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세상 - 굶고 때우고 견디는 청년 ‘흙밥’ 보고서

일취월장7 2017. 3. 9. 10:07

개천에서 용이 나지 못하는 세상

중국에서 받아들인 과거제도는 조선 초기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40~50%에 이르렀다. 하지만 점차 기득권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현재 대학 입시도 비슷하다.

김형민 (PD)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01일 수요일 제493호


국사 시험문제 하나. “고려 광종 때 도입되었으며 후주의 귀화인 쌍기의 권유로 채택했던 관리 선발제도의 이름은?” 0.1초 만에 대답할 수 있을 거다. “과거제도!” 맞아. 과거제도의 시작은 중국 수나라 문제 때야. 그는 400여 년 동안 5호 16국과 남북조 시대라는 극심한 혼란에 시달려온 중국을 다시 하나로 통일한 황제지.

사면팔방으로 찢어진 천하를 하나로 묶어놓으려면 강력한 중앙권력이 필요했지. 각지에서 여전히 똬리를 틀고 있는 세력들도 견제해야 했던 수나라 문제는 583년 각 주에 명령하여 매년 3명을 천거하게 하고 시험을 보아 성적에 따라 관직을 내리는 제도를 실시해. 처음에 선거(選擧)라고 불리던 이 제도는 이후 과거(科擧)로 이름을 바꾸고 확대 실시되면서 중국의 전통적 관리 임용제도로 천몇백 년 동안 유지된단다.

‘시험을 보아 실력을 가려 인재를 선발한다’는 원칙이 지구는 둥글다는 얘기만큼이나 당연해 보이지? 하지만 중국 문화권을 벗어나면 과거는 무척 획기적이고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제도였어. 유명한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가 “중국의 과거제도는 인재들을 시험을 통해 고용하기 때문에 평등한 제도이며, 엄격한 시험을 거쳐 구성원을 선발하는 정부보다 나은 정부는 어디에도 없다”라고 부러워했지.

ⓒ연합뉴스
2016년 10월16일 서울 경희궁에서 열린 조선 시대 과거시험 재현 행사.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과거제도는 조선 초기에는 신분이 낮은 급제자의 비율이 전체의 40~50%에 이르렀고 중반에는 주춤했다가 말기에 이르면 다시 그 비율로 회복되는 등, 이른바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고 해. 외국 사람들이 놀라는 한국 사람들의 높은 교육열이란 어쩌면 이 과거제도의 장구한 전통의 잔상이라고 할 수도 있을 거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자식이 글 읽는 소리(子弟讀書聲)”라고 했듯, 총명한 자식이 공자 왈 맹자 왈 책을 줄줄 외운다면 고관대작이건 산골짝 농부건 목숨을 걸고 과거 공부를 시켰을 테고, 실제로 ‘가문의 영광’을 이룬 사례가 많았다고 하니 말이야.

원칙적으로 천민이 아닌 양인들, 즉 농민은 물론 수공업자나 상인들까지도 과거를 볼 수는 있었다지만 실제로 한글도 아닌 한자로 하는 공부를,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해 책을 일일이 필사하기 일쑤였던 시절에 과거제도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제한돼 있었어. 더하여 ‘시험’의 생명이라 할 공정성마저 흔들렸다면 과거제도는 ‘개천에서 용이 나는’ 시스템이 아니라 용 될 일 없는 이무기들의 헛된 희망을 소비하는 무대로 바뀌었다고 보는 편이 맞지 않을까. 다산 정약용 선생의 말씀을 들어보자.

“명문거족의 자제들은 이를 공부하려 하지 않고 오직 저 시골구석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만이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문예를 겨루는 날에는 권세가의 자제들이 시정의 노예들을 불러 모아 (중략) 이들은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휘두르며 주인의 시험지를 먼저 올리기 위해 첨간만 바라보고 서로 앞을 다투어 몽둥이질을 한다. 합격자를 발표할 적에 보면 시(豕)자와 해(亥)자도 구분하지 못하는 젖내 나는 어린애가 장원을 차지하게 되기 일쑤다(<조선의 뒷골목 풍경> 강명관 지음, 푸른역사 펴냄).”

ⓒ연합뉴스
서울 대치동 학원가 논술학원 앞에 줄지어 선 학부모와 학생들.

조선 정조 때쯤이면 과거 시험장에 몰린 수험생 수가 10만명에 달했다고 해. 그런데 수험번호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시험 답안지를 빨리 낼 수 있는 ‘좋은 자리’ 잡기 쟁탈전이 벌어졌는데, 명문거족 집안에서는 미식축구 선수들처럼 몸싸움 잘하는 ‘떡대’들을 내세워 그 도련님들 자리를 맡도록 했다는 것이지. 그 외 대리시험이나 답안지 바꿔치기 같은 부정행위는 이루 헤아릴 수도 없었어.

경화거족의 ‘사륙문’은 지금의 ‘사교육’

그런데 고관대작들로서는 이 부정행위를 하는 것도 귀찮아졌던 모양이야. 넉넉한 호수에서 노닐던 그들은 각지의 개천들을 말려버림으로써 개천의 용을 멸종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식이었다. “서울 선비들은 사륙문(중국의 육조와 당나라 때 유행한 한문 문체, 4자로 된 구와 6자로 된 구를 배열하기에 사륙문이라 불린다)을 익혔으나 시골 선비들은 그것을 제대로 배울 방법이 없었다. 이렇게 해서 경화거족들(서울에 뿌리내린 명문세족들)은 자기 자식들에게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급제할 수 있는 길을 넓혀주었고, 그럼으로써 자기들만의 서울, 자기들만의 나라를 만들어나갔다(<서울은 깊다> 전우용 지음, 돌베개 펴냄).” 이런 비열한 ‘갑질’의 결과는 정조 임금의 다음과 같은 탄식이었어. “급제하는 이들은 모두 남산과 북악 사이의 집안 자제들뿐이로다.” 왈패들을 돈 주고 사서 “우리 도련님 나가신다. 길 비켜라” 하는 것도 우세스럽고, 엽전깨나 쥐여주고 공부만 한 선비를 사서 대리시험 치르기도 뭣했던 조선의 ‘갑님’들은 마침내 합법적이고 우아하게, 객관적인 실력으로 촌놈이나 미천한 개천 놈들의 도전을 차단하고 그들만의 리그를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던 거야. 시간이 갈수록 혜택을 보는 이들은 또 그 안에서 줄어들었고 종국에는 안동 김씨 세도 같은 막장과 만나게 되는 거지. 과거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던 정약용도 어떤 면에선 기득권에 집착하는 양반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사대문 밖으로 나가지 말고 버텨라. 서울을 벗어나는 순간 기회는 사라지며 다시 일어서기 어렵다”라고 자식들에게 당부하고 있으니 말이야.

이렇게 얘기하다 보니 문득 아빠가 어느 시절 얘기를 하고 있나 헛갈린다. 아빠가 대학생 때에도 부정입학은 많았는데 태반은 대학 당국에 돈을 쥐여주고 입학시키는 형태였고 가끔 대리시험 등도 있었지. 적발될 가능성도 많았고 실제로 꽤 여럿 들통이 나서 망신살을 사고 쇠고랑을 차곤 했어.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런 뉴스는 사라졌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넉넉한 사교육을 통해, 풍족하게 쌓인 스펙을 통해, ‘할아버지의 부와 엄마의 정보력과 아빠의 무관심’을 겸비한 ‘인재’들이 주로 대한민국이라는 하늘을 휘저을 ‘용’들이 될 수 있었으니까.

