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모 특강
그렇게 눈물 흘리며 아버지가 되다
2016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모 특강① 이준호 편
한때 그는 인공위성을 만들던 잘나가던 연구원이었다. 희귀병 아들이 태어나기까지는 그랬다. 그 뒤 한동안 그는 하늘을 원망했다. 삶이 바뀐 것은 비슷한 질병을 앓는 다른 아이의 부모를 만나고서였다. 이심전심. 서로의 존재만으로 위로받으면서 그는 자기가 할 일을 깨달았다. 그것은 병원과 의사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환자 스스로 자기 의료 정보를 수집·기록·공유하며 이에 기반해 자기 결정권을 갖는 새로운 의료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자녀를 키우며 ‘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들’의 얘기를 전하는 ‘2016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모특강’(http://cafe.daum.net/no-worry) 첫 번째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2016 부모 특강-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들
제1강(11월29일) 이준호 ‘희귀질환 아들로 새 길 찾은 인공위성 연구원’
제2강(12월6일) 김종호·김경아 ‘딸 부잣집 사교육 탈출기’
제3강(12월13일) 남태일 ‘동네 아버지들:녹색어머니회와 맞짱 뜰 녹색아버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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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쇼카한국 커뮤니케이션 제공 희귀병 아들이 태어난 뒤 이준호 대표(위 사진)는 다니던 인공위성 개발회사를 그만두고 희귀성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 의료 정보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6 아쇼카 펠로우’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
이준호 (프라미솝 대표)
본래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나는 못 말릴 말썽꾸러기였다. 3층 단독주택이었던 이모 집에 놀러 가면 동네 아이들을 불러놓고 그 집 옥상에서 옆집 옥상으로 건너뛰는 게임을 했다(웃음). 그러다 세 번이나 응급실에서 깨어났으면서도 몸이 나으면 다시 “오늘은 내가 뭔가 보여주겠다”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또 건너뛰기를 시도하곤 했다.
그런 기질이 내 진로를 결정하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중학교 때부터 인공위성을 만든다는 꿈을 꾸게 됐다. 그 시절 존경하던 수학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조는 아이들을 보며 “선진국이 되려면 인공위성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래서야 뭘 할 수 있겠느냐?”라고 질책하시는데, 그 말씀이 순간 가슴에 와 닿았다. ‘인공위성이 뭐지? 대한민국에선 저걸 아직 아무도 못 만들었다고? 그럼 한번 해볼 만하겠는걸.’ 이런 단순무식한 발상을 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 ‘우리별 1호’가 발사됐다. 선수를 뺏긴 듯해 무척 실망스러웠다. 그래도 ‘내가 더 멋진 인공위성을 만들 수 있을 거야’ 하는 단순한 꿈을 밀고 나간 결과 관련 학과를 졸업하고 인공위성을 만드는 회사에 입사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당당히 “비록 우리별 1~3호가 발사됐지만 저는 그보다 더 멋진 위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별 만든 팀이 참 원망스러워요”라고 말했더니 면접 평가를 하던 팀장이 이렇게 대꾸하는 거다. “그거 우리 팀인데?”(웃음) ‘어이쿠, 떨어졌구나’ 싶었는데 운이 좋아서 합격했다.
그로부터 7년여 정말 신나게 일했다. 내가 들어갈 때만 해도 우리 회사는 아직 기술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그러나 한국인 특유의 열정과 긍지로 빠른 시간 내에 앞선 기술들을 따라잡았다. 해외에 인공위성을 수출하고 기술 컨설팅도 해주면서 소형 위성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알아주는 벤처회사로 성장했다. 그 속에서 나도 행복했고 스스로가 뿌듯했다. 3~4개 위성 제작 과정에 참여하면서 위성에 대한 전문지식은 웬만큼 갖췄으니, 이제 해외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나 전념하면 되겠다 싶었다.
