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 '1987년 이데올로기'와 작별하자!

일취월장7 2017. 2. 20. 11:15


청와대 주인 없는 정치, 이것이 민주주의다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① '형용사 민주주의'는 가짜다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      
2017.01.26 08:17:19

헬조선을 바꿀 수 있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이같은 질문을 던진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주권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 첫 걸음이라고 답한다. 무엇보다도 민주주의에 대한 세뇌와 여론 조작의 늪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 급선무라고 말한다. 촛불 혁명을 통해 주권자 연대와 연합의 힘을 자각한 국민이 직접 대한민국을 통치하는 민주주의야말로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청와대의 주인을 누구로 정할 것인지에 앞서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왜곡에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만민공동회, 3.1운동, 4.19 혁명, 6.10항쟁 등에 이어 주권자가 국가 권력을 한 발 뒤로 물러나게 한 다섯 번째의 혁명을 맞이하고 있다. 정치의 근본을 고민하는 박승옥 상임이사의 글을 5회에 걸쳐 연재한다.  

민주주의는 누구나 알고 있듯이 그리스어 인민(demos)의 통치(kratia에서 유래한 데모크라시(democracy)를 번역한 말이다. 도시국가 데모크라시를 최초로 선보였던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 아테나이 시민들은 자신들의 정치 체제를 자랑스럽게 인민의 통치 체제라고 이름지었다. 여기서 금방 드러나듯 사실 민주주의란 번역어는 데모크라시를 제대로 옮긴 말이 아니다. 데모크라시는 직역하면 인민정(人民政), 민주정이다. 소수의 귀족이나 엘리트가 국가를 통치하는 귀족정(aristocracy), 과두정(oligarchy), 1인의 군주나 독재자, 참주가 국가를 통치하는 왕정(monarchy), 독재정(autocracy), 참주정(tyranocracy)과 구분되는 국가의 정치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데모크라시는 서구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같은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구와 달리 한국, 북한, 중국, 대만, 일본 등 동아시아 5개국은 19세기 말부터 데모크라시를 굳이 민주주의로 번역해서, 인민의 일상 생활과 사회 생활, 국가와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핵심 이데올로기 또는 사상으로 격상시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1인의 독재건 소수의 독재건 그 본질은 독재다. 민주주의는 이와는 백팔십도 다르다. 한 사람의 권력자와 정치가, 소수의 권력자와 정치가가 아니라, 인민 모두가 스스로 정치가가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인민 자치 국가, 이것이 민주주의 국가다. 인민이 10만 명이면 10만 명, 5천만 명이면 5천만 명이 모두 똑같이 1/n의 권력자이자 정치가로서 나라와 공동체를 책임지는 정치, 인민이 통치자인 동시에 피통치자가 되는 체제, 그것이 민주주의다. 한 사람이건 소수건 권력자가 발생할 수 있는 소지를 아예 없애버린 정치 체제, 그게 민주주의다.

민주정과 대의정, 공화정은 명백히 서로 다른 정치 체제 개념이다. 거칠게 말해 민주정은 '모든 인민'이 주권자가 되어 국가를 통치하는 체제인 반면, 대의정은 주권을 위임받은 소수의 대표가 국가를 통치하는 체제다. 공화정은 1인 군주나 독재자의 '뜻'에 따라 통치되는 것이 아니라 공공선(res publica)을 목적으로 '법'에 따라 복수의 인민이 통치하는 체제로서, 왕정, 군주정이 아닌 귀족정, 대의정, 민주정 등이 모두 공화정이다.

다양한 계급 계층으로 나뉘어 있는 국가에서 계급 평등을 추구하고, 개인 이익이 아닌 공공의 이익을 실천하고자 하는 조화의 정치 체제가 공화정이다. 때문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조항은 대한민국은 왕정, 참주정, 독재정, 과두정이 아닐 뿐만 아니라 동시에 대의정도 아니라는 명료한 선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다.

간접 민주주의란 없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 앞에 온갖 수식어를 갖다 붙인 ‘형용사 민주주의’ 시대를 살고 있다. 간접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 대의 민주주의, 의회 민주주의, 참여 민주주의, 심의 민주주의, 인민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 한국적 민주주의 등등 형용사 민주주의는 너무나 많다. 그러나 이 모든 형용사 민주주의는 엄밀하게 말하면 가짜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혼란스럽게 만들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엘리트 지배층들의 인민 세뇌와 여론조작 조어들이다. 

▲ 박승옥 저,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한티재

그 중에서도 특히 '간접 민주주의'라는 말은 정말로 민주주의의 참뜻을 완전히 거꾸로 왜곡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기의 형용사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란 아테나이처럼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의 수가 소수일 때나 가능한 정치 체제이며, 수백만 명, 수천만 명, 수억 명의 인민으로 구성된 근대 국민국가에서 실현 가능한 정치 체제는 그런 '직접 민주주의'가 아니라 주권을 대리인에게 위임하는 간접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한국의 대다수 인민들도 이런 주권 위임의 대의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야말로 현실성 있는 민주주의라는 주장을 정설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잘나고 똑똑한 엘리트 기득권자들의 교묘한 선동에 지나지 않는다. 특히 기득권자들의 하수인으로 민주주의의 실현을 지체시키는 고등 사기꾼들인 이른바 대학교수, 정치학자들이 벌이는 교언영색, 성형술 언어일 뿐이다. 

선거 민주주의, 위임 민주주의는 사실 결코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의정은 오히려 민주정과 선명히 대비되는 엘리트 통치 체제이다.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스위스와 간접 민주주의로 잘 포장된 대의정 체제의 미국, 영국 정치 현실을 주권자의 관점에서 조금만 비교해 보아도 이는 금방 드러난다. 

간접 민주주의란 말 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가짜 개념어다. 위임하는 민주주의, 대의되는 민주주의, 대표자 민주주의란 없다. 그 실체는 위임 독재, 대의 독재, 대표자 독재다. 독재를 거꾸로 민주주의로 포장한 것과 같다. 간접 민주주의란 구소련과 북한 등 현실 사회주의 국가의 민주집중제와 똑같이 엘리트 관료 독재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만든 교활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형용 모순 용어이다. 인민으로 하여금 엘리트 소수 독재 정치를 민주주의 체제로 믿게 만드는 체제 홍보 용어이다. 

민주주의는 그냥 민주주의 하나만 존재한다. 물론 민주주의의 각종 실질 제도와 그 실행 방식은 각 나라의 전통과 문화, 정치 현실에 따라 다양하고도 수많은 변형과 변종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몇 가지 뚜렷한 원칙과 지표를 기준으로 민주주의는 그냥 민주주의일 뿐이다. 

주권은 인권과 마찬가지로 절대로 위임이 불가능한 성질의 권력이다. 인권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면 그 개인은 즉시 자유로운 인간에서 노예로 추락한다. 주권 또한 인권과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에게 위임하면 그 즉시 그는 노예 신세로 전락한다.

주권은 행사하는 것이다. 결코 수집하거나 집적하거나 분산시키는 힘이 아니다. 주권이란 인민이 국가의 주요 정책과 제도, 국가의 방향에 대해 심의하고 토론하고 의결하는 통치자로서의 권리이지 결코 권력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주권을 찬탈해 가 수집하고 집적하고 집중시켜 권력자를 만들어 내는 게 독재와 대의제 정치다. 

민주주의에는 권력자가 필요없다. 권력자가 생겨날 수 있는 소지를 아예 원천 봉쇄해 놓는 것이 민주주의의 제도화이다. 인민이 국가를 직접 통치하고 운영한다는 말은 인민이 국가를 운영하는 어떤 특정한 사람에 대해 결정권을 가진다는 말이 아니라, 인민이 스스로 국가의 주요 정책과 제도에 대해 결정권을 가지고 국가를 통치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사람에 대해 결정하는 선거와 주민소환 제도는 민주주의의 지표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지표는 명백히 국민(주민) 발의, 국민(주민) 투표, 국민(주민) 소환, 국민(주민) 재판 등이다.

청와대가 필요 없는 정치, 박근혜같은 어처구니없는 대통령이 아예 나올 수 없는 정치, 대통령이건 수상이건 그 이름이 뭐든 상관없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사람이란 권력자가 아니라 그냥 인민의 머슴에 지나지 않는 정치, 그것이 민주주의인 것이다. 


