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과 삶
"빵대를 치면 그달 월급은 0원이다"
김선영 씨(54세)는 15년째 현대자동차를 판매하는 영업사원이다. 김 씨의 하루 일과는 아침 8시 30분 대리점으로 출근해 전시장 및 사무실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현대자동차 본사(이하 본사)에서 송출되는 방송에 맞춰 아침 체조를 하고, 본사의 교육과 지시사항을 시청한다. 때때로 본사는 전단을 돌릴 시간과 장소까지 정해줬다. 본사 지역본부 직원은 직접 현장을 돌면서 지시를 이행했는지 확인했다.
"800장 뿌리면 차 한 대를 팔 수 있습니다. 그냥 길바닥에 뿌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800명 만나는 거죠. 판촉물 주면서 인사하고 얼굴을 익히는 겁니다."
김 씨는 현대자동차 로고와 직급이 새겨진 명함을 각종 관공서와 빌딩을 돌며 전단을 뿌렸다.
한 달에 팔아야 하는 차량 대수는 세 대 이상. 그렇지 않으면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본사 지역본부장으로부터 '부진자 교육'을 받아야 했다. 김 씨는 그 시간이 가장 싫었다.
"'그렇게 해서 먹고 살겠느냐?'고 모멸감을 주고 쓸모없는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이 교육을 듣고 그만둔 직원들이 많아요."

▲ 현대차영업본점에서 1인 시위하는 김선영 씨. ⓒ작은책(정인열)
자동차판매처는 지점과 판매 대리점(대리점)으로 나뉜다. 지점은 본사가 직접 운영하고 정규직원인 지점 영업사원이 판매한다. 지점 영업사원의 고용주는 정몽구 회장이다. 대리점의 경우 개인사업자인 대리점 대표가 본사와 판매 계약을 맺고 운영하는데, 김 씨의 경우 대리점 대표가 고용한 영업사원에 해당된다. 전국 현대기아차 800개 대리점에 약 1만 명이 있다.
"대리점은 1999년에 처음 생겼어요. 본사가 IMF 때 구조조정하면서 영업사원들에게 희망퇴직 또는 대리점 소사장제 선택을 요구했어요."
당시 40대였던 노동자들은 대리점 대표가 되어 소사장으로 신분을 바꿨다. 그리고 영업사원을 모집했다. 같은 시기에 본사에서도 정규직 영업사원을 모집했다. 김 씨와 같은 처지의 친구 두 명은 정규직에 지원했고, 별 어려움 없이 입사했다. 대리점과 지점에서 하는 일도 똑같고 연봉 차이도 별로 없었다. 김 씨는 경기도 안산중앙대리점에 입사했다. 그때가 2001년 6월이었다. 하지만 15년이 지난 지금은 격차가 너무 벌어져 생계가 어려운 지경이 됐다.
"기본급 없죠. 4대 보험 없고 퇴직금도 당연히 없습니다. 빵대를 치면(실적 없음) 그달 월급은 0원이에요. 실적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줘요. 판매 매출의 70퍼센트가 대리점에서 나와요. 정규직은 실적 미달이어도 부진자 교육을 안 받습니다. 한마디로 비정규직만 조지는(압박하는) 거예요.”
대리점 영업사원은 차를 네 대 팔면 320만 원을 버는데, 여기에서 블랙박스·내비게이션 등을 자비로 고객에게 제공하고 나면 남는 것이 별로 없다. 이는 본사의 판매 지침을 어기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미스터리 쇼퍼'(고객을 가장한 감시 요원)에게 걸려 징계를 받는다.
그에 반해 직영 영업사원은 기본급에 4대 보험은 당연하고, 매일 교통비와 식대로 2만1000원이 나온다. 자녀 대학 학자금 등 복리후생도 좋다. 노조가 있어 해마다 투쟁한 결과다.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대리점 영업사원보다 급여가 두 배는 높다. 김 씨는 정규직 친구들을 만날 때면 상대적 박탈감이 컸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대표의 폭언과 횡포였다.