병원마다 달랐던 아이의 처방전
그런데 2010년 아이가 태어나면서 모든 것이 바뀌었다. 대전의 한 산부인과에서 출산한 아이는 선천성 거대모반이라는 희귀병을 갖고 태어났다. 사실 당시에는 아이 병명이 뭔지도 몰랐다. 병원에서도 얼른 아이를 데리고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올라가 보라는 말만 했다. 막상 서울에 가보니 이 병원, 저 병원 하는 얘기가 모두 달랐다. 어떤 병원에선 ‘지금 당장 아이를 치료해야 한다’라고 했고, 또 다른 병원에선 ‘자랄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료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이건 어떻게 치료를 해볼 수가 없다’ ‘해외에 있는 병원으로 가야 한다’라고 말하는 데도 있었다.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별로 어렵지 않겠다 싶은 일을 접할 때면 위성을 만드는 사람들끼리는 “이건 로켓공학이 아냐(It’s not rocket science thing)”라는 농담을 주고받는다.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자랑하는 로켓공학에 비하면 다른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아이에게 막상 그런 일이 닥치고 보니 내게는 오히려 로켓공학이 쉽게만 여겨졌다. 내 아이를 위해 어떤 치료법을 써야 할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너무도 막막했다. 종교가 있는 사람으로서 부끄러운 고백이기는 한데 당시에는 신도 많이 원망했다. ‘도대체 내가 무슨 큰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까지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누군가의 소개로 모반증 치료에 정통하다는 한 의사를 소개받게 되었다. 대학병원에 근무하다 개인병원을 새로 낸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의사였다. 그 의사는 아이를 보자마자 “이건 내가 본 아이 중에서도 증세가 굉장히 심각한 편이다. 무조건 빨리 치료를 시작하자”라면서 치료비를 제시했다. 깜짝 놀랄 수준의 거액이었다. 엄두가 안 났지만 부모님과 처가에 손을 벌려 일단 치료를 시작해보기로 했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한 게 있었다. 막 개업한 작은 병원에는 마취과 의사도, 입원실도 없었다. 오직 수술실 하나 덜렁 있던 이곳에서 의사는 생후 2주밖에 안 된 아이를 상대로 수술을 시작했다. 마취도 시키지 않은 채 간호사들이 아기 팔·다리를 붙든 상태에서 레이저로 피부를 깎는 시술이었다. 당시 아내와 난 너무나 바보 같아서 이게 얼마나 두렵고 엄청난 일인지를 몰랐다. 두 시간 내내 자지러지게 울다 지쳐 쓰러진 아이를 받아 안으면서도 “수술이 잘 끝나 편안하게 잠이 든 것”이라는 간호사의 말을 그저 액면 그대로 믿었다.
그날 밤 잠에서 깨어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수술한 부위가 등이었는데, 상태를 보니 정말 끔찍했다. 곧바로 병원에 연락을 해보았지만 모두가 퇴근한 그 시간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발을 동동 구르며 그날 밤을 꼴딱 새웠다. 이튿날 아침 동이 트자마자 병원에 가니 의사가 오염된 수술 부위를 드레싱해주는데, 생후 2주밖에 안 된 아기가 무슨 힘이 있겠나. 그저 목을 놓아 울밖에.
끔찍한 것은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년 반. 우리 가족은 그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반복해야 했다. 염증 부위가 아물면 다시 다른 부위를 시술하고, 그 부위에 또 문제가 생기면 드레싱을 받고 하는 시간들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에는 우리 가족 모두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침마다 눈을 뜨기가 두려웠다. 아이 상태가 나쁠 때뿐 아니라 호전됐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내일이면 또 다음 수술을 해야겠구나’ 싶어서였다.
세상 사람들의 잔인한 호기심에 상처받다
이런 삶에 전환점이 생긴 것은 아이가 수술받은 부위에 또 한번 크게 부작용이 나면서다. 모반을 절제했던 부위에 심각하게 염증이 생겼는데, 병원 측이 여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자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 피부가 이렇게 태어난 걸 나 보고 어쩌란 거냐? 이건 팔자다.” 그 말이 내게 약이 되었다. ‘이건 아니다, 이젠 치료를 그만둬야겠다’ 싶은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한때는 우리 아이를 살릴 유일한 우상인 양 비쳐졌던 의사도 별것 아닌 보통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치료를 멈추고 나니, 모든 것이 놀랍도록 달라졌다. 무엇보다 가족 모두가 행복해졌다. ‘이제부터라도 다른 부모들처럼 우리도 아이와 좋은 시간을 가져보자’라고 생각을 바꿨을 뿐인데 아이에 대한 감정도 확 달라졌다. 그 전까지는 미안함·불안감 이런 게 거의 다였다면, 이때부터는 아이가 비로소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아, 우리 아이 눈망울이 이렇게 똘망똘망했구나’ ‘엄마를 닮아 음악도 좋아하고, 춤추는 것도 좋아하는구나.’ 이런 숨은 매력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집 밖에 나갈 때면 늘 신경이 곤두섰다. 아이 외모가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보니 외출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내 또래 부모들은 그래도 덜한데 나이 드신 분들 중에는 아이를 앞에 놓고 예의 없이 “얘는 왜 이러냐?”라고 묻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터에도 한밤중에 가는 등 사람 눈을 피해 다녔지만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힘이 들었다. 아내나 내가 상처받는 건 괜찮은데 우리 아이가 그 말을 알아들을까 봐 고통스러웠다.
