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 노동자 "죄 지은 사람이 잘사는 현실…염병하네!" [현장] 35만 모인 '100일 촛불'…"황교안은 공범"
허환주 기자
"황교안과 청와대 일당이 특검 영장 집행을 방해했다."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이 4일 주최한 '14차 범국민행동의 날' 집회가 진행됐다. 이날은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집회가 열린 지 99일이 된 날이다. 이날 촛불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35만(오후 7시30분현재) 명이 모였다. 10월부터 진행된 촛불집회는 설 연휴를 제외하고는 한주도 거르지 않고 진행됐다.
이날 집회에서는 지난 3일 박영수 특별검사팀이 진행한 청와대 압수수색이 불발로 그친 점을 두고 강한 성토가 쏟아졌다. 압수수색을 거부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을 두고 분노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권영국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법률팀장은 "청와대가 법치주의를 유린했다"고 꼬집었다.
권 팀장은 "법원이 허가한 영장을 황교안과 청와대 일당이 군사상 기밀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압수수색을 정면으로 거부했다"며 "이것이 옳은 일인가"라고 반문했다. 권 팀장은 "이는 국민들에 대한 폭거이자 법치주의의 유린"이라며 "황교안과 청와대 일당이 법을 우롱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권 팀장은 한 발 더 나가 "명백한 공무집행방해로써 범죄행위"라며 "청와대는 이제 군사상 비밀을 요하는 장소가 아니고 범죄 소굴로 전락해버렸다"며 "우리 국민이 이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박근혜와 황교안은 공범"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실장의 발언은 수위가 좀더 높았다. 압수수색을 거부한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은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 실장은 "지금 황교안은 박근혜와 최순실을 보호하고 있다"며 "특검에서 보낸 압수수색 협조공문을 거부한 게 그 증거"라고 주장했다. 우 실장은 "그가 이들 범죄자를 숨기는 이유는 그 역시 범죄자이기 때문"이라며 "박근혜와 황교안은 공범"이라고 주장했다.
"황교안은 당장 사퇴해야 한다. 애초 대행 자격이 없었다. 황교안이 법무부 장관일 때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부정선거 드러났지만 검찰에 이를 기소하지 말라고 했다. 이 공로와 통합진보당 해산 공로로 '김기춘 아바타'인 국무총리가 됐다. 그런 그가 국무총리에 취임하자마자 한 일이 세월호 4.16 연대 사무실 압수수색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삼성이 국민연금을 털어 삼성물산과 합병한 게 황교안 국무총리 재임 때다.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이 지시했다. 그런데 황교안이 이를 몰랐을까. 최순실과 박근혜가 재벌들에게 뇌물을 받아 재단을 설립한 시기도 그가 국무총리였을 때였다.
황교안은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할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수사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다. 박근혜의 첫 번째 공범이다. 대통령 코스프레 하라고 국민이 그 자리에 둔 게 아니다. 촛불은 박근혜만 물러나라고 한 게 아니다. 박근혜 정권의 모든 악정을 중단하라는 명령이다. 황교안은 지금 당장 사퇴해야 한다. 박근혜는 구속하고 황교안은 당장 수사대상이 되어야 한다."
"박근혜 탄핵, 재벌특권 지배 사회 청산하자는 주권자의 명령"
이날 촛불집회에 앞서 퇴진행동은 서울중앙지법 앞 삼거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구속을 촉구하는 사전집회를 진행했다. 사전집회에는 16일간 법원 앞에서 농성을 이어가던 법률가농성단을 비롯해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과 각종 노동자 단체 등 주최 측 추산 1500여 명이 참여했다.