"야! 이 씨발, 개새끼야. 청소도 이렇게밖에 못해?"
한여름에 에어컨도 못 틀게 했다. 다른 대리점도 사정은 비슷했다. 쉬는 날 대표의 주말농장에서 일한 직원들도 있었다. 그러다 못 참고 대표와 싸우고 나가는 직원이 생기면 대표들끼리 직원 정보를 공유했다. 마음에 안 드는 직원은 다른 대리점으로 이직도 못하고 그만둬야 했다.
"10년을 부려 먹고 직원들과 헤어질 때는 퇴직금 한 푼 안 주고 욕을 하면서 내보내요. '저 새끼 잘 되나 봐라', 그리고 직원의 불행을 고소해합니다."
대표들의 횡포는 이것뿐만이 아니다. 일정 매출액 이상을 달성하면 본사에서 성과금을 지급하는데, 중간에서 대표들이 이를 가로챘다. 실제 안산중앙대리점의 경우 2014년 초 700만 원의 성과금이 나왔는데, 대표가 지급하지 않아 3일간 파업한 적도 있다. 대리점 대표들은 이렇게 중간착취로 한 달에 2~3000만 원을 가져갔고, 지금은 대부분 건물주가 됐다.
결국 김 씨와 동료들은 지난해 8월 22일 전국자동차판매노동자연대(판매연대) 노동조합을 결성했다. 기아자동차 정규직 노동자인 박주상 씨가 대리점 영업사원을 위한 온라인 공간을 만들고 지원해 준 것이 큰 도움이 됐다. 김 씨는 위원장을 맡고 앞장섰다. 노조 가입 3일 만에 해고를 통보받았다. 김 씨는 부당해고라며 출근투쟁을 했다. 대표는 사무실 PC와 전화기를 압수하고 계약서와 사무실 열쇠도 빼앗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표가 제 귓불을 빨고 입술도 핥았습니다. 너무나 섬뜩했어요. 40분 동안 침을 뱉고 발로 차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 사실이 공중파 언론에 보도됐고 지난 1월 15일 안산중앙대리점은 폐점됐다. 그 밖에도 노조 가입 사실이 알려진 대리점들이 줄줄이 폐점되거나 조합원들만 해고됐다. 이렇게 해고된 사람만 80여 명에 이른다. 김 씨를 비롯한 조합원들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양재동 현대기아차 본사와 대치동 국내영업본부를 오가며,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판매연대 노조는 상급단체가 없다. 그 이유를 한 지점 영업사원은 이렇게 말했다.
"지점과 대리점 사이 감정이 많이 상해있어요. 서로 경쟁을 하니까요. 지점이 계약하려던 고객을 대리점이 가로채는 일도 있어요. 현대자동차지부 판매위원회(지점 영업사원 노조) 의장은 이런 이유를 대면서 판매연대 노조가 금속노조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어요."
정규직이 있어야 할 자리에 현대자동차는 비정규직 대리점 영업사원을 채웠다. 비정규직 제도는 자본 입장에서는 좋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직접 고용하지 않으니,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고, 유지비는 적게 들며, 이익은 많이 가져다주고, 노동자 사이를 분리시켰다.
김 씨는 노조 활동 후 1년이 넘게 돈을 벌지 못했다. 2000만 원을 대출받아 생활했는데, 이제 또 대출을 신청해야 한다. 김 씨의 가족으로는 아내와 세 딸이 있다. 아내도 같은 처지의 비정규직으로, 기아자동차 대리점에서 사무직으로 최저임금을 받으며 일하고 있다.
"비정규직 신세는 비정규직이 알아요. 그래서 아내도 힘들지만 저를 지지해 줘요. 일곱 살 막내딸은 꿈이 판사에요. '내가 판사 되면 아빠 괴롭히는 정몽구를 혼내 줄 거야'라면서…."
