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박근혜 퇴진은 2017 시민혁명의 시작일 뿐

일취월장7 2017. 1. 17. 11:16
박근혜 퇴진은 2017 시민혁명의 시작일 뿐
[기고] 내정개혁에서 동아시아 평화공존으로 나아가야
이부영 <씨알의소리> 상임편집고문     
2017.01.07 14:16:56

<씨알의 소리> 독자들은 2016년 11월 평화시민혁명에 참여하면서 함석헌 선생님의 비폭력평화주의가 선생님께서 주창하신지 60년 가까이 지난 오늘에 되살아나는 사실에 놀라움과 함께 때가 이르렀다는 예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12월 17일 제8차 주말집회를 치르기까지 함 선생님을 떠올리면서 필자는 촛불집회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다. 전날 밤 페이스 북에 "참고 참읍시다. 우리에게는 소중한 희망이 있습니다."라고 썼다.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이 분을 삭이기 어려운 많은 도발이 이어지고 감정을 자극하는 일도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주말마다 수십만~20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집회를 이어갔지만 연행자 한 사람, 부상자 한 사람 나오지 않았고 집회가 끝난 광장은 쓰레기 한 점 없이 깨끗이 치워졌으며 부모 잃은 어린아이 한 명 없었다. 

외신들은 '기적이 일어났다', '한국인들이 비폭력평화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놀라워했다. 우리 국민들 자신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비로소 우리 자신을,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우리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60년 전부터 식민지배, 동족상잔 한국전쟁으로 사나워질 대로 사나워진 우리에게 "못나게도 강대국들이 시키는 대로 형제끼리 총질해서 죽이고 남은 북에게 북은 남에게 괴뢰라고 부르니 이 땅에는 괴뢰도당만 사누나"라고 질책하시던 함석헌 선생님을 떠올렸다. 그 분의 비폭력평화주의를 떠올렸다. 그 분이 뿌린 씨가 세계가 놀라도록, 아니 우리 자신이 놀라도록 피어나고 있다. 

2016년 평화시민혁명 점검, 해석에 우리 미래 걸려있어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부정부패를 저지른 박근혜를 대통령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투쟁은 국회탄핵을 이끌어냄으로써 1차 관문을 통과했다. 수백만의 시민들이 전국에서 참여하는 8차례의 집회가 눈과 비, 추위까지 겹쳤음에도 불구하고 순조롭게 열렸다. 우리는 이 세기적 평화시민혁명이 어떻게 진행되었고 왜 가능했는지 곰곰히 헤아려야겠다. 이 진지한 점검에 한반도와 동아시아의 미래가 걸려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필자는 갖는다. 

식민지배와 분단, 전쟁과 독재를 겪어온 우리에게 이제 전쟁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하고 폭력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막아야한다는 평화주의가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함석헌 선생님의 가르침이 긴 여운을 지닌 채 이어지고 있다.  

세계는 보수-배타주의-인종주의로, 한국은 정의-화해-공존-공동체주의로

한국에서 평화시민혁명이 분출한 시점은 미국에서 트럼프 정권이 등장하여 동아시아에서 미국과 중국 사이의 역관계에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미국대통령의 아시아재균형정책이 트럼프 당선자의 신고립주의 혹은 개입축소정책으로 재조정되려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한국의 동향을 북한을 비롯한 미국 중국 일본 등 관련 당사국들이 예민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미국과 일본, 유럽을 비롯한 전 세계의 흐름이 보수로, 배타주의로, 자국이기주의로, 인종주의로 흐르고 있지만 한국의 평화시민혁명은 오히려 정의로, 화해와 공존으로, 공동체주의로 향하고 있다.  

고립 속에 핵무장으로 자신의 생존을 찾으려는 북한은 국정파탄과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집권자를 국회에서 탄핵하고 재판에 넘기는 한국의 평화시민혁명을 경외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시민의 수준이 집권자와 지배집단보다 월등히 높은 사실을 확인한 북한은 "남조선을 해방하리라"는 환상을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은 사드배치와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등으로 미-일-한 군사동맹에 한국을 편입시키려하지만 평화시민혁명에 부닥쳐 주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17년에 실시될 한국의 대통령선거에 자신들의 입김을 불어넣으려고 하겠지만 쉽지 않을 전망이다. 지난날처럼 군사독재정권을 내세워 밀어 붙이기에는 치르는 대가가 클 것이다. 중국은 사드배치와 대북정책에서 자신에게 어깃장을 놓는 박근혜 정권이 못마땅했지만 평화시민혁명으로 박정권의 중도하차가 분명해지면서 한국에 대한 태도를 재조정하려 할 것이다. 한국에게 경제적 제재를 가하거나 불이익을 강요하는 것이 뜻대로 되기 어려울 것이고 그렇게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박정희-박근혜 프레임 폐기, 대미의존일변도에서 전환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대로 평화시민혁명은 분단대결체제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운 미묘한 시기에 한반도 내부와 주변에 큰 파장을 던지면서 지속될 전망이다. 국내적으로는 박근혜의 국정농단과 부정부패 사태 때문에 지난 60년 가까이 지속된 박정희-박근혜 프레임의 모든 사고와 행태가 한국 국민으로부터 폐기되도록 만들었다. 이제 독재와 부정부패를 저지르고 반성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지배자의 군림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걸 이번 혁명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아울러 이승만 이래의 미국일변도 의존체제가 불가피하게 전환을 강요당하는 시기에 진입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가 미국에게 힘든 여건 속에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해왔으며 미국 자신도 더 이상 군비확장을 감당하기 어렵게 되고 있다. 트럼프 당선자는 군사동맹을 폐기하거나 축소해가겠다는 걸 대통령 선거전에서부터 약속했다. 이 추세는 점진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앞으로 미국과 중국의 새로운 전략대화는 한반도에서 대결보다는 힘의 균형 쪽으로 진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한국의 평화시민혁명이 한반도에서의 평화공존, 교류번영을 촉진하고 남북의 현상변경을 추구하지 않을 경우 양 대국의 이해와 어긋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북측이 핵문제에서 이런 흐름과 동행하느냐가 관건이 되겠다. 남북의 대화-교류가 신뢰에 기초하여 필요한 까닭이다. 한국은  아베 일본과 대화를 이어가되 일본의 평화운동 진영과 긴밀한 논의를 깊이 있게 나눠야겠다. 