퇴진행동은 성명을 통해 "무노조경영을 내세워 노조파괴를 일삼으면서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철저하게 짓밟아온 삼성을 기억해야 한다"며 "천문학적인 비자금으로 정치권에 로비하고 공직자를 매수하면서 그들만의 특권지배를 추구해 온 재벌 삼성, 총수일가의 경영권세습을 위해 온갖 탈법과 불법을 동원하고 박근혜 세력과 결탁한 이재용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이러한 기억들은 이제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적폐와 재벌특권사회를 청산하고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여는 국민적 연대의 항쟁으로 타올라야 한다"며 "삼성을 필두로 한 재벌들이 부패한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자신들만의 부를 축적하는 동안 많은 노동자 서민들은 고용불안과 기회불균등으로 고통 받아 왔지 않은가. 바로 지금 국정농단-정경유착의 범죄세력들을 단죄하지 못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희망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렇기에 박근혜의 탄핵은 재벌특권이 지배하는 사회를 청산하자는 주권자의 명령"이라며 "박근혜 없는 새로운 민주공화국 건설은 삼성 등 재벌들이 저지른 역사적·사회적 범죄를 철저하고 엄중하게 단죄할 것을 시대적 소명으로 요구한다"고 이재용의 구속은 그 시작이라고 밝혔다.
"나도 모르게 외쳤습니다.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이날 촛불집회에는 최순실 씨가 특검에 소환될 때 그에게 "염병하네"라고 일갈했던 청소아주머니가 참석했다. 아래는 발언내용 전문.
안녕하세요. 최순실 청소부아줌마로 알려진, 염병하네를 외친 사이다 아줌마입니다. 평소 화가 나면 습관처럼 외치던 말인데, 이 말이 이렇게 커질 줄을 미처 몰랐습니다. 너무나 화가 나서 소리쳤는데 여러분들 속을 후련하게 해줬다니 제 스스로 기쁘기도 합니다.
저는 60이 넘었지만 넉넉지 않은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청소일을 하고 있습니다. 새벽부터 출근해야 하지만 일할 곳이 있다는 이유로,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감이 자랑스러웠습니다. 이 땅에서 자식들이 자라서 가정을 꾸리고 손주들이 커나가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게 자랑스러웠고 행복했었습니다.
그렇기에 100만 원 남짓 받는 월급에서도 떳떳이 세금을 냈고, 전혀 아깝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 나라꼴이 이게 뭡니까? 죄를 지었으면 반성하고, 사과하고 머리를 숙여야 할 텐데 죄를 진 사람이 더 잘 살고, 큰소리 치고 이게 지금 현실이란 걸 특검 건물을 청소하며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부유해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그리하여 우리 자식들이 더 잘 살고, 우리 손주들이 행복하게 사는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작은 세금이나마 기쁘게 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국민들의 세금이 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한두 사람 배 채우려고 우리가 이리 고생해야 하는 건가요?
너무 억울합니다. 정말 억울한 건 난데… 그리고, 우리 국민인데, 민주주의가 아니다, 억울하다고 외치는 모습을 보고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나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나도 모르게 외쳤습니다.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요즘 특검 검사님들 밤낮으로 너무 수고가 많으십니다. 잘은 모르지만 청와대 압수수색부터 난관이 많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번 기회에 대한민국의 정의가 살아날 수 있도록 공명정대한 수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래서 더 강한 나라가 되었으면 합니다. 더 잘 사는 행복한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특검 검사님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들의 속이 사이다처럼 뻥 뚫리도록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염병하네, 염병하네, 염병하네… 감사합니다.
대선은 '이상형 월드컵'이 아니다
[서리풀 논평] 다음 정권? '과정'이 더 중요하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무슨 유토피아를 바라지는 않는다. 탄핵이 된다고 뭐가 그리 갑자기 좋아지겠는가. 새 대통령 새 정권이라 해서 하루 아침에 아무런 갈등과 고통이 없는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주리라 믿지 않는다.
그 때문인가, 주위를 돌아봐도 탄핵 이후와 대선 이후를 말하는 목소리에 힘이 없다. 장밋빛까지는 아니라도 뭔가 새로운 기운이 넘쳐야 할 텐데, 전망은 일상의 삶으로 힘 있게 들어오지 못하고 구경과 평론을 넘지 못한다. 정치적 효능감의 측면에서는 '합리적 무지'인지도 모른다. 한 사람 개인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그래도 아쉬움은 크다. 한국 사회에서 대통령 선거 이상의 정치적 기회는 드물다. 새로운, 때로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발본적인 전망을 제시하고 치열하게 논쟁할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가 아닌가. 그 기회가 지금 우리 눈앞을 쏜살같이 지나가고 있다.