대리점 영업사원에게도 기본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기본급과 4대 보험을 주고 노동 인권을 보호해야 한다. 그래야 지점과 대리점 간의 과도한 판매 경쟁도 사라질 것이다. 더 근본적인 해결책은 비정규직을 없애는 것이다.
"후회하지 않아요. 투쟁 전에는 몰랐는데, 이제는 비정규직인 게 너무나 당당해요. 전에는 남들에게 비정규직인 걸 굳이 밝히지 못했어요. 우리 딸들을 위해서도 꼭 해결하고 싶어요."
매달 1일 게시판엔 '퇴사자' 명단이…
"하나만 생각해. 치열하게 살지 않기 위해 서울을 떠난 건지, 제빵사가 되기 위해 서울을 떠난 건지."
네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조언해 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정답을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 게 아니잖아. 왠지 저 위에 내가 쓴 말을 자꾸 읽어 보게 된다. 낱말 한둘만 바꾸면 바로 내 얘기가 되기도 하니까.
매달 1일에는 회사 그룹웨어 게시판에 인사발령 공고가 떠. 내 생각에 그룹웨어 게시물 가운데 제일 열독률(?) 높은 게시물이 아닐까 싶어. 특히 관심 있는 건 '퇴사자' 명단. 대개 누가 나간다고 하면 환송회도 해 주고 미리 인사들을 하기 마련이지만, 간혹 '깜짝 퇴사'를 하는 사람도 있거든.
지난달에는 A 대리가 퇴사를 했더군. 공고가 나기 일주일 전쯤에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카더라' 소문이 돌았는데, 정말이었어. 환송회도 없이, 아는 사람들한테만 비밀리에 인사하고 떠난 모양이야. 회사에서는 약간 '모난 돌' 같은 캐릭터였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혹들이 생겼는데, 아무도 속 시원히 말해 주는 사람은 없었지.
30대 남자들끼리 아주 가끔 술을 한 잔씩 하는데, 나랑은 그런 자리에서 한두 번 정도 얼굴 본 사이였어. 다만 올해 초였나, 술자리에서 A 대리가 했던 얘기가 잠깐 다시 생각날 뿐이었어.
"최 대리님(그때는 대리였어), 근데 왜 최 대리님은 아무것도 안 해요? 난 기대했는데…."
술이 그렇게 많이 취한 것 같지는 않았고, 웃으며 얘기하긴 했지만 꽤 진지했지. 뭘 기대했다는 건가 의아했는데, 곧이어서 얘기하더군.
"최 대리님은 노동 쪽에서 왔잖아요. 진보 언론 기자였고. 우리 회사에서 노동조합도 만들고 우리 같은 사람들 위해서 뭔가 좀 하고 그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물론 정확한 말은 아니야. 기억을 최대한 살려서 쓴 거지. 원망하는 말투는 분명 아니었고, 웃으면서 이야기했어. 내가 노동자 잡지와 진보 성향의 신문사에서 왔다는 걸 알거든. 그래서 내가 회사에서 뭔가 '노동 쪽'으로 움직일 거라고 기대했나 봐. 노동조합도 만들고 회사에 좀 대들기도 하고 그럴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나는 뭔가 장황하지만 아무 알맹이도 없는 대답을 한 것 같아. '예스'도 아니고 '노'도 아니지만, 뭔가 지금까지 계속 '노'로 남아 있는 대답.
우리 회사에는 노동조합이 없어. 노동문제에 대한 이슈가 없어서 노동조합이 없는 건지, 노동조합이 없어서 이슈가 안 생기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법을 대놓고 어기지는 않겠다는 회사와, 이 정도라도 법을 지키면 된 거 아니냐는 직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타협을 유지하고 있다고나 할까.(회사에서 만든 '페이퍼 노조'(이름만 있는 노조)가 있다는 말도 있고.)
