실이 정책으로 만들고 내각은 집행만 하는’ 구조였다. 그러다 보니 정책 결정의 경로가 엉터리였다. 엉뚱한 보고를 받고 와서 담당자도 아닌 참모에게 지시를 내렸다.

천관율 기자 yul@sisain.co.kr 2017년 03월 22일 수요일 제496호

대통령직 파면이 확정되고 4시간여가 지난 3월10일 오후 3시께, 청와대 관계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오늘 삼성동 사저로 이동하지 못한다. 입장 발표도 없다”라고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이후 탄핵 반대 집회가 격렬해지면서 사망자까지 나온 시점이었다. 지지자들의 분노가 갈 곳을 잃고 타오르던 와중에도, 박 전 대통령은 헌재 결정에 따라 지지자를 달래고 갈등을 봉합하는 마지막 공적 책임을 외면했다. 박근혜 시대를 압축하는 키워드는 공공성의 파산이었고, 파면된 날마저도 공적 책임을 외면하는 태도는 그 시대를 끝내는 장면으로 잘 어울렸다.

묘한 역설은 여기서부터다. 박 전 대통령의 공공 의식은 겉보기에 남다른 데가 있어 보였다. 정치 이력 내내 그에게는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사롭지 않다’는 이미지가 따라다녔는데,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저격당했을 때 “휴전선은 괜찮습니까?”라고 물었다는 일화는 이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만들어냈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패배 직후의 빠른 승복 역시 사사롭지 않다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해 가족 간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라고 말하며 자신의 공공 의식을 강조했다.

국회가 탄핵소추안을 가결한 이후, 헌재의 대통령 대리인단 변론이나 광장의 탄핵 반대 집회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논변은 이런 것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제 주머니에 1원 한 푼 챙긴 적이 없는 청렴한 지도자다!” 이 말은 적어도 아직까지는 거짓으로 확인된 바 없다. 박 전 대통령은 정말로 제 주머니에 챙긴 것이 없을 수도 있다. 비슷한 정서는 본인도 강조했다. 지난해 11월4일 2차 대국민 사과에서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저는 청와대에 들어온 이후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염려해 가족 간 교류마저 끊고 외롭게 지내왔다”라고 말했다. 사익 추구를 원천봉쇄했다는 자부심을 내비쳤다. 그녀는 자신의 공적 자의식에 강한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박근혜 게이트 이후 드러난 사실을 보면, 박근혜 시대는 전례를 찾기 어려울 만큼 사사로운 통치의 시대였다. 박근혜 정부는 2013년 출범 당시 청와대 비서관 35명 명단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처음부터 사사롭게 출발했다. 이른바 ‘문고리 3인방’으로 대표되는 비서실 통치가 예견되던 정부여서 비서관 인사 비공개 조치는 사실상 노골적인 공적 검증 회피였다.

장관들의 ‘적자생존(잘 받아 적어야 생존한다)’

이후 박근혜 정부 청와대는 ‘비선의 결정 사항을 비서실이 정책으로 만들고 내각은 집행만 하는’ 공적 프로세스의 총체적 붕괴를 보여주었다. <시사IN>이 단독 입수해 연속 보도했던 ‘안종범 업무수첩’은 분명한 증거다. 2016년 3월18일 박근혜 대통령은 안종범 당시 경제수석에게 야당 의원 두 사람을 콕 찍어 총선 ‘낙선운동’을 지시한다.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한 중대한 공공성 훼손이다. 계통도 엉망이었다. 이 지시는 안종범 경제수석을 통해 현기환 당시 정무수석에게 전달되도록 되어 있다.

ⓒ시사IN 윤무영
<시사IN>이 입수한 안종범 전 수석의 업무수첩 내용을 보면 청와대는 업무 계통이 엉터리였다.

2016년 3월2일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자가줄기세포는 안전성이 입증됐다. 임상실험 진입 장벽을 낮춰라”라는 지시를 안종범 경제수석에게 내린다. 자가줄기세포의 안전성 문제는 과학계에서 확고한 결론이 났다고 보기 어렵다. 정책 결정의 경로도 엉터리다. 의료정책의 비전문가인 대통령이,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내용을, 업무 책임자도 아닌 경제수석에게 일방 지시했다. 의료정책 전문가로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조정수석을 지냈던 김용익 민주연구원장은 “업무 계통이 엉터리다”라고 말했다.

2016년 10월13일 박근혜 대통령은 “북한 선제타격이 통일의 기회가 되고, 북한 리스크가 낮아지면 투자 유치 효과가 있을 수 있다”라는 취지의 지시를 내린다. 북한 선제타격론이라는 고도의 안보 이슈가 투자 유치 문제로 다뤄지는 것도 독특하지만, 이 지시가 왜 안종범 당시 정책조정수석에게 내려졌는지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지낸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대통령이 어디서인지 모를 곳에서 엉뚱한 보고를 받고 국가안보실장도 아닌 정책조정수석에게 지시하는 상황은 이해하기 힘들다”라고 말했다. <시사IN>이 입수한 안종범 업무수첩 12권에 등장하는 ‘VIP(대통령)’ 지시 사항 중 상당수가 이런 식이었다. 안종범 수석은 자신의 보직과 거리가 먼 업무를 마치 개인 집사처럼 지시받았다.

통치의 공적 경로여야 할 내각은, 청와대 참모들의 지시를 단순히 수행하는 사적 통치의 말단 집행조직으로 전락했다. 국무위원으로서 국정의 공동 책임자인 각 부처 장관들은 ‘적자생존’(잘 받아 적어야 생존한다)이라는 야유를 받는 ‘예스맨’들로 채워졌다. 보수 진영에 인맥이 넓은 윤여준 전 장관이 들려준 에피소드다. “블랙리스트 파동 진원지인 문화체육관광부에 조윤선 장관이 부임해서 간담회를 할 때다. ‘위에서 부당한 지시가 와서 조직이 동요하는 문제가 많았으니 막아달라’는 건의가 나왔다고 한다. 조 장관이 ‘나는 여러분들을 보호하러 온 사람이 아니고 지시를 이행하러 온 사람’이라고 말했다더라. 그 말을 들은 문체부 사람들이 이 장관을 믿다가는 자기들까지 큰일 나겠다고 딱 감을 잡고, 없애라고 한 증거를 다들 갖고 있다가 그걸 모두 특검에 넘겼다고 한다.”

통치자 박근혜에게는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사롭지 않다’는 이미지와, 공적 통치 프로세스에 대한 철저한 무시라는 현실이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했다. 8대2로 쪼개진 탄핵 찬반 여론은 대체로 이 모순을 반영했다. 15~20%를 유지했던 탄핵 반대 여론은 박 전 대통령의 ‘사사롭지 않다’는 이미지를 강조하며, 본인 주머니로 1원 한 푼 받은 증거가 없다는 대목을 되풀이해 내세운다. 공적 통치 프로세스가 붕괴했다는 현실은 탄핵 반대 집회에서 외면받았다.

ⓒ연합뉴스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사로운 지시를 충실히 따랐던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왼쪽부터).