어떻게 몇몇 사람과 세력만 탓할 수 있을까. 그들(가장 좁게는 대선 주자와 정당을 말한다)과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은 점점 더 선거공학에 몰두하고, 우리는 점점 더 무력해진다. 상황을 반전시켜야 하지 않을까?
우선 야당에 큰 책임을 묻고 싶다. 여론 조사가 유리해서 그렇든 소위 대세론에 편승해 그렇든, 전망과 비전은 이미 집권한 정권의 분위기다. 우리가 집권하면 다르다고 주장하지만, 지난 10년 집권한 이른바 보수 정권과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 내가 더 경쟁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무엇을 위한 경쟁인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미래를 말하고 교체를 내세우지만 몇몇 대선 후보의 약속은 내용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말로 치장된 원리를 들어봐도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지 종잡을 수 없어서다. 공정, 투명, 협치, 권력 분산, 민주주의, 국민 행복…. 하도 많아 무엇이 누구 이야기인지도 모를 지경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것인가? 어떤 국가, 어떤 사회를 원하는가?
전망과 비전은 자괴감이 들 정도로 빈곤하고 초라하다. 아니, 잘 모르겠다. 경제성장, 사드 배치와 대북 정책, 재벌, 복지, 비정규 노동과 고용 유연화, 자유무역협정(FTA), 지식기반경제와 4차 산업혁명, 청년 일자리, 저출산, 국민연금, 건강보험, 갖가지 불평등…. 온통 지금 그대로다. 왜 집권하려 하는지, 사람을 바꾸는 것 말고는 따로 이유가 없는가? 정권교체는 대통령과 장관, 공기관의 장 자리를 교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가?
정부조직 개편을 새로움으로 치장하지 말라. 정치, 경제, 사회에 대한 새로운 비전이 아니라 겉모양을 바꾸는 것일 뿐이다. 무슨 위원회와 새로운 부처, 조직의 이합집산은 전망과 비전의 출발이 아니라 그 결과여야 한다.
어쨌든 정권이 바뀔 것이라는 대세에 안심하고 있다면, 지금 이대로는 야당이 집권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점을 경고하고 싶다. 우리는 이번 대선에서도 '1987년 체제'(또는 '박정희 체제')의 약속이 상황을 압도한다고 판단한다. 집권하고자 하는 정치세력들의 책임만은 아니지만, 그에 편승한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대선에 나선 사람들과 정치 세력에 묻는다. 성장률 몇 퍼센트, 일자리 몇십만 개, 수출 얼마 식의 약속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가? 소득을 얼마 더 올리고 건강보험의 보장성을 얼마 더 좋게 한다는 것은 어떤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약속은 시대착오적이다. 구체적인 공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틀과 패러다임을 문제 삼는다. 구체제형 경제, 그리고 그에 기초한 사회경제 '성장'은 그 무엇이라도 불가능할 것이고, 그런 기준이라면 다음 정권도 실패할 것이 뻔하다.
또 한 가지. 혹시 그런 외형의 목표를 달성한들 그것이 담고 있는 실제 내용, 즉 시민의 삶이 나아지고 좋아지는 목표와는 연결되지 않을 것이다. 경제성장률을 달성한 들, 또는 제4차 산업혁명의 깃발을 올린들, 의료비, 교육비, 전세 부담이 그대로면, 출산과 보육을 믿을 수 없으면, 노인은 그대로 가난하면, 그 정권이 잘했다고 할 것인가? 이 가혹한 불평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시, 정권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집권하고 좋은 정책을 잘 실행하면 충분한가? 다시 말하지만, 다음 정권이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정치, 경제, 사회의 새로운 전망을 내고 국가의 방향을 다시 잡는 일이다. 결과를 내지 못해도 실마리를 잡는 것으로 충분하다. 아니, 그렇게 주권자를 설득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 전 <서리풀 논평>에서 주장한 바를 되풀이해야 하겠다. (☞바로 가기 : 또 다시 '성장'을 말할 것인가)
"멀리 봐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것을 위해 다음 5년간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시민을 '지도'할 비전과 이념, 철학을 내놓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시없는 기회에, 시민과 토론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초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 주권자의 지금 생각이, 그 욕망이 어떻다고 핑계 삼지 말라. 정치 리더십이란 현실에 반걸음 앞서가면서 사람들의 삶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제 역할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경제와 사회, 한국인의 삶이 대안 경제와 그 체제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둘도 없는 정치적 기회를 놓치고 있는 사태에 대해서는 대선 주자와 정당에만 책임을 물을 일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의 허약함과 빈약함의 결과 때문이겠지만, 지지와 선호는 좀처럼 '상품' 고르기를 넘어서지 못한다. 왜 그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 왜 그 정치 세력이 집권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에 전망과 비전, 정책, 정강,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판단 기준을 듣기 어렵다.
