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스마트폰 쓰는 딜레마 - 스무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스마트폰 쓰는 딜레마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을 허용하자니 폐해가 많고 강제로 거두자니 학생들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 아닐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 [459호] 승인 2016.07.06 17:56:18 |
우리 학교는 원칙적으로 스마트폰 소지를 금지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전면 금지가 불가능하기에 “꼭 필요한 학생만 가지고 와서 담임교사에게 맡기”라고 한다. 그러나 아이들 모두가 스마트폰을 맡기지 않는다는 것은 학생도 알고 교사도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당신들이 모르는, 학교에서 몰래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방법’이 서너 가지 모자란 100가지쯤은 되지 않을까 싶다.
딸이 고등학생 때, 점심시간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걸어왔다. 자신의 오후 일정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어? 너 아직 학교 안 끝났잖아, 어떻게 전화했어? 이건 누구 번호야?” “친구 거야.” “스마트폰 다 내잖아? 친구는 안 냈어?” “다 방법이 있지. 얘는 ‘꽁폰’ 냈어.” 그렇다. 학교에는 가짜폰(그러니까 실제로 사용하는 폰이 아닌 고장 난, 혹은 여분의 전화기)을 내고 유유자적 진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아이들이 꽤 있는 것이다.
거꾸로 ‘공기계’라고 부르는, 통화가 안 되는 전화기를 일부러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다. 남자아이들에게 스마트폰은 통화용보다는 게임용으로 더 유용하다. 점심시간에 이미 밥을 다 먹은 시간인데 교실 불이 꺼져 있어서 “왜 어둡게 불도 안 켜고 있니?” 하고 전등을 켜면 어둠 속에서 후다닥 흩어지는 무리들이 있다. 영락없이 ‘공기계’ 스마트폰으로 게임하는 것을 주변에서 구경하는 아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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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성 그림 | ||
몇 년 전 담임을 맡은 반에는 스마트폰 중독 증상이 심한 아이가 하나 있었다. 아침 독서 시간마다 축 늘어져 엎드려 있는 경우가 많아 “어디 아픈 거니?” 하고 걱정스레 물으면 반 아이들은 “쟤 전자파 금단 증상이에요. 오후에 스마트폰을 받으면 금방 나아요”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 친구들의 놀림에 상처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종례 시간에 스마트폰을 돌려받은 그 아이가 “아∼ 그리웠던 이 전자파 향기∼!”라고 외치면서 전화기를 뺨에 문질렀다. 반 아이들과 모두 함께 웃었다.
그 학생은 아침에 거의 매일 지각을 했다. 어머니 말로는 아침 일찍 매우 여유 있게 집을 나가기 때문에 그럴 리가 없단다. 알고 보니 천천히 걸어오면서 게임을 하거나 어떤 때는 아예 벤치에 앉아 게임을 하다가 와서 지각을 하는 것이었다. 청소할 때도 한 손으로 게임을 하고 다른 한 손으로 걸레를 문지르며 제대로 청소를 하지 않으니 그 아이와 당번이 된 아이들은 늘 불만이 많았다. 그 아이뿐이랴, 아침에 스마트폰을 낼 때는 교탁까지 십리는 되는 것처럼 느릿느릿 나오고 종례 시간에는 교단 옆에 먼지가 일 정도로 전속력 질주로 달려 나오는 건 모든 아이들의 공통점이다.
학급회의로 ‘절제’ 택한 아이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 아이들이 북적인다. 교실에서는 큐브를 하거나 비행기를 접어 날리는 아이들도 있고 대부분 공놀이를 하러 운동장에 나가 있다. 계단참에서 배드민턴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스마트폰 사용이 금지된 학교 규정 덕분에 그나마 쉬는 시간에 이런 모습이 연출되는 것 아닐까? 만약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이 허락된다면 이런 모습 대신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아이들이 일제히 교실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무서운 고요’ 속의 게임에 빠져 있지나 않을까?