회사에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유부남 중에 팔불출이 많다. 점심시간에 차 한잔 마실 때면 자기 아이랑 어딜 갔다 왔다는 둥 자랑하면서 사진을 서로 경쟁적으로 보여주곤 하는데, 나로서는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일이 밀렸다는 핑계로 밥도 혼자 먹곤 했다. 뭐랄까,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낯설게 여겨진다고나 할까? 나랑은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들 같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그 시절 아내와 나는 못 말리게 예민하고 공격적이었다. 하다못해 길에서 만난 어린아이와도 싸운 일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 치료를 위해 찾은 또 다른 병원에서 우리 아이와 똑같은 병명을 가진 아이의 부모를 만났다. 순간 말을 안 해도 모든 것이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분들이 겪어왔을 모진 세월과 아픈 경험이 그냥 그대로 느껴지면서 그 아이가 우리 아이인 양 여겨졌다. 그러면서 절로 위로가 되었다. 아마 그분들도 우리를 보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창업을 떠올린 것은 그때부터다. ‘우리 아이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아이들, 그리고 그 부모들을 위해 뭔가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나를 사로잡았다. 구체적인 아이디어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희귀병 환자·보호자를 위한 폐쇄형 SNS(소설 네트워크 서비스)부터 먼저 만들어보자는 것이 내 구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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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의료 정보가 부족한 난치병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곤 한다. |
그런데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창업하려 했더니 주변 사람들 얘기가 “그건 사업 아이템이 될 수 없다. 그런 SNS는 취미로나 만들라”는 것이었다. 일리가 있다 싶어서 음식점 등을 리뷰하는 상업용 앱을 먼저 만들기로 방향을 틀었다. 몇 달 안 있어 망했다. 그때 깨달았다. ‘오직 돈을 위해 벌인 사업은 이렇게 망하는구나’(웃음).
그 뒤 창업을 함께한 직원들이 다 떠나고 처제와 단둘이 어렵게 사무실을 유지하다 보니 마음이 여러 차례 흔들렸다. 인공위성을 함께 만들던 동료들이 새로운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됐다면서 다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가 특히 그랬다.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도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렇지만 ‘내가 포기하면 누가 또 이 일을 하지?’ 하는 생각이 나를 붙들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우리 아이나 나 같은 희귀병 환자·보호자는 앞으로도 똑같은 괴로움을 계속 겪어야 할 텐데, 이런 상황을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것은 내 성향과 맞지 않겠다’ 싶었던 것이다.
‘희귀병 환자·보호자를 위해 뭔가 해보고 싶다’
그러던 와중에 지인 소개로 알게 된 것이 임팩트 투자사 중 한 곳인 D3주빌리의 이덕준 대표다. 임팩트 투자는 일반 기업 투자와는 다르다. 곧 사업적인 성공 가능성과 더불어 사회적으로 얼마만큼 혁신가치가 있는지가 투자 기준이다. 둘 중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투자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런데 2013년 처음 만난 이 대표는 내가 말한 사업 모델에 기대 이상으로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더니 “임팩트 투자를 정말로 받고 싶다면 앞으로 두 달 안에 당신이 얘기한 내용을 프로토타입(시제품)으로 제작해서 가져와보라”고 말했다.
이건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인공위성이나 만들던 내가 두 달 안에 어떻게 디자이너 한 명 없이 잘 모르던 분야의 시제품을 만든단 말인가? 그러나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 나한테 투자할 사람은 오직 그 사람밖에 없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그날부터 처제한테 기획안을 만들어내라고 다그쳤다. 돌이켜보면 아마 형부가 아니라 원수 같았을 거다(웃음). 처제가 기획안을 만들면 이를 실제 프로그램으로 구현하는 일은 내 몫이었다. 아는 게 없으니 온갖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자료를 구했다. 어쩌다 소스 코드를 공개한 데가 있으면 얼른 갖다 쓰는 것은 물론이었다.
미칠 듯이 불안하고 초조했다. 내게 주어진 기간은 60일뿐인데, 이 중 하루만 삐끗해도 일정을 맞출 수 없을 것 같다는 걱정에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한 게, 온갖 난제와 씨름하다 오후 네 시쯤 되어 허탈한 상태로 산책을 나섰다 돌아올 즈음이면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 한두 개가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곤 했다. 그 아이디어를 실마리 삼아 문제를 풀어가다 보면 어느새 그날 몫의 프로그램이 90%가량 완성됐다. 믿기지 않는 산책의 힘이었다.