다음 정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요구와 바람도 희미하고 흩어져 있다. '크게' 바뀌어야 할 것이 차고 넘치지만, 누가 어떤 정부가 이 일들을 할 수 있는지 거론되지 않는다. 우리 연구소가 직접 참여한 건강보험료 체납 문제가 대표적 사례다. (☞관련 기사 : "건보료 장기체납, 200만가구 넘어…미성년자도 4000여 명")
문제 요약. 건강보험료를 6개월 이상 내지 않은 장기체납자가 200만 가구를 넘고, 장기체납자 중 과반수는 보험료 월 5만 원 이하의 '생계형 체납자'다. 장기체납자 중 만 24세 이하 청소년이 4만7000여 명, 미성년 장기체납자도 4000여 명에 이른다.
누구나 알 듯 이 문제는 건강보험제도를 열심히 잘 운용하는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 소득 파악을 더 잘하고 열심히 걷는 것은 정말 일부분일 뿐이다. 자세히 말할 겨를이 없지만, 건강보험료를 세금으로 바꾸거나, 건강보험과 의료급여를 통합하거나, 의료급여 대상자 수를 3~4배 이상으로 늘리거나 해야 한다.
모든 대안이 마찬가지. 실무와 기술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방향을 잡는 것이 먼저다. 정치의 문제, 정권의 문제, 대안 정책의 문제임이 명확하다. 대통령 선거는 이를 논의할 수 있는 기회이고, 주권자가 압박하여 그들이 방향을 잡게 해야 한다.
결국 우리의 힘이 중요하다. 우선, 여론조사와 이미지에 기초한 인기투표를 벗어나자. 대통령 선거가 '이상형 월드컵'이나 '연예대상'이 아닌 한, '공적' 고통과 문제를 해결할 전망과 실력을 들여다봐야 한다. 분위기에 휩쓸려 공허한 인기가 과학적 현실을 이기는, 이른바 '침묵의 나선'도 거부해야 한다.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견해는 실제보다 더 강해 보이고 그 반대의 의견은 약해 보였다. (…) 나선형으로 진행되는 그 과정에서 결국 하나의 견해는 공적 상황을 장악하는 반면, 다른 견해는 지지자들의 침묵으로 인해 대중의 인식 밖으로 밀려나게 된다."(<침묵의 나선> (엘리자베스 노엘레 노이만 지음, 김경숙 옮김, 사이 펴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모든 시민들이 스스로 비전과 요구를 말하고 집단으로 조직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지지를 드러낼 것이 아니라 할 일과 필요를 압박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 비전과 요구가 드러나고 커지며 공적 상황을 장악할 때, 그들은 결국 우리를 대표할 수밖에 없다. 대의 민주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이명박 정권의 블랙리스트는 지금 어떻게 됐나?
[좋은나라 이슈페이퍼] '악의 평범성'과 김기춘·조윤선
김신동 한림대학교 교수
블랙리스트 작성을 사주한 김기춘이 영장 실질심사에서 담당부장 판사에게 그것이 범죄인 줄 몰랐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발언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김기춘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아마도 김기춘의 명을 받아 공모한 조윤선이나 이하 문체부 공무원 가운데 상당수도 같은 생각을 가졌을지 모른다. 인터넷에서도 그게 왜 문제냐며 기이한 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들의 신념이 얼마나 투철한지 검찰도 법원도 모두 좌익에게 휘둘려 나라를 망하게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에 조금의 망설임이 없다. 공안 검사 출신으로 동국대에서 법을 가르친다는 어떤 이의 글을 보니 나름 정치철학의 역사까지 더듬어 가며 국가의 안위를 수호하기 위해 불온한 자들을 관리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는 해괴한 논리를 확신에 차서 전개하고 있다. 이 말이 맞다고 손뼉을 치며 퍼다 나르는 사람들, ‘좋아요’를 누르며 맞장구치는 사람들 등등이 김기춘의 분신술을 증명하는 판국이다.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왜, 무엇이 이런 생각을 내면화 시키는 것일까? 헌법적 가치 위에 공안의 가치를 수립하는 이들의 사고에는 안전에 대한 그릇된 공포가 바닥에 깔려 있다. 전도된 가치가 내면화 되었을 때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은 더욱 자연스럽게 발현된다. 악의 평범성은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1963년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나오는 구절이다.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장애자들이 아니라,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고 여기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아렌트는 주장했다.