하지만 그렇다고 불만이 없을 수는 없지. 가장 큰 건 야근이야. 먼저 쓴 편지에서도 몇 번 얘기한 것처럼, '저녁이 없는 삶'은 우리한테 일상이지. 오죽하면 한 달에 하루 정시에 퇴근하는 날을 '패밀리 데이'(family day)라고 정해서 기념일처럼 챙기겠어.(그마저도 눈치 보여서 안 지키는 사람들 때문에 이 소박한 기념일도 없어질 것 같아 불안해.)
직장인들이 익명으로 회사 '뒷담화'를 올리는 스마트폰 앱이 있다는데, 거기 우리 회사 직원들이 올리는 글은 열에 아홉이 야근 이야기래.
"21세기의 직원들에게 20세기의 임원들이 19세기의 노동강도를 강요한다."
정확한 것은 아닌데, 언젠가 페이스북에 어떤 기사를 공유하면서 쓴 말이야. 한국 노동자들의 기나긴 노동시간에 대한 기사 아니었을까 싶어. 그런데 당시 회사 대표님(지금은 대표가 바뀌었어)이 댓글을 단 거야. '그걸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라는 요지로….
놀랐지. 댓글 내용은 별로 놀랍지 않은데, 직원의 페이스북에 대표님이 직접 댓글로 의견(감정은 섞이지 않은 점잖은 의견이었어)을 달았다는 게 놀라웠지. 내 계정을 팔로우하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뭘 얼마나 보고 있는지는 신경 안 썼거든. 나를 직접 이 회사에 채용했고, 초고속 승진(특혜라고 여겨질 만큼)을 시켜줄 정도로 나와 우리 팀에 관심이 많은 분이라, 나를 편하게 생각해서 댓글을 단 것 같아. 나도 그동안 어렵게 생각하진 않았는데, 그 뒤로는 어려워졌어.
최근에는 포괄임금제에 대한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한 적이 있어. 대기시간과 근로시간을 엄격히 구분하기 어려운 감시단속직 노동자 등이 아닌 경우, 대개의 일반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포괄임금제로 야근수당을 '퉁 쳐서' 주는 건 불법이라는 기사였지. 우리가 그래. 연봉 계약서에는 야근수당이 얼마라고 딱 정해져 있어. 그런데 그게 실제로 받아야 할 야근수당보다 적을까 많을까? 상상에 맡길게.
그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하는데, 문득 주저하게 되더라. 공유 버튼은 눌러놓고, 뭐라고 써야 하나 생각했어. 내 페이스북을 누군가가 보고 있을 것 같은 생각 때문에…. '노동 쪽 출신 최 대리는 왜 아무것도 안 할까?’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보고 있을 것 같고, '야근을 그렇게만 볼 게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보고 있을 것 같고…. 그래서 나는 결국 '일단 공유'라는 쓰나 마나 한 네 글자만 남겼을 뿐이야.
그래도 우리 회사는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라는 말, 직원들 사이에서도 종종 들어. 맞는 말이지. 하지만 대개의 경우 그 앞에는 어떤 말들이 붙기 마련이야. "야근을 많이 시키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월급을 안 올려 주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모성보호는 안 해 주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성과연봉제는 도입했지만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 이런 식이지.
대체 그 '상대'가 되는 회사는 얼마나 나쁜 회사인 거야? 그럴 때 모두가 동일한 상대를 기준으로 판단하라고 법을 만들어 놓는 건데, 어째 이럴 때는 법이 참 멀고도 멀다. '엄정한 법질서'라는 말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에만 적용되고 근로기준법에는 적용이 안 되는 건가? 상대적이라는 말, 생각할수록 참 편리한 말인 것 같아.