이렇게 두 달 만에 완성된 프로그램을 들고 투자자들 앞에 가서 설명을 하고 투자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청중 박수). 사업 이후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셈이다. 그 뒤 이재우 보고펀드 대표나 IT 전문가인 정지훈 교수(경희사이버대) 등으로부터 추가 투자를 받으면서 ‘케어플’이라는 의료 정보 시스템도 본격적으로 론칭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겪은 내 경험에 비춰보건대, 병원·의사가 ‘갑’이라면 환자·보호자는 ‘을’이다. 곧 모든 진료나 의무기록은 병원만이 가지고 있고, 그 접근 권한은 의사에게만 주어져 있다. 환자나 보호자는 이것이 자기 기록인데도 접근하기가 어렵다. 그렇다 보니 해당 의사 또는 해당 치료가 나한테 맞는지, 맞지 않는지 알지 못한 채 이 병원 저 병원을 떠돈다. 의료사고가 터졌을 때는 더더욱 그렇다.
병원은 ‘갑’, 환자는 ‘을’이라는 부당한 현실
이건 말이 안 된다. 돈은 환자와 보호자가 내는데 왜 모든 정보와 권력은 의료 서비스 공급자에게만 집중돼야 하나? 의료계의 이 같은 정보 비대칭성 내지 힘의 불균형 문제를 환자·보호자 중심으로 해결해보려는 정보 시스템이 바로 케어플이다. 환자·보호자는 자신의 의료 데이터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왜 나한테 이런 약을 투여했어요?” “왜 나한테 이런 치료 방법을 썼어요?”라고 의사한테 물어볼 수 있어야 한다.
다만 현행법상 병원 밖에서 이런 데이터에 접근할 수는 없다는 것이 보건복지부 방침이었다. 그래서 눈을 돌린 것이 재활치료 시장이다. 전국적으로 보면 발달장애 아동이나 성인들을 대상으로 재활치료나 특수교육을 실시하는 복지관이 200곳, 사설 재활치료센터가 1만 곳쯤 된다고 한다. 이들 기관이 보유한 재활치료 정보를 수집·기록·공유하다 보면, 나중에 설사 이들 기관에서 해당 기록을 삭제한다 해도 환자·보호자는 그 기록을 열람할 수 있게 된다.
해당 기관들로서는 이런 상황이 꺼려질 수도 있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궁극적으로는 이렇게 정보를 공유하며 소통하고자 하는 기관을 환자·보호자가 더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다. 12월5일 정식 론칭한 케어플은 현재 3개 시범기관에서 운영 중이다. 케어플이 자리를 잡으면 희귀 질환자와 부모들을 위한 프라이빗 SNS도 제대로 가동할 생각이다.
아이의 현재 상태가 궁금하시다고? 현재 대안학교에 다니는 우리 아이는 즐겁게, 잘 살고 있다. 이를테면 아이는 운동신경이 많이 느린 편이다. 대신 유튜브에서 본 마이클 잭슨의 ‘문 워크’ 춤을 발바닥이 닳도록 연습해 친구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사이좋게 지낸다. 이런 아이와 신나게 놀다가도 옛날에 겪었던 일들이 떠오르면 아이한테 급작스럽게 뽀뽀를 ‘난사’하곤 한다. 너무 미안하고 애틋해서다. 돌이켜보면 아이를 만나고 나와 우리 가족의 삶은 정말 많이 바뀌었다. 이제껏 내 인생이 흘러온 것 자체가 이를 위한 준비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앞으로도 시련은 있겠지만 그 시간들이 나를 잡아주는 힘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세 딸 키우기? 바람 잘 날 없더라
2016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모 특강② 김종호·김경아 편
제1강(11월29일) 이준호 ‘희귀질환 아들로 새 길 찾은 인공위성 연구원’
제2강(12월6일) 김종호·김경아 ‘딸 부잣집 사교육 탈출기’
제3강(12월13일) 남태일 ‘동네 아버지들:녹색어머니회와 맞짱 뜰 녹색아버지회’
김경아 (반편견 입양교육 강사)·김종호(한국기독학생회 대표)
김경아씨는 입양교육 강사 겸 입양 경험자다. 이미 두 딸이 있는 상태에서 생후 3주된 셋째 딸을 입양해 키웠기 때문이다. 남편 김종호씨는 덕분에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산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부모교육 특강-길을 찾다 길이 된 사람들’ 두 번째 강사는 김경아·김종호 부부다. 개성 강한 세 딸을 사교육 없이 키우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었다. 12월6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kr) 강의실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김경아:사회자께서 소개하신 대로 세 딸의 엄마다. 본래 대학 캠퍼스 커플로 만나 눈이 멀어서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고 첫아이를 낳았다. 아이 돌 무렵까지는 날마다 눈물과 한숨으로 지샜다. 육아가 너무 힘이 들어서다. 그런데 그 뒤로는 제법 수월했다. 아이가 부모 말도 잘 듣고 너무 모범적이었다. 타고난 성향 자체가 약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아이였다. 그 바람에 그 시절엔 ‘아이는 부모 하기 나름’이라는 오만방자한 착각에 빠져 살았다. 식당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그 부모가 한심해 보였다.