특히 박 전 대통령 본인이야말로 자신이 ‘국가관이 투철하고 사사롭지 않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다. 2월27일 헌법재판소에 서면으로 제출한 ‘피청구인 대통령 의견서’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저는, 정치인의 여정에서, 단 한 번도 부정과 부패에 연루된 적이 없었고, 주변의 비리에도 엄정했습니다. 최순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의 잘못된 일 역시, 제가 사전에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엄하게 단죄를 하였을 것입니다. (…) 지금껏 제가 해온 수많은 일들 가운데 저의 사익을 위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으며, 저 개인이나 측근을 위해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거나 남용한 사실은 결코 없었습니다.”

3월10일 헌재는 박근혜 대통령이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으므로 탄핵되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기각하면서 이렇게 쓴다. “피청구인(박근혜 대통령)은 최서원(최순실)이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피청구인이 최서원 등이 운영하는 회사에 이익이 돌아가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한 사실은 증거에 의하여 분명히 인정된다. 대통령으로서 특정 기업의 이익 창출을 위해 권한을 남용한 것은 객관적 사실이므로, 헌법과 국가공무원법 등 위배에 해당함은 변함이 없다.” 그 결과가 대통령 개인의 사익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통치의 공공성이 무너진 것은 별개로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탄핵 반대 집회, 박근혜 대리인단, 그리고 박 전 대통령 본인은 이 차이를 모른 척하거나, 정말로 구분하지 못했다.

헌재의 파면 결정 직후, 청와대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충격에 빠졌다. 헌재 결정을 생중계로 지켜보던 박 전 대통령은 이정미 재판관의 전원일치 파면 결정을 듣고 일부 참모에게 전화해 사실관계를 재확인하기까지 했다고 알려졌다. 파면 결정을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듯한 박 전 대통령의 대응은 외부 관찰자의 눈에도 놀라운 장면이다. 공적 통치 프로세스를 그토록 무시하던 통치자가 어떻게 탄핵이 기각되리라고 그리도 당연히 확신할 수 있었을까.

백낙청 명예교수가 제안한 개념이 흥미로운 가설을 제공한다. 백 교수는 올해 <창작과 비평> 봄호에서 ‘이면헌법’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면헌법은 ‘빨갱이로 몰린 자에게는 권리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일종의 관습헌법으로, 분단 체제에서 어떤 이들에게는 실제 헌법보다도 더 상위법으로 간주된다. 탄핵 반대 집회에 나선 항의자들이 “군대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면헌법으로 보면 완벽히 헌정적 원리에 맞다. ‘빨갱이’가 준동한 결과인 작금의 탄핵 사태를 바로잡는 것은 이면헌법의 명령이며, 이면헌법이 실제 헌법보다 우선하므로 내란 선동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국가는 진보·좌파적인 반대파를 ‘비(非)국민’으로 낙인찍고 국가 밖으로 밀어낸다.

ⓒ연합뉴스
20016년 11월2일 서울역광장에서 열린 공공운수노조 총파업 총력투쟁대회에서 조합원들이 박근혜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손팻말을 들고 있다.

박근혜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 중 하나로 기록될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은 이면헌법의 화신이나 다름없었다. 특검 공소장과 고 김영한 민정수석의 업무일지 등에서 나타난 김기춘 전 실장의 세계관은 이면헌법의 전형을 보여준다. 2014년 6월14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를 주재한 김기춘 비서실장이 이렇게 말했다고 김영한 업무일지는 기록한다. ‘이념 대결 속에서 생활-갈등 속에서 전사적 자세 지니도록’ ‘가치중립적 타협은 없다. 회색지대 없다.’

‘국가=우파=현 집권세력=박근혜’

특검 공소장이 밝힌 김기춘식 청와대 운영은 더 노골적이다. 공소장에 따르면 2014년 1월4일 김 전 실장은 수석비서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께서 국회의원 시절부터 국가 개조에 강한 의지를 갖고 계셨다. 지금 형국은 우파가 좌파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 모두가 불퇴전의 각오로 투지를 갖고 좌파 세력과 싸워나가야 한다.’ 2013년 12월18일에는 ‘반국가·반체제적 단체에 대한 영향력 없는 대책이 문제다. 문화계 권력을 좌파가 잡고 있다. 영화 <변호인>과 <천안함 프로젝트>가 그렇다. 하나하나 잡아나가자’라고 말했다.

김기춘 전 실장에게 국가란 곧 ‘우파=현 집권세력=박근혜’였고, 심지어 <변호인>과 같은 상업영화도 반국가·반체제·좌파의 힘을 보여주는 ‘국가 밖의 존재’였다. 헌법 정신과 맞지 않는, 위헌적 통치다. 하지만 ‘빨갱이로 낙인찍힌 대상은 비(非)국민으로 간주한다’라는 이면헌법에는 정확히 부합한다.

실제로 김기춘 전 실장은 자신의 ‘공적 의식’에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한 업무일지의 메모에는 김 전 실장의 이런 발언도 기록되어 있다. “야간의 주간화, 휴일의 평일화, 가정의 초토화, 라면의 상식화” “(청와대는) 명예를 먹는 곳. 모든 것을 바쳐 헌신.” 이는 김 전 실장이 나름대로 공적 자의식을 가졌던 증거다. 이런 공적 자의식의 소유자가 블랙리스트와 같은 반헌법적 통치를 지시했다는 사실은, 그가 충성했던 대상이 헌정 원리라기보다는 이면헌법의 원리라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해서 박근혜 정부의 운영자들은 통치의 공적 프로세스를 붕괴시키는 노골적인 사사로움과, ‘국가관이 투철하다’는 공적 자의식을 모순 없이 조화시켰다. 진보·좌파·반대파를 ‘국가 밖으로’ 밀어내는 것은 이들에게는 전혀 사사롭지 않았다. 오히려 이면헌법의 원리에 따라 국가관이 투철하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 결과 박근혜 정부의 운영자들은, 실제 통치 양태는 지독히 사사로우면서도 정작 투철한 공적 의식을 자부하는 기묘한 분열 상태로 빠져들었다. 박 전 대통령은 헌재 결정에 대한 현실감각이 무뎌질 정도로 이 기묘한 분열 상태의 극단으로 치달았다.

2016년 겨울의 광장은 이 분열 상태에 결정적인 제동을 걸었다.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시민을 대표하는 구호는 “이게 나라냐!”였다. 공공성의 파산을 정면으로 추궁하는 구호다. 광장은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요구와 구호의 집합소였으되, 박근혜 정부의 통치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사사롭다는 점만은 사실상 만장일치가 이루어졌다. 박근혜 정부는 더 이상 투철한 국가관의 외피로 보호받지 못했다. 광장의 주권자들은 박근혜 정부 운영자들의 기묘한 분열 상태를 폭로해 사사로운 민낯을 드러냈다.

이면헌법은 광장의 존중을 전혀 받지 않았으며 국가의 공적 책임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헌법이 광장의 무기가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이면헌법과 대한민국 헌법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광장과 여론의 추이는 분명했다. 대한민국 헌법의 수호자가 이면헌법의 수호자를 훌쩍 뛰어넘는 다수파였다. 3월10일 헌재가 추인한 것은 이 충돌에서 확인된, 대한민국 헌법이 이면헌법에 우선한다는 승리의 선언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은혜를 갚자,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라!”