내 이런 상상을 ‘선생 꼰대들의 과한 걱정’이라고 비판하는 이가 있었지만 이게 단지 기우이기만 할까 싶다. 물론 강력한 규정이나 ‘걸리면 한 달 압수’와 같은 벌칙으로 휴대전화를 금지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스마트폰 사용을 허용하자니 많은 폐해가 있고, 강제로 제출하게 하거나 벌칙을 부여하자니 학생들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 아닐까 하는 딜레마에 빠진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진지한 학급회의를 통해 스마트폰을 학교에 맡기지 않고도 스스로 사용을 절제하도록 운용한 몇몇 학급이 있었다. 토론과 설득을 통해 학교에서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문제에 대해 학생들이 지혜로운 선택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학생들이 배워야 할 것은 ‘통제’가 아니라 ‘자제’일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왜곡하는 사람들
흔히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필요에 의해 이 대화를 뒤틀거나 꾸미는 경우가 있다. 최근 고구려 기행을 시작한 법륜 스님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역사 이야기를 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459호] 승인 2016.07.06 17:55:35 |
아빠가 어느 언론사 면접시험을 볼 때 이야기를 들려줄까? 갑갑한 넥타이 죄어 매고 손은 무릎에 단정히 얹은 상태로 질문을 기다리는데 이유 없이 빙글빙글 웃던 면접관 아저씨가 아빠를 지목했어. “전공이 사학(史學)이구먼?”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면접관 아저씨가 이런 질문을 불쑥 내밀어. “그래, 역사가 뭐야?” 옳다구나 득달같이 대답을 하려는데 면접관이 이렇게 오금을 박았어. “E. H 카의 정의 말고 다른 거.”
아빠는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는 항상 E. H. 카라는 영국 사학자의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라는 명제가 모범답안이었다. 그걸 틀어버리니 아빠의 머릿속이 온통 하얗게 되어버린 거지. 당연히 아빠는 면접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비록 아픈 추억이긴 하지만 아빠는 요즘도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명제를 종종 되뇔 때가 있어. 대화란 어느 한쪽의 윽박지름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야. 여러 쪽 말의 조각조각을 통해 서로의 진실에 접근하는 커뮤니케이션이지.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힌 일방적 말은 결국 대화를 그르치고, 상대방의 진의를 왜곡시키는 법이다. 특히 상대가 전하는 말을 자신의 논리로 여과해서 제 귀에 달가운 것만 골라 듣는 것은 결코 올바른 대화법이라고 할 수 없어. 특히 과거와 현재의 대화에서라면 더욱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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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자료 법륜 스님은 “상고사를 몰라서 우리가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배달나라라고 하는 6000년 전의 역사 기록을 갖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 ||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할 때 현재가 과거, 즉 역사에 대해 말을 거는 방식을 사관(史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거야. 사관에 대해 한 사학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어. “사관(史觀)은 ‘미리 만들어놓은 이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역사적 사실의 광범한 종합으로서 사관은, 귀납적인 결론을 얻어야 할 것이다. 귀납적인 사실 입증이 없다면 사관이란 단순히 미리 짜놓은 각본에 따라 증거물을 찾아 헤매는 결과에 불과하다.” 좀 풀어서 말하면, 역사를 자신의 생각에 맞춰 규정하고 그에 따라 역사를 꿰어 맞춰서는 안 된다는 뜻이야.