조선 후기 서울 양반들이 차별화된 능력의 근거로 이용했던 ‘사륙문’은 우리 시대의 ‘사교육’으로도 대변될 수 있을 거야. 한 달에 기백만원 드는 영어 유치원에서 네이티브 스피커들과 어울리며 자라고 맘 내키면 한 몇 년 해외 연수를 다녀온 ‘인재’와 냉장고에 단어장 붙여놓고 애플, 엘리펀트 읽으며 영어를 시작한 ‘둔재’가 어찌 상대가 되겠니. 또 정조가 탄식한 ‘남산과 북악 사이의 자제’들은 그 이름도 유명한 ‘대치동’이나 ‘중계동’이나 ‘목동’ 아이들로 바꿔 읽을 수 있고, 특수목적고등학교니 자율형사립고등학교니 하는 명찰로 대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른바 자본주의 사회에서 능력 있는 자가 성공하는 건 당연하다고 말하지. 하지만 그 명제는 기회의 평등과 평가의 공정함 위에서만 반듯할 수 있어. 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사회에서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 말처럼 ‘돈 있는 부모’나 ‘빽 좋은 부모’가 실력을 구성하게 되고, 그 나라는 머지않아 망하게 돼. 바로 조선이 걸었던 길이지. 오늘 영화 보러 가자는 아빠 말에 대한 네 대꾸가 가슴이 아팠다. “고등학교 가니까 주말에 노는 습관을 줄여야 돼.” 네가 넘기는 영어 단어집이 눈을 찌르는구나. 앞으로 그 단어들을 일상으로 체득해 영어에 능숙한 아이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굶고 때우고 견디는 청년 ‘흙밥’ 보고서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다 다시 미래를 잃는 청년이 더 이상 없게 하는 것. 그것들의 시작이 바로 ‘밥’이고 ‘청년 식사권’이다. <시사IN>은 그 첫 순서로 ‘흙밥’ 먹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제494호에서는 빼앗긴 청년들의 식사권을 사회가 되돌려주는 방법들을 찾아볼 예정이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2017년 03월 01일 수요일 제493호

“지금까지 먹었던 음식 중에 정말 흙수저 같았던 음식은 뭐예요?” 지난 1월15일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오늘의 유머’에 질문 하나가 올라왔다. 순식간에 댓글 수십 개가 달렸다. “밥 한 숟가락에 굵은소금 한 개씩 넣어 먹은 거요” “물에 카레가루만 풀어서 끓여 마셔본 적 있네요” “자취할 때 물 끓여서 다시다만 넣어 먹은 적 있어요” “자취 대학생인데 아리수 먹고 3일 굶은 거요” 정도는 양반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라면에 밥 말아먹으라는 용도로 파는 500원짜리 공깃밥을 하나 사고 스낵코너에 비치된 단무지 몇 개를 반찬 삼아 구석에서 ‘찌그러져’ 먹었다는 대학생, 밥과 쌈장과 올리브 통조림만으로 한 달을 버텼다는 자취생, 폐기하려고 냉동실에 얼려둔 삼각김밥 3개를 너무 배가 고파 녹이지도 않은 채 부숴서 먹었다는 전직 편의점 아르바이트생, 일하던 한식당에서 손님이 남기고 간 육회가 꿀맛이어서 슬펐다는 유학생, 웨딩홀 혼주 음식은 질이 좋아서 먹다 남은 것도 맛나다는 웨딩홀 아르바이트생, 방값과 면접교통비에 쪼들려 지금도 라면 수프와 고시텔 밥으로 며칠째 연명하고 있다는 취업준비생…. ‘ㅋㅋ’와 ‘^^;’와 ‘ㅠㅠ’가 뒤섞인 청년들의 이 ‘흙밥’ 경험담은 어느 개인의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시사IN 윤무영
동서고금 젊은이들은 늘 끼니를 ‘때우며’ 살았다. 배고픈 이들은 청년 말고도 많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청년들이 먹는 흙밥에는 몇 가지 특수한 요인들이 있다. 고비용 대학 교육, 취약한 노동(아르바이트) 환경, 길어진 취업 준비 기간, 열악한 주거 여건 등이다. 이 모든 조건 속에서 청년들은 제대로 밥을 챙겨 먹기 위해 필요한 돈과 시간과 심리적 여유, 이른바 ‘식사권’을 잃었다. 아니, 정확히는 빼앗겼다.

우리들의 배고픈 ‘우골탑’


한양대학교 졸업생 이호영씨(27)는 친구 A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A의 다른 친구 B가 생활이 어려워 A가 매일 한 끼 식사를 도와준다는 것이었다. A가 학교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면 친구 B가 옆에서 기다렸다가 A가 비운 식판을 갖고 배식대로 가 밥과 반찬을 리필받아 먹는 방식이었다.

B처럼 밥 한 끼 마음 편히 먹지 못하는 친구들이 실제 대학 내에 많다는 사실을, 이씨는 2014년 2월 ‘십시일밥’이라는 대학 내 봉사단체 활동을 시작하면서 절감했다. 십시일밥은 대학생들이 공강 시간에 학교 식당에서 봉사활동한 대가로 식권을 받아, 그것을 식사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에게 나눠주는 비영리 민간단체이다. 일시적인 봉사활동으로 생각하고 꾸린 이 단체가 3년째 전국 29개 대학으로까지 확산될 줄 이씨는 예상하지 못했다. ‘자존심 센 대학생들이 과연 식권을 신청할까’ 반신반의했지만 수요는 넘쳐났다. 지금껏 1900여 명에 이르는 ‘밥 못 먹는’ 대학생들이 십시일밥에 식권을 요청했다.

ⓒ연합뉴스
1월15일, 서울 노량진동 경찰학원 앞에서 공시생들이 고정자리 배정을 기다리며 공부를 하고 있다.
대학생은 더 이상 특권층이 아니다. 한때 엘리트 교육의 장이라 불렸던 고등교육기관에 다니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지출하는 비용 때문에, 대학생은 특권층이 되기는커녕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는 빈곤층 신분에 가까워진다. 이에 가장 큰 기여를 하는 것이 한 해 최고 999만원(2016년 명지대·입학금 포함)에 육박하는 대학 등록금이다. 연세대 988만원, 중앙대(제2캠퍼스) 955만원, 이화여대 942만원 등 우리나라 대학 등록금은 가히 ‘세계 2위’(2015 OECD 교육지표 조사 결과)를 찍을 만큼 최고 수준이다.

한 해 1000만원씩을 턱턱 내줄 수 있는 부모를 만나지 못한 청년들은 대학생이 되기 위해 빚을 질 수밖에 없다. 지난해 전국 대학·대학원생 24만8796명이 7861억5700여만원에 이르는 정부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대학알리미 ‘학자금 대출 현황’ 통계). 민간 금융기관에서 받은 학자금 대출금을 더하면 그 수치는 훨씬 더 커진다.