일부 보수 기독교계, 탄핵 반대 집회 이끌며 황교안 출마 독려 등 정치 세력화 시도

박혁진 기자 ㅣ phj@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2(수) 09:11:42 | 1431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을 앞뒀던 3월1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네거리에서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와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이 공동으로 개최하는 ‘3·1절 구국기도회’가 열렸다. 한기총 대표인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는 기도회 이틀 전인 2월27일 기자회견을 열고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혼란 속에 있는데, 이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모여서 함께 기도하는 것”이라며 기도회 개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기도회가 탄핵 반대 집회와 같은 장소에서 열리는 것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해, “기독교가 어느 특정 편에 서지 않고 중간에서 대한민국이 처한 어려움을 놓고 간절히 기도하고자 이번 구국기도회를 개최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구국기도회는 이 목사의 해명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종교집회임을 내세웠음에도 애국가 제창과 국기에 대한 경례로 행사가 시작됐다. 기도회를 위해 만든 무대에 대형 교회 목사들과 함께 박사모 회장인 정광용 ‘탄핵기각을위한총궐기운동본부’(탄기국) 대변인이 올랐다. 무대 뒤편에는 ‘3·1절 만세운동 구국기도회’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지만, 하단에는 ‘국민총궐기운동본부’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과 박정희 전 대통령 초상화를 들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을 든 참가자들도 손쉽게 찾을 수 있었다. 탄핵 반대 집회에 매번 등장했던 대형 성조기도 보였다. 탄핵 반대 집회에 기독교인들이 참석한 것은 이날이 처음은 아니었다. 1월7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열렸던 탄핵 반대 집회에도 다수의 기독교인들이 참석했다. 당시 참석했던 교인들은 찬송가를 부르며 인근 대치동 박영수 특검 사무실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3·1절을 맞은 3월1일 오전 서울 광화문네거리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한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3·1절 만세운동 구국기도회’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3·1절을 맞은 3월1일 오전 서울 광화문네거리에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비롯한 기독교단체 회원들이 ‘3·1절 만세운동 구국기도회’에 참석해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 시사저널 고성준


“대형 교회 목사들, 黃 지원 대책 마련했었다”

 

3·1절 기도회에 취재차 참석했던 한 기독교 전문매체 기자는 “기도회가 탄핵 반대 집회와 관련이 없다고 강조하지만, 사실상 탄기국 집회에 기독교가 숟가락을 얹은 모양새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날 기도회를 위한 집회신고와 무대 설치도 탄기국이 맡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기도회가 진행되는 도중 정광용 대변인이 기도회 단상에 올라 경찰 측의 차선 통제를 요청했고, 빨간 모자를 쓴 참가자들이 단상 주변을 통제했다고 한다. 기도회 무대 바로 옆에 탄기국 모금함도 놓여 있었다. 이날 기도회는 오후 1시10분쯤 끝났지만, 대다수 참가자들은 기도회 자리를 뜨지 않고 2시부터 이어진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했다. 이날 참가자 중 상당수는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탄핵 반대 집회 참석을 독려하는 식으로 정치색을 드러내는 교계 인사들이 있는가 하면, 물밑에서 정치인들을 움직이려는 기독교 원로들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수도권 한 대형 교회의 담임목사인 김아무개 목사가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의 대선 출마를 계속 권유한 것이다. 황 대행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한 정치권 관계자는 “교회에서 전도사란 직함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황 대행에게 김 목사를 비롯한 교계 원로들이 여러 차례 대선 출마를 직·간접적으로 권유했다”며 “황 대행이 끝까지 대선 출마 여부를 놓고 고민했던 가장 큰 이유도 이런 목사들의 권유를 물리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김 목사를 비롯한 대형 교회 목사들이 황 대행 출마를 위해 이미 수차례 회동을 가졌고, 출마했을 경우 지원 대책까지 다 마련해 놨던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노골적으로 기독교의 정치 세력화를 주도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극우 성향을 띠거나, 대형 교회에 기반을 둔 목사들이다. 이들이 유독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우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한국 기독교가 기본적으로 보수 성향이 짙은 데다 반공 이데올로기까지 더해지면서 박근혜 정권과 코드가 잘 맞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3월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태극기집회에 서석구 변호사(오른쪽)가 참석했다. 이날 집회는 한기총이 주최한 구국기도회가 끝나자마자 시작됐다. © 시사저널 고성준

3월1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탄핵 기각을 위한 국민총궐기 운동본부’(탄기국) 태극기집회에 서석구 변호사(오른쪽)가 참석했다. 이날 집회는 한기총이 주최한 구국기도회가 끝나자마자 시작됐다. © 시사저널 고성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창립한 손봉호 전 동덕여대 총장은 시사저널과의 통화에서 “전통적으로 무속적 신앙이 몸에 배어 있는 우리 민족이 ‘기복(祈福)주의’를 강조하는 교회들에 몰려서 대형화된 측면이 있다”며 “이런 교회들은 대부분 미국 보수 교단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손 전 총장은 또한 “한국전쟁을 전후해 기독교인들이 공산주의 정권의 핍박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반공이라는 가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며 “아무래도 박근혜 정권이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대해 적대적이다 보니 탄핵을 반대하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손 전 총장의 지적처럼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하는 기독교 목사들이 주로 외치는 구호는 ‘공산주의 척결’이다. 3·1절 구국기도회에서 설교한 여의도순복음교회 이영훈 목사는 “집회에 정치적 오해가 없도록 노력하겠다”면서도 “그러나 공산주의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산당이 들어오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무너지고, 모든 교회는 문을 닫아야 한다”며 “북한 공산 독재 정권을 지지하는 어떠한 세력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내 개인 신앙의 입장이고, 우리 교회 입장이다”고 말했다.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날의 보수 기독교를 분석하고 있다. 김 실장은 시사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해방 후 좌익세력에 대한 무차별 테러를 자행했던 서북청년단 역시 기독교에 뿌리를 두고 있다”며 “평안도 출신 월남자들이 모인 영락교회는 서북청년단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였다. 테러와 암살을 주도한 이들의 명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서북청년단은 단순한 이민자 집단이 아니라 해방 정국의 가장 중요한 활동가 세력의 하나로 남한을 극우사회로 이끈 장본인이었다. 그 이후에도 줄곧 한국 사회의 가장 핵심적 파워엘리트 인맥의 하나였고 가장 강성의 극우주의 세력을 대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박근혜 정권에서 서북청년단의 부활을 주장하는 단체가 생겼고, 극우집단들의 활동이 부쩍 활발해졌다”며 “아마도 이명박 정권 시절 권력연합에 참여한 일단의 극우개신교 세력이 그 중심에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1월7일 서울 시내 한 공원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목사가 손을 들어 기도하고 있다. © AP 연합

1월7일 서울 시내 한 공원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집회에 참석한 목사가 손을 들어 기도하고 있다. © AP 연합


일부 개신교 세력, 군사정권 시절 특혜 받아

 

탄핵 반대 집회에 교인들을 동원하는 교계 인사들이 군사정권과 우호적으로 지내며 사실상의 특혜를 누린 것도 공통점이다. 한때 국내 최대의 대학생 선교단체였던 CCC의 고 김준곤 목사는 1968년 제1회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또 “우리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고까지 칭송한 바 있다. 김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이 10월유신을 발표한 뒤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에선 “민족의 운명을 걸고 세계의 주시 속에 벌어지고 있는 10월유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기어이 성공시켜야 하겠다. 외람되지만 각하의 치하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군신자화운동이 종교계에서는 이미 세계적 자랑이 되고 있는데 그것이 만일 전민족신자화운동으로까지 확대될 수만 있다면 10월 유신은 실로 세계 정신사적 새 물결을 만들고 신명기 28장에 약속된 성서적 축복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다.