언젠가 일본에서 구석기 유물을 하도 많이 건져 올려 ‘신의 손’으로까지 불렸지만 그게 몽땅 조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망신을 당했던 일본 학자 후지무라 신이치 얘기를 해준 적 있지? 그의 엉터리 발굴이 진행되는 동안 몇몇 일본인은 환호했어. 그들에게 후지무라의 ‘발견’은 일본인의 역사가 수십만 년이나 된다는 증거였거든. 그들은 일본 ‘문명’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를 앞선다고 주장하며 의기양양하게 교과서에 싣기까지 했단다. 그들에게 일본의 역사는 그렇게 유구한 것이어야 했다. 일본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의 후예여야 했고…. 그 일본인들은 이렇게 말하며 역사의 목을 졸랐던 거지. “너 일본 역사는 그래야만 해. 너는 이런 존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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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 Photo ‘신의 손’으로 불리던 후지무라 신이치의 일본 구석기 유물 발굴은 모두 조작이었다. | ||
며칠 전 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났다. 세계 4대 문명 가운데 하나인 인더스 문명이 인도의 일부 주 역사 교과서에서 빠졌다는 거야. 그 대신 힌두교 여신의 이름을 딴 ‘사라스바티 문화’라는 것이 실렸다. 이런 주들의 공통점은 ‘꼴통’ 힌두교 정당이 정권을 잡은 지역이라는 것이다. 그 정당이 보기에 인더스 문명은 힌두교가 인도에서 자리를 잡기 전의 문명이었거든. 이를 인정하기 싫어서 전 세계 교과서에 거의 공통으로 실려 있는 인더스 문명을 교과서에서 빼버린 거지.
‘어떻게 이런 자들이 있지?’라고 혀를 끌끌 차겠지만, 사실 꼭 모자라는 사람들만 이런 일을 저지르는 것은 아니야. 모두가 존경할 만한 학식과 덕망을 갖췄거나, 아프고 혼란스러운 이들을 위무하는 지혜로운 사람들도 역사에 ‘무례’를 범하곤 한다. 며칠 전 아빠가 법륜 스님이라는 분의 강연록을 듣고 입을 딱 벌려야 했던 것처럼.
법륜 스님이 어떤 분인지는 새삼 설명하지 않겠어. 검색 한 번이면 그분의 어록과 설법이 모니터에 넘쳐날 테니까. 그런데 이분이 최근 옛 고구려 기행에 나서셨어. 우리 역사상 최강국이었고 오늘날 한국의 영어 국명 ‘Korea’의 원조(중원고구려비를 보면 고구려인들은 스스로를 ‘고려’라 부르고 있어)라 할 고구려의 옛 땅을 돌아보는 건 좋은 일이지. 그런데 법륜 스님이 말씀하신 ‘역사’ 중에는 역사가 아닌 게 너무 많았다.
법륜 스님은 “중국에는 어떤 역사 기록에도 6000년 된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배달나라라고 하는 6000년 전의 역사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유감스럽지만 사실이 아니다. 신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중국에는 6000년보다 더 오랜 시대 이야기가 남아 있다. 그러나 6000년 전 ‘배달나라’ 기록으로 주장되는 문서들은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거든. 뭐, 여기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법륜 스님은 과거 일본인이나 인도 힌두교 정당 같은 말씀으로 아빠를 아연실색하게 하셨어.
“(황하 문명보다 훨씬 앞선) 요하 문명은 우리 ‘민족’이 이주해서 살게 된 첫 본거지라고 짐작해볼 수 있으며… 이름을 붙인다면 ‘배달 문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은 세계에서 최고로 앞선 문명입니다.”
오늘날의 이집트인은 피라미드 쌓던 그 이집트인의 직계 후손이 아니다. 지금의 이탈리아 로마인들은 과거 로마제국 사람들과는 거의 다른 종족이야. 혈통이란 장구한 세월과 역사 속에 섞이고 흩어지고 분화되기 마련이니까. 그런데 우리 ‘민족’만은 거의 6000~7000년 동안 길이 보전돼왔다는 주장을 하시니 입이 벌어질밖에.
부여 귀족 집단 호칭을 고구려 호칭으로 착각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에서 고분벽화를 얘기하실 때는 완전히 사실과 다른 말씀을 태연하게 내놓으셨다. “(고구려에는) 5가 아시죠? 마가·구가·우가·저가·양가….” 알다시피 마가·구가·우가·저가는 부여에 있던 귀족 집단의 호칭이야.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착각하실 수도 있다 싶어서 그냥 빙긋 웃던 아빠는 신라가 불교 국가인 가야와 합치기 위해 불교를 공인했고, 가야는 신라와 ‘합의 통합’을 이루었다는 말씀에 이르러 그만 표정이 얼어붙고 말았어.