A 대리는 결국 그 술자리에서 내가 한 장황하고 모호한 말만 기억한 채 회사를 나갔어. 그리고 나는 이 편지에 또 그 장황하고 모호한 대답을 반복한 셈이고. 페이스북에는 기껏 네 글자를 남겨 놓고, 애꿎은 편지에는 괜한 분통을 터뜨리고 있잖아. 부당함을 모른 체하지도 않지만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도 않는 상태. 더 비겁한 사람보다는 덜 비겁한 상대적 비겁함. 나도 매일 이렇게 '상대적'이라는 말 뒤에 숨고 있어. A 대리는 대체 왜 회사를 나갔는지, 나중에라도 꼭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먹고사니즘'은 우리를 좀비로 만들었다
석 달이나 더 일하는 사람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짧은 소설에서 사람의 욕망에 관해 묻는다. 주인공 바흠은 "나도 저 사람들처럼 땅을 살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한결 형편이 나아질 텐데"라고 믿으며, 더 많은 땅을 가지려고 욕심을 부린다. 하지만 결국 그가 가진 땅은 자신이 묻힌 2미터(m)의 구덩이에 불과했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땅이 늘어나면 더 많이 일해야 하는데, 왜?'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바흠에게 땅을 주려던 바시키르 인들처럼 즐기며 살면 안 되나?

▲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할까요?>(길지연 옮김, 미래 펴냄)는 국내에서 글(야나가와 시게루)과 그림(고바야시 유타카)이 추가돼 그림책으로 출간됐다. ⓒ미래아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가장 오래 일하는 나라 한국. 한국인의 1년 평균 노동시간은 2015년 기준 2113시간으로, 노동시간이 가장 짧은 독일보다 석 달 더 일하는 셈이다. 한국인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는 것일까? 사실 사람들이 일을 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은 아니다. 할 일은 많은데, 노동자 수를 계속 줄이는 구조조정이 장시간 노동의 주요한 원인이다. 그렇지만 노래 부르는 베짱이가 아니라, 묵묵히 일하는 개미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 또는 강박관념도 노동시간을 늘리는 원인이다.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케이시 윅스는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제현주 옮김, 동녘 펴냄)에서 우리가 "의무로서의 일, 시스템으로서의 일, 삶의 방식으로서의 일보다는 특정한 일자리, 혹은 일자리 부족에 초점"(14쪽)을 맞추곤 한다고 지적한다. 즉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 정작 그 일이 왜, 어떻게, 얼마나 주어지는지에 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마치 일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우리는 일한다는 것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이런 자연스러움을 통해 "오늘날 신자유주의와 포스트신자유주의 체제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임금을 벌기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며(모두에게 돌아갈 만큼 일이 충분히 많지 않다는 점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탈산업화된 생산양식은 노동자의 손뿐 아니라 머리와 가슴을 필요로 한다."(57쪽) 일은 우리 몸에서 마음으로 깊숙이 침투하고 있고, '먹고사니즘'(경제적으로 이득이라면 다른 것들을 모두 무시해도 좋다는 생각)은 우리를, 식욕이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한 좀비처럼 만들고 있다.
우리는 강력한 노동사회에 살고 있다. 우리 삶은 노동윤리의 정서와 언어에 얽매여 있기에 보수든 진보든 더 오래,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주장에 토를 달지 않는다. 외려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들이나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은 정말 휴일도 없이 더 오래 열심히 일한다. 그러니 '무노동무임금'은 불변의 기준이고, 일하지 않으면 먹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케이시 윅스는 과감하게도 '노동 거부'라는 개념을 들이대면서 자유로워지고 싶다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조금씩 논의되고 있는, 조건 없는 기본소득과 임금 감축 없는 주 30시간 노동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이야기라면서 머리는 끄덕이는데, 머릿속에는 '소는 누가 키우노?'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일하지 않는데 왜 돈을 줘? 윅스는 일이 제약하는 정치적인 상상을 위해, 자유를 위해, 삶을 누리기 위해라고 답한다. 기본소득은 실업자나 불완전 고용 상태의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자원을 제공한다.