 

뿐만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 직후인 1980년 8월6일 고 한경직 목사를 비롯한 유력한 교계 인사들은 서울 롯데호텔 에메랄드룸에서 나라를 위한 조찬기도회를 열었다. 이들은 전두환을 앞에 두고, 전두환의 군권 찬탈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그의 앞날을 축복해 줬다. 이 대가로 교회들은 땅을 받아 큰 교회를 짓거나, 대규모 인원이 모여도 중앙정보부의 감시를 받지 않는 특혜를 누렸다. 

이에 대해 한 진보적 교단의 목사는 “3명 이상만 모여도 중앙정보부나 경찰로부터 의심을 받던 시기에 100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정부로부터 허가받는 것은 특혜나 다름없었다”며 “군사정권이 민주주의와 자유를 원하는 민심을 종교를 이용해 무마시킨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정확하게 얘기하면 당시 군사정권 부역자라고 할 수 있는 목사들이 오늘날 탄핵 반대 집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으로 보인다”며 “극우집회에 교인을 동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키려고 하는 것은 일부 대형 교회 목사들이 가지고 있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부채의식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근혜의 실패는 여성 정치의 실패인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최초 여성 대통령’이었다. 그녀는 탄핵 국면에서 여성혐오를 자신에게 유리한 방법으로 활용했다. 여성 정치는 실패한 걸까. 이 경험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자산이 될 수 있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7년 03월 21일 화요일 제496호


여성은 오랜 세월 정치의 영역에서 공란으로 존재했다. 프랑스 혁명의 불씨를 댕긴 장 자크 루소는 ‘천부인권’을 말하면서도 여성을 배제했다. “모든 인류는 평등하다. (중략) 단 하나, 여성은 예외다. 여성에게는 인권이 없다. 그러므로 교육을 시킬 필요도 없으며 정치에 참여시켜서도 안 된다.” 목소리를 내는 여성이 설 수 있는 자리는 단두대뿐이었다.

한국은 1948년 정부 수립과 동시에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며 제도적 평등을 보장했다. 그러나 투표권은 권력을 나누기보다 독점하는 데 사용됐다. 정치권력은 오랜 시간 남성의 몫이었다. 각국의 성 평등 현황을 확인할 수 있는 세계경제포럼(WEF)의 ‘성 격차 지수’를 보면, 2016년 한국은 144개국 중 116위에 그쳤다. 여성은 교육성취도가 높은 반면, 경제 참여 기회가 낮았다. 무엇보다 정치적 권한 부문에서 낮은 점수를 기록했다. 이 때문에 평소에는 보수와 진보로 노선을 달리하는 여성단체들도 여성할당제 같은 공직선거법 개정 문제에서는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 ‘결정적 다수(critical mass)를 만들어야 한다.’ 즉, 조직 구성원 중 적어도 30%를 여성으로 채우자는 주장이다.

ⓒ시사IN 조남진

박근혜라는 ‘여성 정치인’의 존재에 대한 질문도 여기서 시작된다. 여성이 정치를 하면 ‘여성 정치’인가? 고위 공직자 및 기업 임원의 여성 비율이 매우 낮고(‘유리천장’이 두텁고) 성별 임금격차는 37%로 OECD 국가 중 1위인 한국에서 여성이 국가 최고 의사 결정권자가 된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와 상징성을 지닌다. 여전히 ‘여성’을 생물학적 범주로만 이해하는 사람이 다수임을 고려하면, 2012년 ‘최초 여성 대통령’ 탄생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성 평등’이 이뤄진 것처럼 착각하게 했고, 정치를 성별로만 환원하는 오류를 범했다.

시계를 2012년 그해로 돌려보자. ‘여성’은 박근혜 캠프의 핵심 선거 전략으로 동원되고, 작동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슬로건은 ‘준비된 여성 대통령’이었다. 당시 새누리당 선대위 관계자에 따르면 애초 박 전 대통령은 “약해 보인다”라는 이유로 이를 마뜩잖아 했다. 2007년 당내 경선 당시에도 여성을 부각하는 전략에 부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준비된 여성 대통령’은 자신의 의견을 뒤엎는 기획이었다. 2012년 10월28일, 박근혜 후보는 “여성 대통령만큼 큰 변화와 쇄신은 없다”라고 선언한다.

새누리당은 진보 진영의 어젠다인 경제민주화를 내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자신들의 보수적 인상을 바꾸는 전략 중 하나로 사용했다. “정치 선진화를 세계에 선포하고 국격과 국가 브랜드가 달라지는 것(유정복 당시 직능총괄본부장)” “대한민국에서 3·8선 빼고 마지막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정현 당시 공보단장)” “여성 대통령은 그 자체가 양성평등과 여성 권익을 위한 의미 있는 이정표(김무성 당시 총괄선거대책본부장)”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또한 박 후보에게 제기되는 비판을 ‘여성 전체에 대한 폄하와 동일한 것’으로 다루면서 책임과 답변을 무마했다. 박 후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 “여성 전체를 부인하는 발언(이정현 공보단장)”으로 뭉뚱그렸다. 검증은 피해갔다. 1997년부터 거르지 않고 열렸던 시민사회단체 주최 토론회인 ‘대선 후보 초청 여성정책 토론회’는 박 후보의 거부로 무산됐다. 김은희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연구위원은 “젠더가 보수 정치의 기회주의에 활용되고 정치적으로 전유됐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마치 젠더의 이해관계인 것처럼 포장됐다”라고 평가했다(2013년 1월30일 국회 토론회).

ⓒ사진공동취재단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캠프는 ‘여성’을 핵심 선거 전략으로 동원했다.