착각이 깨진 것은 아이가 초등학교 6학년에 들어설 무렵부터다. 그때부터 아이는 우리가 무슨 말만 하면 반항기를 보이면서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기 일쑤였다. 당시 아직 혈기 방장했던 우리 부부는 그런 아이의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다. 화장을 하거나 짧은 치마·하이힐을 집에 사 들고 온 아이와 남편이 부딪치는 일도 잦았다. 그렇게 2년여를 부딪치면서 아이는 “고등학교만 가면 엄마 아빠와 떨어져 살겠다”라고 자기 의사를 강력하게 표현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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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김경아(왼쪽부터) 부부는 공개 입양한 딸 한 명을 포함해 딸 셋을 키우고 있다. 이들은 각기 개성이 뚜렷한 딸들을 키우며 부모도 성장했다고 말한다. |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밤, 아이가 집에 돌아오질 않는 거다. 12시가 넘어가는데 휴대전화도 꺼져 있고. 결국 새벽 1시쯤 아는 경찰한테 ‘아이 실종신고를 할 수 없겠느냐’고 전화를 걸었다. 그는 실종 당일 신고가 접수되는 일은 없다면서 2~3일만 기다려보라고 했다. 미칠 것 같았다. 집을 나가겠다는 말을 듣는 것과 실제로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아이를 기다리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걷잡을 수 없는 마음에 집 밖에 나가 골목을 서성대다 집에 들어와 보니 그때가 새벽 2시쯤이었나? 남편이 잠들어 있었다. 그걸 보는데 정말 분노가 확 치솟더라(청중 폭소).
김종호:생애 두고두고 책잡힐 세 시간 수면이다. 조금만 참았더라면 나도 괜찮은 아빠 대열에 낄 수 있었을 텐데(웃음).
부모를 반성케 한 사춘기 아이의 반항
김경아:잠자는 남편을 놔두고 계속 집 밖을 서성대면서 별별 생각을 다했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그런데 왜?’ 싶었다. 내가 평소 남편한테 늘 하는 얘기가 “받는 사람이 원하는 사랑을 주는 것이 중요하다”라는 것이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하면 뭐하나? 받는 사람이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하면 도루묵이지. 그런데 그날 내가 혹시 큰딸한테 그런 사랑을 주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됐다. 평소 내가 가장 두려워했던 것이 자식이 나한테 마음을 닫는 것이다. 자식이 마음을 열지 않은 채 부모를 그저 밥 먹여주고 학비 대주는 존재로만 여긴다면, 그보다 불행한 부모가 어디 있겠나? 그런데 내가 그런 존재가 될 수도 있겠구나, 그렇다면 무엇을 포기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진지하게 한 것이다.
다행히 아이는 다음 날 안전하게 돌아왔다. 알고 보니 전날 밤 가출하기로 마음먹은 친구와 함께 청소년 가출 쉼터를 제 발로 찾아갔다고 한다. 따뜻한 그곳에서 쉼터 선생님들이 주는 간식을 먹으며 수다삼매경을 떨다 귀가한 셈이다. 집 나간 아이가 돌아왔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알 길이 없으니 청소년 상담을 하는 후배한테 도움을 청했다. 무조건 화내지 말고 아이를 잘 먹이고 재우기부터 하라기에 그대로 따랐다. 그 뒤 내 노선을 완전히 선회했다. “난 너를 믿는다.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결정을 하든 너를 믿겠다” 하는 쪽으로. 그러고는 아이가 밤새 컴퓨터를 하거나 이상한 옷을 입더라도 간섭하지 않았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라고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랬더니 아이가 엄마 변화를 눈치 채고 마음을 잡기 시작하더라. 부딪치는 횟수도 현저히 줄어들고.