가야가 불교 국가라는 근거로 법륜 스님은 김수로왕의 왕비가 ‘아유타’에서 왔고 불교를 전래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드신다. 그러나 불교를 매개로 가야와 신라 양국이 통합했다는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기록은 아무것도 없어. 더욱이 가야는 네가 알다시피 통일된 한 나라가 아니라 ‘가야 연맹’이었다. 그중 하나인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 신라에게 항복한 것은 사실이지만 ‘통합’이라기보다는 ‘흡수’였다. 심지어 대가야의 경우, 전쟁을 치른 끝에 신라에 합쳐졌다.
아빠는 많은 사람들의 멘토로서 속 시원한 냉수처럼 그들의 속을 풀어주기도 하고 정다운 손길로 등을 두드려주시던 법륜 스님을 존경해. 그런데 자신의 영역이 아닌 분야에 굳이 들어오셔서 전혀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이야기들을 자신 있게 토로하시며 “이 상고사를 몰라서 우리가 열등감에 휩싸여 있다”라고 소리 높여 외치시는 모습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구나. 아빠는 굳이 우리 역사가 세계에서 가장 길지 않더라도, 요하 문명이 우리 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자긍심을 느낀단다. 왜 우리가 분명하지도 않은 역사에 자긍심을 느껴야 하고, 또 그러지 않으면 마치 ‘열등감에 휩싸인’ 이들로 매도돼야 할까. 아빠는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렇게 묻고 싶어진단다. “혹시 우리 역사는 당연히 이래야 한다고 과거에 윽박지르고 계신 건 아닌가요? 그러면서 과거와 ‘대화’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스무살,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는 하던 일에 실패해 도망치듯 내려간 지방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골 할머니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유통하는 회사를 꾸리며 한식집 ‘소녀방앗간’ 6개 지점을 운영하고 있다.
| [459호] 승인 2016.07.06 17:55:25 |
“주최 측에서 강의 제목을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아’라고 붙인 걸 보고 많이 놀랐다”라며 김가영 생생농업유통 대표는 웃었다. 자신은 조금 다르게 산 것이 아니라 ‘엄청’ 다르게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 시작은 작은 차이에서 비롯됐다. 약간의 차이가 한 사람의 진로와 그 주변 세상을 다채롭게 바꿔놓았다는 것이다. 6월14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진행된 여섯 번째 강좌 중 일부를 지상 중계한다.
오늘 아침 부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빈소에 다녀왔다. 나를 낳아준 친어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나를 늘 품어주시던 어머니 중 한 분이다.
스무 살부터 서른한 살까지 지난 10년간 농사짓고 밥 짓는 삶을 살아오면서 여러 부모를 만났다. 나보다 훨씬 연세 드신 그분들과 어울려 살다 보니 말투나 생각이 너무 많이 닮아버린 것 같다. 요즘엔 할머니들조차 저보고 “니 속에 할매 있다”고 하실 정도다(웃음). 그럼에도 오늘 이 자리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돌이켜보면 이렇게 다양한 부모님들이 저라는 이상한 개체를 품어주셨던 덕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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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조남진 김가영 대표는 ‘공부는 잘하고 잘사는데 날마다 저질 식품만 먹는 젊은이들’과 ‘좋은 것을 먹고 살지만 늘 가난한 어르신들’ 사이를 이어주고자 한다. | ||
나는 198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성장률이 두 자릿수였던 미친 시대에 태어난 마지막 세대인 셈이다. 어찌 보면 불행한 세대이기도 하다. 부귀영화를 입에 물고 태어났건만, 앞으로는 평생 내 손으로 그 부귀영화를 다시 일구지 못할 것임을 예감하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세대이기도 하니까. 그에 비하면 나보다 4~5년 뒤에 태어난 1990년대 초반 세대는 훨씬 소박하고 판단이 현실적인 것 같다.