공부하기 위해 빚진 청년은 결국 굶는다. 부채 세대 연구서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천주희 지음, 사이행성 펴냄)에 등장한 대학생 서현민씨(가명·25)는 군 제대 후 복학하며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더 이상의 학자금 대출을 받지 않기 위해 그는 장학금을 타야만 했고, 장학금을 타기 위해서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했다. 공부하느라 바쁜 그에게 ‘일단 나가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먹어야 하고, 다시 도서관으로 올라가야 하는’ 밥 먹는 시간이 너무 아깝다. 그래서 서씨는 아침 8시30분부터 저녁 8시까지 커피만 마시며 밥을 굶는다.

ⓒ시사IN 조남진
고시원처럼 음식 조리가 불가능한 청년들의 열악한 주거 환경이 부실한 식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람이 일을 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데…

흙밥을 먹기 싫으면 일을 해서 돈을 벌면 된다. 그래서 많은 청년들이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밥을 먹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는 도무지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다.

휴학생 김원진씨(가명·22)는 매일 아침 6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아침과 점심, 매일 두 끼를 걸렀다. 사장은 카페에서 키우던 개에게는 수시로 치킨과 소시지 등 간식거리를 챙겨주었지만 아르바이트생들에게는 빈말이라도 “밥 먹고 왔니?”라고 물어보지 않았다.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 수습 기간 15일 동안 가게 앞 주먹밥 집에서 2000원짜리 주먹밥을 먹을 수 있게 해준다던 사장은,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주먹밥 먹는 모습을 보고 “저게 밥값까지 나가게 하네”라고 중얼거렸다. 김씨는 눈치가 보여 배가 고파도 주먹밥을 먹지 않았다.

카페 일이 오후 1시에 끝나도 그에게는 또 다른 아르바이트가 기다리고 있다. 오후 4시부터 밤 10시까지 이어지는 학원 보조교사 일이다. 두 아르바이트 사이 시간에 모자란 잠을 보충하다 보면 하루 중 유일한 식사 기회(점심 겸 저녁)도 놓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편의점에 들러 허겁지겁 삼각김밥을 사먹었다.

아르바이트 노동조합 알바연대알바노조에 접수된 사례들 중에는 김씨처럼 식사권을 빼앗긴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경험담이 차고 넘친다. 어느 프랜차이즈 스테이크 식당 아르바이트생은 오전 11시~오후 3시 근무를 끝낸 뒤 주어지는 식사 시간 30분 동안에도 손님을 맞고 계산을 하느라 밥을 먹지 못했다. 그 시간에
요즘 청년들은 ‘먹는 문제’에 날이 서 있다.
는 분명 임금이 지급되지 않는데도 말이다. 사장은 아르바이트생의 ‘무급’ 식사 시간 30분 동안 다른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하지 않았다.

한 프랜차이즈 빵집 아르바이트생은 근무 중 식사로 늘 폐기 처분된 빵을 제공받았다. 어느 날 그와 동료 아르바이트생들은 실수로 비폐기 제품 1만원어치를 나눠 먹었다. 사장은 빵을 훔쳤다고 노발대발하며 경찰을 불렀다. 그 아르바이트생은 즉결심판으로 벌금 5만원을 선고받았다.

‘일 시킬 때는 가족이고, 밥 먹을 때는 남인’ 고용주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많이 해봤다는 취업준비생 신승율씨(가명·29)는 ‘밥 못 먹는 알바생’이 많은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회가 ‘너희들이 밥을 먹든 말든, 생존하든 말든 알 바 아니다. 우리는 노동력을 돈 주고 구매했고 최대한 뽕을 뽑으면 그만이다’라는 마인드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람이 일을 하려면 밥을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길어진 취업 준비 기간만큼 늘어난 ‘흙끼니’


청년들이 생각하는 지속 가능한 흙밥 탈출구는 ‘정규직 취업’이다. 매일 3000~40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운다는 취업준비생 송유민씨(가명·28)는 “정규직으로 취업한 친구들을 보면 그나마 먹는 게 확 나아지더라. 나도 어떻게든 빨리 취업해서 점심때 맛있는 중국집도 가고 저녁 회식 때 고기도 구워먹어야겠다는 일념으로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청년 백수의 고진감래는 쉽게 실현되지 않는다. 2월13일 서울연구원이 발표한 ‘서울시 청년들의 취업과 창업’ 자료에 따르면 서울시 거주 18~29세 청년 취업 경험자 가운데 정규직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단 7%에 그쳤다. 올해 9급 공무원 시험에는 역대 최대인 22만8368명이 지원했다. 경쟁률은 26.5대1에 달한다. ‘점심으로 중국집, 저녁으로 삼겹살 회식’이 가능할 정도의 일자리 문을 뚫지 못한 이른바 ‘취업 N수생’들은 서울 노량진 등지에 점점 많이, 또 오랫동안 누적되고 있다.

길어진 ‘준비’ 기간에도 하루 삼시 세끼는 꼬박꼬박 찾아온다. “취직을 했든 안 했든 20대 후반쯤 되면 부모한테 더 이상 손을 벌리면 안 되잖나. 그러니 식비라도 줄여서 버티려고 한다”라고 공무원 시험 준비생 강선혜씨(가명·27)는 말했다. 강씨는 한 달 식비를 20만원으로 제한했다. 강씨는 올해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을 때 식비 대책에 대해선 답을 하지 못했다. “그땐 다시 아르바이트를 하든지 해야죠, 뭐.” 강씨는 시험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지난해 아르바이트를 중단했다.

가난하다고 왜 모르겠는가, ‘집밥’의 소중함을

흙밥에 질렸다는 자취 대학생 정시원씨(가명·25세)는 오랜 기간 궁리한 끝에 ‘저비용’과 ‘건강’ 두 측면을 모두 살릴 방법을 찾아냈다. 식재료를 구입해 무조건 집에서 조리를 해먹는 것이다. “마트에서 저렴한 제품 위주로 쌀, 달걀, 두부 등을 구입하니 열흘에 4만원, 한 달 12만원이면 식비가 해결됐다. 편의점이나 학교 식당에서 사먹는 것보다도 훨씬 적게 들더라.”

다만 조건이 있다. 아무리 바빠도 점심시간에는 무조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 조리를 해야 하고, 음식물 쓰레기가 거의 나오지 않도록 식재료를 써야 한다. 정씨는 자신이 주변 친구들에 비해 여건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조리를 하고 식재료를 관리하는 데 매우 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다. 이게 가능하려면 일단 학교나 직장에서 집이 아주 가까워야 하고, 조리가 가능한 주방도 있어야 하고, 알바를 하지 않는 시간도 확보돼 있어야 하는데 주변 많은 친구들의 상황이 그렇지 못하다.”

조리가 용이한 환경에서 사는 청년은 그리 많지 않다. 지난해 청년 식생활 연구 모임 ‘끼다(끼니를 다함께)’는 서울청년정책네트워크 사업으로 ‘청년 독립생활자 식생활 실태에 관한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서울시 1인 가구 청년들은 좁고(72.9%), 환기시설이 부족하고(40.3%), 불만족스러운(56.3%) 부엌에서 혼자(65.6%), 불규칙하게 밥을 먹고(76.6%) 있다.