박근혜와 그 일파가 나라망신을 시키고 경제와 안보를 위험에 빠뜨렸다면 평화시민혁명은 세계의 찬사를 받으면서 국격을 높였을 뿐 아니라 한국과 한반도의 운명을 새롭게 확장하는데 공헌하게 될 것이다. 이 위기의 지구촌에서 한국이 평화시민혁명의 희망으로 떠오르는 기적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동아시아와 한반도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는 우리 시민들이 자랑스럽다. 함석헌 선생님의 비폭력평화주의 사상이 자양분이 되어왔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 글은 <씨알의 소리> 신년호 권두언으로 필자와 잡지사 측의 양해를 얻어 전재한다.

또 '성장'의 주술을 읊조릴 건가?
[서리풀 논평] "'공생적 탈성장과 지역주의'를 제안한다"
시민건강증진연구소   
2017.01.09 10:58:53

대통령이 탄핵될지 확언할 수 없지만, 헌법재판소가 상식적으로 결정하리라 믿는다. 탄핵이 인용되면 60일 이내에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하니, 일 진행은 금방이다. 예상대로 된다면, 관심과 걱정이 곧 대통령 선거로 모일 것이다.

탄핵 결정도 안 났는데 벌써 대선 이야기라니, 김칫국부터 마시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이해한다. 반동과 역진의 기운도 심상찮으니 당분간 탄핵에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다. 끝까지 긴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시대적으로 이중의 과제를 안고 있는 바, 탄핵 이후(정확하게는 탄핵에 이어지는) 대통령 선거 또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십중팔구 시간이 모자라게 생긴 것이 첫째 이유다. 탄핵이 결정되면 각 정당이 경선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채 한 달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일사천리와 주마간산이 뻔하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선거가 으레 바람과 분위기를 타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사정이 더 나쁘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개인을 검증하고 (개인적, 집단적) 비전을 '사회화'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탄핵 이후 제도 정치는 자칫 형식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우리는 탄핵과 대선 국면에서 '새로운' '체제'를 논의하고 그를 바탕으로 제도정치를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유는 명확하다. 탄핵을 중심으로 시민의 열망이 결집했지만, 그 동력은 그냥 새로운 대통령을 뽑자는 것이 아니지 않았는가.

광장에서 터져 나오는 자유발언을 들어보면, 사람들과 그 정신은 도도한 물결과도 같이 새로운 사회를 바라고 요구한다. '선수 교체'가 아니라, 몇몇 사람과 집단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체제를 개혁하자고 한다. 대선이 단지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것으로 끝나면, 광장에 모인 민심, 그리고 직접 민주주의는 실패하는 것이다.  

왜 대통령 선거인가? 대통령 선거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과 동력이 만들어지고 모이며 표출되는 제도적 장치다. 물론, 시민의 뜻을 온전하게 대신하지 못하는 것도 분명하다. 게다가 이번에는 기간이 짧고 여유가 없으니 분위기에 휩쓸려 지나갈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 게이트가 남긴 영향으로 모든 약속이 반(反)-박근혜를 넘지 못할까도 불안하다.

괜한 걱정이 아니다. 정확한 뜻을 알 수 없는 추상적인 구호만 난무하고, 우리의 사회적 삶을 관통하는 시대적 과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말이 없다. 노인과 청년의 불안하고 불평등한 삶은 어떻게 할 것인가? 전망하기도 어려운 경제는? 일자리와 비정규 노동은? 다들 그렇게 문제라고 주장하는 저출산은? 한반도 평화체제 정착은? 더구나 이 모두를 포함하는 미래 사회의 비전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물론, 다들 몰두하는 개헌과 권력구조는 박근혜 정권의 참담한 실패를 반성하는 차원이라 빼놓기 어려울 것이다. 한걸음 앞서 문재인 전 대표가 꺼낸 것처럼 권력기관 개혁도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 (☞관련 기사 : 문재인 "대통령 집무실, 광화문에 두겠다") 하지만 다음 대통령, 다음 정권이 해야 할 일이 새로운 체제에 대한 것이면 이것으로는 턱없이 모자란다.