그렇게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수식어는 박 전 대통령 차지가 되었다. 박정희와 육영수라는 가족의 후광을 등에 업은 채였다. 박 전 대통령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정치를 하기보다는, ‘남성이 용인할 수 있는’ 여성 리더십(이른바 ‘명예 남성’)으로 정치를 해왔다.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은 3월3일 <중앙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대통령 앞에 붙는 ‘여성’이란 말을 떼야 할 것 같다. 너무나 많은 여성 정치 지도자가 그녀의 삶에 관계된 남자들 때문에 최고의 지도자 자리에 올라간다. 그 자체가 가부장제의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박근혜의 실패가 여성의 실패는 아니다

‘여성 대통령’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박 전 대통령이 국정 운영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그녀의 계급적 기반이 주목받을 터였다. 그 자신의 공과보다 아버지가 대통령쯤 되는 ‘다이아몬드 수저’여야 여성이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 강조될 가능성이 높았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대형 국기 문란 사건의 ‘주동자’가 된 지금은 “거봐, 여자는 안 돼”라는 여론으로 귀결된다. 남성이 모든 남성과 여성을 대표하지 않듯, 여성도 모든 여성과 남성을 대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실패는 손쉽게 여성 전체에 대한 비하로 이어졌다. “앞으로 100년 내 여성 대통령은 꿈도 꾸지 말라”던 박지원 국민의당 비상대책위원장의 말은 이를 정확하게 뒷받침한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의 말마따나 여성의 행동은 ‘성별만으로’ 쉽게 환원된다. 남성은 보편적 정치 주체로 간주되기 때문에 개별 남성 정치인의 행동은 전체 남성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전두환·이명박 전 대통령도 ‘역시 남자라서 안 돼’라는 평가를 받지는 않았다. “성차별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여성의 존재를 그들이 직접 수행하고 있는 다양한 역할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의 성 역할’로만 제한하는 규범과 제도다(<낯선 시선>, 교양인, 2016).”

박 전 대통령은 이 같은 ‘여성혐오’를 해소하려 노력하기는커녕 오히려 이용하고 부추겼다. 그녀를 대통령으로 세운 ‘남성 정치’ 역시 이를 거들었다. “내가 남자다운 편이어서 약한 여자를 보면 지켜주고 싶다(최순실씨의 전남편 정윤회)” “대통령이기 전에 여성으로서 사생활이 있다(유영하 대통령 변호인)” “법관이라면 약한 여자를 편들어야(김평우 대통령 대리인)” “여성 대통령에게 미용 시술 의혹에 대해 물으면 결례(김기춘 전 비서실장)” 같은 식이다. 박 전 대통령 역시 지난 1월25일 정규재TV와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에게 제기된 의혹을 해명하며 “여성이 아니면 그런 식으로 비하를 받을 이유가 없다”라고 말했다. 대통령이라는 공적 지위를 지운 채 여성이라는 성별을 부적절하게 동원했다. 권인숙 교수(명지대)는 “여성은 대통령의 공적 역할을 무책임하게 수행해도 되는 존재로 폄하했다”라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의 탄핵을 이끈 주역인 촛불 시민들은 지난 4개월 동안 광장에서 각종 논란을 거치며 민주주의를 훈련하고 합의하는 과정을 경험하는 중이다. 광장은 “여성, 여성 정치인, 여성 대통령으로 환원된 혐오의 언어들이 뒤섞인 페미니스트 정치의 각축장”으로도 기능했다. 김은희 여성정치세력민주연대 연구위원은 이 지점에서 ‘최초 여성 대통령’의 성과를 찾는다. 박 전 대통령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정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근본적인 질문을 끄집어냈고, ‘어떤 여성과 연대할 것인가’를 마주하게 했다(<그럼에도 페미니즘>, 은행나무, 2016).

대중에게 여성을 대표하는 이름은 오랫동안 미스코리아였다. 그 자리를 ‘여성 대통령’이 대신한 것이 아주 나쁜 일만은 아닐 수 있다. 여성학자 권김현영은 계간 <창작과 비평>(2013년 가을호)에서 “오히려 지금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젠더 정치의 지형이 등장할 수 있다”라고 평가하며 정치, 특히 진보 진영이 여성이라는 기호를 적극적으로 전유할 것을 주문한다.

박 전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여성’을 이유로 들지 않아도 된다. 그저 “참 나쁜 대통령”이라는 그의 말을 돌려주는 걸로 충분하다. 실패한 여성 대통령을 가진 경험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민주주의의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박근혜와 최순실, 경계선 없는 ‘가족’이었다”

국정 농단 최순실의 의붓조카 조용래씨 밝혀

구민주 기자 ㅣ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7.03.22(수) 11:37:00 | 1431호


‘최태민가(家)의 내부고발자’. 최태민의 의붓아들 조순제의 장남이자 최순실의 의붓조카인 조용래씨는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조씨의 아버지 조순제씨는 최태민의 다섯 번째 부인이자 최순실의 모친인 임선이씨가 최태민과 결혼하기 전에 전남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다. 홍콩에 거주하던 그는 지난해 10월부터 터진 최순실 의혹에 한동안 무심하려 애썼다. 힘들게 잊은 어릴 적 기억을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러던 중 저녁 뉴스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최태민 일가와 박근혜 대통령 간의 관계를 폭로한 일명 ‘조순제 녹취록’이었다. 이를 들은 그는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즉시 아버지 녹취록과 어릴 적 기억을 글로 정리해 한국에 들어왔다. 다니던 회사도 그만뒀다.

 

3월15일 시사저널과 만난 조용래씨는 할아버지 최태민과 고모 최순실, 그리고 이들과 가족보다 가까웠던 ‘또 하나의 가족’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가감 없이 털어놨다. 그는 “최태민·최순실과 박근혜 사이에는 돈이든 생활이든 경계가 없었다”면서 “우리 가족은 박근혜와 밀착해 키운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에 해체됐다”고 말했다.

 

국정 농단 최순실의 의붓조카 조용래씨  © 시사저널 이종현

국정 농단 최순실의 의붓조카 조용래씨 © 시사저널 이종현


대통령 탄핵 어떤 마음으로 봤나.

 

헌재 판결문을 백 번쯤 읽은 것 같다. ‘탄핵심판은 이념의 문제가 아니다’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끝내 아무 사과도 안 하는 모습은 비극적으로 봤다.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 했는데 앞으로도 진실을 철저히 숨기겠다는 다짐으로 들렸다. 검찰 조사에서도 진실을 말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뭐라고 하셨을 것 같나.

 

아버지가 계셨으면 박근혜는 대통령이 절대 못 됐을 거다. 2007년 7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정희 일가의 온갖 궂은일 다 맡아 했던 자신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박근혜 모습을 보고 아버지는 크게 분노했다. 기자회견을 열겠다는 걸 가족들이 뜯어말렸다. 겨우 한나라당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끝냈다. 그때 아버지는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걸 보면 온 국민한테도 거짓말을 일삼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어린 시절 박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은.

 

어릴 적 박근혜 영애가 집에 오는 날이면 할머니(임선이)부터 새 저고리를 갖춰 입고 현관 앞에서 허리 숙여 인사했다. 할아버지 최태민 역시 목숨도 내놓을 것처럼 충심이 깊었다. 그녀는 왕이었고 우리 가족은 권력에 복종하는 백성이었다. 그게 집안 분위기였다.

  

“매정했던 최태민, 朴 앞에선 ‘사근사근’”

 

할아버지 최태민은 어떤 사람이었나.

 

기억 속 최태민은 늘 자신의 손바닥이나 무릎에 끊임없이 무언가를 쓰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말투는 차갑게 딱딱 끊어지고 매정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런 최태민이 박근혜 앞에서만큼은 말투는 물론 행동 하나하나 그렇게 사근사근할 수 없었다. 그래서 늘 어머니가 ‘정성도 저런 정성이면 닳겠다’고 했었다.

  

아버지가 최순실을 ‘남자 최태민’이라고 했는데 무슨 의미인가.