빼앗긴 사법주권의 탈환, 이것이 민주주의다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② 대한민국의 사법권력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      
2017.01.31 08:56:47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재건 이후 지금까지 한국의 현실 정치 체제는 이중 권력의 대치 상태를 계속해 왔다. 헌법 제1조의 민주공화국 체제를 이룩하고자 하는 인민의 광장 정치세력과 그리고 헌법 제3장 40조 이하 대의제 조항을 근거로 현실에서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과두정, 독재 참주정이었던 대의제 극장 정치세력 간 대립이 그것이다. 그렇다. 민주주의의 밝은 광장 정치와 대의제의 음습한 권력투쟁 극장 정치가 벌이고 있는 투쟁은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엄연한 현실이다. 

1948년 헌법 제정 당시 조선의 정부는 미군정이었다. 미군정은 일본 제국주의 대신 들어선 군사 정부로서 대한민국 정부의 재건을 집행하고 제헌 헌법 제정을 주도한 실제 권력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미국은 1945년 9월 미군의 조선 점령 초기부터 조선 인민은 자치 능력이 없다고 철저하게 경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정경모, <시대의 불침번>, 한겨레출판, 2010.)

그들의 눈에는 해방이 되자마자 일제 권력이 물러간 권력의 진공 상태에서 조선 인민들이 친일파를 제외하고 좌우합작으로 스스로 조직한 자치 기구 ‘인민위원회’는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미국은 조선에 진주하자마자 일제의 친일부역 조선인 경찰과 관료들을 대거 다시 미군정 경찰과 관료로 재기용했다. 그리고는 1945년 12월 12일 곧바로 인민위원회를 불법화 시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은 자치능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강하게 추진했다. 

그런데 이처럼 미국이 제안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신탁통치안을 친일파 언론과 관료들은 완전히 거꾸로 소련이 제안한 것으로 백팔십도 왜곡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거센 반탁운동을 통해 자신들이 마치 민족주의 세력인 것처럼 포장해 친일 매국 전력을 세탁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미국은 대한민국 헌법을 제정할 때도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은 선언으로만 표현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민주주의의 제도화 대신 민주주의와 정반대되는 대의제 국가의 제도화를 설계했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해서 미합중국을 건설할 당시의 유산자 대표들이 갖고 있던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과 똑같이 1948년 당시 미국은 조선 인민과 조선 인민의 민주주의 실현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조선 인민에게 주권자로서의 자치권을 주는 순간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에게 권력을 넘겨주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조선 인민의 절대 다수는 공산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한국이 주권재민의 민주공화국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은 인민의 박탈된 사법주권만 생각해 보아도 자명하다. 한국의 사법권은 하다못해 미국의 군(county) 단위에서도 채택하고 있는 선거를 통한 인민의 위임 절차도 거치지 않는다. 그저 법전만 달달달 외우고 사법시험과 경찰 시험을 통과한 공무원들이 대통령과 대법원장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나면 그 순간부터 무소불위의 사법 권력을 움켜 쥘 수 있다. 대한민국의 사법 주권은 이들 검사, 판사, 경찰이 갖고 있다. 오늘날 현실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 아니라 사법공화국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명백한 범죄자인 재벌 총수의 구속영장을 인민의 머슴인 일개 판사가 서슴없이 기각하는 기가 막힌 일을 생생하게 목격하고 있는 중이다. 대통령 탄핵을 인민이 스스로 결정할 수도 없고, 몇 명 법 기술자들이 하는 꼴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하는 썩은 내 나는 구체제의 사법주권 찬탈 현장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3권 분립 원칙에도 명백히 어긋나는 사법부 수장의 대통령 임명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4.19혁명 직후인 1960년 6월 15일 의원내각제를 주요 골자로 3차 헌법 개정안이 통과되었다. 이 3차 개정안 제78조는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법관의 자격이 있는 자로써 조직되는 선거인단이 이를 선거하고 대통령이 확인한다.”라고 사법부 법관들이 대법원장을 간선으로 선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주권자인 인민들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직선으로 임명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러나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을 폐기했다는 점에서는 일대 개혁 조처였다. 이에 따라 대법원장과 대법관 선거가 1961년 5월 17일 실시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루 전날인 5월 16일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헌법 자체를 중지시켰기 때문에 무산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한국의 정당이나 시민사회단체들이 툭하면 사법기관에 정치 쟁점의 판단과 결정을 맡기곤 하는 일은 정치 활동을 스스로 포기하는 직무유기이자 정치의 폐기를 자초하고 정치를 희화화시키는 정말로 무지한 행위이다.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은 당연히 시민과 노동자들의 연대 연합과 정치력으로 인민을 조직해서 그 힘으로 국가나 지방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바꾸고자 하는 사회운동이자 정치운동이다. 

그런데 그동안 사실 환경, 노동 관련 소송을 비롯해서 숱한 시민사회운동 관련 소송이 빈번하게 제기되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물론 최후의 수단으로 소송을 제기하는 그 절박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이는 사법주권 대리인들인 국가 공무원들에게 인민의 정치를 내맡기는 시민정치와 노동정치의 포기, 정치 청산주의의 행위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사법주권을 인민들로부터 강탈해 간 사법주권 찬탈자들에게 주권자 인민의 정치 활동까지 의존하게 만드는, 국가주의의 노예의식을 강화시키는 반정치의 활동, 이적행위라고까지 볼 수 있는 것이다. 

모든 공무원과 국가기관은 자신에 대한 임면권을 가진 사람의 눈치를 보고 말을 듣게 되어 있다. 그래서 인민이 공무원의 인사권을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에게 위임하는 순간 공무원은 국민의 공복이 아니라 대통령과 자치단체장에게 충성하는 주구(走狗, 사냥개)가 된다.

사법권 일부를 대통령에게 위임하는 순간 경찰과 검찰은 민중의 지팡이가 아니라 민중을 때려잡는 몽둥이가 된다. 자신에 대한 인사권이 인민과 지역 주민에게 있지 않고 대통령에게 있는데, 공무원과 경찰과 검찰이 인민에게 봉사하고 잘 보여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오직 인사권자의 지시 명령에 따라 충성하고 잘 보이면 된다. 

공무원은 인민의 심부름꾼, 비서, 서기로서 그들의 인사권은 당연이 인민이 갖고 있어야 한다. 공무원을 채용하고 해임할 수 있는 권력은 인민의 핵심 주권 가운데 하나이다. 인민이 인사권을 행사하는 방식은 다양하게 많다. 인민이 아무런 조건도 없이 대통령이나 자치단체장에게 인사권을 위임하는 현재의 한국 대의정 체제는 그래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선거를 의심하라, 정당을 의심하라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③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    
2017.02.06 09:19:47

선거가 민주주의라고? 

턱도 없는 소리다. 민주주의는 앞서 말한 것처럼 선거가 핵심이 아니다. 선거는 민주주의의 보조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아테나이 민주주의를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아테나이 인민들은 선거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요소가 아니라는 상식을 갖고 있었다. 아테나이의 모든 공직은 임기가 1년이었다. 한 번 공직을 맡은 사람은 두 번 다시 공직을 맡을 수 없었다. 행정부를 구성했던 7백 명 가량의 행정직 가운데 6백 명 정도가 제비뽑기로 선출되었다. 시민 모두가 스스로 자신을 통치할 수 있는 주권자이기에 통치기구에 누가 들어가서 일할 것인지 뽑는 방식은 당연히 공정하고 사심과 여론조작이 개입될 수 없는 제비뽑기와 선착순이었다. 민회를 이끌었던 4백~5백 명의 시민대표 평의회 의원도 제비뽑기로 결정되었다. 501명, 1001명, 1501명 등으로 구성되는 시민법정의 배심재판관도 제비뽑기로 뽑았다. 아테나이에서 민주주의의 선출 방식은 당연히 제비뽑기였다.

물론 아테나이에서도 군대 지휘관이나 도시 재정 관리 등 전문 영역에 종사하는 공직자는 선거를 통해 적합한 사람을 뽑았다. 이런 공직자 선거는 아테나이에서도 부자와 인지도 높은 명망가들이 당선되는 경향이 강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그래서 권력이 이들 부자들과 명망가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요한 정책 결정은 민회에서 투표로 결정하도록 했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선거로 선출한 10명의 장군들은 주로 파견부대를 지휘했고, 전쟁이 벌어지면 군대를 이끌고 전장으로 나갔다. 그러나 이들 장군도 민회의 투표로 언제든 다시 소환될 수 있었다. 