박근혜 최순실의 국정 농단 사건과 관련하여 죄의식 없이 죄인이 된 정치인들 및 고위 공직자가 매일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대통령과 최순실이 위법을 명하고 저지르는데도 제지하거나 저항한 사람이 극소수다. 트럼프가 이슬람국가 시민들에게 비자 발급을 금지한다고 하자마자 공직자들이 즉각 직위를 걸고 저항하는 미국의 사례와 매우 다른 풍경이다. 범법을 하는 대통령과 그것을 묵인 방조하는 공무원들. 이들은 모두 아이히만의 덫에 걸려든 것일까.
이 글에서는 블랙리스트를 둘러싼 문제를 짚어 본다. 블랙리스트는 사실상 이명박 정부 시작과 함께 강압된 언론 통제 및 표현의 자유 침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이다. 언론 탄압이 버젓이 이루어지는 동안 우리 사회는 강 건너 불 보듯 보고만 있었다. 신공안정국에서 행여 사적 이익을 놓칠세라 오불관언의 자세를 취했던 것이다. 언론을 지키고자 했던 기자들이 잘려 나가고 공영방송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는 수년 동안 '악의 평범성'이 자행되어도 애써 눈을 감았다. 그 결과가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이고 블랙리스트다. (필자)
악의 평범성과 블랙리스트
문화연구자 이동연은 작금의 블랙리스트 사건이 역사적 유산이라고 말한다. 유신의 망령이 다시 소환된 것이며 히스테리에 갇힌 불안한 권력의 과잉방어이다. 그의 분석을 인용한다.
블랙리스트는 역사적 히스테리의 문화적 산물이다. 문화는 역사적 히스테리의 증상이 가장 강한 곳이다. 블랙리스트는 문화의 히스테리 증상을 역사적으로 계승한 증거일 뿐 아니라, 그 자체로 히스테리의 심리를 역사화 한다. 예컨대 유신시대에 자행된 수많은 문화예술의 검열과 예술인들에 대한 탄압은 유신의 가장 극렬했던 히스테리의 순간이다.
"인혁당 사람들을 사형시킨 1975년에 박정희 정권은 무려 225곡의 가요를 금지곡으로 묶었고, 대마초 단속을 통해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등 인기 가수들을 포함해 27명을 구속했다."
긴급조치 9호가 발효된 1975년 6월에 정부는 '공연활동의 정화대책'을 발표하는데, 요지는 가요계를 정화하는 일이었다. 이 대책으로 인해 1차에 130곡, 2차에 44곡, 3차에 48곡이 금지되었다. 1976년에는 레코드 제작 시에는 의무적으로 건전 가요를 1곡씩 포함하는 '건전가요의무삽입제'가 실시되었다. 영화산업 분야에도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통제와 검열, 정신의 백화 통치가 이루어졌다. 1973년 영화법 제4차 개정안은 영화진흥공사 신설과 검열강화가 주 골자였다. 1975년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영화 시나리오 사전 심의가 강화되어, 시나리오 반려 비율이 1970년 3.7%였던 것이 1975년에는 무려 80%까지 급증했다.
역사적 유산으로서 유신의 검열은 문화의 히스테리라고 할 수 있는데, 블랙리스트는 그러한 히스테리가 역사적으로 전이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중략) 근대화의 아버지인 박정희가 다시 소환되어 박근혜로 현시되고, 유신 체제의 문화와 예술의 검열은 지금 블랙리스트라는 역사적 히스테리로 부활했다. (이동연, 페이스북 포스팅. 2017. 2.)