그렇게 중 3이 됐는데, 아이 진로가 막막했다. 1, 2학년 때 워낙 공부를 하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큰애 담임선생님께서 “너는 틀에 박힌 걸 힘들어하니 특성화고에 진학하면 어떻겠니?”라며 아이 인생에 획을 그을 만한 제안을 하셨다. 그 순간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선생님이 권해주신 특성화고가 평판이 괜찮아 보였다. 야자(야간 자율학습)가 없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다. 아이도 이 학교가 마음에 들었던지 처음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내신 성적이 필요했으니까. 이 학교에 진학한 뒤 아이는 선생님들한테 예쁨을 듬뿍 받았다. 그러면서 자신감이 붙었던 모양이다. 이런저런 교내외 대회에 나가면서 수상 경력을 쌓고 밴드부 단장도 하면서 리더십을 키우던 아이는 4년제 괜찮은 대학에 비교적 수월하게 입학했다. 현재는 다니던 대학을 휴학한 채 KOICA(한국국제협력단) 해외봉사 단원으로 모로코에 가 있다.
김종호:둘째는 첫째와 6년6개월 터울을 두고 태어났다. 우리가 나이가 들어서인지 둘째는 첫째보다 훨씬 여유 있게 키웠다. 어릴 적엔 키우는 재미가 정말 쏠쏠했다. 그런데 이 녀석이 크면서 보니 통제가 잘 안 되는 유형이었다. 식당 같은 델 가면 어느새 사라져 옆 테이블에서 음식을 얻어먹고 있는 그런 아이였다(웃음). 낯가림 없이 명랑·쾌활 그 자체랄까. 엉덩이가 가벼워 뭐 하나 진득하게 배우는 법이 없었다. 음악적 재능이 꽤 있는 편인데도 연습이 딸리니 더 성장하는 데 한계가 뚜렷했다. 이 아이를 키우면서 그간 부모로서 갖고 있던 교만이 다 무너졌다. 아이가 부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다.
둘째는 중학교 때 문제가 터졌다. 아이가 집 근처 새로 생긴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같은 반에 발달장애 경계에 있는 친구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몇몇 아이들이 그 아이에게 지우개 가루를 뿌리거나 못으로 상처를 내는 등 집단적으로 괴롭혔고, 이를 보다 못한 둘째가 그 친구 부모에게 이 사실을 몰래 알렸던 모양이다. 이 일로 학교폭력위원회가 소집되고 가해 학생 4명이 징계를 받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집단 괴롭힘이 다시 살아난 것이다. 내부고발자였던 우리 아이도 신분이 노출돼 학교생활이 힘들어졌다. 그런데 학교에 이런 사실을 호소해도 당시 신참이던 담임선생님은 “네가 예민해서 그런다”라고만 했다. 결국 학교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한 뒤 교장 선생님도 따로 만났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권위 의식에 젖어 우리한테 짜증을 내다시피 하는 그분을 보며 학교를 그만둔다는 결심을 더 굳혔을 뿐이다.
공교육과 대안교육 모두 한계에 부딪치다
김경아:그렇게 학교를 나온 뒤 대안학교를 알아보게 됐다. 아이도 당시에는 이 학교에 가고 싶어 했다. 입학용 자기소개서를 쓰느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더 그런 열망이 생긴 모양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안학교는 대안학교대로 또 다른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김종호:이 학교는 아이들의 자율성과 가능성을 극도로 신뢰하는 문화를 지닌 곳이었다. 문제는 그러다 보니 중학생인 아이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의 자율성·가능성까지도 요구하는 경향이 있더라는 것이다. 한 예로 이 학교에 관계 맺기를 어려워하는 친구가 한 명 있었던 모양이다. 학생들은 이 아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놓고 매일 밤 9~10시까지 토론을 벌이다 밤늦게 귀가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제가 됐던 그 아이 엄마가 우리 둘째를 포함해 5명을 집단 따돌림 가해자로 지목하고 나섰다. 이전 학교에서 약자를 보호하려다 억울한 일을 당했던 우리 아이가 이번엔 가해자로 몰린 것이다. 그 바람에 경찰은 물론 검찰에까지 출두해 조사를 받게 됐다.