 

고모 최순실은 늘 ‘돈이 생명’이라고 말했던 할머니의 탐욕과 할아버지 최태민의 차갑고 특이한 성격을 모두 갖고 있다. 나쁜 점만 고루 닮았다. 안하무인 태도도 유별났다. 아버지한테도 늘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끊임없이 일을 시켰다. 그래서 참다 못한 아버지가 주변에서 최순실을 챙겨줄 똑똑한 사람을 찾다가 80년대 말 정윤회를 소개해 준 것이다.

  

아버지가 생전에 박근혜·최순실이 닮았다고 했는데 어떤 점을 말하는 건가.

 

자기 마음대로 해야 하는 성격이다. 그리고 애초에 사람을 차갑게 바라보고 자신의 필요에 따라 기능적으로 대한다는 점 등을 말한 거다.

  

어린 시절 사진 보면 가족끼리 화목해 보이는 것도 꽤 있다.

 

처음부터 가족관계가 비극적인 건 아니었다. 모두가 가난했을 땐 함께 열심히 살자 으으도 했고, 조금 돈이 생겼을 땐 오히려 더 화목해졌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10·26 사태 이후 엄청난 뭉칫돈이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면서 급격히 가족은 깨지고 갈리게 됐다. 그때 아버지가 그 돈 앞에서 철저히 배제됐던 게 지금으로선 천만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1974년 가족 나들이에 나선 모습. 앞줄 왼쪽부터 최순실, 조용래, 임선이, 뒷줄 두 사람은 최순천, 김경옥이다. © 조용래 제공

1974년 가족 나들이에 나선 모습. 앞줄 왼쪽부터 최순실, 조용래, 임선이, 뒷줄 두 사람은 최순천, 김경옥이다. © 조용래 제공


“10·26 이후 들어온 뭉칫돈에 가족 분열”

 

뭉칫돈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버지도 조심스러워 녹취록에 직접적으로 말하진 않았지만 돌려서 말한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개인 금고가 있었고 그 금고에 있던 돈을 사망 후 어린 영애 박근혜가 주변을 지키던 최태민에게 넘겼던 거다. 최태민 입장에선 서 있던 자리에 폭포수 떨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돈이 많아진 후 고모들과의 교류가 끊긴 건가.

 

박근혜라는 권력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고 그로부터 나오는 돈을 독점하기 위해 아버지를 더욱 경계했다. 1998년쯤 아버지 사업이 부도났을 때, 할머니가 딱한 마음에 고모들 몰래 8000만원 정도를 아버지 통장에 넣어준 적 있었다. 그런데 그 이체 내역을 최순실이 보고 돈을 도로 내놓으라고 난리를 쳤던 적 있다.

  

할머니 임선이는 계속 만날 수 있었나.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1999년이었다. 그 후 몸이 아파 계속 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그런데 나와 아버지는 돌아가신 사실을 1년이 지나서야 지인을 통해 우연히 알게 됐다. 그들은 말해 주지 않았다. 우스운 건, 할머니 상갓집에 장남과 장손은 없었는데 박근혜가 상복을 입고 3일 내내 그곳을 지키며 울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피가 거꾸로 솟는 줄 알았다.

 

 이들에 대한 재산환수가 이뤄질 수 있을 거라 보는가.

 

환수 시기와 범위를 특정하는 데 분명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부 환수해야 한다. 일정 시기 이후부터 환수하고 마는 건 결국 그 전의 오랜 부정부패를 눈감아주는 것과 다름없다.

  

최순실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돈에 관한 한 누구나 욕심이 있다. 그런데 최순실은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욕심을 지닌 사람이다. 이번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도 끊임없이 돈을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있었을 거다. 



‘나라 망한다’는 태극기 노인의 울분… “일단 그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

사회·정리 |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사진 | 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입력 : 2017.03.18 16:28:00

최현숙 구술기록자·독거노인생활관리사(왼쪽),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가운데), 이나미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오른쪽)이 3월 1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태극기 집회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최현숙 구술기록자·독거노인생활관리사(왼쪽),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가운데), 이나미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오른쪽)이 3월 16일 서울 정동 경향신문사 회의실에서 태극기 집회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태극기 집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 최현숙·김진호·이나미 3인 대담



해원(解寃). 가슴속에 맺힌 원통함을 푸는 일. 태극기 집회에 참여했다 돌아가는 노인들의 표정을 보자니 떠오른 단어다. 혼자 혹은 삼삼오오 와서 “대통령을 지키자. 빨갱이를 몰아내자”고 외치던 사람들은 광장의 거대한 태극기 물결을 확인하고 한 톤 더 밝아지고 후련해진 표정으로 돌아간다. 개인으로 존재하다 사회를 발견하고 가는 것은 촛불시민들뿐만이 아니다. 문제는 ‘그들의 사회’는 정상적인 우리 사회와는 분리된 무언가로 여겨진다는 점이다. 태극기 집회와 참여자들의 행태는 탐구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원(寃)은 사회 안에서 형성된다. 인구의 약 15%에 해당하는 집단이 이런 원통함을 공유한다면, ‘태극기 노인’의 울분이 형성된 역사적 과정이야말로 적폐 청산을 위해 들여다봐야 할 대상이다. 

<주간경향>은 태극기 집회의 의미와 노인세대 참여자의 심리를 들여다보기 위해 대담을 진행했다. 진보정당에서 오래 활동을 해왔고 현재 독거노인생활관리사이자 구술기록자로 70대 남성 노인의 생애구술사를 다룬 <할배의 탄생> 저자 최현숙씨(60), 한국의 보수정치 철학 연구자 이나미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연구위원(53), 한국 개신교 연구자인 김진호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55)이 함께했다. 대담은 3월 16일 오후 경향신문사에서 약 3시간가량 진행됐다. 대담자들은 “태극기 집회는 밀려난 사람들의 인정투쟁”이라며 “집회의 조직자와 참여자를 분리하고, 동정과 혐오 이분법을 넘어서 사안을 볼 것”을 주문했다. 