아테나이 민주주의가 발전하고 해외 식민지가 확장되면서, 그리고 특히 델로스동맹의 공동기금을 아테나이가 관리하게 되면서 전문 지식이 필요한 분야가 갈수록 늘어나게 되자 점점 더 많은 선거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테나이 민주주의의 통치기구 종사자를 선출하는 기본 방식은 늘 제비뽑기였다. 

아테나이 시민은 누구나 원하기만 하면 행정관에 지원할 수 있었지만 이들은 언제나 민회와 시민법정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엄격한 책임이 뒤따랐다. 1년 임기를 마칠 때는 모든 공직자는 보고서를 작성해야만 했다. 임기 중에도 시민은 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었고 직무정지를 요구할 수 있었다. 시민이면 누구나 행정관에 대한 불신임투표를 제안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재임 시 잘못이 드러나면 매우 과중한 벌금을 물어야 했고 권리를 박탈당했으며, 심지어는 추방당하기까지 했다. 

인민이 통치자이면서 동시에 피치자인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인민이 교대로 통치를 한다는 것을 뜻한다. 통치자와 피치자의 교체 원칙이 민주주의의 핵심 원칙이다. 그것도 소수의 교체가 아니라 될 수 있으면 모든 인민이 통치와 피치를 번갈아 경험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국민발의와 국민투표를 민주주의의 핵심 지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바로 인민이 통치자로서 행하는 주요한 통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결코 대표자나 권력자를 선출하는 것이 민주주의 통치의 핵심이 아닌 것이다. 통치를 받아 본 사람이 통치를 할 때, 통치를 해 본 사람이 피치자로 통치를 받을 때 역지사지의 민주주의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다. 이런 평등한 교체의 원칙을 실현하는데 제비뽑기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소크라테스가 어느 누구도 제비뽑기 방식으로 선원, 건축가, 플루트 연주가를 뽑지는 않는다고 비웃은 것은 민주 정치에 필요한 행정관들과 전문가들을 주권자와 동일하게 놓고 본, 아테나이 시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어이없는 교묘한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에서 시민혁명과 함께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당시 강한 영향을 주었던 루소, 몽테스키외 등의 사상가도 선거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구 근대국가의 탄생 초기 공화정을 만들면서 의회 구성원인 인민의 대표를 뽑을 때 제비뽑기는 거의 거론조차 되지 않고 무시되었다. 그리고 인민 대표의 선출 방식으로는 선거가 거의 아무런 논란도 없이 당연하게 채택되었다. 이것은 서구 근대의 정치 혁명이란 절대 왕정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아니라 의회정, 대의정으로의 이행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 당시 국가 권력에 참여하는 새로운 의회 대표를 뽑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가치는 다름아닌 피치자인 '인민의 동의'였다. 인민의 동의가 없는 왕정과 달리 공화정은 반드시 인민의 동의가 필요했다. 그리고 인민의 동의에 걸맞는 인민 대표 선출 방식은 신의 의지나 우연이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제비뽑기가 아니라 선거였다. 선거는 인민이 직접 대표를 자신의 손으로 선택한다는 의미에서 주권의 행사라는 손에 잡히는 권력 행사로 손쉽게 받아들여졌다. 선거와 투표는 이렇게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형성 초기에 공화정과 대의정을 대표하는 제도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인감 도장을 잘못 찍어 패가망신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된 사례를 주위에서 흔히 접한다. 그래서 인감도장은 누구나 엄격히 관리하고 계약서를 작성할 때는 꼼꼼히 세부 조항을 살펴본다. 만약 계약서에 불리한 조항이 있으면 수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다시 작성한다. 

선거에서 대표자에게 표를 찍는 행위는 주권의 위임 양도 계약서에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 주권의 위임 양도 계약서란 인신매매 계약서와 동일한 성격의 주권매매 계약서이다. 신체포기 각서와 똑같은 주권 포기 각서와 하등 차이가 없다. 

주권은 공동체 사회생활의 핵심이자 삶의 근거이다. 주권이란 사회와 국가 차원에서 당연한 권리로 획득된 제2의 생명이자 인민의 영혼과 육체로서 분리 불가능한 것이다. 이같은 금쪽같은 주권을 양도하는 노예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이 다름아닌 한국의 대통령과 국회의원, 지방의원 선거일의 투표인 것이다. 

정당이 민주주의라고? 

정당은 대의제와 함께 나온 대의제의 쌍둥이다. 영국에서 모습을 드러낸 토리와 휘그 양 정당은 당시 권력에 참여하고 있던 지주계급과 귀족, 극소수 부유층 가운데 제임스 2세의 즉위를 놓고 찬반 양 진영으로 갈린 것이 기원이었다. 정당은 처음부터 최고 권력자를 세우기 위한 권력 획득 투쟁의 정치조직이었다. 결코 주권자의 정치, 주권 통치를 추구한 조직이 아니었다.

명예혁명을 통해 의회가 권력을 장악한 대의정 체제가 발달하면서 영국에서는 지구상에 처음으로 등장한 신흥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을 기반으로 각각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보수-진보의 양대 정당체제가 정립되었다. 정당은 자신들의 계급 이해관계를 대표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자 의회 권력을 비롯한 국가 권력 장악이 최고의 목표인 정치조직이었다. 인민이 직접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테나이 시민들에게 현대 정당을 설명하면 아마도 그 즉시 공동체와 국가를 분열로 이끄는 참주정의 음모 조직으로 단죄했을 것이다.

정당은 선거 조직이다. 계급 정당이건 보통선거권의 확대와 함께 등장한 국민정당이건 정당은 오직 선거를 위한 정당이다. 가뭄 때는 마치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다가도 비가 오면 갑자기 새파랗게 살아나는 바위손처럼 선거가 없는 평소에는 당원의 정치활동이란 게 있는지조차 희미하다가 선거 때만 되면 당원들을 동원하는 온갖 모임으로 되살아나는 한국의 정당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의원내각제를 채택하고 있고, 의회가 이미 있는 상태에서 정당을 조직해 의회 권력에 참여한 서구 국가들의 경우에는 정당의 영향력이 강하고 정당의 상설 기능이 약간이라도 존재한다. 반면에 대통령제의 미국 정당들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직 선거 때만 기능하는 선거 전문 정당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정당은 명백히 유력한 사람 중심으로, 유망한 대통령 후보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철새 정당에 가깝다.

오늘날 특정한 주의주장이나 정책 중심의 정당은 녹색당이나 일부 공산당과 사회주의 정당을 빼고는 현실에서는 거의 없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정당도 보수 정당도 그 이름과 지지기반의 차이만 약간 존재할 뿐 이제는 주의주장이나 정강정책이 크게 차이가 나지도 않는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 표를 긁어모을 만한 공약과 정책을 서로 베끼다보니 이 당이 저 당같고 저 당이 이 당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당은 반드시 과두제화 한다. 전위정당은 말할 것도 없고 간부정당이건 대중정당이건 뭐건,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민의 정치 참여를 온갖 미사여구와 번지르르한 상투어로 늘어놓아도 정당은 반드시 선출된 대표자 중심으로 운영되고 엘리트 귀족정치화 된다. 의회주권론이란 말 자체가 인민주권론이라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를 정면에서 부정하는 정당의 속성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대의제가 진정한 인민주권의 민주주의가 아니듯 정당 또한 민주주의가 아니다. 정당을 사회를 대표해서 국가를 견제하는 민주정치의 도구로 보건 민의조작과 유권자 조종을 통해 소수 지배층의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한 득표 조직으로 보건 민주주의의 기만이긴 마찬가지다. 

정당은 참주정의 비옥한 근거지이다. 히틀러는 국가사회주의당을 기반으로 순식간에 총통이 되었다. 무솔리니도 그랬고 박정희도 그랬다. 레닌도 러시아사회민주당을 근거로 일당독재의 사회주의 국가 독재자가 되었다. 인민 민주주의를 표방했던 김일성도 조선노동당을 기반으로 곧바로 독재자로 변신했고, 곧 이어 김씨 왕조 국가를 만들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직업 정치가의 강력한 지도력이나 참주, 독재자, 주권의 대리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주권을 직접 행사하고 나라를 통치하는 그런 민주주의 공화국의 나라, 자유인들이 살아 숨쉬는 세상을 원할 뿐이다.

