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국제정세 칼럼

썩은 내 나는 박근혜 정부야말로 부검 대상!

일취월장7 2016. 10. 7. 17:04

썩은 내 나는 박근혜 정부야말로 부검 대상!

2016.10.07 10:29:14


[시민정치시평] 죽음의 정치

             

국가는 폭력을 독점한다. 그러기에 국가는 죽음의 정치를 벌인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고 또 살린다. 북한 붕괴론을 암시하며 공멸의 위험도 불사하려는 대통령의 국군의 날 기념사나, 주변의 군사적 긴장을 극단으로 몰고 갈 사드의 배치, 지진대 위에 자리한 핵발전소 등은 이를 대변한다.

살기 위해 죽음을 택하라고 국민을 강박하는 것은 국가 혹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차용할 권리를 확보한 정부다. 국가에 국민의 삶과 죽음은 절대 가치가 아니라 절대 수단이다. 살림을 볼모로 국민을 겁박하며 죽임을 핑계로 국민 위에 군림한다. 그것이 국가가 독점하는 폭력의 실체다. 

고(故) 백남기 농민의 사망을 둘러싼 논란은 이런 죽음의 정치를 재차 되살린다. 박근혜 정부에 항의하는 민중 총궐기가 있었고, 경찰은 이를 대공비 작전을 펼치듯 강제 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고인은 경찰의 직사 살수에 타격받아 사망하였다. 사실은 이렇게 명료하다.

하지만, 세간의 이목은 엉뚱한 곳으로 이끌린다. 한 병원의 신경외과 과장이 궤변이나 다름 없는 이유를 대어가며 내린 병사 판정 때문이다. 민중 총궐기와 그것이 비판하고자 한 정부의 실정과 그것을 강제 진압했던 경찰의 폭력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한 생명이 아니라, 참 구질구질하게 만들어진 그 사망 진단서가 대중의 관심을 호도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망 진단서는 의사의 전문성보다는 국가의 생체 권력이 앞서는 영역이다. 무엇을 사망으로 간주하며 무엇을 그 원인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뿐 아니라 죽음 자체를 원인과 결과라는 인과 관계의 틀로 파악하고자 하는 것까지 그 모두가 의학에 선행하는 국가법의 영역인 것이다. 그러기에 '외인사'는 국가 폭력의 결정체인 수사권이 발동되는 예후가 되며, '병사'는 이제 장례와 애도가 허용된다는 국가의 처분이나 다름 없다. 죽음에 관한 신의 영역을 국가가 가로채고 나선 것이다.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안티고네가 국가 형벌권의 대상이 되어 버린 오빠(혹은 삼촌)의 주검을 두고 번민하여야 했었던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법의학은 의학이기 이전에 법학이자, 동시에 세심한 통치술의 한 부분일 뿐이다.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왜?"라는 법적 인과 관계로 환원해 버리는 것이 이 법의학의 이데올로기다. 거기서는 어떻게 죽었는가는 묻지 않는다. 쌀값 인상의 공약을 저버린 대통령의 식언에 항의하다, 불법적인 차벽을 앞세운 국가 폭력에 저항하다, 혹은 집회와 시위의 자유라는 자신의 기본권을 행사하다 과잉 경비에 나선 경찰의 살수차에 피격되어 죽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심폐 정지와 급성신부전과 급성경막하출혈이 가장 중차대한 문제인 것처럼 가장한다. 총체적인 정책 실패와 죽임까지 불사한 국가 폭력을 대상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어야 할 정치의 문제가, 한 전문가의 자의적 사망 진단이라는 개인의 문제로 전치되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서울중앙지방법원이 고인의 시신에 대한 부검 영장을 발부한 사태는 정확하게 그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주검을 해부함으로써 죽음을 해부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죽었는가의 문제를 왜 죽었는가의 문제로 대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법원은 1차 부검 영장 신청은 기각하였다. 경찰은 검찰 지휘하에 또 영장을 신청하였다. 그러자 법원은 추가 소명을 요구하는 것으로 약간의 어색함을 다스리고는 곧장 전대미문의 조건부 부검 영장이라는 것을 발부했다. 부검 장소와 부검 절차, 참관인 등을 유족과 협의해서 정하고 부검 과정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라는 조건이 달린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영장 발부 행위는 그 자체 심각한 하자를 가진다. 