어떻게든 밥을 지어 먹고 살려는 발버둥은 지금 청년들이 처한 주거 현실에서 가끔 치명적인 ‘무리수’가 되기도 한다. 어느 겨울, 서울 한 고시원의 전기차단기가 내려갔다. 어떤 방에서 전기를 많이 써서 과부하가 걸린 것이다. 주인 할머니가 범인을 색출해냈다. 방에 쌀 한 포대와 전기밥솥을 갖다놓고 몰래 설거지하며 끼니를 이어가던 고시생이 ‘딱 걸렸다’. 원래 고시원에서 전열기나 취사도구 사용은 금지돼 있다. “추운 겨울날, 주인 할머니가 전기밥솥을 안은 고시생을 얼마나 매정하게 쫓아내던지 보는 내가 다 불쌍했다”라고, 그 사건을 목격한 취업준비생 신승율씨(가명)가 말했다.

젊음을 저당 잡은 청년들의 빚, ‘흙밥’

‘슬픈 전기밥솥 고시생’은 식사권을 지키려다 주거권을 잃었지만, 청년들 대부분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식사권을 포기한다. 취업준비생 송유민씨(가명)는 “수중에 돈이 떨어졌을 때 가장 줄이기 쉬운 게 식비다. 방세는 고정되어 있고, 통신비나 사회생활비를 줄이기도 싫다. 밥 한 끼를 굶을지언정 친구들과 모여서 놀 때에 ‘돈 없다’고 티내긴 싫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청년들은 식사권을 포기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젊고’ ‘건강하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젊어서 한두 끼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요.” “어린이나 노인과는 달리 우리는 젊고 튼튼해서 배고픈 걸 좀 잘 견딜 수 있으니까요.” 취재 과정에서 만난 흙밥 먹는 젊은이들이 식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 공통적으로 했던 말들이다.

그런데 이는 가난한 청년들에게는 또 하나의 빚이 된다. 경제교육협동조합 푸른살림의 박미정 대표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청년들과 재무 상담을 하다 보면 자신의 젊음과 건강을 믿고 대부분 식비를 최후 순위로 두더라. 하지만 이는 결국 훗날 의료비 지출과 지속 가능한 소득 창출의 걸림돌로 작용한다. 젊은 시절 부실한 식사로 만성질환자가 돼 돈을 벌기 힘든 사례를 많이 봤다”라고 말했다.

아르바이트 때문에 하루 두 끼를 걸렀던 휴학생 김원진씨(가명)는 “당시 많이 어지럽고 몸이 안 좋아져 결국 오후 아르바이트까지 그만두고 쉬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강박적으로’ 자취방에서 집밥을 조리해 먹는다는 대학생 정시원씨(가명)도 동기가 있었다. “재수 시절 고시원에 살면서 편의점 바나나 한 개로 하루를 견디며 살았더니 ‘이렇게 살다간 죽겠다’ 싶었다. 결국 공부를 그만두고 고향 집으로 요양을 가게 되면서, 앞으로 지속 가능하게 먹고살려면 일단 지금 먹을 것부터 잘 챙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빽다방 커피 한 잔에도 ‘울컥’

청년들이 밥을 가장 후순위에 둔다는 사실이 곧 그들이 먹는 문제에 초연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프랜차이즈 커피점 ‘빽다방’에서 1500~2500원짜리 커피를 자주 사 마셨다는 한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이 도서관에서 받은 포스트잇(위 사진) 하나가 화제가 되었다. 포스트잇에는 “공시생인 거 같은데 매일 커피 사들고 오시는 건 사치 아닐까요? 같은 수험생끼리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느껴져서요. 자제 좀 부탁드려요”라고 쓰여 있었다. 남이 먹는 커피 한 잔을 사치로 규정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만큼, 지금 젊은이들은 ‘먹는 문제’에 날이 서 있다.

대학원생 유세정씨(가명·26)도 스스로 먹는 문제에 예민하다고 말했다. “친구들이 ‘밥 먹자’고 할 때 항상 지갑 사정을 생각하고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린다. 내가 오늘 여기에 얼마 이상을 쓰면 안 되고, 만약 넘기면 뭘 포기해야 될지…. 특히 모임이 1차, 2차, 3차로 넘어갈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는데 친구들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일 때 많이 짜증나고 우울해진다.”

“우선 ‘맛있는 것’을 먹기로 했다”

꼭 빚을 다 갚지 않아도, 취직하지 않아도, 성공하지 않아도 청년들은 맛있는 밥을 먹어도 된다.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자전적 산문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를 연재하는 만화가 김보통씨가 백수가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줄인 것 역시 식비였다. 그는 이어 이발, 옷, 영화 등을 포기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씨는 팬티 바람으로 부엌에 서서 식빵에 피어난 곰팡이를 뜯어내며 ‘착실하게 스스로의 존엄을 바닥에 내려놓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찌해야 이 빈곤의 입구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한참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중국집에 전화를 걸었다. “탕수육 소자에 짜장면 하나요.”

“우선은 맛있는 것을 먹기로 했다. 그래야 바닥에 내팽개쳐진 내 존엄을 다시 챙길 수 있을 테니까. 맛있는 것을 먹고 나면 기분이 좋아질 테니, 기분이 좋아진 상태에서 하고 싶은 ‘작은 일’을 하면 된다(김보통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제12화 ‘식빵맨의 하루’).”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먼저 버렸던 밥을, 상황이 좋아졌을 때 청년들은 또 가장 먼저 챙긴다. <우리는 왜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가>의 저자 천주희씨는 청년 부채 연구의 한 참여자가 학자금 대출금을 모두 갚았을 때 가장 먼저 늘린 게 ‘식비’였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단순히 수입이 늘어서나, 빚을 다 갚아서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사먹어도 괜찮다는 심리적 안정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모든 것의 시작이다.


“돌도 씹어 먹을 나이? 밥상 뒤엎어라”

<시사IN> 제493호 ‘굶고 때우고 견디는 흙밥 보고서’ 기사를 통해 흙수저 청년들의 부실한 밥상 실태를 살펴보았다. 이번 호에서는 빼앗긴 청년들의 식사권을 돌려받는 방법을 궁리해본다.

변진경 기자 alm242@sisain.co.kr 2017년 03월 08일 수요일 제494호

3년 전부터 전국 대학생 2520여 명이 수업이 없는 공강 시간에 각자 학교 식당을 찾았다.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 이들은 식당 배식원과 세척원 등으로 변신했다. 그렇게 자투리 시간 학교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르바이트해서 번 임금을 식권으로 받았다. 그리고 기부했다. 대학생들의 자발적인 봉사로 한 장 두 장 모인 식권 1만9000여 장은 3000원 내외의 밥조차 사먹기 부담스러운 대학생 1900여 명에게 전달됐다. 대학생 봉사단체 ‘십시일밥’이 한 일이다. 이 단체가 내건 모토는 ‘나의 공강 한 시간이 내 친구의 밥 한 끼로’이다.