요즘 20대에 비해 30대 창업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이런 영향인 듯하다. 이 친구들을 보면 사회를 구하겠다기보다는 부모 세대처럼 무너진 집안을 일으켜보겠다는 가족주의에 기반해 돈을 벌어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나는 이런 친구들을 ‘참 대단하다’고 칭송하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왜 돈을 벌려 하는지, 왜 기업을 하려 하는지 자꾸 묻는 사회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왜 이런 얘길 하는지 의아해하실 수도 있겠는데, 이는 조만간 이들 30~40대가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친구들이 여러분의 자녀 세대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미칠 것인 만큼 이들이 이끌어갈 사회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한다.
중학교 시절까지만 해도 나는 학교에서 소통을 잘 못하는 학생이었다. 여자애들이 ‘H.O.T냐 젝스키스냐’를 두고 사생결단 싸울 때 나는 <리니지>(1990년대 후반부터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온라인 게임)만 파고들었다. 나름 <리니지> 만렙(게임에서 지원하는 최대 레벨)을 찍은 중학생으로 온라인에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학교에서의 나는 자폐와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가 의심되는 학생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중3 때 선생님이 내게 선린인터넷고 진학을 권했다. 그 학교에 가면 원 없이 게임을 할 수 있을 거라면서. 선생님은 내가 걱정돼 고등학교에 다섯 번이나 다녀오셨다고도 했다. 결국 나는 선린인터넷고에 진학했다. 외고에 진학하기를 바랐던 엄마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추가모집 때 몰래 원서를 제출했다.
고교 때의 난 중학교 때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학생이었다. 다른 건 여중 때와 달리 남학생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환경의 차이 정도였다. 그런데 내 삶은 180° 달라졌다. 남자아이들과 PC방에 한번 다녀왔더니 아이들이 나를 반장으로 만장일치 추대했다. “반장은 당연히 우리 (<리니지>) 동맹의 맹주가 해야 하는 것 아냐?”라면서(웃음). 2~3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비로소 안심했다. ‘그간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였다. 난 달라진 게 없다. 그저 남학생과 여학생이 각각 많은 환경에서의 장점이 달랐던 것뿐이다. 다시 말해 판이 요구하는 능력이 달랐던 것이다. 그런 만큼 아이가 큰 문제가 없는데도 학교생활이나 교우 관계에서 의기소침하게 지낸다면 판을 한번 바꿔볼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대학은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선택했다. 프로그래밍 대회에서 여러 차례 입상도 했고, 고교 시절 창업한 경험도 있는 만큼 난 내가 이공계로 진학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경험이 내 인생을 바꿔놓았다. 당시 난 입시 과목에 들어가지 않던 사회를 학교에서 유일하게 듣던 학생이었다. 담당 선생님이 좋았던 데다 새로 접한 인문·사회과학 책들이 어린 마음을 끓어오르게 했다. 본래 연극을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 반대로 간호학과에 진학했다던 양호 선생님 또한 내게 영향을 주었다. 선생님은 양호는 뒷전이고 연극 재량활동 지도에 열을 올리시더니 끝내 연극으로 석사학위까지 받으셨다. 그때 깨달았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야 하는 거구나.’ 그 결과 외환위기(IMF) 때 망한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강박감을 버리고 사회학과를 선택한 것이다.
소비자보다 생산자와 더 친한 농산물 유통업자
그렇게 입학했건만 대학에서의 삶이 순탄치는 않았다. 1학년 첫 학기 받아든 학점이 1.35였다. 주변은 공부 잘하는 애들, 잘사는 애들, 예쁜 애들 천지인 것 같았다.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터졌다. 사회 분위기가 급격히 경색되면서 기업들도 경영학과나 경제학과 출신이 아니면 아예 안 뽑는다는 식으로 나왔다. 불안했다. 뭘 먹고 살아야 할지 정말 두려웠다.