"무슨 일은 돈을 받고 무슨 일은 받지 못하는지가 점점 더 무작위하게 보일 때, 그리고 풀타임의 평생에 걸친 안정적 일자리 모델을 사회 규범으로 여기는 게 점점 더 어려워지고 일에 기초한 혜택을 얻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질 때, 수입의 기본수준을 보장하는 것은 소득을 분배하는 훨씬 합리적인 방법을 제공해 준다."(233쪽)
일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다면 임금을 받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일의 성격 자체가 바뀐다. 그리고 노동시간이 단축되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하고 싶은 일에 그 시간을 쓸 수 있다. 이 얼마나 급진적인 주장인가?
그리고 이렇게 삶이 바뀌면 지금 이 시간을 느끼는 우리의 감각도 달라진다. 미래가 아니라 현재가 더 중요해진다. 윅스는 이제 삶을 즐길 때라며 '일에 맞선 삶'을 제안한다. 매혹적인 제안이지만 여전히 우리는 머뭇거린다. 노동 중심의 사유가 문제인데, 그래도 일을 안 하면 어떻게 하나, 모두가 놀면 누가 재원을 마련하나라며 우리는 거국적인 차원의 걱정을 시작한다. 우리 삶에서 일이 빠져 버린 그 여백을 너무 두려워한다. 하지만 정말 일이 빠지면 삶이 망할까?

▲ 왼쪽 <우리는 왜 이렇게 오래, 열심히 일하는가?>(케이시 윅스 지음, 제현주 옮김, 동녘 펴냄)와 오른쪽 <천천히, 스미는>(박지홍 옮김, 봄날의책 펴냄). ⓒ프레시안
산문이 있는 삶
한때 '저녁이 있는 삶'이란 말이 회자되었다. 여가가 있는 삶을 뜻하는 좋은 취지로 사용되었지만 노동과 쉼의 경계가 분명한 근대적인 삶을 뜻하기도 한다. 한때 유행한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카드회사 광고 문구가 의미하는 것처럼 마치 저녁은 열심히 일한 자들만 누릴 수 있는 특권처럼 비치기도 한다. 우리는 항상 이렇게 살았을까?
영미권 작가들의 산문을 모은 <천천히, 스미는>(박지홍 옮김, 봄날의책 펴냄)에서 근대적인 삶이 보편화되기 이전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버지니아 울프, 조지 오웰, 오스카 와일드, 찰스 디킨스 등 유명한 작가들의 짧고 좋은 산문들이 담겨 있는데, 저녁이 있는 삶은 제임스 에이지의 '녹스빌: 1915년 여름'이라는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친 가족이 밤 시간을 보내는 과정이 잔잔하게 묘사된다(남녀의 분명한 성 역할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특별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 느리게 묘사된다. 우리가 싫어서 이런 삶을 떠난 걸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온갖 베스트셀러에 밀려서 시와 산문이 우리 삶에서 사라졌듯이, 우리도 세상에 밀려 일이 아닌 삶을 잊어 간다.
앞서 윅스의 말처럼 일이 삶의 한 방식일 뿐이라면 지나친 노동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단순히 일을 하지 않거나 일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바꾸는 것이다. 조지 오웰은 '두꺼비에 대한 몇 가지 생각'에서 이렇게 묻는다.
"돌아오는 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노동이 절감된 유토피아에서 행복할 이유가 있을까? 그 사람은 기계 덕택에 생긴 여가 시간에 무얼 할까? 우리가 고심하는 정치 사회 문제들이 정말 해결된다면 삶이 더 복잡해지지 않고 더 단순해지지 않을까 싶다. 첫 앵초꽃을 보고 느끼는 즐거움이 윌리처 주크박스의 노래를 들으며 아이스크림을 먹는 즐거움보다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사랑했던 나무와 물고기, 나비 그리고 (…) 두꺼비 같은 것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는다면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미래가 조금 더 가능해질 것이며, 강철과 콘크리트만 떠받들라고 가르친다면 우리 인류는 남아도는 에너지를 서로 증오하고 지도자를 숭배하는 일에 쏟아붓게 되리라 나는 믿는다."(99쪽)
나도 그렇게 믿는다. 그 첫걸음은 세상에 관한 짧은 기록인 산문을 읽는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