김경아:여기 혹시 자식 키우다 검사 만나본 분 계신가? 아니라면 어디 가서 애 키우기 힘들다는 얘길 하지 마시라. 검사 정도는 만나봐야 ‘자식 키워봤다’ 할 수 있는 거다(청중 폭소). 그때 상대 엄마가 문제 삼은 게 모욕죄였는데,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보니 그 이유가 기가 막혔다. 어느 날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그 아이와 우리 둘째가 화분에 물을 주러 가는 길이었는데, 키가 큰편이었던 둘째 아이에게 그 아이가 먼저 “키다리”라는 말을 했단다. 그래서 둘째가 그 아이한테 “너도 식물처럼 물을 주면 키가 클까?” 했다는 거다.
김종호:검찰 조사야말로 정말 모욕적이었다. 조사받다 자살한 사람들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갈 정도였다. 우리가 그랬으니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겠나. 중간에 검사 질문을 잘못 알아들어 엉뚱한 대답을 했다가 막 추궁도 당하고…. 그날 밤 아이가 눈이 팅팅 붓도록 울더라.
김경아:그 일을 겪으며 부모에 대한 둘째의 신뢰는 확실히 높아진 것 같다. 우리가 “너는 무고한 일을 겪는 것이며, 우리는 너와 늘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전달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러고 나서 아이는 대안학교를 그만두고 자기 언니처럼 특성화고에 진학하는 것으로 진로를 바꿨다. 재미있는 게, 이 학교에 들어갈 때 아이 기대 수준이 아주 낮은 편이었다. 공교육과 대안교육을 모두 겪어봤으니 크게 기대를 걸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이는 대학 진학에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이 학교는 대학 진학도 별로 강조하지 않고 학생들의 학업성취 수준도 별로였다. 그러다 보니 아이가 조금만 공부를 해도 꽤 높은 성적이 나왔다. 선생님들이 기특해하며 아이를 따로 불러 보충수업을 시켜주실 정도였다. 그 덕분에 고 1인 아이는 지금 아주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공개 입양한 막내의 파란만장 성장기
김종호:이제 공개 입양한 셋째 딸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인물 보고 데려왔느냐는 농담을 듣는 아이다(웃음). 우리는 이 아이를 생후 3주째 되던 날 입양 기관에서 처음 만났다.
김경아:우리가 공개 입양한 얘기를 하면 꼭 이렇게 묻는 분들이 있다. “낳은 아이가 예뻐요? 키운 아이가 예뻐요?” 여기서 내가 여러분에게만 특급 비밀을 하나 알려드리겠다. 내 말 잘 듣는 애가 제일 예쁘다(청중 폭소).
김종호:우리는 편견 없이 아이를 키우고자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키웠다고 자부한다. 다만 이 아이도 개성이 퍽 남달랐다. 그래도 첫째, 둘째를 키워본 덕분에 놀라지는 않았다. 한 공장에서 나와도 제품은 다를 수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웃음). 이건 입양 탓이 아니라 아이마다 개성이 다른 탓이니까. 이 아이는 언어 발달이나 인지 발달이 많이 느린 편이었다. 수 개념이나 사회성 발달도 더딘 편이고…. 그 바람에 놀이치료나 학습치료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런데 결정적인 계기가 찾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기계체조를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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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호·김경아 부부는 사교육에 돈을 쓰느니 교육단체를 후원하는 길을 선택했다. 사진은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진행중인 출신학교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캠페인. |
김경아:우리 막내가 서부교육청에 속한 학교를 다니는데, 방학 때면 이 학군 학교들에서 진행하던 체육특기 프로그램을 외부에도 개방하는 모양이다. 이 공문을 본 아이가 옆 학교에서 하는 기계체조를 해보고 싶다기에 데려갔다. 그런데 첫날부터 너무 좋아하는 거다. 방학이 끝날 즈음 감독 선생님도 내게 기계체조를 더 가르쳐볼 것을 권유했다. 막내에게 재능이 있다는 것이다. 고민에 빠졌다. 자녀에게 운동을 시켜본 주변 부모들이 쌍수를 들어 나를 말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운동할 때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런데 2년쯤 기계체조를 하던 중 아이에게 척추측만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몸을 쓰는 아이에게는 치명적이었다. ‘이젠 공부를 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학교에서 또 공문이 날아왔다. 양궁부 체험 프로그램이 생겼다는 공문이었다. 일주일 동안 이걸 체험해본 막내가 이번에는 “양궁을 해보고 싶다”라고 했다. 양궁부가 정식으로 있는 학교를 알아봤더니 인근 중학교가 레이더에 걸렸다. 아이는 요즘 이 학교에서 밤 10시까지 양궁을 연습하다 혼자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온다. “넌 초등학생이니까 8시까지만 하고 오라”고 말렸지만 아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 중학생 언니 오빠와 함께 자기도 밤늦게까지 연습을 하고 싶다는 것이다. 토요일도 쉬지 않는다. 부모 입장에선 이보다 편할 수가 없다. 아이가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면 부모는 옆에서 밥만 잘 챙겨주고 격려만 해주면 된다. 아이 꿈이 올림픽에서 메달 따는 거라는데, 그게 안 돼도 상관없다. 무슨 일을 하든 지금 키워놓은 체력이 기본 덕목이 될 테니까.
