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칼럼

‘수포자’에게 추천하는 수학 책 - “나라 전체가 썩은 배로군”

일취월장7 2016. 7. 8. 11:03

‘수포자’에게 추천하는 수학 책

에릭 템플 벨의 <수학을 만든 사람들>은 위대한 수학자들에 대한 짧은 전기적 에세이와 그들의 가장 큰 업적을 버무려놓은 책이다. 이 책은 수포자들이 싫어하는 수식마저도 눈길을 끌 만큼 매혹적이다.

  조회수 : 293  |  고종석 (작가·칼럼니스트)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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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승인 2016.07.07  15:40:43


'수포자’라는 말 들어보셨는지? ‘수학 포기자’의 준말. 내가 수포자가 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아. 어쩌면 중학교 2학년 때일지도 몰라. 2차함수를 배우면서 ‘아, 이건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다’ 싶더라고. 그렇다고 단번에 수학을 포기할 수는 없었지. 수학은 워낙 중요한 과목이니까. 수학이 얼마나 중요한 학문인지를 알았다는 게 아니라, 상급학교 진학에 수학 성적이 얼마나 결정적인지를 알았다는 거야. 그래서 나도 나름대로 수포자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애는 써봤어. 그러나 소용없었어. 수학은 내게 매정했어. 고등학교 때 수열·미적분은 나에게 외계 언어였어. 확률 통계만 겨우 따라갈 수 있었지.

수포자가 된 얼마 뒤,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어. 아, 수학이 내 인생을 뒤바꿔놓을 수도 있겠구나, 아주 나쁜 방향으로 돌려놓을 수 있겠구나. 그 예감은 이내 현실이 되었지. 내가 수학을 잘했다고 해서 반드시 자연과학이나 공학 분야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지는 않았겠지만, 적어도 바라던 대학에 들어가기는 했겠지. 심지어 대학에서 이공계 학문을 전공하게 됐을지도 모르고. 그랬다면 내 가정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었을 거야. 그게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컴맹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IT 기기를 젊은이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현시창(현실은 시궁창)’은 내게도 어김없이 적용돼 나는 시시한 기자로 젊은 시절을 보냈고, 지금은 IT 기기를 겁내는 중늙은이가 되었어.

 <div align=right><font color=blue>ⓒ이지영 그림</font></div> 
ⓒ이지영 그림

이따금, 내가 같은 조건에서 한 세대 늦게 태어났으면 내 삶이 얼마나 비참했을까를 상상하며 가슴을 쓸어내리곤 해. 나는 기자로 일할 때 원고지에 글을 쓰는 세대였고, 1990년대부터 컴퓨터로 글을 쓰는 게 대세가 됐을 때도 한글 문서 작성만 하면 됐거든. 그러니까 컴퓨터는 내게 워드프로세서 기능만 했을 뿐이야. 그런데 요즘 기자들을 보면 랩톱과 각종 IT 기기를 들고 다니며 자유자재로 사용하더군. 아니, 2000년이 되기 전부터도 대학에선 수강 신청을 인터넷으로 했다고 들은 것 같아. 수학이 인터넷과 직접적 관련은 없을지라도, 내가 ‘IT맹’이 된 것은 일찍이 수포자가 된 것과 무관치 않은 게 확실해. 다시 말해 내가 한 세대 늦게 태어났다면, 나는 경제적 사정과 상관없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운이 좋아 대학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하더라도 무직자로 살았을 거야. 나는 엑셀이 뭔지도 모르고, 매킨토시 컴퓨터는 아예 사용해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러니까 하늘이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건 아니야. 수포자도 살아갈 수 있는, 다소 헐렁한 시대에 나를 떨어뜨려놓았으니까.

그런데 묘하게, 성인이 된 뒤 내 독서 목록에서 수학에 관련된 책들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어. 수학이 얼마나 재미있는 학문인지를 선전하는 책이 많이 나와 있잖아. 내가 수포자였기 때문에, 외려 나는 그 책들을 꼬박꼬박 읽어봤어. 그렇지만 대개 처음 20~30쪽만 넘어가면, 그러니까 수식이 등장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멍해지는 거야. 그래서 끝까지 꼼꼼히 읽은 책은 거의 없는 것 같아. 내가 전공한 언어학의 중요한 분야가 의미론이라는 건 언젠가 이 자리에서 말했지? 의미론자 가운데는 수학적 모델을 채택해 자연언어를 탐구하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의미론은 결국 논리학이나 분석철학과 많은 부분 포개지게 돼. 그래서 나는 의미론을 공부할 때도 그런 접근법의 책들은 그냥 수박 겉핥기식으로 읽고 말았어. 다시 한번 나를 헐렁한 시대에 떨어뜨린 하늘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게, 내가 살아온 시절은 미분방정식을 못 풀어도 ‘먹물’ 행세를 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시대였어. 그렇지만 앞으로는 달라질 거야.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더라도 수학적 교양이 반드시 필요할 거야. 수학을 피해갈 방법이 점점 없어진다는 거지. 미국이나 유럽의 연구소들이 예측한 바에 따르면 기자는 곧 소멸할 직업이고, 수학자가 가장 인기 있는 직업이 된다는군.