유신시절 자행되었던 이런 백주의 공갈을 당연시하고 살았던 박근혜와 김기춘으로서 이번 블랙리스트는 범죄가 될 수도 없는 당연한 일이었을 법도 하다. 청문회에 선 김기춘의 언어는 아렌트가 지적한 아이히만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범죄를 언어의 제한성에서 포착하고 있다.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강요하게 될 가공의 폭력에 대해 상상하지 못하는 것을 이 범죄의 핵심으로 지목한다. 다시 말해 아이히만이 저지른 참혹한 살인행위들은 그가 괴수이거나 특별한 악인이어서가 아니라 규정과 명령을 수행하는 범위 이상으로는 도덕적 판단을 하지 못하는 정신적 불구 상태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인 것이다. 그래서 아이히만은 끝까지 결코 자신의 범죄를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못한다. 탄핵이 기각되면 복수하겠다는 박근혜나 모르쇠로 일관하는 김기춘, 우병우는 이 시대에 부활한 아이히만이다. 박정희며 유신이다.
그런데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다. 블랙리스트 작성에 실제 동원된 문체부 공무원들은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그들 및 한국의 모든 공무원들, 나아가 조직의 성원들이 처한 상황은 어떠한가? 부정과 불법을 명령 받았을 때 아이히만이 되지 않고 저항 할 수 있는 길이 있을까? 장관이, 국장이, 과장이 지시하는 것이 불법이고 부도덕한 것임을 알아도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환경이 이루어져 있는가? 답은 부정적이다. 일반기업이나 대개의 조직도 마찬가지이다. 한국 사회에 합리적 도덕적 기준이 개인의 양심을 보호하는 조직은 없다. 이것은 결국 한국이 아직 근대적인 사회로 이행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근대성의 핵심은 합리성이다. 혹은 합리적 이성이다. 인간은 합리적 이성의 주체이며 그 행위는 도덕적 판단에 뿌리를 박고 있다. 도덕적 판단의 중지, 그리고 지시와 명령, 관습에 복종해야 하는 환경은 근대성을 체현하는 조건이 아니며 그 안에 놓인 인간 주체들은 근대적 인간으로 행동하고 사고할 수 없다. 한국인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이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한국인들은 우리가 근대적인 사회, 즉 합리적 이성이 관철되는 제도적 공간에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근대의 껍질, 즉 물질적 성장의 외피를 근대로 이해하고 그 물질성 속에 살고 있는 자신을 근대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국의 정신과 제도는 전근대적 사슬에 묶여 있다. 정경유착, 연고주의, '우리가 남이가' 등은 전근대적 정신성의 실현태이다. 수년에 걸쳐 블랙리스트의 작성과 적용이 일상 업무로 갈등 없이 수행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악의 평범성은 근대적 합리성이 결여된 제도적 공간에서 일상의 업무로 실행된다.
언론 및 표현의 자유 침탈
블랙리스트의 작성은 김기춘과 조윤선에 의해서만 된 것은 아니다. 이명박 정권이 서둘러 자행한 '악의 평범성'은 공영방송 문화방송(MBC)에 낙하산으로 떨어트린 김재철 사장 임명, 연합뉴스 사장의 낙하산 임명, 대통령 최측근 최시중 방통위원장을 통한 언론 통제 등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한 저항은 MBC 구성원에 의한 170일 장기 파업으로 극렬하게 나타났다. 수많은 언론인이 삶의 터전에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내몰렸다.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자시고 할 위선도 없이 자행된 언론 압살이라고 할 만한 사건이 중인환시리에 장기간 지속했다. 그런데도 결국 일차적 피해는 내몰린 언론인들에게만 강요되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 심대하고 치명적인 사회적 해악은 공정한 언론기관의 사멸과 정권을 대변하는 나팔수의 오염된 방송을 감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국민들은 차차 이를 외면하였고 그 결과는 MBC 뉴스에 대한 시청률 하락과 공정성 평가지수에서의 추락으로 나타났다.
2012년 MBC 파업의 장기전은 결국 MBC와 한국 언론에 지우기 힘든 비극으로 남게 되었다. 비극은 보도국 대체인력 투입으로 막을 올린다. 사장 김재철은 30여명의 시용기자를 계약직으로 채용했고, 이듬해 퇴사 직전 이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뒤 MBC를 떠났다.