정당의 역사는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겠다는 의지와 포부를 밝힌 대표자들이 국가 이익과 공공의 이익을 앞세워 인민을 속인 사기와 기만의 역사였다. 대표자들은 인민의 이익을 대변하기는커녕 결국 그 자신이 권력자 기득권층이 되어 인민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데 앞장서 왔다. 우리는 지금까지 70년 동안 숱하게 그런 대표자들에게 속을 만큼 속아 왔다. 사실 이제 한국의 유권자 치고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때가 되면 선거가 있고 대표자를 뽑으라니까 조금 덜 나쁜 놈으로 뽑는 차악의 선택이 그나마 좀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마침내 결사의 시대가 왔다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④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     
2017.02.13 10:48:50

6.25동란 이후 집단 광기와도 같았던 극단의 반공주의가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는 철저히 제한되었고 시위와 집회는 빨갱이나 하는 짓으로 금압되었다. 인민들은 대의정의 탈을 쓴 소수 친미 기득권자들의 극장정치, 쇼윈도우 정치 놀음만 구경할 수 밖에 없었다. 친미 기득권자들은 대부분 충성의 대상만 바꾼 친일 주구들이었다.

그런 민주주의의 암흑 시기를 뚫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것이 바로 다름아닌 4.19혁명이었다. 4.19혁명은 중학생들부터 광장으로 뛰쳐 나와 부정선거 규탄과 이승만 정권 타도를 외치고, 민주주의의 광장정치를 부활시킨 진실로 위대한 인민의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인민은 우매한 것이 아니라 집단지성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시킨 정치혁명이었다. 박정희의 유신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것도 1979년 부마민중항쟁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 체제를 무너뜨린 것 또한 1987년 6월 항쟁이었다. 그리고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에 이어 2016년 지금 우리는 광장정치의 부활을 다시금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는 지금 조선의 멸망 이래 인민의 연대와 연합으로 권력과 싸워 이겨 권력을 잠시 뒤로 물러나게 한 다섯 번째의 민주주의 광장 한복판에 진출해 있다. 맨 먼저 1898년 만민공동회는 인민의 힘으로 당시 친러 수구 내각을 최초로 퇴각시킨 민주주의 혁명이었다. 두 번째로 1919년 전국 방방골골에서 터져 나온 대한독립 만세의 3.1 만세 시위 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를 잠시 뒤로 물러나게 했다. 세 번째가 4.19 혁명, 네 번째가 6.10항쟁이었다. 1980년의 서울의 봄과 광주민중항쟁, 2008년의 광우병 촛불 시위는 권력을 뒤로 물러서게 하기까지는 못했다. 

한국 인민들은 총칼로 무장한 군사독재정권을 연대 연합의 힘으로 굴복시킨 위대한 경험을 갖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은 무장투쟁이 아닌 오직 끈질긴 맨 손의 집회와 시위만으로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한국 민주주의 운동의 이정표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박정희가 1961년 5월 16일 민주공화국을 전복시키고 출범시킨 26년간의 독재정 체제를 그나마 대의정 체제로 바꿀 수 있었다. 그로부터 또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참주 대의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그야말로 제대로 된 민주공화국을 이룩하기 위해 연대 연합의 힘을 다시 결집해 광장으로 나오고 있는 중이다. 

6월 항쟁 이후 30여년의 대의정 체제 적폐와 모순만이 아니다. 지금의 현실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재건 이후 70여 년 동안 쌓이고 쌓였던 주권 박탈의 적폐가 드디어 청산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박정희 신화를 끝장낼 수 있는 통과 제의가 박정희 신화의 주술과 사슬을 끊어버린 인민 스스로의 자각에 의해 드디어 찾아 온 것이다.

일찍이 1백년도 훨씬 전인 1898년 근대 세계로의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우리의 선조들은 만민공동회라는 주권자 인민 주도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를 최초로 선보인 바 있었다. 아관파천 이래 부산의 절영도(지금의 영도)를 러시아에 석탄저장소 조차지로 넘겨주는 등 열강에 각종 이권을 넘겨주는 친러파 수구 정권의 매국 행위와 부패에 대해 당시 조선 인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었다. 인민들은 이를 시정할 것을 요구하면서 3월 10일부터 거의 매일같이 만민공동회를 열었다. 촛불만 없었지 그 규모와 성격 면에서 오늘날 촛불 집회와 하등 다를 바 없었던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효시였다. 

만민공동회는 이전의 집단 상소나 민란과는 전혀 다르게 자치에 대한 주권자로서의 자각과 함께 실제로 인민이 스스로 주권을 행사한 강력한 집회와 시위였다. 당시 서울 인구가 17만여 명이었는데, 만민공동회에 모인 성인 남자는 3월 10일 1만 명, 3월 12일에는 수만 명이나 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을 제외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몰려 나온 것이었다. 종로 거리 일대는 모여든 인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만민공동회를 참관한 각국 공사들과 외교관들조차 대회의 열기와 결의에 큰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선 인민들의 급속한 성장에 놀라움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의 지도 아래 개최되었지만, 3월 12일의 만민공동회는 똑같은 장소에서 남촌의 평민들이 주축이 되어 스스로 개최한 대회였다. 이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수만 명의 인민들은 시위대 군인들이 해산을 시도하자 투석전으로 이를 물리치기도 했다. 만민공동회에서 조선 인민들이 러시아와 열강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면서 결의한 요구 조건, 즉 절영도 조차 반대, 러시아 교관과 재정고문 철수 등에 대해 조선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천민이었던 백정과 나무꾼, 기생과 걸인, 아이들까지 전 인민이 연대하여 몇 달 동안 끈질기게 집회를 지속시켰을 뿐만 아니라 10월 1일부터는 12일 동안이나 철야 집회를 열어 마침내 박정양, 민영환 등의 개혁파 내각을 출범시키는 성과를 얻어 냈다. 실로 주권자 인민의 힘을 자각하는 위대한 민주주의 정치 혁명의 순간이었다.

주권자 정치 혁명이 시작되었다 

2016년 10월부터 시작된 촛불 시위는 전국 방방골골의 지방으로, 나아가 국내뿐 아니라 한국인이 있는 세계 곳곳으로 확산돼 일어나는 동시 혁명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는 1919년 3·1운동 당시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선언한 것과 비견되는, 대한민국의 주권이 인민에게 있음을 선포하는 주권자 정치 혁명 선언에 다름 아니다.

혁명이란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체제가 들어서는 것이다. 그리고 반드시 헌법 개정이나 제정을 동반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 한국의 촛불 혁명은 주권자인 인민들의 각성과 민주주의 능력의 발휘 여하에 따라 어떤 민주공화국 체제로 귀결될지가 결정되는 현재진행형의 혁명이다. 동시에 이 혁명은 촛불 시위와 촛불 소등, 촛불 공연 등 새로운 축제 개념의 혁명을 선보인다는 점에서도 새로운 21세기형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국회의원의 손전화가 불이 날 정도로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내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우편, 현수막, 기상천외한 깃발 제작, 스티커 부착 등등 인민들의 다재다능한 창의가 자유롭게 쏟아져 나오는 '창조 혁명'이기도 하다. 

6월 항쟁은 군사독재 체제의 타도와 직선제 개헌 목표에 집중된 투쟁이었다. 직선제 개헌 이후의 정치 체제는 대통령제 그대로였다. 그래서 항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2016년 촛불도 박근혜 탄핵과 퇴진이라는 집중된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는 분명한 촛불 항쟁이다. 그러나 2016년 촛불혁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자각한 주권자들이 주권 행사의 목표 지점을 뚜렷하게 새로운 민주공화국 체제로 향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체제 변화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정치 혁명이다. 그리고 이제 한국 주권자들은 민주공화국의 주인으로서 대통령을 탄핵하는 값진 승리의 경험을 첫걸음으로 혁명을 완성하는 길고 긴 대장정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라는 표현은 인민의 자유가 어떤 순서로 실천되는지 정확히 말해주고 있다. 사람들은 먼저 말을 배우고 나서 글을 배운다. 말하고 나서 토론하고 그리고 토론 주제에 관한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 주장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서 집회와 시위를 한다.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먼저 알고 인식한 뒤에 기후변화와 미세먼지의 심각성을 알리는 글도 쓰고 소책자를 발간하기도 하고 그런 뒤에서야 정책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석탄화력 발전소 폐쇄를 홍보하는 집회와 시위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같은 언론 출판 집회 시위를 상설의 자유로 지키고 지속시킬 수 있는 결사체를 조직한다.