태극기 집회를 취재해 본 기자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일당 받고 나오는 사람들? 돈만으로는 절대로 저런 열정이 나올 수 없다.’ 1950년대 이전 출생한 세대의 일원들이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을 필사적으로 막아서기 위해 거리 행동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최현숙(이하 최) 태극기 집회에 일부러 참석했다. 노인들이 저렇게 열정적으로 모이도록 하는 것은 박탈감이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계기가 됐지만 근본적으로는 박탈감에 의한 인정투쟁이다. 자신들의 경험, 가치관, 신념이 사회적으로 인정되지 않고, 현대사회의 속도와 변화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멈출 수는 없으니 뒤로 가는 것을 원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박탈당했다는 것인가. 또한 박탈과 소외가 왜 하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을 매개로 광장으로 분출된 것일까.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은 자신들을 세조에 맞서 단종을 지키려 한 ‘사육신’이나 ‘의병’에 비유하면서 존재를 항변한다. 박정희 시대의 산업화가 아니라 그 이전의 왕정시대로까지 퇴행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서울에서 노인들이 대표적으로 모이는 곳은 종로3가의 파고다공원과 종묘공원이었다. 종묘공원은 조선 역대 왕조의 위패가 있는 공간이다. 파고다공원은 시민의 공원으로 만든다며 이들을 쫓아냈고, 종묘공원은 성역화 사업을 한다며 또 쫓아냈다.(종묘는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2007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진행해 화단과 펜스를 설치했다. 사회자 주)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노동자를 몰아낸 방식과도 같다. 종묘공원에서조차 노인들을 쫓아낸 것은 상징적이다. 쫓겨난 사람들이 종묘공원 커다란 나무 밑에서 놀이 삼아 한 자신들의 정치연설과 토론을 현재 광장에서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김진호(이하 김) 개신교 내부의 변화도 지금의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노인세대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은 아닌데, 보수 개신교인들의 집회는 크게 네 가지 부류가 있다. 첫 번째 부류는 1990년대 서울 강남·분당 등에서 성공한 대형교회 목사들이 동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명박 정권을 만들었지만 지금은 잘 동원이 안 된다. 지금 교회에서 장로 등을 맡는 부유하고 교육받은 40~50대는 성조기가 등장하고 목사가 동원하는 형태의 집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좀 더 세련된 방식을 원한다. 두 번째는 목사와 관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1960~70년대 경기 외곽에 기도원이 많이 들어섰는데, 주로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처지의 신자들이 모여 ‘메시아니즘’(구원자 숭배)에 가까운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신앙생활을 했다. 지하철이나 시내에서 막무가내로 전도하는 사람들은 이 부류가 많다. 역시 목사들이나 중산층 개신교인들은 이들을 싫어한다. 기도원들은 1990년대 거의 몰락했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대형교회가 시민단체에 자금을 대서 조직하는 청년·탈북자 집회다. 태극기 집회 참여자들은 두 번째 유형의 신앙행태와 매우 유사하다. 개신교뿐 아니라 천주교, 불교 등 한국의 메이저 종교들은 계층이동을 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가 1970년대 크게 성장한 이유는 가난하고 건강하지 못한 계층에 ‘하나님 믿으면 부자 되고, 건강해지고, 영적으로 편안해진다’며 포용한 결과다. 지금은 이런 가난한 신자들은 교회에서조차 받아들여지지 않고 떠돌다 열정을 쏟아낼 기회가 되면 자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나미(이하 이)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전쟁의 기억의 영향력이 크다. 내가 20대일 때도 당시 30대들과 말이 잘 안 통했다. 그들은 젊었을 때부터 보수적이었다. 저희 부모님도 70세가 넘으셨는데, 아버지의 경우 인민군이 전쟁 중 (군량미 명목으로) 쌀 낱알을 세면서 가져간 것을 아직도 기억하며 치를 떨고 있다. 물론 쌀 낱알을 가져간 건 인민군뿐만은 아닐 수 있다. 예전에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참여하면서 시골의 노인들을 인터뷰했다. 실제로는 한국군이나 미군에 의한 학살이 많았지만, 극단적 공포는 자신을 지배자와 동일시하도록 만든다. 위에서 말하는 대로 ‘모두 공산당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도 한 태극기 집회 참여자로부터 “우리가 돈 때문에 여기 나오는 거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들은 지금도 정말 정권이 바뀌면 북한이랑 친해지고 우리나라가 공산화될 것이라는 공포를 갖고 있다. 

노인세대는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전쟁을 겪고 극우 반공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대에 자아가 형성됐다. 이는 세월이 흘러도 잘 안 바뀐다. 1946년부터 한국전쟁 때까지 문헌을 보면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구분이 명확히 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후 남한이나 북한이나 잿더미 상태에서 사회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카리스마적인 리더가 전쟁의 기억을 조장했다. 공산주의에 대한 미움만 허용됐다. ‘국가가 허용한 기억’만 남는 것처럼 분노의 표출방식 역시 ‘국가가 허용한 형태’로만 남는다. 2000년대 초 몇몇 노인들이 저를 찾아온 적이 있다. 자식과의 갈등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그런데 자식에 대한 분노를 민주정권에 대한 분노로 표현했다. 자식에 대한 분노는 자신들이 나고 자라면서 강요받은 ‘가족주의’와 맞지 않는 것이다. 분노는 오직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만 허용됐고, 세대 간이나 가족 간 갈등을 해결하는 완충장치는 만들어지지 못했다. 좌우대결처럼 보이는 갈등은 사실 좌우대결이 아니라 다른 맥락일 수 있다. 

태극기 집회에서는 자기들끼리도 수틀리면 서로 ‘빨갱이’라고 욕한다.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면 그냥 ‘빨갱이’라고 부른 것을 몸이 기억하게 된 것이다. 

감정적인 문제는 크다. 2012년 대선후보 토론회에서도 젊은 사람들은 이정희 당시 통합진보당 후보가 논리적이고 말을 잘한다고 생각했지만, 나이 든 세대는 ‘저런 싸가지 없는 자식 같은’이라고 생각했다. 또 독일 나치나 트럼프 지지현상에서 보이듯 극우는 강력한 지도자를 열망하는 심성이 있다. 극우가 보수와 갈라지는 지점이다. 아까 ‘사육신’ 얘기가 나왔는데, 박정희 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사실상 군주제였다.(대담을 진행한 날 박 전 대통령 사저에서는 “마마님 죄송합니다”라며 절을 올리는 지지자도 있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강력한 군주는 너무 익숙하다. 

역시 분단이 원죄적인 측면이 있다. 박근혜는 하나의 계기였고, 전쟁 이전부터 시작된 권력자를 따르고 약자에게 공격성을 드러내도록 한 역사, 노인의 박탈감 등등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분노는 임계점에 달했는데, 사회적으로 치유하는 방법이 없다. 민주화 이후, 특히 IMF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와 만성적인 저성장 시대를 거치며 사람들의 불안이 가속화되고, 심리적인 위로·안정·영적인 것을 찾으려는 흐름은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종교계에서는 ‘뉴웨이브’라고 하는데, 문제는 이런 ‘영적인 위로’는 다 소비를 통해 이뤄진다. 가난한 노인들은 소비를 통한 위로에 동참할 수 없다. 과거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모이던 가난한 교인들의 경우 타악기 등으로 감정을 고조시키다 통곡하고, 그때 카리스마적 목사가 나와서 병자들을 치유한다. 무질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치유를 한다. 보건의료체계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유일하게 아는 치유의 방식인데, 지금은 그런 공간이 없다.


보수정권이 집권해도 노인의 박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노인 빈곤문제 등은 계속 진행됐다. 그들의 박탈감과 분노는 보수정권을 향하지 않는다. ‘태극기’를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는다.

순종을 내면화했던 세대다. 극우 집회가 극렬했던 때는 2003~2004년 무렵이었다. 김대중 정부를 거쳐 노무현 정부가 탄생하자 ‘정말 야권이 안 되길 바랐던 마음’이 격렬한 분노로 나타났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4·19 이후 5·16으로 좌절됐다. 이후 긴 독재기간에 광주민주항쟁까지 겪었다. 계속 패배의 역사였다. 반면 이후 세대는 승리와 상승의 경험이 많다. 87년 민주항쟁의 승리, 직선제 경험, 88올림픽, 월드컵 4강, 심지어 2008년 촛불집회에서도 당시 정부는 한 발 물러섰다. 세대 간 경험이 완전히 다르다.