우선, 부검 영장의 발부 요건이 어떻게 충족되었는가가 의문스럽다. 부검은 언제나 필요한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고인과 그 유족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기존의 증거나 자료들에 의해 외인사라는 점이 충분히 입증될 수 있으면 부검이라는 추가적인 강제 수사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역으로 부검을 실시하려면 외인사가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들어야 한다. 즉 경찰-검찰이 기존의 증거에 대하여 합리적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증거나 소명을 제시했어야 한다. 

그런데 법원은 "병사"로 기재된 사망 진단서에도 불구하고 제1차 결정에서는 영장 청구를 기각하였다. 법원은 이미 "진료 기록 내역을 압수해 조사하는 것을 넘어 사체에 대한 압수 및 검증까지 허용하는 것은 필요성과 상당성(타당성)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한 바 있다. 진료 기록만으로 외인사임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으며 그 사실을 뒤엎을 만한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는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제2차 결정에서는 자료 보완을 요구한(사실 보완 요구 자체도 이례적인 것이다) 후 기다렸다는 듯이 부검 영장을 발부하였다. 사실 관계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이 부분에서 되려 우리가 법관의 판단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법관의 생각을 바꾸게 만든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검찰-경찰이 어떤 용빼는 재주가 있어 순식간에 법관의 판단까지 바꿀 만큼 그렇게 중대한 자료를 만들어 소명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둘째, 이 부검 영장은 가해자에게 증거를 찾아내도록 한다. 주지하듯 경찰은 살수차 운용 경관에서부터 당시 현장지휘부, 그리고 전현직 경찰총수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이 사건의 폭력성을 부인해 왔다. 살수도 지침대로 했고 지휘도 제대로 이루어졌으며, 민중 총궐기에 대한 집회 관리도 전혀 잘못된 것이 털끝만큼도 없다는 것이 경찰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래서 경찰은 내부적인 감찰도 중단하고 검찰은 검찰대로 수사에 손을 놓고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증거나 자료, 증언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한통속이 되어 자신들의 결백을 강변한다.

여기에 정부‧여당까지 나아가 보수 논객들까지 편들고 나선다. 설상가상격으로 부검을 담당하게 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부검의조차 부검이 필요하다고 공식 선언을 하였다. 누가 봐도 외인사인 것을, 누가 봐도 직사 살수에 의한 죽임인 것을, 그 부검의들은 한 목소리로 아니라고 하면서 가해자인 경찰의 편을 들고 있다. 어떤 면으로 보더라도 부검의 객관성과 중립성을 장담하지 못하는 구조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경찰에게 부검을 맡길 때 그 부검의 결과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 절차에서는 그 어떠한 정의도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도 저 법관은 가해자인 경찰과 그의 한 손인 부검의에게 고인의 시신을 맡겨 버렸다. 

셋째, 이 과정에서 사망의 이유와 원인이 교착되어 버린다. 고인의 사망에 이른 일련의 과정은 철저하게 정치적이다. 물론 살수차 운용 경관과 그 현장 지휘부, 경찰 총수까지 그 행위에 합당한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차벽과 살수차, 막대한 경찰력 등의 폭력을 동원하여 국민의 입과 귀를 막게끔 지시한 통치권력과 그에 부종하는 정치권력에 대한 책임추궁이다. 혹은 우리의 삶을 이토록 옥죄고도 우리들을 "개돼지"라고 명명하기에 스스럼이 없는 일단의 지배 세력들에게 이 세상은 국민이 주인임을 보여주는 일이다. 경찰이 부검의 논란을 일으킨 것은 경찰관 몇 명의 문책을 피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이 사건이 이렇게 정치화되어 현 정치 권력에 대한 책임 추궁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민중총궐기의 정치를 부검의 정치로 되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부검 영장을 발부한 법관은, 그리고 그가 속한 이 땅의 사법부는 이런 정치적 소명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지나치게 법에 충실함으로써 스스로가 또 다른 아이히만이 되기를 자처한다. 사법관의 지배(juristo-cracy)라는 것은 이렇게 발생한다. 정치의 문제를 법의 문제로 환원한 채 모든 것을 경직된 법교리 속에 매달아버리는, 저 권위주의 체제가 행사하던 탈정치화의 패악이 이렇게 반복되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는 죽음과 주검까지도 철저하게 도구화하고 통치의 수단으로 삼는 그 엄청난 폭력이 내재되어 있다. "망자의 몸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정희진의 질문은 이 지점에서 아주 적절해진다. 고인은 자신의 목소리를 외치다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생명을 앗아간 것은 국가이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우리의 귓전을 울려 퍼진다. 그의 죽음과 그의 함성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국가는 '망자의 몸'을 부검이라는 이름으로 탈취하고자 온갖 힘을 다한다. 그의 몸에 부착된 그의 목소리를 떼어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함성이 부검의의 칼날에 갈가리 헤쳐져 우리의 귀에까지 와 닿지 못하게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저 법관의 영장 발부 결정은 너무도 무모해진다.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렇게 저렇게 붙인 조건들 때문에 가뜩이나 빗나간 문제의 해결 고리조차도 더 어지럽게 만들어 버렸다. 부검 영장의 경우 집행장이 아니라 허가장의 성격을 가지는 것인 만큼, 그가 힘을 실어 제시한 조건들은 영장의 중요 부분으로 그것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으면 영장 자체가 효력을 상실하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법리는 사족처럼 초라하다. 고인의 사망은 누가 보더라도 물대포의 타격에 의한 외인사이며, 그 배경에는 민중들의 목소리를 적대하며 전투적으로 지워버리고자 하는 폭력적인 정권이 존재함 또한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부검 영장을 발부하는 법관의 치졸한 법리로는 도저히 가리지 못하는 그 엄중한 우리들의 정치가 눈앞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검 영장이 진정으로 가리켜야 하는 곳은 따로 있게 된다.