십시일밥을 창립한 이호영 전 대표(27·한양대 졸업생)에게 어른들은 종종 “왜 대학생들 밥까지 도와줘야 하나?”라며 딴죽을 걸었다. “대학생은 스스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밥 사먹을 수 있는 사람들 아닌가”라는 비판이었다. 학교 식당에서 친구가 비운 식판에다 밥을 ‘리필’해서 먹는다는 가난한 대학생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처음 활동을 구상했다는 이호영 전 대표는 “우리 눈에 잘 띄지 않지만 밥 한 끼 마음 편히 먹기 힘든 친구들이 주변에 분명 많을 거라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십시일밥 제공
대학생 봉사 단체 ‘십시일밥’의 활동 모습.
예상이 맞았다. 단기 프로젝트로 한양대에서 출발한 십시일밥은 높은 수요 때문에 3년째 전국 29개 대학으로 퍼지며 ‘끝’을 내지 못하고 있다. 이 대표는 식권 판매대에서 십시일밥 봉사를 하면서 청년들의 생생한 ‘흙밥’ 실태를 자주 목격했다. “학교 식당 스낵 코너에서 라면과 밥 한 공기를 사면 1800원이다. 당연히 많은 학생들이 별미로 가끔 사먹는다. 그런데 학기 내내 매일 그것만 사먹는 친구를 봤다. 라면이 좋아서 그러지는 않을 것 아닌가.”

십시일밥에 참여한 봉사자들이 친구들에게 제공해준 것은 단순한 ‘밥 한 끼’가 아니다. 십시일밥 수혜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답변자 중 66%가 “식권을 받지 않았더라면 추가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을 것”이라고 답했다. 수혜자들은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인 만큼 실질적인 공부 시간을 확보’(80%)했고, 또 ‘식권을 받아 아낀 돈을 자기계발·학습비 등의 미래를 위한 투자에 썼다’(83%). 청년들에게 밥은 곧 ‘미래’였다.

십시일밥은 대학 내의 작은 민간단체다. 대학생들이 서로를 돕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불가능하다. 이호영 전 대표도 한계를 명백히 인식했다. “십시일밥을 시작할 때부터 목적은 ‘이슈 레이징’이었다. 밖에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친구들이 밥을 못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라도 이렇게 돕고 있습니다. 학교와 정부, 사회가 이 문제를 알고 해결해주십시오.’”

대학이 부유해질수록 학생들은 배고파진다

하지만 대다수 대학에 배고픈 학생이란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수익의 원천’이다. 대학 내 외식업체 등 외부업체 입점률이 이를 방증한다. 대학교육연구소가 2015년 12월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서울 지역 대학에 입점한 일반·휴게 음식점은 310곳에 달한다. 아워홈·신세계푸드·GS리테일 등 대부분 대기업 계열 외식 사업체다. 대학은 학생들이 낸 등록금으로 멋들어진 건물을 지어 목 좋은 곳에 이런 업체들을 입점시킨 뒤 매달 임대료를 받는다. 지난해 전국 196개 사립대학이 임대사업과 같은 법인 수익사업으로 벌어들인 돈은 2조9817억원. 그 돈은 결국 ‘소비자’인 학생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 대학이 부유해질수록 학생들은 배고파진다.

다행히도 일부 국립대학 몇 곳은 그래도 학생들 밥을 챙긴다. 전남대·서울대 등에서 실시하는 ‘1000원 식사’가 대표적이다. 2월23일 저녁 6시,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식당은 방학인데도 저녁 식사를 하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식당에 들어오는 학생 대부분은 B코너로 향했다. A·B·C 코너 가운데 B코너 메뉴는 가격이 단돈 1000원이다. 이날 메뉴는 카레라이스와 부추무침·샐러드·김치였다. 밥과 반찬 리필도 가능하다. 서울대학교 박여진 영양사는 “그나마 지금 방학이라 한산한 편이지, 학기 중에는 700명까지 길게 줄을 선 적도 있다. 서울대는 학교가 넓어 각기 가까운 식당에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은데 1000원 식사 시행 이후에는 먼 거리의 단과대 학생들도 일부러 찾아온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신선영
ⓒ시사IN 신선영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는 학생들이 경제적으로 부담 없이 식사를 할 수 있도록 2015년 6월부터 ‘1000원 식사’를 시작했다. 2월23일 저녁 서울대 학생회관 식당에서 학생들이 식사하고 있다.
서울대는 2015년 6월부터 1000원 식사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경제적 부담 없이 건강한 대학 생활을 하며 인재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처음에는 아침 식사에 한했다가 지난해 3월부터는 저녁 식사까지 확대했다. 한 끼 식사 단가 2200원 가운데 1200원을 학교발전기금에서 충당해, 지금껏 16만여 끼니를 1000원에 제공했다. 아침과 저녁 식사 모두 시행한 지난해 기준으로 2억여원 남짓한 예산이 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복지 지출에도 학생들 만족도가 높았다. 서울대 학생처 장학복지과 최명선 주임은 “어떤 학생들은 등록금 동결에 비견될 만큼 자신들에게 직접 도움이 되는 복지정책이라고 하더라”며 학생들의 만족도를 전했다.

‘1000원 식사’는 서울대에 앞서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처음 실시했다. 2015년 4월부터 전남대는 매일 본교 식당 두 곳, 여수캠퍼스 식당 한 곳에서 단가 2000원짜리 아침 식사를 학생들에게 1000원에 제공하는 ‘건강밥상’ 사업을 시작했다. 역시 학교발전기금에서 그 재원을 충당했다. 전남대 학생과 하성림 후생팀장은 “‘자취하는 학생들이 많은데 이들이 밥 세끼를 다 사먹으려면 경제적으로 부담이 되지 않겠느냐’라는 걱정이 이 사업의 출발이 되었다. 아침만이라도 학교에서 도와주면 학생들의 생활에 활력도 주고 밥값 부담도 줄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전남대의 이 ‘1000원 식사’는 서울대에 이어 지난해 4월 부산대, 9월 충남대 등으로 확산됐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반가운 이런 대학 식복지 정책의 혜택은 ‘우리 학생’들에게만 주어진다. 전남대, 서울대 등에서 1000원으로 밥을 사먹을 수 있는 자격은 모두 ‘재학생’으로 제한돼 있다. 학생 카드가 없는 일반인은 제 가격을 내야 한다. 학내 생활협동조합이 운영하는, ‘가성비 최고’라고 소문난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학교의 학생 식당은 지난해 2월부터 외부인 출입을 아예 막았다. 점심시간마다 타 대학 학생들을 포함한 외부인들이 너무 많이 몰려와 정작 재학생들이 줄을 서다가 밥을 먹지 못하거나 외부에서 밥을 사먹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는 이유였다.

배고픈 학생들에게 눈 한번 꿈쩍 않는 대다수 대학들에 비하면 이들 대학의 ‘우리 학생’ 밥 챙겨주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혜택을 받는 ‘우리 학생’들은 우리 사회 청년의 극히 일부이다. 더구나 이른바 ‘흙수저’가 ‘1000원 식사가 지원될 만큼 학교발전기금이 충분한’ 대학에 들어가는 일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학교 밖 가난한 청년 혹은 가난한 대학교의 학생은 배가 고파도 기댈 곳이 없다.