마침 추진하던 일이 잘 안 되면서 도망치듯 대구로 내려갔다. 거기서 만난 사람 집에 얹혀 2개월을 살았다. 스무 살에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해본 셈이다.
돌이켜보면 그때 남들과 조금 다르게 살기 시작한 것이 삶의 방향이나 삶을 바라보는 크기 자체를 바꿔버린 듯하다. 일반적으로 놓인 길에서 각도를 1˚ 벌려 다른 길을 갔을 뿐인데 나중에는 두 길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생겨났달까. 사실 자녀가 틀어지는 걸 견딜 수 없어 하는 건 부모의 본능이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어렸을 적 1˚만 각도를 틀어주시면 스스로 품은 역량에 따라 자녀들이 언젠가 부모를 넘어설 수도 있음을 기억해주셨으면 한다.
대구에서 뭘 할까 두 달을 고민한 끝에 경북 청송, 전남 곡성 등을 전전하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할머니들이 빌려준 땅에 상추를 심었는데, 5~6월이면 이것들이 얼마나 미친 듯이 자라는지 대학에 복학을 하려 해도 할 수가 없었다. 상추가 끝나면 고추 등 다른 농사를 짓느라 도무지 짬이 안 났다. 그러다가 유통업에까지 뛰어든 것은 할머니들 때문이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농사지은 상추를 거의 다 내다팔았다. 조금 관찰해본 결과 어떻게 하면 팔릴지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걸 할머니들이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도대체 왜 그러세요?” 따졌더니 “얄미워서 그런다”라고 하셨다. 자기들이 농사지은 것도 함께 팔아달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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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방앗간 페이스북 김 대표가 운영하는 밥집 ‘소녀방앗간’의 메뉴는 생산자 공급 계획에 맞춰 1년 전에 미리 기획한다. | ||
그때부터 마을 이장님 차를 몰래 빌려 할머니들 농산물까지 팔고 다녔다. 취급하는 품목과 물량이 많아지면서 나중에는 상인들이 오히려 나한테 “더 팔 게 없냐?”라고 물어볼 지경이었다. 너무 바빠지면서 내 밭 건사는 그냥 동네 할머니들한테 맡겼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유통업자가 된 것이다. 아마 이마트 같은 대형 유통업체에선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다. 나는 소비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일반 유통업자와 달리 생산자와 나를 동일시하는 유통업자이기 때문이다.
장사 규모가 커지면서 나중에는 유통회사를 차리고, 폐교를 사들여 사무실로 개조해 썼다. 회사에서 번 돈으로 할머니 집 지붕도 고쳐드리고, 조손 가정도 돕는다. 이분들의 삶을 보면 참 기가 막힌다. 어린 나이에 시집와서 평생을 바람피우는 남편에 속 썩이는 아들 뒷바라지하다 궁극에는 손자까지 키우는 할머니들을 보면서 나는 ‘이분들이 마지막 가는 길만은 존중받고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내가 파는 농산물은 그냥 농산물이 아니다. 이분들의 60~70년 생애를 제값 받고 팔지 못하면 이분들의 역사 또한 제대로 대우받지 못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우리 농업 살리기 운동이 소비자 건강을 강조하는 쪽으로 치우치는 것도 유감이다. 진짜 건강하게 살려면 아예 도시에서 숨을 쉬지 말아야지(웃음). 우리 농산물을 이용하는 진짜 이유는 이분들의 삶을 예우하는 것이어야 한다. 지금껏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 사회를 지탱해온 이분들의 삶이 존중받을 수 있어야 한국 사회 또한 누구나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들은 말한다. “난 소학교도 못 갔어. 김 사장은 대학 졸업하는 것 보고 싶어”라고. 내가 10년째 휴학에 휴학을 거듭하면서 대학에 적을 걸어둔 이유도 이것이다. 잘나가는 사람은커녕 대학 졸업한 사람조차 주변에 거의 없는 이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다. 궁극적으로는 이로써 학벌이라는 게 이 사회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 또한 보여주고 싶다.