당연히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격렬한 집회와 시위 이후에는 다음 순서로 인민 스스로의 수많은 결사체가 비온 뒤 대나무 순 올라오듯 만들어진다. 4.19혁명 뒤에 교원노조를 비롯한 노동자 단체와 정당, 정치 단체, 양민학살 진상규명 단체 등 인민 스스로의 단체가 속출했다. 그동안 억눌려 왔던 결사의 자유를 마음것 봇물 터트리듯 행사하고 나선 것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는 민주노조와 농민회를 비롯하여 환경, 여성, 보건의료 등 부문별로 수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결성되어 이른바 신사회운동의 시대를 열어 제꼈다. 만민공동회 이후 수많은 인민들의 결사체들이야말로 한국 독립운동의 뿌리였다. 3.1운동 이후에는 또 노동조합, 농민회 등을 비롯해 신간회와 수많은 문학단체와 문화예술 단체들이 식민지 사회운동의 시대를 주도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2016년의 광장 정치 또한 새롭고 젊은 수많은 민주주의 결사체 탄생을 예고하고 있다. 

바야흐로 이제 마침내 결사의 때가 왔다. 마침내 우리는 권력이 물러난 그 자유의 공간에서 나와 똑같은 공동체의 이웃들을 발견했다. 이웃과 동료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발견했다. 내 삶과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연대하고 결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해방감을 회복했다. 그리고 인민의 연대와 연합이란 다름아닌 이같은 자유로운 결사체로 구체화 될 수밖에 없다. 

남북의 적대적 공존을 누가 어디서부터 어떻게 허물어뜨릴 수 있을 것인가. 남북 기득권 전쟁세력의 적대적 공존을 남북 평화세력의 공생과 호혜 상생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주체 세력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사회, 빈익빈 부익부의 불평등 없이 누구나 일한만큼 공정한 댓가를 받을 수 있고, 안전한 삶을 누리며 자유와 평등을 누리는 자유인들의 연대 사회로 어떻게 만들어 나갈 것인가. 그렇다. 주권자 인민 스스로의 결사운동, 그 외에 다른 답이 있을 수 없다. 문제는 인민의 결사다. 

우리는 수많은 결사체를 우리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만드는 놀라운 현실의 변화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특히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고 자유발언을 한 중고등 학생 등 청소년들의 수많은 결사체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역에서부터 가까운 이웃과 뜻이 맞는 동료들과 결사해서 회의하고 토론하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행동을 실천하게 될 것이다. 전국 차원의 결사체도 만들 수 있다. 기존의 결사체에 들어가 새로운 개혁을 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시민사회단체, 정치단체, 협동조합 등 수많은 결사를 지역에서부터 더 많이 만들고 수많은 모임과 회의를 더 자주 가지는 것이야말로 촛불 이후의 진정한 촛불 혁명이다. 그런 수많은 모임과 회의와 토론이 모여 연대와 연합의 위대한 힘이 결집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권을 탈환하는 지름길이고 내 삶과 세상을 바꾸는 주권자 자유인으로 변신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인민이 단순히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집회와 시위는 그 동기가 사라지면 중단된다. 국가와 사회 체제를 민주주의로 바꾸기 위해서는 집회와 시위만으로 불가능하다. 민주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과정도 이행 이후의 유지도 집회와 시위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집회와 시위를 조직하는 인민 스스로의 결사체가 없다면 지속가능한 집회와 시위조차 불가능하다. 헌법과 법을 바꾸고 정책과 제도를 바꾸는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추동하고 이끌어내는 것이 바로 수많은 인민의 결사체들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인민의 일상생활 모든 분야에 걸쳐 수도 없이 만들어지는 지역 인민들의 결사체들이다. 지역 결사체들의 연대와 연합이다. 민주주의는 인민의 수많은 결사체가 없으면 이행도 유지도 안 된다. 인민의 결사체는 민주주의 광장 정치를 지속시키고 민주공화국을 유지하는 기둥이다.  



'극장 정치'를 무너뜨리자

[내가 알아야 민주주의다] ⑤
박승옥 기적의협동조합 상임이사       
2017.02.19 13:50:50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주권자 인민의 직접 행동이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음에도 대한민국은 왜 아직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대의제 참주정, 기득권자들의 과두정 정치 체제가 지속되고 있을까? 그냥 미군정과 미국 탓만 하고 있으면 될까? 아니면 뛰어난 정치 지도자가 없어서일까? 

미군정과 미국의 책임도 있고, 역대 정치 지도자들의 무능력도 책임이 있긴 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책임은 우리들 인민 스스로에게 있다. 주권자로서 민주정치를 책임지고 운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과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광장 정치를 부활시키는 데는 성공했으면서도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제대로 실현시키지는 못했다. 광장을 열어 제끼고 민주주의의 백화제방을 이룩한 뒤엔 늘 똑같은 방식으로 다시 대통령이나 정당을 바꾸는 권력자 바꾸기의 대의제 극장정치 시즌 1, 2의 시리즈물이 반복되게끔 허용하고 말았다. 

대의제를 민주주의로 잘못 인식하면 대의 권력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나는 것은 요원하다. 자신의 주권을 찬탈당한지도 모르는 무능은 인민을 엘리트 참주 정치가들의 선동에 농락당하는 시청자 대중으로 전락하게 만든다. 우리 스스로 뿌리깊은 나무 바람에 아니 흔들릴 정도로 대한민국을 민주주의 정치 체제로 굳건하게 만들지 못하면 광장정치의 부활 이후에 시리즈물 극장정치의 연속 상영 행태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솔직히 이 점을 자각하고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 차원 이전에 일상생활에서조차 민주주의를 실천하지 못해 왔고, 지금도 못하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서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심지어는 취미 동아리에서조차도 민주주의는 없거나 무기력하다.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밝히는 자유인으로서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해 왔다. 가정에서도 아버지 어머니는 절대 군주처럼 일상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고 학교에서도 학생 자치는 구호일 뿐 힘 있는 교장 선생님이 거의 모든 문제를 결정한다. 군대와 직장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지역공동체의 일상 속에서도 온갖 비리와 부정의에 대한 자유인으로서의 당당한 비판과 주권 행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나 하나 참고 지내면 속편하지 하는 외면과 무관심에 익숙해 있다. 스스로 자신의 처지와 신세를 자각하지 못하는 주권자는, 주권자도 자유인도 아니다. 아니 자격조차 없다.

요즘 유행하는 개개인의 내면의 힐링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공동체와 사회, 국가 차원의 힐링과 성찰이 전제되지 않는 개인의 힐링은 불가능하다. 눈을 뜨면 도처에 불의와 불평등의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참혹한 이웃이 있는데, 눈을 감고 외면한 채 내면의 힐링과 평화를 추구한다는 것은 도피이자 기만의 평화이다. 내 가족, 내 이웃의 삶,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를 자유롭고 평등한 자유인들의 사회와 국가로 바꾸는 일은 그래서 그 어떤 종교혁명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예수와 붇다 등 동서양의 그 어떤 종교 지도자들도 사회와 국가의 현실을 정면에서 응시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다만 예수와 붇다는 사회와 국가의 혁명만 가지고는 인간이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없다는 자명한 진리를 설파했던 것이다. 

주권자가 자유인으로서 인민의 정치혁명을 시작하는 일은 그러므로 거창한 이데올로기 혁명에 그치지 않는다. 주권자 혁명은 보통 사람들의 삶의 혁명이자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다. 그리고 종교의 영성을 동반한 혁명이기도 하다. 

문제는 지역이다 

문제는 지역이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민주주의 광장 정치를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부터 상설의 민주주의 광장정치로 확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우리는 더이상 연기 잘하는 정치 배우들이 등장해 쇼를 연출하는 극장 무대의 멍청한 관객이 아니다. 출구조사와 밤샘 개표 방송같은 투표권의 드라마 무대에 일희일비하는 고립된 모래알 주권자가 아니다.