대안은 ‘우리 학생’이 아니라 ‘우리 청년’을 위한 건강한 밥상이다. ‘젊다면 누구나’ 양질의 밥을 먹어야 하고 또 먹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 청년 식사권 운동을 벌이는 시도들도 미약하게나마 우리 사회에서 생겨났다. 그 가운데 하나가 1인 가구 청년 식생활 연구모임 ‘끼다(끼니를 다함께·facebook.com/ggida.lab)’의 활동이다. 끼다는 또래의 청년 이웃을 초대해 식사를 차려주는 집밥 프로젝트 ‘우야식당’(<시사IN> 제461호 사람in ‘집나간 집밥의 반란’ 기사 참조)에서 발전한 단체다. 1인 가구 식생활 실태 조사와 노량진·신림동 고시촌 등지에서의 ‘하루 한 끼 건강하게 밥 먹기’ 캠페인, 식생활 일지 작성 모임 등 서울 청년들의 식사 문제에 관한 다양한 활동을 꾸리고 있다. 끼다 모임지기 해영씨는 “돈 없이 갑자기 사회로 내던져진 청년들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제대로 먹을 수 있는 방안을 찾는 건 개인의 능력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고민할 공적 영역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끼다 제공
‘희망토’는 청년의 농업 접촉면을 넓혀 청년이 제대로 된 먹을거리를 경험하도록 한다.
대구에서 도시농업 운동을 펼치는 ‘희망토(facebook.com/localfoodhopesoil)’ 강영수 이장은 청년 식생활 문제를 풀기 위해 농장과 청년들 사이 네트워크를 제안한다. 잉여 농산물 나눔에서 시작해 농업교육·체험활동을 벌이는 등 청년들의 ‘농업’ 접촉면을 넓히면서 강씨는 청년들이 ‘제대로 된 먹을거리’에 대한 경험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해 몸이 상한 청년들을 보며 많이 안타까웠다. 청년 문제라 하면 취업이나 창업만 얘기하는데 그렇게 돈 벌어서 뭐하나? 결국은 잘 먹고 살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먹는 것에 대해 한번이라도 고민을 해보는 게 중요하지 않겠나?”

ⓒ끼다 제공
1인 가구 청년 식생활 연구모임 ‘끼다’가 나누는 도시락.
끼다와 희망토는 각각 서울시·대구시와 함께 청년 식생활 관련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끼다는 지난해 서울시 청년허브 연구사업 중 하나로 ‘청년 독립생활자 식생활 실태에 관한 조사 연구:밥, 잘 먹고 있나요?’를 진행했다. ‘부족한 시간과 제한된 여건으로 청년들의 식사가 매우 부실하다’는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서울시에 청년 대상 푸드셰어링, 공유부엌, 건강키트 사업 같은 정책 도입을 제안하기도 했다. 희망토는 대구시 청년정책네트워크 사업의 일환으로 대구 청년 밥상 설문조사를 벌이고 청년들이 보건소에서 건강검진을 받도록 유도하는 ‘건강 스탬프’ 도입을 제안했다.

이들이 주장하는 청년 ‘식사권’은 곧 청년 ‘건강권’이다. 희망토 강영수 이장은 “각종 신체검진이 이루어지는 고등학교에서 졸업한 뒤 취업해 직장 건강검진을 받기까지 20~29세 청년들이 건강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요즘 청년들의 부실한 밥이 건강 사각지대 시기의 건강을 망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흙수저 밥상을 뒤집어엎어라”


학생들과 대학 그리고 활동가들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이지만, 청년 식사 문제는 근본적으로 청년들의 부족한 ‘수입’을 해결하지 않고는 풀기 어렵다. ‘수입 없음→아르바이트→시간 없음→준비 실패→취업 실패→(다시) 수입 없음’으로 빙글빙글 도는 고리(왼쪽 그림) 안에서 밥은 청년들에게 굶고 때우고 견뎌야만 하는 장애물이 돼버렸다. 이 악순환 구조를 끊자며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대안으로 모색하는 것이 바로 ‘청년수당’이다. 바우처 제공 등의 항목별 간접 지원이 아닌, 사용처가 비교적 자유로운 현금 지원 방식의 청년수당은 청년들의 식사권 증진에도 대안이 될 수 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일본의 대학 시간강사 구리하라 야스시가 쓴 책 <학생에게 임금을>(서유재 펴냄)에 따르면 일본 한 대학 식당에서 판매하는 ‘후쿠시마 정식’이 대학생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었다. 대학생들이 방사능 걱정에 둔감해
서도, 특별히 후쿠시마 살리기 운동에 공감해서도 아니다. 그 풍성함에 비해 아주 싸기 때문에, ‘식욕이 왕성하고 가난한 학생들이 한번 먹게 되면 끊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학생임금’ 도입을 주장하는 구리하라 야스시는 이렇게 썼다. “확실히 할 것은, 대학이 가난한 학생을 바보 취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 녀석들은 화내지 않는다고. 나는 이렇게 말해두고 싶다. 후쿠시마 정식 곱빼기를 뒤집어엎어라. 참지 않아도 된다. 학생임금을 쟁취하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하자.”

‘끼다’의 모임지기 해영씨는 사회는 물론 청년들 스스로도 너무나 당연히 ‘참아야 한다’고 여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 먹고 싶은 것도 유예한 채, 모두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포기하며 살고 있어요. 그런데 지금 현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면 미래 또한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희망토 강영수 이장도 사회가 청년들에게 하는 이야기를 곰곰 생각해보라고 한다. “젊은 사람들에게 그러잖아요, 돌도 씹어 먹을 나이라고. 그런데 아무리 젊은 사람이라도 아무거나 먹으면 안 돼요. 지금 참으면서 성공하라고만 하지 말고, 먼저 제대로 된 밥을 주고서 취업을 하라든 창업을 하라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 많은 대학, 지방자치단체, 활동가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청년들의 ‘식사권’을 돕는 동시에, 흙수저 밥상을 눈앞에 둔 청년들은 스스로에게 이런 주문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흙수저 밥상을 뒤집어엎어라. 참지 않아도 된다.”


20대에 사춘기 앓는 '어른아이들'이 위험하다

입력 2017-03-02

부모 손잡고 병원 찾는 20대 어른들 
청소년기 정체성 고민 억압·외면한 탓
자신감 있는 386 부모세대 영향도 원인

강병훈 <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 정신과·소아정신과 전문의 >                                    

진료실에 20대 초·중반의 대학생이나 수험생, 직장인이 부모와 같이 오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전에는 만 18세의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혼자 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제는 20대 초·중반 성인도 청소년과 같은 형태로 진료받기를 원하는 것이다. 진료 형태뿐 아니라 정신적 성숙도 역시 중·고교생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부모도 아이를 성인이 아니라 중·고교생으로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료 형태와 성숙도만 청소년기와 유사한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 역시 청소년기에 겪었어야 할 부모에 대한 반항심, 가치관에 대한 혼란, 자기 정체성에 관련된 문제여서 진료 중에도 대학생이 맞는지, 성인이 맞는지 계속 생년월일을 확인하게 된다.