그것은 고인의 시신이 아니라, 이 땅에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의 시신과 벌써 부패의 썩은 냄새를 풍기는 이 땅의 통치 권력이 죽여버린 민주주의의 시신이다. 백남기 특검법을 요구하는 서명 운동은 그래서 의미 있어 보인다.



남으로 오라? 박근혜, 이제 '카드'가 없다

2016.10.07 08:22:35


[현안 진단] 전략없는 핵 대신 인권 문제로 타깃 변경

             
국군의 날 기념사에 담긴 분명한 메시지와 은폐된 신호

지난 10월 1일 국군의날 기념사는 최근 북한 문제에 대한 박근혜 대통령의 고민과 의도를 외교적 수사의 애매함 없이 과감하고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대통령은 김정은 정권에게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과시해서 정권 안정을 이루겠다는 착각을 버리라고 촉구하고, 북한 주민에게는 참혹한 인권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는 대한민국으로 올 것을 권고했다. 그러면서 우리 내부를 향해서는 북한 내 우발 사태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안보에 대해서는 모든 국민이 일치단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메시지가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느냐 또는 실현 가능하냐는 논란과는 별개로 대통령 발언으로는 다소 수위를 넘는 파격성과 단순한 논리가 주는 명쾌함 때문에 그동안 북핵 문제를 다루는 우리 정부의 대응에 답답해하고 좌절감을 갖게 된 사람들의 속을 일시적으로 시원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운치 않은 점이 많다. 오히려 생각할수록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대통령의 초강경 대북 메시지 속에는 북핵 개발 저지 노력이 한계를 드러낸 상황에서 나오는 무기력과 좌절감이 숨어 있다. 또한 아무리 대북 제재 강도를 높여도 중국의 국익을 무시하면서까지 북한의 숨통을 막을 수 없는 점도 명백하다. 북한과의 협상 재개는 이미 시기를 놓쳤고 새로운 협상을 위해 준비된 협상 카드도 없는 실정이다.

그나마 대북 제재 강화나 협상 개시를 위해서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대북 제재 강화는 중국 손에, 대북 협상 카드는 미국 손에 있을 뿐이다. 이 모두 남북 관계의 경색과 파탄이 불러온 결과이다. 

다소 파격적 내용을 담은 이번 기념사는 북한 비핵화를 위해 이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이 사실상 없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북한 주민이 굶주림과 폭압 정치를 박차고 대량으로 탈북해 나오는 상황을 고대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사드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사드가 이 시점에서 필요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북한 핵무장을 전제로 하는 대응책일 뿐이지 비핵화를 위한 해결책은 아닌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북한 비핵화 정책을 포기한 정부로 기록될 수 있다는 걱정과 우려를 떨칠 수 없다. 

▲ 지난 1일 충남 계룡시 계룡대 대연병장에서 열린 건군 제68주년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연설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전략적 사고의 빈곤과 안보 카드의 남용 

이번 기념사가 대통령 발언으로 부적절하다는 지적은 우선 전략적 사고에 기반을 둔다. 남북 관계에서 최종 정책 결정권자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발언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 등은 문제 삼고 싶지 않다. 

우리는 어떠한 계산에 따르더라도 북한 핵을 용인할 수 없다.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우리는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서 북한 비핵화를 이루어내야만 한다. 대통령이 언급한 '남으로 오라'는 메시지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전략적 사고의 부재를 드러낸다.