매일매일 지역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수많은 지역 주민이 출연하는 상설의 야외 정치광장 무대를 설치하는 것은 이제 지역 주권자의 몫이다. 비상근 정치인으로서 매일매일 일상의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일은 지역 주민의 과제이다. 지역의 주요 정책과 제도, 국가의 주요 정책과 제도를 인민이 직접 알고 심의하고 결정하는 상설의 정치 제도를 만들고 이를 실행하는 것은 이제 지역 촛불 연대와 연합이 해야 할 일이다. 지역 촛불의 연대와 연합이 광화문 촛불의 마르지 않는 수원지며, 이것이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100년이 넘는 한국 중앙정치의 기득권 지배 세력 구조는 지방에 똑같은 토호세력 지배 구조로 연결돼 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중앙 기득권 지배 세력들의 그 착취의 빨대는 곧바로 다름아닌 지역의 주권자 인민들에게 꽂혀 있다. 깨어 있는 지역 주권자들이 연대하고 연합하면 이런 빨대부터 잘라내는 것은 사실 일도 아니다. 지역 토호 세력들의 대의제 극장 정치 구조를 지역 인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 광장 정치 구조로 바꾸는 것도 그리 어려운 과제가 아니다. 독재 세력의 권력과 돈의 원천을 무너뜨리는 것은 의외로 간단하다.

재벌과 언론, 특권 관료 등 극우 기득권 매국노들의 주요한 경제 기반은 기업과 부동산이고, 금융과 국가 재정이다. 예컨대 전체 인민의 절반이 무주택자인 현실에서 서울의 지역인 강남을 비롯한 도시 곳곳의 건물과 주택, 전국에 걸친 지방의 토지는 이들의 마르지 않는 젓줄이다. 청문회 때마다 불거지는 장관과 국회의원 후보들의 불법 땅 투기는 하나의 삽화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런 불법과 탈법, 부패의 땅 투기부터 지역 주권자들의 단합된 힘으로 얼마든지 없애 버릴 수 있다. 지역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 세력이, 지역 정치의 연대 연합이 전국 방방골골에서 지역 기득권 토호정치를 바꾸고, 동시에 그 힘으로 중앙의 극장정치 무대를 밑에서부터 허물수 있는 다양한 길은 이미 열려 있다. 

혁명은 멈춤이다, 공동의 집 건축이다 

▲ 내가 알야야 민주주의다 ⓒ한티재

사실 대의제 과두정 권력자들의 힘의 원천은 억압당하는 인민 개개인의 모래알같이 분산된 평등 주권이다. 참주 권력자를 만든 건 다름아닌 인민 자신들이다. 자본주의의 힘의 원천은 착취당하는 인민 개개인의 먼지 같은 피와 땀이다. 자본주의의 흡혈귀들을 만든 건 다름 아닌 인민 자신들이다. 인민들이 스스로 착취당함과 억압당함을 받아들인 노예가 되었기 때문에 권력자와 재벌이 그렇게 괴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민들이 극장정치 관객으로 스스로 원룸에 유폐되어 있었기에 권력이 저렇게 막강한 힘을 휘둘러 대고 있었던 것이다. 재래시장 대신 재벌의 대형 마트에서 시장을 보고, 중소기업 제품 대신 재벌의 브랜드 상품을 구매했기 때문에 재벌이 저렇게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인민들을 마음껏 착취하고 억압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인민이 모두 권력과 재물의 태산과 바벨탑에 가는 것을 멈추고, 거기 가서 밭농사 논농사도 짓지 말고, 넘치고 넘치는 상품 만드는 일도 하지 말고, 거기 가서 시장도 보지 말고, 그러면 바벨탑의 콘베이어 벨트는 돌아가지 않고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러면 체제는 저절로 멈추어 진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그저 즐겁게 이웃의 티끌과 바보들과 함께 스스로 집 밥 만들어 같이 나누어 먹고, 함께 일하고, 기쁘게 놀면 된다. 예수님의 오병이어 기적은 이런 멈춤의 지혜와 우리의 ‘공동의 집’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이다.

멈춤이야말로 수탈당하는 노동 노예들, 억압당하고 힘없는 바보들과 티끌들의 최상의 지혜이다. 무력으로 권력자와 재벌들과 군산복합체와 국제 금융마피아들을 이길 가능성은 이제는 전혀 없다. 무력과 착취와 억압을 이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또다른 무력이 아니라, 멈춤과 비폭력 평화다. 바보들이 착취당함과 억압당함을 멈추는 그 순간 돈과 권력은 힘없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만다. 티끌들이 자유인이 되고 바보가 되어 자유와 자비의 삶을 이웃과 함께 누리는 것, 그것이 저 권력과 부를 허무는 지름길이다. 신자유주의를 이기는 가장 슬기롭고 즐거운 비폭력 평화의 체제 바꾸기 비법이다. 

무엇보다도 주권자인 인민이 지배자들이 던져 준 허상의 고정관념을 깨고 생각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지름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주위 사람들을 보수와 진보의 진영으로 나누어 편을 가르는 진영 논리와 진영의 삶에서 벗어나는 것이 출발이다. 보수-진보의 적대적 진영 수렁에서 빠져 나와야 새로운 신천지를 볼 수 있다. 적대와 배제, 살인과 전쟁의 논리를 버리고, 하루라도 빨리 자유로운 ‘살림’과 삶의 세상으로 건너오는 것이 자유인의 첫걸음이다. 죽임의 이분법 이데올로기를 극복하고 다채로운 자유인의 삶으로 가는 길로의 방향 전환이다. 허상의 살얼음에 불과한 구체제의 철벽을 과감하게 부수고 감옥에서 탈출하는 행동 선언의 제1조는 각자 도생에서 동반 공생으로 생각을 바꾸는 것이다.

생각을 바꿔야 결사하고, 결사해야 생각이 바뀐다 

우리는 결사의 때에 결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생각을 바꿔야 결사하고 결사해야 생각이 바뀐다. 이미 지역에서부터 결사의 씨앗들이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이제 그 결사와 인민의 연대와 연합으로 지역과 중앙의 대의제 극장정치 무대가 완전히 허물어 지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광화문의 새로운 민주주의의 광장 정치 무대가 전국 각 지역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 무대를 세우는 배움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나날이 주권자 자유인으로 거듭나고 있는 한국의 인민들은 모든 구체제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있다. 서구화 산업화만을 맹목으로 추종하는 서구 중심 세계관도, 서구 학문에 그저 맹종하는 식민지 근성의 사슬도 과감하게 끊어버리고 과감하게 자유와 해방을 되찾고 있다. 스마트폰에 머리를 박고 우리의 생각을 외주로 주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의 세상에서 벗어나, 스마트폰의 장점을 활용하면서도 사색하는 자유인으로 재생하고 있다. 혼밥과 혼술의 고립에서 벗어나 이웃과 친구와 대면하는 새로운 세상은 이미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한국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뿌리는 지역이다. 뿌리가 마르면 나무 자체가 말라 죽는다. 지역공동체란 중앙 권력의 하위 권력으로 작동하는 지방과 달리 인민 스스로의 자치가 실현되는 인민의 생활 근거지다. 중앙정치, 서울정치의 무대인 광화문과 서울시청과 똑같이 중요한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무대는 지역공동체다. 지역에서부터 지역 주권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인민 자치의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추동하지 못하면 민주주의 광장정치는 백일몽으로 끝난다. 인민의 연대는 그저 막연한 개별 인민들의 뿌리없고 가벼운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이웃들과 연대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지역 광장 정치 연대가 대의제 극장정치를 무너뜨린다 

대의제 극장정치 무대는 중앙이고 서울이다. 민주주의는 밑에서부터 이루어지는 하층 연대로서의 풀뿌리 인민 스스로의 자치와 통치다.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대의제 극장 정치를 포위해 밑에서부터 무대 자체를 허물 수 있는 힘은 수많은 지역의 상설 민주주의 광장 정치의 근거지 연대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다. 지역이 연대 연합해야 중앙이 바뀐다.

지역 주민들 스스로 지역의 정치를 바꾸고 지역 정치결사체의 연대와 연합의 힘으로 국가 정치를 극장정치에서 광장 정치로 바꾸지 못하면 주권 탈환은 또다시 불가능해진다. 지긋지긋한 기득권 가짜 보수-진보의 적대적 공존 상태를 허물어뜨리지 못하면 장삼이사 인민의 인간다운 삶은 해결책이 없다. 숱한 지역 주민의 민주주의 광장 정치야말로 대한민국과 내 삶, 이웃의 삶을 바꾸는 튼튼한 근거지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운명은 이같은 수많은 지역 주민들의 일상의 광장 정치에 있다. 나아가 지역에서부터 인민 주권을 실현하는 주민발의, 주민투표, 주민소환, 주민감사의 일상에서의 제도화를 지역 주권자의 힘으로 실현해야 한다. 일정액 이상의 자치단체 사업은 반드시 주민투표를 거쳐야 하는 제도화를 실현해야 한다. 그래야 대의제 정경 유착의 자금줄이 끊어진다. 