이렇게 청소년기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성인기를 맞이한 사람이 겪는 우울, 불안, 분노, 혼란 등의 정신과적 증상은 제 나이의 문제를 들고 온 청소년의 증상에 비해 훨씬 복잡하고 어려우며 심한 경우가 많다. 미국 발달심리학자 에릭슨의 심리발달단계이론에 의하면 청소년기의 주된 심리발달 과제는 자아 정체성의 확립이며 그 다음 시기인 초기 성인기의 주된 심리발달 과제는 청소년기에 어느 정도 확립된 자아 정체성의 바탕 하에 사람들과 친밀함을 늘려나가는 것이라 한다. 이 이론에 따라 생각해보면 청소년기의 과제가 달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다음 과제를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청소년기의 과제와 성인기의 과제가 겹쳐지면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환자를 더욱 짓누르게 된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어떻게 보면 간단하다. 제 나이에 해야 할 청소년기의 고민이 성인기까지 미뤄진 것이다. 본인과 가족은 미뤄진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다. 실제로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가 사춘기를 심하게 겪지 않고 대학입시까지 무난히 치르게 된 것에 대해 그 당시에는 매우 다행이라 여겼다고 하면서 후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당사자인 환자도 주변에서 ‘중2병’이니 뭐니 하면서 사춘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모습을 보면서 사춘기를 겪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내면의 요구를 억압하고 외면한 것으로 보인다.

왜 이런 일이 많아지는 것일까. 우선 입시에 편중된 현행 교육과정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는 현재 한국 사회에서 청소년이 처한 현실과 부모 세대의 특징이 연결돼 이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른바 386세대라는 1960년대 출생자와 뒤따르는 1970년대 출생자가 현재 부모세대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이전 부모세대에 비해 좀 더 아는 것이 많으며 다양한 경험을 했다고 자부한다. 또 이전 부모 세대는 30대 후반이나 40대 정도부터 자신을 기성세대라 인식하며 유교적인 질서나 가치를 지키려고 힘들게 노력했다면 지금 부모 세대는 40~50대에도 이전 부모세대에 대항했던 기억을 바탕으로 여전히 자신이 신세대라는 생각-적어도 구세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정작 사회에서는 이들이 기성세대의 주축이 되는 묘한 상태를 보인다. 

하지만 지금 부모 세대 역시 나름의 약점이 있고 그로 인해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헬조선’이니 ‘지옥불반도’니 하는 말이 나오게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는 자녀에게 부모의 판단이 옳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런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녀에게 대학입시의 중요성과 청소년기의 고민이 불필요함을 얘기하기 때문에 더더욱 자녀들이 이에 저항하기 어려운 상태가 돼 부모의 요구에 맞춰 나름의 고민을 별다른 대책 없이 미루는 결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거기에 저성장 시대에 청소년 스스로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 대신 취업 등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상황에서 이런 결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환상에서 현실로 도피하는 좌파

‘극단적 중도파’는 좌파와 우파가 서로를 극복하기 위해 경쟁하던 정치의 기능을 없앤다. 이때 정치는 권력 자체가 목적이 된다. 실업·환경·복지·교육·인권 등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빅텐트’와 ‘대연정’ 밖에 있다.

장정일 (소설가)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01일 수요일 제493호

“민주주의는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다.” 영국의 좌파 저널리스트 타리크 알리가 쓴 <극단적 중도파>(오월의봄, 2017)에 나오는 첫 구절이다. 그러나 정작 혼란스러운 것은 이 책의 제목이다. 좌파나 우파가 한쪽으로 치우친 것을 극좌나 극우라고 일컫는 것은 예사롭지만, 균형잡기나 타협의 산물인 중도에 ‘극단적’이라는 관형사는 어울리지 않는다. 한국판 편집자가 임의로 지은 제목인가 싶었지만, 원제가 ‘The Extreme Centre’이니 오해할 여지는 없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서구 정치는 좌파와 우파가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서로를 극복하기 위한 경쟁을 해왔다. 좌파와 우파의 각축과 병존은 서구 정치가 추구해온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지은이가 ‘극단적 중도파’라고 명명한 이것은 전통적 정치를 가능하게 해주던 동력인 좌우파의 적대를 없애버린다. 전통적인 정치가 산산이 부서진 자리에 현실주의자들의 야바위판이 벌어진다. ‘진보적 보수주의자(반기문)’니, ‘빅텐트(안철수·손학규)’니, ‘대연정(안희정)’이니 하는 것들이 그렇다.

1994년 최연소 노동당 당수가 된 토니 블레어는 1979년 보수당에 빼앗긴 정권을 18년 만에 찾아왔다. 전전임(前前任)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는 ‘사회는 없다’라고 선언한 프리드리히 폰 하이에크의 숭배자였다. 하이에크의 주요 논지에는 사회가 없으므로 당연히 노동권과 보편 복지를 보장하는 ‘사회국가’도 허상이며, 서로 경쟁하는 개인만 존재한다. 대처는 케인스주의 경제정책을 배척하고 베버리지 보고서(1942년에 작성된 영국 사회보장제도의 시안)를 토대로 한 국가적 합의를 무효로 되돌렸으며, 노동조합을 파괴했다.

ⓒ이지영 그림
블레어는 노동당 개혁이라는 구호로 당수가 되었다. 그가 노동당 당수로서 가장 먼저 한 일은 1918년부터 노동당 정책의 대명사였던 국유화 강령을 당헌에서 삭제하는 거였다. 현재의 영국 노동당은 블레어 도당이 당을 전횡했던 시절의 노동당을 신노동당(New Labour, 1994~2010)이라고 따로 지칭한다. 신노동당 지지자들은 대처주의를 수용하는 노동당의 변화를 긍정적인 뜻에서 급진적이라고 환영했고, 대처주의로 고통받은 영국 민중은 신노동당이 일단 승리를 쟁취하고 나면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회복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희망과 달리 블레어가 3기 연속 집권했던 10년(1997~2007) 동안 이들은 대처리즘을 더 순도 높게 발전시켰다.  

‘제3의 길’ ‘갈등 제로 정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따위 솔깃한 도식을 내세웠지만, 블레어가 이끈 “신노동당은 재계가 마음껏 돈벌이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했던 것”이 전부다. 신노동당은 평등과 사회정의라는 개념 자체를 폐기하고 재분배 정치로부터 등을 돌리면서, 노동당이 고수해온 사회민주주의와 단절했다. 이들은 영국은행에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완전한 자율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금융부문을 자유시장에 맡겼고, 미혼모 복지수당 삭감과 대학 등록금 의무 납부제를 실행하고, 각종 공공 서비스를 사영화
<극단적 중도파>
타리크 알리 지음
장석준 옮김
오월의봄 펴냄
하는 등, 대처가 하지 못했던 것을 더 과감하고 정밀하게 밀어붙였다. 슬라보예 지젝의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문학사상사, 2017)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가장 뛰어난 업적을 물었을 때, 대처 총리는 망설임 없이 ‘신노동당’이라고 대답했다.” 알리는 노동당이 대처주의에 투항하게 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25년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 함께 붕괴한 것은 소비에트 연방이나 ‘공산주의 이상’ 혹은 ‘사회주의 해법’의 유효성만은 아니었다.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도 함께 추락했다. 승리한 자본주의의 돌풍이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는 과거 자신들의 사회 프로그램을 구성하던 요소들을 지키려는 결의나 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대신 자살을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극단적 중도파’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지젝 역시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에서 알리와 동일한 설명을 한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대항적 시스템 및 노동자의 권익을 약속하는 다른 생산 체계의 심각한 위협이 있어야만 노동자와 빈곤층에 상당한 배려를 제공”한다. 그런데 “그런 대항이 사라질 경우, 유럽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해체도 가능하다”.