노인들은 거꾸로 기억한다. 젊은이들이 ‘패배의 역사’로 기억하는 시대는 ‘나라를 만들기 위한 인고의 시대’였다. 기초연금 20만원을 준다고 했다가 안 준다 했을 때 대다수 노인 반응이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데, 청년들도 일자리 없다는데, 어떻게 우리만 달라고 하느냐’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봐야 할 요소로, 이 분들의 생애사에서 국가는 항상 불안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아예 없었고, 그 후에는 매일 좌우대립하다 전쟁하다 분단됐다. 보수의 경제정책이나 양극화를 비판하지만, 평생 가진 거 없었던 노인들은 그나마 기본적인 복지체계가 깔린 지금이 최선의 상태다. 남한에 남은 그들에게 이런 국가라도 잘 지키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래서 나는 태극기 집회에 대한 질문을 달리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청중과 마이크 잡은 사람들을 분리해야 한다. 그들이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태극기를 들었다? 청중들은 지킬 기득권이 아예 없다. 똑같이 계엄령을 말하더라도 그들이 광장에서 울면서 말하는 것은 정말 국가가 불안하다고 믿은 것이다. 일단 그 마음을 알아줘야 한다. 반대로 마이크 권력을 쥔 사람들이 무대에서 이런 발언을 할 때는 확실하게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사망이나 과격시위의 책임을 개개인들에게 돌릴 것이 아니고 뒤에서 활용하는 거대 장이 있다. 서북청년단 역시 김성수(<동아일보> 설립자)와 한민당 세력이 이들에게 숙소를 제공하고 야당집회에 가서 때려부수게 했다. 서청 입장에서는 폭력행위를 통해 미군물자를 얻을 수 있었다.

동의한다. 거리 전도사들 대부분이 남자 노인들이고 공통의 경험은 자식과의 불화다. 그런 분노를 젊은 여성에게 시비 걸고,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것으로 해소한다. 그것과 별개로 이런 소외를 증오로 엮는 증오의 선동가들을 경계해야 한다. 서북청년단 역시 월남한 청년의 분노를 누군가 선동해 살인자로 만든 것이다. 우리 사회에 그런 매개자들이 많다. 교회도 그 중 하나다.

노인세대의 울분과 박탈감은 사회와 가정으로부터 무언가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현대사회의 상식에 맞지 않는 요구까지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다. ‘알고 보면 태극기 나온 분들도 착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해결이 될까. 대화는 가능할까.

KBS 방송에서 본 것인데, 북한 이슈와 관련해 정확한 정보를 주고 토론을 시키면 때때로 토론은 난상으로 난리가 나도 결국 의견합일을 보고 사람들이 생각을 바꾸기도 했다. 희망적인 신호였다.


최 노인세대에게 이것이 가능할까 좀 회의적이다. 이 분들은 논리로 따라오지 않는다.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 다른 방식 중 하나가 ‘생애사’라고 생각한다.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왔나, 어떤 경로를 거쳐 정치적으로 보수화됐나, 왜 가난했을까 묻고 또 물어보며 현재 상태에 이르게 된 사회적 경로를 찾는 것이 필요하다. 예전(2008년) 총선 때 서울 종로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골목에서 명함 주고 설명하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선거는 시끄러운 것이고 자기 찍을 사람은 정해져 있다. 고무 다라이에 꽃 심고 상추 심는 게 낙이다. 거기 가서 ‘그 꽃이름 뭐예요? 상추 언제 심었어요?’라고 접근해야 한다. 마음을 열면 속내를 이야기한다. 정치 지향이 다른 거 알아도 ‘강정(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그거 어떻게 생각해?’ 물어본다. 노인은, 아니 모든 사람은 그렇게 움직인다. 복지정책 일일이 설명할 필요 없다. 노인들은 골목 안에서 공동체 문화로 사는 데 습관이 된 데다, 생존을 위해서 알아서 잘 찾아 다닌다. 못 나가고 집에 있는 건 무릎이 안 좋기 때문이다. 노인들 하는 말이 “무릎과 틀니만 괜찮으면 산다”고 한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이걸로 몇천원 벌어서 다 쓸 데가 있는 거야” 하면서 열심히 줍는다. 동정할 필요 없다. 젊은이들은 독거노인을 보면 ‘내가 저런 비참한 독거노인이 되지 말아야지’라고 생각하고, 언론도 그렇게 접근하지만, 독거노인은 독거가 젤 편하다.

사회적 돌봄 시스템은 확장돼야 한다. 내가 만나는 경우 절대고독 상태의 노인들이 많다. 특히 가족들로부터 소외된 남성 노인들이 그렇다. 

물론 잘 나가다가 추락한 남성 노인의 경우 복지체계에 편입되지 않았고, 자살과 고독사의 핵심이므로 개선돼야 한다. 또한 노인들은 서로 싫어한다. 무릎이 아파서 매일 TV만 보는 사람들에게 TV는 ‘고령화가 문제다. 노인이 많아서 문제’라고 하니까. 그런데 평생 가난했던 노인이나 여성 노인의 경우는 스스로 복지시스템에 편입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할배의 탄생>에 쓰여진 월남 참전용사 출신 할아버지는 선거에서 박정희(1960~70년대)와 김대중(1997년)을 찍었다. 박정희는 남자다워서 좋고, 김대중은 그의 탄압에 굴하지 않아 찍었다는 것이다. 다들 자기 기준이 있다. 동정이건 혐오건 ‘노인들은 다 똑같다’고 보는 시선이 대화의 가장 큰 장벽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인에 대한 동정과 시혜적 시선에 반대한다. 그걸 뒤집으면 혐오다. 

우리 사회는 노인을 사회의 군더더기로 본다. 반면 실질적으로는 1:9 또는 2:8의 여론을 반영하는 태극기집회와 촛불집회를 최소 반반의 지분을 차지하는 ‘세대갈등’인 것처럼 보도해 탄핵국면에서 나오는 경제민주화·재분배 등의 요구를 방어하는 데 활용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반대 여론이 15%다. 집회 규모를 보면 이 정도 인구에서 엄청 많이 나온 거다. 무시무시한 결집도다. 더구나 노인인구는 늘어난다. 지금이야 탄핵국면이니 ‘수구정당 안 되겠지’라고 하다 언제 뒤집어질지 모른다. 이런 게 반복되면 엄기호 선생 말대로 ‘일상의 울증과 광장의 조증’도 반복된다. 일상적으로 전혀 문제 해결이 안 되다가 일 터지면 광장에서 폭발하는 것이다. 노인하고 대화해야 하는 이유다. 


두 분의 말씀에 동의한다. 더불어 ‘증오의 선동가들을 어떻게 솎아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노인들이 가진 속성을 나쁘게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노인뿐 아니라 청년, 탈북자 등 여러 계층이 이들의 표적이 된다. 저는 NGO에 대한 투명성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본다. 어떻게 활동하고, 국가든 교회든 이들을 어떻게 지원하는가 이런 것들이 상시적으로 투명하게 밝혀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