서울도 지역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광역시와 25개 자치구는 국가 권력이 작동하는 지방 행정기관이다. 그러나 마을공동체는 인민의 자치가 살아 숨쉬는 공간이다. 서울의 마을공동체 운동이 살아나 숨쉬는 공간이 바로 풀뿌리 지역이다. 

서울의 전통 지역공동체가 산산히 해체된 폐허 위에서 우리는 지금 마을공동체의 부활을 목도하고 있는 중이다. 6.25 이전 170여만 명이던 서울시 인구는 지금은 1천만이 넘는 거대 도시로 변모했다. 산업화와 함께 불어닥친 이농민의 서울 집중이란 또한 도시빈민의 성장 과정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말부터 도시빈민 공동체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도시빈민 공동체 운동은 재개발의 광풍과 뉴타운 광풍 앞에서 주민들의 빈번한 이주로 인해 무력화 되고 말았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공동육아 운동으로부터 시작된 마을공동체 운동은 이제 서울의 풀뿌리 지역 곳곳에서 새로운 지역자치의 공동체 운동으로 성장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런 대도시의 지역 마을공동체 운동이야말로 협동조합 운동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확실한 근거지가 아닐 수 없다. 

서울의 밑바닥 마을공동체에서부터 365일 문이 열린 민주주의 상설 광장 정치가 지역 정치를 바꾼다. 지역 근거지 연대, 지역 상설 광장 정치 연대가 극장 정치를 몰아내고 한국 민주주의를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지역의 민주주의 정치가 중앙정치와 대의제 극장 정치를 해체하는 도미노의 시작이다.


'1987년 이데올로기'와 작별하자!
[장석준 칼럼] "바리게이트 안쪽의 우상도 몰아내야"
장석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2017.02.21 12:02:07

요즘 토요일에  서울 시내에 나가면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세종로에서 광화문 네거리를 거쳐 태평로로 이어지는 대로의 남쪽과 북쪽이 전혀 딴 세상 같다. 세종로에서는 탄핵을 촉구하는 촛불 집회가 열린다. 반면 시청 앞에서는 태극기를 흔들며 탄핵 기각을 외치는 집회가 벌어진다.

세종로 쪽 인파에는 여러 연령대가 섞여 있는 데 반해 시청 광장에는 고령층이 압도적으로 많다. 세종로에서는 팔짱 낀 젊은 남녀나 유모차를 끌고 나온 가족이 자주 눈에 띄는 반면 시청 쪽에서는 군복 입고 색안경 낀 초로의 남성들이 눈길을 끈다. 규모 면에서는 비교가 안 된다. 시청 앞에 모인 이들의 수를 아무리 많이 쳐줘도 여론조사에서 계속 확인되는 '탄핵 지지 80% 대 반대 20%'의 구도가 얼추 비슷하게 나타난다.

2017년 벽두에 주말마다 서울 중심가에서 반복되는 이 기이한 광경은 한국 사회를 가로지르는 분단선을 새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이 나라의 현대사가 퇴적된 결과인 시민사회 내 단층들이 선명히 노출된다. 촛불 시위는 이 단층들이 지표면 위로 드러나도록 시민사회를 크게 흔들어놓았지만, 단층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2006~2007년 촛불 시위는 새로운 단층 하나를 더 보태서 한국 시민사회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지도 모른다.  

시청 광장에 모인 시민사회의 제1층  

어느 나라든 시민사회에는 근대의 두 혁명, 즉 자본주의 혁명과 민주주의 혁명에 참여하고 반응하며 이를 재구성해온 과거 여러 세대의 경험들이 퇴적돼 있다. 이런 역사적 경험들이 여러 조직과 전통, 담론과 행동양식을 통해 현재 시민사회의 구조로 이어진다. 집단 경험 중에서도 특히 대중적 사회운동이 중요하다. 자본주의 초기부터 자본과 국가에 독립적이면서 때로 이들과 대결한 노동조합 같은 조직들이 이후 시민사회의 중핵 구실을 하게 된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대비되는 한국 현대사의 특징은 이런 사회운동의 초기 성장 과정이 부재하다는 점이다. 실은 '부재하다'는 말은 잘못이다. '존재했다'. 일제 강점기(특히 1920년대)에 곳곳에서 노동조합, 농민조합을 건설하려 했고, 이런 흐름이 해방 공간에서 잠시나마 꽃을 피웠으며, 1960년 4월 혁명 직후에도 비슷한 조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경험이 다 폭력적으로 단절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공간의 사회운동은 분단과 전쟁으로, 4월 혁명 직후의 시도는 5.16 쿠데타로 짓밟혔다. 그래서 비록 역사책에 기록으로는 남았으되 과거 운동의 경험이 시민사회에 자취를 남기지는 못했다. 즉, 한국 시민사회는 사회운동의 과거를 '빼앗겼다'.  

자연과 마찬가지로 사회 역시 진공을 싫어한다. 사회운동의 부재로 빈 공간은 이내 사회운동의 기능을 대체할 다른 조직들로 채워졌다.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는 새마을운동을 필두로 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가 불어난 관변 조직이었다. 둘째는 자생적인 자조(自助) 단체로 출발해 강력한 연줄 문화의 토대가 된 향우회, 동창회였다. 셋째는 서민층을 집중 공략한 보수 개신교 교회였다. 한국에서 시민사회의 가장 단단한 밑바닥, 제1층을 이루는 것은 사회운동의 이러한 역사적 대체물들이다.  

이들을 노인층과 일치시킬 수는 없다. 노인층의 세대적 속성으로 환원해서 설명할 수도 없다. 하지만 노인층과 경향상 중첩되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의 노인층은 자본주의 혁명의 수레바퀴를 굴리느라 청춘을 보낸 세대다. 다른 자본주의 국가였다면 마땅히 사회운동을 생존의 무기로 삼았겠지만, 이들은 그 반공-국가주의적 대체물에 의지해야만 했다. 1987년 이후 비로소 한국 사회에도 사회운동들이 터져 나왔지만, 이 세대는 이 흐름에 동화되지 못했다. 국가와 충돌하는 신흥 사회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국가기구와 유기적으로 결합된 전통적 조직들에 계속 충성하는 쪽이 더 쉽고 편했다.  

그래서 사회운동의 부재를 중심으로 구축된 시민사회 부분과, 신흥 사회운동과 결합된 시민사회 부분 사이의 균열과 대립이 일상 세계에서 무엇보다 세대 간 분단선으로 나타나게 된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시민사회의 보수적 지층에 속했던 이들까지 한때 새누리당(이들의 눈에는 곧 '국가 정당')으로부터 이탈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민사회의 이 부분은 이내 전열을 정비하고 반격에 나섰다. 시민사회의 더 큰 부분이 광화문 광장에서 실체화하는 것을 학습한 이들은 시청 광장에서 이를 솜씨 좋게 모방했다.

말하자면 태평로와 세종로를 가르는 상반된 두 광경은 한국 시민사회의 가장 밑바닥 지층과 나머지 사이의 분단이 가시화된 것이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가 거둔 승리는 (부정선거 요소들을 제외한다면) 시민사회의 제1층이 다른 지층보다 더 강력한 외적 확장력을 발휘한 결과였다. 2016년에 시작된 촛불시민혁명은 이 우열 관계를 완전히 뒤집었다. 그러나 제1층과 나머지 사이의 대립 자체는 그대로다. 물론 제1층의 강한 내적 응집력 역시 별로 바뀐 게 없다.  

광화문 광장을 연 시민사회의 또 다른 지층 

토요일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시청 광장에 모인 일부를 제외한 현재 한국 시민사회의 다수가 어떠한 모습인지 드러난다. 그러나 그 안에도 세종로와 태평로를 가르는 분단선만큼이나 심각한 잠재적 분단선이 존재한다. 지금부터는 이 이야기를 해보자.