대통령 선거는 권력과 정부는 물론 체제를 재조정하는 큰 정치적 기회다. 더구나 이번은 탄핵사건까지 더했으니, 토대에 근접하고 그런 점에서 체제적일 수 있다. 조건과 상황이 어렵다지만, 적어도 4~5년 동안은 오지 않을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첫 걸음으로 대선 후보들에게 새로운 체제에 대한 비전을 요구한다. 무슨 수당을 얼마 올리고 어디다 무엇을 만들겠다는 수준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백화점식으로 나열된 시시콜콜 정책들은 어차피 곧 내놓을 것이 아닌가. 멀리 봐서 한국 사회가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것을 위해 다음 5년간 무엇을 어떻게 하려 하는지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

미리 말하지만, 시민을 '지도'할 비전과 이념, 철학을 내놓으라는 뜻이 아니다. 다시없는 기회에, 시민과 토론하고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갈 초안을 제시하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들이 마땅히 해야 할 첫 번째 역할이자 책임이다.  

새로운 체제에 대한 열망이 지금 이 시기의 정신이라면, 그 체제는 바꾸고 버려야 할 낡은 체제를 디딘 채 또 탈출해야 한다. 극복 대상인 구체제(앙시앵 레짐)는 바로 '박정희 체제'와 '1987년 체제'라는 데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물리적으로는 전혀 일치하는 시기가 없는 두 체제를 구체제라 하는 것은 그 체제들이 이질적이면서 동시에 동질적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버리고 극복할 것인가? 구체제들이 완전하게 공유하는 것, 그만큼 완고하고 지속적이어서 사람의 내면까지 지배하는 정신이자 권력. 새로운 체제가 넘어서야 하는 핵심이면서도 누구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성장 패러다임이다. 경제 성장은 박정희 체제 이후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는, 적어도 50년 이상을 지속해 온 시대정신이다.

우리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로 이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먼저 실용적 이유. 어떤 방법으로도 과거와 같은 뜻의 성장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한국 경제의 구조가 그렇지만, 꼭 한국만의 사정도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다 국제 경제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자리도 과거와 크게 다르다.  

가만히 있으면, 또다시 제2의 녹색경제나 창조경제 같은 '주술'로 시민이 헛갈릴 가능성이 크다. 이번에도 말만 바꿔 '동반성장'이나 '내포적 성장', 또는 '제4차 산업혁명'을 앞세우고, 대상만 바꿔 인공지능, 생명바이오, 신약, 정밀가공 등을 '신화'로 만들까 걱정이다.

다시 몇 퍼센트 성장률과 몇만 달러 소득목표만 힘을 얻으면 비관적이다. 또 한 번 성장동력이라 포장해야 하고, 지식기반경제, 부가가치, 문화산업, 원격의료와 의료서비스 산업과 같은 '경제적 가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박정희 체제, 그리고 1987년 체제까지도 목표이자 삶의 양식이었던 몸집 불리기는 더는 가능하지 않다. 모든 대선 주자들은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새로운 경제체제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비전을 내기를 바란다.  

성장 패러다임에서 벗어나는 것은 실용일 뿐 아니라 가치이자 윤리이기도 하다. 성장을 금과옥조로 삼은 구체제는 우리에게 경제 '제국주의'를 유산으로 남겼고, 그만큼 우리는 '비인간적'이 되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경제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는 (…) 성장의 달성 방법에 대해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 (…) 체르노빌, 광우병, 오염된 혈액제제 등의 배경에는 부주의, 규정을 어기는 것, 법 위반 등이 있다."(세르주 라투슈, <탈성장 사회>, 양상모 옮김, 오래된생각 펴냄).

경제 성장 이데올로기는 이런 경로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연결된다. 그뿐인가. 우리 또한 이런 비전이나 철학을 내면화하고 있었다면, 새로운 경제체제는 우리 모두의 삶이 좀 더 인간화되는 길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이번 대선이 새로운 성장동력을 둘러싼 경쟁과 각축이 아니기를 바란다. 그보다는 성장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경쟁해야 한다. 핵심은 어떤 새로운 성장이 아니라 성장과 결별하는 것이다.  

"성장 사회와의 결별은 사회관계와 '정치적인 것'을 되찾기 위해 경제 성장과 경제 발전, 즉 경제에서 벗어날 것을 의미"한다.  

주권자의 지금 생각이, 그 욕망이 어떻다고 핑계 삼지 말라. 정치 리더십이란 현실에 반걸음 앞서가면서 사람들의 삶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끌어내는 것이 제 역할이다. 우리는 지금 한국 경제와 사회, 한국인의 삶이 대안 경제와 그 체제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곧 모든 (잠재적) 대통령 후보들의 경제 비전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것을 내놓으면, 우리도 토론에 참여할 용의가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안은 이런 것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공생적 탈성장과 지역주의'(세르주 라투슈, <발전에서 살아남기>, 이상빈 옮김, 민음사 펴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