첫째, 북한을 핵 포기로 유도하는 것이 아니라 핵에 더욱 매달리게 해서 핵 보유 쪽으로 몰아가는 결과가 될 가능성이 많다는 점이다. 기념사도 언급했듯이 김정은 정권은 체제 불안정이라는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핵 개발에 나서고 있다. 따라서 외부 위협이 커질수록, 그리고 체제 불안정을 느낄수록 핵 개발에 매달리게 된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민생 챙기기나 두만강의 수해 복구보다 체제 안보를 위한 핵개발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이다.

'남으로 오라'는 메시지는 실현 가능성과는 상관없이 북한 주민의 동요를 도모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북한 정권으로서는 공공연한 체제 위협을 이유로 핵 개발에 더욱 매진해야 하고, 소위 '인권 책동'에 맞서 주민 단속을 강화해야 한다는 심리와 명분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둘째, 북한 비핵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 옵션의 가능성을 스스로 제약한다는 점이다. 북핵 문제는 과거의 양상과는 완전히 다른 국면에 처해있다는 점에서 정부의 정책 옵션도 새롭고 창의적 차원에서 모색해야 한다. 대북 제재가 되었든 협상이 되었든 과거의 제재나 협상이 실패했다는 점에서 이를 모방하여 반복하는 것은 소용없다고 본다. 제재도 파격적이어야 하며 협상도 파격적이어야 할 것이다. 

유엔 안보리는 지난 9월 북한의 5차 핵 실험에 따른 강도 높은 대북 제재를 준비하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각국의 전문가 사이에서 핵 협상 재개 요구도 만만치 않다. 미국과 일본의 북한 전문가 중에는 핵 동결을 목표로 협상을 시작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이미 제재 수위를 높이되 협상 재개를 병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정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대통령이 정세 변화의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융통성 없는 메시지를 내놓는다면 상황이 바뀔 때, 우리 정부의 대응을 대단히 어렵게 만들 소지가 크다. 아마도 협상의 주도는커녕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불리한 위치를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혹자는 대통령의 이러한 초강경 대북 메시지가 상당한 전략적 사고에 기반한 것이기는 하되 국내 정치적 필요에 따른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여소야대 정치 지형과 정권 말기 레임덕을 우려하여 안보 이슈로 어려움을 돌파하기 위한 것이라거나, 강경한 대북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어 지지자를 규합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러한 분석이 헛된 추론에 머무르길 바라지만 이런 논란 자체가 결국 국론 분열을 자초하는 빌미가 된다는 지적을 사시로만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북한 핵 문제에서 인권 문제로 타깃을 변경하는가  

북한 핵 개발 저지를 위한 여러 대안들이 한계를 보이면서 북한 인권 문제가 핵 문제를 제치고 최고 현안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7월 미국은 김정은 위원장을 인권 침해를 이유로 제재 리스트에 올렸다. 그에 대한 국제 형사법 처벌도 논의되고 있다. 북한 인권 문제가 핵 문제보다 풀기 어려운 매듭들을 여기저기 만들고 있는 중이다.

북핵 협상이 재개되더라도 타협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며 가시적 성과는 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기간 중에 핵 문제보다 인권 문제의 매듭을 푸는 일이 전면에 부상할 전망이다. 

우리 국회가 제정한 북한 인권법이 9월 초 발효되었다. 이제 정부 차원에서 관련 정책을 구체화해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번 국군의 날 기념사가 대북 정책 중점 타깃을 북핵에서 인권 문제로 바꾸는 정지작업을 위한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북한 인권 정책은 그야말로 치밀한 전략적 고려하에 시행되어 북한 비핵화 정책의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 특히 인권 문제의 강조가 북한 비핵화에 대한 무대책을 은폐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북한 인권 문제에 대한 입장은 본 '현안 진단'에서 이미 여러 차례 밝힌 바 있지만 세 가지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도록 해야 한다. 북한의 현실을 이해하는 기반위에서, 북한 주민 스스로의 힘으로, 한반도 평화가 유지되는 대전제 아래에서 개선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통일 과정에서나 통일 후에나 북한 주민의 마음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핵심적 과제이다. 그러나 북한의 당국과 주민을 분리하여 북한 주민의 탈북이 곧 인권 문제의 해결책인 것처럼 비트는 논리와 그 의도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진정으로 북한 주민의 인권과 삶에 관심이 있다면 지금 당장 그들에게 목숨을 걸고 '남으로 오라'고 하기 전에 먼저 생존의 기로에 선 두만강 지역 수재민에게 따뜻한 손길을 보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전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