“나도 살았잖아, 그러니까 너네도 살아”
유통회사에 이어 지난해부터는 서울에 ‘소녀방앗간’이라는 밥집도 운영 중이다. 할머니들이 지금 모습 그대로 농사짓는 걸 지원하는 유통구조를 만들려면 한식집을 해야겠다는 판단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 집 메뉴는 1년 전에 미리 기획한다. 내년에 호박고지를 스무 번 반찬으로 내자 싶으면 그 전해 가을에 미리 필요한 양을 다 말려두는 식이다. 사실 소비자들은 호박고지보다 애호박을 더 선호한다. 그러나 애호박은 한창 바쁜 농번기에 농사를 지어야 한다. 반면 호박고지는 추수를 다 마친 뒤 한가할 때 제멋대로 자라 있는 호박을 썰어 말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우리는 호박고지를 더 많이 쓰게끔 식단을 짜는 것이다.
반찬도 세 가지밖에 없다. 김치를 빼면 2찬이 전부다. 생산자에게 헐값으로 100을 사오면 그중 70을 소비하고 30은 버리는 게 지금까지의 식당 구조였다. 그러나 소녀방앗간은 생산자에게 제값을 쳐줌으로써 70만 사오고 버리는 것이 없게끔 하는 방식을 지향하고자 한다. 그 덕분에 우리는 음식물 처리업체를 이용하지 않는 밥집으로도 유명하다. 처음엔 처리업체를 이용할까 했는데 그쪽에서 오히려 “이 집은 가정용 음식물 쓰레기봉투만 사용해도 충분할 것 같다”고 말하더라.
나는 소녀방앗간이 밥집이라기보다 소통 채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밥집에 오면 직원들이 “오늘 메뉴는 취나물과 다래순을 섞은 것인데, 다래순은 5월에 할머니들이 훑어 가져온 것이다”라는 식으로 그날의 식단을 일일이 설명한다. 손님들이 궁금해하는 게 있으면 이를 할머니들에게 물어 답변을 대신 전달한다.
이 과정에서 도시 사람들이 농산물이란 게 절로 자라 식탁에 놓인 게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으면 한다. 공부는 잘하고 잘사는데 날마다 거지 같은 것만 먹는 내 또래 친구들과, 좋은 것을 먹고 살기는 하는데 늘 가난한 어르신들, 이들 사이에 소통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다.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착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분들의 역량을 충분히 배워두려는 것뿐이다. 사실은 우리가 얻는 것이 훨씬 많다.
지난해 서울 성수동에 1호점을 연 소녀방앗간은 현재 이대 앞 6호점까지 늘어났다. 올여름에는 서귀포에 들어설 제주올레 여행자센터에 7호점을 낼 계획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가장 잘하는 건 돈 버는 일이라 할 수 있다(웃음). 자본주의가 가장 좋아하는 특기를 타고난 셈이다. 다만 누군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파산해야 하는 게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결국 나의 특기는 남을 죽이는 일인 셈이다. 슬픈 특기다.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일은 이것과 정반대다. 나는 예술적인 일, 창조적인 일처럼 ‘살리는 일’을 좋아한다. 프로그래밍을 하기 전에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은 농사로 돈 버는 일을 하니 특기와 취미가 따로 노는 삶을 살아온 셈이다. 그런 내가 이 땅에 발붙이고 숨 쉬며 살아온 게 어찌 보면 신기할 따름이다. 가끔 친구들에게 말한다. “나도 살았잖아. 그러니까 너네도 살아”라고. 그 어느 때보다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이 많은 친구들에게 오늘 얘기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정리·김은남 기자