“야당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

자신이 살고 있던 공공주택이 주택담보회사의 소유가 되면서 보금자리에서 쫓겨나야만 했던 약 100만명의 신노동당 열성 지지자들은 블레어에게 속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그런데도 블레어가 총선에서 세 번 내리 승리하면서 총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 민중에게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알리는 이런 딜레마를 “우리는 야당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다”라는 말로 요약했다.

영국 정치는 “보수당-자유민주당 연립정부에 노동당이 추가된, 머리는 셋이지만 몸통은 하나인 극단적인 중도파의 손아귀에 있다.” 극단적 중도파가 되면서부터 좌파는 선거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통적인 좌파 정책을 내팽개치고 차츰 자본친화적이 되기 시작했다. 또 정권을 쥐고 나서도 시민의 권리보다 자본의 이해를 우선하면서 기업 권력에 굴종한다. 이처럼 좌우의 정치적 차이가 축소되면서 정치는 권력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게임에 참여한 엘리트 정치꾼의 사업으로 전락한다. ‘박근혜-최순실-이재용’ 조합이 벌인 정경유착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좌파가 우파와 차이가 없어질 때, 민중은 두 가지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하나는 극우에 투표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투표장에 가지 않는 것이다.  

‘빅텐트’와 ‘대연정’은 정치적 차이가 사라져버린 한국 정치의 민낯과 추한 권력의지를 보여준다. 솔직히 거기에 뭐가 있나? 거기에는 상위 1%와 야합하는 지배 엘리트와 상위 10%에 가입하려는 중산층의 욕망만 있다. 실업·환경·복지·교육·인권 등, 경제발전보다 뒤처진 정말 중요하고 시급한 정치적인 것은 모두 빅텐트와 대연정 밖에 있다.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선 후보인 문재인과 안희정은 신자유주의로 기울어졌던 노무현 정권의 잘못을 사죄하거나 반성하기는커녕, “노무현 정권이 정말 변절한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가진 진보의 개념이 낡아서 그런 것인지 묻고 싶다”(<시사IN> 제491호 “정권 교체 그 이상을 원한다면!” 기사 참조)라고 반문한다. 우리가 가진 진보의 개념이 낡았다? ‘현실에서 환상으로 도피한다’가 일상적 어법이지만, 지젝은 거꾸로 ‘환상(사회주의라는 이상을 향한 투쟁)에서 현실(시장과 기업 만세!)로 도피한다’라는 말로 오늘날의 좌파를 꼬집는다.


‘임신할 몸’이 아닌 인간으로 대하라
윤정원 (녹색병원 산부인과 과장) webmaster@sisain.co.kr 2017년 03월 01일 수요일 제493호

지난달 동료 산부인과 의사들의 카톡방을 뜨겁게 달군 그림이 있었다. 인유두종바이러스(HPV) 백신 중 하나인 ‘서바릭스’를 만드는 회사의 브로슈어에 실린 그림이었다. 백신을 맞을지 말지 고민하는 여중생에게 남자아이가 다가가서 말한다. “너 그거 얌전히 맞는 게 좋을 거야. 신문에서 사춘기 때 맞는 것이 좋다고 했어.” “이 자식! 네가 뭘 알아? 남자가.” “사, 상관있어! 여자가 나중에 내 아이를 낳을 수도 있으니까!” 접종 경험자로서, 의사로서 우리의 공통된 의견은 이랬다. 백신 주사를 자궁경부암 예방하려고 맞지, 아기 낳으려고 맞는 건가?

해당 제약회사 홍보팀의 안타까운 감각과 재능을 탓하기에는, 이미 사회가 대놓고 여성의 몸에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논란이 됐던 행정자치부의 ‘대한민국 출산지도’만이 문제는 아니다. 보건복지부의 ‘사회가 책임지는 행복한 임신·출산’ 홍보 페이지를 보면 만 12세 여아 HPV 백신 무료접종 사업을 ‘임신 전 예방·준비’ 일환으로 홍보하고 있다. 물론 자궁경부암 예방은 중요하다. 자궁경부암은 2014년 기준으로 10만명당 9명의 유병률을 보이고 있다(갑상선·유방·대장·위·폐 다음으로 6위이다). 선진국에 비해 유병률이 높다. 특히 젊은 층의 유병률이 높다. 백신 접종과 정기검진의 중요성이야 말해 무엇하랴. 하지만 자궁경부암에 대한 대중의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내가 임신할 수 있는 몸임을 자각하고, 누구와 언제 섹스를 하고, 언제 임신과 출산을 할지 고민하고 합의하고 결정하는 것과, 타인에 의해 임신할 수 있는 몸으로‘만’ 상정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전자는 몸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재생산권이라는 중요한 시민권을 찾는 과정이고, 후자는 보호와 통제되어야 할 존재로 대상화되는 과정이다.

이른바 ‘낙태죄’ 처벌 강화 국면이나 대한민국 출산지도 이슈에서 여성들이 꾸준히 ‘My body My choice(나의 몸 나의 선택)’라는 구호를 가지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렇기에 이 구호는 여성의 재생산권뿐만 아니라 장애인 인권, 트랜스젠더 성별 정정, 정신질환자 인권침해 등 여러 인권 이슈에 적용시킬 수 있다.

임신할 몸만이 아닌 자기결정권을 가진 시민이기에

여성의 몸을 섹슈얼하게 또는 모성적으로만 보는 대상화는 공기 같아서 무의식중에 여성에게 내재화된다. 산부인과 문턱이 많이 낮아지는 만큼 포괄적이고 중립적인 이름인 ‘여성의학과’로 부르자는 노력도 이루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산부인과는 임신·출산 관련 병원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것도 이 때문이다. 이 고정관념은 청소년이나 미혼 여성이 여성과 진료를 받는 일을 방해한다. 2012년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산부인과 이용 경험이 있는 여성 1067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는데 61.6%가 ‘처음 산부인과를 방문했을 때 망설였다’고 대답했다. 그들 중 67.9%가 진료 자체가 두려워서, 21.6%가 사회적 시선 때문이라고 답했다.

담배는 나중에 엄마가 될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각종 암과 호흡기 질환의 원인이기에 끊기를 권유한다. 생리통은 아기를 낳으면 없어진다고 설명할 게 아니라, 생리혈 배출을 위해 자궁이 수축할 때 생기는 통증이므로 진통소염제와 진경제로 완화할 수 있다고 설명해야 한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마지막 편지처럼, 우리는 질병이나 장애를 증명해서 동정받고 싶지도, 성실히 일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싶지도 않은,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몸을 온전히 긍정하고 통제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이자 권리이며, 이 욕구가 부정되는 경험은 결국 시민으로서 갖는 권리를 부정당하는 일이다. 자궁을 가지고 있어서, 누군가의 엄마가 될 거라서가 아니라, 우리는 인간이라서 존중받고 싶다. ‘임신·출산 정책’이 아니라 ‘여성건강 정책’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