당시 파업에 참여했던 임명현 MBC 기자는 '2012년 파업 이후 공영방송 기자들의 주체성 재구성에 관한 연구-MBC 사례를 중심으로'라는 석사논문을 통해 MBC 기자들의 '자기소외'를 분석했다. 그는 논문에서 "공영방송의 정권종속화 강화와 그에 따른 경영진의 비인격적 인사관리 기조 속에서 기자 주체는 잉여로 호명돼 뉴스의 외부로 격리되거나 도구로 호명돼 경영진이 주문하는 저널리즘 실천을 수행했다. 기자들은 기존의 저항적 실천 대신 자신의 저널리즘 실천을 유예했다. 이 같은 배경에는 모멸감과 공포, 수치심과 무력감 같은 집합심리가 자리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조직전체가 배제의 공포 속에 저널리즘을 유예하는 상황 속에서 모든 아이템 판단은 보도국 간부들에 의해 수직적으로 결정됐고, 결국 최순실게이트 국면에서의 '보도참사'로 이어졌다.
MBC의 경영진은 사법부의 부당징계 판결을 무시하고 부당전보→경력채용 방식을 반복하며 공포를 형성했다. MBC노조에 따르면 MBC에서 파업 이후 징계, 대기발령, 교육발령, 무관 부서 전보 등 인사관리를 경험한 조합원은 165명이며, 이 중 91명은 여전히 본업에서 제외되어 있다. 직종별로는 기자 50여명, PD 30여명, 아나운서 10여명이다. 2016년 초 폭로된 백종문 녹취록에 따르면 녹음 당시 백종문 MBC편성제작본부장은 "회사를 망가뜨린 사람들이 50~80명"이라고 말했다.

▲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강제 직종 전환 현황. ⓒMBC노조
대통령 탄핵으로 인한 독재적 권력의 붕괴와 권력 공백 상태에서 이명박 박근혜 정권 시기의 언론 압살을 고발하는 선언과 영화가 나왔고 이러한 고발과 지난 시가의 문제에 대한 분석은 줄을 이을 것으로 보인다.
"연합뉴스 기자들은 지난 12월 21일 성명을 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기사를 데스크가 난도질해도, 국정교과서를 '단일교과서'라고 쓰라는 지시가 내려와도, 대다수 시민단체와 한 줌도 안 될 관변단체를 1대 1로 다루는 기사가 나가도 우리는 항의하되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다"고 자성했다". (미디어 오늘, 2016. 12. 21)
해직언론인의 투쟁과 연대와 삶을 다룬 <7년-그들이 없는 언론>도 블랙리스트에 의한 언론인 핍박, 공정언론 실종을 잘 보여준다.
알맹이 근대화를 향한 과제
블랙리스트는 김기춘과 조윤선이 만든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지난 십 년 가까이 한국 사회는 전체적으로 블랙리스트에 의한 공포 정치에 흔들렸고 언론인을 탄압하고 언론을 길들이는 만행에 항거하지 못한 대가를 결국 박근혜 국정 농단을 통해 엄청난 비용으로 치르고 있다. 블랙리스트 관련 책임자의 처벌은 물론이고 이미 훼손될 대로 훼손된 MBC를 어떻게 정상화할 것인지도 큰 과제로 남아있다.
2월에 국회를 통과하여야 할 방송법 등 개정안이 당장 시급한 과제이다. 여소야대의 흔치 않은 기회를 잘 살릴 것인가, 아니면 무위로 돌려버릴 것인가가 국회에 넘겨져 있다. 통과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공정 언론 회복의 첫 걸음일 뿐이다. 수많은 난제가 놓여 있다. 결국은 껍데기 근대화를 극복하고 근대성의 알맹이를 채워나가야 하는 일이다. 근대적 합리성을 일상의 업무 공간에 제도로서, 관습으로서, 행위의 기본 준칙으로서 정착시켜 나가지 못한다면, '악의 평범성'은 언제든 고개를 들고 재앙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정권이 바뀐다 해도 마찬가지다. 언론뿐만이 아니라 전체 한국 사회의 앞에 놓인 커다란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