그러나 그런 시대가 온다 하더라도 수포자가 사라지지는 않겠지. 수학은 다른 학문에 견주어 노력보다는 재능이 훨씬 요구되는 학문이니까. 그런 불행한 미래의 수포자를 위해서, 그나마 덜 불행한 현재의 수포자가 추천하고 싶은 책이 하나 있어. 에릭 템플 벨이라는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수학자 겸 과학소설 작가가 쓴 <수학을 만든 사람들>(Men of Mathe-matics)이야. 이 책은 안재구라는 이가 번역해 미래사라는 출판사에서 1993년에 처음 한국어판이 나왔는데, 서점에선 구하기 어려울 거야. 20년 이상 품절되지 않고 팔려나가는 책은 한국에 매우 드무니까. 도서관에서 빌려보는 수밖에 없을 거야. 영어에 좀 자신이 있는 사람이면 아마존에서 영어판을 사서 읽을 수도 있을 거고. <수학을 만든 사람들>은 내가 읽은 수학 관련 서적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고, 가끔은 바로 그 재미 때문에 다시 들춰보는 책이기도 해.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까지의 위대한 수학자들에 대한 짧은 전기적 에세이와 그들의 가장 큰 업적을 버무려놓고 있어. 사실 나 같은 수포자도, 미적분이 두려울 뿐 그걸 독일의 라이프니츠와 영국의 뉴턴이 거의 비슷한 시기에 발견했다는 것 정도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알고 있었어. 그 사실을 놓고 독일인들과 영국인들은 자존심 대결을 벌이느라 17세기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지. 이 책에서 수포자들이 가장 재미있어할 부분은 수학사의 에피소드들일 거야. 수학자들은, 음악가가 그렇듯, 특별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야. 그 특별한 재능 때문에 그들은 별난 사람으로 취급되기도 해. 아무튼 <수학을 만든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제논에서부터 게오르크 칸토르(1845~1918)에 이르기까지 수학을 만든 사람들의 삶을 재구성하고 있어. 칸토르에서 아쉽게 끝난 것은 이 책의 원본이 1937년에 출간됐기 때문이야. 그 두 별 사이에, 또는 둘레에 데카르트, 페르마, 파스칼, 오일러, 라그랑주, 라플라스, 가우스, 코시, 로바체프스키, 아벨, 야코비, 갈루아, 불, 크로네커, 리만, 푸앵카레 같은 별들이 점점이 박혀서 수학사의 눈부신 성좌를 이루고 있지.

너무 뛰어나 불행해진 천재 수학자

어찌 보면 이 책은 천재들의 이야기야. 수학사에 굵은 글씨로 이름을 남기려면 천재일 수밖에 없어. 프랑스의 에바리스트 갈루아와 노르웨이의 닐스 헨리크 아벨은 20대에 죽었으면서도 수학사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지. 그렇지만 그들도 우리 수포자들과 비슷하게 질투하고 시기하고 사랑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속이고 그랬어.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도 있고 자유주의자도 있고 진보주의자도 있지. 이 책의 수학자 가운데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준 이는 군(群)이론에 커다란 공헌을 한 에바리스트 갈루아야. 저자는 그를 다룬 장에 ‘천재와 광기’라는 제목을 붙였는데, 사실 광기라는 말은 좀 심한 것 같아. ‘격정’ 정도가 좋지 않을까 싶어. 갈루아의 짧고 파란만장한 삶을 여기서 요약하지는 않을게. 다만, 그의 삶은 시험관보다 뛰어난 수험생은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것을 알려줘. 그는 너무 뛰어난 탓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어. 대학의 입학 시험관들이 그의 답안지를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그는 또 19세기 프랑스의 정치적 요동에 휘말려 체제와 심하게 불화해. 견결한 공화주의자 갈루아는 (아마 프랑스 경찰의 계략에 휘말려) 정치적 적과 권총 결투를 벌이다 총알이 배를 관통해 21세로 삶을 마감하지. 죽은 뒤 어딘가에 묻혔지만, 오늘날 그의 무덤은 흔적도 없어. 그의 영원한 묘비는 그의 전집이지. 고작 60페이지에 불과한, 그러나 수학사가 결코 누락할 수 없는 위대한 전집.