김종호:어쩌다 보니 딸 셋 키운 얘기를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가 아이를 키우면서 나름 정리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 싶다. 그 첫 번째는 자녀와 부모인 나의 삶을 분리하라는 것이다.
김경아:나는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주고 싶다. 다만 아이들 개개인이 겪을 희로애락까지 대신 해주려 하지는 않는다. 주변에 보면 아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까지, 나아가 아이가 스스로 해내야만 하는 일까지 대신 해주려는 부모가 많은 것 같다. 애정이 넘쳐서 집착에 이르면 위험신호일 뿐이다.
아이 셋 키운 경험으로 단언컨대 아이들은 결국 제 생긴 대로 살아가더라. 사실 우리 부부를 닮았다면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공부를 안 하고 또 못할 수는 없다(웃음). 하지만 어쩌겠나. 아이들은 다 각자의 장단점을 안고 태어나는 것을. 부모가 내려놓으면 아이가 더 상처받을까 봐 전전긍긍할 필요가 없다. 우리 자신을 돌아봐도 부모님이 대신 해줄 수 없는 일을 겪으며 더 성장하고 성숙하지 않았나.
‘아이들은 결국 제 생긴 대로 살아간다’
김경호:두 번째는 부모도 자신의 행복을 찾아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영어든 수학이든 학교·학원에서 다 가르쳐주는 요즘 세상에 부모가 자식한테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나? 결국에는 부모가 사는 모습, 사고방식 이런 것들일 게다. 아이들은 듣고 배우는 게 아니라 보고 배운다 하지 않나. 돌이켜보면 성격도, 취향도 다른 우리 부부가 지난 23년간 갈라서지 않고 함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비슷한 가치관을 공유했기 때문인 것 같다. 부부가 서로 신뢰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게 아이들한테는 가장 좋은 교육일 것이다.
김경아:다음으로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왔으니 사교육 관련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 사실 우리 집은 사교육을 거의 시키지 않았다. 피아노, 미술 등 예체능 사교육과 달리 공부 쪽 사교육은 처음부터 거리를 뒀다. 애가 셋이나 되는데 사교육에 돈을 썼다가는 생계가 위험해질 것 같아서다(웃음). 게다가 사교육에 쓰는 돈이 너무 아깝기도 했다. 첫째 애의 경우는 나중에 수능 준비할 때가 돼서야 “애가 이 정도 실력이면 부모가 억지로라도 학원에 보냈어야지 그냥 내버려두면 어떡해?”라고 우리를 원망하더라(웃음).
대신 공교육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게 우리 생각이었다. 선생님을 우리와 아이를 함께 키우는 동반자로 포지셔닝하고 학기 초마다 이런 생각을 선생님께 말씀드리곤 했다. 요즘 보면 사교육 선생님한테는 함부로 하면서 공교육 선생님한테는 지나치게 절절매는 부모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럴 게 아니라 선생님을 나와 같은 동지로 만들려는 자세를 가졌으면 한다.
우린 교육단체도 열심히 후원한다. 사실 사교육을 시키지 않을 거라면 소위 좋은 대학에 아이를 보낼 가능성은 접으셔야 한다. 이런 기대를 끝까지 붙들고 가면 아마 굉장히 고통스러우실 게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보다 직업의 귀천을 따지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주장하는 출신학교차별금지법이 시급히 제정되길 바란다. 수포자(수학 포기자)를 양산하는 교육과정도 하루빨리 개선됐으면 한다. 우린 대안언론이나 보육시설도 열심히 후원한다.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이 사교육에 돈을 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경호:마지막으로 부모가 주도권을 놓아서는 안 된다는 얘기도 하고 싶다. 국가가 강제한 의무교육이 도입된 이래 부모들이 자녀교육을 외부에 위탁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누가 뭐래도 교육의 일차적 주도권은 부모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교육을 돈 주고 맡기는 식이 되면 아이의 미래가 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는 만큼 부모가 교육의 주체이고 일차적 책임자라는 생각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