30년 전의 촛불이었던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 땅에도 사회운동의 봄이 시작됐다. 민주노동조합이 대거 등장했고, 농민회, 학생회 등이 전성기를 맞이했다. 늦기는 했지만, 그래도 봄이 왔으니 다행이었다. 하지만 늦게 왔기 때문에 그만큼 사회운동이 대결하고 극복해야 할 과제가 더 커졌다. 이제 막 싹 튼 사회운동들이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다. 산업 자본주의 태동기에 사회운동이 등장해 대응할 기회를 빼앗겼던 한국 현대사의 특징이 이후에도 업보처럼 시민사회를 짓누른 것이다.  

가령 노동운동은 노동자 대투쟁 이후 겨우 서구 노동운동 1세대 수준에 도달했다. 그런데 자본은 이미 자본주의 초기 단계를 넘어 전 사회적 지배력을 갖춰나가고 있었다. 서구에서는 거대 산별 노조로 성장한 노동운동이 거대 자본과 세력 균형을 이룬 덕분에 복지국가의 길이 열렸다. 그러나 한국의 신생 노동운동은 복지국가는커녕 거대 자본에 맞서 노동조합을 지키기도 벅찼다. 노동운동은 점차 대기업, 공기업 안에서 기업별 노동조합을 유지하는 데 만족하기 시작했다.  

노동운동이 기업별 임금협상에 안주하자 다른 운동들이 그 빈 곳을 채워나갔다. '시민운동'이라 불리게 된 운동들이었다. 누구는 시민운동을 중산층 운동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서구 신사회운동의 틀로 설명하려 했다. 하지만 경실련, 참여연대 등이 대표한 한국의 시민운동은 대중적 사회운동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던 중대한 사회문제들에 대응하려 한 지식인 중심 운동이었다 할 수 있다.  

1987년 이후 신생 사회운동들이 직면한 이러한 도전과 한계, 좌절과 적응이 이들과 함께 등장한 시민사회의 새로운 지층을 규정했다. 노동조합 등 대중적 사회운동에 직접 조직된 이들은 좀처럼 늘지 않았다. 시민운동은 중앙 언론 매체와 관계 맺으며 나름의 영향력을 펼쳤지만, 조직된 토대가 없었다. 민주화를 주도한 세대(86세대)를 중심으로 시민사회의 새 층위가 모습을 갖춰갔지만, 이는 극히 제한된 조직 구심들과 모래알 같은 대중으로 이뤄진 아주 무른 단층이었다.  

'일상' 시기에 새로운 시민사회는 자본과 국가에 비해 엄청나게 열세였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비상'한 방법에 기대야 했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반복된 사회운동의 총동원이었다. 대중적 사회운동에다 시민운동까지 모두 결집해 정권과 대결하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원형은 1987년 6월 항쟁일 테고, 실질적인 시작은 1996~97년 총파업일 것이다.

실은 이번 촛불 시위도 이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지기 전부터 광화문 광장을 열려고 싸워온 것은 1987년 이후 성장한 시민사회 부분을 대표하는 사회운동들이다. 광화문 집회 주최자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을 구성하는 단체들 역시 바로 이들이다. 매번 촛불 집회 무대를 준비하고 가두 행진을 기획하는 게 이들이다. 이들이 지금까지 '촛불' 혹은 '광장'으로 불려온 시민사회 다수파의 촉매 구실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촛불 시민 혁명으로 부상한 잠재적 제3층?  

그러나 광장 시민의 압도적 다수는 사실 기성 사회운동과 직접 관련 없이 행동한다. 심지어 조합원이거나 단체 회원이더라도 소속 조직의 결의나 지침에 따라 시위에 참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소셜 미디어'라 불리는 수평적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와 감정을 교류하면서 개인적으로 혹은 가족이나 친지와 함께 광장에 나서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세종로에서 나부끼는 깃발의 상당수도 노동조합이나 시민운동 단체가 아니라 개인이나 비공식 모임이 자유롭게 만든 것들이다.  

따져 보면 이런 양상이 처음 나타난 것은 2000년대 초부터다. 이때부터 조직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이후 사회운동의 총동원 국면이 반복될 때마다 이런 참여자들이 늘어났다. 그러다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시위부터는 기성 조직들을 오히려 압도하기 시작했고, 이번 촛불 항쟁에서는 그 규모가 드디어 수십만, 수백만에 이르렀다. 아마 중앙 무대가 필요 없었다면, 기성 조직들은 이 대열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촛불 시위는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지구 곳곳에서 폭발한 저항운동들(가령 스페인의 '분노한 자들' 운동)과 같은 시간대 안에 있다. 이들 모두 위계적 조직이 아니라 수평적 네트워크에 바탕을 둔 대중운동이다. 주된 참여자는 청년들이다. 금융 위기의 직접 피해자가 이들인데다 나이가 젊을수록 정보화의 산물인 네트워크 문화에 더 익숙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촛불 시위는 워낙 엄청난 수의 다양한 시민들이 참여해서 이런 특성이 눈에 잘 띄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도 젊은 세대일수록 기성 단체들이 아니라 소셜 미디어를 통로 삼아 광장에 모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한국 시민사회에 제3의 단층이 출현하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태평로와 거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로의 중앙 무대와도 다른 시민사회가 구축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지금 당장은 청와대 쪽과 시청 광장 쪽에 맞선 공동전선 속에서 차이와 긴장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박근혜를 청와대에서 몰아내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시민 혁명이 1단계 승리를 거두고 나면, 이제껏 가려져 있던 광장 내부의 균열선이 부각될 가능성이 높다. '승리'를 어떻게 이어나갈지를 놓고 1987년 세대의 노동조합, 시민운동과 2007년 세대의 촛불 시민 사이에 지난 몇 달 동안과 같은 합의가 쉽게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촛불 정국 와중에도 자정과 혁신의 시도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노동조합 운동의 모습에서 이를 예감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촛불 시위에 적극 참여하면서도 노동조합이나 시민운동 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남의 일로만 느껴진다는 20대의 정서에서도 그런 징후를 읽는다.  

이 예감이 그대로 맞아떨어진다면, 촛불 이후 시민사회는 이전보다 더 파편화되고 복잡해질 것이다. 시청 광장과 광화문 광장으로 상징되던 분단에 더해 세 번째 단층이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경향상 고령층과 중첩되는 제1층, 86세대가 중심인 제2층에 주로 청년층이 대표하게 될 제3층이 더해질 것이다.  

제2층과 잠재적 제3층이 한 블록일 경우에 어떤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촛불 항쟁으로 이미 확인됐다. 반면 1, 2층에 더해 제3층까지 분립해 균열과 대립이 복잡해진다면, 한국 사회는 더욱더 해결 불능의 교착 상태에 빠져들 것이다. 정반대 방향의 두 갈래 길 앞에 지금 한국 시민사회가 서 있다.  

'1987년 이데올로기'와 단절하자  

어쨌든 열쇠를 쥔 것은 부족하나마 그래도 자원과 경험을 지닌 쪽이다. 시민사회 제2층의 구성요소인 기성 사회운동들이 자기 혁신을 감행하면서 새로 부상하는 흐름에 다가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전통적인 조직 체계를 넘어서 수평적 네트워크와 중첩되려고 시도해야 한다.

가령 기성 사회운동 조직들이 네트워크형 사회운동의 플랫폼 구실을 할 수 있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이나 미조직 노동자의 네트워크(가령 퇴직자들의 사회 참여 네트워크)를 증식시키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시민운동 단체 역시 시민들이 네트워크형 사회운동(가령 교육이나 주택 문제의 이해당사자 조직)에 나서도록 정보, 정서, 경험을 나누는 플랫폼이 될 수 있다. 이런 실험을 통해 시민사회의 제2층과 제3층을 처음부터 유기적으로 연결할 가능성을 타진해봐야 한다.  

하지만 조직 실험보다 더 근본적인 과제가 있다. 1987년 세대의 시민사회에 익숙했던 상징, 담론, 행동양식 중에서 2007년 세대의 시민사회가 공감하고 동의할 수 없는 것들에게 작별을 고하는 일이다. 재벌 지배에 맞서는 데 장애가 되고 정규직-비정규직 분열을 거든 사회운동 내부의 한계와 오류를 과감히 드러내고 시급히 새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말하자면 '1987년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2017년 우리는 박근혜 정권, 재벌 세력과 함께 바리게이트 이쪽의 우상 또한 권좌에서 몰아내야만 한다.

* 이 글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가 발간하는 <시민과 세계> 2016년 하반기호에 실린 논문 <1987년 이후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적 궤적과 현재의 성찰 ― 서구 사회운동과 비교하며>에서 필자가 주장한 바를 압축하고 재구성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