수포자들은 수식을 싫어하지. 그런데 이 책에도 수식은 나와. 수학자들의 핵심 업적을 간단하게라도 설명해야 하니까. 이 책은 그 수식까지도 눈길을 끌 만큼 매혹적이야. 그렇지만 수포자들의 전통대로 수식을 뛰어넘고 읽어도 얻을 것이 많은 책이야.



“나라 전체가 썩은 배로군”

조선시대에도 전국에서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 침몰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임금들은 관계된 관리들을 처벌하고 생존자를 끝까지 수색·구원하려고 노력했다.

  조회수 : 2,479  |  백상웅 (시인)  |  webmast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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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9호] 승인 2016.07.07  15:40:33


<조선왕조실록>에는 세곡을 운반하는 조운선(漕運船) 침몰 사고가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태종 때는 조운선 34척이 침몰되어 쌀 1만여 석을 잃었고 사람 1000여 명이 죽었다. 수색 작업 중에 섬에서 한 사람을 발견했는데, 그는 도망가기 바빴다. 쫓아가 까닭을 물으니 “도망하여 머리를 깎고, 이 고생스러운 일에서 떠나려고 한다”라고 대답했다. 임금은 이에 “쌀은 비록 많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지마는,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다.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조운(漕運)하는 고통이 이와 같으니, 선군(船軍)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해 흩어지는 것은 마땅하다”라며 “육로로 운반하는 것의 어려움은 우마(牛馬)의 수고뿐이니,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 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험한 육로는 느리고 불편했다. 조운선 침몰은 태조 때부터 고종 때까지 계속됐다.

정조 시절에도 전국에서 조운선이 침몰하는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정조실록> 정조 1년 3월8일 네 번째 기사에는 조운선 침몰에 대한 임금의 하교가 기록되어 있다. “북쪽 백성을 구하려다 도리어 남쪽 백성을 해롭게 한 것이니,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 배들이 연이어 패선(敗船)된 것이 모두 배가 완전하지 못한 탓이라고 말을 하니, 자신이 독운(督運)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잘 점검하여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다.”

 <div align=right><font color=blue>ⓒ박영희 그림</font></div> 
ⓒ박영희 그림

정조는 이 사고와 관계된 관리들을 처벌한다.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라는 대목에서 백성을 생각하는 임금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정조 시절의 조운선 침몰 사고에 대한 이야기는 소설가 김탁환이 <목격자들>(민음사, 2015)에 담은 바 있다. 이 소설의 부제는 ‘조운선 침몰 사건’이다. 소설의 주인공 홍대용·김진·이명방은 사건을 조사하며 부패한 나라의 민낯과 마주친다. 소설 속에서 김진은 이렇게 탄식한다. “이렇게 썩었을 줄은 몰랐네. 나라 전체가 푹푹 썩은 배로군.”

2014년 4월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 대통령은 해경을 엄벌하겠다며 해경을 해체했다. 대통령은 말했다. “조사할 것이고 원인 규명도 확실하게 할 것이고 거기에 대해서 반드시 엄벌에 처할 것”이라고 했다. 해양경찰청은 국민안전처 산하의 해양경비안전본부로 자리를 바꿨다. 해체는 없었다. 세월호 구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처벌은 없었고 오히려 책임자들은 승진했다고 한다. 이들은 체계도 없이 구조수색 작업에 임했고 심지어 책임도 떠넘기려고 했다. 이춘재 당시 경비안전국장은 해양경비안전조정관 전담직무대리로 올라 ‘넘버 2’로 불리고 있고, 세월호 참사 당시 대변인이었던 고명석 장비기술국장은 서해해양경비안전본부장으로 승진했다. 사고에 대한 대처 능력이 전혀 없음을 확인했음에도 국가는 그들을 신뢰하고 승진까지 시켰다.

“내가 딱하고 마음이 아파 차라리 죽어 몰랐으면 싶다”

세조 때, 조운선 54척이 침몰하자 임금은 관찰사를 불러 생존자를 “끝까지 수색하여 구원”하라며 아래와 같이 유시한다. “이제 충청도 관찰사의 계본(啓本)을 보니, 전라도의 조운선 54척이 본월 3일 태안의 안흥량을 지나다가 바람을 만나 혹은 선척 전체가 파손되어 침몰하였거나, 혹은 향방을 알지 못한다 하니, 내 이를 몹시 진려하는 바다. 먼 섬이나 포구에서 비록 언덕을 의지해서 살아난 자가 있어도 먹을 것이 없으면 반드시 굶어 죽을 것이니, 그 여러 고을로 하여금 선척과 식량을 갖추고서 끝까지 수색하여 구원하게 하고, 또 연해의 민가로 하여금 육지에 내려 먹을 것을 구하는 자를 만나거든 이르는 대로 음식을 먹이도록 하라.” 세월호에 탑승한 476명 중에서 295명이 사망했고 아직 9명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세월호는 인양 작업을 하고 있다. 슬픔이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